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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 자료 소개
5) 진주대첩 소개
(1)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전투 소개 (2002. 3. 16. 태서(익) 제공) 출전 : 서인환,<길고 긴 7년 전쟁>,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국립진주박물관,1999. 지승종,<16세기말 진주성전투의 배경과 전투상황>
진주성 1차 전투 1592년(임진년) 5월 하순, 김해를 장악한 일본군은 창원으로 나아가 전라도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또다시 남해 연안을 따라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진격하는 양면 협공 작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7월에 있었던 한산도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본 수군이 해상활동을 중지한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7월 하순부터 육로를 통해 서진하여 진해-고성을 점령한 다음, 8월초에 진주로 육박하였다.
진 주 성 이 무렵에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략하려는 준비를 대대적으로 진행시키고 있었다. 일본군은 수군의 연전연패로 말미암아 남해안의 해안거점 확보가 곤란하게 되자, 육로로 서진하여 해안 거점과 전라도의 진입로를 확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8월 중순부터 한성주둔 병력 일부를 김해로 남하시켜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진주성에는 목사 김시민과 판관 심수경, 곤양 군수 이광악 등이 삼천팔백여 명의 병력으로 결전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성 외곽지역에는 의령 의병장 곽재우가 급파한 심대성과 고성 의병장 최강, 이달 그리고 전라 좌이병장 임계영 우의병장 최경회등의 군사들이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전라감사 권율은 22일에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한 다음이었으므로, 무주·금산지역의 고바야키와 군과 싸운 뒤 남원에 집결하였던 임계영·최경회의 전라 좌우 의병부대 만이 10월 2일에 함양-단성을 급거 이동하여 진주성을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9월 26일에 함안에 진출한 일본군은 병력을 두 개 부대로 나누어 진용을 정비한 뒤, 10월 3일 선발대 만여 명이 함안을 출발하여 4일에 진주 동쪽 외관 마현(馬峴=말띠고개)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의 주력은 6일 아침부터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성을 동·서·북 삼면에 포위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였으나, 의병부대들이 여러 곳에서 수성군(守城軍)과 호응하여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섣불리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8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을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올라 성벽을 넘으려고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바퀴가 달린 삼층누각을 만들어 접근시켜 놓고 그 속에서 성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에, 성안의 군민들은 목사 김시민의 지휘하에 혼연일체가 되어 총통과 활을 쏘아 적병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물리쳤다. 진주성에서는 현자총을 발사하여 적진을 위협하는데 이때 누대를 만들고 있던 일본군은 뜻밖에도 위력 있는 총탄이 날아오자 모두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일본군은 8일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9일 낮에는 소부대로 나누어 진주성 외곽에서 그들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지원 부대들을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소부대들은 오히려 의병부대들에 의하여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이에, 9일 밤 일본군은 성안의 방어 병력을 성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술책을 썼다. 일본군은 밤이 되자 진영 안에 불을 밝혀 놓고 병기와 물자를 실은 수레를 철수시켜 마치 퇴각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성밖의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하여 성안의 방어군이 성밖으로 출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군의 유인술책을 간파한 김시민은 성의 방어태세를 더욱 견고히 하고 성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일본군은 그들의 유인술책이 수포로 돌아가자 10일 새벽에 동문과 북문으로 전병력을 투입하여 총공격을 실시하였다. 일본군의 이 공격으로 동문 방어를 지휘하던 목사 김시민이 전탄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나 곤양 군수 이광악이 목사를 대신하여 끝내 성을 지켜내었다.
이날 전투는 밤부터 시작하여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해가 뜨면서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뒤이어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한 가운데 서로의 군사와 말울음 소리, 그리고 총성과 호각소리만 요란한 아비규환이었다. 이때에 적 진영에서 불길이 일어났고, 이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비로소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동문 신성과 북문 밖 격전장에는 사람과 말의 시체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다. 시체 중 일부는 일본군이 끌어가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에 집어 던져 화장하였는데, 적장의 시체만은 자루에 넣어 가지고 달아났다. 성안의 수성군들은 사력을 다하였으므로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또한 원병도 없었으므로 대규모 추격전을 전개하지도 못하였다.
진주성 방어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목사 김시민은 전투가 마무리될 무렵 탄환을 맞았지만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상처가 깊어 끝내 진중에서 순국하자 그를 애도하는 성민들의 울음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고, 여인들은 소복을 입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임진 삼대첩(행주대첩, 한산도대첩)의 하나로서 일본군의 사망자가 장수 삼백 명, 병사 만여 명이라고는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다만 일본군의 피해가 매우 큰 것은 사실이었다. 진주성 함락에 실패한 일본군은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본국에 허위 보고를 하여 책임을 면하기에 급급하였다.
그 후, 1593년에 이르러 일본군은 부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함창-문경-조령을 연하는 경로 만을 근근히 유지함으로써, 한성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의 후방 연락 통로마저 차단 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전력소모와 보급선 차단 및 명나라 군사의 참전 등으로 작전에 차질이 빚어졌다. 급기야는 전 병력이 남하하게 되었으며 강화교섭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임란 초기에 일본군은 호남을 공격하기 위해 두길을 택하였는데, 해상에서는 한산도에 이르러 이순신에게 격파되었으며, 육지로는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지휘하는 진주 군민의 저항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호남이 온전하게 지켜진 것은 한산도에서의 수군 활동과 진주성의 성공적인 방어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분한 마음을 품게 되었고, 1593년 6월에 진주성은 다시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공격을 받게 되었다.
진주성 2차 전투 한성의 일본군이 중로로 철수함에 따라 부산-한성간 중요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도 함께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가토·구로다·니시·나베시마 군은 1593년(계사년) 4월 29일에 경상도에 이르러 상주·선산·인동·대구 등지에 분산하여 주둔하였다. 한편, 명의 경략 송응창은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한 이후로 10여일이 지나 경상도에 도착할 때까지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이여송에게 비로소 추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명군은 5월 초에 한강을 건너 중로로 남하하였다. 이렇게 되자 상주·선산·인동·대구 등지의 일본군은 5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다시 철수하여 밀양 이남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이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자, 충청·전라·경상 하삼도에 선전관을 급파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왜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적의 해상 탈출을 철저히 봉쇄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하여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한성에서 철수한 뒤, 그들이 경상도 해안 지역에 축조한 왜성에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한 직후인 1592년(임진년) 7월에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동해안의 울산 남쪽 육십 리에 있는 서생포에서부터 남해안의 거제도에 이르는 해안 및 도서지역 십여 곳에 열두 개의 본성과 여섯 개의 지성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한성의 일본군이 철수하였을 때에는 이 축성공사가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다.
경상도 지역으로 집결한 일본군은 이 무렵 경상우도 요지이며, 전라도로 진입하는 육상의 관문이기도 한 진주성을 공략하여 1592년 10월의 제 1차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입하기 위하여 진주성을 공격하다가 김시민이 지휘하는 진주성 군·민의 저항으로 실패한 이래, 진주성 패전을 그들의 침략 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한 치욕적인 전투로 인식하고, 설욕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4월에 왜군이 남하하였을때 도요토미는 5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이 포함된 명령을 하달하는데 그중에서 4월 17일 것은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모조리 토멸하고 그후에 전라도·경상도를 정복하고 축성할 것, 한성에 집결한 병력을 인수하고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고 한 사람이라도 남기지 말고 도살할 것"이다.
한성 철수가 완료될 무렵인 5월 20일에 도요토미는 진주성 공격을 위한 다음과 같은 방략을 지시하였다.
첫째, 공격부대는 총 병력 구만삼천 명으로 하되, 제1대 가토· 제2대 고니시· 제3대 우키타· 제4대 모리· 제5대 고바야카와군으로 구분한다. 둘째, 수성부대는 총 병력 이만 삼천 명으로 하되, …(중략)… 필요시에는 부산성의 병력으로 지원한다. 셋째, 수군 부대는 가덕도에 위치하되, …(중략)… 조선 수군에 대비한다. 이와 같은 토요토미의 진주성 공격 명령이 6월 상순에 조선 주둔 일본군 진영에 하달되자, 공격부대들은 창원·김해 부근에 집결하여 진주성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도요토미의 진주성 공격 명령을 받은 고니시는 "조선군이 진주성에서저항하지 말고 성을 비워 인명을 구하도록 하라"고 심유경에 통고하였다. 이에, 명군측에서 경략 송응창과 부총병 유정 등이 일본군 진영에 서신을 보내어 진주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으나 실효가 없었다.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계획이 알려지자, 진주 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을 명군을 접대하기 위하여 상주에 머물고 있다가 급거 진주성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창의사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사천현감 장윤·의병장 고종후·이계련·민여윤·강희보·이잠 등이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으며, 인근 고을의 부사·현령·현감 등 수명의 지방관들도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주성에는 삼천오백여 명의 군사와 육만여명의 주민들이 입성하여,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도절제사로 추대하고 충청병사 황진을 순성장으로 삼아,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의하였다.
경상·전라·충청의 군사와 의병은 함안에 주둔하였는데 적인 함안으로 오자 전라도 관찰사 권율은 본도 방비 명분으로 운봉으로 갔고, 곽재우 등은 정진을 지키고 있었다. 적이 정진으로 오자 곽재우는 삼가 등지로 물러갔다. 이에따라 진주는 백리내에 외원군이 전무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6월 16일에 함안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함안에서 병력을 양분하여 1대는 의령으로 진출하고, 다른 1대는 반성을 경유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일본군의 선발부대는 20일에 진주성 동북쪽 십리 지점인 마현으로 진출하였으며, 이튿날 도착한 본대와 합류하였다. 이에 22일 오전, 제1대 가토 군은 성의 북쪽을, 제2대 고니시 군은 서쪽을, 제3데 우키타 군은 동쪽을 각각 담당하여, 예비대를 제외한 칠만여 명으로 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첫날 공격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야간 공격에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부터 일본군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다시 공격 기세를 올렸다. 이러한 일본군의 세력에 놀란 명군은 거창·남원 등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진주성의 위기을 외면한 채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남원에 주둔 중이던 낙상지·송대빈 군은 부총병 사대수로부터 진주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원에서 구례까지만 진출한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관망한 하고 있었다. 진주성의 군·민 들은 성이 완전히 포위당하여 외부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성을 지키려는 결의를 더욱 공고히 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일본군은 25일부터 동문밖에 토산을 쌓아 망루에서 내려다보면서 성안으로 조총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성안에서도 황진의 지휘아래 토산을 쌓아 그 위에서 현자총통으로 응사하여 일본군의 망루를 격파하였으며, 일본군의 화공(火攻)도 무력화시켰다.
이에, 일본군은 27일부터는 귀갑차라는 새로운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귀갑차는 진주성 군·민의 화공을 받아 소각되고 말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야음을 타서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방비가 소홀한 서문쪽을 집중공격하여 성벽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이튿날, 서문 쪽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는데, 이때 진두 지휘하던 순성장 황진이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진주성의 군·민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는데, 29일에는 일본군이 귀갑차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하여 비에 젖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물밀듯이 성안으로 돌입하였다. 진주성의 군·민 들은 남강을 뒤로 한 채 촉석루 쪽으로 밀려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으며,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무기를 남강에 던지고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진주성 방어전을 총지휘하던 김천일은 그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장열한 최후를 마쳤으며, 삼천여 명의 군사와 육만여명의 성민들은 진주성 함락과 함께 전멸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29일에 진주성에 입성하여, 도요토미로부터 지시 받은 대로 진주성을 철저히 유린하여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1대는 섬진강 동안을 따라 구례·곡성 일대까지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다가 7월 9일에 일단 진주로 복귀하였다. 진주성에서 육만만여 명의 군·민들을 살육한 일본군은 그후 다시 각군별로 지정된 왜성으로 되돌아갔다.
(2)<진주대첩 소개> (2001.10. 5. 태서(익) 제공) 김성일이 의병장 곽재우.이달등을 보내어 진주를 구원하게 하고, 사잇길로 군기를 수송하게 하였는데,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크게 격파하여 진주가 포위에서 풀렸다. 당초 왜장이 군사 수만 명을 모두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의 군사는 3천여 명이었다. 김시민이 여러 성첩을 나누어지키게 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니 성 안이 적요하였다. 적이 기치와 개삽을 많이 설치하고 금으로 꾸민 가면에 의복을 이상하게 차려 입어 햇빛에 번쩍이고 바람에 펄럭이니 온갖 형상에 눈이 부시고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왜장 6명이 진을 나누어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총수수천 명이 항상 산 위에서 성 안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그 형세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는 듯하였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김시민은 군사들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고 적들의 소리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즉시 포를 쏘고 북을 울리며 응전하게 하였다. 적이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많이 베어 엮어서 막이를 만들고 흙을 쌓아 그 속을 채워 우리 군사가 모르게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었는데 한 칸 너비쯤 되는 것으로 그 위에 망석을 덮어 많은 군사가 동시에 일제히 오르게 하려 하였으며, 3층의 산대를 만들어 성첩을 내려다 보게 하였다. 김시민은 화구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어 성 위에 감춰두게 하고 대포및 대석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적이 공격할 장비를 모두 갖추고 사면으로 육박하자, 성 안에서 현자총을 쏘아 산대의 적을 맞춰 떨어뜨리고, 화약과 풀로 송장을 태웠으며, 대포루 대나무로 엮을 긴 사다리를 부수고, 끓인 물을 퍼붓기도 하고 큰 돌을 던지기도 하여 여러 가지의 공격용 장비를 격파하였다. 9월 10일 밤중에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다가 몰래 되돌아와 적의 대장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서 처음에는 동문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 바야흐로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또 하나의 대진이 동문의 경우처럼 갑자기 북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만호 최덕량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항해 싸우며 일사불란하게 막아내었는데, 동녘이 밝아오자 조금 뜸해졌다. 성 안의 나무와 돌, 기와,띠풀 등이 거의 없어졌으며 시민도 탄환에 맞아 누워 있었다. 이때 곤양 군수 이광악이 왜장을 쏘아 죽이니 한낮이 되어서야 적진이 미로소 퇴각하며 시체를 태우고 포위를 풀고 흩어졌다. 성이 포위당한 10여 일 동안 4~5차례 큰 전투를 벌이면서 안팎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적이 먼저 도망하였다. 바아흐로 포위하고 주둔할 때에 양도의 구원병은 모두 요새에 웅거하여 결진하고서 밤이면 가까운 산에 올라 성 안과 함께 불을 들어 북을 치며 서로 응원하였으나 감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적이 나누어 이웃 고을을 노략질하자, 구원병이 요로에서 막고 습격하여 상당수를 살해하거나 상처를 입혔는데, 김준민은 여러 번 싸움에서 완전하였으므로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미 퇴각하여 본 소굴로 돌아갔으므로 여러 고을이 모두 수복되었다. 김시민의 병이 심해지자 김성일이 서예원을 대신하게 하였다. 서예원은 완력은 있으나 어리석은 겁장이로 재능이 없는데, 그의 형 서인원이 명사이기 때문에 특별히 발탁하여 변수를 삼았었다. 그가 북도에 있을 때에는 수급을 거짓으로 만들어 공을 자랑하여 직질이 올랐었으므로 조헌이 매번 상소하여 그의 죄를 논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해 부사로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김성일을 따라다녔으므로 김시민을 대신하였는데, 이때부터 진주성의 수비는 다시 전일과 같지 못하였다.
*진주대첩이 소개되고 있는 홈페이지 : http://www.1815.or.kr
(3)진주대첩 소개 (2002. 5. 29. 영환(문) 제공)
1) 1차 진주대첩(晋州大捷) 1592년(임진년) 5월 하순, 김해를 장악한 일본군은 창원으로 나아가 전라도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또다시 남해 연안을 따라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진격하는 양면 협공 작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7월에 있었던 한산도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본 수군이 해상활동을 중지한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7월 하순부터 육로를 통해 서진(西進)하여 진해-고성을 점령한 다음, 8월초에 진주로 육박하였다.
이 무렵에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략하려는 준비를 대대적으로 진행시키고 있었다. 일본군은 수군의 연전연패로 말미암아 남해안의 해안거점 확보가 곤란하게 되자, 육로로 서진하여 해안 거점과 전라도의 진입로를 확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8월 중순부터 한성주둔 병력 일부를 김해로 남하시켜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진주성에는 목사 김시민과 판관 심수경, 곤양 군수 이광악 등이 삼천팔백여 명의 병력으로 결전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성 외곽지역에는 의령 의병장 곽재우가 급파한 심대성과 고성 의병장 최강, 이달 그리고 전라 좌이병장 임계영 우의병장 최경회등의 군사들이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전라감사 권율은 22일에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한 다음이었으므로, 무주·금산지역의 고바야키와 군과 싸운 뒤 남원에 집결하였던 임계영·최경회의 전라 좌우 의병부대 만이 10월 2일에 함양-단성을 급거 이동하여 진주성을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9월 26일에 함안에 진출한 일본군은 병력을 두 개 부대로 나누어 진용을 정비한 뒤, 10월 3일 선발대 만여 명이 함안을 출발하여 4일에 진주 동쪽 외관 마현(馬峴=말띠고개)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의 주력은 6일 아침부터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성을 동·서·북 삼면에 포위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였으나, 의병부대들이 여러 곳에서 수성군(守城軍)과 호응하여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섣불리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8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을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올라 성벽을 넘으려고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바퀴가 달린 삼층누각을 만들어 접근시켜 놓고 그 속에서 성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에, 성안의 군민들은 목사 김시민의 지휘하에 혼연일체가 되어 총통과 활을 쏘아 적병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물리쳤다. 진주성에서는 현자총을 발사하여 적진을 위협하는데 이때 누대를 만들고 있던 일본군은 뜻밖에도 위력 있는 총탄이 날아오자 모두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일본군은 8일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9일 낮에는 소부대로 나누어 진주성 외곽에서 그들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지원 부대들을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소부대들은 오히려 의병부대들에 의하여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이에, 9일 밤 일본군은 성안의 방어 병력을 성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술책을 썼다. 일본군은 밤이 되자 진영 안에 불을 밝혀 놓고 병기와 물자를 실은 수레를 철수시켜 마치 퇴각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성밖의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하여 성안의 방어군이 성밖으로 출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군의 유인술책을 간파한 김시민은 성의 방어태세를 더욱 견고히 하고 성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일본군은 그들의 유인술책이 수포로 돌아가자 10일 새벽에 동문과 북문으로 전병력을 투입하여 총공격을 실시하였다. 일본군의 이 공격으로 동문 방어를 지휘하던 목사 김시민이 전탄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나 곤양 군수 이광악이 목사를 대신하여 끝내 성을 지켜내었다.
이날 전투는 밤부터 시작하여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해가 뜨면서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뒤이어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한 가운데 서로의 군사와 말울음 소리, 그리고 총성과 호각소리만 요란한 아비규환이었다.
이때에 적 진영에서 불길이 일어났고, 이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비로소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동문 신성과 북문 밖 격전장에는 사람과 말의 시체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다. 시체 중 일부는 일본군이 끌어가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에 집어 던져 화장하였는데, 적장의 시체만은 자루에 넣어 가지고 달아났다. 성안의 수성군들은 사력을 다하였으므로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또한 원병도 없었으므로 대규모 추격전을 전개하지도 못하였다.
진주성 방어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목사 김시민은 전투가 마무리될 무렵 탄환을 맞았지만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상처가 깊어 끝내 진중에서 순국했다.
이와 같이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임진 삼대첩(행주대첩, 한산도대첩)의 하나로서 일본군의 사망자가 장수 삼백 명, 병사 만여 명이라고는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다만 일본군의 피해가 매우 큰 것은 사실이었다. 진주성 함락에 실패한 일본군은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본국에 허위 보고를 하여 책임을 면하기에 급급하였다.
2) 2차 진주성 싸움
한성의 일본군이 중로로 철수함에 따라 부산-한성간 중요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도 함께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가토·구로다·니시·나베시마 군은 1593년(계사년) 4월 29일에 경상도에 이르러 상주·선산·인동·대구 등지에 분산하여 주둔하였다.
한편, 명의 경략 송응창은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한 이후로 10여일이 지나 경상도에 도착할 때까지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이여송에게 비로소 추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명군은 5월 초에 한강을 건너 중로로 남하하였다. 이렇게 되자 상주·선산·인동·대구 등지의 일본군은 5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다시 철수하여 밀양 이남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이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자, 충청·전라·경상 하삼도에 선전관을 급파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왜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적의 해상 탈출을 철저히 봉쇄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하여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한성에서 철수한 뒤, 그들이 경상도 해안 지역에 축조한 왜성에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한 직후인 1592년(임진년) 7월에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동해안의 울산 남쪽 육십 리에 있는 서생포에서부터 남해안의 거제도에 이르는 해안 및 도서지역 십여 곳에 열두 개의 본성과 여섯 개의 지성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한성의 일본군이 철수하였을 때에는 이 축성공사가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다.
4월에 왜군이 남하하였을때 도요토미는 5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이 포함된 명령을 하달하는데 그중에서 4월 17일 것은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모조리 토멸하고 그후에 전라도·경상도를 정복하고 축성할 것, 한성에 집결한 병력을 인수하고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고 한 사람이라도 남기지 말고 도살할 것"이다. 한성 철수가 완료될 무렵인 5월 20일에 도요토미는 진주성 공격을 위한 다음과 같은 방략을 지시하였다.
첫째, 공격부대는 총 병력 구만삼천 명으로 하되, 제1대 가토· 제2대 고니시· 제3대 우키타· 제4대 모리· 제5대 고바야카와군으로 구분한다. 둘째, 수성부대는 총 병력 이만 삼천 명으로 하되, …(중략)… 필요시에는 부산성의 병력으로 지원한다. 셋째, 수군 부대는 가덕도에 위치하되, …(중략)… 조선 수군에 대비한다. 이와 같은 토요토미의 진주성 공격 명령이 6월 상순에 조선 주둔 일본군 진영에 하달되자, 공격부대들은 창원·김해 부근에 집결하여 진주성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도요토미의 진주성 공격 명령을 받은 고니시는 "조선군이 진주성에서저항하지 말고 성을 비워 인명을 구하도록 하라"고 심유경에 통고하였다. 이에, 명군측에서 경략 송응창과 부총병 유정 등이 일본군 진영에 서신을 보내어 진주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으나 실효가 없었다.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계획이 알려지자, 진주 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을 명군을 접대하기 위하여 상주에 머물고 있다가 급거 진주성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창의사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사천현감 장윤·의병장 고종후·이계련·민여윤·강희보·이잠 등이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으며, 인근 고을의 부사·현령·현감 등 수명의 지방관들도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주성에는 삼천오백여 명의 군사와 육만여명의 주민들이 입성하여,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도절제사로 추대하고 충청병사 황진을 순성장으로 삼아,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의하였다.
경상·전라·충청의 군사와 의병은 함안에 주둔하였는데 적인 함안으로 오자 전라도 관찰사 권율은 본도 방비 명분으로 운봉으로 갔고, 곽재우 등은 정진을 지키고 있었다. 적이 정진으로 오자 곽재우는 삼가 등지로 물러갔다. 이에따라 진주는 백리내에 외원군이 전무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6월 16일에 함안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함안에서 병력을 양분하여 1대는 의령으로 진출하고, 다른 1대는 반성을 경유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일본군의 선발부대는 20일에 진주성 동북쪽 십리 지점인 마현으로 진출하였으며, 이튿날 도착한 본대와 합류하였다. 이에 22일 오전, 제1대 가토 군은 성의 북쪽을, 제2대 고니시 군은 서쪽을, 제3데 우키타 군은 동쪽을 각각 담당하여, 예비대를 제외한 칠만여 명으로 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첫날 공격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야간 공격에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부터 일본군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다시 공격 기세를 올렸다.
이러한 일본군의 세력에 놀란 명군은 거창·남원 등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진주성의 위기을 외면한 채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남원에 주둔 중이던 낙상지·송대빈 군은 부총병 사대수로부터 진주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원에서 구례까지만 진출한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관망한 하고 있었다. 진주성의 군·민 들은 성이 완전히 포위당하여 외부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성을 지키려는 결의를 더욱 공고히 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일본군은 25일부터 동문밖에 토산을 쌓아 망루에서 내려다보면서 성안으로 조총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성안에서도 황진의 지휘아래 토산을 쌓아 그 위에서 현자총통으로 응사하여 일본군의 망루를 격파하였으며, 일본군의 화공(火攻)도 무력화시켰다 이에, 일본군은 27일부터는 귀갑차라는 새로운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귀갑차는 진주성 군·민의 화공을 받아 소각되고 말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야음을 타서 투항을 권 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방비가 소홀한 서문쪽을 집중공격하여 성벽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이튿날, 서문 쪽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는데, 이때 진두 지휘하던 순성장 황진이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진주성의 군·민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는데, 29일에는 일본군이 귀갑차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하여 비에 젖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물밀듯이 성안으로 돌입하였다. 진주성의 군·민 들은 남강을 뒤로 한 채 촉석루 쪽으로 밀려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으며,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무기를 남강에 던지고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진주성 방어전을 총지휘하던 김천일은 그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장열한 최후를 마쳤으며, 삼천여 명의 군사와 육만여명의 성민들은 진주성 함락과 함께 전멸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29일에 진주성에 입성하여, 도요토미로부터 지시 받은 대로 진주성을 철저히 유린하여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1대는 섬진강 동안을 따라 구례·곡성 일대까지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다가 7월 9일에 일단 진주로 복귀하였다. 진주성에서 육만만여 명의 군·민들을 살육한 일본군은 그후 다시 각군별로 지정된 왜성으로 되돌아갔다.
3) 임난 최대의 격전지 진주(晋州)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왜 이렇게 진주를 점령하려 애를 썼을까? 내가 생각하기로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쌀이요, 하나는 이순신이다. 쌀은 나주평야와 논산평야를 의미하는 말이요,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무참한 패배 때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최고의 명장하면 단연 이순신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지휘아래에 있는 우리 수군은 단 한차례도 패배가 없었음은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그의 수군 활약 덕분에 왜군(倭軍)의 보급이 끊긴것도 여러분은 알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올 때 대략 그 수는 15만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보급만도 만만찮았을 터인데, 더구나 보급까지 끊겼으니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왜군의 기세가 반으로 꺽인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물론 고을을 약탈하여 보급을 해소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일 뿐이다.
여기서 화제를 잠시 돌려,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대는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단연 전라도다. 왜냐하면 전라도에는 나주평야와 논산평야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으로서는 그 곳의 쌀을 가져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꽤 쉬운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리산 자락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왜군이 전라도로 가장 쉽게 갈수 있는 루트는 부산-마산-진주-하동-순천 이 루트가 가장 쉬운 루트이다. 그중에 부산과 마산은 벌써 왜군이 점령을 하였다. 하지만 왜군의 쌀을 가져오자는 계획은 이순신의 수군과 진주성이라는 철옹성 때문에 중단된다. 부산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 수군은 한산대첩에서 쓴맛을 봤고, 육군은 진주성을 함락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의 수는 약 2만명 정도였고, 김시민 목사의 지휘아래 조선군은 약 3800명정도였다. 얼핏보아도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김시민 목사의 준비성 덕택인지 몰라도 4면에서 죄어오는 일본군을 화포와 성의 잇점을 살려서 막아낸다. 이 전투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사용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임난당시 계발된 이 무기는 현대의 포탄과 같은 개념의 무기로써, 발사하면 폭발하여 주위를 피해를 주는 무기이다. 이전까지의 포탄은 그냥 구멍을 내는 개념인데 반하여, 이 진천뢰는 목표를 맞추는 순간 파편으로 적을 살상하는 무기로써, 아마 그 전의 포탄과는 비교도 안되는 살상력(殺傷力)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완구(大碗口)를 사용하여 이 진천뢰를 쏘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김시민 목사의 뛰어난 지휘능력과 조선군의 정신력과 조총을 뛰어넘는 화포를 사용하여 1차 진주성 싸움은 간신히 막아낸다. 하지만 더 이상의 원군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추격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1593년에 이르러 일본군은 부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함창-문경-조령을 연하는 경로만을 근근히 유지함으로써, 한성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의 후방 연락 통로마저 차단 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전력소모와 보급선 차단 및 명나라 군사의 참전 등으로 작전에 차질이 빚어졌다. 급기야는 전 병력이 남하하게 되었으며 강화교섭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에 실패한 이후로 도요토미의 진주성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해 위해서도 언급했지만, 진주성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위에서도 밝히듯이 워낙 원군이 전무한데다 일본군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결국 군관민이 다 몰살당하는 결과를 당한다. 하지만 일본군을 막아야겠다는 그 의지가 참으로도 아름다웠기에 진주성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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