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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려실 기술 내 기록 내용> (2003. 11. 16. 윤만(문) 제공)
▣ 연려실기술 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정묘년의 노란(虜亂) ▣
〇 처음에 창성 부사(昌城府使)김시약(金時若)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방어할 계책을 세웠는데, 군졸들이 겁을 내어 날마다 점점 흩어져 도망가고 정탐 나간 병졸이 돌아오지 않아 적에 대한 보고가 끊겼다. 이에 이르러 의주의 적 2백여 기병이 불시에 쳐들어와 선언하기를, “너희 나라는 다 함락되고 국왕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너희가 한 구석에 있는 외로운 성을 가지고 감히 큰 군사를 막겠는가.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군졸들이 성을 넘어 달아나자 시약이 군사로 하여금 경계를 엄하게 하고 단속하도록 하니, 성중 군졸들이 일시에 창을 거꾸로 들고 반역하자, 시약이 말하기를, “나는 지방관으로서 마땅히 이 땅에서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가든지 머물든지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적이 성을 넘어가는 장수와 군졸을 마구 죽이고 이어 성 안으로 달려들어와 시약 등이 사로잡혔다. 적이 포박을 풀어주면서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자 산 채로 의주로 끌고가 죽이고, 두 아들은 머리를 깎아 노예로 만들었다. 《조야기문》 〇《촬요(撮要)》에는, “오랑캐의 한 부대가 쳐들어 오니 창성 부사 김시약이 달아나다가 붙잡혀 죽었다.”고 하였다.
☞ (김시약의) “두 아들은 머리를 깎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김시약이 달아나다가 붙잡혀 죽었다.”고 한 위 기록은 여러 자료와 기록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 다음은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4월 1일(정유)에 기록된 충숙공 김시약에 대한 기록입니다. 『연려실기술』『조야기문』등이 비록 훌륭한 사서(史書)이나 조선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당해낼 사료(史料)는 없습니다. 적이 또 한 떼의 군대를 보내어 의주에서 강을 따라 올라와 창성부(昌城府)를 공격하자 절제사 김시약(金時若)이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켰으나 힘이 다하고 원군도 없어서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시약이 적에게 잡히자 적이 칼로 위협하였으나 시약은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2) 창성공 인장 발견에 대한 자료 (2002. 5. 9. 태서(익) 제공)
영조21년(1745),평안도 창성부의 백성이 밭을 갈다가 옛 인장 한개를 얻었는데, 인의 뒤쪽에 만력(1573~1619) 몇 년에 주조한 것이라고 새겼습니다.대개 정묘 호란(1627년)으로 부사 김시약장군이 전사 할 때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라고 부사 이형신이 서면으로 감영에서 上에게 보고하여 왔다. 감사 이종성을 내려 보내어 관계일을 돌아 보도록 하고 印을 보물로 하여 본영에 수장케 했다. 출전 : 미상 에서 上에게 보고하여 왔다. 감사 이종성을 내려 보내어 관계일을 돌아 보도록 하고 印을 보물로 하여 본영에 수장케 했다. 출전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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