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구(金 九)1876(고종13). 7. 11.∼1949. 6. 26--(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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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범 및 연보

 2. 영정

 3. 동영상

 4. 주요 사진 자료

 5. 창작 음악극 소개

 6. 백범 김구 노래

 7. 창작 오페라

 8. 한국 위인 전기 전집

 9. 백범기념관 개관 학술대회

10. 백범 동상 제막식

11. 보성 은거지 기념관 개관

12. 기타 각종 자료 소개

1) 북한의 백범 유적지

2) 백범 묘비문

3) 만시(장개석과 정인보)

4) 경순왕의 33대손 기록

 

본문

p11.png 1. 백범 및 연보 소개

독립운동가, 정치가.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초명은 구(龜)·창수(昌洙), 호는 백범(白凡), 초호는 연하(蓮下), 익원공(휘 사형)의 20대손(항렬자-會)으로 순영(淳永)의 아들. 황해도 해주(海州)출신.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3년(고종30) 동학(東學)에 입교,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 접주(八峰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입단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일본 육군 중위 쓰찌다를 살해,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복역중 1898년(광무2) 탈옥, 충남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하고 1903년(광무7)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9년(융회3) 안악(安岳)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체,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감형(減刑)으로 1914년 출옥,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했다.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과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수가 되어 항일 무력 활동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義擧)를 지휘하여 60만원의 현상이 붙은 채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를 탈출, 가흥(嘉興)으로 갔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 전후 방책을 협의, 1935년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했으며, 1940년 임시정부를 중경(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선임되었고, 1945년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다가 8·15 해방으로 귀국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성명을 반대하여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했다. 대한독립촉성 중앙협의회 부회장·민주의원(民主議院) 부의장·민족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내며 극우파(極右派)로서 활약했다.  

 

1948년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 북한에 가서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정부 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中間派)의 거두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www.kimkoo.or.kr

 

 *<백범 선생 가계표> (2005. 12. 26. 영환(문) 제공)

 

1세[士衡(익원공)]--2세[陞]--3세[宗浚]--4세[璜]--5세 계지. 귀지 [終智]--6세[軾], 륜--7세 [永遜]--8세 세달. [鼎]--9세  [璉厚]--10세 [大忠]--11세 [以亨], 이정--12세 [潤昌]--13세 세온.[世寶]--14세 언겸. 언성. 언근. [彦함(言+咸)]--15세 [尙寬]--16세 양수, [精壽]--17세 유원. [福源(字明汝)]--18세 [榮元(字聖瑞)] . 영량--19세 [萬默]. 일묵--20세 재진. [在夏]--21세 [九(白凡)]--22세 仁. 信--23세 振. 揚. 揮--24세 容正. 容萬

 

*<연보> (2003. 8. 6. 태서(익) 제공)

 

1) 1876(1세) :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기동(基洞 : 텃골, 뒤에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김순영(金淳永)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으로 당 27세. 어머니는 곽양식(郭陽植)의 장녀로 곽낙원(郭樂圓) 당 17세. 아명은 창암(昌巖).

 

2)  1879(4세) : 천연두를 앓음.

 

3) 1880(5세) : 집안이 강령(康翎) 삼거리로 이사하다.

 

4)1884(9세) : 조부상을 당하다.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5)1887(12세) :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 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

 

6)1889(14세) : 통감, 사략 등의 병서(兵書)를 읽다.

 

7)1890(15세) : 학골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통학하며 당시(唐詩), 대학, 과문(科文) 등을 배우다.

 

8)1892(17세) :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 매관매직(賣官賣職)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그 후 풍수와 관상 공부 등을 했고, 병서를 탐독. 동학(東學)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라 개명.

 

9)1893(18세) :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報恩)에서 최시형(崔時亨) 대수주(大首主)를 만남.

 

10)1894(19세) : 팔봉 접주(八峰接主)로 동학군의 선봉이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했으나 실패.

 

11)1895(20세) : 신천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인 소년 안중근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를 받음.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이 지휘하는 의병단에 참가.

 

12)1896(21세) : 2월 안악군 치하포(安岳郡  河浦)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죽여 국모(國母)의 원한을 풀다. 5월 2일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에 투옥됨.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13)1897(22세) : 7월에 사형이 확정되고, 고종(高宗)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14)1898(23세) : 3월 9일 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됨.

 

15)1899(24세) :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

 

16)1900(25세) :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7)1901(26세) : 엄친(嚴親) 김순영 씨 세상을 떠남(12월 9일).

 

18)1902(27세) : 장연(長淵) 친척집에서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1903(28세) :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安昌浩)의 영매(令妹) 신호(信浩)와 약혼했으나 또 파혼이 되다.

 

20)1904(29세) : 신천 사평동 최준례(崔遵禮 : 당시 18세)와 결혼함.

 

21)1905(30세) :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 준(李儁), 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 운동에 앞장섬.

 

22)1906(31세) :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23)1907(32세) : 장녀 화경(化敬) 출생.

 

24)1908(33세) : 신민회를 통한 구국 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 학교(楊山學校)를 세움.

 

25) 1909(34세) :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며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의 교장이 되다. 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26) 1910(35세) :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 회의에 참석함.

 

27) 1911(36세) : 1월 5일 사내 총독(寺內總督)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安明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너 17년형을 언도받음.

 

28) 1913(38세) : 옥중에서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고침.

 

29) 1914(39세) :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30) 1916(41세) : 출옥 후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씀.

 

31) 1917(42세) : 장남 인(仁) 출생.

 

32) 1919(44세) :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

 

33) 1922(47세) : 차남 신(信) 상해에서 태어남.

 

34) 1923(48세) : 임시 정부 내무국장에 취임.

 

35) 1924(49세) :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 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36) 1926(51세) : 12월 임시 정부의 원수(元首)인 국무령(國務領)에 취임.

 

37) 1927(52세) :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 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 위원에 취임.

 

38) 1928(53세) :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다.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함.

 

39) 1929(54세) : 5월 자서전 백범일지를 탈고하다. 재중(在中) 거류민 단장을 겸임.

 

40) 1931(56세) :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 투사를 양성함.

 

41) 1932(57세) : 1월 8일 이봉창(李奉昌) 일황(日皇) 저격에 실패.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로 하여금 상해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

 

42) 1933(58세) : 윤 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江蘇省 嘉興)으로 피신. 가흥에서는 주애보(朱愛寶)라는 여자 사공에게 몸을 의탁함.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 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 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함.

 

43) 1934(59세) : 다시 임시 정부 국무령에 취임.

 

44) 1935(60세) : 11월 가흥에서 임시 의정원 비상 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

 

45) 1936(61세) : 이동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창당.

 

46) 1937(62세) : 임시 정부를 진강(鎭江)에서 장사(長沙)로 옮김.

 

47) 1938(63세) : 민족주의 삼당(三黨)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南木廳)에서 조선 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 가료함.

 

48) 1939(64세) : 장사가 위험해지자 다시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김. 다시 임시 정부 주석으로 취임. 어머니 곽씨 부인이 인후염으로 82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남.

 

49) 1940(65세) :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 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 군사 특파단(軍事特派團)을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에 상주케 하여 무장 부대 편성에 노력함.

 

50) 1941(66세) : 12월 9일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함.

 

51) 1942(67세) : 7월 임정과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 공포됨. 광복군(光復軍)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 됨.

 

52) 1944(69세) :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安徽省 阜陽)에 광복군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 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키로 함.

 

53) 1945(70세) : 2월 임시 정부가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함. 장남 인이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일본이 항복. 11월 23일 임시 정부 국무 위원 일동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 국민 운동을 적극 추진함.

 

54) 1946(71세) : 2월 비상 국민 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 인천,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 의사의 유골을 효창 공원에 봉안.

 

55) 1947(72세) : 1월 비상 국민 회의가 국민 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조석에 취임. 제2차 미소 공위(美蘇共委)가 열리자 반탁 투재 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을 지지하다.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

 

56) 1948(73세) : 2월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발표. 4월 19일 남북 협상 참가차 평양으로 감. 5.10 선거 후부터는 건국 실천원 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 힘을 기울임.

 

57) 1949(74세) :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 7월 5일에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영면함.

 

58)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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