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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21) <역사 평론가 이덕일의 평론> (2004. 11. 8. 정중(도) 제공) (1) 重刊忠烈錄 古 4650-168 1798년(정조 22년) 重刊. 金魯奎(朝鮮) 編. 1책(零本). 肖像. 圖. 木版本. 32. 5 21cm.
선조∼광해군대의 무신으로 명나라를 도와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 한 金應河(1580∼1619)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그의 행적과 관련 기록들을 묶어 편찬한 책.
김응하의 본관은 안동이고 고려의 명장 方慶의 후손으로 자는 景義이며 철원 출신 이다. 1604년(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 소부터 그의 재주를 아끼던 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박승종이 전라관 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三守郡守·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 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金景瑞의 휘하 에 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 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천명의 휘하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神宗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 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忠武이다. ≪충렬록≫은 1621년(광해 13)에 初刊되었고 다 시 1798년(정조 22)에 중간되었다. 중간충렬록의 서문은 閔鍾顯이, 초간충렬록의 서문 은 李廷龜가 썼다. 卷首를 비롯하여 모두 8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은 이 중 4 권1책만이 남은 영본이다. 목록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首는 김응하의 초상과 전투 당시를 표현한 忠烈錄圖, 그의 世譜, 遺墨, 명의 신종황제가 내린 詔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忠烈錄圖는 擺陳對賊, 援 督戰, 矢盡劒擊, 兩帥投降의 제목을 가진 4개의 그림 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에 대한 해설에서 이 중간본의 충렬록도는 舊本의 것과 약간 의 차이가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구본은 遇賊擺陳, 倚柳射賊, 死後握劒, 兩帥投降이 라는 제목을 달아 당시 상황을 표현하였고, 또 구본의 네번째 그림의 밑에는 龍灣祠宇 圖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이 사당이 없어지고 따로 鐵原, 宣川, 昌城, 鍾城, 慶源 등지에 사당이 있어서 다 그릴 수 없으므로 뺐다고 하였다. {권1}에는 贈判書致祭文, 贈領議政致祭文, 鐵原褒忠祠賜額致祭文, 宣川義烈祠賜額祭文, 昌城忠烈祠賜祭文 등의 賜祭文과 御製詩를 실었고, {권2}에는 旌褒事實을 {권3}에는 遺文, 碑文, 告祝祭文 등 을 실었다. {권4}에는 諸家記述이라는 제목으로 明人 茅元儀가 찬한 ≪武備志≫ 朝鮮 考·명인 曹學佺이 찬한 ≪名勝志≫ 寧遠衛篇·≪兩朝從信錄≫·金堉 찬의 ≪海東名臣 錄≫·≪定齋集≫·≪月沙集≫ 등의 문헌기록에서 김응하에 관한 사실을 발췌하여 실 었다. 그 이하 목록에 보이는 傳·箋을 실은 {권5}, 悼詩를 묶은 {권6}, 詩文別錄을 묶은 {권7}, 附錄의 {권8}은 남아있지 않다. 목판 그림은 비교적 사실적인 표현으로 당시 금나라와 조선의 병사들의 모습과 무기, 전투 장면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 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희라) (9-1)
(2) 忠烈錄
<古 貴 923. 55-G417c> 朴承宗 編, 1621년(광해군 13년) 간행 2권 1책, 목판본, 20. 7cm. x 32. 7cm.
1619년(光海君10) 明의 요청으로 建州 後金을 치는데 원병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전 사한 宣川府使 金應河(1580-1619)의 공훈을 기리려고 편찬한 책. 목판본으로서 간행 년대는 이이첨이 쓴 서문의 刊期로 볼 때 光海君 13년(1621)으로 추정된다. 간행된 시 기가 비교적 오래된 탓인지 책장의 4면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서두에는 大北派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하던 李爾瞻의 서문이 실려 있다. 당시 後金의 기세는 날로 극성 하여 明은 遼東의 대부분을 失陷당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경험이 있던 楊鎬 , 劉綎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大軍을 일으켜 후금의 본거지를 토벌하려 했다. 동시에 조선에 대해서도 원군의 파병을 종용하였는데 光海君은 마지못해 姜弘立, 金景瑞 등에 게 약 1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게 했으나 '深河의 전투'에서 朝明연합군은 대패 하고 강홍립 등은 후금군에 투항했던 것이다. 강홍립 등의 투항은 明의 의구심을 더하 기에 충분했고 동시에 出兵 회피를 비난했던 조선의 在野 사대부들을 격동시켰다. 바 로 이러한 시점에서 '金應河가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조선정부로서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이러한 논리는 이 책 의 전면에 흐르고 있다. 곧 책 전체가 김응하를 찬양하는 내용 일색으로, 光海君에게 김응하를 顯彰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인 [進忠烈錄箋], 朴承宗이 쓴 祭文, 朴希賢이 쓴 傳記文 성격의 [金將軍傳], 이이첨이 쓴 [哀金將軍歌], 韓纘男이 쓴 발문, 沈喜壽 朴 弘耉 趙挺 李好閔 柳希奮 李慶全 李廷龜 尹昉 柳夢寅 洪命元 李 光 權盼 金 李安訥 등 당시 요인들이 쓴 추모시 등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밖에도 함께 참 전한 명나라 장수들과 전사한 將卒들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쓴 [祭劉都督文], [祭喬遊 擊文], [戰亡將士賜祭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金將軍傳]에서 '그가 後金軍의 칼을 맞고서도 버드나무에 의지해 끝까지 항전했다'라든지 '죽어서 시신이 되어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으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라는 이야기를 후금 병사의 傳聞으로 전하고 있는 것 등은 김응하의 공훈을 강조하려는 본서의 의도에서 볼 때 주목되는 대목들이다. 이것은 책의 도처에서 李廷龜를 위시한 非北人系 학인들 이 후금군에게 투항했던 姜弘立 金景瑞에 대해 가차없이 매도하고 있는 것과도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본서는 17세기 전반 '明淸交替'라는 국제적 전환기에 극히 미묘했던 조선과 명의 관계,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녔던 華夷觀의 실제적 모습, 그리고 외교문제를 둘러싼 조선 조정의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 겨진다. (한명기)
(3)[한국사 바로보기] ④明 출병요구와 광해군 등거리 외교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논란이 일고 있지만 우리나라 외국 파병의 역사는 400년 전으로 올라간다. 1616년,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대금국(大金國·후금·청나라)을 선포한 뒤 명나라에 조공을 중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위협을 느낀 명나라는 조선군과의 협공을 통해 후금을 제압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광해군은 그동안 중립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많은 정보를 입수한 덕분에 두 나라의 정세를 훤히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우리 군사를 죽음의 땅으로 보낼 수 없다”고 결심하고 파병을 피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광해군의 속셈은 조선군대를 국경을 넘기지 않고 국경지대에서 위세만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왜란 이후 경제가 피폐해졌고, 아직도 일본의 침략위협이 있다”고 전제하고 “더욱이 원병을 요청하는 황제의 칙서가 없다”는 점을 문제삼은 국서를 명나라 사신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는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와 출병에 동조하는 조정 대신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했다. 결국 광해군은 1만3천여명의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그러면서 강홍립을 은밀하게 불러 “정세를 잘 살펴보고 행동을 결정하라”(觀形向背)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또 강홍립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전하여 군사를 죽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강홍립은 여진어에 능통한 통역을 대동하고 군사를 이끌고 느리게 움직였다.
그는 서울에서 출발해 반년이 걸린 1619년 1월말쯤에야 압록강을 넘어갔다. 명이 요구한 말 1,000필도 순차로 압록강을 넘어갔다. 명군 장수들은 저마다 조선군을 끌어가려 했으나 조일전쟁 때 조선에서 활약했던 유정의 휘하에 편입되었다.
명군들은 연달아 패전했다. 조선군은 1616년 3월 심하에서 후금군을 패주시킨 일도 있었으나 사르후에서는 명군을 따라 장수 김응하와 군사 수천명이 전사하는 사태를 맞이했다. 명군 지휘관인 유정이 일선에서 죽었다.
- 대신들도 모르게 전황파악 -
강홍립은 통역을 누르하치에게 보내 “마지못해 출병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군사를 산골에 숨겨두고 투항을 통고했다. 후금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대들과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싸우겠소”라는 말로 화답했다.
후금에 인질로 잡힌 강홍립은 모든 전투과정을 적은 장계를 여러 차례 조정에 보고했다. 보고서를 쓴 종이를 잘라서 노끈으로 꼬아 위장해서 보냈다. 광해군은 이런 정보를 입수해 외교정책을 수립하는 자료로 활용했다. 누르하치도 조선군의 투항에 흡족하여 국서를 보내 사르후전투의 승리를 알리고 조선의 출병은 사세로 보아 어쩔 수 없었음을 언급하고 계속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해왔다. 이런 과정을 조선 조정의 대신들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보고서를 중계한 평안감사 박엽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명군이 그 내막을 알 리 없었다.
요동 일대가 후금의 수중에 들어가자 명나라 주민들이 조선 땅으로 몰려들었다. 1622년까지 12만명을 혜아렸다. 그들 속에 모문룡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조선에서 군사를 모아 요동수복의 구호를 내걸고 조선으로부터 식량과 군수물자를 지원 받았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또 조선이 명나라에 등을 돌리고 후금 쪽으로 기우는 사태를 막기 위해 견제·감시하는 역할도 자임하고 있었다. 모문룡은 한때 의주 건너편에 있는 요동의 진강을 점령했으나 곧 후금군에 밀려 다시 조선 땅으로 도망쳐왔다. 후금군은 모문룡을 잡으려 평안도 용천까지 침입해 왔다.
광해군은 큰 위협을 느끼고 교묘한 술수를 부렸다. 모문룡을 간상배로 판단한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섬으로 들어가 몸을 피하고 재기를 도모하라고 권고했다. 그리하여 모문룡은 압록강 입구에 있는 가도로 들어갔다.
광해군은 그런 모문룡을 홀대하여 거의 지원을 끊었다. 광해군의 전술은 명나라에 대해 모문룡의 거점을 확보해 주었다는 변명거리를 만들고 후금에 대해서는 모문룡의 죽지를 부러뜨렸다는 핑곗거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광해군은 심하전투에서 죽은 김응하의 충절을 기려 호조판서를 내리고 모든 신하들에게 공적을 찬양하는 시를 짓게 한 뒤 명나라 사신들이 왕래하는 길가에 사당을 세웠다. 이런 일을 벌여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 변함없음을 알리려는 의도였다. 더욱이 찬양시집인 ‘충렬록’을 대량으로 찍어 요동 일대에 배포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읽게 했다.
- 2차파병요구 단호히 거절 -
당시 요동지방에는 “조선과 여진이 남몰래 화친을 맺었다”는 풍문이 끊임없이 떠돌았다. 이런 풍문을 불식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또 광해군은 조선이 탐지한 후금에 관한 정보를 명나라 사신들에게 들려보냈다. 모두 광해군의 양면외교술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후금에 보낸 국서와 강홍립의 행동이 차츰 알려지자 벼슬아치들은 봄 논의 개구리들처럼 와글거렸다.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려는 안 된다고 떠들면서 광해군의 정책을 모조리 방해했다. 광해군은 “나는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면서 노심초사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가?”라고 심경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광해군의 애타는 심정을 남들은 몰라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명나라는 후금과 전쟁을 벌이면서 패전을 거듭했다. 그런 속에서 조선에 대해 해마다 원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칙사 원견룡의 위협과 공갈에 맞서, 조선군대가 압록강 일대를 지켜 명나라가 왕래하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 명나라를 돕는 길이라고 언급하여 2차 원병 파견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1623년 광해군이 무력(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 사정은 어떻게 돌아갔던가? 인조와 인조를 추대한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군부의 은혜를 저버린 ‘망나니’라고 떠들었다. 그들은 평안감사 박엽과 의주부윤 정준 등 후금의 통로를 맡은 자들을 재빨리 처형했다. 이를 본 명나라 장수들은 “통쾌한 일”이라고 찬양했다. 그들은 떠오르는 후금과의 교류를 철저히 끊고, 꺼져가는 명나라에 기울었다. 모문룡 같은 간상배에게 쌀 80만석을 보내주는 따위 등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요동에 위축되어 있던 명나라 군사들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유발하여 나라를 다시 쑥대밭으로 만들고 민생을 도탄으로 몰아넣었다.
명나라는 끝내 멸망했으며 후금은 더욱 힘을 키워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차지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우리 역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4) 광해군 즉위에 대한 시비
* 명의 파병요청과 조선 지배층 이는 조선측의 거부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누루하치는 1618년(광해군 10) 4월 명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 원한'을 내세우며 요충지역인 무순(撫順)을 함락시킴으로써 명나라에 정면도전했다.
명청교체의 서막이었다. 이에 분개한 명나라는 정벌군을 조직하면서 조선에도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광해군은 파병에 반대했으나 서인과 남인은 물론 대북의 이이첨까지 향명대의(向明大義)에 따른 원병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고, 소북의 박승종.임연과 서인 윤휘, 남인 황중윤 등 극소수만이 광해군을 지지했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여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광해군에게 중요한 것은 원병 파견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국방력 강화였다. 그는 여진어 역관 하세국(河世國) 등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으며 화기도감(火器都監)을 다그쳐 조총과 화포를 개량하게 했다. 광해군 4년 호서(湖西)의 조천종(曺天宗)이 만든 파진포(破陣砲)는 이렇게 만들어진 신무기였다. '파진포를 쏘아 보니, 아륜철(牙輪鐵)이 돌과 서로 마찰하면서 금세 저절로 불이 일어나 철포가 조각이 나고 연기와 화염이 공중에 가득하였으며 불덩이가 땅 위에 닿으면서 절반쯤 산을 불태웠습니다.
만일 적이 오는 길에 다수를 묻어 둔다면 승패의 변수에 크게 유익하겠습니다. … 비록 수천 명의 군사일지라도 한 발의 포탄이면 소탕할 수 있으니, 싸움터의 무기로는 이보다 교묘한 것이 없습니다("광해군일기" 4년 11월 12일)' 그러나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명나라의 거듭된 요청과 '재조지은(再造之恩: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준 것)'에 보답해야 한다는 조선 지배층의 요구에 밀려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조명군 1만여명은 광해군 11년(1619) 2월 압록강을 건넜는데, 여기에는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5천여명의 조총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조총수의 분전으로 승리했으나 두 번째 전투에서는 대패했다. 버드나무에 의지해 싸우다 전사해 '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고 불렸던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를 비롯해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을 비롯해 수천 명의 장졸이 전사했다. 그것도 명 장수 두송(杜松)이 공명심으로 약속을 어기고 먼저 진군하는 바람에 당한 참패였다.
*후금과 화의를 맺은 이유 이때 강홍립이 항복함으로써 나머지 장졸의 목숨을 건졌지만 이후 극심한 시비에 휘말려야 했다. 서인들이 작성한 "광해군일기"의 사관(史官)은 항복이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會寧府)의 시장 장사꾼 호족(胡族)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 그 장사꾼 호족이 미처 돌아가기도 전에 역관 하서국이 먼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갔으므로 노추(奴酋:후금 국왕)가 의심하여 감금하였다.
얼마 후 회령의 통보가 이르자 마침내 하서국을 석방하고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체로 미리 예정된 계획이었다 ("광해군일기" 11년 4월 2일)' 그러나 평안감사 박엽(朴燁)은 "적이 먼저 하서국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했다("광해군일기" 11년 3월 12일)"고 후금에서 먼저 청했다고 전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광해군이 일개 시장 장사꾼에게 중대한 국사를 먼저 통보했다는 주장은 의심스럽지만 서인들은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뜻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전사한 김응하 추모문집인 "충렬록(忠烈錄)"를 편찬하는 등 대대적인 전사자 추모사업을 벌여 자신에게 쏠리는 의혹을 불식시키려 했다. 그러면서 명의 재파병 요청은 끝내 거부했다. 대신 평안도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오히려 명나라를 돕는 길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러나 광해군 12년(1620)부터 쿠데타를 준비한 서인들에게 이런 화해조치는 쿠데타의 호기일 뿐이었다. 사실 인조반정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쿠데타였다. 광해군 14년(1622) 12월부터 조정에서는 이귀와 김자점을 역모로 처벌하라는 주장이 빗발쳤던 것이다.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가 합계하기를 '이귀가 그의 인척(姻戚)인 김자점과 함께 서궁(西宮:인목대비)을 부호한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말들이 자자합니다. … 이귀.김자점을 잡아다가 가두고 끝까지 추궁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하소서 ("광해군일기" 14년 12월 24일)'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당파싸움으로 치부했고, 쿠데타 당일(재위 15년 3월 12일) 이이반(李而頒)이 '오늘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변(上變)했음에도 무시했다. 유희분.박승종 등이 두세 번 조치를 취하라고 청하자 병조판서, 입직당상, 네 포도대장, 훈련 도감 대장을 비밀리에 불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연서역에 모여있던 반군이 창의문을 지나 창덕궁 문 밖에 이르자 궁성의 호위를 맡은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지팡이를 버리고 맞이했으며 천총 이확(李廓)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다급해진 광해군은 젊은 내시의 등에 업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 도망갔다가 체포됨으로써 쿠데타는 반정으로 변모했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출교지는 쿠데타 세력들의 대외인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이렇게 즉위한 인조정권이 숭명반청(崇明反淸)의 기치를 드높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뜨는 청나라를 반대하고 지는 명나라를 숭상했던 이 정책의 결과는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과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이었다.
현실을 무시한 외교정책으로 국토는 또다시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350여년 후인 지금. 광해군 때처럼 외교문제는 극심한 국론분열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핵심은 단연 미국과 북한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 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어디가 명나라이고, 어디가 청나라인가. 현재의 정부와 야당 중 어느쪽이 광해군이고 어느쪽이 인조인가. 아마 서로가 자신은 광해군이고 상대방을 인조라고 비난하고 싶을 것이다.
광해군인지 인조인지의 기준은 이념이 아니라 국익을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외교는 내치의 연장이란 말처럼 국내 정치의 반영이다. 우리는 동맹을 선택할 것인가 자주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 중간지대를 선택할 것인가.
(5) 명의 파병요청과 광해군 무순 점령에 경악한 명 조정은 즉각 정벌군을 조직하면서 같은 해 윤4월 조선에도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천자의 나라, 부모의 나라를 오랑캐가 공격한데 분개한 조선의 지배층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모두 파병에 찬성했다. 서인 남인은 물론 이이첨 등 대북까지도 원병 파견을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광해군은 이를 천자의 나라와 오랑캐의 싸움이 아니라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싸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인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점에서 광해군과 조선의 지배층 사이에는 커다란 대외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광해군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은 박승종, 임연 등의 소북 일부와 서인으로는 윤휘(尹暉), 남인으로는 황중윤 뿐이었다. 「이때 왕이 징병을 요청해 온 일에 응하고 싶지 않아 누차 비국(備局:비변사)에 분부하여, 요동(遼東) 광령(廣寧)의 각 아문에 자문(咨文)을 보내 저지해 보도록 하였는데, 묘당에서 의견을 고집하며 따르지 않자 조정의 의논을 널리 거두라고 명한 것이었다. 이에 2품 이상이 아뢰면서 목소리를 합쳐 같은 내용으로 청하였으니, 비록 간사한 원흉이라 하더라도 대의(大義)를 범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윤휘(尹暉)가 앞장서서 보내면 안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황중윤(黃中允) 조찬한(趙纘韓) 이위경(李偉卿) 임연의 무리는 왕의 의중을 탐색하여 아첨하려고 속임수로 가득 찬 도리에 어긋나는 말로 공공연히 헌의(獻議)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기미년 전역(戰役)에서, 역관을 보내 오랑캐와 통하고는 두 원수(元帥)가 투항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끔 하고 말았다. 안으로는 군모(君母:인목대비)를 감금하고 밖으로는 황명(皇命)을 거부하여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말았는데‘이러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 하겠다.’『광해군일기』10년 윤4월 26일」 이처럼 광해군은 외로운 가운데서 파병을 저지하려고 애썼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겨우 20여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후금이 무순을 공격하기 전부터 여진족의 동태에 신경쓰던 광해군은 일찍부터 정보습득과 군비확장에 나섰다. 광해군은 즉위년 8월에 이미 만포(滿浦)의 향통사(鄕通事:여진역관) 하세국(河世國) 등을 여진에 보내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으며, 화기도감(火器都監)에서 조총과 화포는 물론 신무기를 생산하게 했다. 광해군 4년 호서(湖西)의 조천종(曺天宗)이 만든 파진포(破陣砲)는 새로운 신무기였다. “파진포를 쏘아 보도록 하니, 아륜철(牙輪鐵)이 돌과 서로 마찰하면서 금새 저절로 불이 일어나 철포가 조각이 나고 연기와 화염이 공중에 가득하였으며 불덩이가 땅 위에 닿으면서 절반쯤 산을 불태웠습니다. 만일 적이 오는 길에 다수를 묻어 둔다면 승패의 변수에 크게 유익하겠습니다. 적이 오는 길에 묻어 두었다가 스스로 부딪쳐 불이 나도록 하고 우리 군대는 다만 요해처에 싸움에 대비해 묻어 두기만 하면 됩니다. 가령 적들이 이 길을 경유하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겠지만 만일 이 길로 경유한다면 비록 수천 명의 군사일지라도 한 발의 포탄이면 소탕할 수 있으니, 싸움터의 무기로는 이보다 교묘한 것이 없습니다.(『광해군일기』4년 11월 12일)” 광해군은 또 조총수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후금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조청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준비가 채 되기도 전에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과‘재조지은’에 보답해야 한다는 조선 지배층의 요구에 밀려 조명군(助明軍)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군의 패전과 항복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조명군 1만여명은 광해군 11년(1619) 2월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들어갔다. 명(明) 장수 경략(經略) 양호(楊鎬)의 지휘를 받게 된 조선군은 3월 2일 심하(深河)에서 후금군과 조우하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때 만난 후금군을 기병 3백명이라고 기록했으나 이민환의 『책중일록(柵中日錄)』은 기마병 6백명이라고 적고 있다. 이 첫 번째 전투에서는 조선군 조총수가 후금군을 격퇴했으나 3월 4일 명군을 따라가던 조선군은 부차에서 후금군 3만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것도 명의 좌익중로군 사령관 두송(杜松)이 공명심 때문에 먼저 진군하다가 괴멸되는 바람에 조선군까지 기습당해 패전한 것이었다. 이것이 유명한‘심하전투’인데 이 전투 이후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후금에 항복했다. 그런데 이 항복이 미리 계획된 것이냐가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광해군이 미리 항복을 지시했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평안감사 박엽의 장계에 따르면 후금에서 먼저 화의를 청해왔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나라의 호역(胡譯:여진어 역관)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경서(金景瑞)가 먼저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약속을 하고 돌아왔는데 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와서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중국의 패잔병 수백 명이 언덕에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이 우리 군대에다 대고 ‘너희 진영에 있는 중국인을 모두 내보내라’고 소리치고, 또‘중국 진영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소리쳤습니다.(『광해군일기』 11년 3월 12일)」
조선군은 결사항전 하려는데 후금에서 먼저 강화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때 강홍립이 진영에 있는 명나라 사람들을 보내자 후금군이 모두 타살한 것은 후금에서 명과 조선을 분리해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광해군이 미리 강홍립에게 항복하라는 밀서를 주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강홍립(姜弘立) 등이 직명을 써서 장계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신이 배동관령(背東關嶺)에 도착하여 먼저 호역(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노(虜)에게 밀통하기를‘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하여 여기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接戰)하지 않을 계획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會寧府)의 시장 장사꾼 호족(胡族)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 그 장사꾼 호족이 미처 돌아가기도 전에 하서국(河瑞國)이 먼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갔으므로 노추가 의심하여 감금하였다. 얼마 후 회령의 통보가 이르자 마침내 하서국을 석방하고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체로 미리 예정된 계획이었다.(고딕은 사관의 평)(『광해군일기』11년 4월 2일)】 평안감사의 보고는 조선군이 싸우려 했으나 후금이 먼저 화의를 청했다는 것인데,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광해군과 강홍립이 미리 항복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주장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조선군은 심하의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버드나무에 끝까지 의지해 싸우다 전사해‘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고 불렸던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를 비롯해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 등 장수들을 비롯해 수천 명의 병졸이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이 처음부터 후금에 항복할 생각이었으면 굳이 그 많은 병사가 죽을 필요는 없었다. 광해군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천하의 대세였고, 그 대세에 따라 조선의 외교정책을 결정짓는 것이었다. 천하의 대세는 후금이었고 광해군은 조선을 적대시 않는 후금과 국운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강홍립의 항복에 조야는 들끓었다. 강홍립 가족을 사형시켜 명나라에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에게 중요한 것은 그 가족들을 죽이는 것보다 강홍립이 천신만고 끝에 보내오는 밀서로 후금군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그러면서 심하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 추모문집인 『충렬록(忠烈錄)』을 편찬하는 등 전사자 추모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명과 지배층의 의심을 풀게 했다. 광해군은 명의 재파병 요청에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대신 평안도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오히려 명나라를 돕는 길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광해군은 북인들이 서 남인들과 별다른 대외인식의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했다. 광해군이 재위 14년(1622)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쫓겨난 서인과 남인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한 것은 북인들에 대한 이런 실망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이정구 이귀 최명길 이서 남이공 이수광 정경세 등의 서 남인들을 다시 등용했다. 그러나 광해군 12년(1620)부터 쿠데타를 모의한 서인들에게 광해군의 이런 화해조치는 쿠테타의 호기일 뿐이었다. 광해군은 북인들의 대외정책에 대한 실망으로 대북 일당체제를 완화시키며 서 남인들을 등용했으나 서 남인들은 거꾸로 광해군의 대외정책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전환시켰다. 사실 인조반정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쿠데타였다. 광해군 14년(1622) 12월부터 대간에서는 이귀와 김자점의 쿠데타 모의를 알아차리고 조사를 요청했다. 12월 23일 장령 이시정, 지평 한정국 정담은 비밀리에 광해군에게 이귀와 김자점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며 '역적을 토죄하는 법을 중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하고 양사(兩司:사헌부 사간원)도 이들을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양사(兩司:사헌부 사간원)가 합계하기를‘이귀가 그의 인척(姻戚)인 김자점과 함께 서궁을 부호한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말들이 자자합니다. 인심이 망측스럽고 시사(時事)가 위급한 이때를 당하여 시급히 조사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귀 김자점을 잡아다가 가두고 끝까지 추궁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하소서.(『광해군일기』 14년 12월 24일)」 이처럼 양사에서 이귀와 김자점의 이름을 들어 국문을 청했을 때 응했으면 인조반정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당쟁으로 치부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반정 당일인 재위 15년 3월 12일 이이반(李而頒)이’오늘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변(上變)했으나 역시 당쟁으로 치부한 광해군은 무시했다. 유희분 박승종 등 정승들이 두세 번 비밀리에 조사를 청하자 광해군은 비밀리에 병조 판서, 입직 당상, 네 포도대장, 훈련 도감 대장을 불렀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이미 연서역에 모여 있던 반군이 창의문을 지나 창덕궁 문 밖에 이르자 궁성의 호위를 맡은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지팡이를 버리고 와서 맞이했으며 천총 이확(李廓)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광해군은 젊은 내시의 등에 업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나아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가 체포됨으로써 쿠데타는 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출교지는 이들의 대외인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 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이런 인식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정권이 대외정책을 숭명반청(崇明反淸)으로 급격히 전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과 인조 14(1636)년의 병자호란으로서 국토가 후금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것이었다. 정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국익을 추구해야 할 외교정책에서 숭명반청이란 헛된 명분론을 앞세운 결과 맞게 된 국난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외교현실은 이른바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으로 혼란스럽다. 자주파와 동맹파 중 누가 광해군이고 누가 인조인가? 조선 후기 내내 광해군은 혼군(渾君)이라 불렸던 부정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그 평가가 달라져서 광해군은 국익을 우선한 현실적인 외교전문가로 대접받고 있다. 반면 인조는 헛된 명분론과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나라를 망친 용군(庸君)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는 그만큼 역사의 평가는 길고 유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주파와 동맹파 서로 자신들이 광해군이며 상대방이 인조라고 평가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평가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가치를 뛰어넘어 미래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받는 평가가 될 것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러로 대표되는 대륙세륙과 미 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기에 외교정책은 우리 사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게다가 현재는 냉전체제의 해체로 적과 아군의 개념이 뒤바뀌거나 혼동상태에 있는 세계사적 전환기이다. 지구촌 유일의 슈퍼파워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과 미래의 슈퍼파워로 발돋움하려는 중국이라는 양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과거 내전을 치렀던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늘 광해군이 살아온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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