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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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5. 각종 역사 자료 종합

10) 연려실기술 내의 자료 (2003. 6. 17. 태서(익), 2003. 11. 14 윤만(문) 공동 제공)

(1)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진주(晉州)의 승전 김시민(金時敏)  

     

처음 적병이 진주로 향한다고 큰소리치니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이 지리산에 들어가 피란하였다. 김성일이 듣고 진주로 달려가니 경내가 텅 비어 있었다. 시민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경은 병이라고 칭하였다. 성일이 군령(軍令)으로 오게 했더니 경이 등창으로 죽었다. 성일이 시민을 시켜 군사를 정돈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다. 《순영록》

김시민은,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이요, 고려조의 원신(元臣)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선무공신(宣武公臣) 2등 제 3인에 기록되었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하고 시호는 충무공이다.

○ 진주는 영남의 큰 고을이다. 시민이 무인(武人)으로 막 통판(通判)이 되어 목사의 일을 대리로 보게 되니 무기를 수리하고 성을 수축해서 죽기로 지키려 하였다. 이때 적병이 횡행해서 감히 항거하는 곳이 없었는데 유독 진주만이 우뚝하게 호남 영남의 보장(保障)이 되었다. 조정에서 듣고 8월에 시민을 발탁해서 목사로 올렸다.

 

시민이 사졸(士卒)들과 고락을 같이 하며 성을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웠다. 사천(泗川)에 있던 적이 장차 진주를 범한다는 말을 듣고 조대곤(曺大坤)과 더불어 정병 천여 명을 영솔하고 싸우러 나가다가 십수교(十水橋)에서 적을 만나 수많이 쳐 죽이자 적이 밤에 달아났다. 《기재잡기》에는 "사천 현감 정득열과 연합해서 적을 쳤다." 하였다. 드디어 고성ㆍ창원 여러 성을 연달아 회복하고김면(金沔)과 연합하여 금산(金山)의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많았다. 시민이 칼에 맞아 발을 다치자 면이 눈물을 흘리었다. 9월에는 진해에 있는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꾀어서 사로잡아 행재소로 보냈더니 발탁하여 우병사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오기 전에 죽었다. 《부계기문》ㆍ《자해필담》ㆍ《일월록》ㆍ《기재잡기 합록》

 

10월 3일에 적이 세 길로 갈라 진주로 향했다. 일군(一軍)은 말재[馬峴]를 넘고 일군(一軍)은 미륵벼루[佛遷]를 지나 바로 진주를 치기로 하고 이튿날 선봉 천여 기병이 진주 동쪽 산봉우리에 왔다가 돌아갔다. 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전쟁에 패해서 단필 말을 타고 성에 들어와 같이 지키기를 원하니 시민이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에 들어오면 이것은 주장(主將)을 바꾸는 것이니 반드시 명령 계통이혼란할 것이다." 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와서 성문을 계엄하느라 창졸간에 염려가 있을까 하니 주장은 밖에서 후원하는 것이 좋소." 하였다. 숭인이 부득이 돌아 나오다가 적을 성 밖에서 만나 사천 현감 정득열과 가배량 권관 주대청(朱大淸) 등과 연합해서 싸우다가 패해서 죽었다. 이때 곽재우(郭再祐)는 시민이 숭인을 들이지 않았다는 소문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런 계책으로 족히 성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으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하였다. 《일월록》

 

적의 군사가 행진해서 성을 포위했기 때문에 시민의 군사 3천 7백여 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백여 명이 성중에 있어 분대(分隊)해서 지켰다. 《일월록》

 

당초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겁쟁이여서 먼저 달아나고 함안 군수 유숭인은 전공(戰功)을 세워 병사로 승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진주가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구원하러 갔다가 길에서 적을 만나 싸워 패해서 죽었다. 《기재잡기》

 

이때 적병이 함안에서 승전한 기세로 선봉 천여 명의 기병이 바로 진주 동편 말재의 북쪽 산봉우리에 올라 종횡으로 달리면서 위엄을 떨쳤다. 시민이 성중에 영을 내려 보아도 못 본 체하고 화살 하나도 허비 못하게 하였다. 단지 성안에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장막을 크게 벌인 후 성중 남녀노소를 모아 모두 남복을 입혔다. 적병 수만은 진주 동쪽 10리 임연대(臨淵臺)등에 집결하여 진치고 있었다.

 

6일 아침에 큰 적병이 여울[大灘]로부터 몰려오는데 혹은 긴 자루의 둥근 금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흰 바탕에 황금 무늬 잡색 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삽선[?]을 졌는데 바람에 펄럭이어 광채가 황홀하였으며, 혹은 닭털로 만든 관을 쓰고 혹은 산발한 모양의 탈박을 쓰고, 혹은 뿔 달린 금탈박을 쓰고 각각 잡색 깃발을 지고 혹은 푸른 일산ㆍ붉은 일산을 받들고 흰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리고 살기가 공중에뻗쳤다. 세 부대로 나오는데, 하나는 동문 밖 순천당(順天堂)에 진을 치고는 성중을 내려다보고, 하나는 개경원(開慶院)에서 동문을 지나 봉명루(鳳鳴樓) 개경원(開慶院)앞에 진을 치고, 하나는 향교 뒷산에서 바로 순천당ㆍ봉명루 진과 합해서 각 산봉마다 벌떼처럼 둔치고 개미같이 모여들었다. 적장 6명은 검은 옷을 입고 쌍견마(雙牽馬 양쪽 말몰이)에 창칼을 가진 자가 옹위하여 서고, 앞뒤에는 흰 납의(衲衣)를 입은 여인이 역시 쌍견마로 따른 왜졸을 많이 거느리고 왜장 앞에 섰다. 총수(銃手) 천여 명이 성중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탄환이 마치 우레 소리와 같고 3만여 명의 적이 일시에 고함쳐서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으나 성중에서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적막하고 반응이 없었다. 그 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기다려 포를 쏘고 북을 울리니 어느 사이에 적이 여염집으로 흩어져 혹은 문짝을 가지고 혹은 관(棺) 재목을 가지고 혹은 집 판자를 벗겨서 성밖 백 보쯤 되는 곳에 죽 늘어서 판자 안에 앞드려 총쏘기를 그치지 않았다. 남은 적은 민가에 들어가 짚과 대나무로 만든 집의 구성물을 뜯어내어 일시에 막사를 지어 6, 7리가 연해 뻗치었고 다 푸른 장막을 둘렀으며 적장은 혹은 향교에 들어가고 혹은 여염집에 들어갔다. 이날 짐 실은 마소가 동쪽에서 들어가는 것이 종일 끊이지 않았다. 초경에 적이 한 곳에서 날라리를 불면 곳곳에서 서로 호응하여 여러 왜적들이 크게 소리치다가 밥 먹을 무렵에 그쳤으나 탄환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으며 불을 아침까지 피웠다.

 

7일에는 적의 떼가 또 장편전(長片箭)으로 성중을 향해서 난사하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수십 리 이내의 여염집을 다 불태웠다. 김시민은 밤에 악공을 시켜 문루에서 피리[笛]를 불게 하여 한가한 모습을 보였다. 적중에 있는 어린애들이 혹은 서울말로 혹은 시골 사투리로 성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외치기를, "서울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는데 바구니만한 작은 성을 어찌 지키겠는가. 오늘 저녁에 개산(介山)아버지가 오면 너희 세 장수의 머리는 마땅히 깃대 위에 달릴 것이다." 하였다. 성중이 격분해서 꾸짖으려 하니까 김시민은 그들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밤 달이 지자 적이 대로 엮은 것을 가만히 동문 밖에 세우고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성내를 굽어보게 하여 포를 쏘고 화살을 피할 곳을 만들었다.

 

8일에 적이 대나무로 사다리 수천을 만들고 또 넓은 사다리를 만드는데 대나무로 총총하게 엮고 망성(網席)을 덮어 차례차례 벌여 놓고 여러 군사들이 바로 성으로 올라올 길을 만들었으며 또 높은 비계[架] 3층을 만들어 성을 내려다볼 계책을 세웠다. 시민이 현자총(玄字銃)을 세 번이나 쏘아 3층 비계의 왜적을 꿰뚫으니 적이 놀라서 물러났다. 시민이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진천뢰(震天雷)ㆍ질려포(?藜砲)ㆍ돌멩이등을 많이 비치하고 또 자루 긴 도끼와 낫을 준비하고 성안에는 가마솥을 많이 두고 물을 끓였다. 낮에는 진내(陣內)에 복병하여 서서 보지 못하게 하고 또 허수아비를 만들어 활을 당겨 시위를 채워 성 위에 출몰(出沒)하게 하고 군인들에게 엄명해서 헛살 한 개 못 쏘게 하였다. 밤 이경에 고성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와 진주 복병장 권유경(權惟敬)이 각각 십자 횃불을 들고 남강 밖 고개 위에 벌여 서서 날라리를 불매 성중에서 북을 울리고 날라리를 불어 응답하니 적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구원병은 오지 않고 적세는 날로 성해졌다. 시민이 밤낮으로 방어하면서 항상 한마음으로 같이 죽자는 것으로 모든 군사를 권면하고 몸소 물과 장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구해서 포탄이 빗발쳐도 서서 꼼짝 않았다. 시민이 스스로 울면서 효유하기를 성을 만일 보전 못하면 성중에 있는 천백 인은 다 칼끝의 귀신이 될 것이니 사지에 놓인 뒤에야 살 계책이 생긴다는 옛말을 명심하라하였다. 사졸이 죽기로써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래 싸워서 화살이 떨어졌다. 시민이 성벽에서 줄타고 넘어가서 감사에게 달려가서 알리려 하나 합당한 사람 얻기가 어려워서 이에 중상(重賞)을 걸고 영리(營吏)하경해(河景海)를 얻었다. 경해가 밤을 타 가만히 가서 긴 화살 백여 부(部)를 얻어 계속 쓰게 되었다.

 

10일 사경에 적이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바리가 나가서 거짓 돌아가는 모양을 보여 아군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그런 뒤에 불을 끄고 가만히 돌아와서 동문 새성[親城]을 육박하여 허수아비에 근접하여 사다리로 올라와 아군을 속이고 말 탄 왜적이 뒤따라 돌진해서 총알이 비오듯하였다. 시민은 동문 북장대에 있고 판관은 동문 옹성에 있다가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죽기로 싸웠다. 포를 쏘고 돌을던지고 불을 던지고 끓는 물을 퍼부으니 적이 마름쇠를 밟고 화살ㆍ돌멩이에 맞은 자가 수 없었고 쓰러진 시체가 삼[麻]가리 같았다. 바야흐로 성 동문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적이 어둠을 타고 가만히 와서 돌연히 옛 북문에 이르러 형세가 급박해져 왔다. 성첩을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전 만호(萬戶)최덕량(崔德良)과 군관 이눌(李訥)ㆍ윤사복(尹思復)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전하는데 노약자와ㆍ여자들도 역시 돌을 굴리고 불을 던지고 하여 성중에 기와ㆍ돌멩이ㆍ지붕 덮은 짚들이 거의 다 없어졌다. 동녘이 밝아지자 적세가 약간 약해졌다. 이때 시 민은 왼쪽 이마에 탄환을 맞아 일을 살피지 못하고 곤양 군수 이광악이 대리로 지켜 용맹을 떨치고 힘껏 싸워 왜장을 쏘아 죽였다. 진시와 사시의 중간쯤에 적이 물러갔다. 죽은 자는 셀 수 없었는데 적들이 끌어다가 불태워 버렸으므로 머리를 벤 것은 겨우 30여 개이며 적이 물러간 뒤에 불사른 뼈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왜장의 시체는 상자에 담아갔으며 우마와 포로로 잡았던 우리 남녀들은 버리고 도망갔다. 시민은 탄환을 맞고 장사들은 힘이 다하여 추격하지 못한 것을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왜장 우시등원(羽柴藤元)은 즉 수길의 종질로 병력이 가장 강성하던 자인데, 패전하고 창원으로 물러가 분한(憤恨)으로 죽었다.

 

이때 고성 의병장 최강(崔堈)ㆍ이달(李達) 등이 군사를 영솔하고 구원하러 왔다. 성중 장사들이 듣고 기뻐서 뛰었다. 곽재우도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고 정인홍은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ㆍ정방준(鄭邦俊) 등에게 사수(射手) 5백여 명을 인솔시켜 와서 구원했는데, 준민은 중도에서 적과 더불어 싸워 머리 수십 개를 베고 진주성에 진군하니 포위가 이미 풀려 있었다.

 

시민이 군사를 일으키던 당초에 미리 염초(焰硝) 150근을 굽고 왜제(倭制)를 모방해서 총 70여 자루를 만들어 상시로 연습시킨 까닭에 싸움에 임해서 화약이 떨어지지 않고 화약을 풀잎에 싸서 적에게 던지기까지 하였다.

 

순찰사 김성일은 첩보(捷報)를 보고 진주로 달려와서 적의 시체가 깔려있고 피비린내가 땅에 가득한 것을 복 시민의 누워 있는 곳에 들어가 위로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그리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아 많은 군사를 대신 영솔케 하였다.

 

이때 일군이 붕괴된 나머지 누구 한 사람 감히 성을 지키겠다는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시민만이 고립된 성을 지켜 안에는 정병이 없고 밖에는 계속되는 후원이 없었는데, 적은 병력을 다 끌고 와서 포위하니 구름 사다리와 땅속길로 구공(九攻)하는 술법(주D-001) 을 다하였다. 그럼에도 시민은 대응하기를 귀신같이 하여 단지 충의(忠義)로써 사졸을 격려하여 14주야를 싸워, 죽이고 상하게 한 것이 셀 수 없으며 호남을 보호하여 적으로 하여금 내지(內地)로 몰고 들어오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도 역시 날아오는 탄환에 맞아 상도 받기 전에 죽었다. 《일월록》

 

임진년 난리에는 우리나라에 단지 3대첩(三大捷)이 있었으니 진주를 지킨 것, 노량(露梁)의 싸움 이순신, 행주(幸州)의 승전이 그것이다. 갑오년 강화 때 왜적이 말하기를, "진주의 싸움에서 그들의 장관(將官) 죽은 자가 3백 명이며 군사 죽은 자가 3만 명이니, 반드시 그 보복을 한 뒤에야 강화를 논의할 수 있다." 하였다. 이 말이 공갈에서 나온 것이라 반드시 모두 그렇다 할 수는 없으나어찌 근거 없는 말이겠는가. 《부계기문》

 

시민은 탄환 맞은 뒤에도 그 몸은 돌보지 않고 때때로 머리를 들어 북쪽을 향해 눈물을 흘리다가 이달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진중에서는 적이 알까 해서 비밀에 붙여 발상(發喪)을 하지 않았고 그뒤에 곡성이 서로 들리기가 1년이 넘었고 사녀(士女)들이 소식을 하였다.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양에 이르러 우병사로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들었다.

 

성을 지킨 공은 이정암(李廷?)도 진실로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나 김시민과 같이 논하는 데는 역시 차등이 없을 수 없다. 정암의 대적한 것은 장정(長政)인데 병력이 1만도 차지 않고 정암의 영솔한 바는 수천이 넘는 의병이었고 모든 장수가 와서 모인 자도 역시 많아서 가히 더불어 겨를 만하였다. 이때를 당해서 본도의 모든 장수는 다 공을 능히 세우지 못했으나 오직 정암만이 이렇게 이겼고 또 진중에선비들이 많아 알리기 쉽고 행재(行在)에서 멀지 않아 소식이 잘 통한데다가 정암의 평소 성망(聲望)도 있어 역시 인심이 복종되었으므로 그 공이 크게 나타났다. 그러나 시민은 단지 맡은 군사만 거느렸고 구원병이 심히 적었으며 대적한 자는 행장(行長)으로 장정에게 비할 바 아니었다. 각 진에 있던 모든 적이 온통 합세해서 적병의 수가 네 고을 가득 찼으니 수십만으로 셈하지도 못하였다. 비하자면 산을 들어 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은데 시민이 마침내 성을 의지하여 굳게 지켜 능히 대적을 물리쳤으니, 그 형세의 쉽고 어려운 것은 정암과 크게 달랐고 본도에 사람이 흩어져 없고 행재소도 멀리 떨어져 소식이 미치지 못한데도 진주의 승전을 연안(延安) 일과 똑같이 논하니 역시 정론이 못 된다.

  [주 D-001] 구공(九攻)하는 술법 : 묵자(墨子)가 성을 지킬 때 기묘한 술책으로 공수반(公輸般)이 아홉 번 공격하는 것을 모두 잘 방어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2) ▣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진주(晉州)의 승전 김시민(金時敏) ▣

 

처음 적병이 진주로 향한다고 큰소리치니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이 지리산에 들어가 피란하였다. 김성일이 듣고 진주로 달려가니 경내가 텅 비어 있었다. 시민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경은 병이라고 칭하였다. 성일이 군령(軍令)으로 오게 했더니 경이 등창으로 죽었다. 성일이 시민을 시켜 군사를 정돈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다. 《순영록》

 

김시민은,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이요, 고려조의 원신(元臣)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선무공신(宣武公臣) 2등 제 3인에 기록되었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하고 시호는 충무공이다.

 

진주는 영남의 큰 고을이다. 시민이 무인(武人)으로 막 통판(通判)이 되어 목사의 일을 대리로 보게 되니 무기를 수리하고 성을 수축해서 죽기로 지키려 하였다. 이때 적병이 횡행해서 감히 항거하는 곳이 없었는데 유독 진주만이 우뚝하게 호남 영남의 보장(保障)이 되었다. 조정에서 듣고 8월에 시민을 발탁해서 목사로 올렸다.

 

시민이 사졸(士卒)들과 고락을 같이 하며 성을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웠다. 사천(泗川)에 있던 적이 장차 진주를 범한다는 말을 듣고 조대곤(曺大坤)과 더불어 정병 천여 명을 영솔하고 싸우러 나가다가 십수교(十水橋)에서 적을 만나 수많이 쳐 죽이자 적이 밤에 달아났다. 《기재잡기》에는 "사천 현감 정득열과 연합해서 적을 쳤다." 하였다. 드디어 고성ㆍ창원 여러 성을 연달아 회복하고김면(金沔)과 연합하여 금산(金山)의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많았다. 시민이 칼에 맞아 발을 다치자 면이 눈물을 흘리었다. 9월에는 진해에 있는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꾀어서 사로잡아 행재소로 보냈더니 발탁하여 우병사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오기 전에 죽었다.

 

《부계기문》ㆍ《자해필담》ㆍ《일월록》ㆍ《기재잡기 합록》

10월 3일에 적이 세 길로 갈라 진주로 향했다. 일군(一軍)은 말재[馬峴]를 넘고 일군(一軍)은 미륵벼루[佛遷]를 지나 바로 진주를 치기로 하고 이튿날 선봉 천여 기병이 진주 동쪽 산봉우리에 왔다가 돌아갔다. 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전쟁에 패해서 단필 말을 타고 성에 들어와 같이 지키기를 원하니 시민이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에 들어오면 이것은 주장(主將)을 바꾸는 것이니 반드시 명령 계통이혼란할 것이다." 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와서 성문을 계엄하느라 창졸간에 염려가 있을까 하니 주장은 밖에서 후원하는 것이 좋소." 하였다. 숭인이 부득이 돌아 나오다가 적을 성 밖에서 만나 사천 현감 정득열과 가배량 권관 주대청(朱大淸) 등과 연합해서 싸우다가 패해서 죽었다. 이때 곽재우(郭再祐)는 시민이 숭인을 들이지 않았다는 소문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런 계책으로 족히 성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으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하였다. 《일월록》

 

적의 군사가 행진해서 성을 포위했기 때문에 시민의 군사 3천 7백여 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백여 명이 성중에 있어 분대(分隊)해서 지켰다. 《일월록》

 

당초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겁쟁이여서 먼저 달아나고 함안 군수 유숭인은 전공(戰功)을 세워 병사로 승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진주가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구원하러 갔다가 길에서 적을 만나 싸워 패해서 죽었다. 《기재잡기》

 

이때 적병이 함안에서 승전한 기세로 선봉 천여 명의 기병이 바로 진주 동편 말재의 북쪽 산봉우리에 올라 종횡으로 달리면서 위엄을 떨쳤다. 시민이 성중에 영을 내려 보아도 못 본 체하고 화살 하나도 허비 못하게 하였다. 단지 성안에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장막을 크게 벌인 후 성중 남녀노소를 모아 모두 남복을 입혔다. 적병 수만은 진주 동쪽 10리 임연대(臨淵臺)등에 집결하여 진치고 있었다.

 

6일 아침에 큰 적병이 여울[大灘]로부터 몰려오는데 혹은 긴 자루의 둥근 금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흰 바탕에 황금 무늬 잡색 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삽선[翣]을 졌는데 바람에 펄럭이어 광채가 황홀하였으며, 혹은 닭털로 만든 관을 쓰고 혹은 산발한 모양의 탈박을 쓰고, 혹은 뿔 달린 금탈박을 쓰고 각각 잡색 깃발을 지고 혹은 푸른 일산ㆍ붉은 일산을 받들고 흰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리고 살기가 공중에뻗쳤다. 세 부대로 나오는데, 하나는 동문 밖 순천당(順天堂)에 진을 치고는 성중을 내려다보고, 하나는 개경원(開慶院)에서 동문을 지나 봉명루(鳳鳴樓) 개경원(開慶院)앞에진을 치고, 하나는 향교 뒷산에서 바로 순천당ㆍ봉명루 진과 합해서 각 산봉마다 벌떼처럼 둔치고 개미같이 모여들었다. 적장 6명은 검은 옷을 입고 쌍견마(雙牽馬 양쪽 말몰이)에 창칼을 가진 자가 옹위하여 서고, 앞뒤에는 흰 납의(衲衣)를 입은 여인이 역시 쌍견마로 따른 왜졸을 많이 거느리고 왜장 앞에 섰다. 총수(銃手) 천여 명이 성중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탄환이 마치 우레 소리와 같고 3만여 명의 적이 일시에 고함쳐서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으나 성중에서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적막하고 반응이 없었다. 그 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기다려 포를 쏘고 북을 울리니 어느 사이에 적이 여염집으로 흩어져 혹은 문짝을 가지고 혹은 관(棺) 재목을 가지고 혹은 집 판자를 벗겨서 성밖 백 보쯤 되는 곳에 죽 늘어서 판자 안에 앞드려 총쏘기를 그치지 않았다. 남은 적은 민가에 들어가 짚과 대나무로 만든 집의 구성물을 뜯어내어 일시에 막사를 지어 6, 7리가 연해 뻗치었고 다 푸른 장막을 둘렀으며 적장은 혹은 향교에 들어가고 혹은 여염집에 들어갔다. 이날 짐 실은 마소가 동쪽에서 들어가는 것이 종일 끊이지 않았다. 초경에 적이 한 곳에서 날라리를 불면 곳곳에서 서로 호응하여 여러 왜적들이 크게 소리치다가 밥 먹을 무렵에 그쳤으나 탄환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으며 불을 아침까지 피웠다.

 

7일에는 적의 떼가 또 장편전(長片箭)으로 성중을 향해서 난사하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수십 리 이내의 여염집을 다 불태웠다. 김시민은 밤에 악공을 시켜 문루에서 피리[笛]를 불게 하여 한가한 모습을 보였다. 적중에 있는 어린애들이 혹은 서울말로 혹은 시골 사투리로 성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외치기를, "서울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는데 바구니만한 작은 성을 어찌 지키겠는가. 오늘 저녁에 개산(介山)아버지가 오면 너희 세 장수의 머리는 마땅히 깃대 위에 달릴 것이다." 하였다. 성중이 격분해서 꾸짖으려 하니까 김시민은 그들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밤 달이 지자 적이 대로 엮은 것을 가만히 동문 밖에 세우고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성내를 굽어보게 하여 포를 쏘고 화살을 피할 곳을 만들었다.

 

8일에 적이 대나무로 사다리 수천을 만들고 또 넓은 사다리를 만드는데 대나무로 총총하게 엮고 망성(網席)을 덮어 차례차례 벌여 놓고 여러 군사들이 바로 성으로 올라올 길을 만들었으며 또 높은 비계[架] 3층을 만들어 성을 내려다볼 계책을 세웠다. 시민이 현자총(玄字銃)을 세 번이나 쏘아 3층 비계의 왜적을 꿰뚫으니 적이 놀라서 물러났다. 시민이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진천뢰(震天雷)ㆍ질려포(蒺藜砲)ㆍ돌멩이등을 많이 비치하고 또 자루 긴 도끼와 낫을 준비하고 성안에는 가마솥을 많이 두고 물을 끓였다. 낮에는 진내(陣內)에 복병하여 서서 보지 못하게 하고 또 허수아비를 만들어 활을 당겨 시위를 채워 성 위에 출몰(出沒)하게 하고 군인들에게 엄명해서 헛살 한 개 못 쏘게 하였다. 밤 이경에 고성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와 진주 복병장 권유경(權惟敬)이 각각 십자 횃불을 들고 남강 밖 고개 위에 벌여 서서 날라리를 불매 성중에서 북을 울리고 날라리를 불어 응답하니 적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구원병은 오지 않고 적세는 날로 성해졌다. 시민이 밤낮으로 방어하면서 항상 한마음으로 같이 죽자는 것으로 모든 군사를 권면하고 몸소 물과 장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구해서 포탄이 빗발쳐도 서서 꼼짝 않았다. 시민이 스스로 울면서 효유하기를 성을 만일 보전 못하면 성중에 있는 천백 인은 다 칼끝의 귀신이 될 것이니 사지에 놓인 뒤에야 살 계책이 생긴다는 옛말을 명심하라하였다. 사졸이 죽기로써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래 싸워서 화살이 떨어졌다. 시민이 성벽에서 줄타고 넘어가서 감사에게 달려가서 알리려 하나 합당한 사람 얻기가 어려워서 이에 중상(重賞)을 걸고 영리(營吏)하경해(河景海)를 얻었다. 경해가 밤을 타 가만히 가서 긴 화살 백여 부(部)를 얻어 계속 쓰게 되었다.

 

10일 사경에 적이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바리가 나가서 거짓 돌아가는 모양을 보여 아군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그런 뒤에 불을 끄고 가만히 돌아와서 동문 새성[親城]을 육박하여 허수아비에 근접하여 사다리로 올라와 아군을 속이고 말 탄 왜적이 뒤따라 돌진해서 총알이 비오듯하였다. 시민은 동문 북장대에 있고 판관은 동문 옹성에 있다가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죽기로 싸웠다. 포를 쏘고 돌을던지고 불을 던지고 끓는 물을 퍼부으니 적이 마름쇠를 밟고 화살ㆍ돌멩이에 맞은 자가 수 없었고 쓰러진 시체가 삼[麻]가리 같았다. 바야흐로 성 동문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적이 어둠을 타고 가만히 와서 돌연히 옛 북문에 이르러 형세가 급박해져 왔다. 성첩을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전 만호(萬戶)최덕량(崔德良)과 군관 이눌(李訥)ㆍ윤사복(尹思復)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전하는데 노약자와ㆍ여자들도 역시 돌을 굴리고 불을 던지고 하여 성중에 기와ㆍ돌멩이ㆍ지붕 덮은 짚들이 거의 다 없어졌다. 동녘이 밝아지자 적세가 약간 약해졌다. 이때 시 민은 왼쪽 이마에 탄환을 맞아 일을 살피지 못하고 곤양 군수 이광악이 대리로 지켜 용맹을 떨치고 힘껏 싸워 왜장을 쏘아 죽였다. 진시와 사시의 중간쯤에 적이 물러갔다. 죽은 자는 셀 수 없었는데 적들이 끌어다가 불태워 버렸으므로 머리를 벤 것은 겨우 30여 개이며 적이 물러간 뒤에 불사른 뼈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왜장의 시체는 상자에 담아갔으며 우마와 포로로 잡았던 우리 남녀들은 버리고 도망갔다. 시민은 탄환을 맞고 장사들은 힘이 다하여 추격하지 못한 것을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왜장 우시등원(羽柴藤元)은 즉 수길의 종질로 병력이 가장 강성하던 자인데, 패전하고 창원으로 물러가 분한(憤恨)으로 죽었다.

 

이때 고성 의병장 최강(崔堈)ㆍ이달(李達) 등이 군사를 영솔하고 구원하러 왔다. 성중 장사들이 듣고 기뻐서 뛰었다. 곽재우도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고 정인홍은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ㆍ정방준(鄭邦俊) 등에게 사수(射手) 5백여 명을 인솔시켜 와서 구원했는데, 준민은 중도에서 적과 더불어 싸워 머리 수십 개를 베고 진주성에 진군하니 포위가 이미 풀려 있었다.

 

시민이 군사를 일으키던 당초에 미리 염초(焰硝) 150근을 굽고 왜제(倭制)를 모방해서 총 70여 자루를 만들어 상시로 연습시킨 까닭에 싸움에 임해서 화약이 떨어지지 않고 화약을 풀잎에 싸서 적에게 던지기까지 하였다.

 

순찰사 김성일은 첩보(捷報)를 보고 진주로 달려와서 적의 시체가 깔려있고 피비린내가 땅에 가득한 것을 복 시민의 누워 있는 곳에 들어가 위로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그리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아 많은 군사를 대신 영솔케 하였다.

 

이때 일군이 붕괴된 나머지 누구 한 사람 감히 성을 지키겠다는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시민만이 고립된 성을 지켜 안에는 정병이 없고 밖에는 계속되는 후원이 없었는데, 적은 병력을 다 끌고 와서 포위하니 구름 사다리와 땅속길로 구공(九攻)하는 술법주D-001 을 다하였다. 그럼에도 시민은 대응하기를 귀신같이 하여 단지 충의(忠義)로써 사졸을 격려하여 14주야를 싸워, 죽이고 상하게 한 것이 셀 수 없으며 호남을 보호하여 적으로 하여금 내지(內地)로 몰고 들어오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도 역시 날아오는 탄환에 맞아 상도 받기 전에 죽었다. 《일월록》

 

임진년 난리에는 우리나라에 단지 3대첩(三大捷)이 있었으니 진주를 지킨 것, 노량(露梁)의 싸움 이순신, 행주(幸州)의 승전이 그것이다. 갑오년 강화 때 왜적이 말하기를, "진주의 싸움에서 그들의 장관(將官) 죽은 자가 3백 명이며 군사 죽은 자가 3만 명이니, 반드시 그 보복을 한 뒤에야 강화를 논의할 수 있다." 하였다. 이 말이 공갈에서 나온 것이라 반드시 모두 그렇다 할 수는 없으나어찌 근거 없는 말이겠는가. 《부계기문》

 

시민은 탄환 맞은 뒤에도 그 몸은 돌보지 않고 때때로 머리를 들어 북쪽을 향해 눈물을 흘리다가 이달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진중에서는 적이 알까 해서 비밀에 붙여 발상(發喪)을 하지 않았고 그뒤에 곡성이 서로 들리기가 1년이 넘었고 사녀(士女)들이 소식을 하였다.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양에 이르러 우병사로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들었다.

 

성을 지킨 공은 이정암(李廷馣)도 진실로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나 김시민과 같이 논하는 데는 역시 차등이 없을 수 없다. 정암의 대적한 것은 장정(長政)인데 병력이 1만도 차지 않고 정암의 영솔한 바는 수천이 넘는 의병이었고 모든 장수가 와서 모인 자도 역시 많아서 가히 더불어 겨를 만하였다. 이때를 당해서 본도의 모든 장수는 다 공을 능히 세우지 못했으나 오직 정암만이 이렇게 이겼고 또 진중에선비들이 많아 알리기 쉽고 행재(行在)에서 멀지 않아 소식이 잘 통한데다가 정암의 평소 성망(聲望)도 있어 역시 인심이 복종되었으므로 그 공이 크게 나타났다. 그러나 시민은 단지 맡은 군사만 거느렸고 구원병이 심히 적었으며 대적한 자는 행장(行長)으로 장정에게 비할 바 아니었다. 각 진에 있던 모든 적이 온통 합세해서 적병의 수가 네 고을 가득 찼으니 수십만으로 셈하지도 못하였다. 비하자면 산을 들어 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은데 시민이 마침내 성을 의지하여 굳게 지켜 능히 대적을 물리쳤으니, 그 형세의 쉽고 어려운 것은 정암과 크게 달랐고 본도에 사람이 흩어져 없고 행재소도 멀리 떨어져 소식이 미치지 못한데도 진주의 승전을 연안(延安) 일과 똑같이 논하니 역시 정론이 못 된다.

[주 D-001] 구공(九攻)하는 술법 : 묵자(墨子)가 성을 지킬 때 기묘한 술책으로 공수반(公輸般)이 아홉 번 공격하는 것을 모두 잘 방어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3) ▣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호성(扈聖)ㆍ선무(宣武)ㆍ청란(淸亂)의 공을 기록하다. ▣

 

갑진년 6월에 빈청(賓廳)에서 원훈(元勳)과 대신이 아뢰기를, “신축년에 공을 감정(勘定)할 때 호종공신과 정왜공신의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임인년 가을에 비로소 합쳐서 녹훈하자는 의논이 있어서 곧 이 뜻을 전하께 아뢰어 고쳐 정하였습니다. 이제 언관(言官)이 또 나누어 기록하기를 청하고, 그 중에서 빼어버릴 사람 27명과 추후에 기록된 정운(鄭運) 등도 마땅히 아울러 빼버려야 된다고 청하니,그렇다면 왜적을 정벌한 무장으로서 남아있는 자는 다만 이순신ㆍ권율ㆍ원균ㆍ고언백 네 사람뿐입니다. 권응수는 영천에서 수복한 공이 있고, 이억기의 수군과 조경(趙儆)은 행주(幸州)에서 승첩한 공이 있으며, 김시민(金時敏)과 이광악은 진주에서, 이정암(李廷馣)은 연안(延安)에서 모두 성을 보전시킨 공이 있는데도 모두들 빼버린다면 후일에 무장들의 마음이 풀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진년 난리 초기에 신점(申點)이 북경 옥하관(玉河館)에 있다가 왜변을 듣고 통곡하면서 군사를 청하였습니다. 그뒤에 중국에서 대군이 나오게 된 것은 모두 신점의 힘이었는데도 홀로 공신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이 두어 사람은 마땅히 그대로 아울러 두어야 될 것입니다. 또 두 가지 공신이 처음에는 그 수효가 매우 많았던 까닭에 4등급으로 정하였으나, 이제 이 칭호를 나누기로 하였으니 3등급으로 감정하고, 중국에서 군량을 얻어온 사신도 정왜공(征倭功)에 옮겨 기록하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호종을 호성(扈聖), 정왜를 선무(宣武)라고 고쳐 불렀다.

 

갑진년에 호종한 공을 감정할 때에, 처음에는 익운(翊運)공신이라고 하였는데 유영경(柳永慶)이 의논을 주장하여 호성(扈聖)이라고 고쳤다. 그때 윤승훈(尹承勳)이 영상으로서 백관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존호를 올리기를 정청(庭請)할 때에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공들이 몸을 아껴서 먼저 물러나고 나에게 이 일을 담당하게 하니 공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소.” 하더니 영경의 같은 당인 장령 이덕온(李德溫)이승훈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영경이 대신 영상이 되었다. 《하담록》ㆍ《소대기문》

 

(4)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진주(晉州)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이하는 동무(東廡) 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거제(巨濟) 사람 ㆍ강희열(姜希烈)의병장이다. ㆍ조경형(曺慶亨)진해(鎭海) 사람 ㆍ최기필(崔琦弼)판관을 지냈다. ㆍ 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의병장이다. ㆍ장윤현(張胤賢)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ㆍ박승남(朴承男)판관을지냈다. 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이하는 서무(西廡) ㆍ이잠(李潛)의병장이다. ㆍ이종인(李宗仁)김해사람 ㆍ성영달(成穎達)우후(虞侯)이다. ㆍ장윤(張潤)사천(泗川) 사람 ㆍ윤사복(尹思復)첨정(僉正)을 지냈다. 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 ㆍ정유경(鄭維敬)주부(主簿)를 지냈다. ㆍ김태백(金太白)수문장을 지냈다. 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5) ▣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선조조의 상신(相臣)  ▣

 

[정언신(鄭彦信)]

정언신은, 자는 입부(立夫)이며, 호는 나암(懶菴)이요,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예조 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정해년(1527)에 나서, 병인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부제학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를 거쳐 기축년에 정승이 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관련되어 남해(南海)로 귀양갔다가 신묘년(1591)에 죽었다. 나이가 65세였다. 기해년(1599)에 복관(復官)되었다. 《기축록》에 상세히 나와 있다.

 

특별히 북병사(北兵使)에 임명하니, 귀순한 번호(藩胡)들이 공의 은혜와 신의를 사모하여, 아들을 낳으면 매양 공의 성명을 따서 이름을 짓기를 가부(賈父)주D-013같이 하였다. 용주(龍洲)가 지은 《신도비(神道碑)》

 

계미년(1583)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에 함경도 순찰사에 발탁하고 임금이 운검(雲劒)을 하사하였다. 공이 인재를 알아보는 데 능하여 막하에 있던 사인 이순신(李舜臣)ㆍ신립(申砬)ㆍ김시민(金時敏)ㆍ이억기(李億祺)가 모두 명장이었다. 변방의 일을 마치니 관찰사로 다시 임명하여 북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용주가 지은 〈신도비〉

 

31) 재조번방지 3(再造藩邦志 三) 내 기록 내용 (2003. 8. 28. 태서(익) 제공)

적이 성안에다 불을 던지는 바람에 연소된 가옥들이 매우 많고 화염이 충천하니, 성안의 사기가 꺾이고 예원은 겁에 질려 당황하여 호령이 전도되고, 더구나 김천일과 더불어 서로 용납되지 못하여 주객이 불화하였다. 어떤 늙은 기생이 조용히 막하사(幕下士)에게 말하기를,

“전날 김 목사(김시민(金時敏)께서 이 성을 지킬 때에는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동심 협력했기 때문에 시종 시켜왔지만 지금 사세를 살피건대, 전날과는 아주 딴판이니, 우리들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

하니, 김천일이 듣고 중인의 마음을 미혹시키는 요망한 말이라 하여 그 기생을 목베었다. 군중에서 급히 장윤(張潤)을 대신 가수(假守)로 삼아 예원의 직무를 맡게 하자, 온 군중이 약간 안정되었다

                       재조번방지 3(再造藩邦志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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