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4) <연려실기술>에서
<연려실 기술 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9. 윤만(문) 제공) (1) ▣ 연려실기술 제34권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경신년의 대출척(大黜陟)과 허견(許堅)의 옥사 ▣
○ 박상원(朴相元)에게 형벌을 네 차례 쓴 뒤에 결안하기를, “압수한 문서 가운데 작은 편지가 있었는데 겉면에는 ‘요동백 복당(遼東伯福堂)’이라 쓰여 있고 편지 안에는, ‘옥(獄)에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장담(壯談)을 할까. 들리는 소문에 북경(北京)의 세력이 움츠렸다는데 이런 때에 당신은 옥에 갇혀서 날개를 펼치지 못함이 매우 한스럽다.” 라는 말이 있었는데, 타고난 성품이 우직하며 자신을 충성스럽고 의롭다고 여겨 혹 김응하(金應河)와 견주어서 남몰래 서로 칭호로 불렀으니 요망할 말을 한 죄가 확실합니다.” 하였다. 당고개에서 교수형에 처하였다.
(2) ▣ 연려실기술 별집 제11권 정교전고(政敎典故) 전제(田制) ▣
○ 김응하(金應河)가 아직 현달하지 않을 때에, 철원(鐵原)의 양전감관이 되었는데, 균전사(均田使)가 그 전답의 품등을 높여 세(稅)를 올리려고 하는 것을 응하가 고집하고 즐기지 않아서, 볼기를 맞았으나 오히려 전의 소견을 고집하였다. 철원의 백성이 지금까지 그 덕을 감사히 여긴다. 《공사견문》
(3)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을사년에 세웠고 무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 창성(昌城) 충렬사(忠烈祠)기해년에 세웠고 을 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 선천(宣川) 충렬사(忠烈祠) : 김응하(金應河)ㆍ김만중(金萬重)벼슬은 문형(文衡)이다. ㆍ박태보(朴泰輔) ○ 종성(鍾城) 행영사우(行營祠宇)을사년에 세웠다. :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ㆍ 김응하(金應河) ○ 경원(慶源) 충렬사(忠烈祠)임신년에 세웠다. :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
(4) ▣ 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하다 ▣ 계해년에 종친부에서 모 도독(毛都督)에게 보낸 글에, 이때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있었는데, 이해 5월에 본국에서 이상길(李尙吉)을 접반사로 삼았다 “폐군(廢君)은 소경왕(昭敬王)의 측실이 낳은 둘째 아들인데 젊었을 때 자못 헛된 명예가 있어 세자로 세웠었습니다. 무신년에 선왕께서 병환이 위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폐군이 위를 이어받았는데 즉시 선왕에게 죄를 얻고 쫓기어 나갔던 간신 이이첨ㆍ정인홍 등을 불러들여 정권을 맡기고, 또 선왕이 관계했던 후궁 김씨(金氏)와 간통하고 그의 말만 들으니, 이첨 등이 김씨와 결탁하여 서로 안팎이 되어 폐군의 동복형(同腹兄) 한 사람, 대군 한 사람, 선왕의 후궁 열한 사람, 선왕의 손자 두 사람, 왕비 김씨의 아버지와 형제 네 사람을 죽였으며, 그 밖에도 조정의 대신 중에 죽음을 당한 자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심지어는 대비를 죽이려고 하여 별궁에 깊이 가두었습니다. 어리석은 오랑캐가 중국의 원수가 된 것은 본래 천하가 함께 분노할 일이니, 우리 나라 군신은 더욱 창을 베고 칼을 갈아서 임진왜란 때에 구해준 큰 은혜를 갚으려 해야 할 것인데, 폐군은 적개하는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적들과 통하여 은밀히 장령(將領)들을 시켜 오랑캐에게 항복하게 하여 중국 군사가 패전하도록 하였고 매양 변방에 있는 신하들에게는 적과 싸우지 말도록 하였으니, 폐군은 그야말로 한 나라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천하의 죄인인 것입니다. 벼슬을 제수하고 형벌을 주는 것이 모두 뇌물로 결정되었는데 수령 자리 하나에 때로는 천 냥이 넘었습니다.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심하(深河)에서 전사한 조선 장수 김응하(金應河)의 가족에게 내려준 은(銀) 2만 냥도 모두 궁중에 운반해 들이고 그 집에는 한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포저집(浦渚集)》
(5) ▣ 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조 고사본말(廢主光海朝故事本末) 모비(母妃)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있게 하다 ▣ 대비를 폐할 때 정청(庭請)에 나아가 참례한 백관의 명록(名錄)대개 780명인데 미관잡직(微官雜職)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 좌의정한효순, 우의정민몽룡(閔夢龍), 좌찬성박승종(朴承宗), 우찬성이충(李沖)우참찬유간(柳澗)사인(舍人)유충립(柳忠立)ㆍ정광경(鄭廣敬), 검상(檢詳)남궁경(南宮㯳), 사록(司錄)옥진휘(玉晉輝),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이광정(李光庭), 한평군(韓平君)이경전(李慶全), 완창군(完昌君)이각(李覮), 봉산군(蓬山君)정상철(鄭象哲), 길천군(吉川君)권반(權盼), 풍안군(豊安君)임곤(任袞), 한흥군(漢興君)조공근(趙公瑾),한산군(寒山君) 조진(趙振), 한남군(漢南君)이필영(李必榮), 영성군(靈城君)신경행(辛景行), 영평군(鈴平君)윤중삼(尹重三), 완산군(完山君)이순경(李順慶), 완숭군(完崇君) 이이경(李頤慶), 청릉군(淸陵君)김신국(金藎國), 여양군(驪陽君)민인백(閔仁伯), 석흥군(碩興君) 이척(李惕), 하청군(河淸君)정희현(鄭希玄), 원양군(原陽君) 송강(宋康), 해신군(海愼君)이희령(李希齡), 익흥군(益興君)이응순(李應順), 문평군(文平君)유공량(柳公亮), 석룡군(石龍君)전룡(全龍), 충훈도사(忠勳都事)심일명(沈日明), 충익도사(忠翊都事)엄혜(嚴譓), 판돈녕(判敦寧)민형남(閔馨男), 도정(都正)이형욱(李馨郁), 첨정(僉正)강수곤(姜秀昆), 주부(主簿)이명백(李明白), 참봉이몽룡(李夢龍), 판중추(判中樞)노직(盧稷), 지사(知事) 박홍구(朴弘耈)ㆍ표정로(表廷老), 동지(同知)장만(張晩)ㆍ박정현(朴鼎賢)ㆍ심열(沈悅)ㆍ박자흥(朴自興)ㆍ이응(李膺)ㆍ장예충(張禮忠)ㆍ방의남(方義男), 첨지(僉知)한총(韓叢), 도승지유황(柳璜), 경력(經歷)이사수(李士修), 도사(都事) 박영(朴瑛), 지사(知事)한희길(韓希吉), 전흥군(全興君)이시언(李時彦) 등과 호위(扈衛)한 해숭위(海嵩尉)윤신지(尹新之), 일선위(一善尉)김극빈(金克鑌), 길성위(吉城尉)권대임(權大任),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의빈도사(儀賓都事)이국형(李國衡), 이조참판유몽인(柳蒙寅), 참의(參議)유희발(柳希發), 정랑(正郞)이중계(李重繼)ㆍ윤이지(尹履之)ㆍ김적(金適)안경심(安景深), 좌랑윤형철(尹衡哲)ㆍ이지정(李志定)ㆍ정지경(鄭志經)ㆍ홍득일(洪得一), 예조판서이이첨(李爾瞻), 참판윤수민(尹壽民), 참의이명남(李命男), 정랑안경(安璥)ㆍ채겸길(蔡謙吉)ㆍ최호(崔濩), 좌랑유약(柳瀹)ㆍ조정생(曺廷生)ㆍ한정국(韓定國), 병조판서유희분(柳希奮), 참판이덕형(李德泂), 분참판(分參判)이성길(李成吉)ㆍ김지남(金止男), 참의정립(鄭岦), 분참의(分參議)박사제(朴思齊), 참지(參知)이원엽(李元燁), 정랑유진증(兪晉曾)ㆍ이용진(李用晉)ㆍ오윤해(吳允諧), 분정랑(分正郞)박률(朴慄), 좌랑김시국(金蓍國)ㆍ강선여(姜善餘)ㆍ유화(柳鞾)ㆍ조길(曺佶)ㆍ이사맹(李師孟), 형조판서조정(趙挺), 참의정규(鄭逵), 정랑홍여일(洪汝一)ㆍ이응천(李應天)ㆍ박광선(朴光善)ㆍ신득연(申得淵)ㆍ나인(羅紉)ㆍ권고(權●), 좌랑민정(閔瀞)ㆍ남이민(南以敏)ㆍ박수의(朴守誼)ㆍ최진운(崔振雲), 공조판서이상의(李尙毅), 참판조탁(曺倬), 참의장자호(張自好), 정랑윤정지(尹廷之)ㆍ최탁(崔琢)ㆍ박조(朴簉), 좌장이명한(李明漢)ㆍ김덕망(金德望)ㆍ경선(慶選), 판윤(判尹)윤선(尹銑), 좌윤(左尹)김개(金闓), 우윤(右尹)이원(李瑗), 서윤(庶尹)윤희(尹僖), 판관(判官)신수신(愼守身), 참군(參軍)홍유형(洪有炯)ㆍ김명응(金命應)ㆍ이종립(李宗立), 대사헌조존세(趙存世)삼사(三司)ㆍ승지ㆍ한림(翰林)과 주서(注書)는 들어가지 않았다.판결사(判決事)박경신(朴慶新), 사의(司議)김경열(金景悅), 사평(司評)황립중(黃立中)ㆍ신경진(申景進), 사성(司成)민호(閔頀), 사예(司藝)이창정(李昌庭)ㆍ신충일(申忠一), 직강(直講)채승선(蔡承先)ㆍ유광(柳洸))ㆍ이숙(李潚)ㆍ윤지양(尹知養), 전적(典籍)한윤겸(韓允謙)ㆍ황상겸(黃尙謙)ㆍ신식(申栻)ㆍ한급(韓昅)ㆍ홍경찬(洪景纘)ㆍ양시헌(梁時獻)ㆍ이강(李茳), 박사(博士)오전(吳晪)ㆍ권준(權濬)ㆍ박진(朴瑨), 학정(學正)이유일(李惟一)ㆍ허돈(許暾)ㆍ조훈(趙壎)ㆍ한정국(韓正國), 판교(判校)이수록(李綏祿), 교검(校檢)이경현(李景賢), 정자(正字)홍헌(洪憲)ㆍ심지청(沈之淸)ㆍ김언(金琂)ㆍ박안효(朴安孝)ㆍ정심(鄭沁)ㆍ유집(柳潗), 좌통례(左通禮)김위남(金偉男),우통례(右通禮)금개(琴愷), 상례(相禮)강홍중(姜弘重), 찬의(贊儀)유영(柳泳), 인의(引儀)홍사준(洪師浚)ㆍ조차마(曺次磨)ㆍ유경춘(柳擎春)ㆍ이유(李瑜)ㆍ정연수(鄭兗岫)ㆍ유식(柳湜)ㆍ한사성(韓師聖)ㆍ이흠(李欽)ㆍ윤취빙(尹就聘)ㆍ이정건(李廷楗)ㆍ 임취빙(林就聘)ㆍ김복흥(金復興)ㆍ박자원(朴自元)ㆍ가인의(假引儀)임충좌(任忠佐)ㆍ신준(申俊)ㆍ이승안(李承安)ㆍ장인서(張麟瑞)ㆍ곽계문(郭繼文), 종부정(宗簿正)유탁(兪濯), 주부(主簿)서탁(徐晫), 전적(典籍)남이성(南以聖), 장악정(掌樂正) 이홍엽(李弘燁), 첨정(僉正)정대해(趙大海), 주부(主簿)민주(閔澍), 직장(直長)최원호(崔元祜) ㆍ허항(許恒), 사도정(司導正)이시립(李時立), 첨정(僉正)조계한(趙繼韓), 주부김우성(金佑成)ㆍ정섭(鄭涉), 사옹정(司饔正)정문진(鄭文振), 주부성흔(成忻), 직장박문엽(朴文燁)ㆍ유윤창(柳允昌)ㆍ박승안(朴承安), 봉사(奉事)이쟁(李崝)ㆍ유여성(柳汝惺)ㆍ 정진(鄭晉)ㆍ이사민(李師閔)ㆍ참봉심정익(沈廷翼), 상의정(尙衣正)정도(鄭道), 판관(判官)이승헌(李承憲), 주부(主簿)안언길(安彦吉), 별좌(別座)박효전(朴孝全)혹은 황효전(黃孝全)이라고 한다.박안행(朴安行)ㆍ임광준(任光俊)ㆍ황식(黃湜), 직장(直長)구해(具海), 사복정(司僕正)황익중(黃益中), 첨정(僉正)유박(柳舶), 판관(判官)유희안(柳希安), 주부한덕윤(韓德允)ㆍ성창렬(成昌烈), 내섬정(內贍正)이순민(李舜民), 주부김연경(金延慶), 봉사최명선(崔命善), 봉상정(奉常正)이시정(李時楨), 첨정(僉正)차운로(車雲輅), 판관조익(趙釴), 주부박희현(朴希賢)ㆍ강문익(康文翼)ㆍ왕보신(王輔臣), 봉사김경후(金慶厚), 참봉김지수(金地粹), 내자정(內資正)금변(琴忭), 주부황진(黃津), 봉사윤성득(尹誠得), 예빈정(禮賓正)윤정(尹綎), 주부정사온(鄭思溫), 별좌(別座) 권필중(權必中)ㆍ 윤형임(尹衡任), 직장이준익(李俊翼), 참봉이격(李格), 제용정(濟用正)박효생(朴孝生), 판관(判官)김현(金俔), 직장박찬(朴燦)ㆍ박현(朴睍), 봉사조탁(趙倬), 참봉정문해(鄭文海), 군기정(軍器正)강린(姜繗), 부정(副正)정응정(鄭應正)ㆍ한여징(韓汝澂)ㆍ조수헌(趙守憲), 판관윤간(尹侃)ㆍ이두망(李斗望), 주부심이(沈怡)ㆍ윤호(尹昈), 직장임천수(任天壽), 봉사이응립(李應立)ㆍ고경서(高景瑞), 참봉정환(鄭煥), 군자정(軍資正)유효립(柳孝立), 판관(判官)윤흥충(尹興忠), 주부정종길(鄭宗吉)ㆍ김영(金韺), 봉사이준(李浚), 사재정(司宰正)송극인(宋克訒), 첨정(僉正)박천서(朴天敍), 주부강세경(姜世慶)ㆍ직장 이경민(李慶閔), 참봉정심(鄭諶)ㆍ사섬정(司贍正)유철(柳澈), 주부이탁(李倬), 직장한여현(韓汝賢), 봉사민선철(閔善哲), 참봉한사일(韓師一)ㆍ사포주부(司圃主簿)윤홍업(尹弘業), 별좌(別座) 이경준(李慶俊)ㆍ김형윤(金亨胤), 장원별좌(掌苑別座)임성로(任星老)ㆍ김호(金灝), 평시령(平市令)이원현(李元顯), 직장이사증(李師曾)ㆍ조지별좌(造紙別座)김수정(金守正), 금화별좌(禁火別座)한오(韓晤), 전생주 전생주부(典牲主簿)박안국(朴安國), 봉사신종근(申從謹), 참봉이호(李護), 사축별좌(司蓄別座) 송탁(宋鐸)ㆍ이정신(李廷臣)ㆍ박수형(朴隨亨), 상서직장(尙瑞直長)최응하(崔應河), 의영주부(義盈主簿)남궁격(南宮格), 직장한순(韓㫬), 봉사허련(許璉), 빙고별좌(氷庫別座)조심(趙諶)ㆍ임경후(任慶後), 교서교리(校書校理)정흡(鄭洽), 저작(著作)이유성(李惟聖), 종묘령(宗廟令)우정침(禹廷琛), 직장김효달(金孝達), 봉사이호직(李好直)ㆍ최홍서(崔弘緖), 사직참봉(社稷參奉)유노증(兪魯曾), 조국준(趙國俊),전설별좌(典設別座)민익(閔榏)ㆍ김숙(金橚)ㆍ심숙(沈俶)ㆍ신득의(愼得義), 와서별좌(瓦署別座)이진영(李晉英), 활인별좌(活人別座)심훤(沈暄)ㆍ이사성(李士星)ㆍ정항(鄭恒), 귀후별좌(歸厚別座)장흔(張昕)ㆍ안정(安鋌), 선공첨정(繕工僉正)이정익(李廷益), 직장심돈(沈暾), 봉사신순(申楯)ㆍ 이응명(李應溟), 참봉이유후(李裕後), 감역(監役)임석후(任碩後)ㆍ김영구(金永耈)ㆍ홍형(洪逈)ㆍ우시계(禹時啓)ㆍ이경(李㯳)ㆍ이국광(李國光), 풍저주부(豐儲主簿)하진(河鎭), 직장최응두(崔應斗), 장흥주부(長興主簿)우대유(禹大有), 직장윤인계(尹仁啓), 봉사김광국(金光國), 광흥수(廣興守)정근(鄭瑾), 주부한사덕(韓師德), 봉사정문승(鄭文升)ㆍ채계 (蔡繼先), 금부도사(禁府都事)이숭의(李崇義)ㆍ정찬(鄭纘), 전옥주부(典獄主簿)이순(李楯), 오부주부(五部主簿) 유세증(兪世曾)ㆍ유건(柳鍵), 참봉윤홍보(尹弘輔)ㆍ구현(具鉉)ㆍ윤보형(尹保衡)ㆍ성대수(成大受)ㆍ김원(金瑗), 동몽교관(童蒙敎官)정운서(鄭雲瑞)ㆍ이성석(李聖錫)ㆍ 이영의(李榮義)ㆍ최기문(崔起門)ㆍ최구(崔衢)ㆍ이중명(李重溟), 내시교관(內侍敎官)윤상민(尹商民)ㆍ이일형(李日馨), 훈련교관(訓鍊敎官)최응문(崔應雯), 사산감역(四山監役)윤형준(尹衡俊)ㆍ유지호(柳之豪)ㆍ김철(金哲)ㆍ신억(申億)이민수(李敏樹), 도총 경력(都摠經歷)이응린(李應麟)ㆍ이동룡(李東龍)ㆍ강작(康綽)ㆍ 변언황(邊彦璜), 분경력(分經歷)이득가(李得可), 도사(都事)한기영(韓耆英)ㆍ정국정(鄭國楨)한창(韓㻛)ㆍ채색(蔡穡)ㆍ박성(朴成)ㆍ박영(朴瑛), 훈련도정(訓鍊都正)유승서(柳承緖)ㆍ 훈련정이충선(李忠善)부정(副正)이우철(李友哲)ㆍ허정식(許廷式), 첨정(僉正)이대득(李大得)ㆍ최보(崔葆), 판관(判官)심대항(沈大恒)ㆍ방경복(房景福), 주부이정언(李廷彦)ㆍ정직(鄭稷), 참봉배경(裵璟)ㆍ최규(崔叫)ㆍ봉사한응복(韓應福)ㆍ이석남(李碩男), 선전관(宣傳官)이중광(李重光)ㆍ이종선(李宗善)ㆍ이곽(李郭)ㆍ이종(李悰)ㆍ정원필(鄭元弼)ㆍ신유(申曘)ㆍ조종의(趙宗義)ㆍ조정영(曺挺英)ㆍ이경하(李景夏)ㆍ이탁(李倬)ㆍ 성언길(成彦吉)ㆍ백대진(白大進)ㆍ박곤원(朴坤元)ㆍ박명룡(朴命龍)ㆍ유종립(柳宗立)ㆍ신채(申蔡), 익위(翊衛)박일현(朴逸賢)ㆍ이언직(李彦直)ㆍ이평형(李平亨), 사어(司禦)신수천(愼守天)ㆍ최환(崔煥), 익찬(翊贊)유정립(柳鼎立)ㆍ조성(趙誠), 위솔(衛率)이운근(李雲根), 부솔(副率)조실구(曺實久)ㆍ 이호원(李浩源), 시직(侍直)김수관(金守寬)ㆍ이석망(李碩望), 세마(洗馬)유시립(柳時立)ㆍ조각(趙珏)ㆍ황길남(黃吉男), 호군(護軍)이위경(李偉卿)ㆍ 유경종(柳慶宗)ㆍ조유도(趙有道)ㆍ정광성(鄭光成)ㆍ유지신(柳止信)ㆍ한덕수(韓德修)ㆍ여인길(呂裀吉)ㆍ 응형(柳應泂)ㆍ최윤조(崔胤祖)ㆍ윤의(尹顗)ㆍ이여검(李汝儉)ㆍ성이문(成以文)ㆍ김정간(金廷幹)ㆍ이득원(李得元)ㆍ이국(李掬)ㆍ이응린(李應麟)ㆍ박서(朴瑞)ㆍ박적(朴寂)ㆍ이여해(李汝諧), 사직(司直)남근(南瑾)ㆍ송석경(宋錫慶)ㆍ이대엽(李大燁)ㆍ여우길(呂祐吉)ㆍ윤휘(尹暉)ㆍ민형(閔泂) 박이서(朴彝敍)ㆍ 송안정(宋安廷)ㆍ 이선복(李善復)ㆍ이경황(李慶滉)ㆍ안륵(安玏)ㆍ우치적(禹致績)ㆍ원유남(元裕男)ㆍ변응지(邊應祉)ㆍ원근(元瑾)ㆍ이백복(李百福)ㆍ조유정(趙惟精)ㆍ이문전(李文荃)ㆍ오정방(吳定邦)ㆍ오순무(吳舜懋)ㆍ정문부(鄭文孚)ㆍ이구징(李久徵)ㆍ윤의립(尹毅立)ㆍ조경진(趙景禛)ㆍ김응함(金應緘)ㆍ구인경(具仁慶)ㆍ박봉수(朴鳳壽)ㆍ박덕린(朴德麟)ㆍ원수남(元秀男)ㆍ조흥남(趙興男)ㆍ이현(李玹)ㆍ 김윤신(金允信)ㆍ이은종(李殷宗)ㆍ정응운(鄭應運)ㆍ 조명(趙溟)ㆍ구덕령(具德齡)ㆍ이충길(李忠吉)ㆍ김경서(金景瑞), 사과(司果)송석조(宋錫祚)ㆍ정진철(鄭震哲)ㆍ조훤(趙暄)ㆍ황이중(黃履中)ㆍ이영남(李英男)ㆍ조충일(趙忠一)ㆍ강홍업(姜弘業)ㆍ김응하(金應河)ㆍ박난수(朴蘭秀)ㆍ이정생(李挺生)ㆍ김수겸(金守謙)ㆍ이시호(李時豪)ㆍ유태첨(柳泰瞻)ㆍ유옥(柳沃)ㆍ고경민(高敬民)ㆍ박지진(朴知晉)ㆍ김원복(金元福)ㆍ노세준(盧世俊)ㆍ윤경기(尹慶祺)ㆍ안용(安容)ㆍ조희보(趙希輔)ㆍ권복길(權復吉)ㆍ 안호인(安好仁)ㆍ이식립(李植立)ㆍ홍대방(洪大邦)ㆍ유몽룡(劉夢龍)ㆍ박자(朴梓)ㆍ권사공(權士恭)ㆍ이인귀(李麟貴)ㆍ전윤(田潤)ㆍ이경호(李景瑚)ㆍ홍기남(洪奇男)ㆍ이굉(李鍧)ㆍ한준(韓俊)ㆍ이승형(李升亨)ㆍ심륜(沈惀)ㆍ전효신(全孝信)ㆍ최위(崔㬙)ㆍ박성룡(朴成龍)ㆍ윤안국(尹安國)ㆍ이귀경(李龜慶)ㆍ허완(許完)ㆍ이성(李晟)ㆍ황치성(黃致成)ㆍ조발(趙撥)ㆍ강침(姜沈)ㆍ 창문(柳昌文)ㆍ조국빈(趙國賓)ㆍ유림(柳琳)ㆍ권흡(權洽)ㆍ정침(鄭沈)ㆍ 윤기헌(尹耆獻)ㆍ김운성(金雲成)ㆍ조준남(趙俊男)ㆍ남궁인(南宮戭)ㆍ황락(黃洛)ㆍ 김전(金銓)ㆍ이일원(李一元)ㆍ성식(成軾)ㆍ민종량(閔宗亮)ㆍ방천수(文天壽)ㆍ전유형(全有亨)ㆍ정지륜(鄭之倫)ㆍ임석훈(林碩熏)ㆍ이겸(李馦)ㆍ강선(江璿)ㆍ이분(李芬)ㆍ권형(權)ㆍ최숭(崔崇)ㆍ민항(閔沆)ㆍ홍창세(洪昌世)ㆍ이복형(李福亨)ㆍ 장명응(張明應)ㆍ이중길(李重吉)ㆍ남빈(南贇)ㆍ이대남(李大男)ㆍ안몽윤(安夢尹)ㆍ정승조(鄭承曹)ㆍ정대립(鄭大立)ㆍ 조굉중(趙宏中)ㆍ안홍망(安弘望)ㆍ이응망(李應望)ㆍ이 서(李惟恕)ㆍ박기남(朴奇男)ㆍ권근(權瑾)ㆍ이종성(李宗誠)ㆍ김영(金穎)ㆍ성시헌(成時憲)ㆍ송진(宋震)ㆍ조옥건(趙玉乾)ㆍ최한(崔漢)ㆍ유대일(兪大逸)ㆍ윤인남(尹仁男)ㆍ신경류(申景柳)ㆍ김경의(金景義)ㆍ정양(鄭暘)ㆍ허상(許詳)ㆍ 김경운(金慶雲)ㆍ이문창(李文昌)ㆍ김원남(金元男)ㆍ정지한(鄭之罕)ㆍ김유형(金有馨)ㆍ신득자(申得滋)ㆍ권응원(權應元)ㆍ홍걸(洪傑)ㆍ신인민(愼仁民)ㆍ 이복광(李復匡)ㆍ한천두(韓天斗)ㆍ이덕부(李德符ㆍ홍택(洪澤)ㆍ이욱(李●)ㆍ이정(李楨)ㆍ최경춘(崔景春)ㆍ홍룡해(洪龍海)ㆍ한현인(韓顯仁)ㆍ권로(權櫓)ㆍ이신의(李愼儀)ㆍ안숙도(安肅道)ㆍ한항길(韓恒吉)ㆍ조광필(趙光弼)ㆍ권엽(權燁)ㆍ조천종(曹天宗)ㆍ김명남(金命男)ㆍ신용휴(申用休), 사정(司正)변응항(邊應恒)ㆍ허함(許涵)ㆍ성희구(成僖●)ㆍ오숙(吳䎘),사맹(司猛)박경범(朴景範)ㆍ홍찬(洪粲)ㆍ홍여량(洪汝亮),사용(司勇)최수(崔璹)ㆍ 이고(李稿)ㆍ이의춘(李宜春)ㆍ김여정(金汝頲)ㆍ신극제(申克濟)ㆍ양두남(梁斗南)ㆍ이숙(李淑)ㆍ황덕영(黃德韺), 훈련낭청(訓鍊郞廳)이중광(李重光)ㆍ이영달(李英達). 《명륜록》
(6) ▣ 연려실기술 제21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심하(深河)의 전쟁 기미년[광해군 11년 (1619)]ㆍ붙임 김응하(金應河). 사신을 보내어 변무(辨誣)하다. 오랑캐가 요동에 웅거하다.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들어오다.] ▣
○ 홍립이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하고, 중군(中軍)에 전 첨사오신남(吳信男)을, 종사관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 정응정(鄭應井)ㆍ전 군수이정남(李挺男)을, 별장(別將)에는 숙천 부사(肅川府使)이인경(李寅卿)ㆍ절충(折衝)이국(李掬)ㆍ창성 부사(昌城府使)박난영(朴蘭英)ㆍ 절충유태첨(柳泰瞻)ㆍ절충신홍수(申弘壽)를, 향도장(嚮導將)에는 아이만호(阿耳萬戶) 조영립(趙英立)을, 이상은 도원수 휘하에속했다. 중군에는 우후(虞候)안여눌(安汝訥)을, 별장에는 절충김원복(金元福)ㆍ절충황덕창(黃德彰)ㆍ군관한응룡(韓應龍)ㆍ김흡을, 향도장에는 하서국(河瑞國)을, 이상은 부원수의 휘하에 속했다.중영장(中營將)에는 정주 목사(定州牧使)문희성(文希聖)을, 중군에는 강서 현령(江西縣令)황덕영(黃德韺)을, 좌영장(左營將)에는 선천 군수(宣川郡守)김응하(金應河)를, 중군에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유길(李有吉)을, 우영장(右營將)에는 순천 군수이일원(李一元)을, 중군에는 운산 군수(雲山郡守)이계종(李繼宗)을, 연영장(連營將)에는 청성 첨사(淸城僉使)이찬(李穳)을 임명했는데 이것을 10진영으로 나누었다. 《책중일록》
○ 유정은 양마전으로부터 관전으로 나아가고, 도사 교일기(喬一琦)는 우리나라 군사 만여 명을 독촉하여, 원수 강홍립ㆍ부원수 김경서ㆍ종사관 이민환ㆍ무장(武將)문희성ㆍ이일원ㆍ김응하 등을 거느리고 그 동쪽을 쳤다. 유정은 마가채 아귀를 지나 3백여 리나 깊숙히 들어가서 10여 채(寨)를 이겼으나, 4일에 적이 중국 군졸의 복장을 하고 유인하는 속임에 빠져서, 겹겹이 포위되어 군사가 드디어 무너지니,유정과 유초손(劉招孫)ㆍ교일기가 모두 죽고, 우리 장수 김응하도 힘써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다.《충렬록(忠烈錄)》
○ 원수 강홍립 이하 전군이 항복하니,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모두 죽이고, 장령(將領)들 몇 명만 남겨 두었다.
○ 4일에 명 나라 장수들이 먼저 행군하고 아군의 3영이 뒤따라 나아가니, 도로는 평탄하나 산골이 연이어 뻗어서,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려, 영졸(營卒)들이 각각 거마작(拒馬柞)을 메고 앞으로 겨우 수십 리를 가서 부거지(富車地) 노성(好城)에서 60여 리의 거리에 있다.에 도착하니 대포 소리 세 번이 연달아 들렸다. 이에 홍립이 말을 빨리 달려 길 왼편 언덕에 올라 보니, 회오리 바람에 갑자기 일고,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기 때문에 곧 좌영은 맞은 편 높은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중영은 원수가 올라간 언덕에 진을 치고, 우영은 남쪽 변두리 한 언덕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따. 좌영은 이미 벌판에 진을 쳤었으나 적의 기병이 벌써 가까이 있어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근처 부락 백여 집에 명 나라 군사들이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이 따라 와서 진영 위에 덮었다. 잠시 후에 진 상공(陳相公)ㆍ우 수비(于守備)ㆍ교 유격(喬遊擊)이 필마단기로 와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가 모두 함몰되었고 제독도 전사하였다.” 하였다. 대개 유정이 새벽에, “가합령(家哈嶺) 밖은 적의 경비가 전혀 없다.”는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빨리 달려 먼저 가서 수십 리에 걸쳐서 군사를 나누어 부락을 약탈하게 하여 군대의 대오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랑캐 장수 귀영가(貴盈哥)가 3만여 기를 거느리고 서로에서 밤새 내내 달려와 새벽에 가합령을 지나서 산골짜기에 매복하였다가, 불의에 뛰쳐 나와서 앞 뒤를 가로막아 끊으니 명 나라 군사의 여러 진영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채 모두 함몰되었다고 한다. 우 수비와 진 상공은 즉시 달려 가고 교 유격은 말하기를, “나는 귀국 군사를 감독하니 갈 수 없다.” 하였다. 연기와 먼지 속을 바라보니, 적의 기병이 크게 닥치는데, 양쪽 날개처럼 멀리 에워싸고 먼저 아군의 좌영을 치니 홍립이 전령을 내려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달려와 구원하게 하여 좌영과 진을 연합하게 하여서 겨우 대열을 이루자, 적의 기병이 달려와 충돌하니, 기세가 비바람과 같았다. 포와 총을 한 번 쏘고 나서 두 번째 화약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은 벌써 진중에 들어와 순식간에 좌우영이 모두 함몰되었다. 이에 선천 군수김응하, 운산 군수이계종(李繼宗), 영유 현령이유길(李有吉), 우영천총(右營千摠)김요경(金堯卿)ㆍ오직(吳稷)ㆍ좌영천총김좌룡(金佐龍)은 모두 전사하고, 좌영천총신충업(申忠業)은 도망가고, 우영장 순천 군수이일원(李一元)은 벗어나 달려서 중영으로 들어왔다. 《책중일록》
○ 저 두 사람(강홍립ㆍ김경서)는, “임금의 밀지(密旨)가 있다.”고 일컫고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우리 예의의 나라를 금수의 나라로 떨어뜨렸으니 만약 김응하의 죽음이 없었다면 장차 무엇으로 천하 후세에 말을 하였겠는가. 김장군의 〈묘비〉
○ 김응하는, 자는 경희(景羲)이며, 본관은 안동이요 철원에 살았다. 을사년에 무과에 뽑혔는데 신장이 8척이 넘고 힘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고 활쏘는 재주가 뛰어났다. 기풍이 헌칠하고 행동이 조용하여 무인의 거친 기질이 없었으며, 술을 몇 말이나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명신록》
○ 심하(深河)의 전쟁에 그 가족과 영결하고 뒷일을 처리하고는 인신(印信)을 봉하여 고을 아전에게 주면서, “적을 만나면 내가 반드시 전사할 것이니, 이것을 차고 갈 수 없다.” 하였다. 《명신록》○ 그때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유길(李有吉)이 김응하와 같이 죽었는데, 죽을 때에 한삼(汗衫)을 찢어서 ‘5월 5일 죽다.[五月五日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말 갈기에 매었더니, 말이 군중을 지나 뛰어서3일 만에 집에 돌아가서 슬피 울고 곧 죽었다. 이에 그 말을 유길의 무덤 밑에 묻었다. 그 무덤이 파주 광탄(廣灘)에 있는데 지금 사람이 ‘말무덤’이라 이른다.
○ 과거에 공 김응하 이 좌영 군사를 거느리고 김경서 군에 소속되었는데, 부차령(富車嶺)에 이르러 여러 군졸이 가볍게 전진하다가 패하니, 공이 수하 군사 3천 명으로써 말을 채찍질하여 진을 버렸다. 진이 이루어지자 홍립에게 고하기를, “속히 우영에 전령을 내려 맞아서 싸우게 하시오.” 하니, 홍립이 우영장 이일원을 시켜 서로 돕게 하였다. 공이 일원에게, “우리 군사는 험한 곳에 웅거하지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으나, 일원이 듣지 않더니, 적 수천 기병이 두 진 사이를 가로질러 끊자 일원은 도망쳤다. 얼마 후에 적 6만 명이 1리 밖에 진영을 맞대고 정예 병력을 뽑아서 그 앞을 침범하자 공이 포수를 시켜 일시에 적병에게 총을 쏘아 세 번이나 물리쳤더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에 가득 차서 포와 화살을 쏠 수가 없었다. 이에 적이 힘을 합하여 쳐들어오니, 아군이 즉시 전멸하였다. 공이 홀로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서 버드나무 밑에 기대어서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헛 나가지 않고 한꺼번에 여럿을 맞추니 적의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었다. 이때 공은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수없이 몸에 맞았지만, 두꺼운 갑옷을 입어서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적을 치며 홍립을 크게 꾸짖기를, “너희들이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리고 구원하지 않는구나.” 하였다. 또 칼이 부러지자, 빈 주먹으로 버티면서 더욱 분전하였는데, 이때 한 적병이 뒤에서 창을 던져서 드디어 땅에 엎어져 목숨이 끊어졌다. 그래도 오히려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한 기운이 한창 일어나니, 적이 서로 돌아보며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홍립 등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오랑캐 추장이 양 진의 시체를 묻게 하였는데, 공의 시체만은 썩지도 않은 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김응하 묘비《우암집》
○ 아군이 우미령(牛尾嶺)을 넘었다. 원수의 군영은 영(嶺) 위에 있고, 좌영은 영(嶺) 밑 평지에 있었는데 이튿날 날이 밝아서 보니, 명 나라의 패전한 군사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간간이 아군에 들어오니 아군이 떠들썩하여 좌영에서 명 나라 패잔병을 진중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갑자기 오랑캐가 많이 밀어닥쳐 먼저 좌영을 침범하므로 응하가 거마목(拒馬木)나무로 말이 넘어오지못하게 만든 것. 을 진 앞에 둘러치고 부대를 나누어 포를 쏘게 하니, 오랑캐 기병이 길이 막혀서 뚫고 오지 못하고 여러 번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갔다 하였다. 그때 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영(嶺) 위에 있으면서도 좌영에서 벌떼처럼 왕래하며 긴급함을 알려와도 망연히 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오랑캐 기병들은 패잔병의 말을 연이어 매어 놓고, 철기병이 말 뒤에 따라오면서 병기로 말을 몰아 내달려 거마목을 무너뜨리게 하였다. 이에 좌영에서 포를 쏘니, 오랑캐의 선두가 넘어지자 뒤따라온 적병이 연달아 밟고 넘어오는데, 좌영에서는 군사가 적어서 버티지 못하고 드디어 패하였다. 이리하여 응하가 말을 잃고 걸어서 큰 버드나무 밑에 나가 활로 쏘아 죽인 적의 수가 매우 많았는데, 이때 오랑캐 군사들은 공의 주위를 담처럼 둘러서고 숲같이 나열하여 있으면서도 응하가 서있는 백 보 안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하더니, 한참 후에야 오랑캐가 어지럽게 들어와서 응하가 전사하였다. 김려기(金麗奇)가 전한 《정재집(定齋集)》
○ 이전에 응하가 우미령(牛尾嶺)을 넘기 전에 어떤 늙은 할멈이 지나가며, “군사가 이 영(嶺)을 넘으며 안 될 것인데 왜 잠시 여기서 멈추지 않는고.” 하니, 응하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며 잡아다 베고 드디어 영을 넘더니 군사가 과연 패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神)이 먼저 고하였으나, 응하는 이미 죽을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김여기가 전한 《정재집》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응하가 화살이 다하여 말을 찾아 달아나려고 좌우를 돌아보았으나 그때는 이미 좌영 군교 지득남(池得男)이 공의 좋은 말을 훔쳐 타고 도망한 뒤였으므로 공이 드디어 죽었다. 공의 자손들이 이 일을 호소하여 득남을 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요행히 면하였다.” 하는데, 응하가 칼 한 자루와 활 한 개로 사방에서 오는 오랑캐를 혼자 감당하였으니, 반드시 살지 못할것은 화살이 다하기 전에도 알 수 있었던 일이며,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달아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인데, 자손들이 그 부조(父祖)를 그르침이 많도다. 《정재집》
○ 공 김응하 은 몸과 얼굴이 웅장하며, 큰 소 다리를 한꺼번에 먹고, 더욱 활쏘기를 잘하여 맞추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 선천(宣川) 사람이 북도(北道)에 수자리[戍] 가서 뛰어나게 잘 달리는 호마(胡馬)를 얻었는데, 공은 이 말을 타고 달리며 말 위에서 투구ㆍ갑옷ㆍ활집ㆍ화살통 등을 벗어 땅에 던지고, 말에서 뛰어 내려서는 낱낱이 주어서 다시 말 위에 뛰어 올랐으니, 그 날래고 용맹함이 이와 같았다.이에 선천의 백성과 군사들은 벌써 공의 재능에 감복하였고 나라 풍속이 평소에 건주(建州) 오랑캐를 가볍게 여겨서 모두 분발하여 이르기를, “묵작(墨綽) 세속에서 건주 오랑캐를 묵작(墨綽)이라 불렀다. 을 섬멸시킬 수 있으니 돌아와 공로로 책봉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늙은이와 어린이가 아니면 모두 공을 따라 출병해서, 이로 인하여 선천 백성들의 죽음이 많았다. 《정재집》
○ 조정에서 김응하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용만(龍灣)에다 사당을 세우고 공의 화상을 그려 모셨더니 병자년 난에 오랑캐가 그 사당을 불태웠다. 이에 선천 백성들이 공을 위하여 선천에다 사당을 짓고 제사지내려 하니 부사가 두려워하고 꺼려서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김장군의 행적과 만사를 기록하여 〈충렬록(忠烈錄)〉이라 이르고, 세상에 간행하였고, 박정길(朴鼎吉)은 시를 짓기를,
백 길의 심하(深河)와 만 길의 산에는 지금까지 모래밭에 피 흔적이 얼룩졌네. 강 위에서 초혼(招魂)하지 말아라. 오랑캐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리. [百丈深河萬仞山 至今沙磧血痕斑 英魂且莫招江上 不滅匈奴定不還] 하였다. 《정재집》ㆍ《속잡록》
○ 명 나라 신종(神宗)이 조서로 김응하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그 처자에게는 백금을 내리고 〈묘비〉차관(差官)을 보내어 용만관(龍灣館)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글에, “방군(邦君) 어사(御史)와 호분 백윤(虎賁百尹)들은 들어라. 동번국(東藩國)의 충신 김응하 장군은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였으니, 짐(朕)의 마음에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상작(上爵)을 주노라.아아, 처음 이 추한 북쪽 오랑캐가 무엄하게도 남쪽으로 말을 먹여[南牧 남침] 사나운 무리를 거느리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였다. 더욱 내 계책이 정하였으니 어찌 감히 정벌하지 않으랴. 나의 대장(大將)과 우방(友邦)의 대군을 독려하여 하늘의 토벌을 받들어 행할 때 장군은 죽을 마음을 가졌고 사졸도 살 뜻이 없었도다. 전군이 모두 패하였으며 교활한 오랑캐가 승세를 타니 여러 장수들은 살기에 급급하였는데 장군만은 죽음을 바쳤도다. 장군의 의리는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나 장군의 죽음은 내가 부끄러워하노라. 아아, 안에는 중국이요 밖에는 이적(夷狄)이니 수양(修攘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것)함이 도리를 얻으면 오랑캐가 절로 복종하고, 수양(修攘)함이 도리를 잃으면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게 하나니, 과인이 생각하지 않고 덕을 밝히는 데 어두워 만리를 정벌하여, 나의 장졸을 몰아다가 오랑캐의 땅에 피와 살을 버리게 하였으니 과인이 부끄러워 하노라. 민심은 일정하지 않아 오직 은혜만을 생각하니, 어루만져 주면 나를 임금으로 여기나 학대하면 나를 원수로 여기는도다. 과인이 위로는 천심(天心)을 거스리고 아래로는 민심을 어기는 것을 피하지 아니하고 가볍게 큰 일을 일으켜 군수물자 운반에 원망이 일어나니 드디어 장군만이 혼자서 싸우는데 구원병이 없게 되었으니 과인이 부끄러워 하노라. 붉은 충심을 누가 본받으며 백골을 누가 거두리오. 당상(堂上)에 늙은 어미는 문에 기대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끊기고 규중에 홀로 된 아내는 망부석(望夫石)이 되었으니 내가 심히 슬퍼하노라. 비록 그러하나, 과인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워 해도 아무 쓸모가 없고 장군의 죽음은 죽어서도 빛이 있도다. 가을 서리 같은 큰 절개와 흰 태양 같은 맑은 충성은 만고토록 강상(綱常)을 붙들고 인신(人臣)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대의를 밝히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였으니, 장군은 비록 한 번 실패로 죽었으나 만고에 죽지 아니하였도다.
아아,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죽지 않았으면, 당(唐)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요, 문천상(文天祥)이 죽지 않았으면, 송(宋)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으면 내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다. 충신과 열사가 어느 시대에 없으리오마는 몸을 잊고 나라에 바친 그대 같은 이가 뉘 있으리오. 천지에 순수하고 강한 한 기운이 만고에 뭉쳐 있더니 장군은 이 기운을 타고나서 장군이 되었도다. 삼군(三軍)에게 장수는 탈취할 수 있으나, 필부의 마음은 탈취할 수 없고, 오악(五嶽)은 움직일 수 있으나, 한 절개는 움직이기 어려운 것을 이로써 알겠다. 만약 장수들의 충성심이 모두 장군과 같았으면 장군이 어찌 패하여 죽었으며, 과인이 어찌 오랑캐 추장에게 욕을 당하였으랴. 아아, 충성이 장군과 같고 용맹이 장군과 같고 지혜가 장군과 같았으나 고립되어 구원이 없었음은 과인이 죄로다. 덕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함은 옛부터 그런 은전이 있었으니 충신을 표창하고 절의를 드러내는 것이 오늘 날만 없으리오. 나는 선왕의 업을 계승하여 예물을 갖추어서 장군의 처자에게 사례하고 요동백(遼東伯)으로 증직하노니, 나의 작은 정성을 드러내어 구원(九原 저승)에 있는 충혼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속잡록〉
○ 세상에서 말하기를, “김응하가 죽으니 명 나라에서 요동백을 추봉하였다.” 하니 망녕된 말이다. 〈충렬록〉에 기록된 여러 사람의 만사와 전기에 모두 이런 내용이 없고, 명 나라 사람이 지은 〈충의록(忠義錄)〉에도, “조선 장관 김응하 등에게도 휼전(恤典)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것을 보아도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시골 선비가 조서를 모방한 것으로 그 글이 매우 상스럽고 졸려하였는데,조경남이 이것을 기록하여 드디어 잘못 전해졌다. 송시열이 응하의 신도비문을 지으면서 드디어 엄연히 요동백이라 일컬었으니 애석하다. 《몽예집(夢囈集)》
○ 군보통인(軍保通引) 김철현(金鐵賢)이 공을 따라 바야흐로 버드나무에 기대어 활을 쏠 때에, 모든 군사가 다 흩어졌으나 철현만이 그 자리를 지키며 떠나지 않고 공의 갑옷 속에 엎드려 화살을 집어 주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철현이 외치기를, “화살통이 비었습니다.” 하니 공이 돌아보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네가 달아나고자 하느냐.” 하였다.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의리상 장군과 같이죽겠으니 장군과 함께 한 칼에 죽어서 소인이 도망가지 않음을 밝히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함께 죽었다. 조정에서 철현의 자손에게 10대 동안 세금을 면제시키고, 용만(龍灣)에 사당을 세워 철현의 화상을 공의 곁에 그려 두었다. 《몽예집》
○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버드나무 밑에 한 장수가 가장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았다. 조선에 만약 이런 사람이 두 서너 사람만 더 있었다면 대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명신록》
○ 응하가 버드나무 밑에서 기대어 적을 쏘고 그 밑에서 죽었기 때문에, 적이 그 나무를 ‘장군버들[將軍柳]’이라고 이름하였다. 《일사기문》
○ 효종조에 공의 아우 응해(應海)가 역옥(逆獄)의 공초에 관련되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응하의 아우이니,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곧바로 북병사(北兵使)로 임명하였다. 김장군 비문
○ 기미년 전쟁에 광해군이 이첨과 더불어 원수 홍립에게 형세를 보고 향배(向背 항복과 공격)를 정하라고 은밀히 명하였으니, 이는 오랑캐로 하여금 군사를 우리나라에 먼저 옮겨서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홍립 등이 전교를 받았기 때문에, 적을 만나도 애당초 힘써 싸우지 않고 전군이 오랑캐에 항복하였는데, 김응하만이 홀로 분연히 따르지 않고 별도로 그가 거느린 군사를 내어 힘써 싸우다가죽었으니, 그 의열(義烈)은 진실로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또한 명 나라 여러 장수들도 감히 따를 수 없는 바이니, 그 절의를 표창하여 후세를 가르침은 진실로 옳은 일이다. 그런데, 조정으로부터 시편(詩篇)을 널리 구하여 한 책을 만들어 내어 훈국(訓局)에 명하여 나라 안팎에 간행 배포하고, 이어서 중국에까지 들어가게 한 것은, 그 뜻이 전적으로 응하의 절의를 표창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은밀히 명했던 흔적을 숨기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이첨이 감히 상소한 것도 또한 여기에 원인이 있으니, 통분을 금치 못하겠다. 《동리소설(東里小說)》
○ 인조 기사년(1629)에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문희성을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더니,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문희성은 방어사(防禦使)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김응하의 절의를 본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홍립 등과 같이 항복하였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라를 욕되게 한 그 죄는 목을 베어도 부족하거늘, 국가에 법이 없어 아직까지 형벌을 받지 않았고, 지금에 경상우병사의 직임까지주게 되니 이것은 이웃 나라에 듣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목(除目 관리들의 임면에 관한 문건)이 한 번 나오기만 하면 여론이 더욱 놀랄 것이니, 파직하옵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사헌부의 장계에 또 이르기를, “영변 부사이일원이 싸움에 지고 적에게 항복하여, 짐승같이 대우하는 것을 감수하고, 요행히 포로로 돌아왔으니, 오랑캐가 이들을 종을 부리듯 하였는데, 지금 서로(西路)의 중요한 진(鎭)을 맡기니 만약 오랑캐가 들으면 우리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파직하옵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응천일기》
심하(深河)의 전쟁 기미년[광해군 11년 (1619)]ㆍ 김응하(金應河). (연려실기술 제21권) (2003. 6. 19. 태서(익) 제공)
○ 홍립이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하고, 중군(中軍)에 전 첨사오신남(吳信男)을, 종사관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 정응정(鄭應井)ㆍ전 군수이정남(李挺男)을, 별장(別將)에는 숙천 부사(肅川府使)이인경(李寅卿)ㆍ절충(折衝)이국(李?)ㆍ창성 부사(昌城府使)박난영(朴蘭英)ㆍ 절충유태첨(柳泰瞻)ㆍ절충신홍수(申弘壽)를, 향도장(嚮導將)에는 아이만호(阿耳萬戶) 조영립(趙英立)을, 이상은 도원수 휘하에속했다. 중군에는 우후(虞候)안여눌(安汝訥)을, 별장에는 절충김원복(金元福)ㆍ절충황덕창(黃德彰)ㆍ군관한응룡(韓應龍)ㆍ김흡을, 향도장에는 하서국(河瑞國)을, 이상은 부원수의 휘하에 속했다.중영장(中營將)에는 정주 목사(定州牧使)문희성(文希聖)을, 중군에는 강서 현령(江西縣令)황덕영(黃德?)을, 좌영장(左營將)에는 선천 군수(宣川郡守)김응하(金應河)를, 중군에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유길(李有吉)을, 우영장(右營將)에는 순천 군수이일원(李一元)을, 중군에는 운산 군수(雲山郡守)이계종(李繼宗)을, 연영장(連營將)에는 청성 첨사(淸城僉使)이찬(李?)을 임명했는데 이것을 10진영으로 나누었다. 《책중일록》
○ 유정은 양마전으로부터 관전으로 나아가고, 도사 교일기(喬一琦)는 우리나라 군사 만여 명을 독촉하여, 원수 강홍립ㆍ부원수 김경서ㆍ종사관 이민환ㆍ무장(武將)문희성ㆍ이일원ㆍ김응하 등을 거느리고 그 동쪽을 쳤다. 유정은 마가채 아귀를 지나 3백여 리나 깊숙히 들어가서 10여 채(寨)를 이겼으나, 4일에 적이 중국 군졸의 복장을 하고 유인하는 속임에 빠져서, 겹겹이 포위되어 군사가 드디어 무너지니,유정과 유초손(劉招孫)ㆍ교일기가 모두 죽고, 우리 장수 김응하도 힘써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다.《충렬록(忠烈錄)》
○ 저 두 사람(강홍립ㆍ김경서)는, “임금의 밀지(密旨)가 있다.”고 일컫고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우리 예의의 나라를 금수의 나라로 떨어뜨렸으니 만약 김응하의 죽음이 없었다면 장차 무엇으로 천하 후세에 말을 하였겠는가. 김장군의 〈묘비〉
○ 김응하는, 자는 경희(景羲)이며, 본관은 안동이요 철원에 살았다. 을사년에 무과에 뽑혔는데 신장이 8척이 넘고 힘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고 활쏘는 재주가 뛰어났다. 기풍이 헌칠하고 행동이 조용하여 무인의 거친 기질이 없었으며, 술을 몇 말이나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명신록》
○ 공 김응하 은 몸과 얼굴이 웅장하며, 큰 소 다리를 한꺼번에 먹고, 더욱 활쏘기를 잘하여 맞추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 선천(宣川) 사람이 북도(北道)에 수자리[戍] 가서 뛰어나게 잘 달리는 호마(胡馬)를 얻었는데, 공은 이 말을 타고 달리며 말 위에서 투구ㆍ갑옷ㆍ활집ㆍ화살통 등을 벗어 땅에 던지고, 말에서 뛰어 내려서는 낱낱이 주어서 다시 말 위에 뛰어 올랐으니, 그 날래고 용맹함이 이와 같았다.이에 선천의 백성과 군사들은 벌써 공의 재능에 감복하였고 나라 풍속이 평소에 건주(建州) 오랑캐를 가볍게 여겨서 모두 분발하여 이르기를, “묵작(墨綽) 세속에서 건주 오랑캐를 묵작(墨綽)이라 불렀다. 을 섬멸시킬 수 있으니 돌아와 공로로 책봉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늙은이와 어린이가 아니면 모두 공을 따라 출병해서, 이로 인하여 선천 백성들의 죽음이 많았다. 《정재집》
○ 심하(深河)의 전쟁에 그 가족과 영결하고 뒷일을 처리하고는 인신(印信)을 봉하여 고을 아전에게 주면서, “적을 만나면 내가 반드시 전사할 것이니, 이것을 차고 갈 수 없다.” 하였다. ○ 그때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유길(李有吉)이 김응하와 같이 죽었는데, 죽을 때에 한삼(汗衫)을 찢어서 ‘5월 5일 죽다.[五月五日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말 갈기에 매었더니, 말이 군중을 지나 뛰어서 3일 만에 집에 돌아가서 슬피 울고 곧 죽었다. 이에 그 말을 유길의 무덤 밑에 묻었다. 그 무덤이 파주 광탄(廣灘)에 있는데 지금 사람이 ‘말무덤’이라 이른다.《명신록》
○ 과거에 공 김응하 이 좌영 군사를 거느리고 김경서 군에 소속되었는데, 부차령(富車嶺)에 이르러 여러 군졸이 가볍게 전진하다가 패하니, 공이 수하 군사 3천 명으로써 말을 채찍질하여 진을 버렸다. 진이 이루어지자 홍립에게 고하기를, “속히 우영에 전령을 내려 맞아서 싸우게 하시오.” 하니, 홍립이 우영장 이일원을 시켜 서로 돕게 하였다. 공이 일원에게, “우리 군사는 험한 곳에 웅거하지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으나, 일원이 듣지 않더니, 적 수천 기병이 두 진 사이를 가로질러 끊자 일원은 도망쳤다. 얼마 후에 적 6만 명이 1리 밖에 진영을 맞대고 정예 병력을 뽑아서 그 앞을 침범하자 공이 포수를 시켜 일시에 적병에게 총을 쏘아 세 번이나 물리쳤더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에 가득 차서 포와 화살을 쏠 수가 없었다. 이에 적이 힘을 합하여 쳐들어오니, 아군이 즉시 전멸하였다. 공이 홀로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서 버드나무 밑에 기대어서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헛 나가지 않고 한꺼번에 여럿을 맞추니 적의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었다. 이때 공은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수없이 몸에 맞았지만, 두꺼운 갑옷을 입어서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적을 치며 홍립을 크게 꾸짖기를, “너희들이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리고 구원하지 않는구나.” 하였다. 또 칼이 부러지자, 빈 주먹으로 버티면서 더욱 분전하였는데, 이때 한 적병이 뒤에서 창을 던져서 드디어 땅에 엎어져 목숨이 끊어졌다. 그래도 오히려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한 기운이 한창 일어나니, 적이 서로 돌아보며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홍립 등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오랑캐 추장이 양 진의 시체를 묻게 하였는데, 공의 시체만은 썩지도 않은 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김응하 묘비《우암집》
○ 아군이 우미령(牛尾嶺)을 넘었다. 원수의 군영은 영(嶺) 위에 있고, 좌영은 영(嶺) 밑 평지에 있었는데 이튿날 날이 밝아서 보니, 명 나라의 패전한 군사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간간이 아군에 들어오니 아군이 떠들썩하여 좌영에서 명 나라 패잔병을 진중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갑자기 오랑캐가 많이 밀어닥쳐 먼저 좌영을 침범하므로 응하가 거마목(拒馬木)나무로 말이 넘어오지못하게 만든 것. 을 진 앞에 둘러치고 부대를 나누어 포를 쏘게 하니, 오랑캐 기병이 길이 막혀서 뚫고 오지 못하고 여러 번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갔다 하였다. 그때 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영(嶺) 위에 있으면서도 좌영에서 벌떼처럼 왕래하며 긴급함을 알려와도 망연히 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오랑캐 기병들은 패잔병의 말을 연이어 매어 놓고, 철기병이 말 뒤에 따라오면서 병기로 말을 몰아 내달려 거마목을 무너뜨리게 하였다. 이에 좌영에서 포를 쏘니, 오랑캐의 선두가 넘어지자 뒤따라온 적병이 연달아 밟고 넘어오는데, 좌영에서는 군사가 적어서 버티지 못하고 드디어 패하였다. 이리하여 응하가 말을 잃고 걸어서 큰 버드나무 밑에 나가 활로 쏘아 죽인 적의 수가 매우 많았는데, 이때 오랑캐 군사들은 공의 주위를 담처럼 둘러서고 숲같이 나열하여 있으면서도 응하가 서있는 백 보 안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하더니, 한참 후에야 오랑캐가 어지럽게 들어와서 응하가 전사하였다. 김려기(金麗奇)가 전한 《정재집(定齋集)》
○ 이전에 응하가 우미령(牛尾嶺)을 넘기 전에 어떤 늙은 할멈이 지나가며, “군사가 이 영(嶺)을 넘으며 안 될 것인데 왜 잠시 여기서 멈추지 않는고.” 하니, 응하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며 잡아다 베고 드디어 영을 넘더니 군사가 과연 패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神)이 먼저 고하였으나, 응하는 이미 죽을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김여기가 전한 《정재집》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응하가 화살이 다하여 말을 찾아 달아나려고 좌우를 돌아보았으나 그때는 이미 좌영 군교 지득남(池得男)이 공의 좋은 말을 훔쳐 타고 도망한 뒤였으므로 공이 드디어 죽었다. 공의 자손들이 이 일을 호소하여 득남을 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요행히 면하였다.” 하는데, 응하가 칼 한 자루와 활 한 개로 사방에서 오는 오랑캐를 혼자 감당하였으니, 반드시 살지 못할것은 화살이 다하기 전에도 알 수 있었던 일이며,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달아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인데, 자손들이 그 부조(父祖)를 그르침이 많도다. 《정재집》
○ 조정에서 김응하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용만(龍灣)에다 사당을 세우고 공의 화상을 그려 모셨더니 병자년 난에 오랑캐가 그 사당을 불태웠다. 이에 선천 백성들이 공을 위하여 선천에다 사당을 짓고 제사지내려 하니 부사가 두려워하고 꺼려서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김장군의 행적과 만사를 기록하여 〈충렬록(忠烈錄)〉이라 이르고, 세상에 간행하였고, 박정길(朴鼎吉)은 시를 짓기를, 백 길의 심하(深河)와 만 길의 산에는 지금까지 모래밭에 피 흔적이 얼룩졌네. 강 위에서 초혼(招魂)하지 말아라. 오랑캐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리. [百丈深河萬?山 至今沙?血痕斑 英魂且莫招江上 不滅匈奴定不還] 하였다. 《정재집》ㆍ《속잡록》
○ 명 나라 신종(神宗)이 조서로 김응하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그 처자에게는 백금을 내리고 〈묘비〉차관(差官)을 보내어 용만관(龍灣館)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글에, “방군(邦君) 어사(御史)와 호분 백윤(虎賁百尹)들은 들어라. 동번국(東藩國)의 충신 김응하 장군은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였으니, 짐(朕)의 마음에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상작(上爵)을 주노라.아아, 처음 이 추한 북쪽 오랑캐가 무엄하게도 남쪽으로 말을 먹여[南牧 남침] 사나운 무리를 거느리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였다. 더욱 내 계책이 정하였으니 어찌 감히 정벌하지 않으랴. 나의 대장(大將)과 우방(友邦)의 대군을 독려하여 하늘의 토벌을 받들어 행할 때 장군은 죽을 마음을 가졌고 사졸도 살 뜻이 없었도다. 전군이 모두 패하였으며 교활한 오랑캐가 승세를 타니 여러 장수들은 살기에 급급하였는데 장군만은 죽음을 바쳤도다. 장군의 의리는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나 장군의 죽음은 내가 부끄러워하노라. 아아, 안에는 중국이요 밖에는 이적(夷狄)이니 수양(修攘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것)함이 도리를 얻으면 오랑캐가 절로 복종하고, 수양(修攘)함이 도리를 잃으면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게 하나니, 과인이 생각하지 않고 덕을 밝히는 데 어두워 만리를 정벌하여, 나의 장졸을 몰아다가 오랑캐의 땅에 피와 살을 버리게 하였으니 과인이 부끄러워 하노라. 민심은 일정하지 않아 오직 은혜만을 생각하니, 어루만져 주면 나를 임금으로 여기나 학대하면 나를 원수로 여기는도다. 과인이 위로는 천심(天心)을 거스리고 아래로는 민심을 어기는 것을 피하지 아니하고 가볍게 큰 일을 일으켜 군수물자 운반에 원망이 일어나니 드디어 장군만이 혼자서 싸우는데 구원병이 없게 되었으니 과인이 부끄러워 하노라. 붉은 충심을 누가 본받으며 백골을 누가 거두리오. 당상(堂上)에 늙은 어미는 문에 기대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끊기고 규중에 홀로 된 아내는 망부석(望夫石)이 되었으니 내가 심히 슬퍼하노라. 비록 그러하나, 과인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워 해도 아무 쓸모가 없고 장군의 죽음은 죽어서도 빛이 있도다. 가을 서리 같은 큰 절개와 흰 태양 같은 맑은 충성은 만고토록 강상(綱常)을 붙들고 인신(人臣)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대의를 밝히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였으니, 장군은 비록 한 번 실패로 죽었으나 만고에 죽지 아니하였도다. 아아,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죽지 않았으면, 당(唐)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요, 문천상(文天祥)이 죽지 않았으면, 송(宋)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으면 내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다. 충신과 열사가 어느 시대에 없으리오마는 몸을 잊고 나라에 바친 그대 같은 이가 뉘 있으리오. 천지에 순수하고 강한 한 기운이 만고에 뭉쳐 있더니 장군은 이 기운을 타고나서 장군이 되었도다. 삼군(三軍)에게 장수는 탈취할 수 있으나, 필부의 마음은 탈취할 수 없고, 오악(五嶽)은 움직일 수 있으나, 한 절개는 움직이기 어려운 것을 이로써 알겠다. 만약 장수들의 충성심이 모두 장군과 같았으면 장군이 어찌 패하여 죽었으며, 과인이 어찌 오랑캐 추장에게 욕을 당하였으랴. 아아, 충성이 장군과 같고 용맹이 장군과 같고 지혜가 장군과 같았으나 고립되어 구원이 없었음은 과인이 죄로다. 덕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함은 옛부터 그런 은전이 있었으니 충신을 표창하고 절의를 드러내는 것이 오늘 날만 없으리오. 나는 선왕의 업을 계승하여 예물을 갖추어서 장군의 처자에게 사례하고 요동백(遼東伯)으로 증직하노니, 나의 작은 정성을 드러내어 구원(九原 저승)에 있는 충혼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속잡록〉
○ 세상에서 말하기를, “김응하가 죽으니 명 나라에서 요동백을 추봉하였다.” 하니 망녕된 말이다. 〈충렬록〉에 기록된 여러 사람의 만사와 전기에 모두 이런 내용이 없고, 명 나라 사람이 지은 〈충의록(忠義錄)〉에도, “조선 장관 김응하 등에게도 휼전(恤典)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것을 보아도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시골 선비가 조서를 모방한 것으로 그 글이 매우 상스럽고 졸려하였는데,조경남이 이것을 기록하여 드디어 잘못 전해졌다. 송시열이 응하의 신도비문을 지으면서 드디어 엄연히 요동백이라 일컬었으니 애석하다. 《몽예집(夢?集)》
○ 군보통인(軍保通引) 김철현(金鐵賢)이 공을 따라 바야흐로 버드나무에 기대어 활을 쏠 때에, 모든 군사가 다 흩어졌으나 철현만이 그 자리를 지키며 떠나지 않고 공의 갑옷 속에 엎드려 화살을 집어 주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철현이 외치기를, “화살통이 비었습니다.” 하니 공이 돌아보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네가 달아나고자 하느냐.” 하였다.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의리상 장군과 같이죽겠으니 장군과 함께 한 칼에 죽어서 소인이 도망가지 않음을 밝히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함께 죽었다. 조정에서 철현의 자손에게 10대 동안 세금을 면제시키고, 용만(龍灣)에 사당을 세워 철현의 화상을 공의 곁에 그려 두었다. 《몽예집》
○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버드나무 밑에 한 장수가 가장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았다. 조선에 만약 이런 사람이 두 서너 사람만 더 있었다면 대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명신록》
○ 응하가 버드나무 밑에서 기대어 적을 쏘고 그 밑에서 죽었기 때문에, 적이 그 나무를 ‘장군버들[將軍柳]’이라고 이름하였다. 《일사기문》
○ 효종조에 공의 아우 응해(應海)가 역옥(逆獄)의 공초에 관련되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응하의 아우이니,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곧바로 북병사(北兵使)로 임명하였다.(김장군 비문)
○ 기미년 전쟁에 광해군이 이첨과 더불어 원수 홍립에게 형세를 보고 향배(向背 항복과 공격)를 정하라고 은밀히 명하였으니, 이는 오랑캐로 하여금 군사를 우리나라에 먼저 옮겨서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홍립 등이 전교를 받았기 때문에, 적을 만나도 애당초 힘써 싸우지 않고 전군이 오랑캐에 항복하였는데, 김응하만이 홀로 분연히 따르지 않고 별도로 그가 거느린 군사를 내어 힘써 싸우다가죽었으니, 그 의열(義烈)은 진실로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또한 명 나라 여러 장수들도 감히 따를 수 없는 바이니, 그 절의를 표창하여 후세를 가르침은 진실로 옳은 일이다. 그런데, 조정으로부터 시편(詩篇)을 널리 구하여 한 책을 만들어 내어 훈국(訓局)에 명하여 나라 안팎에 간행 배포하고, 이어서 중국에까지 들어가게 한 것은, 그 뜻이 전적으로 응하의 절의를 표창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은밀히 명했던 흔적을 숨기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이첨이 감히 상소한 것도 또한 여기에 원인이 있으니, 통분을 금치 못하겠다. 《동리소설(東里小說)》
○ 4일에 명 나라 장수들이 먼저 행군하고 아군의 3영이 뒤따라 나아가니, 도로는 평탄하나 산골이 연이어 뻗어서,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려, 영졸(營卒)들이 각각 거마작(拒馬?)을 메고 앞으로 겨우 수십 리를 가서 부거지(富車地) 노성(好城)에서 60여 리의 거리에 있다.에 도착하니 대포 소리 세 번이 연달아 들렸다. 이에 홍립이 말을 빨리 달려 길 왼편 언덕에 올라 보니, 회오리 바람에 갑자기 일고,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기 때문에 곧 좌영은 맞은 편 높은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중영은 원수가 올라간 언덕에 진을 치고, 우영은 남쪽 변두리 한 언덕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따. 좌영은 이미 벌판에 진을 쳤었으나 적의 기병이 벌써 가까이 있어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근처 부락 백여 집에 명 나라 군사들이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이 따라 와서 진영 위에 덮었다. 잠시 후에 진 상공(陳相公)ㆍ우 수비(于守備)ㆍ교 유격(喬遊擊)이 필마단기로 와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가 모두 함몰되었고 제독도 전사하였다.” 하였다. 대개 유정이 새벽에, “가합령(家哈嶺) 밖은 적의 경비가 전혀 없다.”는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빨리 달려 먼저 가서 수십 리에 걸쳐서 군사를 나누어 부락을 약탈하게 하여 군대의 대오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랑캐 장수 귀영가(貴盈哥)가 3만여 기를 거느리고 서로에서 밤새 내내 달려와 새벽에 가합령을 지나서 산골짜기에 매복하였다가, 불의에 뛰쳐 나와서 앞 뒤를 가로막아 끊으니 명 나라 군사의 여러 진영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채 모두 함몰되었다고 한다. 우 수비와 진 상공은 즉시 달려 가고 교 유격은 말하기를, “나는 귀국 군사를 감독하니 갈 수 없다.” 하였다. 연기와 먼지 속을 바라보니, 적의 기병이 크게 닥치는데, 양쪽 날개처럼 멀리 에워싸고 먼저 아군의 좌영을 치니 홍립이 전령을 내려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달려와 구원하게 하여 좌영과 진을 연합하게 하여서 겨우 대열을 이루자, 적의 기병이 달려와 충돌하니, 기세가 비바람과 같았다. 포와 총을 한 번 쏘고 나서 두 번째 화약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은 벌써 진중에 들어와 순식간에 좌우영이 모두 함몰되었다. 이에 선천 군수김응하, 운산 군수이계종(李繼宗), 영유 현령이유길(李有吉), 우영천총(右營千摠)김요경(金堯卿)ㆍ오직(吳稷)ㆍ좌영천총김좌룡(金佐龍)은 모두 전사하고, 좌영천총신충업(申忠業)은 도망가고, 우영장 순천 군수이일원(李一元)은 벗어나 달려서 중영으로 들어왔다. 《책중일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