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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7) <국가재건과 청의침입>에서 (2002. 12. 28. 윤만(문) 제공) 손바닥 검사후 항복군 4,500명을 죽인 이유?
【안동김문의 요동백 김응하장군이 1619년 3월 2일 무순 근처 사르후 富洞(부동)의 전투에서 순국하신 직후의 사건을 소개하면서 약소국가 백성의 비애를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 사건은 오늘 이곳에 살고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강홍립의 조선 원병은 싸우는 체하다가 전세가 불리해 지자 군사를 일단 산골에 숨겨두고 투항을 통고하면서 “우리 군사는 마지못해 출병했다”는 임금의 뜻을 전달했다. 후금군의 장수는 사자와 통역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화의가 성립된 후 우리 군사들은 산골을 내려와 며칠만에 처음 음식을 먹으며 안도했다. 후금의 장수가 도원수를 만나보기를 요청해 강홍립이 예복을 입고 그들 진영으로 갔다. --후금군은 강홍립이 들어오기에 앞서 旗手(기수)를 보내 조선 군사의 무장을 해제했다. 장수에게만 말타는 것을 허락한 뒤 군사를 양떼 몰듯하여 자기들 진영으로 데리고 갔다. 후금의 장수는 우리 군사를 射場(사장)에 모아 놓고 손바닥을 검사해 살결이 고운 군사와 거친 군사로 나누어 거처를 별도로 지정했다. 양반과 상인을 구별한 것이다. 그들은 양반 출신 군사의짐을 뒤진 끝에 봇짐속에서 후금군의 머리 세 개를 찾아냈다. 또 양반 출신 군사 가운데서 주인의 딸을 죽이고 도망치려한 자와 강간하려다 발견된 자를 가려냈다. 후금군은 결국 양반 출신 군사 4,500명을 죽여 버렸다. 왜 이들을 죽였을까? 바로 이들이 尊明主義子(존명주의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홍립 등 장수들도 억류당했으며, 죽고 도망친 군사를 뺀 나머지 8천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출전 : 국가재건과 청의침입/한길사/이이화/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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