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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1) 전사지 관련 자료 소개 (2003. 8. 12. 발용(군) 제공) 출전 : 이규태의<新열하일기> 중에서 청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무순성(撫順城)이 함락되자, 명나라는 최후의 일전을 무순 동남쪽에 있는 사얼후에서 벌일 양으로 47만에 이르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명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출병중이던 강홍립(姜弘立) 도원수 휘하의 2만 조선군도 이 사얼후의 일익을 담당, 결전에 임하고 있었다. 청나라측 문헌에 보면 이 결전이 붙었을 때 모래바람이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어둠에서 밝은 쪽을 향해 공략하게 되어 백발백중인데,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밝은 데서 어둠을 향해 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포탄 모두가 버드나무에만 맞을 따름이었다.
사서(史書)는 이 사얼후 대패를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고 피는 흘러 개울을 이루었으며, 기치(旗幟)와 사졸(死卒)들이 혼하(渾河)의 물길을 막았다.' 이 사얼후 전투중에 도원수 강홍립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적진에 투항했으나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끝까지 사투, 우리 군사(軍史)뿐 아니라 중국의 군사에도 길이 빛을 남기고 있다.
당시 우영(右營) 사령관이던 김응하 장군은 십 리를 두고 적군 6만 명과 대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을 가려 포와 화살을 쏠 수 없었다. 이를 틈타 적군이 총공격을 펴 아진을 도륙하는데, 장군은 버드나무 한 그루를 방패 삼아 활을 쏘아댐으로써 접근하는 적을 모조리 적중시켜 시체밭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휘두르며 싸웠고, 칼이 부러지자 제 목숨을 아끼려고 나라를 저버린 도원수 강홍립을 꾸짖으며 닥치는 대로 적군을 박살냈다고 장군의 묘비명은 적고 있다. 그는 열심히 싸우다 등 뒤에서 던진 적군의 창에 맞아 쓰러졌는데, 시체를 거두어 묻을 때까지도 부러진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기 띤 눈을 감지 못하였다 한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을 우러러 우리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였고, 명나라에서는 중국 동북 지방의 가장 높은 벼슬인 요동백(遼東伯)에 봉했다. 그리고 적국인 청나라에서도 김응하 장군이 방패 삼아 싸웠던 그 버드나무에 장군버들(將軍柳)이라는 벼슬을 내렸고, 그 벼슬 이름이 연유가 되어 지명이 돼내렸다던데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김응하 장군이 전사한 사얼후 산은 산이라기보다 표고 70미터에 불과한 둔덕이었다. 사망자 5만 명을 냈다는 결전의 고전장(古戰場)인 심하(深河)는 이제 대적방(大狄房)댐에 수몰되고 없었다. 다만 사신길을 따라가던 박정길(朴鼎吉)이 짬을 내어 그 근처를 서성이다 남겨놓은 시 한수를 되뇌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백 길의 심하와 만 길의 산에는 지금도 모래땅에 피흔적이 완연한데 강 위에서 장군의 혼을 부르지 말라 오랑캐를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려니.
이제는 강물이 아닌 댐에서 장군의 넋을 초혼해야 할 판이니 무상하지 짝이 없다. 굳이 이 사얼후에서 다른 하나의 사적을 또 찾는다면 바로 인질 잡혀 있던 소현세자의 양식을 위하여 농사를 지어 먹게 한 150일 갈이(耕)의 농토다. 《심양일기(瀋陽日記)》에 '사을고(士乙古)'로 표기된 땅이 바로 이 사얼후이며, 병자호란 때 납치당해 온 조선 피로인과 평안도 변경 지역의 죄인 가운데 농사꾼을 차출, 이곳에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여 조선관에 양식을 대도록 했던 것이다.
그 농사 이민들은 대대로 이 땅에 눌러 살았는데 만주족이나 한족과 혼혈, 피가 희석되어 찾아볼 방법이 없었다. 다만 '어머니'를 이 일대에서는 '어머이'라 하고, 울음을 울 적엔 '애고!'라 하며, 창살에 창호지를 바를 때 만주족들은 창살 밖으로 바르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한국처럼 창살 안쪽에서 바르는 등 언어적. 문화적 잔재만을 애오라지 간직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곳 동포학자가 말해 주었다. 그 후 청나라를 오갔던 많은 사신들은 이 충신의 넋을 기리고자 전적지인 심하를 찾고자 했으나, 무순의 심하와는 전혀 다른 산해관(山海關)의 심하로 잘못 알고 엉뚱한 곳에서 회포를 푼 사신이 한둘이 아니었다.
연행 기록 《계산기정》을 보자. '산해관의 성첩에서 1리쯤 나오면 강을 건너게 된다. 이곳은 요동백 김응하 장군이 크게 싸우다 죽은 땅이라, 무공을 기리고자 적의 시체로 쌓은 큰 무덤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고 물어보아도 모른다.' 그러고서 다음과 같은 회포의 시 한 수를 읊었다.
부러진 창은 멀리 뻗은 모랫벌에 가라앉고 밤새의 구름은 옛 무덤 묻어 버렸다. 장군은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데 천년토록 부질없이 물만 흘러 가는구나.
박정길 [ 朴鼎吉 , 1583~1623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양이(養而).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 160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인(舍人)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1618년 전한(典翰) ·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그해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로, 동지사(冬至使)를 겸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0년 대사성 ·공조참판을 지내고, 1622년 문안사(問安使)로서 명나라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을 영접하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지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앞서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일로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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