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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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응하(金應河)

p05.png 3. 충렬록 소개

         (2002. 6. 7. 소장자 태영(군) 자료 제공, 발용(군)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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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록> (1621년 작.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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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록> (1991. 부사공파 간행본)

 

<충렬록 내부 사진 자료 소개>

(2004. 6. 18. 은회(익) 제공)

 출전:고미술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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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록 소개>

(2004. 11. 6. 영윤(문) 제공)

忠烈錄<古 貴 923. 55-G417c> 朴承宗 編, 1621년(광해군 13년) 간행 2권 1책, 목판본, 20. 7cm. x 32. 7cm

 

1619년(光海君10) 明의 요청으로 建州 後金을 치는데 원병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전사한 宣川府使 金應河(1580-1619)의 공훈宣을 기리려고 편찬한 책. 목판본으로서 간행 년대는 이이첨이 쓴 서문의 刊期로 볼 때 光海君 13년(1621)으로 추정된다. 간행된 시 기가 비교적 오래된 탓인지 책장의 4면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서두에는 大北派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하던 李爾瞻의 서문이 실려 있다. 당시 後金의 기세는 날로 극성 하여 明은 遼東의 대부분을 失陷당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경험이 있던 楊鎬 , 劉綎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大軍을 일으켜 후금의 본거지를 토벌하려 했다.

 

동시에 조선에 대해서도 원군의 파병을 종용하였는데 光海君은 마지못해 姜弘立, 金景瑞 등에 게 약 1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게 했으나 '深河의 전투'에서 朝明연합군은 대패 하고 강홍립 등은 후금군에 투항했던 것이다. 강홍립 등의 투항은 明의 의구심을 더하 기에 충분했고 동시에 出兵 회피를 비난했던 조선의 在野 사대부들을 격동시켰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金應河가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조선정부로서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이러한 논리는 이 책 의 전면에 흐르고 있다.  곧 책 전체가 김응하를 찬양하는 내용 일색으로, 光海君에게 김응하를 顯彰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인 [進忠烈錄箋], 朴承宗이 쓴 祭文, 朴希賢이 쓴 傳記文 성격의 [金將軍傳], 이이첨이 쓴 [哀金將軍歌], 韓纘男이 쓴 발문, 沈喜壽 朴 弘耉 趙挺 李好閔 柳希奮 李慶全 李廷龜 尹昉 柳夢寅 洪命元 李 光 權盼 金 李安訥 등 당시 요인들이 쓴 추모시 등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밖에도 함께 참 전한 명나라 장수들과 전사한 將卒들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쓴 [祭劉都督文], [祭喬遊 擊文], [戰亡將士賜祭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金將軍傳]에서 '그가 後金軍의 칼을 맞고서도 버드나무에 의지해 끝까지 항전했다'라든지 '죽어서 시신이 되어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으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라는 이야기를 후금 병사의 傳聞으로 전하고 있는 것 등은 김응하의 공훈을 강조하려는 본서의 의도에서 볼 때 주목되는 대목들이다.

이것은 책의 도처에서 李廷龜를 위시한 非北人系 학인들 이 후금군에게 투항했던 姜弘立 金景瑞에 대해 가차없이 매도하고 있는 것과도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본서는 17세기 전반 '明淸交替'라는 국제적 전환기에 극히 미묘했던 조선과 명의 관계,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녔던 華夷觀의 실제적 모습, 그리고 외교문제를 둘러싼 조선 조정의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 겨진다. (한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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