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김응하(金應河)

p05.png 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6) <대동기문(大東奇聞)>에서

 

(1) 대동기문에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  

(2003. 1. 4. 주회(안) 제공)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인조 때까지의 명장 46명의 전기(傳記)를 엮은 책---에서 인용한 김응하 장군 관련 글이 실려 있습니다.

 

■ 新完譯 大東奇聞 上,中,下 (2000, 이민주 역, 명문당)

中 p241 金應河가 나무에 의지해 죽다.

김응하는 철원사람이니 자는 景義이다. 신장이 8척이 넘고 風儀가 俊偉하고 기개가 軒昻(헌앙)하며 술을 두어 말 마셔도 어지럽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백사 이항복이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선천군수로 옮겼더니 부임하자 인재를 모으는 것으로 急務를 삼으니 士庶들이 그 의리에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어서 모두 응하를 위하여 한번 죽고자 했다.

己未 深河(심하)싸움에 좌영장으로 강홍립의 節制를 받게 되었는데, 떠나기에 임하여 그 아우 응해가 따라가려 하자 응하는 말하기를

"형제가 모두 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

하여 힘써 말리고 집사람과 결별하고서 강을 건너 심하에 이르러 청나라 사람과 만나 힘써 싸우다가 기운이 다하여 나무에 의지하여 죽으니 명나라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요동백을 증직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영상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무이다. <명장전>

 

●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인조 때까지의 명장 46명의 전기(傳記)를 엮은 책.

구분 : 목활자본

저자 : 홍양호

시대 : 조선 후기(1816)

소장 :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목활자본. 6권 3책. 1816년(순조 16) 인간(印刊).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책머리에 1794년(정조 18)에 저자가 쓴 자서(自序)가 있다.

 

내용은 권1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장보고(張保皐)·심나(沈那), 고구려의 부분노(扶芬奴)·을지문덕(乙支文德)·안시성주(安市城主),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 고려의 유금필(庾刃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을, 권2에 오연총(吳延寵)·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박서(朴犀)·김경손(金慶孫) ·이자성(李子晟)을, 권3에 김방경(金方慶)·한희유(韓希愈)·원충갑(元沖甲)·안우(安祐)·정세운(鄭世雲)·안우경(安遇慶)·정지(鄭地)를, 권4에 고려의 최영(崔瑩)을 비롯하여 이지란(李之蘭)·최윤덕(崔潤德)·이종생(李從生)·어유소(魚有沼)·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을, 권5에 곽재우(郭再祐)·정문부(鄭文孚)·황진(黃進)·휴정(休靜:西山大師)·정기룡(鄭起龍)·김시민(金時敏)을, 권6에 이정암(李廷鐫)·임중량(林仲樑)·김덕령(金德齡)·정충신(鄭忠信)·김응하(金應河)·임경업(林慶業)·정봉수(鄭鳳壽)· 림(柳琳) 등을 수록하였다. 기술(記述) 방법은 정사(正史)의 열전형식을 본떴다. 자서(自序)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홍양호 洪良浩 [1724~180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 풍산(豊山)

호 : 이계(耳谿)

별칭 : 자 한사(漢師), 초명 양한(良漢), 시호 문헌(文獻)

활동분야 : 정치, 문학

주요저서 :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본관 풍산(豊山). 자 한사(漢師). 호 이계(耳谿). 초명 양한(良漢). 시호 문헌(文獻). 1747년(영조 23) 진사를 거쳐 1752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 ·수찬 ·교리를 지낸 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심해지자 경흥(慶興)부사로 나갔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 한성부우윤 ·대사간을 지내고, 178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 1794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조판서가 되고, 1799년 양관(兩館) 대제학을 겸임, 1801년(순조 1) 중추부판사도 겸하였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갱장록(羹墻錄)》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대구형(戴衢亨) ·기효람(紀曉嵐) 등 학자와 교유, 귀국 후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산림녹화에 주력하였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의뢰, 벚나무 묘목을 가져다가 우이동(牛耳洞)에 심었다. 글씨는 특히 진체(晉體) ·당체(唐體)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이계집(耳溪集)》이 있다.

 

편저에 《만물원시(萬物原始)》 《육서경위(六書經緯)》 《군서발배(群書發排)》 《격물해(格物解)》 《칠정변(七情辨)》 《목민대방(牧民大方)》 《향약절중(鄕約折中)》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등 다수가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2) 金應河倚樹而死 - (2003. 12. 22. 윤만(문) 제공)

 

金應河,는 鐵原人,이니 字는 景羲,라 身長,이 八尺餘,요 風儀俊偉,하고 氣岸,이 軒昻,하고 飮酒數斗不亂,이러라 年二十五,에 武科,하다 白沙李恒福,이 一見奇之,하야 超遷宣川郡守,러니 到任,에 以收拾人才,로 爲急務,하니 士庶莫不堪義,하야 皆欲爲應河一死,러라 己未深河之役,에 以左營將,으로 受姜弘立節制,러니 臨行,에 其弟應海欲隨去,하니 應河曰兄弟俱死無益,이라 力止之,하고 與家人訣別,하고 渡江之深河,하야 與淸人遇,하야 倚樹而死,하니 明帝聞之,하고 贈遼東伯,하니 朝廷,이 贈領相,하고 諡忠武,라하다(名將傳)

 

☞ 倚(의지할의), 岸(언덕안), 昻(오를앙), 莫(없을막), 隨(다를수),

 

俱(함께구), 訣(이별할결), 遇(만날우)

김응하가 나무에 의지해 죽다 -

김응하는 철원사람이니 자는 경의이다. 신장이 8척이 넘고 풍의가 준위하고 기개가 헌앙하며 술을 두어 말 마셔도 어지럽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백사 이항복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선천군수로 옮겼더니 부임하자 인재를 모으는 것으로 급무를 삼으니 사서들이 그 의리에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모두 응하를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했다.

 

기미 심하 싸움에 좌영장으로 강홍립의 절제를 받게 되었는데, 떠나기에 임하여 그 아우 응해가 따라가려 하자 응하가 말하기를, “형제가 모두 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하여 힘써 말리고 집 사람과 결별하고서 강을 건너 심하에 이르러 청나라 사람과 만나 힘써 싸우다가 기운이 다하여 나무에 의지하여 죽으니 명나라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요동백을 증직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영상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무이다.<명장전>

 

《출전 : (원문) 大東奇聞-全-/學民文化社/1993/卷之三 pp9 (국역) 신완역 대동기문/명문당/2000/(중)pp241~242》

 

김철현(金鐵賢)의 십세손까지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다 -

김철현은 평안도 선천부의 통인이었다. 열아홉 살에 갓 장가든지 몇 개월도 못되어 김응하를 따라 출전하여 늘 곁에 있으면서 시중을 들었다. 싸움 터에서 응하의 갑옷 뒤에 엎드려 화살을 건네주다가 화살이 다 떨어져 버렸다. 응하가 큰 칼을 빼어들고 육박전을 벌이다가 몸에 수 십 군데 창을 맞자 철현을 돌아보며, “도망하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철현은, “소인이 마땅히 사또와 함께 죽을 것이니, 바라옵기는 사또와 한 칼 아래 죽어 소인이 비겁하게 도망하지 않았음을 밝히고자 합니다.”라 대답하고 마침내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 뒤, 조정에서 철현의 십세손까지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고, 의주에 사당을 세워 응하의 곁에다 철현의 초상을 그려 안치하였다.<명장전>

 

《출전 : (국역)쉽게 풀어쓴 대동기문(하) pp79~80/국학자료원/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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