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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 자료 소개
4) 출생지 및 성장지, 전설 소개 (2003. 7. 25. 항용(제) 제공) (1)장소 :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469-1 (2)면적 : 1583평방m (3)소유자 : 김선응 외 1인(안동김씨 제학공파 문중 공동재산)
<답사기> (2003. 7. 25. 항용(제) 제공)
오늘 천안의 김시민장군 사당건립추진위원회 허용기 회장의 요청으로 허회장과 김남응(제학공파종회 부회장님) 동 위원회 부회장님과 함께 공주대학교를 다녀왔습니다. 아침 7시에 집을 출발하여 고속버스를 타고 천안으로 갔고 다시 직행버스로 병천에 도착하였습니다. 남응대부님께서 마중을 나오시고 이어 병천 복지회관에서 기다리고 계신 창규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잘 다듬어진 남응 대부님 댁으로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문영공 종중 연혁> 책자 발간 문제, 2.<김시민 장군 병천 백전 생가지 및 생장지 입증 문헌과 충남 지방문화재 등록>과 관련한 문제. 3. <안사연의 문영공 종중 지원 육성 대책> 4,어제 윤식 종친(문)님의 제보로 코베이에서 경매로 얻은 제학공파 교관공세계(鍾默 著)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병천에서 콩국수로 점심을 하고 백전으로 향했습니다. 그 도중에 새로 건축한 도정사 앞의 다리를 보았습니다. 작년 제학공 시제에 갔을 때 하천 위로 낮게 놓여진 다리가 위험스럽게 휘어져 있어 매우 걱정을 했었던 다리입니다. 천안시에서 15억의 예산으로 앞으로 세워질 김시민장군 사당및 기념관을 예상하여 건립한 것이랍니다. 병천의 제학공파 창규, 남응 종친 여러분의 저극적인 교섭활동의 결과라고 합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이어 김시민 장군 생가로 갔습니다. 정확하게는 장군의 어머님인 창평이씨 할머님의 친정 아버님(李成春)이 사셨던 집입니다. 마을 중앙, 김시민 장군의 용맹적 전설을 담고 있는 사사처(射蛇處) 뒤 약 100m 안 쪽에 있는 양지 바른 정남향의 집입니다.
천안의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금년 초에 지방문화재 등록을 위한 서류를 충남 도청에 제출했고 약 1개월 전에는 충남 도문화재위원들이 현지를 답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화재로 인정할 만한 실물적 증거와 문헌적 자료 불충분으로 등록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오는 7. 31일이 그 결정일이라고 합니다. 이날 <불가> 판정이 나면 다시는 등록 요청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태가 벌어 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류>로 판결나면 12월까지 자료를 보충하여 재제출해야 하는데 <보류>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생가지는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460-1번지에 있는 약 100여 평의 대지와 50여 평의 가옥입니다. 다행히 몇 해 전 제학공파 백전문중에서 해당 토지를 매입했다고 합니다. 다행입니다. 약 100여 년전에 지어진 집 같습니다. 창평이씨 할머니가 사신 때인 1550년대에 지어진 집은 무너지고 다시 지은 집이랍니다. 창규아저씨를 댁에 모셔 드리고 바로 그 집 앞 밭이 김충갑, 김시민, 김득신의 위패를 모셨던 충렬사(고종 때 훼철)가 있던 자리라고 하여 열심히 살폈습니다. 이 토지 역시 백전 종중에서 문중토지로 몇 해 전에 매입했다고 합니다. 문중 여러분의 노고와 정성에 감복했습니다. 사사처를 거쳐 천안으로 나와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 사무실로 갔습니다. 이 때 정의공파 회장님(김수진)으로부터 홈페이지 관련 자료를 만들어 이메일로 보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허용기회장님과 함께 몇가지 김시민 장군 지방문화재 등록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경과 말씀을 듣고 공주로 향했습니다. 1시간을 달려 공주대 인문학부 사학과 교수인 이해준교수를 만났습니다. 조선 후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신 분이며 오랫동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근무하시고 우리 안사연 여러분이 즐겨 활용하고 계신 역사종합사이트를 개발하신 분이기도 하며 충남 연기군의 도첨의공 휘 흔 할아버지의 연기대첩비 건립 시 관련 자료 준비와 학술 발표 및 관련 서적인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손들을 저작하기도 했던 분이십니다.
지방문화재로 등록 허가를 받기 위한 몇가지 자료 발굴문제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김시민 장군의 아드님인 남봉공(휘 치)의 남봉문집과 손자인 백곡공(휘 득신)의 백곡문집 속에 들어 있는 백전과 김시민관련 글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외 김시민 관련 구비설화의 채록, 백전의 충열사와 관련한 문서, 충무공과 백전과의 관계를 밝히는 문서나 문헌 등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6시에 4명이 함께 대학 인근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3명은 다시 천안으로 돌아와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한 다음 고속버스편으로 서울의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되었습니다.
여러 종친 여러분의 힘을 기다립니다. 김시민 장군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백전마을과 관련한 자료이면 어느 것도 좋습니다. 구비전설이든 충렬사 자료이든, 이와 관련한 문서이든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좀 급한 상황입니다.
출생 및 성장과정 소개 (2002. 4. 23. 태서(익) 제공) 출전 : 충무공 김시민장군 사당건립추진위원회 홈페이지 소개
김시민장군은 1554년(이조 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장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구안동김씨)이며 자는 면오(勉吾)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 현재 백전부락 어구에는 700∼800여년된 느티나무와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것은 충무공이 어렸을 때 활로 뱀을 쏘아 맞춘 사사처(射蛇處)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 충무공 김시민장군 사당건립추진위원회--330-090 충남 천안시 쌍용동 광명 APT 상가 402호 . Tel : (041)577-5757 Fax : 576-6622 * 출생지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일대 지명 소개 (2002. 4. 5. 태서(익) 제공)
가 전 리 :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 때 갈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백전리, 하백전리, 용연리, 가암리, 서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암리의 가자와 백전리의 전자를 따서 가전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므로 병천면 가전리가 되었다. 거북바위 : 구암(龜岩), 잣밭 앞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둘이 겹쳐서 거북이 모양으로 서 있고,그 옆에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바이 동쪽에 김씨세거(金氏世居), 북쪽에 백전동 천(栢田洞天)이라 새겼다. 명종때 명신 김충갑(金忠甲)이 그의 장인 이성춘(李成春)의 재산을 이어 받아 이 마을에 살면서 그 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느티나무 : 거북바위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골 문달안 : 문달안 옆 골에 있는 골짜기. (전설) : 큰 느티나무 아래에 전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이무기가 살면서 이근처의 짐승들을 많이 해치므로 김충갑의 아들 충무공 김시민이 아홉 살 때 동네 아이들을 시켜 느티나무에 오르게 하고, 이무기가 아이들의 그림자를보고 물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아이들을 향하여 올라 오는 것을 활로 쏘아 서른 세발을 맞추어 죽였는데 그 피가 십여일이나 붉게 흘러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인 김재홍씨가 사사처란 비를 세워 놓았다. 강당산 : 돌모루 앞에 있는 산. 그 밑에 도정강사(挑汀講舍)가 있었다. 개등어리 : 장승백이 북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개 등어리와 같이 생겼다고 한다. 가락부리 : 가암(佳岩)이라고도 하는데 돌모루 동쪽에 있는 마을. 마을 모양이 가락부리와 같다고도 하며 마을 앞에 좋은 바위가 있었는데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강당골 : 창평 이씨 묘와 제학공의 제단이 있는데 창평이씨는 충무공 김시민의 외조부이다. 이 자리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며 명나라 명사 두사총(杜師聰)이 소점인데 말이 물을 마시는 형이라 하며 은(銀) 세말을 폐백으로 주었다고 전하여 온다. 팟자들 : 널버텅이라고도 하며 갈마음수형 밑에 있는데, 넓고 말 외양간의 널과 같다고 한다. 돌모루 : 하백전(下栢田) 모퉁이에 돌산이 있어 돌모루라 하며 잣밭 아래쪽이 된다. 독바위 : 얹힌 바위. 영암(靈岩). 새말 서쪽 모퉁이 냇가에 있는 바위. 독 같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얹힌 자리에서 밑바위까지 실구멍이 통한다고 한다. 돌산 : 석산(石山). 돌모루 옆에 있는 산. 산 밑에서 봉우리까지 돌이 험하게 박혀 있다고 한다. 투구봉 : 잣밭 앞에 있는 산. 산 모양이 투구와 같다. 조골 : 장승백이 북쪽에 있는 마을. 철의 일을 했다. 충열사터(忠烈祠터) : 가전리 249번지 돌모루에 있는 충열사터. 정랑 조명, 충무공 김시민, 죽계 김계종을 배향했는데 고종 5년 1864년 폐지되었다. 진등 : 잣밭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등이 길다. 새말 : 용연(龍淵), 잣밭 서쪽에 새로 된 마을 앞에 용못이 있었다. 갓소못이 라고도 한다. 잣밭 : 백전(栢田), 상백전이라고도 하는데 세성산이 농성이었을 당시 그 성에 따른 성밭(城田)에서 연유되어 재밭이 되었다. 장승백이 : 세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상장골 : 삼성동(三省洞) 잣밭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인조때 학자 황종해(黃宗海)가 그 아버지 묘를 쓰고 날마다 세 번씩 성묘하였다고 한다. 부엉바위 : 투구봉 동쪽 기슭에 있는 바위. 모양이 부엉이 같이 생겼다 한다. 말무덤 : 상장골 위에 있는 옛 무덤. 지금은 없어졌음. 사근다리 : 잣밭 동쪽에 있는 골. 산등이 길다. 배락골 : 잣밭 뒤에 있는 골짜기. 명태골 : 명태 한 코 하고 논 일곱마지기와 바꾸었으므로 명태골이라고 한다. 만지원고개 : 새말에서 북면 만지원으로 넘어가는 고개. 말탄돌 : 국도 변에 돌을 깍아 세워 놓았는데 이 돌에 올라서 말을 탔으므로 말탄 돌이라고 한다. 현재는 없어졌다. 최쟁이골 : 공인(工人)들이 살던 곳. 공인을 쟁이라고 불렀기때문에 쟁이 골이라 한다.
<전설 이야기> (2002. 5. 29. 영환(문) 제공)
옛날 시골 냇가 큰 바위 밑에 용만한 큰 구렁이가 살고 있으면서 사람이나 가축이 지나가면 슬그머니 잡아 먹으니 동네 사람들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워낙 크고 힘이 세어 사람의 힘으론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그 근처엔 얼씬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 구렁이가 어서 늙어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아홉살 난 소년이 용감히 나섰다. 바로 이 동네 꼬마대장이다. 소년은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손에 들고는 같은 또래의 부하들을 불러모았다. "저 바위 위에 올라가 뱀을 꾀어 내어라. 그러면 내가 처치할 것이다." 그러나 올라가려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걸 보자 다시 소년은 호통을 쳤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 알겠느냐?" 그제서야 소년의 위압에 눌린 아이들은 마지못해 바위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이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더니 큰 구렁이가 기어나왔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우성을 쳤다. "에잇, 괘씸한 것." 소년은 이를 보자 이를 악물고는 활 시위를 당겨 가까이 다가가서는 힘껏 쏘았다. '퍽' 아주 순간적이었다. 화살이 놈의 머리에 정통으로 꽂힌 것이다. 그러자 솟구치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더니 콸콸콸콸 도랑물처럼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0여 일 이로 인해 강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장소에 射蛇處라는 비석이 있슴)
이 용감하고 지혜로운 소년이 훗날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죽음으로 지킨 그 유명한 김시민 장군이다.김시민은 1554년 8월 27일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에서 출생했으나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농촌리에 있는 그의 사당인 충민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다. 그가 태어날 때 어찌나 울음소리가 우렁차고 몸집이 컸던지 장군이 나왔다는 소문이 다른 마을까지 퍼져 나갔다고 한다. 소문대로 그는 자라면서 산과 들을 누비며 칼쓰기, 활쏘기를 즐겨하면서 동네아이들의 대장이 되어 병정놀이를 자주 했다. 그의 8세 때의 일화가 전한다. 어느 여름날, 꼬마대장 김시민이 번잡한 길거리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는데 마침 그 곳 군수의 행차가 지나가게 되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대장의 구령에 맞춰 훈련을 하고 있자
"이놈들 군수 어른의 행차이시다. 썩 길을 비키려므나." 하니 대장이 앞을 떡 가로막으며 "지금 여기는 전쟁중이라 아무도 지나가지 못합니다." 하고는 당당하게 딱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하도 맹랑하여 "허어 병정놀이인 것 같은데 갈 길이 바쁘니 어서 비키려므나." 하고 사정을 하자 "그래도 안됩니다. 굳이 지나가시려거든 저희와 싸워 이곳을 뚫고 나가십시오." 하며 군수에게 활을 겨누는 게 아닌가. '으음 맹랑한지고 ..., 나라의 장군감이로다.' 군수는 속으로 기특히 여기고 "허어 그대는 뉘댁 자손인가?" 하고 물으니 병졸 아이들이 의기가 양양하여 앞을 다투어 "저 마을 지평댁 아들이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길로 군수는 대장 소년의 아버지인 지평 김충갑을 찾아갔다. 갑자기 군수가 들이닥쳐 이런 사실을 말하자 지평은 너무도 황송하여 "아이구 이를 어찌합니까. 하라는 글공부는 안하고 병정놀이만 즐겨하니 큰일이옵니다."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러자 군수는 "아닙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시민 소년을 훌륭한 장군감으로 키우도록 하십시오." 하고는 꼬마병정들의 진을 피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의 어머니는 아들이 무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장군들도 무인이며 직접 조상되는 김방경 장군도 무인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아무리 졸라도 무인은 문인보다 지체가 낮다며 꼭 과거엔 문과에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엔 당파싸움이 극심하고 더구나 장차 나라에는 큰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 터라 어머니께 불효이나 나라일을 생각하여 시민은 무과에 응시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25세 되던 1578년(선조 11)에 마침내 무과에 응시 당당히 급제했다. 이로부터 벼슬에 올라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고 2년후인 1583년(선조 16)엔 당시 도순찰사 정언신의 직속 장수로서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니탕개는 두만강변의 여진인 추장으로서 당시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들의 대우를 소홀히 한다는 것을 이유로 난을 일으켜 큰 소란을 떨었던 것이다. 그 후 시민은 훈련원 판관이 되었는데 군사훈련에 관한 문제를 병조판서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진주 판관으로 부임한다. 이 때 부임지로 내려가면서 그는 모친이 사는 고향마을로 행차를 돌렸다.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이 구경차 몰려나왔다. 그 때 어머니도 그 틈에 끼어 있다가 "문과행차만 좋은 줄 알았더니 무과행차도 좋구나. 뉘댁 자손의 행차라 하더냐?" 하고 물어 아들의 행차임을 알리자 "그러냐. 양반도 무관을 할 것이로구나" 하고 모자지간의 갈등을 풀었다고 한다. 마침내 1592년 4월 24일(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 때 그는 병으로 죽은 진주 목사직을 대리하고 있을 때인데 면저 성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사람들을 모아서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장비를 정비하면서 군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였다. 부산포로 쳐들어온 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진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에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함께 적을 물리치고 싸워 이기는 등 거듭 공을 세워서 그해 8월 진주 목사로 승진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곧 총통 70여 병을 비롯 화약을 만들어 병정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치고 성을 굳건히 수리하고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란 걸 알고 진주를 공략하지 못하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10월에 왜장 고시니 유기나가가 수만명의 왜군을 몰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김시민은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자 복장을 하게하고 허수아비에 군복을 입혀 병정으로 가장하여 적이 얕보지 못하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시켰다. 이는 진주성의 주민이 모두 다하여 3천8백여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적은 수로 적을 괴롭히려면 깊은 밤을 이용하여 적을 기습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이라고 판단하고 결살대를 조직하여 기습 공격함으로써 적으로부터 김시민은 귀신이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2만여명의 병졸을 가지고도 7일여나 경과하도록 속수무책으로 피해만 입고 있는 왜병은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군대를 여덟패로 나누어 공격을 해 왔다. 깊은 밤을 이용해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기도 하고 조총을 마구 쏘아대며 물밀듯이 덮쳐 오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김시민의 지휘를 받고 힘을 합친 진주 성민들의 조직적인 방어를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왜병은 다시 최후의 공격을 하기로 하고 전술을 짜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대단히 중요한 이 정보를 제공해 준 사람은 뜻밖에도 어린 소년이었으니 당시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한 진주성 온 성민들의 단합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 싸움이 얼마나 격렬하고 통쾌했던가는 지붕의 기왓장까지 날려가며 밤새도록 싸운 결과 살아남아 도망간 왜병의 수가 2천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그런데 하늘도 슬퍼서 눈을 감았다는 이 안타까운 일을 어쩌려! 왜병이 물러나자 성중을 순시하던 김시민 장군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조총탄을 맞은 것이다. 서둘러 치료했으나 워낙 상처가 깊었다. 그래도 그는 그 위급함에도 나라 일을 근심하며 궁궐 쪽에 절을 하며 눈물을 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592년 10월 20일 39세였다. 그 후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올려지고 영의정과 상락부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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