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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간공(貞簡公) 김영후(金永煦) --- 안렴사공의 祖父 <정간공 단소>
■ 정간공(김영후) 연보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국헌(菊軒)<급암시급, 척약재학음집>. 온재(穩齊)<화해사전>.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문영공(김순)과 제평군부인 양천허씨(허공의 따님) 사이에서 4남3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영돈, 영휘, 사순, 영후) (정책, 백이정, 별리가불화에게 출가) 이제현, 이달존, 박충좌, 민종유, 김영돈, 안목 등과 함께 백상당문인 24인의 한 사람으로 둘째 매형 백이정의 문인이다. <화해사전 제자서술>
(28세) 乙未(을미=1319년)년에 또 선친(=방경) 산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季子(계자 =막내아들)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행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순)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1321 민지찬 김순묘지명>
(30세) 永煦(영후)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1321 민지찬 김순묘지명>
(34세) 1325년(충숙왕 12)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36세) 충숙왕14년 1327년 4월에 상주목사가 되어 객관(상주 상산관)을 완성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안축의 근재집 상주객관중영기>,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수기>
법주사 자정국존이 입적하기 직전(정묘년, 충숙왕 14년-1327) 12월 1일 아침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1342 이숙기찬 전원발서 법주사자정국존비문>
(41세) 永煦(영후)는 ♠봉선대부 자섬사사이다. <1332 이제현찬 김순처허씨묘지명> 충혜왕 임신 2년(1332) 여름 4월 무오일에 왕이 삼사 우윤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그림 부처를 바쳤다.
(48세) 1339년(충숙왕 복위 8)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50세)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적42)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삼사우사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 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정하여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받았다.
(51세)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행성이 이 글을 베껴 김영후(金永煦)에게 주어서 중서성에 제출하게 하였다. 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왕에게는 양이형제(兩姨兄第)의 관계가 있는 까닭에 왕이 김영후에게 초 1백 정(錠)과 능직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주어 보냈다.
(52세) 충혜왕 계미 후 4년(1343) 봄 2월 갑진일에 왕이 용사(勇士)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하다가 밤에 ♠좌우사 낭중 김영후와 같이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시었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앉히고 마부를 불러 이르기를 “네 주인 낭중이 자기 타던 말을 나에게 선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튿날 김영후가 이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
(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55세)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61세) 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공(=방경)의 손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영후)의 집에 공의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했다 <1350 안진발 충렬공행장>
(65세) 1356년(공민왕5, 병 신년) 2월 갑술일에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70세) 1361년 (공민왕10년 신축) 5월 임술일에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가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상당군부인 청주한씨( 의 따님) 와의 사이에서 2남(김천, 김장)을 낳았다. <족보>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위 정간공 연보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를 저본으로 하여 몇가지 자료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 及菴詩集 (閔思平) 1. 大叔菊軒公 新構野莊 與吾壽春莊隔江相望 六月 一日 予適來吾莊 聞公亦到新莊欲謁 而風作浪湧 不可禁當 不勝鬱鬱 因成?絶句二首 拜呈左右 ★金永煦 百頃平湖侶鏡光 백경평호려경광 漁村兩岸正相望 어촌양안정상망 晩風吹浪忽難渡 만풍취랑홀난도 幾恨無回謁渭陽 ○한무회○위양 樓臺巳見白蓮社 누대사견백련사 風浪未過靑草湖 풍랑미과청초호 此是坦師當日句 차시탄사당일구 ★禪坦 朗吟空復飮村 낭음공부음촌고 ⇒번역 : 자료 미확보
■ 척약재학음집 (김구용) 樓上次韻奉呈菊軒相國 루상차운봉정국헌상국 春風無限客中愁 춘풍무한객중수 散盡賢侯半日留 산진현후반일류 却恨不如樓下水 각한불여루하수 溶溶(삼수변)樣樣向西流 용용양양향서류 ⇒번역 누각 위에서 차운하여 국헌상국께 받들어 드리다. 봄바람에 나그네의 수심이 끝이 없는데 어진 수령들이 다 흩어진후 한나절을 머무네 도리어 누각아래 물만도 못함을 한탄하나니 도도하게 출렁대며 서쪽으로 흐르네
<상산관 전경> 1327년(충숙왕14) 4월에 공께서 상주목사가 되어 객관(상주관)을 완성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운 것이다. *법주사 자정국존비 (김영후 휘자 부분)
2) 영삼사사공(領三司使公) 김 천(金 천(艸+貳)) --- 안렴사공의 父
<영삼사공 단소>
■ 영삼사사공(김천) 연보 ○ 정간공(김영후)과 上黨군부인 청주한씨(父한보 祖한강 曾祖한광윤)와의 사이에서 2남(김천,김장)중 장자로 출생하였다. ---부 정간공 생년 1292년과 2자 사렴의 생년 1335년을 비교해 보면 영삼사사공의 생년은 1312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음--- ○ 고려조에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호군을 지냈으며, 원나라로부터 승무랑 자승고경점의 벼슬을 선수받기도 하였다. ○ 그(=김영후)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고려사> ○ 또 후일 조선조에서 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에 추증되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이는 아드님인 익원공의 勳貴로 인함이다. ○ 배위 三韓국대부인 현풍곽씨(父곽원진, 祖곽돈효, 曾祖곽용, 外祖조운경) 와의 사이에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를 두었다. ○ 묘는 실전되어 오창읍 모정리 고위와 동원에 설단 분향한다. *** 위 연보는 <안렴사공파세보>를 저본으로 고려사 기록 1건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 정간공(김영후)과 영삼사사공(김천) 설단 정간공의 아버지 문영공(김순)의 장지와 백형 김영돈의 거처가 개성인 점과 정간공께서 고위관직에 계시어 개성 어딘가에 거주하셨을 것이므로 정간공과 영삼사사공의 묘도 개성 인근 어딘가에 있다가 실전된 상태로 추정되고, 기록도 전무하여 알 수 없는 실정이다. 1962년 정간공의 후손인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서운관정공파 3파에서 합력하여 충북 청원군 오창읍 모정리에 있는 안렴사공(김사렴) 묘역 좌하에 정간공과 영삼사사공 설단을 조성하였다가, 1993년에 중수하고, 1996년 묘역 좌상으로 이설하였다가, 2000년 수해로 인하여 다시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안렴사공 숙부 장령공(김장)과 아들 서운관정공(김수) ---서운관정공파의 파조 장령공은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파조인 수(綏)의 아버지이다. 고려에서 보궐지감찰사장령을 역임했으며, 조선에서는 사헌부집의를 추증받았다. 무덤은 고려말기에 잃은 듯하고, 전하는 기록도 없다. 1969년 안동김씨 종회에서 영단을 세웠다. 석물은 비석과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서운관정공파의 파조 김수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서운판정공을 역임하였고, 그의 손자인 자행(自行)이 관찰사 등과 같은 관직을 역임한 공로로 조선에서 예조참의로 추증을 받았다. 그는 조선조 개창 이후, 이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원주 지방에 은신하여 행적과 묘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1968년 안동 김씨 종회에서 그의 영단을 만들었다. 석물로는 비석, 혼유석, 향로석, 상석이 있다. 김장 김수 영단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81에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경기도, 1991>
♠ 안렴사공 백형 판사공 김사겸(金士兼) --- 무후 ○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사렴의 생년 1335년을 감안해 볼 때, 판사공의 생년은 1333년 전후로 추정--- ○ 1365년 종부령을 지냈고, 당시 삼사우윤 이창로, 군부판서 염흥방은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 벼슬은 판사를 지냈고, ○ 배위 청주한씨(父한공의, 祖한악, 曾祖한사기, 外祖경사만)와의 사이에 1남(김우), 2녀(윤신보, 유소문에 출가)를 두었다. ○ 자 김우(金瑀,金禑)는 1365년 權務이었고, 벼슬은 부사를 지냈다.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 무후하여 후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묘소도 알 길이 없다. ***위 연보는 <안렴사공파세보>와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기록으로 편집하였음***
♠ 안렴사공 동생 충강공 김사안(金士安) --- 무후 ○ ?∼1391(공양왕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방경(方慶)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천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형이다. ○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형 사렴의 생년 1335년과 동생 사형의 생년 1341년을 감안하고, 조부 정간공의 졸년 1361년 이전에 김사안의 나이 20세를 넘었음을 감안해 볼 때, 충강공의 생년은 1338년 전후이었을 것으로 추정---김영후(1292-1361)의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 1359년 감군위참군사를 지냈고 <1359 처외조부 민사평 묘지명> ○ 1370년 전 밀직사부사 이었고, 당시 전 종부령 최유경, 박사 이존사 등은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1370 처모 김묘처민씨 묘지명> ○ 1374년 밀직부사를 지냈고 <1374 처외조모 민사평처김씨(김륜의 따님) 묘지명> ○ 1388년(우왕14) 문하시중 이색, 첨서 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사안(金士安)을 명나라로 보내 새해를 경축하고 겸하여 명나라 관리를 파견하여 국정(國政)을 감독할 것과 청년 자제의 명나라 유학을 허가할 것을 청하였다. 이색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사안을 따라갔던 상인(商人) 백거마(白巨麻)가 많은 금, 은을 휴대하고 갔던 바 이숭인이 그 액수를 제한케 하였다.이색은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이숭인, 김사안 등과 함께 신우를 여흥부(驢興府)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이색은 앞질러 혼자 가서 만났다. ○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 여말에 형 안렴사공(김사렴)이 청주 도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운곡 원천석 등이 찾아와 망국의 한을 달래는 자리에서 석루(?자,호)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1860 화해사전> ○ 1391년(공양왕 신미3) 9월 경인일에 前 전라도 관찰사 김사안(金士安)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3일간의 사업을 정지하였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를 주었다. ○ 배위는 재당숙 묘(昴)의 9녀중 맏딸이나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 *후에 족보 제작과정에서 당내혼이라 하여 누락시킨 듯하다. <1359 처외조부 민사평 묘지명>, <1370 처모 김묘처민씨 묘지명>, <1374 처외조모 민사평처김씨(김륜의 따님) 묘지명> 무후하여 후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묘소도 알 길이 없다. *** 위 연보는 고려사를 저본으로 하여 안렴사공파세보와 묘지명 3건 기록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 안렴사공 동생 익원공 김사형(金士衡) --- 익원공파의 파조 ○ 1341∼1407(태종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이다. ○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 金士廉(안렴사), 金士衡(좌정승) 형제는 고려의 멸망-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金士廉은 고려가 망하자 청주 도산에 은거 두문불출했으며 한양쪽을 향하여 앉은 일조차 없었다는 節臣. 이성계가 여러차례 불러 佐司諫에 임명했으나 끝까지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 金士衡은 달랐다. 고려말 삼사우사를 지냈던 그는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됐으며, 태종때는 좌정승에까지 올랐다.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
○ 안렴사공파는 충렬공 김방경의 4대손인 士廉(1335∼1405)의 계열로서, 사렴은 안렴사를 지냈고, 호를 梧隱이라 하였다. 그는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절신인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도 도의로써 교유하였고, 조선건국후 태조가 등극하자 두문불출하였고 이태조가 수차 높은 벼슬에 불렀으나 사양하고 청주 오근으로 낙향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그의 아우인 익원공 士衡이 조선의 건국에 동참하여 공신호를 받았고, 그를 통하여 형인 안렴사공을 등용의 뜻을 전하였는데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집안에 전해진다. 아우인 익원공이 오근에 이르자 가마에서 미쳐 나오기 전에 휘장 틈으로 손을 디밀어 "손이나 만져 보자"고 하면서 이르기를 "가늘 길이 갈리고 뜻이 다르지만 형제간의 정이야 어찌 다르겠느냐" 하면서 그대로 돌려 보내고 이내 도산으로 은둔하여 그는 이후 한양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연기군종친회> ***위 내용은 여말선초 혁명시절의 갈림길에 선 안렴사공과 익원공 관련 기록임. 익원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익원공파 소개란 참조***
♠ 허강의 처 ---안렴사공 자매 신돈은 영산(靈山) 사람이요, 그의 모친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여종이다.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 이름은 신변조(遍照)요, 자는 요공(耀空)이다. 신돈은 그 어미가 천하여서 중들 사이에서도 한축에 들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고 있었다. 밀직 허강(許綱)의 처 김씨(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영후(金永煦)의 손녀인데 허강이 죽으니 신돈이 문벌을 탐내어 그 과부에게 장가 들고자 했다. 김씨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평생에 남의 여자라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정히 나를 욕보이려고 한다면 나는 자결하고 말겠다”라고 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신돈이 이 말을 듣고 단념하였다. <고려사>
3) 안렴사공(按廉使公) 김사렴(金士廉) ---안렴사공파 파조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년)∼1405년(조선 태종 5년)
고려의 충신. 명장 방경(方慶)의 현손(玄孫). 문장에 능하며 공민왕 초엽 문과(文科)에 급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집현전 대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集 賢殿大學士)를 더하고 공신호를 내리자 신돈이 위험 인물임을 상소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퇴, 태조에 의해 수차에 걸쳐 좌사간(左司諫)에 기용되었으나 거절한 후 도산(陶山)에 가서 살았다.
■ 사서에 안렴사공 행적이 전하지 않음 臨終時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시며 遺言하시기를 "나는 麗朝의 옛 臣下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保存치 못하고 나라가 亡하여도 또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天下의 罪人이라. 무슨 面目으로 地下에 들어가 先王과 先祖들을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깊은 山中에 묻고 封墳도 하지 말고 表石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서 이미 벼슬한 사람은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警戒하시었다. 때문에 生存時의 文蹟과 其他 事蹟 및 生卒日時와 墓所등을 모두 紛失하여 傳하지 못하고 野史나 遺乘에 傳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것 뿐이다. 슬프다! 고려말 혁명할 때에 절개를 지키고 이름을 이룬 선비가 많았다. 그런데 鄭麟趾가 史傳을 지을 때에 모두 빼놓고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聖祖의 본의겠는가?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기왕부터 嫌疑(혐의)가 있어서 그 사람들을 말살시켜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래서야 장차 어찌 앞날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장하겠는가? <안렴사공 신도비문 : 1840이전, 남공철>
■ 안렴사공(김사렴) 연보 ○ 1335-1405 <1708 송천서원 건립시 문헌자료, 양촌집 '1403 회목과 회약' 참조>,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 국대부인 현풍곽씨와의 사이에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 1358년(공민왕7)에 비서감을 지내고, 당시 처조부 안목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처부 안원숭은 군부판서 진현관으로 있었다. <1358 이색찬 (장인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김태현+왕씨 → 김태현 여 + 안목 → 안원숭 → 안원숭 여 + 김사렴 ○ 1377년에 朝議郞 佐司諫 知制誥를 지내고, 당시(1382년) 4자 도절제사 김제, 척약재 김구용의 1자 서령 金明善이 동방급제하였다. <1377 고려 진사방목, 1382 고려 문과방목> ○ 벼슬이 문하시랑 정당문학 안렴사에 이르렀다. <1534 모재 김안국찬 (5대손)김지 묘갈명> ○ 안동인. 상락공 방경의 후. 어려서부터 學問에 뜻을 두었고 文詞에 富하여 공민왕 초에 登第하여 官은 안렴사를 지냈다.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直諫으로 善俱하여 著名하였다. 태조 개국시 청주로 逃隱(도은)하였고, 左司諫으로 누차 불렀으나 起遂(기수)하지 아니하고 入山하여 閉戶하고 終하였다. <1592이전 편찬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 농암 김주, 목은 이색 등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과 함께 문정공 신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특히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신현선생은 일찍이 원나라에 건너가 왕의 사부로 대접받았었고 국내에서는 정몽주, 원천석, 김진양,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을 길러낸 대학자였는데, 여말에 김사렴을 비롯해서 많은 충신 열사들이 배출되었던 것도 이분의 높은 가르침에 감화를 많이 받은 것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1860 화해사전> ○ 공은 외모에서 풍채와 위엄이 있었고, 한 인간으로서 마음 씀씀이가 크고 넓었으며, 공직에 나아가서는 오직 충절로 신명을 다하였고, 외직에 있을 때에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데 온 정성을 쏟아 그 이름을 온 세상에 떨쳤다. (風采嚴威 器度弘傅 奉公以誠 按民盡力 名重當世) <조선명신록, 해동인물지) ○ 또한 공은 "여말 8청"의 한분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분들은 고려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로 벼슬을 그만두고, 배록동에 은거하였는데, 공을 비롯하여 어은 金浚, 어촌 孔(마음심)府, 대은 李裕, 둔촌 李集, 대제학 尹珪, 사암 閔(마음심)兪, 송은 具鴻 등을 이른다. 배록동이란 이씨 조선에서 전조의 신하들에게도 봉록을 주었지만, 이들 고려의 절신들은 한 마을에 살면서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분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모셔져 내려오고 있다. ○ 그리고 공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耘谷 元天錫의 집에 모여 壇祀(단사)에 종참하였다.당시 운곡은 고려말에 군벌이 설치고 국기가 흔들리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 밑에 숨어 들어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터였다. 그런데 혁명 역도들이 우왕, 창왕을 시해하고 훈구 대신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자 비분강개한 충성으로 비록 나라는 망해도 고려의 종사만은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치악산 정상에다 계단을 설치하고 단군, 기자, 고려 태조 등의 열성과 변혁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종묘제례와 똑같이 제사를 올렸다. 이 단사를 變祀(변사) 또는 革祀(혁사)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종참한 분들은 공(김사렴)을 비롯하여 이양중, 최청몽, 서?, 탁신, 조승숙, 이집, 최원도, 조유, 김로, 음양동, 하자종, 성여완, 이?, 이원, 겅계성, 우성유, 방직범, 최양, 부종의, 설지유, 김약시 등인데 이에 참사한 분들은 모두 80인 이었다고 한다.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
○ 운곡 원천석 선생이 오은 김사렴을 찾아가니 그 아우 석루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그때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순은 신덕린이 와서 최후의 결별로 만나서 그리든 회포와 처세할 것을 한담하면서, 운곡 원천석에게 역동 우탁 가문과 불훤재 신현 가문이 화당한 사실을 기록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1860 화해사전>
○ 배위 죽계부인 순흥안씨(父안원숭, 祖안목, 曾祖안자기?안우기, 高祖안향, 外祖원선지)와의 사이에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를 두었다. 처부 안원숭은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데 맏사위가 안렴사공이고, 기전룡, 성석린 등이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안렴사공파세보>, <순흥안씨 홈페이지>
○ 몰후 273년만인 1678년(숙종4 戊午)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고, 1938년(무인) 2월에 다시 봉축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1678년(戊午) 영모재를 안렴사공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1708년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재실로 써내려 왔다. <1802이전, 홍양호,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영모재 안내서>
○ 1708년(숙종34, 戊子) 유림들이 서원을 청주서쪽 송천에 세우고 해마다 춘추 향사를 올리었고, 1871년(고종8)에 정령에 의하여 毁撤(훼철)되었다가 충북 유도회의 주관으로 다시 복원되었고 매년 3월 20일에 院享(원향)을 받들고 있다. 그후 3년만인 1711년 辛卯년에 유생 ★이택하 등 120인이 詣闕上疏(예궐상소)하여 서원에 宣額(선액)할 것을 청하여 왕께서 該曹에 명하여 稟處(품처)하라 하였다. 그때 조정에 유사하여 일이 침체되었다. <1802이전, 홍양호,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 ?1768년 13대손 김래가 청주에 사는 일가들의 부탁을 받고 오은선생 행장을 찬하였다. ○ 1749년 충청도관찰사 홍계희가 안렴사공 墓碣銘을 찬하였다.) ○ 1781년 묘하에 묘비를 건립하였다. <안렴사공 묘비 비문> ○ 1802년이전 당시 금석학의 대가였던 홍양호가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을 초하였다. ○ 1818년(순조18 戊寅) 2월에 鄕儒 이의병 선생이 장두에서 순조가 수원에 거동하는 행차 앞에서 상소하여 안렴사공의 시호 하사하기를 소청했다.
○ 1822년 외후손되는 남공철이 고려명신전을 지을 때 일민편에 안렴사공 기록을 수록하였다. 이를 근거로 1925년 대동기문에도 실리었다.
김사렴은 평장사 방경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고 모두들 임금에게 직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신돈이 정권을 전단할 때 왕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우러러 섬기었다. 공민왕 14년에 신돈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 수정리순론섭리보세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왕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여 공치기와 연등놀이 연회를 갖고 상을 주되 은병, 안장, 능라금주, 천수필식을 주며 즐기었다.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태조대왕이 등극하자 사렴은 청주에 피해 숨어 살며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읊조리되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태조가 사렴에게 사간원 좌사간 벼슬을 주고 여러번 불렀으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급기야 도산으로 들어가 더욱 문호를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면서 회한으로 여생을 살았다. 죽음에 임하여 여러 자손에게 이르되 "나는 려조의 대대로 내려오는 충신으로서 이미 임금을 구하고 나라를 붙잡지 못하였으며 또한 나라가 망함에 몸을 순국치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들어가서 선대왕과 선인을 뵈올까 보냐" 하였다.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며 자손중에 이미 벼슬했던 자는 다시 사환에 나가지 말라" 유언하였다.
○ 1830년 (순조30, 庚寅)년 7월 하순에 외손인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안렴사공의 13대손 김래의 부탁을 받고, 안렴사공 묘갈명을 찬하였다.
○ 1840년 이전 남공철이 안렴사공의 후손 人+英(영)과 亨道(형도)와 瑞霖(서림)이 찾아와 碑銘(=비문)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기에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광복후인 1954년 청원군 오창읍 모정리 모정골에 있는 묘소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977년 신도비각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신도비 명문대로 '이수귀부'로 고치고 비각전체를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934년 두문동서원(개성직할시 개풍군 광덕면 만수산 두문동)에 안렴사공(김사렴)과 판삼사공 둘째아들 김전 공이 배향되었고,
○ ?1935년 경현사(전남 장성)에도 안렴사공(김사렴)이 배향되었고
○ 2000년 12월, 고려통일대전(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산72번지)에는 충렬공 할아버님을 비롯 表節에 안렴사공 사렴 할아버지와 靖節에 전서공 성목 할아버지, 義節에 군사공 칠양 할아버지, 전서공 아드님 휴 할아버지, 靖節에 판삼사공의 둘째아들 전, 이렇게 여섯분을 배향하기로 결정하였다.
<묘소 원경>
<묘소>
<묘역 좌우 문관석과 동자석>
<안렴사공 묘비>
<재실-영모재>
<신도비각>
<신도비>
<영모재 전경> (청원 오창 모정리)
<묘역 원경>
<송천서원(松泉書院) 소개> 1) 사진 소개 (2002. 7) <송천서원 입구>
<송천서원>
<현판>
<안렴사공 위패 내부> ■ 송천서원(松泉書院) ○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읍 양지리에 있는 서원. ○ 1695년(숙종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①김사렴(金士廉, 1335-1405), ②최유경(崔有慶, 1343-1413), ③이정간(李貞幹, 1360-1439), ④박광우(朴光佑, 1495-1545)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옥산면 송천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 1711년에 松泉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 그 뒤 ⑤이지충(李之忠, 1509-1562), ⑥조강(趙綱, 1527-1599), ⑦이대건(李大建, 1550-1574), ⑧이제신(李濟臣, 1536-1584), ⑨이인혁(李寅爀, 1634-1710), ⑩최석정(崔錫鼎, 1646-1715), ⑪남구만(南九萬, 1629-1711), ⑫박문수(朴文秀, 1691-1756), ⑬이종성(李宗成, 1692-1756), ⑭이효석(李孝碩, ?-1491), ⑮김여량(金汝亮, 1603-1683)을 추가 배향하였다. ○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에 훼철되었다. ○ 광복후 지방유림이 복원계획을 공의하여 오던 중, 국조보조를 받아 1975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 경내의 건물로는 5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모현문(慕賢門)과 양 옆의 협문으로 된 삼문(三門), 4칸의 모현재(慕賢齋), 5칸의 수호사(守護舍), 정문(旌門) 등이 있다. ○ 사우에는 김사렴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이제신, 이인혁, 남구만, 최석정, 박문수, 이종성, 이효석, 김여량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재실은 제향때 제관들의 숙소와 강학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수호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 ), 7두(豆)이다. ○ 재산으로는 대지 750평, 논 2,000여평 등이 있다. <전고대방, 충청북도지(충청북도, 1975), 청주시지(청주시, 1976)>
<송천서원 배향인물> ① (안동)김사렴(金士廉) ?1335-?1405 ② (전주)최유경(崔有慶) 1343(충혜왕 복위 4)∼1413(태종 13) ☞김묘의 사위, 김묘의 세째딸이 최유경의 둘째부인, 따라서 김구용의 매부, 김사렴의 동생 김사안의 손아래 동서임 ③(전의)이정간(李貞幹) 1360(공민왕 9)∼1439(세종 21) ☞안렴사공의 4자 김제의 따님 시부, 즉 사위 이사혜의 부 ④(상주)박광우(朴光佑) 1495(연산군 1)∼1545(명종 즉위년). ⑤(우봉)이지충(李之忠) 1509(중종 4)∼1562(명종 17) ⑥(한양)조강(趙綱) 1527(중종 22)∼1599(선조32). ⑦(경주)이대건(李大建) 1550(명종 5)∼?1574 ☞김도(병천 도원리 안렴사공파)의 사위, 이시발의 부 ⑧(전의)이제신(李濟臣) 1536(중종 31)∼1584(선조 17) ⑨(경주)이인혁(李寅爀) 1634-1710 ☞이시발의 손자, 즉 김도(병천 도원리 안렴사공파)의 외현손 ⑩(전주)최석정(崔錫鼎) 1646(인조 24)∼1715(숙종 41). ☞최유경의 후손, 최명길의 손자, 최명곡(최석정) 선생이 주무가 되어 松泉에 서원을 세워 공(=안렴사공 김사렴)을 주벽으로 선현 7선생을 모시고 춘추 원향을 올리게 되었다. 7현의 향축문도 최명곡 선생이 撰하시었다.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서원터 : 송천마을 뒤에 있었다. 지금은 오창읍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빗돌만 남아 있다.<청원군 지명지> ⑪(의령)남구만(南九萬) 1629(인조 7)∼1711(숙종 37). ☞남재의 후손, 남공철<1760(영조 36)∼1840(헌종 6)>의 선조, 남공철은 김상기(병천 도원리 안렴사공파)의 외현손으로 고려명신전 일민편에 안렴사공을 기록하고, 안렴사공(김사렴)의 묘갈록과 신도비명을 찬하였음 ⑫(고령)박문수(朴文秀) 1691(숙종 17)∼1756(영조 32) ☞암행어사로 유명, 백곡 김득신과 절친했던 구당 박장원의 증손 ⑬(경주)이종성(李宗成) 1692(숙종 18)∼1759(영조 35) ☞이항복의 5세손 ⑭(전의)이효석(李孝碩) ?-1491 ☞안렴사공 4자 김제의 외손자, 즉 이사혜의 아들 ⑮(개성)김여량(金汝亮) 1603(선조 36)∼1683(숙종 9).
**도 : 송천서원 전경 **도 : 송천서원 내부 안렴사공 위패
4) 안찰사공(按察使公) 김간(金侃) ---무후 ■ 안찰사공(김간) 연보 ○ 안렴사공(김사렴)과 죽계부인 순흥안씨와의 사이에서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생몰년 미상 ---부 안렴사공의 생년 1335년을 감안할 때, 공의 장남 김간의 생년은 1355년 전후로 추정--- ○ 1380년(우왕6 경신)에 護軍을 지냈고, 당시 처부 金懷祖는 판내부사를 지냈다. <1380 윤해묘지명> ○ 벼슬이 안찰사에 이르고 ○ 묘는 오창 목령 하사동 술좌에 여말선초의 묘의 형태인 웅대한 방형석묘로 모셔져 있었고, 1998년 체경묘원으로 면봉시 문관석 등 석물을 옮겨오고, 사각방형 묘의 석대는 옮겨와서 체경묘원 오르는 길 계단에 쌓아 놓았고, 고려동경으로 추정되는 부장품 유물이 발견되어 현재 영모재에 보관하고 있다. ○ 배위는 무주부인 광주김씨(=광산김씨)로 판서 金懷祖(김회조)의 따님이고, 무후하여 후손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 ***위 내용은 <1988 체경묘원유연비문>을 요약하고 <1380 윤해 묘지명> 기록 1건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 1998년 체경묘원으로 면봉 ○휘侃(간)공은 관이 안찰사에 이르시고 배는 무주부인 광주김씨니 판서 懷祖(회조)지녀요 묘는 오창목령 하사동술좌 이었다가 금번 이 묘원에 면봉하게 되었다. 즉 안찰사 휘侃(간)공의 영묘는 오창목령 술좌에 웅대한 방호석묘로 모셔져 있었고 원래 비대한 산판과 위토가 있었을 것이나 후사없는 묘소인데다 방손들의 불찰로 거개가 상실되었고 임야는 소유포기되어 행정청의 귀속재산으로 처분된 것으로 사유된다. 우금까지 근소한 위토 330평이 유지되어 있어 묘하 양청동 방예손 일계에서 세사를 봉행하여 오던중 의외로 국가사업인 오창 첨단과학기술공단 건설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전기 위토가 편입되어 그 보상금 2천3백6십만원을 수령케 되자 소관문중의 협의로 오은공 대종회에 헌납하고 묘지이안을 성원하는지라 이를 기꺼이 가납하여 정랑공, 소윤공의 영분까지 일괄사업으로 병행키로 만장일치 종의가 숙성되어 묘원을 영건하게 되었다. ○ 묘원영건역사 개황 1998.4.2 묘원영건 추진위원이 2조로 편성되어 1조는 소윤공 설단비를 이전하여 오고 신묘원의 정지 영묘위치 및 굴광작업을 하고, 2조는 안찰사공 구묘 발굴 및 유골수습, 이안작업을 수행하였다. 안찰공 휘侃(간)공의 분묘는 약 57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조고비 양위분의 유골이 정결히 유류되어 있어 실로 기이한 감탄을 느끼게 하였다. 체경묘원에는 以西爲上 원칙에 따라 향하여 좌측에 안찰사공의 면봉묘를, 중앙에 소윤공의 이안영분을, 우측에는 이제까지 실전되었든 정랑공의 초혼영분을 봉축하였다. 따라서 별항 게기한 바와 같이 각 석물을 배열하고 안찰사공 구묘에서 가져온 문관석을 세웠으며 우측에 유연비를 수립하여 묘정을 정제하였으니 이상 작업에는 범 3일간의 용역이 소요되었다. ○ 부장품 유물의 발견 안찰사공 구묘에 대하여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규모가 웅대하고 오랜 고분인지라 혹여 부장품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신중히 발굴한 바 과연 하나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니 직경 8cm, 厚3mm의 원형물건인데 표면은 약간 형으로 고운 면을 갖고 있으며 배면은 운용문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 꼭지가 있고 위에는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슬끈으로 꾀었든 듯하였다. 이제는 전문가의 감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필자의 상식으로는 고려동경일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공께서 평생 지니든 애용물을 부장한 것이거나 더 비약적으로 해석하면 안렴사 부군께서 또는 상락후 부군 때부터의 것을 장자이신 안찰사공께로 유전하였다가 후사가 없으심으로 부장케 된 것인가도 추리해 보게 된다. 여하간 면경은 자기면모를 성찰하는 것이오 청직한 인격을 관조하는 것이니 고결한 역대 선조의 지조와 풍절을 포회한 진품임이 틀림없다 하겠다.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도 : 안찰사공(김간) 구묘 **도 : 체경묘원 전경 **도 : 체경묘원 계단에 있는 안찰사공(김간) 방형석묘 석대 **도 : 안찰사공(김간) 방형석묘 출토 고려동경 ♠ 안렴사공 2자 인비(仁庇) ---삭발 출가 ♠ 안렴사공 장녀 ---목천인 목사 마희원에 출가
5) 정랑공(正郞公) 김위(金 =삼수변韋) ---무후 ○ 안렴사공(김사렴)과 죽계부인 순흥안씨와의 사이에서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중 3남으로 태어났다. ○ 휘위(金삼수변韋)공은 관이 정랑이며 배 실관부인과 함께 묘지가 (충북 청원 오창읍)목령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끝내 실전하였기로 1998년 체경묘원에 영분을 봉축하였다.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도 : 정랑공(김위) 영분
6) 도절제사공 김제(金 =삼수변制) ---무후⇒전의이씨 외손봉사 ○ 안렴사공(김사렴)과 죽계부인 순흥안씨와의 사이에서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중 4남으로 태어났다. ○ 1377년(북원선광7 정사, 명홍무10, 우왕3) 3월 성균학생 김제가 진사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도절제에 이르렀다. 당시 父는 朝議郞(=정5품) 佐司諫 知制誥 士廉이었다. ○ 1382년(대명홍무15 임술, 북원천윤4, 우왕8) 5월 안동 김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동년급제한 안동 金明善은 벼슬이 서령에 이르렀다. <고문서집성23-거창초계정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山亭은 절제사 김공 제가 세운 정자인데 유지가 창고(?창리)의 동쪽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長城(현 모정리)에 고려충신 안동김씨 안렴사공이 임종하시고 그 앞에는 山亭이 있었다. 李貞幹 (1360-1439) 다섯째아들 士惠가 안렴사의 아들인 병사 제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오근을 별장으로 삼아 왕래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거주하였다. <오근지> ○ 배위 성산군부인 성주이씨(父이원구)와의 사이에 2녀(이사혜, 이훈에 출가)를 두었다. 여서는 전의인 군수 李士惠(이사혜), 정랑 李訓(이훈)이니 군수공은 부 중추원사효정공貞幹(정간)이요 생4남하니 한성부좌윤孝碩(효석), 부사友碩(우석), 종사랑仁碩(인석), 부위義碩(의석)이며 효정공(이정간)과 좌윤공(이효석)은 송천서원에 동배되었다. ○ 묘는 오근목령에 있다. 당시 예속으로 도절제사공은 여서 이사혜 전의이씨 가문에 습승되어 거차 오백여년래 외손봉사를 뫼시어오니 희세의 기문이오 미거라 찬양할 일이다.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도 : 도절제사공(김제) 묘 (전의이씨 외손봉사)
7) 소윤공 김약(金) ○ 안렴사공(김사렴)과 죽계부인 순흥안씨와의 사이에서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중 5남으로 태어났다. ○ 고려말에 소윤 벼슬을 하였고, 부친 안렴사공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 선고를 평총한 연유로 역시 봉분을 못하게 유언하여, 목천 백락촌에 있는 묘소를 실전하였으므로, 1946년(병술) 12월 도산 오은공 묘하에 설단을 모시었고, 1998년 체경묘원에 설단을 이안하여 영분을 봉축하였다. ○ 배위 숙부인 승평부인 순천박씨(父박원상, 祖박숙정) 사이에 1남(우주)를 두었다. **도 : 소윤공(김약) 영분
8) 지주사공 김우주(金遇周) ○ ?∼1444(세종26), 안렴사공의 손 ○ 소윤공(김약)과 승평부인 순천박씨와의 사이에 1남으로 태어났다. ○ 공은 仁德과 淸廉으로 알려져 本職에 거듭 임명되었는데 사퇴후에는 不營産業하고 자손에게 傳敎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충효와 정직을 世守할 것을 훈계하셨다. ○遇周(우주)는 임종하면서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이미 평총을 하셨는데, 내가 어찌 홀로 봉분을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충절 가문의 넋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이는 곧 충효의 본보기가 되었음은 물론 세상 사람들은 공의 가문을 절의대가로 칭송해 왔다. 아들 휘丸은 상대의 고향인 오근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땅으로 이거한 후 과시에 합격하여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 오창 복현리 분토골에 묘가 있고 묘하에 재실이 있으며, 1998년 공의 묘역 상단에 체경묘원을 조성하여, 김간 묘, 김약 영분, 김위 영분을 봉축하였다. ○ 묘원수호 및 봉사대책 기존의 지주사 遇周(우주)공의 재실이 있으나 심히 頹落(퇴락)하여 앞으로 재건을 목표로 하고 이를 '체경재'라 재명을 부여하여 통합하고 4위 열조를 모시어 수호하고 봉사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지주사공의 위토는 상당 면적을 보유하고 있으나 현하 농촌실정으로 세향을 올릴 정도에 그치고, 소윤공 위토는 답 1,053평, 전 464평인 바 도산에서 이곳으로 세수를 전교받어 합사에 소용키로 한다면 세일사에는 큰 애로사항이 없다할 것이다. 체경재에 대하여는 수축이나 재건함에는 전혀 재력이 전무한지라 앞으로 새로이 계획을 세워 사업을 추진해야 될 것인바 각별히 後昆(후곤)을의 성력과 특별한 협찬이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체경묘원유연비문, 1998, 김재화> ○ 슬하에 1남(환)이 후사가 이어지고 있다. **도 : 지주사공(김우주) 묘
9) 좌랑공 김식(金湜) ○ 안렴사공(김사렴)과 죽계부인 순흥안씨와의 사이에서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 1393년(태조2) 계유문과에 급제하였고 <1914갑인보> <?조선 문과방목> ○ 벼슬은 이조좌랑에 이르렀으며, 공은 진천군 문백면 막동에 은거하여 문학으로써 평생을 마치었는데, 문하에 문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 묘소는 유명평총 (아버지 안렴사공의 遺命에 따라 평총)으로 실전되었다가 돌아가신지 백여년후에 수남리(현 천안시 동면) 후산에서 지석을 발견하여 후손들이 공실묘소를 가봉총토하였다. 건좌이고 묘비와 석상이 있다. ○ 1997년 장손 (김식-1/2김자려- 1/3극) 김극의 유택이 있는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구미촌 후록 유좌에 이안하였다. 이때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에 있던 직장을 지낸 큰아들 金自麗(김자려)의 묘소도 (노장우撰 권영구書 비와 석상이 있음) 함께 이안하였다. ○ 배위 상산부인 진천송씨(父송광우, 祖송소, 曾祖송지백, 外祖홍원노)와의 사이에 2남(자려, 자형)이 후사가 이어지고 있다. **도 : 좌랑공(김식) 묘
10) 직장공 김자려(金自麗) ○ 좌랑공(김식)과 상산부인 진천송씨와의 사이에 1남으로 태어났다. ○ 직장을 역임하였고, ○ 묘는 진천군 문백면 계산리 2-1 유좌에 있었고(노장우찬 권영구서 묘비), 배위의 묘는 금숙동계좌이었는데 1987년 정묘 3월 8일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1997년 장자 (김식-1/2김자려- 1/3극) 김극의 유택이 있는 영동군 황간면 회포리 구미촌 후록 유좌에 이안하였다. ○ 배위 천안전씨(父부사 전향, 外祖목사 문희로)와의 사이에 3남(극,인,려)이 후사가 이어지고 있고, 영동 황간, 진천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도 : 직장공(김자려) 묘
11) 서령공 김자형(金自荊) ○ 좌랑공(김식)과 상산부인 진천송씨와의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 관직은 서령을 지냈다. ○ 湜(식)의 둘째아들이며 안렴사공의 손자인 自荊(자형)은 임종에 임하여 그 자손에게 이르기를 "충효 두 글자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遺命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안렴사공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너희들은 앞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지 말며 조상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그 자손들 역시 유지를 받들어, 自荊(자형)도 자기 분묘를 평총으로 하도록 일렀고, 그 때문에 지금도 묘소를 알 길이 없다. 묘는 진천군 문백면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하여 지금은 충북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는 삼보산에 설단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 배위는 동래정씨이다. 후손이 증평일원에 많이 세거하고 있다. **도 : 서령공(김자형) 설단
12) 판교공 김환(金丸) 지주사공의 아들인 환(丸)은 안렴사공 이래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파묻고 봉분도 하지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그리고 자손 중에서 고려조에 이미 벼슬하였던 사람은 다시는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라." 는 충절의 유훈이 이어져오는 상대(上代)의 고향인 오근(현 충북 청원군 오창읍)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 땅으로 이거한 후 1442년(세조 임술년) 친시(親試)에서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한림주서를 거쳐 승문원판교에 이르렀다.
▲ 판교공 휘 환(諱 丸) 묘소
13) 참의공 김종손(金宗孫, 1428∼1478) 丸의 아들 宗孫(1428∼1478)은 1447년(丁卯)에 음사로 벼슬에 나가 사헌부감찰에 이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宗孫의 아들 城(1451∼1487)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여러 고을의 군수를 맡았으며, 1487년 홍치황제등극 진하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가셨다가 통주(通州)에서 졸하시니 병조참판에 증직되시고, 자손들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여러 번 높은 품계를 추증받았다. ▲ 참의공 휘 종손 묘소
<참판공(휘 城) 묘소> (2007. 6. 14)
▲ 참의공 휘 성 묘소
▲ 참의공 휘 성 묘표. 배위 풍천임씨 묘표
14) 안원군 김공량(金公亮, 1472∼1544) (주회(안), 2007. 9. 19. 은회(익) 제공) 城의 아들로 안원군파의 파조가 되는 公亮(1472∼1544)은 안렴사공의 7세손으로 자를 필지(弼之) 호를 양곡(楊谷)이라 하였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올라 안원군(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공은 묵재(默齋 李深源, 1454∼1504)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과 덕행이 순결(純潔)하고 아름다웠는데, 연산조때 절제과로 등제하였으나 스승과 뭇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전시(殿試)에 나가지 않고 세사(世事)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고요히 지내셨다. 묘는 경기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고, 묘갈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가 썼다. 정사룡의 문집 [호음잡고](湖陰雜稿)에 <유명조선국김군공량묘갈명>(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이 실려 있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었다. 안원군의 묘갈을 書한 로(魯)는 우리 가문의 서운관정공파 희수(希壽)의 아들이며 당대의 명필로서, 이외에도 승지공 김공예(金公藝, 1485∼1537) 묘갈, 아버지 김희수(金希壽, 1475∼1527) 묘비를 書하였다.
1520년(3자 주 8세) 기묘년 주계군 성광 이심원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사문(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내구(內舅)인 충정공 허종(許琮) 상공께서 벼슬에 나아가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과 심정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이신 문강공 박세희(朴世熹)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간사에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机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1544년 5월 27일 판서공(공량)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송별하고 부의하는 뜻을 내리셨다. 9월 17일 모친 정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10월 20일에 고와 비를 여주 백양동 선영 안 정좌 벌에 합장하였다. 1546년 8월 15일에 선고비의 묘도에 비갈을 세웠다. 호음 정사룡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의 동고 김로 교리가 글씨를 썼다.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 바로 이 안원군 公亮의 직계 사손들이 세거해 온 곳이 바로 소정면 운당리이다. 안원군파가 처음으로 연기땅에 연고를 맺은 것은 바로 안원군의 아들인 진천현감 완(浣)때 였다고 전해진다. 구전되는 바로는 안원군이 전의현 덕평면 운당리·원덕리 (현 소정면 운당리) 일원의 토지와 임야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아 아들인 진천현감 浣에게 관리토록 함에 이때부터 안원군계의 가문이 이곳을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운당리에 영장댁(호준) 맞은 편에 있는 하마(下馬)터로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역시 사손파 안동김씨의 위세를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17대손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사손인 龍植(1936생)의 주관으로 1995년 운당리에 진천현감공 이하 모두 15대 34위의 장자·장손의 묘소를 이장하여 모시고 있다. 묘소입구에는 해방이후 이전한 안원군파 재실이 있다.
<묘소 사진>(2007. 6. 14. 안사연 참배. 발용(군) 촬영 제공)
▲ 안원군 휘 공량 묘소
<안원군(휘 공량) 묘갈명 병서> (2005. 6. 18. 태서(익) 제공) 有明朝鮮國金君墓碣銘幷序 金氏系出新羅敬順王著籍安東者尤大有諱丸入 本朝終判校諱宗孫司憲監察諱城官至部將監察以下皆 贈顯官部將君聘 贈領議政許蓀之門成化壬辰生君君諱公亮字弼之生未浹旬失恃鞠於曾王母及長?默不好嬉自知讀書受業於宗室朱溪君君外舅許忠貞公琮以德望伏一世嘗勸君仕君辭以 志學忠貞抽春秋傳試之君應誦瀾?大被嘆賞君累屈鄕薦益自勵學成取科將有以爲適燕山政亂貶戮薦紳人多罹禍君遂絶意世事杜門養疾親舊靑紫競耀君以白衣處之夷然 也只以文酒自娛子姪及學子請益者因資材而誘進終日講?不以寒暑廢輟君篤於孝友丁內喪務遵中制事後母備盡色養?督二弟皆克就業每遇初度悲慕不巳不爲世俗宴樂 性任眞不修邊幅應接之際未嘗變初心嘉靖甲辰五月二十七日寢疾終于家春秋七旬有三君配李氏光陽縣監彭穗之女理家有法度??藻以尸祀贍酒羞以供賓使君不虞窮約 皆內贊也某年月日亦以疾終壽七十君之葬某年月日先卜驪州蛇洞之原至是配葬君凡三男一女男長曰浣次曰滌擢武科次曰澍魁己亥文科今爲弘文館校理以文行顯女適別 提李浣娶僉使姜碩卿女生二男幾女男曰忠男孝男幼女適張仲悌餘幼滌娶朴養根女生一男曰仁男澍娶宗室鎭陽守渶女生二男一女曰順男?正男皆幼銘曰 生也高華受也純淑學成行備志絶干祿象懸少微晦迹自?推其所有?滿門墻人所競?我所背馳雖獲考終竟?其施伯鸞德曜名不愧稱數窒而通于後是?
<병사공(휘 公奭) 묘소> (2007. 6. 14. 안사연 참배. 발용(군) 촬영 제공)
▲ 병사공 휘 공석 묘소
▲ 병사공 휘 공석 신도비(김주 찬, 송인 서, 박영 전)
▲ 신도비 부분 글씨
15) 김완(金浣) 안원군 公亮에게는 모두 3子(완,척,주)가 있었는데, 장자인 진천현감 浣은 자를 정숙(靜叔)이라 하였고 진천현감을 지냈으며 증직으로 좌승지를 추증받았다. 부인은 안동강씨이고 묘소는 율목동에 있던 것을 이장하였는데 이장시 명기(明器 : 조선시대 士族들의 묘소에 함께 묻는 부장품)가 출토되어 사손이 보관하고 있으며 목관과 복식도 그대로 출토되었다고 한다. 목관은 7자×8자반의 겹관으로 복식은 누비이불등의 고급 복식이 400년 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관끈도 그대로 보존되어 그 끈을 잡고 운구하여 이장하였다 한다. 차자인 척(滌)의 후손들은 전라도 광산으로 이거하였고, 3자인 주(澍, 1512∼1563)의 후손들은 경기도 여주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도 : 김완 이하 15대 34위 장자장손 묘역 **도 : 김완묘 출토 명기
16) 김충남(金忠男, 1530∼1618) 浣의 아들인 충남(忠男, 1530∼1618)은 자를 서경(恕卿)이라 하였고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19) 생원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교관에 올라 토산현감을 역임하였다. 89세로 장수하여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퇴계 이황의 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실려 있다. 忠男은 아들이 없어 壽男(공량弟 公奭의 후손)의 子인 엽(曄)을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군위현감과 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 김정삼(金鼎三) 정삼(鼎三)은 안렴사공의 12대손이며 숙종조시 武科급제하여 선전관, 비변랑감찰, 함평현감, 낙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715년(강희54)에 세운 <군수김후정삼애민청덕선정비>(郡守金候鼎三愛民淸德善政碑)는 전남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 낙안읍성 향교입구에 있다. **도 : 김정삼 선정비 (낙안읍성 향교입구)
18) 김호준(金好焌, 1867∼1914) 정상(鼎相)의 가계에서 한말에 희수(喜秀 : 족보명 喜源)- 호준(好焌 : 족보명 榮澤)으로 이어지는 인물을 배출하였다. 喜秀(1821∼1878)는 음직으로 1878년 선공감가감역에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好焌(1867∼1914)은 1886년(고종23) 무과에 갑과 1인으로 급제한 뒤 상서원주부, 훈련원판관, 첨정을 거쳐 토산병마절도제위, 그리고 1893년에는 용양위부호군으로 경주영장에 임명되어 안동지역의 동학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의 교지와 유품을 사손이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안동일대의 동학 토벌에 관련된 일기 [영가일기](永嘉記事)는 필초본으로 당사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사료로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도 : 김호준 유품
○안원군파에서는 文科급제 1명(환), 生員進士급제 6명(충남, 원후, 인, 철, 정운, 정신), 武科에 21명(숙, 근후, 구, 언국, 명구, 숙, 현국, 명악, 명혁, 정삼, 중국, 명익, 영수, 주영, 좌국, 명준, 영택, 정서, 정덕, 사묵)이 급제하였다. 조선조 사마방목을 보면 忠男의 부친 완(浣)은 봉렬대부 行진천현감을, 元厚의 부친 엽(曄)은 통훈대부 行활인서별제를, 철( +喆)의 부친 명준(命峻)은 통정대부 行장연현감 해주진관명마절제도위를 지냈음을 알수 있고, 이외에도 안렴사공파 세보를 보면 구(石+求)는 구례현감을, 명혁(命赫)은 여산도호부사를, 정상(鼎相)은 경흥부사를, 좌국(佐國)은 다대첨사를, 정덕(鼎德)은 정평부사를 지내고 분무원종훈에 책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원군파 후손으로 在完은 1950년대에 지방의회의원과 교육위원회위원을 역임하였고, 在元은 근 30여년간을 오직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현재 태원, 재은, 호식은 사손 용식과 함께 종사일이면 남다른 정성을 보여주어 종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在龍(1956생)은 안렴사공 인터넷 홈페이지(http://hgdryj.hihome.com)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운당리에는 안원군파 외에도 안렴사공 후손이 많이 세거하고 있는데, 공석(公奭)후손 엽(曄)이 공량(公亮)후손 忠男의 양자로 들어올 때, 형 엽(曄)을 따라 이거해 온 담(曇)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으며, 1980년대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在益(1938∼1983)은 그의 후손이다. 또한 공언(公彦)후손 일파가 이거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漢植(1962생)은 현재 연기군의회의원(2002년 당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 내용은 <안렴사공파 세보>와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책자를 저본으로 하여 몇가지 자료를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광산파> 19) 김척(金滌) 士廉(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城(성)---公亮(공량)의 3남(완,척,주)중 2남으로 태어난 안렴사공 7대손 김척은 가정계묘 무과급제하고, 통정 행안천목사를 지냈다. 후손들이 전라도 광산 (나주 본량면 매곡⇒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으로 이거하였다. 안렴사공 21대손 태봉현종은 안렴사공의 7대손 휘척(滌) 무통정 행안천목사의 묘소가 그의 아들인 휘仁男 원종공신충순위의 묘소 아래 모셔져 있어, 2002년 12월 23일 휘척 선조의 묘를 파묘하여 아드님묘소 위로 이안하고 둘레석과 의물을 갖추어 修補하여 영세시영토록 하였다. **도: 김척과 김인남 묘역
20) 김준(金俊) 안렴사공 14대손으로 1907년(순종4 경술) 6월15일, 대구에서 의병대장으로서 의거항왜하여 동생 伯(초명佑)과 모친과 함께 일문삼절하였다. <광주읍지>
<안렴사공파 세보>에 보면 仁男(인남)은 원종공신 충순위, 益昌(익창)은 진사 문과, 石+永(팽)은 통정 행하동현감, 天一(천일)은 무인 생원, 致興(치흥)은 무 어모, 進益(진익)은 효행 증동몽교관, 漢樞(한추), 聲彩(성채), 養淳(양순)은 무과, 養業(양업)은 무과 증시 문천 감목관, 聲贊(성찬)은 무과 훈련주부 첨추, 養老(양노)는 무과 선전관, 養信(양신)은 무 통정 가덕첨사겸 웅천 진수군절도사, 時達(시달)은 무과 무신 분무공신원종, 昇哲(승철)은 가선 행돈녕부도정 이며
현재 후손 在哲(재철)은 종사에 헌신하고 있으며, 사손가계(은회-태흥1947-범준1980)는 서울 도봉구 번동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안동김씨 대종회관 건립시 번동종중에서 희사한 토지를 매각한 경비로 회관 건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현재 번동종중회관을 건립운영하여 활발한 종사활동을 하고 있다. **도 : 번동종중회관
<화산군파> ■ 경기도 이천시 율면 本竹里 안동김씨 수백년 世居阡(세거천) ---부회장 斗會 <대종회보 제62호, 1998. 10> 경기도 이천시 율면 本竹里는 우리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문중의 집성촌이다. 이 곳에 우리 안동김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충렬공 현손 안렴사공 휘士廉의 7대손인 휘澍(주) 광국공신 화산군의 葬儀(장의)를 여주군 흥천면 歸白里에 모시고 이천시 율면 본죽리에 不 之位(부조지위)를 명받아 祠堂(사당)을 建竪(건수)함으로 이때부터 우리 안동김씨의 세거가 시작된 것이다. 화산군의 향사는 연 춘추 2회 (춘:한식일, 추:추석일)에 배향하고 있으며 화산군의 문집으로는 寓菴集 3권으로 天地人이 있는데 지파 후손인 안렴사공의 19대손 文演씨가 소장하고 있다. 요즈음 후손들이 공의 유적을 영구히 보존키 위하여 여주군 공보실에 자료 일체를 갖추어 지방문화재로 상신을 하고 있다. 이렇듯 공명하신고로 공의 현손대에 이르러 1室4孝가 배출하였으니 휘銑 (官은 贈통덕랑 사헌부지평)과 선의 제 銶 (贈조산대부 사헌부지평)와 구의 제 휘錫 (송우암시열 문하 사산감역불사 통훈대부 사헌부지평)과 그의 妹氏(당시 10세) 등 4남매가 그의 어머니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으시니 병환이 소생하여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서기 1753년 (영조 계유) 에 조정에서 증직을 하고 영조대왕께서 친필로 [一室四孝]라고 써서 賜額旌閭(사액정려)를 내리셨다. 그 정려가 폐허된 瓦家앞에 보존되어 있으며 일실사효라 쓴 영조의 친필현판은 종손인 22대손 起鎬씨가 보관하고 있다.
21) 화산군 김주 (金澍), 1512(중종7)∼1563(명종18).
字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庵), 안원군(安原君) 휘 공량(公亮)의 아들. 1531년(중종26) 진사(進士)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1544년 사가독서 (賜假讀書)를 했고, 내외직을 역임 후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개성 유수 ·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1563년(명종18)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이인임(李仁任)이 아닌 이자춘(李子春)이라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연경(燕京) 관사(館舍)에서 병으로 몰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관의 수의를 특사하여 서장관 李陽元으로 하여금 염습과 호상을 치르게 하였다.
1565년(명종20, 을축, 가정44)---1월, 여주 백양동 선영에 장사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고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등과 우의가 두터웠다. 선조(宣祖) 23년(1590)에 광국공신(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특히 8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 《우암 집(寓菴遺集)》이 있다.
*주. 팔문장(八文章) : 명종 15년 7월에 선발한 문장가들을 말하는 것으로 오상(吳祥)의 문집인 <부훤당집>(負暄堂集)에 의하면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서 정유길(鄭惟吉), 민기(閔箕), 심수경(沈守慶), 이량(李樑), 이이(李珥), 임수(林洙), 김주(金澍) 등이 선발되어,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음
<문단공 영정>
1. 영정 봉안일 : 2004. 7. 11 2. 영정 봉안처 : 경기도 여 주군 흥천면 귀백리 화산군 재실 3. 화가 : 벽해 김송배(僻海 金松培 화백)
<묘소>
<교지 소개> (2003. 11. 5)
1) 제공일시 : 2003. 11. 2. (충렬공 묘제시) 2) 소장자 : 영식(안렴사공파. 화산군 휘 澍 後孫) 3) 사진 인화 제공자 : 용주(안렴사공파. 화산군 휘 澍 後孫) 4) 교지내용 (1)일시 : 1790(정조14. 건륭55). 4. 11. (공 몰 후 227년) (2)내용 : 화산군에게 <贈輸 忠翼謨光國功臣正憲大夫 禮曹判書 兼 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花山君>에 추증하고 시호 文端을 내리는 교지
<국역 우암유집> 1. 발간 일시 : 2005. 2. 27. 2. 역자 : 심경호(고려대 교수) 3. 발간처 : 우암문집 간행추진위원회
<화산군 연보> (2003. 11. 8. 윤만(문) 제공) ■ 화산군 연보 1세(중종7, 1512, 임신, 정덕7)---9월 7일, 태어나다. 20세(중종26, 1531, 신묘, 가정10)---진사시에 합격하다. 28세(중종34, 1539, 기해, 가정18)---11월, 별시 문과에 장원하다. 29세(중종35, 1540, 경자, 가정19)---1월, 수찬이 되다. 6월, 정언이 되다. 30세(중종36, 1541, 신축, 가정20)---이조좌랑이 되다. 사가독서하다. 32세(중종38, 1543, 계묘, 가정22)---경기도사가 되다. 8월, 헌납이 되다. 9월, 부교리가 되다. 12월, 관북어사가 되다. 33세(중종39, 1544, 갑진, 가정23)---2월, 교리에 이어 시강원 문학이 되다. 4월, 좌문학이 되다. 사가독서하다. 모친상을 당하다. 36세(명종2, 1547, 정미, 가정26)---2월, 이조정랑이 되다. 7월, 의정부 검?이 되다. 8월, 의정부 사인이 되다. 10월, 부?교가 되다. 37세(명종3, 1548, 무신, 가정27)---4월, 경기어사가 되어 救荒을 잘 하는지 살피다. 5월, 장령이 되다. 7월, 부교리가 되다. 9월, 사간이 되다. 38세(명종4, 1549, 기유, 가정28)---3월, 부응교가 되다. 5월, 李洪胤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여 가자받고 兒馬 1필을 하사받다. 6월, 우부승지가 되다. 9월, 병조참지가 되다. 39세(명종5, 1550, 경술, 가정29)---5월, 좌승지가 되다. 이조 예조 참의를 지내다. 40세(명종6, 1551, 신해, 가정30)---남양부사, 도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다. 41세(명종7, 1552, 임자, 가정31)---3월, 부제학이 되다. 5월, 대사간이 되다. 9월, 한성부 우윤이 되다. 11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42세(명종8, 1553, 계축, 가정32)---2월, 대사헌이 되다. 대사성이 되어 사은사로 연경에 가다. 43세(명종9, 1554, 갑인, 가정33)---1월, 돌아와 곧 論賞 문제로 헌부의 논계를 받아 파직되다. 서용되어 이조 호조 참판을 지내다. 44세(명종10, 1555, 을묘, 가정34)---2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다. 5월, 왜구가 침입하자 전주부윤 李潤慶을 수성장으로 삼는 등 대응하다. 7월, 왜변 방비의 잘못으로 파직되다. 45세(명종11, 1556, 병진, 가정35)---8월, 개성부 유수가 되다. 47세(명종13, 1558, 무오, 가정37)---8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11월,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대사성이 되다. 49세(명종15, 1560, 경신, 가정39)---1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50세(명종16, 1561, 신유, 가정40)---7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다.
51세(명종17, 1562, 임술, 가정41)---9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10월, 한성부 좌윤이 되다. 52세(명종18, 1563, 계해, 가정42)---1월, 예조 참판이 되다. 홍문관 제학이 되다. <成川圖記>를 지어 올리다. 도총부 부총관이 되다. 5월, 종계개정진청사 겸 진하사로 연경에 가다. 황제의 윤허가 난 뒤, 9월 17일에 玉?館에서 졸하다. 황제가 예부에 명하여 治喪토록 하다. 예조판서에 추증되다. (명종20, 1565, 을축, 가정44)---1월, 여주 백양동 선영에 장사 지내다. (선조23, 1590, 경인, 만력18)---8월, 종계 개정의 공으로 수충익모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花山君에 추봉되다. (정조13, 1789, 기유, 건륭54)---6대손 禾+來가 문집을 간행하다. <김래의 跋> (정조14, 1790, 경술, 건륭55)---文端의 시호를 받다. (고종11, 1874, 갑술, 동치13)---후손 文演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김문연의 重刊跋> <신도비명(이돈우 찬), 연보,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함> <墓表陰記, 神道碑銘(李敦宇 찬), 한국계행보 등에 의함>
*<우암공 관련 자료 소개> 가. <친필 소개> 1)<근묵 서찰>
* 발견일 : 2002. 8. 13 * 발견인 : 金恒鏞(제) * 출전 : <槿墨(仁)>(성균관대 간. 1995. 87P.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 작성 연대 : 1544년 4월 17일 * 수신인 : 미상 * 원문 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제. 제주 문화재위원)
가.한문 해독 원문
專평(人+平) 以存 副以節? 深感厚意 無以爲喩 ?審台候萬重 慰豁十分 皆以不輕 論罪爲啓 而時未聞結末 必以判金吾 上知之遲而然也 等待亦可苦 奈何奈何 餘萬 非遠書可旣 不宣 伏惟 台下照 謹拜 上謝狀 甲辰 四月 十七日 弟澍頓
나. 번역문
특별히 종을 시켜 계절에 맞는 부채를 남겨주신 두터운 후의에 깊이 감사합니다만 알릴 길이 없었습니다. 대감께서 평안하심을 알게 되어 십분 위로가 됩니다.
모두들 가벼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논죄(論罪)하여 계(啓)를 하였다는데, 이때까지 결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판의금<判金吾> 때문에 상감께서 늦게 아시게 되어 그랬을 것입니다. 기다리기도 또한 괴롭습니다만 정말 어찌하오리까. 나머지 모든 것은 머지않아 편지로 나중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갖추지 못합니다. 삼가 대감께서 살펴보소서. 삼가 감사의 글을 올립니다. 갑진 (1544년. 중종39) 4월 17일 제(弟) 주(澍) 돈수
*<발견 시문 소개>
<三聖臺(삼성대)> (2002. 6. 26. 태영(군) 조사. 제공) 老龍擡首飮江流 (노룡대수음강류) : 노룡대 머리숙여 강물을 마시는듯 五月登臨爽愈秋 (오월등림상유추) : 한더위 오월에도 가을인가 의심하네 羽翰欲生頻擧腋 (우한욕생빈거액) : 깃나래 돗친듯이 겨드랑이 들먹이고 雲소파觸爲低頭 (운소파촉위저두) : 하늘은 찌를세라 고개나직 숙여지네 (하늘소) (두려워할파) 長空淡淡夕陽盡 (장공담담석양진) : 맑고맑은 하늘가 석양빛 짙어오고 遠水溶溶孤島浮 (원수용용고도부) : 출렁출렁 파도위 외로운섬 떠있구나 舒嘯一聲村木動 (서소일성촌목동) : 휘바람 불어가며 숲사이 거닐다가 杖藜乘輿下滄州 (장려승여하창주) : 청려장 휘어잡고 강가로 내려가네
2)친필 서찰
(1) 발견 일시 : 2002. 10. 25. (2) 발견자 : 김태영(군) (3) 출전 :<한국서화가인명사전>(범우사 발행. 한문영 저)
나. 우암유집 소개 1)<우암유집 >-- 규장각 소장본 (2002. 2. 26. 항용(제) 조사. 제공) 출전 : 규장각 소장본 (복사본) 2) <우암집>(중간본)-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2003. 4. 12. 발용(군) 제공)
내용 : 목활자본. 6권 3책. 저자의 6대손이 1789년(정조 13) 수집 간행하였고, 후손 문연(文演) 등이 1874년(고종 11)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주연(胄演)의 발문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권1에 시 67수, 권2에 서(書) 1편, 소(疏) 3편, 계(啓) 25편, 차(箚) 10편, 권3에 고양세고서(高陽世稿序) 1편, 응제성천도기(應製成川圖記) 1편, 명(銘) 3편, 교서 1편, 논(論) 8편, 표(表) 3편, 책(策) 1편, 권4~6은 부록으로 유사(遺事)와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3) <우암집>(초간본)--영환 소장본 소개 (2003. 4. 10. 발용(군) 제공) 1) 입수일시 : 2003. 4. 10일 경 2) 입수자 : 김영환(문온공파) 3) 입수처 : 전문 경매처-<코베이> 4)출판일시 : 1789년(정조13) 5)편집 간행자 : 6세손 래 6) 판본 : 속판본(7권 1책 )
4) <우암유집>(중간본)-후손 金容周 소장본 (소장본 관람-2003. 12. 13. 용주(안) 제공. 사진-2003. 12. 15. 발용(군) 제공)
1)판본 : 목판본(6권 3책) 2)출판 일시 : 1934년 3)중간본 편집자 :김문연(文演) 보완. 4)내용 : 이복원(李福源)의 서문. 문연(文演), 주연(胄演)의 중간발문(重刊跋文)이 있음 3)소장처 : 현재 후손들이 약 10여 권 소장하고 있음 5)중간본 편집자 소개 (2003. 12. 12. 주회(안) 제공) * 김문연(金文演) 1900년대 전반 외부주사를 지냈고, 많은 종사활동과 저술활동을 하였다. ○ 1919년 항우전, 몽학지남, ○ 1926년 안렴사공파 세보 <병인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 1933년 노정 김재철 조문객 명단에 문연, 주연 등이 함께 명단이 있고, ○ 1934년 주연 등과 함께 우암집을 보완 중간하고 권말에 전 외부주사 문연이 중간발을 썼다. ○ 1935년 대동보 <을해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 1940년(庚辰 仲夏) 안동 녹전 죽송리 재실 음수재 현판을 書하였다. ○ 족보에 김문연 찬 [원류고증] 이 있다.
6) 문집 관련 각종 자료 소개 (1)■ 한국문집총간 해제2 (2003. 6. 12. 주회(안) 제공) P40. [152] 寓庵遺集 출전 : 우암선생유집(우암유집). 목판본. 1789년刊. 7권1책. 10행20자. 21.9×15.1(cm). 上白魚尾. 규장각장본(奎6516). 叢刊33.
⊙ 저자 金澍 : 1512년(중종7)∼1563년(명종18). 자는 應霖. 호는 寓庵, 萬窩. 본관은 안동. 시호는 文端. 봉호는 花山君. 이황, 김인후, 임형수와 교유. 정유길, 심수경 등과 함께 8문장으로 불림.
⊙ 가계 성(城, 군수)---공량(公亮, +전의이씨, 현감 팽혜의 녀)---1)완(浣, 현감), 2)척(滌, 첨중), 3)주(澍, 전주이씨 진양수 渶의 녀)
주(澍)---1)正男(좌랑, +具삼수변幹의 녀), 2)厚男(감찰, +李王+咸의 녀), 3)季男(현감, 安景武의 녀), 1녀+尹儼(좌랑), 2녀+李世良(사인), 3녀+鄭文承(사인), 4녀 <墓表陰記, 神道碑銘(李敦宇 찬), 한국계행보 등에 의함>
⊙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조선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겨 自編인지 후손에 의해 편찬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詩文集으로 家傳되어 오던 것이 7책이었는데, 왜란과 호란을 겪는 와중에서 대부분 유실되었다. 다만 ★南龍翼이 만든 <箕雅(기아)>와 邑誌에 저자의 작품이 실려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6대손 ★래가 집안 내에 소장되어 있던 禁宴應製詩, 저자가 方伯으로 있을 때 관내 州縣의 亭宇에 題詠한 것, 成川圖記, 論, 表 등을 모으고, <초두빼고蘇齋集> 등에 나오는 저자에 관한 기록과 ★래의 종질 ★得顯이 수집한 자료를 합하여 遺事를 만들고, ★李福源의 序를 받아 모두 7권1책으로 엮어 을유면(1789, 정조13)에 木版本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6516)과 장서각(4-6337)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뒤 후손 ★文演이 세상에 전하고 있는 乙酉本의 소략함을 한탄하여 다시 諸家의 家藏, 名山의 秘藏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 후손 ★胄演 등의 도움을 받아 1874년(고종11)에 6권3책의 活字本으로 중간하였다. <중간본> 여기에는 書, 疏箚(소차), 啓(계)가 새로 들어가고 詩와 銘, 論은 추가되고, 부록으로 墓表陰記와 神道碑銘 등이 새로 들어가고 遺事가 증보되고, 年譜가 새로 들어갔는데, ★文演은 書牘(서독), 箴(잠), 頌(송)이 미비함을 애석해 하였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781)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89년에 후손 ★래가 간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본이다.
<序(이복원 찬), 跋(김래 찬), 重刊跋(김문연, 김주연 찬) 등에 의함>
⊙ 저본의 구성과 내용
본집은 7권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에 ★이복원의 序와 總目(총목)이 실려 있고, 권별로 目錄이 따로 붙어 있다.
권1-4는 詩이다. 고시 오언과 칠언, 근체시 오언과 칠언, 율시 오언과 칠언으로 분류되어 저작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전체 시의 편수가 87수에 불과하다. 저자의 시는 <箕雅(기아>에 실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복원의 序에서는 <題安分堂> 시의 작품성을 강조하였다. 지방관을 지내면서 남긴 작품이 다수이니, 경기도사 시절에 지은 <陽城>, <麻田東軒韻> 등, 남양부사 시절 지은 <南陽>, 전라도관찰사 시절에 지은 <金堤東軒韻>, <臨陂集勝樓韻> 등, 황해도관찰사 시절의 <友蓮閣>, <文化東軒>, <豊川八景>, <松禾照鏡軒> 등이다.
권5는 序, 記, 銘, 墓碣銘이다. 저자의 처조모 ★고양신씨와 관련한 <高陽世稿序>, ★명종이 내린 成川圖에 대해 지은 <應製成川圖記>,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은 <題扇子(제선자)>, 숙부 ★金公奭의 묘갈명이다.
권6은 論, 策, 敎書, 表이다. 논 4편은 張良, 裵矢+巨, 王朝, 鄧伯道에 관한 것이고, 책은 인품의 고하를 논한 <人品策>이며, 교서는 황해도관찰사 ★趙士秀에게 내린 것이다. 표는 科體로 <趙普謝雪夜微行(조보사설야미행)>, <蔡仲謝封蔡(채중사봉채)> 등 3편이다.
권7은 후손 ★김래와 ★김득현이 만든 遺事와 1789년 ★이복원이 지은 諡狀이다. 유사는 <호음집>, <소재집>, <호당록>, 野乘(야승) 등 각종 기록에서 저자 관련 사실들을 수집하여 엮은 것인데 각 語句 아래에 출전을 밝혀 놓았다.
맨 끝에 ★김래의 跋이 있다. [鄭弼溶]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암집 (寓菴集 ) 조선 중기의 문신 ★김주(金澍)의 시문집. 6권 3책. 목활자본. 1789년(정조 13) 6대손 내( )가 편집, 간행하였고, 1874년(고종 11) 후손 문연(文演) 등이 보완,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 주연(胄演)의 중간발(重刊跋)이 있다. 권1에 시 67수, 권2에 서(書) 1편, 소(疏) 3편, 계(啓) 25편, 차(箚) 10편, 권3에 서(序) 1편, 기(記) 1편, 명(銘) 3편, 교서 1편 논(論) 8편, 표(表) 3편, 책(策) 1편, 부록인 권4 ∼ 6에 유사와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 중에는 저자가 관학유생(館學儒生)으로 있을 때 보담(寶曇) · 행사(行思) 두 중의 목을 베고 봉선(奉先) · 봉은(奉恩) 두 절을 훼철할 것을 제의한 〈 청참승훼사소 請斬僧毁寺疏 〉 가 있다. 계에는 중국의 금제품을 들여오지 말라는 〈 물무중조금물계 勿貿中朝禁物啓 〉 , 마정의 폐단을 지적한 〈 마정정리계 馬政整釐啓 〉 와 그 밖에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및 권신 이기(李?)를 탄핵한 내용들이 있다. 차는 〈 시폐진면차 時弊陳勉箚 〉 · 〈 납충벽이차 納忠闢異箚 〉 · 〈 금억승도차 禁抑僧徒箚 〉 등으로 모두 사료적 가치가 높다. 〈 응제성천도기 應製成川圖記 〉 는 임금이 내린 성천도에 대하여 지은 기문으로, 성천의 지리와 풍토, 그리고 군사적 · 경제적 중요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논은 모두 중국의 인물을 평한 것이며, 책은 인품의 고하를 따지는 〈 인품책 人稟策 〉 이다. 부록에는 저자의 행적을 적은 기록 이외 이황(李滉) · 김인후(金麟厚) · 임백령(林百齡) 등 당시 명현들의 창수시(唱酬詩)인 〈 제공창수 諸公唱酬 〉 가 있다. 규장각도서 ·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우암집 조선 중기의 문신 ★김주의 시문집. 1789년(정조 13)에 간행되었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차 부분.
다. 친필 발견 소개 (2003. 5. 19. 태서(익) 제공)
1. 발견일 : 2003. 5. 19. 2. 발견자 : 김태서(익) 3. 출전 : 한국 정신문화원. <원문 해독 및 번역> (2004. 6. 18. 항용 제공) *해독 및 해석 : 김익수(제)
未惟冬寒 令體履神日拜仰區區之00 崔公來致 令監下問之辭仍副以海大直付 於親廚絶饌之時深感 厚注使最00000 微而昏病瀟留關000 玆未遂意罪新當該病 聞逢敍一一姑先行後 起瞻萬萬不宣伏惟 令下鑑謹拜上候狀 癸丑 至月 卄七日 戚侄 金澍 頓
<제주도 문화재위원 김익수 해독 및 번역> 추운 겨울에 영감께서 잘 지내시는지요. 날마다 우러러 뵙고 싶은 생각은 구구....합니다. 최공(崔公)이 와서 영감의 안부를 묻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에 부응하여 어버이에게 해대(海大)를 부쳐주었으니 부엌에 반찬이 떨어질 때라 너무 후의를 베푸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 미약하고 혼미하나 병이 나아지면 관(關)에 머물고 ........입니다. 지금 뜻대로 이루지도 못 했는데 이 병을 앓고 보니 죄가 새로 더 붙을 것입니다. 듣고 접했던 것들을 일일이 말씀드리고 싶지만 잠시 먼저 가는 편에 안부를 묻습니다. 모든 것을 다 적지 못합니다. 삼가 오직 영감께서 살펴보소서. 삼가 안부 글을 올립니다. 계축(1553) 동짓달 27일 척질 김주 돈수
*주 1) 본 간찰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되어 있음. 그런데 원본 소장처와 이동 경로는 알수 없음(정문연 관계자의 답) 2) 상기 서찰에 대한 추측 (2004. 6. 19. 주회(안) 제공) (1) 영감은 화산군의 숙부인 도정공(김공석)으로 봄. 도정공 : 병마절도사(종2품), 병조참판(종2품)을 역임하였기에 令監(종2, 정3품 당상관)으로 호칭된 것 같음. 1553년 몰하심. (2)화산군(김주) 께서는 1553년 계축년 ?월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연경에 사은사로 가셨다가, 이듬해 1월에 돌아오셨음. 추운 겨울, 동짓달 27일 留關하고 계시다면 상기 서찰은 중국에 계실 때 작성한 것으로 봄.
**화산군 묘와 신도비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
<묘소>
▲ 신 신도비
▲ 구 신도비
▲구신도비 탁본
■ 화산군 약력 ○1512(중종7)-1563(명종18)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應霖(응림). 호는 寓菴(우암), 萬窩(만와). 안렴사공의 7대손이다. ○1512년(중종7년 임신)에 안원군 휘公亮과 전의이씨(이팽혜의 녀)의 사이에 3남(완,척,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531년(중종26년 신묘)에 진사가 되시고, 1530년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544년 사가독서 (賜假讀書)를 했고, 내외직을 역임 후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개성 유수·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대사헌 부제학 송도유수 전라도 황해도 양도 감사를 거쳐 文衡(문형)으로 薦擧(천거)되었고, 또 한성좌우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참판과 양관제학을 지내셨다. ○1555년(명종10)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관찰사 김주(金澍)는 이윤경을 영암 현장으로 파견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이윤경은 왜적을 물리쳐서 성을 잘 지켰으며 그 공로로 전라감사에 승직되었다 <이윤경(李潤慶)의 문집 숭덕재유고 (崇德齋遺稿)> ○1563년(명종18년 계해) 제학으로 있을 때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이인임(李仁任)이 아닌 이자춘(李子春)이라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1563년 9월 17일 향년 52세로 연경(燕京) 관사(館舍)에서 병으로 죽었다. 명나라 황제가 관의 수의를 특사하여 서장관 李陽元으로 하여금 염습과 호상을 치르게 하였다. 是年에 명나라 황제가 예조판서에 양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1590년(선조23)에 광국공신 3등에 화산군을 봉하고 부조지위를 명하고 文端이란 諡號(시호)를 내렸다. ○공은 풍채가 장엄하시고 도량이 넓으시고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셔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치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등과 우의가 두터웠다. 문장에 뛰어나 오상(吳祥)·민기(閔箕)·정유길(鄭惟吉)·심수경(沈守慶) 등과 함께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우암 집>이 있다. ○諡狀(영상 이복원 찬), 신도비명(이돈우 찬, 후손 김연하 서), 유고 1권(후손 김택연 家), 필적 8각병풍서 (후손 김연문 家) ○ 배위 전의이씨(진양수 渶의 녀)와의 사이에 3남 4녀를 두었다. 1)正男(좌랑, +具삼수변幹의 녀), 2)厚男(감찰, +李王+咸의 녀), 3)季男(현감, 安景武의 녀), 1녀+尹儼(좌랑), 2녀+李世良(사인), 3녀+鄭文承(사인), 4녀. 윤민헌(尹民獻)은 1562(명종 17) ∼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이(李珥) ·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 화산군 연보 1세(중종7, 1512, 임신, 정덕7)---9월 7일, 태어나다. 20세(중종26, 1531, 신묘, 가정10)---진사시에 합격하다. 28세(중종34, 1539, 기해, 가정18)---11월, 별시 문과에 장원하다. 29세(중종35, 1540, 경자, 가정19)---1월, 수찬이 되다. 6월, 정언이 되다. 30세(중종36, 1541, 신축, 가정20)---이조좌랑이 되다. 사가독서하다. 32세(중종38, 1543, 계묘, 가정22)---경기도사가 되다. 8월, 헌납이 되다. 9월, 부교리가 되다. 12월, 관북어사가 되다. 33세(중종39, 1544, 갑진, 가정23)---2월, 교리에 이어 시강원 문학이 되다. 4월, 좌문학이 되다. 사가독서하다. 모친상을 당하다. 36세(명종2, 1547, 정미, 가정26)---2월, 이조정랑이 되다. 7월, 의정부 검?이 되다. 8월, 의정부 사인이 되다. 10월, 부?교가 되다. 37세(명종3, 1548, 무신, 가정27)---4월, 경기어사가 되어 救荒을 잘 하는지 살피다. 5월, 장령이 되다. 7월, 부교리가 되다. 9월, 사간이 되다. 38세(명종4, 1549, 기유, 가정28)---3월, 부응교가 되다. 5월, 李洪胤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여 가자받고 兒馬 1필을 하사받다. 6월, 우부승지가 되다. 9월, 병조참지가 되다. 39세(명종5, 1550, 경술, 가정29)---5월, 좌승지가 되다. 이조 예조 참의를 지내다. 40세(명종6, 1551, 신해, 가정30)---남양부사, 도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다. 41세(명종7, 1552, 임자, 가정31)---3월, 부제학이 되다. 5월, 대사간이 되다. 9월, 한성부 우윤이 되다. 11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42세(명종8, 1553, 계축, 가정32)---2월, 대사헌이 되다. 대사성이 되어 사은사로 연경에 가다. 43세(명종9, 1554, 갑인, 가정33)---1월, 돌아와 곧 論賞 문제로 헌부의 논계를 받아 파직되다. 서용되어 이조 호조 참판을 지내다. 44세(명종10, 1555, 을묘, 가정34)---2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다. 5월, 왜구가 침입하자 전주부윤 李潤慶을 수성장으로 삼는 등 대응하다. 7월, 왜변 방비의 잘못으로 파직되다. 45세(명종11, 1556, 병진, 가정35)---8월, 개성부 유수가 되다. 47세(명종13, 1558, 무오, 가정37)---8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11월,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대사성이 되다. 49세(명종15, 1560, 경신, 가정39)---1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50세(명종16, 1561, 신유, 가정40)---7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다. 51세(명종17, 1562, 임술, 가정41)---9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10월, 한성부 좌윤이 되다. 52세(명종18, 1563, 계해, 가정42)---1월, 예조 참판이 되다. 홍문관 제학이 되다. <成川圖記>를 지어 올리다. 도총부 부총관이 되다. 5월, 종계개정진청사 겸 진하사로 연경에 가다. 황제의 윤허가 난 뒤, 9월 17일에 玉?館에서 졸하다. 황제가 예부에 명하여 治喪토록 하다. 예조판서에 추증되다. (명종20, 1565, 을축, 가정44)---1월, 여주 백양동 선영에 장사 지내다. (선조23, 1590, 경인, 만력18)---8월, 종계 개정의 공으로 수충익모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花山君에 추봉되다. (정조13, 1789, 기유, 건륭54)---6대손 禾+來가 문집을 간행하다. <김래의 跋> (정조14, 1790, 경술, 건륭55)---文端의 시호를 받다. (고종11, 1874, 갑술, 동치13)---후손 文演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김문연의 重刊跋> <신도비명(이돈우 찬), 연보,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함> <墓表陰記, 神道碑銘(李敦宇 찬), 한국계행보 등에 의함>
■ 화산군 가문은 퇴계학맥의 정통 성리학 가문 1)퇴계 이황 등과의 교유 ○퇴계의 문집인 <퇴계집>에 퇴계 이황이 화산군 김주와 호당에서 사가독서시절 교유한 시 12수가 실려 있다. 그리고 임형수의 금호유고에 1, 洪暹의 인재집에 1, 김인후의 하서전집에 2, 丁?의 유헌집에 1, 김세필의 十?軒集에 1, 高??의 태촌집에 1, 유세명의 우헌집에 1, 沈?의 樗村遺稿1에 1, 이복원의 쌍계유고에 1(시장) 건의 화산군 김주관련 시문이 실려있다. 그런데 화산군 문집 <우암유고(寓菴遺稿)>7권이 있는데, 화산군 사후 200여년 뒤에 편집된 목판본으로 호당에서 독서할때 지은 시는 한수도 수록 되어있지 않다. 아마 임진난을 겪는 사이에 당시의 많은 시 작품들이 유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書堂: 호당 이라고도 하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장소. 곧 독서당을 말함. 사가독서는 세종때 신숙주, 성삼문 등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학자들을 독서하게한 상사독서(上寺讀書)에서 비롯되어 세조와 연산군때는 일시 폐지 되었다가 중종때 다시 부활 되었다. 1507년 지금의 동대문 숭인동에 있는 정서원을 독서당으로 많들었다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의 정자를 고쳐 동호독서당 이라고 하였다. 이로 부터 몇차례 옮기기는 하였으나 명칭 자체는 바뀌지 않고 임진왜란때까지 계속 독서의 장소및 도서관의 기능을 수행 하였다. "옛날 용산사(龍山寺)를 성종조에 이르러 서당이라 고치어 글을 읽게 하였으며, 뒤에 두모포 남쪽으로 옮겼고 중종때에 다시금 동호(東湖) 송암(松菴) 서녁기슭에 터를 잡아서 호당(湖堂)이라고 일렀다." 퇴계는 이 호당의 남쪽 다락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회문당(會文堂)이라 이름 하였는데 이 서당에서 김주,하서 김인후,민기,임형수등과 글을 읽으며 시작(詩作)을 주고 받았다".한다. ○퇴계는 43세 11월에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을 받았으나 부임 하지않고 고향에 머물러 있다가 김주가 보내온 편지에 답하면서 향리에 벼슬을 부탁한다. 그리하여 2월에 홍문관 교리로 다시 서울로 퇴계를 불려 올리었다. 이때 김주는 전랑으로 있을때였다. ○전랑(銓郞)은 조선시대 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정5품관인 정랑(正郞)과 정6품관인 좌랑(佐郞) 직을 통칭하는 말이다. 전랑은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가장 중요한 청요직(淸要職) 가운데의 하나로 주로 홍문관 출신의 젊고 명망있는 문신 중에서 선임되었다. ○응림, 이때 상을 당하여 성중에 머물러 있었다. ○신축년(41세)에 지은 <독서당에서 임금님이 내리신 복숭아와 은잔을 받고서 임사수, 정길원, 김응림과 더불어 동호에 배를 띄우고 놀면서, 임금님의 은총을 특별히 받은 것을 크게 떠벌려 자랑하였다. ○퇴계는 다시 서울에 올라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하였다. 3월 12일에 이 시에 나오는 두 사람이 찾아온 기록이 보인다.
2) 화산군 가문과 퇴계 학맥 ○화산군 ★김주는 모재 김안국의 門人으로 한양에서 호당에 계실 때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등과 교유가 깊어서, <퇴계문집>에 교유시 여러 편이 실려 있고, 참고로 퇴계 이황도 ---34세 때에 ♠여주에 은거중인 모재 김안국을 권발과 같이 尋訪(심방)했으니 이때부터 퇴계의 견문이 많이 넓어졌고 --- 라는 기록으로 볼 때 모재 김안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모재 김안국은 (안렴사공파) ★김공언과 교유가 있었으며, 김공언의 아버지이신 ★김지의 묘갈을 찬하기도 하여 <모재집>에 실려 있다. 또한 퇴계 이황과 교유한 조선조 중기의 명필 송인은 ★김공석의 묘비(신도비)를 서하고, 김공석의 동생인 ★김공망의 묘비(묘갈)를 찬하기도 하였다.
○김공량의 손자 ★김충남은 퇴계의 문인이며, 김공망의 후손 ★김억려는 퇴계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서운관정공파 김희수는 ★(종손-1성-)김공망과 관직생활을 같이 하였으며, 아들 김로는 ★김공량의 묘갈(정사룡 찬)을 서하였고, ★(종손-2지(3계)-)김공예의 묘갈(성세창 찬)을 서하였으며, 아들 김홍도는 퇴계의 문인이다.
<김종손---②김지---②김공언> ★김공언은 모재 김안국과 교유하였고, 김안국은 ★김지의 묘갈을 찬하였으며, 김안국은 퇴계 이황과 화산군 ★김주의 스승임 <김종손---①김성---①김공량 ②김공석 ③김공망> 김공량의 아들 ★김주는 퇴계와 교유하였고 손자 ★김충남은 퇴계의 문인이며, 김공망의 후손 ★김억려는 퇴계의 문인이며, 퇴계와 교유한 송인은 ★김주가 찬한 ★김공석의 묘비(신도비)를 서하고, ★김공망의 묘비(묘갈)를 찬하였음
송질묘비(재양주) : ★성세창 문, ★김로 서, 박영 전 남변묘표(재광주) : ★김안국 문, ★김로 서 김공석묘갈(재여주) : ★김주 문, ★송인 서 김공망묘비(재양주) : ★송인 문, 김이 서, 김무 전 김공량 묘비 : ★정사룡 찬, ★김로 서 김공예 묘갈 : ★성세창 찬, ★김로 서 김희수 묘비 : ★심정 찬, ★김로 서 김로 묘비 : ★정사룡 찬, ★송인 서, ★신효중 전액
3) 1900년대 초반의 유학 가문 유생들의 명부인 1928년 해동청금록(海東靑衿錄), 1929년 <조선청금록>에 등재된 화산군 후손은 다음과 같다. --권1 경기도 광주군 ★김사필(金思弼) 여뢰(汝賚) 류암(柳庵) 안동인(安東人) 변무공신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참봉(參奉) ★김재형(金在衡) 천교(天交) 우암(又岩) 안동인(安東人) 변무공신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직원(直員) --여주군 ★김세경(金世卿) 문백(文百) 만포(晩浦)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이천군 원(元) 음죽(陰竹:경기도 이천 일부와 충북 음성군에 걸쳐 있던 지명) ★김각경(金珏卿) 우일(佑一) 송석(松石) 안동인(安東人) 변무공신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의관(議官) --권5 충청남도 홍성군 원 결성(結城:현 충남 홍성군 일부 지역) ★김원회(金元會) 종린(鍾麟)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김연규(金演圭) 치정(致貞) 시남(枾南)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枾 - 시(?)의 본자(本字) ★김영회(金英會) 공일(供日)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예산군 원 대흥(大興:현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일대) ★김두회(金斗會) 주원(周元) 서암(瑞岩)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유문학(有文學) --권7 전라남도 장성군 ★김연하(金演夏) 벽농(碧農) 안동인(安東人)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군수(郡守) 문학덕행 당세아유(文學德行 當世雅儒)
■ 우암사(寓菴祠) **우암사 (이천 율면 본죽리)
◇본죽리(本竹里) 우암사(寓菴祠) 율면 본죽리 밤골부락 상단에 있는데 퇴락(頹落)하여 정문(正門)과 담장은 무너진지 오래고 남아있는 사당 건물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너져 가고 있다. 명종 때 사람인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사당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초서(草書)에 능했다고 한다. <이천시지>
◇안렴사공 7대손 澍 사당건립 ---泰相 본래 화산군의 사당은 이천군 율면 본죽리 후산 현 위치에 보존되어 왔었으나 불행히도 6.25 사변으로 인하여 관리가 소홀하여 완전 폐허가 되어 복원하기엔 속수무책으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변후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에 사당복원 문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소종중에서는 복원건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해 왔으며 복원해야 한다는 뜻은 이구동성으로 일치하였으나 소종중에는 재정이 없었으며 서로 만나면 걱정만 하고 있던 중 마침내 고향을 떠났던 안렴사공 21대손 泰相 현종 (현 안성축협 전무)께서 모친께서 늘 사당복원을 말씀하심이 여러차례이어서 어머님 (경주김씨) 생전에 소원을 풀어 드리고자 거액을 선뜻 獻誠(헌성)함으로 엄두도 못냈던 사당복원 공사를 시작함으로 諸宗의 기쁨이 충만하여 그후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사를 착공한 후 태상 종친은 공무에도 바쁜 가운데 직접 공사를 지휘감독하고 휴일이면 자손까지 동원하여 일을 도움으로 마침내 훌륭한 사당을 준공하여 영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永世是安을 告由하니 온 문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태상 현종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표창패를 수여하였다.
<우암공 후손(휘 계남 계열) 가계도> (2005. 6. 3. 용주(안) 제공)
김주-정남-후남-계남 협- 경기. 석기. 덕기. 황(생원)-성징(통정대부.현감)현종. 권(진사.정언)숙종. 운항(통덕랑)숙종. 문 (문과.진사) 현필(무과.평산부사.신미병판겸동지의금부사)영조. 병호(무과.칠곡부사겸대구진관)정조. *사익(경상병마절도사겸황주진관) 헌종. *재우(선산군수) 선회
위의 가계는 문단공 3남이신 계남 선조님 가계인데 지난 1980년 및 을해보 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1920년대에 발행한 대보에 기록이 자세하게 되어있습니다. 안렴사공파에 병마절도사는 공석.수남.두 분뿐인 줄만 알고 있었으나 한 분이 더 계십니다. 전혀모르고 있었습니다
■ 광국공신(光國功臣) 광국공신녹권 (하회마을 충효당 영모각 소장)
조선시대에 종실의 계통을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조선 태조의 세계(世系)가 명나라 ≪ 대명회전 大明會典 ≫ 에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되자, 이를 정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절을 파견, 종계의 개정에 성공하였다. 이에 1590년(선조 23) 그 동안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오거나 또는 주문(奏文)을 지은 이로서 공로가 뚜렷한 사람 19인을 선정, 이들을 다시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논공한 뒤 공신에 책봉하였다. 삼등은 9인으로, 생전에 종계변무의 주문을 지은 기대승(奇大升)에게 덕원군(德原君)을, 1563년(명종 18)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객사에서 죽은 ★김주(金澍)에게 화산군(花山君)을 각각 추봉하였다. 이 밖에 이양원(李陽元)에게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을, -----유성룡(柳成龍)에게 풍원부원군( 淵 原府院君)을,-----각각 봉하고, 이들을 수충공성광국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이라 칭하였다. *유서애유물/국주공신녹권 : 1590년 8월 한석봉이 쓴 광국공신녹권. 개인소장. *광국지경록 : 조선 선조 때의 종계변무(宗系辨誣) 완수를 축하해 펴낸 시집. 1책. *속광국지경록 : 청(淸) 사서(史書)에 기록된 잘못된 조선 종계(宗系)를 바로잡아 편찬한 책. *광국공신회맹록 : 1등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여 윤근수 등 3명, 2등은 수충공성익모광국공신이라 하여 이후백(李後白) 등 7명, 3등은 수충공성광국공신이라 하여 김주(金澍) 등 9명이다.
■ 우암유집(寓庵遺集)과 김주의 草書
◇우암유집(寓庵遺集) 우암선생유집(우암유집). 목판본. 1789년刊. 7권1책. 10행20자. 21.9×15.1(cm). 上白魚尾. 규장각장본(奎6516). 叢刊33. 저자는 조선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겨 自編인지 후손에 의해 편찬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詩文集으로 家傳되어 오던 것이 7책이었는데, 왜란과 호란을 겪는 와중에서 대부분 유실되었다. 다만 ★南龍翼이 만든 <箕雅(기아)>와 邑誌에 저자의 작품이 실려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6대손 ★래가 집안 내에 소장되어 있던 禁宴應製詩, 저자가 方伯으로 있을 때 관내 州縣의 亭宇에 題詠한 것, 成川圖記, 論, 表 등을 모으고, <초두빼고蘇齋集> 등에 나오는 저자에 관한 기록과 ★래의 종질 ★得顯이 수집한 자료를 합하여 遺事를 만들고, ★李福源의 序를 받아 모두 7권1책으로 엮어 을유면(1789, 정조13)에 木版本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6516)과 장서각(4-6337)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89년에 후손 ★래가 간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본이다.
그뒤 후손 ★文演이 세상에 전하고 있는 乙酉本의 소략함을 한탄하여 다시 諸家의 家藏, 名山의 秘藏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 후손 ★胄演 등의 도움을 받아 1874년(고종11)에 6권3책의 活字本으로 중간하였다. <중간본> 여기에는 書, 疏箚(소차), 啓(계)가 새로 들어가고 詩와 銘, 論은 추가되고, 부록으로 墓表陰記와 神道碑銘 등이 새로 들어가고 遺事가 증보되고, 年譜가 새로 들어갔는데, ★文演은 書牘(서독), 箴(잠), 頌(송)이 미비함을 애석해 하였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781)에 소장되어 있다. <序(이복원 찬), 跋(김래 찬), 重刊跋(김문연, 김주연 찬) 등에 의함> <한국문집총간 해제2>
○[도서해제]와 [안동김씨족보]에 의하면 "文章과 言議에 뛰어났었고, 퇴계이황, 하서김인후, 금호임형수 등과 친하였으며 초서를 잘 썼다." <한국서예사, 金基昇, 1975, 정음사> ○문장 도학에 뛰어나 이황 김인후 임형수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저서>寓菴遺集 *도 김주필적 <한국서화가인명사전, 2000, 한문영, 범우사>
**도 : 필적1) 槿墨(仁) (오세창, 1995, 성균관대학교박물관, 解題 任昌淳)(서간-초서) **도 : 필적2) 우암집 유묵 1점 **도 : 필적3) 한국서화가인명사전 1점 **도 : 필적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간찰 1점
작성일 : 2003/05/29 08:06 (from:211.114.248.22) 조회 : 36 <우암유집>(규장각 소장. 2002. 2. 항용 조사. 제공) *<관련 자료 소개> 1) <친필서찰 번역문 소개> * 발견일 : 2002. 8. 13 * 발견인 : 金恒鏞(제) * 출전 : <槿墨(仁)>(성균관대 간. 1995. 87P.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 작성 연대 : 1544년 4월 17일 * 수신인 : 미상 * 원문 해독 및 번역인 : 金益洙(제)
가. 한문 해독 원문 專 以存 副以節 深感厚意 無以爲喩 審 台候萬重 慰豁十分 皆以不輕 論罪爲啓 卽時 未聞結末 如似判金吾上知之遲卽然也 等待亦可苦 奈何奈何 餘萬 非遠書可免不宣 伏惟 台下照 謹拜 上謝狀 甲辰 四月 十七日 弟澍頓
나. 번역문 오로지 살아남게 하랴, 절삽(節 )에 따르랴 하시는 두터운 뜻을 깊이 느끼며, 깨우쳐 주신 것으로 여깁니다. 하물며 대감님의 건강을 살펴야 함에야. 십분 명심하라고 위로하신 것, 모두 가벼이 하지 않겠나이다. 죄를 논하여 계(啓)를 하였다 하나 즉시 그 결말을 미처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판의금부<判金吾>가 상감께 늦게 알려서 곧 그랬을 것 같습니다. 기다리기가 또한 괴로우니 정말 어찌하오리까. 나머지 모든 것이 멀리서 보내는 편지인지라 갖추지 못했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삼가 대감님께서 살펴보소서. 근배. 감사의 글월 올립니다. 갑진(1544) 4월 17일 제 주(澍) 올림.
※주1 - 절삽(節삽) : 미상 주2 - 상감 : 명종 추정 주3 - 김 주(金 澍) 1512(중종7)∼1563(명종18).
*<발견 시문 소개> <三聖臺(삼성대)> (2002. 6. 26. 태영(군) 조사. 제공) 老龍擡首飮江流 (노룡대수음강류) : 노룡대 머리숙여 강물을 마시는듯 五月登臨爽愈秋 (오월등림상유추) : 한더위 오월에도 가을인가 의심하네 羽翰欲生頻擧腋 (우한욕생빈거액) : 깃나래 돗친듯이 겨드랑이 들먹이고 雲소파觸爲低頭 (운소파촉위저두) : 하늘은 찌를세라 고개나직 숙여지네 (하늘소) (두려워할파) 長空淡淡夕陽盡 (장공담담석양진) : 맑고맑은 하늘가 석양빛 짙어오고 遠水溶溶孤島浮 (원수용용고도부) : 출렁출렁 파도위 외로운섬 떠있구나 舒嘯一聲村木動 (서소일성촌목동) : 휘바람 불어가며 숲사이 거닐다가 杖藜乘輿下滄州 (장려승여하창주) : 청려장 휘어잡고 강가로 내려가네
<영상시>(2002. 6. 27. 태서(익) 제작, 제공)
2) 우암집 소개 (2003. 4. 12. 발용(군) 제공) 출전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우암집> 내용 : 목활자본. 6권 3책. 저자의 6대손이 1789년(정조 13) 수집 간행하였고, 후손 문연(文演) 등이 1874년(고종 11)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주연(胄演)의 발문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권1에 시 67수, 권2에 서(書) 1편, 소(疏) 3편, 계(啓) 25편, 차(箚) 10편, 권3에 고양세고서(高陽世稿序) 1편, 응제성천도기(應製成川圖記) 1편, 명(銘) 3편, 교서 1편, 논(論) 8편, 표(表) 3편, 책(策) 1편, 권4~6은 부록으로 유사(遺事)와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3)<우암문집> 입수 소개 1. 입수일시 : 2003. 4. 10일 경 2. 입수자 : 김영환(문온공파) 3. 입수처 : 4. 내용 : 목활자본. 7권 1책(상기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을 다시 7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 아닌가 함) 5. 목차 소개 寓庵遺集 金澍 寓庵遺集序 (李福源) 寓庵遺集總目 卷一 目錄 古詩五言 友蓮閣 古詩七言
應製成川圖詩 卷二 目錄 近體五言
贈僧 次息波亭韻二首 近體七言 題?十? 香山九老 商山四 太公釣魚 伊尹耕田 竹林七賢 蔡邕知音 淵明歸去來 蘇仙赤壁 子猷訪戴 西湖訪梅 題林塘香?後 夜夢 得看世何須?白眼 逢人休說?譽言之句 似是警省狂疎 因聯成近體詩一篇 陽城 南陽 贈僧靈秀 贈僧 約遊滿月臺 因雨未赴 移設西門樓 奉和祖江漁? 仍送米酒三首 次息波亭韻二首 金堤東樓韻 題水營山亭 文化東軒韻四首 ?川八景 椒島春雲 業?秋月 雙池蓮? 一徑楊柳 縛石積雪 ??曉鍾 望德靈祠 環館喬木
卷三 目錄 律詩五言 鶯 麻田東軒韻二首 江華東軒韻 薄書之叢 頭??? 無暇修答 然盛意不可辜負 聊步來韻 敢博一粲 意且不足 復吟短章一篇 以廣其意云 奉次前韻 再示漁?丈人 次山甫韻 奉酬祖江丈老苦雨憫窮之作三首 李君天章 從諸君遊西江 宿甘露寺 翌日歸來 袖詩示余 仍次韻贈之二首 臨陂集勝樓韻二首 金堤東軒韻 次長連壁上韻 阿浪浦三首 ?川迎輝樓二首 許秀才茅亭二首 又次壁上韻二首 松禾照鏡軒二首 輓申參議復淳淳之
卷四 目錄 律詩七言 禁苑應製 送鄭都事執中思良赴關北蓮幕 二首 次徐仲胤繼卞韻 朴淵二首 次逸人名 次羅州撫夷樓韻 三聖臺 ?山東軒韻 題甕津東軒 安岳東軒韻 殷栗東軒韻 所江東軒韻 題安分堂二首 次延安平遠堂韻 送別朴子悅監軍湖南
卷五 目錄 序 高陽世稿序 記 應製成川圖記 銘 題扇子朝天時 墓碑銘 叔父北道節度使公 [金公奭]神道碑銘 卷六 目錄 論 張良勸追項羽論 裴矩論 王朝不諫天書論 鄧伯道棄兒論 策?題 人稟策 ?書 ?黃海道觀察使趙士秀書 表科體 趙普謝雪夜微行 蔡仲謝封蔡 孫皓謝拜歸命侯
卷七 目錄 遺事 諡狀 (李福源) 跋 (金?) 跋=6세손 金래 래=禾+來
4)친필 발견 소개 (2003. 5. 19. 태서(익) 제공) <출전 : 정신문화원>
20) 현감공(휘탁)
김탁(金濯)은 북병사와 훈련원도정을 지낸 김공석(金公奭, 1477∼1553)과 정부인(貞夫人) 안악(安岳)이씨[이조좌랑 희순(希舜)의 딸, 대사간 평(枰)의 손녀] 사이에 2남(김탁, 김황)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55년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으로 있었고, 동생 김황(金滉)은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이었다.
<현감공(휘 濯) 묘소> (2007. 6. 14. 안사연 참배. 발용(군) 제공)
▲ 현감공 휘 탁 묘소
21) 김득수(金得壽) 자(字) 덕로(德老) 호(號) 암적자(庵笛子) 본관(本貫) 안동(安東) 와암(窩庵), 주(澍)의 7세손(七世孫)
■ 김주의 7세손 김득수 인장 (오세창의 근역인수에 게재)
22) 김선(金銑) 본관은 안동,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렴사를 지낸 후 이조에 벼슬하지 아니하고 청주에 은둔한 김사렴(金士廉)의 11대 손(孫), 광국공신(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이다. 공은 부모께 효도함이 지효(至孝)라고 세상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과 증지평의 벼슬을 받았다. 행장(손 김득제 찬)이 있다.
■ 본죽리(本竹里) 일실사효(一室四孝) ◇본죽리(本竹里) 일실사효(一室四孝) 정문(旌門) <이천시지> 율면 본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 당시 그 정문(正門)으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의 동생인 ★김석(金 錫), 이들의 두 누이동생 등 4남매의 효행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은 안동인으로 문단공(文端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해지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영묘(英廟) 계유년(癸酉年, 서기 1753)에 조정에서 정려(旌閭)하고 영조대왕이 친히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 (賜額)하였다고 전한다.
◇본죽리 일실사효 정려(本竹里 一室四孝 旌閭) <이천시 홈페이지> 소재지 : 율면 본죽리(栗面 本竹里) 현재 일실4효 정려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지만 다행히 일실사효 정려에 소장하였던 현판 3개가 율면 본죽리 김용진(金龍振)씨 집 문전(門前)에 세워져 있던 것을 우암사(寓菴祠) 개축(改築) 당시 그 정문(旌門)을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金銑)과 그 동생인 김석(金錫), 김구(金銶), 이들의 누이동생 등 4남매의 효행(孝行)을 표한 정문(旌門)이다. 김선(金銑)의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율면 본죽리에 살았다. 어려서 급제하여 안렴사(按廉使)를 지낸후 벼슬 하지아니하고 청주(淸州)에 은둔한 김사렴(金士廉)의 7대손 광국공신 화산군 김주(光國功臣花山君 金澍)의 현손이다.
김기창(金起昌)씨의 군지편찬(郡誌編纂) 자료(資料)에 의하면 김선(金銑)은 안동인(安東人)으로 문단공(文端公) 김주(金澍)의 현손(玄孫)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이들 4남매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므로서 다시 소생(蘇生)하게 되어 그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조 30년(1753)에 조정(朝廷)에서 정려(旌閭)되어 영조대왕의 친필(親筆)로 일실사효(一室四孝)라 써서 사액(賜額) 하였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4명의 효자가 난 것을 기리는 추천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백행의 근원이며 모든 나라가 따라야 할 것은 오로지 효(孝)이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 지평공은 천성이 순하고 효심이 깊어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그래서 부모님이 기뻐하시면 지평공도 기뻐하였고, 부모님이 근심하시면 지평공도 근심하였다. 공께서 어른이 되어서는 진실로 효도하고 봉양함이 더욱 돈독하여 반드시 뜻과 힘을 다하였다.
공의 모친이 여러해 동안 병을 앓았는데, 김구, 김석 그리고 열 살이 넘은 누이동생과 함께 지극한 정성으로 약을 다려드렸다. 그 정성이 대단히 지극하여 공께서 먼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회복하게 되었고, 그 다음날에 또 위독해지자 공의 동생과 누이동생이 차례대로 공과 같이 손가락을 잘라 공의 모친이 소생하여 며칠 동안 더 연명하였다.
모친의 장례를 지냄에 있어서는 예제에 따랐는데, 이 형제분들의 얼굴이 수척하였고 돌아가신 것을 매우 슬퍼하고 울음소리가 애절하여 조문하는 사람들이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동네사람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후에는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서 날마다 모친의 묘소에 참배하고 3년동안 죽을 먹어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부친께서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을 것을 권하여 어머님을 그리는 정을 진정시키고 그 말씀에 따라 고조할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고조할아버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효를 다하였으며 돌아가시자 슬퍼함을 다하였으니, 모친상과 부친상이 한결같이 애절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다.
아아!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4남매의 지극한 효를 다한 행적은 여지병풍과 읍지에 기록되었으며, 같은 고을에 사는 선비가 이러한 사실을 이천군에 알리고, 이천군에서는 경기감영에 보고하고, 경기감영에서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현종 10년(1669)에 4남매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은혜가 내려졌다. 이뿐만 아니라 영종 30년(1754)에는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一室之四孝』라 하였다.
효자·효녀가 어찌 옛날에만 있었겠는가? 4남매의 효자는 옛날부터 드물었는데 여기 김씨 4남매의 효행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지평공의 고조할아버지 문단공은 시와 예의 교훈을 잘 익혀서 도의를 드러내는 근거로 삼았으므로 학문과 뜻과 행동이 세상에 추앙받는 바 되었다. 그래서 그 공로는 우리 가문을 보존하였고 충훈부에 그 이름이 올랐다. 공의 할아버지 부사공은 광해군때를 당하여 홀로 대의를 지켰으며, 더럽지 않은 절개를 세워 지극히 돈독하였다. 이어 4남매의 독실한 효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충(부사공의 충을 말함)과 효(지평공의 효행을 말함)는 우리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다.
아아! 할아버지께서는 그 부모님의 장례를 치룰때는 슬픔을 머금고 그 애통함을 참으셨으니, 효도해야한다는 것을 고칠수 없는 뜻으로 아신 것이며, 혹시나 선조의 뜻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셨으니, 이 어찌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선인의 뒤를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아버지께서는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선조들의 효행이 점차 잊혀져서 나타내지 못하게 될 것을 매우 걱정하였다. 이에 이러한 간절한 말을 국왕에게 상언하여 여러 대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4효자의 효행의 빛을 드러내게 되었고, 현종과 영조 두 임금의 영광스런 은전을 입게 되었다. 이는 실로 우리 부친께서 지극한 뜻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필연적인 결과로 효자 정려를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당시에는 미쳐 틈을 내지 못하여 돌아가신 우리 부친께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하셨다.
그래서 이 못난 증손자가 이를 마음 아프게 생가하여 여러 형제·자식들과 더불어 정려 짓기를 의논하여 그 일을 마치게 되었다. 이에 감히 "우리 선조의 뜻을 계승하였다."라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 집안의 4남매의 효행은 여러 고을의 모범이 되며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김씨 집안의 효행은 그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있었다고 그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라고 발문을 적었다.
<賜額內容> 孝子 贈 通德郞 司憲府持平 金銑 贈 朝散大夫司憲府持平 金銶 贈 通訓大夫 司憲府持平 行果毅 四山監役 金錫 孝女監役 李明三妻 金氏四男妹 之門 英宗甲戊七月 日 ?命 旌閭 (해설) 효자로 통덕랑(정5품) 사헌부지평에 증직된 김선, 조산대부(종4품) 사헌지부평에 증직된 김구와, 통훈대부(정3품) 사헌부지평 행과의 사산감역에 증직된 김석과, 효녀이므로 감역에 증직된 이명삼의 처 등 김씨 4남매 의 정려문이다. 김씨 4남매의 효행을 기려 영조 30년(1754)에 명정되었다.
*<김공석 후손 김선이 작성한 분재기소개> (1) 1차 조사 내용 (김태영(군) 2003.5.2. 제공 자료) * 분재기 소장처 : 경기도 여주군 향토사료관 내(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 관광지내 여주군 향토사료관 전시) * 유물 제목 : 안동김씨 분재기 * 전시물 소개내용 :
분재기는 재산의 주인이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하여 준 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분재기는 1678년 작성된 안동김씨 충렬공파 집안의 것으로 피상속자인 장남 김영후를 비롯한 아들 셋, 딸 일곱에 대한 상속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름 밑에 서명도 보인다.
(2)2차 조사 내용 (김주회(안). 2003. 12. 23. 제공)
이 분재기는 그동안 어느 분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었으나 지난주(2004. 12.12) 여주향토사료관 방문시(김영환, 김용주, 김승회, 김주회) 실물확인결과, 여주 백양동에 세거해 오신 안렴사공파 김공석 후손인 김선의 자녀인 김영후를 비롯한 10남매(아들3, 딸7)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분재기로 1678년 작성된 것입니다. 아래와 같이 정정을 부탁해 놓았습니다.
분재기는 재산의 주인이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하여 준 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분재기는 1678년 작성된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여주 귀백리 입향조 김환(金丸)의 6대손 김선(金선)의 피상속자인 장남 김영후를 비롯한 아들 셋, 딸 일곱에 대한 상속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름 밑에 서명도 보인다.
오늘(2004.12.23) 여주군향토사료관 사료관팀장/학예연구사 구본만 님으로부터 이메일로 여주군향토사료관 소장 안동김씨분재기 사진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을 아래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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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주군향토사료관 구본만 입니다. 안동김씨분재기 사진을 첨부파일로 보내드립니다. 안동김씨 분재기는 우리군의 향토사학자 이셨던 고 이현구 선생께서 우리군 사료관에 대여해 주신 여러 여주 관련 자료 중 하나입니다. 이현구 선생 사후 후손들과 협의하여 우리군이 이현구선생께서 사료관에 대여해 주신 유물을 일괄 구입하여 현재는 우리군 사료관 소유의 유물이 된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또다른 구안동김씨 관련 자료는 없습니다.
<부사공(휘 熹) 묘소> (2007. 6. 14. 안사연 참배. 발용(군) 제공)
▲ 부사공 휘 희 묘소
23) 김태기(金泰基, 1602∼1646) ○아버지 장흥부사 희(憙)는 생원시, 진사시, 문과에 급제하고, 묘갈(영상 조현명 찬, 제학 조명구 서)이 있으며, 장흥에 거사비가 있다. ○1602(선조 35)∼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형숙(亨叔), 호는 무위당(無爲堂).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2년 정언이 되고, 그뒤 양사(兩司)를 거쳐 1645년에 장령을 역임하고 태인현감을 지냈으며, 영광군수로 재직중 죽었다. ○청백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묘표(여서 조종저 찬, 조상우 서), 묘지(손 김성환 찬)가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南岳集(趙宗著)〉
*사진 자료 : 2007. 6. 14. 안사연 참배 (발용(군) 제공)
▲ 필선공 휘 태기 묘소
▲ 필선공 묘비 부분 글씨
▲ 필선공 묘비 이수 전면
▲ 필선공 묘비 이수 후면
<옆면>
24) 김문연(金文演) 1900년대 초반 외부주사로 종사에 헌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 1926년 안렴사공파 세보 <병인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 1935년 대동보 <을해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 1940년(庚辰 仲夏) 안동 녹전 죽송리 재실 음수재 현판을 書하였다.
■ 화산군파는 <안렴사공파세보>와 <조선 문과방목, 사마방목>을 종합해 보면 ○문과 급제 4명(澍주, 憙희, 泰基태기, 도) ○생원진사 급제 26명(鎬호, 당, 志지, 晉基진기, 季男계남, 황, 得悌득제, 好胤호윤, 득종得悰, 득유, 稙직, 게, 聖沆성항, 집, 玘기, 수, 도, 聖煥성환, 鉉烈현열, 敬浩경호, 基浩기호, 漢浩한호, 思榮사영, 思喆사철, 思悳사덕, 在鳳재봉) ○무과 급제 11명(聖淵성연, 신, 稷직, 득성, 璿선, 鉉哲현철, 得烈득열, 鉉弼현필, 秉浩병호, 思翊사익, 在禹재우) ○季男계남은 대흥현감, 金+英영은 군수, 득성은 하동부사, 鉉哲현철은 강익현감, 聖源성원 은 곡성현감, 鉉弼현필은 평산부사, 秉浩병호는 ○곡부사를 지냈고 ○泰基태기의 부 憙희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軍資監)/정(正)을, 鎬호1624-와 당1645- 의 부 泰基태기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종부시(宗簿寺)/정(正)을, 季男계남1552- 의 부 澍주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禮曹)/행참판(行參判)을, 聖渙성환1683-과 聖沆성항1674-의 부 당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함양(咸陽)/행군수(行郡守)와 진주광주진관(晋州鎭管)/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泰演태연1871-과 晋演진연1874- 의 부 思喆사철은 조봉대부(朝奉大夫)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鳳演봉연1874-의 부 思悳사덕은 통훈대부(通訓大夫)/행주부(行主簿)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得悌득제는 호日省堂일성당으로 遺稿2권이, 득유는 유고와 묘갈(영상 이상황 찬, 판서 신위 서)이 있으며, 稙직은 호尋樂亭심락정으로 흑산도로 피적한 바 있고 유고가 있다. 玘기는 호柳隱류은으로 유고와 誌(이량연 찬)가 있고, 鉉大현대는 호胄峰주봉으로 노주 오희상 문하이고 유고와 誌(대간 이경보 찬)가 있으며, 好問호문은 호憩菴(게암)으로 화서 이항노에게 사사하였으며 유고와 묘갈(판서 신기 찬)이 있다. 聖濂성렴은 호隱菴은암으로 송시열 문하 이고 소(신면)가 있다. 思默사묵은 호枾北시북으로 효행이 있었으며 유고2권이 세가에 소장되어 있고 행장(이판 金聲振 찬)이 전한다. 志지는 행장(김학성 찬)이, 聖游성유는 행장(종자 김식 찬)이 전하고 묘갈(여서 영상 조현명 찬)이 있으며 돈녕도정을 역임하였다. 聖涵성함은 행장(손 득제 찬)이, 禾+巨거는 행장(자 득제 찬)이 전한다. 聖溥성부는 傳(참봉 김덕흠 찬)이 있고 효행이 있었고, 王+景경은 호溪隱계은으로 효행이 있었다.
○禾來래는 ?1768년 안렴사공 행장을 짓고, 1789년 우암집을 엮었으며, 得顯득현과 權권은 1739년 기미보 발행에 참여하였고, 演夏연하는 외부주사 歷참사관 검사도사무관 승통정대부 정3풍 행장성군수를 지냈으며, 화산군 김주 신도비를 서하였다.
○ 화산군파 관련인물을 열거해 보면 이복원 - 김주諡狀 찬, 우암집 序 이돈우 - 김사선의 외손자로 김주 신도비 찬 김안국 - 김주의 스승으로 김공언과 교유하고 김지 묘갈 찬 조현명 - 김성유의 사위로 장인 김성유 행장 찬, 김희 묘갈 찬 조명구 - 김희 묘갈 서 조종저 - 김태기의 사위로 장인 김태기 묘표 찬 조상우 - 김태기 묘표 서 송시열 - 화산군 현손 김석의 스승이고 김성렴의 스승이며, 일실사효 현판 기 오희상 - 김현대 스승 이경보 - 김현대 誌 찬 이항로 - 김호문 스승 신기선 - 김호문 묘갈 찬
○현재의 회기동 안동김씨 대종회관이 건립되기 전에 대왕코너 사장이던 호진은 사무실을 내어 대종회 사무실로 제공하였고, 卿辰경진(會항)은 1917생으로 호義龍의룡이며 1970년대 대종회관 매입자금 조달과 1979년 기미보 발행에 참여하였다. 현재 용주는 화산군 종사에 헌신하고 있으며, 1970년 후반에 제작된 충렬공 영정 문무복 2폭은 용주의 친우 화백이 제작한 것이다. 사손가계 (思弘---演根---禮卿---1960泰炯태형)는 현재 서울 제기동에 세거하고 있다.
25) 김공석(金公奭) 1477(성종3)-1553(명종8)
○1477년(성종3) 성의 3남(공량, 공석, 공망)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주경(周卿) ○1507년(중종2) 무과(武科)에 급제 호조(戶曹)·공조(工曹)·형조 (刑曹)의 참의(參議)를 거쳐, 강릉부사(江陵府使)·포도대장(捕盜大將)·병마절도사(兵馬 節度使)·북병사·훈련원도정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1534년(중종29) 공조참의를 지내고 ○1535년(중종30) 특진관 최세절(崔世節)특진관, 김공석, 원팽조(元彭祖)이 함께 진 설치와 봉수 설치를 위하여 다대포와 부산포 등지를 가서 보았다. ○1537년(중종32) 찰리사 김공석을 상가(賞加)하면 바로 2품이 되므로 물품으로 숙마(熟馬) 1필을 상으로 받았다. ○1539년(중종34) 압해관이 요동으로 떠날 때 의주목사 김공석(金公奭)는 일처리에 능숙한 사람이니 반드시 잘 처리할 것이라 하여 하처하였다. ○1540년(중종35) (강릉)부사를 지내고 ○1542년(중종37) 함경도 관찰사 김섬과 함께 북도 병사(北道兵使)김공석(金公奭)이 육진(六鎭)을 순행하며 형편을 살폈다. ○1543년(중종38) 병조 판서 임권(任權), 형조 판서 신광한(申光漢), 포도 대장 김공석(金公奭) 등이 함께 의논하여 포도 절목(捕盜節目)을 마련한 단자(單子)에 도적의 발생 원인과 야간 순시를 아뢰었다. 김공석(金公奭)을 병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1545년(명종즉위년) 전라 병사 김공석(金公奭)의 서장을 정원에 내리면서, 중국에서 전수한 총통에 대해 세밀하게 전습할 것을 명했다 “이 서장을 보니 상당히 자세하다. 만약 왜인들이 중국인들과 교통하면서 총통 만드는 법을 전습하여 그 묘리(妙理)를 다 배우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니다. 오늘 중국 사람들에게서 전습하여 방포(放砲)한 후에 병조에 말해서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로 하여금 세밀하게 갖추 알게 하여 힘써 전습하도록 하라.” ○1552년(명종7) 김공석(金公奭)을 청홍도 수군 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김공석 묘와 묘갈은 여주 백양동에 있는데 조카 김주가 찬하고, 송인이 서하였다. 金澍찬 叔父北道節度使公 [金公奭]神道碑銘이 寓庵遺集에 실려 있다.
<사진 자료> (2007. 6. 14. 안사연 참배. 발용(군) 촬영 제공)
▲ 병사공 휘 공석 묘소
▲ 병사공 휘 공석 신도비(김주 찬, 송인 서, 박영 전)
▲ 신도비 부분 글씨
26) 김수남(金壽男) 1547년(명종2)∼1605년(선조28) 자仁甫, 안렴사공 9세손. 공은 1574년(선조7, 갑술)에 무과에 급제하고 누진을 거듭하여 남병사(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여주 백양동에 있다.
<묘소 사진> (2007. 6. 14. 안사연 참배. 발용(군) 촬영 제공)
▲ 남병사공 휘 수남 묘소
27) 김지(金日+至, 1572년(선조5)∼1628년(인조6)) 자汝晦, 안렴사공 10세손. 1594년(선조27, 갑오)에 무과에 급제하고 누진하여 영변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광해혼조에 불사하고 후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는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다.
형조·공조판서 및 총융사 신준(申埈)의 묘 *참판공(휘 지)의 따님가 사위 묘소 탐방기 (2007. 11. 12. 윤만(문) 제공) 형조 공조판서 및 총융사 신준(申埈)의 묘 위치 : 경기도 광주시 실총읍 신대리 산1-1
신준 : 신준의 자는 평중(平中), 시호는 충정(忠靖), 본관은 평산, 신립(申砬)의 손자, 신경진(申景?)의 아들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로 부는 부사 질(?)·조부는 병사 수남(壽男)·증조는 현감 탁(濯)·외조는 별좌 용인 이철광(李哲光)으로 합부하였다.
인조 1년(1623)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에 책록되었고 평흥군에 봉해졌으며, 강화유수, 수원부사를 거쳐 효종 4년(1653)에는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그 후 형조·공조판서를 거쳐 총융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는 신대리 평산신씨 충장공 묘역 맨 위에 있다. 묘갈(墓碣)은 판서 박필주(朴弼周) 찬, 묘지(墓誌)는 손자인 영의정 완(玩)이 찬하였으며, 시장(諡狀)은 판서 윤급(尹汲)이 찬하였다.
<신준의 묘>
<신준 묘비>
28) 김담(金曇) 忠男(=공량-완의 子)은 아들이 없어 壽男(=공석의 子)의 子인 曄(엽, 1528∼1612)을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군위현감과 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그의 생가 동생인 曇(담)은 무과에 급제한 뒤 재령현감을 지내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 공산성으로 피난할 때 덕원리에서 왕을 등에 업고 험준한 차령고개를 넘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에 올랐고 뒤에 인조가 曇의 묘를 교하에 있는 자신의 능묘인 莊陵 가까이 묻게 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묘소는 실전이다. 공은 행적은 정사공신녹권에 있다. ---이 가문에서 배출한 현대 인물로는 曇(담)의 후손으로 應默의 6자 在益(1938∼1983)이 유명하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직중 미얀마 아웅산 사고로 순직 청조근정 훈장을 수여받았고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9) 김기(金琦, 1722-1794) ■ 기헌 김기 연보 ○ 字를 ?圭, 號를 寄軒 또는 西湖라 하였고, 이조 경종2년 임인(서기 1722년)에 경기 여주 백양리 사제에서 안동김씨 嗣慶(사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 그의 行狀에 의하면, 그는 용모가 청수하고 기상이 탁?하며 性度 擧止가 莊重 凝定(응정)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원대한 기량의 인물로 定稱했으며, 취학 후에는 文理에 ?달하여 塾師(숙사)들이 때때로 질문에 응대하지 못했고 기억력이 뛰어나 무슨 서적이나 한번보면 모두 기억하여 동리 부노들이 모두 대과에 장원 감이라고 囑望(촉망)하였다. ○ 그러나 18세때 科場(과장)에 나가 당시 선비들의 不正趨勢가 成習이 되어 썩어가는 것을 보고 鄕第(향제)로 돌아와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기로 뜻을 굳혔으며 그는 효성이 극진하여 父公 嗣慶의 병환이 해가 지나도 낫지 않자 온천욕법이 좋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충청도 신창현으로 부공을 모시고 이거하였다가 ○ 부공의 병환이 쾌차하자 故庄(고장)에 돌아가지 않고 충청도 옥천으로 이거하였으며, 거기서 당시의 名儒 耕窩(경와) ★李命源에게 후대를 받아 교유하면서 經傳子史를 위시한 제가 잡서를 통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이런 공부들이 모두 성인의 도를 배우는 길이 못된다고 깨닫고 당시 畿湖(기호)에서 학행의 重望을 지고 있던 雲坪 ★宋能相, 木+樂泉 ★宋明欽 두 학자의 문에 차례로 출입하며 聖學에 전념하였다. ○ 그뒤 상경하여 뒤에 相國이 된 竹下 ★金불화변翌(김익), 당시 관직에 있던 ★李鼎輔, ★李益輔, ★李?源 등과 친교를 맺아 그들로부터 한결같이 出仕의 권고를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그 도를 실천할 수 없는 바에야 구차하게 벼슬자리만 지키고 앉았으면 그것은 祿과 헛된 명예만 탐내는 일이 아니겠으냐고 반문하고 사뭇 거절하였다. ○ 그뒤 스승 ★宋 雲坪이 돌아가자 더욱 世情과 멀어져 전라도 무주 雪川에 은거하며 산수 자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유행 역질에 가족이 전염되어 8,9인이 함께 사망하자 가난과 함께 무서운 정신적 痛苦롤 겪었으며, ○ 그러면서도 晏然(안연)히 살아가는 그의 생활을 딱하게 여긴 당시의 陜川(협천)군수 ★沈 翼雲이 자기의 子姪과 향리 자제들을 보내 수업시킴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때에 及門한 제자들 중에 ★朴 致遠, ★金 謹樞, ★愼 敦恒 (연암집, 열녀 함양박씨전에서 立言之士라고 稱道된 학자) 등은 모두 遁世(둔세) 究學한 평민 학자들이었다. ○ 44세 되던 영조 41년에 父喪을 당하자 가난한 생활을 잘 아는 ★沈 군수의 주선으로 장례를 마쳤으며, 그뒤 충청도 영동에 이거하여 喪配한 伯氏 僉知公의 8세된 아들을 데려와 撫育(무육)하여 성취시키고, 만년에는 사뭇 영동에 寓居(우거)하면서 향리 사족 학자들과 교유하며 講學詠詩로 여생을 마쳤다. ○ 尹씨, 吉씨, 郭씨 3配에서 東說동열, 東祐동우 두 아들을 두고 73세로 정조 18년 갑인(서기 1794년)에 졸하였다. ○ 묘는 영동군 양강면 묘동리 촌후계좌이며, 恩津 宋在郁撰 表가 있다. ○ 기헌유고를 간행한 5대손 사기(思夔)는 자允一 정묘6.29생 을유10.29졸로 묘는 영동군 양강면 남전리 상목동 선고묘좌록 계좌이다.
■ 기헌유고(寄軒遺稿) **도 : 기헌유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寄軒遺稿 金琦 著 金思燮 1959 古3648-10-710 고전운영실 고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형태사항 4卷1冊(127張) : 四周雙邊 半郭 21.0x17.3cm, 有界, 12行24字, 註雙行, 上下向1葉花紋魚尾 ; 27.9x20.3cm. 주기사항 序: 己亥(1959) ...宋在植, 跋: 五世孫 思燮 <目次> 表紙 = 0 序 = 1 目錄 = 3 卷之一 = 11 詩五言古詩 = 11 詩七言古詩 = 16 詩五言絶句 = 19 詩七言絶句 = 21 詩五言律 = 27 詩七言律 = 33 卷之二目錄 = 87 卷之二(書) = 89 卷之三目錄 = 131 卷之三 = 133 雜著 = 133 序 = 177 卷之四目錄 = 185 卷之四 = 187 祭文 = 187 傳 = 218 卷之五目錄 = 231 卷之五(附錄) = 233 跋 = 253 ○寄軒遺稿. 卷1-5 /김기 [刊寫者未詳]/1959 <전남대 소장> 형태사항 5卷1冊 : 四周雙邊 半郭 20.6 x 16.3 cm, 有界, 12行24字, 上1葉花紋魚尾 ; 27.6 x 20.1 cm. ○起軒遺稿 , 全 /강두환 保景文化社/1984 <서울대(중앙) 한국외국어대 소장> 형태사항 296 p. ; 31 cm.
■ 黃生傳황생전과 丁生傳정생전 1) 寄軒遺稿에 <黃生傳>이란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북벌론을 비판하고,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2) 丁生傳은 金琦(1722-1794)의 作이다. 현재 고소설분야에서 관심을 가지는 <丁生傳>이라는 작품은 문집에는 실려있지 않다. 애정소설이기 때문에 문집을 간행할때 의도적으로 뺀 것 같다. 이 작품은 사족남성과 중인여성간의 애정갈등을 조명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18세기 한문 소설사에서 한 자리를 지킬만한 중요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본 작품은 비교적 장편에 속하는 것으로, 작자 김기의 遺稿(유고)가 간행될 때에도 수록되지 못하고 그의 후손 家中에서 單本으로 筆寫되어 전해지던 것을 필자(=송준호)가 (1975년의) 수년 전에 입수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성신여대의 송준호 교수가 제공해 준 한문소설로서 총 72면, 매면 12행, 매행 18자 평균으로 筆寫되어 있는 唯一本이다. 정생전은 장편 한문소설이다. 글자수가 15,900여자 (評言 351자 제외)에 달하는데4), 이것을 번역했을 경우에는 분량이 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3)정생전 연구분석 논문 ○ 失意의 美學 -미발표 한문소설 丁生傳 考- (송준호) : 연세어문학 제5집 (1974,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p1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丁生傳에 나타난 愛情과 孝의 意味 (李愼成) : 釜山漢文學硏究 v.3 (1988/06/10, 부산한문학회) p.99-146 ○ 丁生傳 解題 (金起東) : 國語國文學論文集 v.12 (1983/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p179-186 정생전 해제, p187-221 정생전 필사본 원문 ○ 古典漢文小說選 (1984.3, 편자 김기동, 교학연구사) p305-331 정생전 활자본 원문
■ 정생전 줄거리 주인공 丁生은 경기도 楊根縣에서 鄕班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미만에 조실부모하고 서울에 사는 고모부 권상서 댁에 의탁해 자라며 공부하였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才識(재식)이 過人(과인)하여 사람들에게 早達할 인물로 칭송되었다. 어느해 봄날, 삼각산 하 삼청동에 상춘놀이 다녀오는 길에 어느 집 앞에서 잠깐 비를 피하다가 그 근처에 있는 조그만 정자 뒤에 숨어 서 있는 아름다운 처녀를 보고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그 처녀를 뒤따라 갔다. 그러자 그 처녀는 놀라는 기색이 없이 자기는 吏曹書吏(이조서리) 아무개의 딸인데, 오늘 마침 계모가 도봉산 암자에 불공 드리러 가면서 집을 지키라 하여 지키고 있는 중이며 어제 밤 꿈에는 자기의 죽은 생모가 내일 네 天定配匹(천정배필)을 만나게 될 것이니 기다리라고 現夢(현몽)하여 丁生을 맞아 들였으며 오늘 밤에는 자기 아버지는 숙직이라고 말하였다. 生은 그 처녀에게서 숙식을 잘 대접받고 그 처녀와 백년가약을 맺고 돌아왔으나, 戀戀(연연)의 情을 이기지 못하던 중, 다시 그 처녀의 편지를 받고 다시 그 처녀를 찾아가 즐겁게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러나 사뭇 그리운 情懷(정회)를 못견디어 하다가, 깊이 자성하고 공부에 전념하던 중에 그 처녀로부터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과 그래서 부모로부터 집을 쫓겨 나게 됐다는 소식이 오고 처녀의 패물이 있으니 그것을 팔아서 집과 세간을 장만하여 살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丁生은 고모에게 큰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워 주저하다가 고모부 권상서가 충청도 청풍부사로 좌천되어 가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서 고민하며 지내던 중 어느날 밤에 한벽루 위를 거닐고 있었더니 갑자기 그 처녀가 흰 수건으로 목을 매고 피를 흘리며 나타나 울고 하소연하매, 그 사이에 자신이 겪은 일, 아들을 낳아서 종년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목매어 죽었다는 사실과 함께 무한한 원망과 악담을 늘어 놓고, 만일 丁生이 용서를 받으려면 모년 모월 모일에 서울 광통교 위에 가서 종년에게 업혀 있을 아들을 데려다가 기르라 말하고 사라졌다. 丁生은 그 뒤 서울에 올라와 양반 집 딸에게 다시 장가들어 아들을 낳고 재산도 꽤 넉넉해지고 명성도 널리 알려졌다. 그 처녀가 지정한 날, 丁生이 광통교에서 과연 종년과 아들을 만나서 그 아들을 집으로 데려 오려다가, 집안의 분난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아들을 업고 따르던 종년을 몰래 떼어놓고 도망쳐 왔다. 그날 밤에 그 처녀의 혼이 또 나타나 꾸짖고 사라졌다. 그 뒤부터 丁生은 집안의 재산이 탕진되고 생활이 어려워져서 고향 楊根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어 겨우겨우 살아갔다. 이런 생활 중에 또 부인이 병이 들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충청도 보은현감으로 가 있는 고종4촌 아우 (권상서의 아들)를 찾아갔다.
거기서 까닭없이 병이 들어, 점장이에게 점을 치니 산과 물이 아름다운 산중에 가서 수양해야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곳 속리산 속리사에 가서 중들의 厚待(후대)를 받아가며 지내던 중에, 어느날, 그 절에서 대법회를 열게 되어 전국 사방의 중들이 모여 들었으며, 그러던 어느날, 온 절 중들이 묘향산에 있는 名僧(명승)이 온다고 모두 환영을 나갔다. 그 묘향산 명승은 절에 오자 곧바로 丁生을 찾아와서, 자기는 전날 밤에 죽은 어머니의 現夢(현몽)으로 여기에 아버지인 丁生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며 울면서 절하고 자기는 바로 丁生이 광통교에서 버린 그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 명승은 법회를 전부 지휘하여 다 마친 뒤에 절에 모인 중들을 불러 놓고 자신은 당분간 중생활을 중단하고 늙은 아버지 丁生을 봉양해야 하겠으니 모두 이해하고 돌아가라고 하고 그 중들로부터 보조받은 재물들을 어느 부자에게 맡겨 이윤을 늘려 달라고 부탁한 뒤, 자기 손수 丁生의 음식 거처를 돌보며 영양있는 고기와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명승은 아버지 丁生의 안락한 여생을 위하여 水石, 풍치가 아주 아름다운 絶俗한 名區, 이화동에 모시고 가서 거기에 깨끗하게 草屋(초옥)을 짓고 효성을 다하였다. 丁生은 신선의 參同契(참동계)를 익혀 고기 먹기를 사양하자 명승은 늙은 아버지의 筋力(근력)을 염려하여 수일동안 불공기도를 들인 뒤에 꿈속에 神人이 나타나 산삼있는 곳을 지시하여 그곳에 가서 童山蔘(동산삼)을 캐어와 아버지 丁生을 봉양하였다. 어느날 양근 本第(본제)에 있는 本室(본실) 소생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와서 만나고 庶兄(서형)인 명승도 만난 뒤, 아버지 丁生에게 본가로 돌아가자고 청하자, 서형인 명승은 아버지는 成仙(성선), 자기는 成佛(성불), 동생은 成孺(성유)하면 一家내에 三敎가 俱傳하게 될 것이니, 그냥 돌아가라고 달래고 富人에게 맡긴 錢財(전재)를 나누어 돌려 보내면서 어제 잠에 天象을 살펴보니 胡人(호인)이 장차 중국의 天子가 될 것이고, 그에 앞서 우리나라가 호인의 난을 당할 것이니 서방으로 피난해야 한다고 하였다. 어느날 丁生은 자기 부자의 前頭 所歸地(來世)를 미리 알고 싶다고 말하자, 명승은 아버지 丁生이 꼭 알고 싶다면 수일간만 수고하면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아버지 丁生과 자신이 함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무도 못보게 한뒤 出身脫形法(출신탈형법)을 써 부자가 함께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 서방 수미산에 도착해서 이른바 木禾(나무에 열리는 쌀)를 먹어 보고, 星宿海(성숙해) 곧 天池(천지)를 구경한뒤 다시 서방으로 갈대잎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가서 瑤池(요지)에 도착해서 서왕모의 후대를 받았다. 또 바람을 타고 서방으로 가서 한 곳에 도착하니 쇠문(철문)이 높다랗게 닫혀 있고 그 문을 지키는 졸병들은 눈이 셋 달린 놈, 넷 달린 놈, 혹은 여섯, 일곱 달린 놈 등 여러 놈들로서 모두 꼴이 흉악하게 생겨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잃게 무서웠으며, 명승이 문 앞에 가자 그들은 모두 절을 하고 맞아 들였다. 丁生도 아들을 따라 바로 들어가려 하자 그 문지기들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못 들어가게 했다. 丁生이 아들이 들어가는데 어째서 아버지가 못 들어가느냐고 항의하자 그 문지기 신들은 모두 호통을 치며 여기가 인간세상과 같은 줄 아느냐, 여기는 부자간이니 무엇이니 하는 인륜같은 것은 알지도 못한다고 하며 명승은 이곳 지장왕의 제자이고 丁生은 天上 仙人으로 인간세상에 下謫(하적)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시비하는 사이에 명승은 아버지 丁生이 못들어 오는 줄 알고 나와서, 여기는 인간세상에서의 인륜관계는 인정되지 않으며, 일찍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바람을 타고 이화동에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겨우 하루 밤을 지낸 것 뿐이었다.
어느날, 丁生은 아들과의 담론 중에 儒佛仙은 世道에 모두 裨益(비익)이 되지만 九流諸子(구류제자)의 學은 모두 正道를 해치는 것들이라고 말하자, 명승은 그렇지 않고 九流(구류)도 모두 한가지씩의 진리가 있으니 그것들을 적합한 경우경우에 쓰면 모두 裨益되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그 진리를 모두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적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해가 된다고 말하였다. 丁生은 명승의 식견이 이렇게 넓고 큰데 세상에 쓰이지 못하니 아까운 일이라고 말하자, 명승은 자기의 뜻은 크게 쓰이는 인물이 되려는 것이요, 결코 작게 쓰이는 인물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어느날 새벽부터 丁生은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 부처처럼 앉아 있기 3일동안 계속한 뒤, 아들인 명승을 불러 앉히고, 자기는 속세의 생각을 잊은지 오래지만 한 가지 마음 속에 괴로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처녀(명승의 어머니)에게 지은 죄이고, 그래서 이번에 그 처녀가 가 있는 저 세상엘 遊神法(유신법)을 써서 찾아가 자기와 그 처녀 사이의 인연과 그 처녀의 거처를 알아 봤더니, 자기는 원래 옥황상제의 香案前吏(향안전리) 였고, 그 처녀는 太上元君(태상원군)의 약로守婢 였는데 옥황의 명으로 약을 가지고 태상원군에게 갔던 자기가 수비인 그 처녀와 잠깐 눈빛을 주고 받았었고 그것이 죄가 되어 둘이 함께 지장왕에게 압송되어 지상으로 下謫(하적)되었고, 그래서 인간세에서 그런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며 모두 天上에서부터의 因報(인보)라. 그 처녀는 처음 죽었을 때는 謫期(적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갔기로 鬼錄(귀록)에 이름이 적힌 채 저승에서 방황하다가 지금은 적기가 다 차서 舊職(구직)에 복귀해 있더라고 말하고, 내일 楊根에 있는 작은 아들을 불러오라 하였다. 그 며칠후 두 아들이 와서 앞에 엎드리자 丁生은 자신이 어릴때부터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겪으면서 20세 후에는 才學(재학)을 세상에 인정받아 靑雲 길에 거의 으로게 됐다가 불행하게 여러번 실패했고, 50세 이후에는 世情을 멀리하고 향리에 돌아가 窮居(궁거)하다가 지금에 와서 脫俗의 眞樂을 누리니 세상의 모든 名利가 모두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 처녀에게 진 죄는 무겁고 또 처녀는 불쌍하긴 하지만 이런 인연이 없었던들 아들인 명승과 같은 高僧大德을 낳았겠는가. 이것은 모두 조물주의 造化요, 그 처녀도 이제는 그런 인연의 所使(소사)임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 명승인 큰 아들은 修養成佛하고 작은 아들은 保家守門에 진력하여 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말하고 곧 化去(영생의 신선이 되어 없어짐)하였다. 두 아들은 육신을 모셔다가 장례를 禮대로 잘 모시고, 명승은 자기 生母와 乳母(종년)를 모두 父墓 옆에 이장하고 嫡弟(적제)와 작별한 뒤 錫杖(석장)을 짚고 西向하여 飄然(표연)히 가버렸다. ---정생전 終
30) 김재익(金在益, 1938-1983) 경제학자·행정가. 서울 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1960년까지 미국 하와이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미국 스탠포드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4년까지 한국은행 조사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등을 거친 뒤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의 근간을 다루는 경제기획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금리·저물가정책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평소 그의 경제관을 경제정책에 반영하였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이후 계속 한국경제계획의 기저가 되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버마(지금의 미안마) 예방을 수행하였다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사태로 순직하였다.
◇ 김재익의 프로필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이순자, 1998)> 1938년 11월 26일 서울에서 부친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 사이에서 9남매의 막내로 출생 그는 충남 연기군 전의읍 소정리 소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6.25는 그의 가정에 치명타를 입힌다.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제들은 풍지박산된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던 형과 당시에 대학에 다녔던 두 형들 모두 행방불명이 된다. 6.25는 모든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김재익의 가정에 유달리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김재익은 1938년 11월 26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부친 안동김씨 金應默과 모친 姜炳周와의 사이에 6남 3녀중 막내로 출생한다. 부친은 김재익의 어린 시절에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서울로 이사온 김재익 형제들은 홀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 가난 속에서도 김재익은 구김살 없이 밝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성장했다. 서울 삼청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다닐 때 늘상 모범생이었다. 서울로 이사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산다. 그래도 그는 밝고 명랑하고 구김살 없이 소년시절을 보낸다.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이었다. 그의 누님 두 분이 수녀였다. 큰 누님 김재순은 수녀로서 성심여대 총장을 지냈고, 둘째 누님 김재숙은 성심수녀원 원장을 지냈다. 독실한 천주교인어어서 그랬는지 그는 성직자의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김재익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0년 봄 당시 취직시험으론 가장 어렵다던 한국은행 공채시험에 당당 수석합격한다. 김재익은 한국은행에 재직중인 62년 봄 혜화동 성당에서 李淳子씨와 결혼, 그뒤 韓會(63년생), 承會(71년생)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이에 따라 김재익은 스탠포드로 옮겨가 본격적인 학구생활에 들어갔다. 부인 이순자도 하와이대에서 취득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인정받아 스탠포드대 도서관에 취직했다. 전 대통령은 김재익의 사람됨이나 경제이론 면에서 나라의 보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문상차 미망인 李淳子 여사를 만났을 때 국보적 존재를 잃었다고 하면서 애도의 정을 표시하였다. 그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스탠포드대학에서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미나 룸 하나를 김재익 룸으로 명명하였겠는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1992 5판, 이장규, 중앙일보사) ---1980년대 초반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의 활동이 많이 게제되어 있다.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추모문집 (1998.09.02) 83년 버마 아웅산 사태 때 비운의 생을 마친 김재익(1938∼1983)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추모 문집. 엘리트 경제관료 김재익을 회고하는 경제관련 인사들의 글 5편, 낙천적인 선비로서 그를 기억하는 친 구들의 글 15편, 가족들의 글 6편 등을 부인 이순자(숙명여대 문헌정 보학과)교수가 엮었다.
♠ 성심여대총장 김재순 ---김재익의 큰 누님 가톨릭대 성심교정(경기도 부천시 역곡동) 김재순부총장(수녀) 고령자 전형제도 고안 (1996.04.23). 수녀 신분의 김재순 가톨릭대부총장(68·전성심여대총장)이 환경운동 연합(사무총장 최열)의 공동대표로 선출 (1996.02.07) 아웅산 사건때 숨진 김재익 경제수석의 누님인 김재순부총장은 51년 화학과를 졸업한 이후 미국 위스콘신대(밀워키)를 나와 58년부터 성직생활에 몸담아 왔다. 64년 이후 줄곧 성심여대(94년 10월 가톨릭대로 통합)에서 근무해왔다. 성심여대 교수로 생활하면서 93년 총장직까지 올랐던 김부총장은 성심여대 가 가톨릭신학대 및 가톨릭의대와 합쳐 가톨릭대로 통합되면서 부총장직 을 맡아왔다.
31) 김공망 (金公望, 1482(성종 13) ∼ 1528(중종 23)) ■ 김공망 연보 ○1482(성종 13) ∼ 1528(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수(渭 馬 ). 환(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손(宗孫)이고, 아버지는 오위부장(五衛副將) 성(城)이며, 어머니는 임치(任治)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출신으로서 사림계(士林系) 인물(人物)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된 뒤, 성균관 전적(典籍)과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을 두루 거쳐, 정언(正言) · 지평(持平) 등 사헌부 · 사간원의 요직인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중종 6년 (1511) 김공망(金公望)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지평 ★김희수(金希壽)와 정언 김공망(金公望)이 소격서(昭格署)와 문계창(文繼昌)·홍경주(洪景舟)·허지(許遲)·조현범(趙賢範)·조준(趙俊)·심의(沈義)·이성언(李誠彦)·강태수(姜台壽)의 일을 논하고, 김공망이 또 오결(吳潔)의 일을 아뢰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태수가 뒤에 공조 좌랑이 되었을 때 아무도 논한 자가 없었는데, 이는 세력의 융쇠(隆衰)가 있었음인지 국법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걸핏하면 법을 고치고 형세에 따라 상벌(賞罰)하니, 이는 동방 말세의 일이다. 슬프다.】 또 군직(軍職)의 쓸모없는 관원으로서 녹을 받는 자를 도태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중종 10년 (1515) ★김희수(金希壽)를 장령으로, 김공망(金公望)·채세걸(蔡世傑)을 지평으로, 최중연(崔重演)을 헌납으로, 이언호(李彦浩)·임추(任樞)를 홍문관 교리로, 민수원(閔壽元)·김인손(金麟孫)을 정언으로 삼았다. 조강에서 지평 김공망 등이 강릉의 풍속과 사치를 금하도록 아뢰다 지평 김공망(金公望)이 아뢰기를, “강릉(江陵)은 풍속이 강한하고 품관(品官)이 모두 강성하기 때문에 수령이 제어하지 못하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품관이 자기의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관노(官奴)·인리(人吏)들에게 징속(徵贖)하되 법대로 하여 자기 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진상하는 물건을 빼앗거나 역마로 사물(私物)을 수운하니, 풍속의 방자하고 사나움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새 관찰사가 배사(拜辭)할 때에 각별히 전교하시어 금하게 하소서.” ○중종 13년 (1518) 장령 ○중종 14년 (1519) 판사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내자시 정이 되어서는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이어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인근 고을의 수령 중에서 사욕을 취하고자 하여도 김공망이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5년간의 지방관 임기를 마친 후 신병(身病)으로 사직했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양주사곶(蛇串: 남양주 퇴계원면 퇴계원리 山74-1) 임좌이며, 묘갈은 이암 송인 문, 김이 서, 김무 전<대동금석서 대동금석속목 p51> 여성군 송인 찬, 자 이 서병전<안렴사공파세보>이다. ○배위 경주이씨(성현의 외손녀)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순(淳)이시며 종사랑(從仕郞: 문관 주사)을 지내셨으며 앞서 세상을 떠나셨다. 차남은 곧 ★이(삼수변伊)이신데 현풍현감(玄風縣監: 현풍고을 원님, 면장)을 지내셨고, 三男은 ★서(삼수변筮)이신데 부사직(副司直: 무관직 소령)과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노동청 사무관)을 지내셨으며, 四男은 ★준(浚)이시며 벼슬은 만호(萬戶: 외관직 무관, 대령)이셨다. 따님 한 분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 ★조섬(趙金+舌)에게 출가하셨다. <김공망 묘갈명 (송인 찬, 김이 서병전)>
■ 公望 문집기록 ◇芙蓉堂 : 堂在海州客館西牧使●김공망改建송시열撰記 (林下筆記 : 李裕元(1814~1888)) 林下筆記 奎4916 李裕元(1814~1888)이 隨意·隨錄한 것을 總集한 雜著. 筆寫本으로 著者의 여러 著述 중에서도 代表的인 것이다. 1871年(高宗 8)에 그의 寓居地인 天摩山 嘉梧谷 林下廬에서 脫稿하였다는기록으로 보아 이 책은 그가 宦海의 바쁜 생활속에서 틈틈이 써두었던 수록류를 한데 모아 이때에 와서 成冊한 것으로 보인다.
◇고봉선생문집 제3권 고 통훈대부 행평산도호부사(通訓大夫行平山都護府使) 조공(趙公) 묘갈명 공의 휘는 부우(府隅)요, 자는 태수(台?), 성은 조씨이며 관향(貫鄕)은 황해도 배천(白川)이다. ---아들은 두 명인데 진(鎭)과 섬(?)이며, ---섬(?)은 해주 목사인 ●김공망(金公望)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 次●公望韻 (立巖集 : 閔齊仁) ◇ 三月二十六日 聞●公望病久 往見于儒城舊舍則英病稍歇 ?與望同訪翰林亭 還廬 作詩三首以寄之 (立巖集 : 閔齊仁) ◇ 慶席 ●公望以兩恩同慶爲題 使之賦 (河西全集 : 金麟厚) ◇ 海州牧使金公[●公望]墓碣銘 (?庵遺稿 : 宋寅) 김공망 1482(성종 13)∼1528(중종 23) 민제인 1493-1549(성종24-명종4) 김인후 1510-1560(중종5-명종15) 송인 1517-1584(중종12-선조17)
■김공망 묘갈명 (송인 찬, 김이 서병전)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해주목사 겸춘추관편수관 公자望자 할아버지 묘갈명 해석
할아버지의 휘(諱)는 공망(公望), 자(字)는 위수(渭 )로 안동김씨이시며 신라 경순왕의 25세손이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환(丸)이시며 벼슬은 ♠승문판교(承文判校: 외교부 1급 관리관)를 지내셨고, 조부(祖父)의 휘는 ★종손(宗孫)이시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검찰 감사기관원)의 벼슬을 지내셨으며 돌아가신 후 조정에서 ♠호조참의(戶曹參議: 재경부 차관보)의 벼슬을 내리셨다. 부친(父親)인 ★성(城)께서는 ♠부장(部將: 오위의 대령)의 벼슬을 지내셨고 돌아가신후 ♠병조참판(兵曹參判: 국방부 차관)의 벼슬을 내리셨다.
일찍이 별좌(別坐: 장부 검사원, 서기관)에 계신 ★임치(任治)의 따님과 장가드시어 성화 임인(成化 壬寅: 성종13, 1482)년에 공(公: 할아버지)을 낳으셨다. 公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 영민하셨으며 부친을 일찍 여의셨으나 능히 스스로 정성을 다 하셨으며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고 정덕 병인(正德 丙寅: 중종원년, 1506)년에 문과(文科)에 오르시어 ♠승문정자(承文正字: 외교문서 서기)의 벼슬에서 ♠주서(注書: 왕명 출납 주사)의 벼슬로, 또 ♠성균전적(成均典籍: 국립대학교 사무관)의 벼슬을 거치시어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외교부 사무관), ♠공조(工曹: 건교부), 형조(刑曹: 법무부), 호조(戶曹: 재경부), 예조(禮曹: 외교 교육부) 및 병조좌랑(兵曹佐郞: 국방부 사무관)을 벼슬을 거치시어 다시 ♠정언(正言: 사간원 사무관) 벼슬에 오르셨고, ♠강원도사에서 내직(內職)인 ♠공조정랑(工曹正郞: 건교부 서기관) 벼슬에 오르시고 다시 ♠형조, 예조, 사헌지평(司憲持平: 검찰 감사원 서기관)에 오르시고 ♠훈련(訓練), ♠봉상(奉常: 제사 시호의 부이사관), ♠상의(尙衣: 임금님의 옷 공급관장), ♠군기첨정(軍器僉正: 국방부 조달청 부이사관), ♠사복(司僕: 궁중 여마, 구목관리), ♠선공(繕工: 건교부 부이사관), ♠부정(副正: 사복 군기사의 부이사관) 등의 벼슬을 거치시고 ♠제용정(濟用正: 조달청 이사관)으로 승진하시었다.
공께서는 무릇 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하심에 정성을 다하시었고 장래까지 염려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포부의 인격자' 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3년간이나 직책을 맡은 까닭에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은 '公이야말로 장관(長官: 장차 큰 관직을 맡으실 분)으로서의 직책을 맡을 합당한 인물'이라고 말들 하였다.
애당초 집을 지을 때도 公께서는 모친을 위해서 북당(北堂)을 지어 받드는 곳으로 정했는데 마침 公의 형님이신 ★공석(公奭)께서 ♠보성군수(寶城郡守)가 되시어 어머님을 모시다가 떠나시게 되니 公께서는 즉시 임금께 ♠나주목사(羅州牧使) 자리 얻기를 청하셨는데 그 자식의 정(情)을 다하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주목사의 임명을 미쳐 받지도 못하신 채 모친께서는 병(病)을 얻으셨다. 곧 달려가 모시려 했으나 곧 세상을 떠나시니 바로 정덕 신사(正德 辛巳: 중종16, 1521)년의 해였다.
公께서는 모친 거상 중에 예의를 다 하시고 가정 계미(嘉靖 癸未: 중종18, 1523)년에 복(服)을 벗으시고 ♠군자(軍資: 국방부 조달청), ♠장악첨정(掌樂僉正: 장악원의 음율 교열 이사관)이 되셨다. 곧 ♠사도정(司道+禾正: 농림부 이사관)이 되셨다가
♠해주목사(海州牧使: 황해도 해주지방 일급시장)로 부임하시어 세금을 적게 걷으시고, 재판을 공정하게 하시고, 죄 없는 사람을 잘 다스리시고, 간사한 사람을 굴복시키는 이러한 소문이 황해도 전역에 퍼져 이웃 읍(邑) 재상들이 의롭지 않은 일을 하고자 하였는데 사사로이 서로 경계하고 혹시 公께서 저희들의 이 불의(不義)를 알까 저희들끼리 두려워했다.
그후 5년이 지나 병환(病患)을 이유로 사직(辭職)하고 돌아오셔서 무자(戊子: 중종23, 1528)년 7월 14일에 돌아가시니 춘추(春秋) 47세이셨다. 그해 양주(楊州) 고을 동쪽 사곶(蛇串: 남양주 퇴계원면 퇴계원리 山74-1)에 임좌병향(壬坐丙向: 북북서 남남동)의 자리에 모셨다.
公의 인품은 아주 곧고 절조를 굳게 지키시어 세속과 구차스럽게 화합하지 아니하시고, 속되게 아래 위를 내려다보거나 쳐다보지 아니하시어 뭇 사람들의 기쁨을 사지 않으시었다. 그렇지만 속마음을 서로 주고 받는 분은 반드시 교분(交分)을 나누시었는데 그 분들은 명망이 있는 분들이었으니, 가령 참찬(參贊) 문절공(文節公)인 ★조원기(趙元紀) 같은 분이 그 한 예이다.
公의 부인(婦人)이신 숙인(淑人) 이씨(李氏)께서는 경주 망족(望族: 명망 있는 집안)의 가문(家門)으로 증조(曾祖)이신 ★사화(思和)께서는 부사(府使: 도호부 1급 관리)이셨고, 조부(祖父)의 휘는 ★익배(益培)이시고 벼슬은 좌랑(佐郞: 서기관)이시었고, 부친의 휘는 ★복형(復亨)이시고 주부(主簿: 고을현감)를 역임하셨다. 외조부(外祖父)님은 ★성현(成俔: 성종때 대학자)이시며 예조판서(禮曹判書: 교육부 외무부장관)를 지내셨다.
숙인(淑人: 할머니)께서는 홍치 경술(弘治 庚戌: 성종21, 1490)년에 출생하시어 천성(天性)이 인자하시며 근면 검소하시고 시집을 오시면서 시어머님을 모심에 효성을 다하시고, 아랫동서와 윗동서와의 화합을 꾀하시고, 가족을 사랑하시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시며, 노비를 부림에 은혜로써 하시고 어루만져 주시며, 제사를 받드심에 지극한 정성을 다 하시고, 부녀로서의 바느질을 정밀하게 하셨고, 평상시에 화려한 옷을 입지 아니하시고, 식사는 간소하게 드시고, 언행(言行)에 가식이 없으시고, 화를 내지 아니하시고, 옷과 이불을 세탁하심에 반드시 몸소 친히 하시고, 며느리나 하인들이 그 수고를 대신하겠다고 하여도 그를 허락하지 않으시었다.
갑자(甲子: 명종19, 1564)에 아드님 ★이(삼수변伊)의 부임지에 수행하시고 그후 융경 무진(隆慶 戊辰: 선조원년, 1568)년 3월 29일에 끝내 병환(病患)으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79세이시었다. 차남(次男) 이(삼수변伊) 등이 모친의 시신을 모시고 돌아오니 때는 6월 4일이었다. 돌아가신 공(公: 할아버지)의 묘소에 합장(合葬)으로 모시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순(淳)이시며 종사랑(從仕郞: 문관 주사)을 지내셨으며 앞서 세상을 떠나셨다. 차남은 곧 ★이(삼수변伊)이신데 현풍현감(玄風縣監: 현풍고을 원님, 면장)을 지내셨고, 三男은 ★서(삼수변筮)이신데 부사직(副司直: 무관직 소령)과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노동청 사무관)을 지내셨으며, 四男은 ★준(浚)이시며 벼슬은 만호(萬戶: 외관직 무관, 대령)이셨다. 따님 한 분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 ★조섬(趙金+舌)에게 출가하셨다.
종사(從仕=1순)께서는 2남 2녀를 두셨고, 현풍(玄風=2이)께서는 2남 1녀를, 사직(司直=3서)께서는 3남 3녀를, 만호(萬戶=4준)께서는 1남 1녀를 두시었다. 외손(外孫)은 1남 5녀를 두셨고 증손(曾孫) 약간명을 두시었다.
내(★寅: 이 갈문을 지은이)가 현풍(玄風: 차남 ★삼수변伊)와 더불어 서로 알고 지낸지가 오래 되었으며, 어느날 친구가 복(服)을 벗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찾아와 갈문(碣文)을 청하며 말하기를 "자네의 부친(=송지한←송질)께서도 또한 나의 아버님(=김공망)을 잘 아시고 계시지 않은가" 나는 도저히 자네의 청을 사양할 수 없어 이렇게 이 글을 엮고 명(銘)을 뒤에 붙이니
그 뜻은 크고 또 크시고, 기상 또한 높고 높으시어 바퀴처럼 원만하셨지만, 이 세상에 어찌 편한 길만을 원하셨겠는가 수명은 길지 못하셨지만 그 탓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오직 숙인(淑人: 할머니)께서는 아주 잘 하셔서 집안에 남은 상서로움이 서려 있고 자손이 수없이 어질고 훌륭하시니 장차 멀리 더욱 창성하시리라. 이 글을 돌에 새기나니 오래 길고 영원한 세월동안 밝은 빛이 되리라
융경 3년 기사 (己巳: 선조2, 1569) 월 일에 세우다 봉헌대부 행도청부도청관 여성위 이암( 庵) ★송인(宋寅) 삼가 글을 짓고 장예원사평 현풍현감 차남 ★이(삼수변伊) 슬퍼하며 글을 쓰고 전함
서기 2003년 4월 일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참판공지파 목사공계 김포종회 회원 삼가 세움
32) 김이(金삼수변伊) 김공망의 차남 이(삼수변伊)는 장예원사평 현풍현감(玄風縣監: 현풍고을 원님, 면장)을 지냈고, 송인과 더불어 서로 알고 지낸지가 오래 되었으며, 어느날 복(服)을 벗지 않은 상태에서 송인을 찾아가 갈문(碣文)을 청하며 말하기를 "자네의 부친(=송지한)께서도 또한 나의 아버님(=김공망)을 잘 아시고 계시지 않은가" 하여 1569년(융경3년 기사己巳 선조2)에 여성위 이암( 庵) 송인(宋寅) 삼가 글을 짓고, 이(삼수변伊)가 슬퍼하며 글을 쓰고 전하여 김공말 묘갈을 세웠다. <김공망 묘갈명 (송인 찬, 김이 서병전)>
33) 김지(金墀(土+遲)) (1455-1534) **도 : 현령공 김지 묘와 묘비 (청원 오창읍 양지리 산수동) 자 次軒차헌이며 공은 군수 성의 아우인데, 사헌부감찰 증호조참의 종손의 아들로서 1474(성종5) 갑오에 사마시를 거쳐 그후 루전하여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치적이 높았다. 연로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특히 통정대부 당상관의 승차의 성은을 받았으며 1534(중종29) 갑오 9월 초9일 향년 80세에 졸하다. 묘는 오근산소동에 있는데 모재 ★김안국은 묘갈을 찬하여 이르기를 "너그럽고 후덕하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고을을 다스림에 백성을 잘 보살폈으며 집안에 거처함에 화목을 돈독히 하였고 장수와 강녕을 누렸다." 하였다. <오창지> 김지 묘갈(모재 김안국 찬)이 오창 양지리에 있으며, 김안국의 모재집에 김지 행장, 김지 묘갈문이 실려 있다. 김지의 아들 공언은 병천으로 이거하여 모재 김안국과 교유하였다.
■안동김씨 통정대부 문의현령 김지 행장 김지 1455(세조원년) - 1534(중중29년) 공은 고려말 충신 본관 안동인 문하시랑 정당문학 관지 안렴사 휘는 사렴 호는 오은공의 5대손이요, 사헌부감찰 증호조참의 종손의 아들로서 1474(성종5) 갑오에 사마시를 거쳐 그후 루전하여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치적이 높았다. 연로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특히 통정대부 당상관의 승차의 성은을 받았으며 1534(중종29) 갑오 9월 초9일 향년 80세에 졸하다. 공의 묘비를 모재 ★김안국이 찬하니 좌와 같다.
■현령공 비문 공 諱지 字次軒 안동김씨 신라경순왕지후 경순왕9세손 曰방경 고려첨의중찬봉상락군개국공 시문충렬 훈업관세 공지9대조야, 5대조 여말충신 문하시랑 정당문학 관지안렴사 휘사렴, 증조 지주사우주 조승문원판교 휘환, 고 증호조참의 사헌부감찰 휘종손, 비광주김씨 용분시위사 대호군 휘처지녀 공성겸태 을해20중 사마시 ---(후략)--- 김안국찬 (호모재 관지2상 의성인 동국유현) <문의향교지, 1991> p 351
34) 김만협(金萬協, 1640-1693) 字는 世珍, 安東金氏 按廉使公 金士廉의 후손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벼슬은 朝奉大夫 童蒙敎官으로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이 다하여 동분서주하며 온갖 약을 구하여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로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당하여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묘를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의 복상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3년 죽을 먹으며 지냈다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근방의 산에 불이 일어나 부친의 묘소가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그는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화상과 화기를 마셔 병을 얻게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숙종조에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괴산군지, 1990>
■ 김욱, 김직, 김욱, 김수 (金稶. 金稙. 金 禾+遂. 金 穡) 본관은 安東, 金萬協의 아들들로서, 모두 부모를 위하여 誠孝가 독실하여 旌閭했다. <괴산군지, 1990>
■ 부지런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한 김만협(金萬協) 괴산읍에서 남쪽으로 미원행 도로를 따라 5km가면 문광국민학교가 있고 문광국민학교를 지나 약 200m 좌측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고려말의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인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10대손 金天海의 아들 萬協의 것이다. 1640년에 출생하여 남달리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로서 1692년(숙종18) 3월 8일 문중에서 상의하여 세우게 되었다. 공은 자녀를 2남 5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남다른 효자였다. 독신 효자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金萬協이 효자로 교지를 받기까지는 아우되는 萬전의 뒷받침이 컸다. 아우 만전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 가계를 구기지 않게 뒷받침하였고 형 만협은 어버이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보살펴 드렸다고 한다. 만협은 순창조씨와 혼인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부인 조씨의 부친은 공조좌랑에 오른 덕망높은 분이었고, 그의 증조부는 사과 벼슬에 오른 이였다. 정부인 순창조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후처로 전의이씨를 맞아들였다. 만협은 조봉대부 동몽교관의 벼슬에 올라 나라일을 보살피는 한편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을 다하여 동분서주하여 온갖 약을 구하여 써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만협은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를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 복상 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식생활에 있어서도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음식을 피하기 위하여 3년간은 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으며 복상기간을 마쳤다고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 근방의 산에 불이 났다. 산불은 부친의 묘소에까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만협은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만협은 화상과 화기를 마시고 병을 얻게 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69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행 사실은 정려 및 안동김씨 가보에 기록되어 있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김만협 효자각(金萬協 孝子閣) 김만협-김일 효자정려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이 정려각은 효자 金萬協 (1640-1693)의 정려로 숙종18년 (1692)에 세운 것인데, 1985년 효자 金溢(1719-?) 의 정려를 합설하였다. 김만협의 자는 世珍, 본관은 안동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부친의 임종이 가까우매 단지주혈하여 5일을 더 연명하였다. 3년 복상동안 20리길을 매일 성묘하였으며 성묘중 산에 불이 일어나 묘소에 가까워지자 옷을 벗어 물을 적시어 불을 껐다. 이 일로 화상과 화기를 마셔 세상을 떠났다. 김일의 자는 益三, 김만협의 5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모친의 병이 깊었을 때 지성을 다하여 치료하였으며 천수를 다하매 10리 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3년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孝子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金萬協之文, 孝子 贈嘉善大夫 通德郞 金溢之文 이라 쓴 편액 2점과 김만협의 행적을 적은 孝子金公行錄, 김일의 효행을 기록한 金溢孝行錄이 판각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2칸, 측면1칸의 목조와가로 보호철책을 둘렀다. <괴산의 문화재>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괴산군 문화유적>>, 85.> <괴산군지, 1990>
<효자각 사진> (2005. 9. 17)
35) 김일(金溢) 1719∼ ? 字는 益三, 본관은 安東 金萬協의 5세손이다. 효자 가문에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늘 부모곁에서 부모님을 지켰고 조석으로는 잠자리를 살피어 문안드렸으며,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지성으로 약을 달여드렸다. 나이 13세에 모친이 오랜 병환으로 신음하며 백약이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산제를 베풀어 3개월 동안 하루같이 험한 산길을 왕래하며 산신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지성이 감천하여 모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가세가 청빈하여 어머니 봉양이 어려워서 마을의 제사집을 다니며 음식을 얻어다가 공양하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수일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병환이 들어 자기를 부르고 있는 꿈을 꾸어 심상치 않아 과거를 포기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과연 노모가 병석에 누어 있었다. 지성으로 간호하여 치유케 하고, 천수를 다하여 죽으니 10리 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3년동안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가선대부 통덕부사이며 묘는 신기리 가정동에 있다. <괴산군지, 1990>
■ 석달동안 산제 올려 노모 병을 고친 효자 김일(金溢) 자는 益三, 본은 안동김씨 가문의 조상인 효자 金萬協의 5대손으로 세습적으로 효도에 성실한 가문에서 1719년(숙종45)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곁을 지키어 아침 저녁으로 잠자리를 살펴 문안드리며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걱정이 되어 나의 몸을 사치할 수 있겠느냐 하며 머리를 빗는 일도 없이 스스로 약을 다려 드렸다고 한다. 모친이 13년이란 오랜 병환으로 신음하는데 어떤 약이든간 써보지 아니한 약이 없었다. 백약이 무효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산제를 지내게 되는데 목욕을 깨끗이 하고 밤중에 10리 길이나 되는 험한 고개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눈바람을 맞아가며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범을 두려워하지 않고 험한 고개를 넘어가서 3개월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모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가세는 청빈하여 외로운 편모에게 봉양할 기름진 음식을 대접할 형편이 못되어 동네에 제사집이 있으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찬잔술과 한조각의 음식을 얻어다가 공양했다고 하며 허리에는 항상 음식을 얻어담을 주머니를 차고 다니었으며 옷도 깨끗이 입지 못하고 옷소매는 기름때에 절어 있었다고 한다. 김일은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 수일간 머무르게 되어 내일이면 과거를 보러 시험장에 들어가게 되는 날인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 고향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차림을 하는데 같이 온 친구들이 깜짝놀라 물어보니 효자 김일은 대답하기를 "어제밤 꿈에 늙으신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니 반드시 병환으로 편찮으신 모양이다. 내 어찌 과거를 보기 위하여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겠느냐" 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과연 늙은 모친이 병들어 누워 계셨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노모가 살만큼 살아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니 10리밖에 묘를 쓰고 밤에는 궤연(망인의 신주를 모신 곳) 옆에서 자고 낮에는 무덤앞에 주과를 진설해 놓고 곡하기를 복상 3년동안을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효자각 사진> (상기 김만협과 함께 있음. 2005. 9. 17)
36) 김락춘(金洛春) 김락신(金洛新) 형제 國良(국량)의 아들 김락춘은 字는 聖團, 본관은 安東 按廉使 金士廉의 후손이며 募梧齋 金琦의 손자이다. 묘는 괴산군 사리면 이곡리 백양동이다. <괴산군지, 1990> 김락신은 字는 命汝, 洛春의 아우이다. 가세가 극빈하여 근검 노력으로 노부의 구미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하게 할 의복을 마련하기에 힘쓰더니 연로한 부친이 병이 위중하자 자신도 육순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동안 잠시도 병석을 떠나지 않고 시탕하며 병간호에 정성을 기울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여러 동생들을 거느리고 상례를 다하며 4년을 하루같이 성묘했다. <괴산군지, 1990>
37) 김태룡(金泰龍) (1905-1972) **도 : 송덕비 (괴산 사리면 이곡리 보광초 이곡분교장) 서사참봉 在學(周然)의 손자이며, 숭릉참봉 龍會(호淡淵)의 아들로 종사랑 전위참봉 행문묘직원을 지냈다. 자는 韓雄, 호는 龍+耳 世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며 金龍會의 아들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기개가 강직하여 士友들의 경모를 받았으며 일찍이 개화에 눈을 떠 지역내에 후학들이 교육할 학교가 없어 자라나는 학동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는 점을 묵과할 수 없어 사리면 梨谷里에 사는 이태호씨를 찾아 논의하고 사재 1백석지기를 희사하여 이태호씨가 희사한 대지 1,220평 위에 3개의 교실을 신축하여 학교를 세웠다. 육영사업에도 공헌했으며, 그는 종사랑전위참봉으로 괴산향교 전교를 지냈다. 그의 덕행과 인망은 유림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후에 禾谷초등학교 동창생 일동과 지방유지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송덕비를 학교앞에 세웠다. 문헌 송덕비문 <괴산군지, 1990>
<송덕비 탐방> (1)탐방일 : 2006. 1. 17 (2)탐방자 : (3)내용 : 현지 방문 결과 학교명은 <보광초등학교 화곡분교장>이었고, 송덕비 앞에는 아무런 해설문이 없었으며 송덕비 후면기록은 마멸되어 잘 알아볼 수 없었음. 송덕비의 전면에는 <金泰鏞先生 頌德碑>라 되어 있음(龍과 鏞 중 어느것이 옳은지)
<괴산군 사리면 보광초등학교의 분교인 화곡분교장>
<화곡 분교장 정문 앞에 있는 송덕비 2기>
<송덕비>(좌-김태용 송덕비. 우-이태호 송덕비)
<김태용선생 송덕비>
<이태호선생 송덕비>
38) 김공언 (金公彦) 金公彦 공은 조선 성종조에 문의현령이던 아버지 金지(김지)와 어머니 진주유씨 사이에서 4남1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릇이 크고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모재 김안국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벼슬이 동부참봉에 올랐다. 그러나 중종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숨고 핍박을 당하자 조정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출생지인 청주를 떠나 병천으로 옮겼다. 모재 김안국이 김공언의 부친 김지의 묘갈을 찬하였다. 김공언 공은 병천에서 선산유씨를 부인으로 맞아 憙(희), 燾(도), 勳(훈), 煦(후)를 낳았다. 장남 희와 3남 군자감정 훈은 이곳 병천에, 차남 도는 부사직으로 삼척에, 4남 후는 영동에 삶의 터전을 닦아 지금까지 후손들이 그 곳에 살고 있다. 묘는 목천 갈전면 검대동에 있으며 행장이 전한다.
<모재전집에 실려 있는 공에게 부치 모재 김안국의 시조> (2005. 9. 26. 용주(안) 제공)
출전 : 모재전집 제목 : 安東에 이르러 公彦에게 부치다.
매양 西淸에서 숙직할때를 생각고. 雲樹의 생각 悠悠함을 견디기 어려웠노라. 그런데 만난지 몇일이 못되어. 또다시 天涯에 離別愁 남긴단 말가.
<원문> 到 安東奇 公彦 每憶 西淸 禁直 秋不德 雲樹 思 悠悠相逢 未洽藪寶話又起 天涯 像別愁.
♠ 이시발(1569-1626) ---김도의 외손자 ○공언의 2자 김도의 외손자 (이대건-)이시발은 경주이씨로 1602년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직시 출렬공(휘방경)의 묘갈을 건립하였고, 그의 유고집인 벽오유고에 충렬공 墓誌가 수록되어 있으며, 김도의 사위 이대건(李大建,) 이시발의 손자 이인혁(李寅爀)은 오창 송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김공언---2/4김도---따님(+이대건)---이시발
39) 김옥 (金,沃+金) ○3남인 훈의 아들 孝吉은 생부 희로 1553년 음 예빈시첨정에 올랐으며, 沃+金(옥)과 (삼수변) (색) 두 아들을 낳았다. 옥은 1618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도사로 훈련원정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웠다. 색은 학자로서 성품이 곧고 어질며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호는 柯亭이다. 도원리에 있는 사정대는 안동김씨 김옥(金 )이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다.
40) 김세후 (金世厚) ○옥의 아들 世厚는 벼슬이 우승지에 올랐고 대록지 유행록에 실려 있으며 묘는 회인에 있으며, 손자 鼎和, 鼎弼, 鼎佐는 당대의 문장가였다. 鼎和(정화)는 묘가 보은 회인 갈치에 있으며, 과거를 일삼지 않고 경서에 힘써 행의를 닦고 자제에겨 孝友를 먼저 가르쳤다. 손자 命淵과 命涵은 예학에 밝아 문하에 많은 문사가 배출되었고 翰國과 명연의 호패가 사손집에 전해오고 있다.
41) 김지수 (金芝秀, 1791-1856) 人+英(영)은 성리학에 밝았고 형도와 함께 남공철에게 안렴사공의 신도비명을 부탁하였고, 영의 아들 芝秀는 호柯圃(가포)로 문장에 뛰어나 군수 조국인과 함께 大麓誌대록지(서울대 소장, 奎3259)를 편찬했다. 안정복이 대록지를 편찬한 후 40여년만에 군수 조국인과 김지수에 의해서 또다시 편찬되었고, 이때에는 金聖述(김성술 : 제학공파로 이호의 5대조로 목천지방 8才士의 수장이었다 함)을 비롯하여 8명의 士林들이 읍지 편찬에 참여하였다.
<柯圃 金芝秀의 시> ---1853년 노은정을 중수하고 시를 지어 현판 7대를 내려온 조그만 정자여 그 동안의 흥폐에 세월 얼마 지났는가 문장의 화려함은 현판에 남아 있고 풍치는 여전하여 책상과 병풍에 접근하네 임천은 먼 곳이라 회포도 다감한데 헌무를 중수하니 눈이 활짝 뜨이네 후손들이 성력을 다했노라 치하하기는 후일에 선령을 참배할 때 말씀이 있으리라 *김지수 (1791-1856) 본관은 안동, 호는 가포, 대록지 편찬 *1853년 노은정을 중수한 뒤 목천 지방의 8문장가중 양파 류영무, 가포 金芝秀, 석남 한정이 등 세 사람이 중수를 기념하는 시를 지어 현판함 <四수詩> 백석탄 밝은 달 밑에 갓끈 씻는 자 이 누구이며, <한만용> 연암탄 가랑비 속에서 낚시대 드리운 자 그 누구인가, <김시백> 노은탄 물소리 속에 거문고 타는 자 누구라 하는가. <한만용> 외지의 나그낸들 어떠하리오 누구누구 있든지 알바 아닐세. <김지수> ---목천의 8才士 중에서 안동김공 芝秀(지수)와 강릉김공 시백, 청주한공 만용의 3인이 이 동리에 살면서 문장과 덕행과 뜻이 서로 맞았는데 어느날 우스개 소리를 하던 끝에 한공이 입으로 제1귀를 부르니, 강릉김공이 따라서 제2귀로 응답했고, 한공의 또 제3귀를 불르자 안동김공이 이어서 제4귀로 응답하였다.
42) 김정좌(金鼎佐) ○정필은 어릴적부터 학문에 부지런하여 문장과 글씨가 특출했으며, 손자 명집도 문사가 풍부했다. ○鼎佐(정좌)는 호居由窩(거유와)로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고, 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金鼎佐의 시> 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 석양(夕陽)의 그림자 속에 중은 절로 돌아가고, 흐르는 물소리 가운데에 말(馬)은 다리를 건너간다.
43) 김상기 (金相器, 1639-1708) ■ 노은공(김상기) 연보 1639년 아버지 金志亮과 어머니 행주기씨의 2남4녀중 2남으로 출생 ? 숙부 봉직랑 金志奭에게 양자로 들어 옴 ? 사헌부 감찰인 남양홍씨 홍우민의 딸과 결혼 1662년 24세때 향시에 등과,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침 (51세) 1689년 노은정을 지음 (61세) 1699년 도동서원을 중수할 때 상량문을 지음 (65세) 1703년 곽시징, 김광수와 더불어 시를 지어 노은정에 현판함 1708년 70세를 일기로 별세, 3남5녀 11손을 둠
■ 노은공(김상기) 약력 공의 자는 鼎甫(정보), 호는 老隱, 본관은 안동으로 1639년(인조17 기묘)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아버지 志亮과 어머니 행주기씨의 2남4녀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숙부이신 志奭에게 봉직랑 志奭공과 숙모 죽산박씨에게 입양되었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이니 고려명장 諡號 忠烈公인 諱 方慶의 15대 손이고, 이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려의 충절을 끝까지 지킨 안렴사 梧隱 士廉의 11대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신동이라 불렸고 숙종때는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니 세상사람들은 공을 詩將軍이라 불렀다. 공은 이같은 학식과 인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도 정5품의 통덕랑을 내렸으나, 공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물욕에 젖지 않아 자기를 위한 학문과 후진의 양성에 전념키 위해 조상대대로 살아온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로 은거하는 길을 택하여 오직 시문학에만 전념하시니 선비들로부터 더욱 추앙을 받으셨다. 특히 영조대왕의 스승이신 郭始徵 선생과 목천군수인 金光遂 선생과는 친교가 두터웠다. 공은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시며 후진양성에 힘을 아끼지 않으셨다. 50세 되던 해 정자를 짓고 현판과 바위 위에 老隱亭이란 이름을 친필로 새기시고 스스로 老隱居士라 하셨다. 1708년 (숙종34) 9월 18일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배위는 현감 홍우민의 따님인 恭人 남양홍씨로 슬하에 3남5녀를 두셨다. 공의 높은 학문과 선비로서의 고결한 인품을 사모하여 정조때의 명 문장가로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낸 南公轍은 노은정 현판에 공의 행적을 기린 글을 남기셨고, 공의 손자 錫範은 老隱亭記를 지었다.
<노은정 현판> 김상기 공의 친필 휘호 - 건립자 김상기 공의 친필로 현판되어 있고, 같은 글자가 노은정 아래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
<金相器의 글> ---1803 남공철 현판, 대록지 수록 우뚝하게 솟은 바위 정자 또한 높으니 사방이 훤하구나 가도 또 가도 모두가 산뿐인데 누워 듣는 이 물소리 뿐이라네 나무에 가리워 석양 빛 푸르고 꽃은 취객과 어우러져 붉어라 누가 예 올라 주인을 묻거들랑 숨어 사는 머리 하얀 늙은이라 하게나 *金相器 (1639-2708) 자는 鼎甫(정보), 호는 老隱
<金相器의 글> ---1963 김태경의 노은정기, 천안군지 수록 공(=김상기)이 스스로 시를 지어 말하기를 높이 높이 솟은 위태로운 바위 위에 정자 높아서 바라보니 사방으로 통했네 다니는 길은 산그림자 밖이 아니오 누웠으니 또한 물소리 속세일세 나무들은 사양에 가리워 푸르기만 하고 꽃들은 취객을 맞이하니 불기만 하네 정자에 올라가서 주인을 묻는다면 늙은 은사 백박의 늙은일세이라
♠ 한강 정구(1543-1620) ---문영공(김순)의 외손자 정포의 후손 이곳에 한강 정구와 관련 유적지로 도동서원, 강당터, 한강정이 있다. 한강 정구는 고려시대 문영공(휘순)의 큰 사위 정책의 둘째아들 설곡 정포(설곡시고가 전해 옴)의 후손으로 한강집을 지었는데, 이 한강집에 충렬공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강당터> 번개울 뒤에 있는 강당 터.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처가인 한씨들의 인연으로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한강정> 한강 정구 선생이 산수의 절경을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객지에 살면서 주자의 서원을 은석산 밑에 세웠으니 곧 죽림서원이라, 옛터가 있다. <도동서원> 조선 인조 기축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주자, 정구, 김일손, 황종해를 배향했던 서원으로 노은 김상기(1639-1708) 공이 상량문을 쓰고, 백곡 김득신(1604-1684, 선조37-숙종10년)공께서 창건당시 상량문과 향사의 축문,집례문을 찬하였다.
♠ 곽시징(1644-1713) --- *곽시징(1644-1713) : 본관은 청주. 송시열의 문인으로 영조의 왕자시설 스승 외가가 광터골이어서 자주 들려서 김상기와 교유가 많았다고 하고, 유고 고소설이 있으나 병천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의 빈한으로 발간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경한정> 경한재 곽선생 또한 산수의 절경을 사랑하사, 정자를 짓고 주자의 寒泉(한천)을 따서 이름하면서 노은정과 더불어 이야기 하고 웃으면서 問答하였다고 老隱詩에 말하였다. < > 즐거운 농막 우뚝한 두 정자 시냇물 맑고 외길이 나 있네 베개 위에 샘물소리 와 닿고 술잔 속에는 산이 들어와 비치네 소나무에 걸린 달 들창이 환하구나 바위에 꽃이 지니 물마저 붉어라 난간에 기대어 낚시 드리우고 두 늙은이 마주보며 앉아 있네 또 詩歌는 있으나, 정자는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숭명사터 石礎> 도원 김선생과 경한재 곽선생을 배향하던 사당의 옛터
■ 천안노은정 (天安老隱亭) (문화재자료 355호) 지정일 1997.08.05 소재지 충남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산19 소유자 안동김씨종중 노은정은 노은 김상기가 학문 연마와 후배양성을 위해 숙종 15년(1689)에 지은 정자이다. 건물 이름은 선생의 호에서 유래하였으며, 철종 4년(1853)에 처음 고친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건물은 화강암 위에 앞면·옆면 2칸 규모로 세웠고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정자의 각 기둥에는 수침을 막는 돌기 등을 사용해 안전을 도모했다. 노은정은 천안시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며, 300년 전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서 주위경관 또한 아름다워 ‘도원 8경’의 하나로 전하고 있다. 도원8경의 하나로 1799년에 편찬된 대록지에도 기록이 전한다. 조선 숙종때 학자인 노은 김상기(金相器)가 세상일을 잊으려 1689년경에 이곳에 정자를 짓고 호를 따서 노은정이라 하였다. 광기천변의 암반위에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세웠고 지붕은 몇번의 번와공사가 있었으나 기둥이나 가구재는 당초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특히 사모지붕을 올릴 때 지붕틀을 구성하는 기법을 볼 수 있다.
<사진 자료> (2002. 11. 13. 안사연 탐방 촬영)
<노은정 아래 바위의 글씨>
<외형과 구조> 조선중기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보이는 노은정은 건축학자와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주 방문해 살펴보고 갈만큼 우리 건축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면2칸, 측면2칸에 정사각형으로 기둥은 괴목(회화나무)을 사용했으며, 지붕은 원래 골기와에 팔작지붕이었지만 지난 1989년 개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변질되었다. 급격한 경사의 암반 위에 지은 관계로 8개의 기둥 밑에는 돌기둥을 각각 받쳤으며, 2寸 두께의 나무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마루 밑은 공간으로 자연의 암반이 살아있다. 마루의 4면 기둥사이에는 나지막한 난간을 둘러서 안정을 도모함은 물론 마루에 앉아서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정자 밑에는 거북 형상의 바위가 받치고 있어 정자의 위용을 더해 주며, 정자아래 바위(암벽)에는 '老隱亭'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정자 건립당시(=1689) 새긴 것으로 노은공(=김상기)의 친필이다. 정자 주위는 30평 정도로 주변에는 수령 300년의 참나무와 느티나무, 향나무 등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운치를 자아내며, 새들의 지저귀는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경으로 장관을 이루는 정자이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광기천은 일명 갈전천(칠앗내) 또는 검계(검개울) 라고도 하며 물이 맑아 옛 先人들이 樓上에서 낚시를 드리우던 정취를 헤아릴 수 있다. 이 곳은 금강 상류로서 인근 지역의 식수와 농업용수, 공업용수의 젖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 1970년경의 정자 모습 - 1972년도 발행 [이것이 한국이다] 충청도편에 실린 노은정 *(사진) 1989년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른 노은정 - 노은정을 둘러싸고 있는 수령 300년의 고목
<전 설> 노은정의 창건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정자의 터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유명한 지관을 불렀다. 처음에 명당으로 정한 곳은 銅城山 지맥의 정상이었다. 이곳에 定礎立柱하고 上樑까지 했는데 무슨 일인지 밤 사이에 모든 재목을 남김없이 뜯어서 이곳 검계변(현 위치)으로 옮겨 놓기 수 차례가 거듭되었다. "이는 神靈의 소행이지 사람의 행위는 아니라" 하고, 지금의 위치에 터를 정하였다. 그러나 이 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 편의 건축도 할 수 없는 협소한 곳이었다. 후면에는 가파른 산줄기가 솟아있고, 그 기슭에는 한 덩이의 화강석 바위가 돌출되어 광기천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柱礎 한 개 놓고 기둥 하나 세울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괴이한 현실에 주저하여 役事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화강석 바위에 천수를 상징하는 거북의 像을 조각하고 길일을 택하여 山神과 龍神께 告由를 드리고 名工으로 하여금 설계를 하고 정자 짓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후 무사히 역사를 마치니 당시의 정자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은정 연혁> 1689년 노은 金相器가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378번지 금강 상류 광기천에 정자를 지어 노은정이라 이름 붙임 1703년 영조의 스승인 경한재 곽시징과 목천군수 김광수가 金相器와 더불어 시를 지어 현판함 (시는 전하지만 현판은 남아 있지 않음) 1747년 건립자의 손자 金錫範이 金相器의 시를 다시 현판하고 소감을 함께 씀 1803년 건립자의 5대손 金聖說(김성설)이 중수하고, 건립자의 외현손인 영남관찰사 남공철이 金相器의 시, 金錫範의 글, 자신의 소감을 함께 현판함 1853년 중수한 뒤 목천지방의 8문장가중 양파 류영무, 柯圃(가포) 金芝秀, 석남 한정이 등 세 사람이 중수를 기념하는 시를 지어 현판함 1895년 건립자의 6대손 金思永이 중수하고 중수기를 현판함 (상춘객이 훼손시켜 현재 남아 있지 않음) 1930년 金昌會, 金珽會(김정회), 金振彩(김진채), 金泰慶 네 사람이 중수하고 중수기 현판 (상춘객이 훼손시켜 현재 남아 있지 않음) 1963년 3월 10대손 김태경(1897-1986) 삼가 쓴 노은정기가 천안군지에 실려 있다. 1976년 400년생 향나무 도벌당함 1989년 건립자의 후손일동 중수 (현 상태의 정자) 1990년 건립자의 9대손 金聖會가 비문을 짓고 후손일동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움 1993년 천안군청 (군수 윤병열)이 '내 고장 이름다운 곳 찾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2천700만원을 투입해 노은정 주변의 정화사업을 하고 유래비를 세움 1996년 한국족보신문사에서 기획탐방으로 집성촌 취재로 안동김씨 400년 세거지와 노은정 보도 199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 지정 2003년 천안시에서 보수 실시 2013년 충청남도와 천안시가 원형으로 보수
44) 김색(金삼수변束) ○김색은 호柯亭가정으로 아들 志奭은 봉직랑이며, 그 아들 相器는 생부는 志亮지량으로 자는 鼎甫, 호는 老隱이라 하고 글로써 세상을 울렸다. 그는 일찍이 경한재 곽시징, 군수 김광수와 벗하며 지냈다. 숙종의 사액서원인 도동서원의 상량문을 쓰기도 하고, 말년에는 노은정을 지었으며, 또한 후진양성에 힘을 바쳤다. 공의 손자 錫泰(3녀+남유용-남공철), 錫範, 錫謙과 증손 宗洙도 글씨와 문장으로이름이 높았다. 瑞霖(서림)은 영과 함께 남공철에게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金錫範의 글> ---1803 남공철 현판 위의 시 한 수는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김상기)께서 늙으막에 이 정자를 짓고 나서 읊으신 것이다. 이 시를 아직도 현판에 새겨서 걸어 두지 못하여 세속을 초월하여 글을 읽고 산골에서 여생을 마치려 한 할아버지의 뜻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손자 錫範이 마침, 內從弟(=?양파 류영무, 1788-1871)가 군수로 있는 完山에 왔다가 그 힘을 빌어 비로소 작은 현판을 하나 만들고는 흐느껴 울면서 이 글을 씀은 뒤에 이 곳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참고자료가 되게 함이라. 1747년 (영조23년) *金錫範 (1685-1754) : 자는 士則(사칙), 건립자 김상기 공의 손자
♠ 남공철(1760-1840) ---석태의 외손자 ○석태의 외손자 (남유용-)남공철은 (순조 계해)경순왕유허비명병서, 안렴사공묘갈명을 찬하고, 고려명신전 일민편에 안렴사공을 수록하고 있으며, 命淵의 아들 +英(영)과 亨道(형도)와 瑞霖(서림)이 남공철에게 찾아가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여 신도비명을 찬하였고, 1803년 건립자의 5대손 金聖說(김성설)이 노은정을 중수한 뒤 건립자의 외현손인 영남관찰사 남공철이 金相器의 시, 김상기의 손자 金錫範의 글, 그리고 자신의 소감을 함께 써서 현판하였다. 외조부 석태의 묘를 쓸 때 청주한씨 종산과 경계로 청주한씨가 완강히 반대하자, 당시 높은 벼슬에 있었던 외손자 남공철에게 연락하자, 대소 관원 수백명이 노은정 앞길에 장사진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공언---3/4김훈---김효길---김색---김지석---김상기---김봉구---김석태---따님(+남유용)---남공철
<南公轍의 글> ---1803 남공철 현판 우리 외고조 노은공은 산골에 숨어 살면서 공명과 인연을 끊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비록 그의 덕을 아는 이가 없지만 충청도의 선비들은 지금까지도 그가 남기신 자취를 우러러 보며 그리워하는 이가 많이 남아 있다. 정자는 그가 늙으막에 지은신 것인데 오랫 세월 비바람에 쓰러져 가던 것을 공의 5대손 聖說(성설)이 다시 손질을 하고, 이어 공의 시를 적은 현판까지 걸고 나서 내게 말 한마다 해 줄 것을 부탁하여 왔다. 아! 한 그루의 나무도 누가 심었느냐에 따라 사랑받기도 하고 미원도 하는 법인데, 하물며 이 추녀와 기둥, 창과 벽 모두는 바로 공이 일찍이 거닐고 의지하던 곳이며, 이 시는 또 공이 그 때 느낀 감정을 노래한 것인데 어찌할 것인가. 聖說이야말로 선조의 뜻을 잘 이은 사람이라 하겠다. 1803년 (순조3년) 가을 외현손 영남관찰사 남공철 삼가 씀 *남공철(1760-1840) : 호는 금릉,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영의정을 지냈고, [고려명신전]을 지음
45) 達成의 부인 광산김씨 ○ 5대손 達成의 부인 광산김씨는 남편이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를 남편에게 먹여 3일이나 더 살게 했으며,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따라가니 세상 사람들이 열녀로 추증했다. (이 내용은 대록지에 수록되어 있음)
46)김호겸 (金好謙, 1824- ) ○金命淵의 증손 김호겸(金好謙)은 김난수(金蘭秀)의 아들로 1824년 출생하여 자는 익재(益哉)이며 拙軒(졸헌)이라 자호하고, 목천(木川)에 거주하다 1873년(高宗10) 예조(禮曹), 성균관(成均館)에서 式年 進士급제하여 여덟 지방의 군수를 지내고 공조참의에 이르고, 거사비와 유고와 安東金씨一門四忠(=진천파)史蹟<1982, 金在晩(=청천파) 譯>에 글이 전한다.
○김사긍(金思兢)은 1874년(高宗11) 增廣 進士급제하였으며, 회인현감을 지내고 거사비가 전해온다. 묘는 갈치에 있다.
○榮厚(영후)는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로 묘는 삼척부남교곡백련동이며, ?遇泰(우태)는 대동보 간행에 참여하였고, 秉和(병화)는 호敦軒돈헌으로 통정대부 부승지를 지냈으며, 원묵(瑗默)은 호 又隱(우은)으로 무과급제 훈련원첨정을 지냈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장원하였으나 벼슬을 사직하고 후학에 전념했다. 성묵은 관찰부주사를 지냈다.
47) 김주연(金周演, 1876- ) ○瑗默(원묵)의 아들 김주연(金周演)은 자 문현(文顯), 호觀齋(관재)이며 在演으로 개명하고, 1876년 출생하여 목천(木川)에서 거주하다 명륜당(明倫堂), 비천당(丕闡堂)에서 1894년(高宗31) 式年 進士장원급제하였다.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김사용(金思容)이며, 생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訓鍊院)을 지냈다. 주연은 1943년 개성에서 문영공(김순)의 묘지석을 찾아내어 제학공파 낙호씨 등 10여명과 함께 현재의 안양으로 이안하는데 주역을 담당하였고, ?1937년 안동김씨 화수록을 발행하였으며, 동생 재영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을 백낙준과 함께 졸업하고 안동김씨 종약소를 설립하여 종사에도 헌신하였다.
○광기·연풍파 후손들이 천안시 병천면 도원리,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 괴산군 연풍면 등지에 세거하고 있는데, 병천 도원리에는 공언1남 김희 후손 일파와 공언3남 김훈 후손이 400여년 이상 세거하여 9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김희의 후손 泰鳳(태봉)1941-은 청원군교육장이며, 3남 김훈의 사손사계(사긍-재홍-인회-태윤-永植1933)는 도원리 광터골에 세거하고 있다. 泰熙(태희)1916-는 초대농협조합장을 지내고 종사에 헌신해 왔으며, 泰麟(태인)1928-은 해양대학 졸업하고 삼부해운 회장이며 현 안동김씨대종회장을 맡아 종사에 헌신하고 있으며, 泰完(태완)1937-은 충북대교수, 昌植(창식)1942-은 국방연구소 이학박사, 우식은 공학박사, 태형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교수로 있으며, 喆會(철회)1946-는 인하대교수를 역임하였다. 홍식은 인천 경진교통(주) 회장으로 인천 종친회장을 10여년간 역임하였으며 1996년 노은정 책자를 발행하였다. 재실은 산업은행 이사를 역임하고 산업캐피탈 사장으로 있으며, 태영은 청주지방노동사무소장을, 泰武(태무)는 한국통신진흥(주) 사장을, 유식은 디지털카메라 전문 IT제품 동호회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http://www.dcinside.com)를 운영하고 있으며, 泰慶(태경, 1897-1986)은 호 必隱(필은)으로 1963년 천안군지에 노은정기를 남기는등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聖會(성회)1947-는 호柯川(가천)으로 서예 명저이며 1990년 3월 노은정유래비를 짓고, 1996년 노은정 책자를 편집하고, 1997년 노은정 문화재 지정에 공헌하였고 태인은 제19대. 홍식은 대종회 회장을 관묵(2003년~2008년)과 태운(2008~2013)은 대종회 사무총장을 맡아 종사에 헌신해 오고 있다. 현재 재경 광기종중(회장 관묵)은 종친 50여명이 있으며, 정기적으로 서울과 향리의 종친간에 친목을 도모하면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공언2남 김도의 후손으로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 오리동에 세거해온 후손 萬輸(만수)1808-는 선략장군 훈련원판관, 允會(윤회)1885-는 예조참의 경주부사, 泰碩(태석)1916-은 삼척군 산림조합장과 삼척군 평통협의회장, 震植(은식)1935-은 광진건설사장, 佐亨(좌형)1834-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秉會(병회)1861-는 종사랑 궁내부주사, 泰純(태순)1887-은 종사랑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으며, 삼척군근덕면 교가리 무릉동에 세거해 온 후손 仲會(중회)1876는 중추원의관, 寬會(관회)1880-는 중추원의관, 在洪(재홍)은 직산현감을 역임하였다.
○공언4남 김후의 후손은 영동으로 이거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신회, 보사부 서기관, ?국립의료원장, 반월 의료보험조합 이사장을 지낸 찬회와 행정고시 합격하여 재정경제부에 근무하고 있는 찬회의 아들 태주1964- 등이 그 후손이다.
48) 김진(金瑨, 1537-1642) 자(字) 여헌(汝獻)으로 1583년 계미에 김몽서(金夢瑞)의 아들로 태어나, 1590년(경인) 진사시 에 급제하고 1623년(인조1) 개시(改試) 병과5(丙科5)로 급제하였으며 僉知事(첨지사)를 지냈다. 공은 현령 지의 증손인데, 만력 경인년(159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광해군 때에 명경과에 참여하였으나 은자를 바치지 않았으므로 과거에 이름이 제거되었으나 끝내 마음을 변치 않고 더욱 독실히 경학을 공부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은자를 바치지 아니하여 과거에 낙방한 자들을 사기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다시 강경하게 명하니 딴 선비들은 모두 분하게 여겨 경서를 공부하지 아니하여 낙방하였으나, 공은 홀로 통달하여 명경과에 합격하니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벼슬이 통정대부로 부사에 이르렀다. <오창지>
○김진(金 ) 공은 부사 진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현감에 이르렀다. <오창지>
49) 김봉채(金鳳彩) 공은 현감 진의 증손인데,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우암은 손수 "군자는 마음을 두기를 청천백일과 같이하여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다" 는 십삼 자를 써서 주었으니, 스승의 인정하고 기약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손자 동수는 재예가 뛰어나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문장이 깨끗하였으나 여러번 응시하여도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죽으니 원통하다고 말하였다. <오창지>
○김석한(金錫漢) 공은 진의 현손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통정대부로 우후에 이르렀다. <오창지>
50) 김응서 (金應瑞) 진사이며, 아들 瑄(선)은 묘가 괴산 청천 덕평에 있으며, 후손들이 영월 북면 덕상리, 괴산 청천 덕평, 지촌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51) 김하서(金河瑞, 1551-1610) 공은 안렴사의 9세손으로 현령 지의 손자이다. 자는 경희(景羲)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였고, 1576년(선조9)에 한성부(漢城府), 성균관(成均館)에서 식년(式年) 진사(進士)급제하였다. 이때 제학공파 김제갑(金悌甲)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는 시험관이었다. 공은 출생으로부터 총명준수하고 재질과 기품이 특이하였다. 모부인의 훈육으로 높은 스승에게 나가지 아니하고 모부인을 효양하는 한편 교학에 힘썼다. 42세시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勤王의 대의를 품고 2차에 걸쳐 격문을 지어 列邑 수령과 지방 士友간에 보내어 초모한 의병 500여인으로 충주 죽산간의 진을 친 관군과 협공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한 사방으로 土豪 士家에 통해 出穀케 하여 군량을 돕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의병에 종사하였는데 격문을 초한 것이 매우 간절하여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겠는가. 이에 오백명의 의사들을 모집한다. 우리 군주의 강토를 복구할 것을 마음에 기약하는데 다만 군비가 한결같지 못함을 한탄한다. 이에 한 치되는 혈담을 가지고 의로운 제군들에게 두루 올린다." 하였다. <오창지> 난이 끝난 후에는 인신으로서 국난을 좌시키 못하였을 뿐 공명에 뜻이 있지 않다 하여 그 전공을 일체 나타내지 아니 하였으며 몸과 입과 뜻을 삼간다는 뜻으로 身, 口, 意의 세가지를 緘封(함봉)한다 하여 三緘堂(삼함당)이라 자호하고 유연히 일생을 마쳤다.
○김대 (金玳, 1585-1637) 1585년 乙酉생으로 자는 여화(汝華)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였고, 1613년(광해5) 증광(增廣)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조선사마방목> 공은 진사 하서의 아들인데, 재주로 세상에 알려졌다. <오창지>
52) 김련(金璉, 1589-1637) 하서(金河瑞)의 아들로 1589년(사마방목에는 1587 丁亥) 태어났으며, 자(字)는 여기(汝器)이며, 1615년 성균관(成均館), 장악원(掌樂院)에서 진사시에 급제하고, 1621년(광해13) 알성시(謁聖試) 병과1(丙科1)로 급제하고 관직은 좌랑(佐郞을 지냈다. 공은 진사 대의 아우이다. 벼슬이 병조의 낭관에 이르렀다. 재주가 사륙문에 뛰어났고 도학계몽, 예서를 지었는데, 글이 지극히 웅장하고 고상하며 절실하여 세상에 행할 만하였다. 호를 梧洲라 하였다. 오근 사람으로 이삼준과 이기와 공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모두 해미현감이 되니 세상에서는 삼해미라고 칭하였다. <오창지> 53) 김재광(金在光, 1922-1993) 오창읍 장대리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서울특별시 의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신민당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무려 8선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13대 때는 국회부의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선생은 오창이 배출한 한국정치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정치 이외에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등 한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93년에 졸하였다. <오창지>
1922∼1993. 정치가.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서강(西剛). 충청북도 청원 출신. 아버지는 동묵(東默)이고 어머니는 유옥(柳玉)이다. 1960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1968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고, 1989년 미국 퍼시픽대학교(Pacific States University)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8월 초대서울시의회 의원, 같은해 10월 민주당(民主黨) 원내총무, 1960년 12월 제2대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었다가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 1963년 4월 군정연장반대시위로 서울교도소에 수감되고, 수감중 105인동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같은해 11월 민정당(民政黨) 서대문구갑구 후보로 위원장이 되었지만 그해 8월 한일조약비준반대를 위하여 소속정당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도 사퇴하였다. 1967년 2월 신민당 창당을 발기하였으며, 같은해 6월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이 되어 신민당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을 맡아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1976년 신민당 최고위원,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 12월 이른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4년 11월 정치활동금지가 해제되자 12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창당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1985년 1월 신한민주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하면서 2월 제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7년 11월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상임고문,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으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90년 연임하였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해 7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이 되었다. 한편 1968년 국가진단연구소(國家診斷硏究所) 이사장, 1972년 동아정경연구회(東亞政經硏究會) 회장, 아시아의원연맹(APU) 이사, 건국대학교 재단이사, 그리고 1989년 서울시의정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里程表(金在光, 東亞政經硏究會, 1991)>가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전 국회부의장/김재광씨 별세 (1993.01.04) 13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재광씨(70)가 3일 오후 4시 30분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서울시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6대 총선때 서울 서대문구에서 국회에 진출한 뒤, 정치 활동 규제에 묶인 11대를 제외하고는 이곳 한곳에서 연속 7 선을 기록했다. 초선인 6대때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하는 결단성을 보였고, 구 신민당에서 당3역,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80년대 중반에는 김대중씨의 동교동계로 분류됐으나, 87년 대선때 양 김씨의 후보 단일화 실패이후 김영삼씨와 손잡고 김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장을 맡기도 했다. 아호는 서강. 부인 오학순여사(68)와 4남3녀. 가족들은 유해를 서울대병원 영안실(764-6099,6299)에 안치 했다. 장지는 고인의 희망대로 충북 청원군 오창읍 양지리 선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초에는 고인의 희망대로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선산으로 정하였으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국립묘지로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조중연 고 김재광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1997.01.03일 오전 국립묘지 애국 지사 묘역에서 제5주기 기념식을 가졌다.
54) 김낙서(金洛瑞, 1553-1623) 공은 진사 하서의 아우인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특별히 재랑(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아들 진과 언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자손의 귀함으로 인하여 승지에 추증되었다. <오창지>
55) 김욱(金頊, 1583- ? ) 공은 충신인 민숙공 언의 형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다. <오창지> 김욱(金頊)은 김낙서(金洛瑞)의 아들로 1583년 계미(癸未)에 태어났다. 자는 여신(汝信)이고, 제 김언이며, 청주(淸州)에 거주하였다. 1603(선조36) 성균관(成均館), 태평관(太平館)에서 식년(式年) 진사(進士)급제하고, 이때 시험관은 ★김수(金) 중추부행지사(中樞府行知事) 등이었으며, 161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56) 김언(金王+言, 1588-1637) 김언은 김낙서(金洛瑞)의 아들로, 1589년 기축에 태어났으며, 자(字) 여윤(汝潤)이고, 형(兄) 김욱(金頊) 외조부(外祖父) 이희담(李希聃) 부(妻父) 이선립(李先立)이며, 1609년 기유 생원시 급제하고, 1615년(광해7) 식년시(式年試) 병과6(丙科6)에 급제하였다.
■ 민숙공(김언) 약력 ○1588(선조21)-1636(인조14). 조선 인조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은 汝潤(여윤).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고 아버지는 진사 洛瑞(낙서)이다. 청원군 오창읍 양지리에서 태어났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609년(광해군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8년뒤 겨우 봉상시주부에 머물렀다. ○인조반정후 부안현감, 예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사예, 예빈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金世達(1625-1674)은 자는 士章,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의 11세손이며 괴산군 청천면 무능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그의 재종숙인 성천부사 ★김언의 임소책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괴산군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때 허적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6)에 허적이 처형된뒤 아들 世輔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愍肅(민숙)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갈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짓고 학사 김공 鎭商이 썼으며 죽천 김공 鎭圭가 두전을 하였다. <오창지> ○현종2년(1661)에 정문이 세워졌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읍 복현리에 있으며 송시열이 지은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시지 <청원군지>
■ 愍肅公(민숙공 김언) 할아버님의 약력 ---1994년 2월 14일 (순절 357주기 기념)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좌승지공파 종친회
1. 서기 1588년, 선조21년 음력 6월 탄생, 거금 406년전임 2. 아버님 진사로 ★洛瑞(낙서), ★율곡 선생의 문하생, 평생 불출사, 詩畵(시화)로 벗하고 유유자적, 승정원 좌승지 추증됨, 어머님 전의이씨 병절교위 지내신 ★희담의 따님 3. 서기 1615년 (28세시) 문과급제, 상봉주부 벼슬 7-8년간 계심, 광해군 폐모론에 불참하여 미관직에서 오래 계심, 36세시 인조반정으로 기성랑으로 승차 4. 부안현감으로 계실적, 양친이 연이어 돌아가심, 시기하는 자 있어 무고함에 오래 한직에 계심 5. 41세시, 영천군수로 재직시, 무안현감시 궐례로 탄핵받아 파직됨 (집상중궐례로) 6. 부안 관민이 무고함과 선정치적을 진정하야 복관되시고 사도사정으로 승차하심 7. 성천부사가 되시고, 선정으로 인조임금께서 품위를 높이고 표창하심 8. 병자년, 서기 1636년에 청나라 사정이 급박함에 서북지방 관장을 모두 무신으로 교체하였으나, 영상 ★김류가 공의 선치적과 민심이 따름을 들어 유임시킴 9. 병자년 12월 9일, 청태종이 20만 대군으로 압록강을 도하침공, 불과 7일만에 (12월 15일)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함 10. 평양감사 ★홍명기의 명으로 자모산성으로 달려가 합류함 11. 평양감사 ★홍명기가 아무 연락 없이 딴 곳으로 가버림에 홀로 의병을 초모하여 적과 대치함 12. 상부와 연락이 두절되고, 고립무원으로 민심이 경동하여 관병의 이탈자가 속출함에 세궁력진 상태에 빠짐 13. 대세가 돌이키기에 불가능함에 관, 병, 민을 해산시킴 (가전에는 米, 布를 분배하였다 함) 14. 잔여 관, 민, 병이 같이 죽기를 간청하고 사위 ★金益勳과 시위병이 없고 달아나라 함에 크게 꾸짖고 죽기를 맹세하고 후일을 도모하라 이르시고 해산시킴 15. 소수의 시종 군사와 더불어 산성에서 돌로 적과 싸우시다가 적의 칼아래 쓰러지심 16. 적장이 항복하기를 권하나, 공께서 목숨이 끊어질때까지 크게 꾸짖고 불절하여 끝내 해를 입으심. 때는 인조15년 (정술년) 정월 초5일 (서기 1637년) 이며, 거금 352년전임 17. 당시 공의 가속이 각기 흐트러져 큰 환난을 당함, ★世輔 15세, ★世弼 7세, ★世翊 4세였음 18. 감사 ★홍명기가 비장과 의복을 보내어, 공의 시선과 의대를 수습시키고 그는 김화현에서 청과 싸우다가 전사함 19. 그후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됨에 경기도 광주군 기자산에 안장하시고, 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墓碣문을 쓰심 (가전에 의하면 의대와 유품만을 가지고 쓴 허묘였다 함) 20. 초취부인 경주최씨 아들 ★世弘 벼슬 통덕랑 일찍 별세 (21세) 무후, 딸 한분 ★柳道三에게 출가, 최씨부인 묘는 오창읍 양지리 뒷산, 시아버님 승지공 묘소옆에 있음 21. 재취부인 전주이씨로 세종대왕 6세손 李先立의 딸임, 남은 ★世輔, ★世弼, ★世翊과 1년 (광남군 ★金益勳에게 시집감) 두시고, 서기 1675년 정월 초6일 돌아가심, 향년 76세, 38년간 홀로 의도를 엄중히 하고 가도를 확립함에 가문을 지키고, 어린 세 자녀를 훌륭히 키워 출세시켰음, 묘소는 할아버님과 합장함, 현재 우리 모은 후손은 전주이씨 할머님의 후손임 22. 성천부 관기 ★今玉이 오래도록 할아버님을 모시다가 자모산성에서 끝까지 남아 돌을 나르다가 도우며 싸웠음. 후에 성천부민이 감격하여 貞節廟閣(정절묘각)을 세우고, 후에 다시 숙종 임금님께서 旌門(정문)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현재 성천에 현존한다 함 23.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되었으나, 조정에 무고하는 무리있어 할아버님의 거룩한 죽음이 표상되지 못하여 영상을 지낸 ★홍중보가 항상 한탄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하고 필경 둘째 아드님 ★世輔 할아버님이 장성하여, 그 실정과 억울함을 끈질기게 탄원하고 그치지 않으셨음 24. 예조판서 ★김남중, ★이일상이 주청하여 현종임금께서 이조판서 추증하시고, 본가에 旌閭問(정려문) 세워 표창함 (때는 현종5년, 서기 1664년으로 순절후 27년만이었음) 25. 현종때 영의정 ★허적이 사사감정으로 비방 무고하여, 정려문을 헐고 묘갈을 땅에 묻었음 (장차 청나라의 노여움을 사서 나라에 재앙이 닥친다고 함) 26. 서기 1680년 허적이 역적으로 주멸됨에 자손들이 다시 탄원, 예조에서 재논의 영의정 ★김수항께서 주청하여 판부사 ★민승중에게 사실규명을 명함. ★민승규 성천부 현지에 가서 직접 성천부 관민을 상대로 현지조사함 27. 할아버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관, 민, 병들과 장렬하게 순절하심을 목도한 백성들이 한결같이 그 행적을 똑똑히 증언하고 입증함 (가전에 의하면, 이미 전에 할아버님과 기생 ★금옥의 사당을 주민 스스로 지어놓고 추모하고 있었다 함) 28. 숙종 임금님께서 ★민승중의 복명과 성천부민, 유생의 탄원으로 본가에 정려문을 다시 복권시키고, 성천부에 사당과 순절비를 세우게 하시고, 묘비와 묘갈을 다시 세우게 하심 (묘소 : 광주군 기자산 가좌동 자좌 있었다 함) 29. 현종 임금님때에 이조판서로 추증, 다시 좌찬성으로 높이고 정종(=정조)때 민숙공이라 시호내림. 두부인 모두 정부인 교지 받음
■ 조선왕조실록 숙종 009 06/06/30(정해) /고 성천부사 김언의 철거된 정려를 세워줄 것에 관한 전 교관 김세보 등 삼형제의 상소 ---전 교관(敎官) 김세보(金世輔) 등 형제 세 사람이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인 고(故) 성천부사(成川府使) 김언(金)은 일찍이 병자년의 난리에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하려고 하다가 적병에게 핍박을 받자 적을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의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의 옷을 벗어 군관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시체를 거두게 하고 조정에서 포장(褒奬)·정표(旌表)의 명이 전후에 계속해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갑진년에 역적 허적(許積)이 사감(私憾)을 풀려고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끝내 정문(旌門)을 철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소가 예조에 내리자, 예조에서는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김수항의 의견은 “그 당시의 감사 홍명구가 수의(衣)에 싸서 비장(裨將)을 보낸 사실은 그의 아들인 고(故) 상신(相臣) 홍중보(洪重普)가 조정 중신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이야기 했으니, 이것은 공안(公案)이 될 수 있으니, 간사하게 속이는 말인지는 분변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명백합니다. 다시 정려를 세워 주도록 청합니다.” 하고, ---우의정 민중정(閔重鼎)의 의견은, “정표하는 은전은 처음에 그의 아들의 상언으로 허락했었는데, 뒤에 한 사람이 추후에 헐뜯는 이유로써 철거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아들이 말하는 데 따라서 환원시킨다면 아마도 신중히 하는 도리가 아닐 듯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란이 일어난 지가 오래지 않으니, 성천(成川) 사람 가운데 반드시 눈으로 직접 보고서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또한 따라간 고을 기생 ★금옥(今玉)이란 자가 절벽에 떨어져서 죽었다.’고 했으니, 이와 같은 일들도 또한 파묻어 없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방문(訪問)하여 그 실제 사정을 알아내어 위에 알린 뒤에 해당 부(府)에 다시 명하여 포장(褒章)을 의논하게 함이 일의 체모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의정의 의논대로 시행하게 하고, ★금옥이 추락해 죽었다는 사실 여부는 본도로 하여금 물어보게 한 뒤에 다시 품지(旨)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 김세영(金世榮) 1651년(효종2) 신묘에 등과하여 관이 만호에 이르렀다. <청주시지, 1976>
○ 김세보(金世輔, 1623- ) 공은 충신인 민숙공 언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으며,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오창지> 김세보(金世輔)는 1623년 계해(癸亥)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경(重卿)이고, 경(京)에 거주하였으며, 1662년(현종3) 한성부(漢城府), 동학(東學)에서 증광(增廣) 진사(進士)급제하였고, 이때 시험관은 남용익(南龍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이었다. 부친은 김언(金)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천(成川)/행도호부사(行都護府使)이었으며, 형 김세홍(金世弘) 제 김세필(金世弼), 김세익(金世翊)이 있다.
○ 김세필(金世弼, 1631- ) 공은 현감 세보의 아우인데,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다. <오창지> 김세필(金世弼)은 1631년 신미(辛未)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해(仲諧)이고, 경(京)에 거주하였으며, 한성부(漢城府), 동학(東學)에서 1663년(현종4) 식년(式年) 진사(進士)급제하였으며, 이때 시험관은 허적(許積) 형조판서(刑曹判書), 박장원(朴長遠) 이조참판(吏曹參判), 남구만(南九萬)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이었다.
57) 김세익(金世翊, 1634(인조12)∼1698(숙종24)) 김세익(金世翊)은 김언의 아들로 1634년 갑술에 태어났다. 자(字) 량경(亮卿)이고 외조부(外祖父) 이선립(李先立) 처부(妻父) 이후응(李後膺)이며, 경(京)에 거주하였고, 1654년(효종5) 서학(西學), 동학(東學) 식년(式年) 진사(進士) 급제하였으며, 전주판관(全州判官)을 역임하다 1686년(숙종12) 정시(庭試) 병과2(丙科2)로 급제하였으며, 관직 경상감사를 지냈다.
■ 김세익 약력 1634(인조12)-1698(숙종24).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亮卿(양경). 아버지는 성천부사 王+言(언), 어머니는 李先立의 딸. 아버지가 병자호란때 적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자 중림찰방에 기용되어 관계에 나갔으나 1681년(숙종7) 헌납 朴泰孫으로부터 탐학하다는 탄핵을 받아 仕版(사판)을 삭거당하였다. 그뒤 다시 서용되었으며 1686년 전주판관으로 재임시 53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사간원에 들어갔다. 1694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시에 시관으로 영남지방을 다녀와서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宮房의 침탈상을 보고하고 그 구제책을 촉구한 바 있으며, 이듬해에도 군병의 기강확립과 궁방의 검약한 생활 등을 건의한 바 있다. 김세익은 수군절도사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로 강화도에 있으면서 충렬사 제문을 지었다.<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이후 여러차례 승지에 발탁되었으며, 1698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도내를 순시하던 중 청송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 국조방목 淸選考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왕조실록 기록 요약 ○숙종11/01/05(을축) 특지(特旨)로 김세익(金世翊)에게 좌윤(左尹)을 제수(除授)하였다. 이어서 김세익(金世翊)의 사람됨과 그의 활쏘는 기예(技藝)를 칭찬하였다. 그러기에 이 명이 있었다. ○숙종20/05/15(임자) 김세익(金世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숙종20/09/27(임진) / 부사직 김세익이 영남의 사정을 상소하다. 부사직(副司直) 김세익(金世翊)이 명을 받고 영남(嶺南)에 내려가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돌아와서 상소하여 본도(本道)의 사정을 논의하기를, ○숙종20/09/29(갑오) 김세익(金世翊)을 장령으로 ○숙종21/05/16(정축) 김세익(金世翊)을 헌납으로, ○숙종21/05/19(경진) 헌납 김세익이 성천의 은점 폐지와 초료의 폐단 등 관서지방의 민폐에 대하여 상소하다. 헌납(獻納) 김세익(金世翊)이 관서(關西)에 가서 선비를 시험보이고 조정에 돌아와 민폐(民弊)를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성천(成川)의 은점(銀店)을 폐지시킬 것과, 황주(黃州)·봉산--- ○숙종21/08/02(신묘) 헌납 김세익이 국름을 허비하는 폐단 등에 대해 상소하다 ○숙종21/08/14(계묘) 김세익(金世翊)을 집의(執義)로 ○숙종21/10/16(을사) 김세익(金世翊)을 총융사(摠戎使)로 ○숙종21/11/06(갑자) 김세익(金世翊)을 사간(司諫)으로 ○숙종22/01/18(을해)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2/02/21(정미)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2/04/30(을묘)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2/05/20(을해) 좌변 대장 김세익 ○숙종22/08/09(임진) 승지 김세익(金世翊) ○숙종23/01/19(신미) 승지(承旨) 김세익(金世翊)이 말하기를, “강도(江都)의 모든 산들이 거의 민둥산이 되었으므로, 혹시라도 급박한 일이 있게 되면--- ○숙종23/03/25(병자)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3/03#03(계미) 우승지(右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3/07/22(경자)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3/09/28(을사) 김세익(金世翊)을 충청도 관찰사로 ○숙종23/10/01(무신) 배천의 문회 서원에 편액을 내리고 치제하게 하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친히 문회 서원(文會書院) 네 자(字)를 써서 승지(承旨) 김세익(金世翊)을 보내어 편액(扁額)을 내리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숙종23/10/13(경신) 충청도 감사 김세익(金世翊) ○숙종23/10/13(경신)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4/02/03(무신) 승지 김세익이 역로의 폐단을 아뢰고 사사로운 역마 이용 엄금을 청하다. ---모든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결재를 받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승지 김세익(金世翊)이 배천(白川)에 봉사(奉使)하였다가 막 돌아왔는데, ○숙종24/07/15(정해) 김세익(金世翊)을 경상도 관찰사로 ○숙종24/10/29(경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세익(金世翊)이 졸(卒)하여 이세재(李世載)로 대신하였다.
■ 김세익(金世翊) 인장 (오세창의 근역인수) ---인장1 : 金世翊印 ---인장2 : 安東世家
■ 김세익 글 忠烈祠 祭文 (좌승지 金世翊, 1634-1698) 깊숙이 병자 정축년에 있어서랴. 어찌된 운수인지 재앙을 만나다니. 임금의 수레는 떠나려 하는데, 장관의 말은 급함을 알려오니 조정은 물끓듯이 어지러워라. 먼저 섬으로 피신을 해야지, 임금이 계신 곳은 소식이 끊겨지고 소리쳐 도와주는 이 없네. 긴 강물로 띠를 둘러 있는데 이른바 험한 요새지라 믿고만 있었는데. 사람의 꾀로서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데 북녘 오랑캐는 나는 듯이 건너 오네. 천작의 요충이라지만 창졸간에 빼앗겼으니 인축이 문드러져 산성에 그득하고 일반 백성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갈팡질팡 하는데 짐승도 놀라 뛰고 새는 숨기가 바쁘니 팔진미도 먹다가 버려야 하니 누가 일찍이 이를 분별하였으랴. 슬프다 그대 여러분 신하들이여 풍상은 급한데 굴하지 않는 분이 있으니 오직 이때의 元老인지라. 중요한 직분이 있는 것도 아니로데 용렬하게 결단을 내려 이곳에 부임하였으니 배운 것은 저버리지 않아 혹은 재상으로 봉직하면서 혹은 임금을 뫼시는 일에 앞장서는데 평복차림이 있었으니 음으로 보직되어 이바지 하였는데 서로가 이어서 이 나라에 신명을 바치었노라. 義는 중하고 생명은 가벼운 것이지, 하물며 여러 軍官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에 종과 편술관 패관 등이 있었으니 총책임자를 꾸짖으며 강물에 뛰어들었으며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중에 뛰어 들어가니 장수들은 패주하련만 우리는 열명 가운데 한 분이 살았겠지. 간은 이날 순국하였으니 신위야말로 비록 가지런하지 않아도 충신으로서는 서로가 짝지어 있노라. 예부터 난리에 있어서야 어찌 충의심이나 절개가 없을손가. 한편으로 드디어 모시었으니 더욱 높여야만 하네. (이하 생략) (註) 김세익은 수군절도사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로 本島에 있었다. <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충렬사 (忠烈祠) (시도유형문화재 21호) 소재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 선원 김상용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천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어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다시 받았다. 197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있다.
○김두수(金斗壽)는 김세주(金世柱)의 아들 김두남(金斗南)의 형제로 1669년 기유(己酉)에 태어났으며 자는 대수(大)이고 경(京)에 거주하였다. 1693년(숙종19) 성균관 반수당(成均館泮水堂), 동학(東學)에서 식년(式年) 생원(生員) 급제하였으며, 이때 시험관은 이서우(李瑞雨)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이었다.
<김세익 선조님 소개> (2005. 5. 30. 태서(익) 제공)
성 명】 김세익(金世翊) 【생몰년】 1634(인조 12)∼1698(숙종 24)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양경(亮卿)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634(인조 12)∼1698(숙종 2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양경(亮卿)으로 성천 부사 김언(金線)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가 병자호란 때 적병과 싸운 공으로 중림 찰방(重林察訪)에 기용되었다. 1681년 헌납 박태손(朴泰遜)의 탄핵을 받아 한때 삭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숙종 11년(1686) 전주 판관을 지내고, 같은해 왕의 특지(特旨)에 의해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 또 그해 53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 · 승지 등을 지냈다. 지평으로 재직할 때 시관(試官)으로 영남을 다녀온 후 궁방(宮房)의 폐해를 지적하였으며, 1695년에도 군대의 기강 확립과 관소의 비용절약을 건의하였다. 1698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임지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 경상도 선생안 (상주문화원)
◇김세익(金世翊) o직 명:통정대부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대구도호부사(通政大夫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邱都護府使) o재임기간:1698년(숙종 24년) 무인(戊寅) 9월 16일~1698년(숙종 24년) 무인(戊寅) 10월 23일 졸서(卒逝)
■ 조선왕조실록 숙종 009 06/06/30(정해)
/고 성천부사 김언의 철거된 정려를 세워줄 것에 관한 전 교관 김세보 등 삼형제의 상소
---전 교관(敎官) 김세보(金世輔) 등 형제 세 사람이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인 고(故) 성천부사(成川府使) 김언(金)은 일찍이 병자년의 난리에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하려고 하다가 적병에게 핍박을 받자 적을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의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의 옷을 벗어 군관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시체를 거두게 하고 조정에서 포장(褒奬)·정표(旌表)의 명이 전후에 계속해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갑진년에 역적 허적(許積)이 사감(私憾)을 풀려고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끝내 정문(旌門)을 철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소가 예조에 내리자, 예조에서는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
■ 김세익(金世翊) 인장 ---인장1 : 金世翊印 ---인장2 : 安東世家
<김세익 인장. 근역인수 게재>
◇충렬사 (忠烈祠) (시도유형문화재 21호)
소재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
선원 김상용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천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어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다시 받았다. 197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있다.
■ 허재집 (원광대학 역)
虛齋와 그 文學 (원광대 교수 柳在泳)
허재집은 허재 柳惠源(1632-1695)의 시문집이다. 허재 세상을 떠난 100년쯤 뒤에 5세손 世夏( )가 필사하고 <世箕 使3종제 世夏詩 一○實記> 6세손 東琪가 趙宇熙의 序(1881)를 받아 간행하려다 못하였다.
그 뒤 9세손 桓圭가 尹夏重의 序(1918)를 받고 8세손 熙雨의 跋(1918)을 붙여 목활자본 3권1책으로 간행하였는데 허재 세상 떠난 200여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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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完山伯金亮卿世翊次柳處士韻贈別 /완산백김양경세익차류처사운증별 완산백 김양경 세익(1634-1698)이 유처사(▶유혜원, 1632-1695)의 증별시에 차운하여
淸談今獲久離餘 /청담금획구이여 /(집) 떠난 지 오랜데 이제 淸談했으니 忘却從來困簿書 /망각종래곤부서 /그 전 따분한 문서 잊어 버렸네 彭澤休官幽興在 /팽택휴관유흥재 /彭澤의 벼슬 그만 둔 그윽한 흥취 있으니 九秋佳節返吾盧 /구추가절반오로 /九秋 佳節에는 내 집에 돌아 가려네
*完山伯 : 전주부윤을 이리 지칭 *金亮卿 世翊 : 1687년(숙종13) 전주부윤으로 있었다. 이 詩는 1688년에 쓴 것으로 본다. *淸談 : 맑고 고상한 이야기 *彭澤 : 중국 강서성에 있는 고을 이름. 晉의 도연명이 이 고을 원이 되었다가 五斗米로 허리 굽히기 싫다고 그만 두었음 *九秋 : 가을 90일 동안을 이름. 三秋
● 謝宛山府伯金亮卿世翊助貝+盡石溪崔先生祠宇啓 /사완산부백김양경세익조○석계최선생사우계 鳳谷金東準沙溪石溪門人配此祠宇在全州府 /봉곡김동준사계석계문인배차사우재전주부 완산부윤 김양경 세익이 석계 최선생 사우에 부조한 걸 사례한 글 봉곡 김동준은 사계 석계 문인으로 이 사우에 배향되었는데 전주부에 있다. ---내용 9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석계 최선생 : *봉곡 김동준 :
● 謝宛山府伯金亮卿粧匣具籤於歷代史要啓 /사완산부백김양경장갑구첨어역대사요계 전주부윤 김양경이 역대사요에 장갑 구첨해 준 걸 사례하는 글 ---내용 5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歷代史要(역대사요) : 중국의 전국시대로부터 5대 말까지의 역사를 간추려 10권으로 엮은 책. 권청하 편찬 *權靑霞(권청하) : *粧匣(장갑) : 책을 좋게 보존하기 위해 갑을 만들어 끼워 둠 *具籤(구첨) : 籤紙(첨지)를 붙여 둠. 찾기 쉽게 종이 쪽지를 붙여 둠
허재집 권지3
부록 ● 安東金世翊贈虛齋序 /안동김세익증허재서
안동 김세익이 해재(▶유혜원)께 준 서문
내(▶김세익)가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문서와 편지2) 로 바빠3) 한 가지 아름다운 정서도 없고 술잔 들고 시를 읊는 그러한 겨를 또한 거의 없었다. 정묘년(▶1687년 숙종13) 여름 공무가 조금 한가하여 두건을 벗어 놓고5) 의의정에서 아이들과 새로 자란 대 수백 그루를 완상했다.
그때 고부6) 김중심(金仲深)7) (金聖淵의 자는 仲深. 文科하여 결성현감 이조좌랑을 했는데 허재▶유혜원 門下에서 受業했다) 이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나의 스승 흥덕8) 유처사(▶유혜원)는 이름이 혜원(惠源)이고 자는 원중(源中)이며 세속을 벗어난 한 시인인데 그 심사를 논한다면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고 탐하는 것은 오직 술9)일 뿐인데 마침 일이 있어 이 부(全州)에 이르렀다" 고 했다.
나는 처음 문인(文人) 운사(韻士)로 알고 소동을 보내어 맞아 왔는데, 상대하니 용의가 소박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였으며 혼연히 지란의 방에 들어 앉은 듯 향기로왔다. 함께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며 백가서를 다 논해 보았는데 계합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가 지었다고 하는 시문을 외는데 거의 조금도 이속한 말이 없어 그 내력을 알아보니 ★권청하의 문인이었다.
그가 뜻이 있는 것을 알만한데 먼지를 털 즈음에 그 손가락이 끊어진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척연(戚然)하여 중심(▶김성연)에게 물어보니, 연전에 그 어버이 병에 단지 진혈하여 바로 회소되었고 지금까지도 근심없이 살아 계시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듣고 섬찍하나 공경심이 나 중심에게 말하기를,
58) 김세달(金世達, 1625-1674) 자는 士章,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의 11세손이며 괴산군 청천면 무능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그의 재종숙인 성천부사 ★김언의 임소책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637년 호병이 평안도의 요충인 성천고을을 침공하자 부사 김언이 관병을 단속하여 경골, 창암산성을 수호하는 한편, 의병을 널리모아 적의 대병과 혈전을 거듭하다가 전세가 급박하여 전황과 적세를 자세히 기록한 장계를 조정에 올리고져 할 때, 적의 포위망을 탈출할 가능성이 있는 소년인 공에게 전계할 것을 명하는 한편 어린 재종질로 하여금 무사 귀향토록 조처했다. 공은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장계서찰을 작은 칼로 썰어서 순서대로 심지를 꼬아 행장 질끈을 만들어 지고 죽기를 한하고 주야 배도하여 서울로 치달아 올라갔다. 경사에 이른 공은 행장끈을 풀어 연폭하니 내용이 소상하여 이를 조정에 올리니 왕이 들으시고 기특히 여겨 인견하고 성장후에 관직에 녹용토록 윤음을 내렸다. 병자호란 이후 사색당쟁으로 나라가 혼란하여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 은거하며 후학지도에 힘쓰며 여생을 마쳤다. 사후에 예조판서 운봉 ★강백년이 연주하여 공조참판에 증직되고 묘는 청천면 고성리에 있다. 문헌 : 현종실록 <괴산군지 (1990.8)>
♠강백년(姜栢年) 1603(선조 36)∼1681(숙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아버지는 주(#주43)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응서(應瑞)의 딸이다.
■ 참판공(세달) 묘갈중수 -일시 : 2003.3.11 -장소 : 충북 증평군 청천면 고성리 산68-21(외고현) 참판공 묘정 -내용 : 사초, 묘갈입석 및 고유제 봉행 ◇증가선대부공조참판안동김공묘갈명병서 -2003년 계미 3월 일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 종회장 9대손 在華 근찬 -참판공 隸下(휘斗山 휘以鉉) 3연합 종회 裔孫일동 건수 ◇묘갈 중수 추진위원 명단 -在華 : 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 종회장 -成會 : 참판공 종회 고문 -元會 : 참판공 종회 고문 -雄會 : 참판공 종회장 -泰晧 : 참판공 11대 宗嗣孫 -翊會 : 3연합종회 도유사 -粲會 : 참판공 종회 부회장 -英會 : 재청안동김씨 참봉공파 화수회장 -旨會 : 재청안동김씨 참봉공파 화수회 고문 및 전 회장 ◇序言 우리 안동김씨가 무량(무릉도원)에 입향한 것은 1580년대(이조 선조13년)로서 약 420년전이 됨으로 임진왜란의 12년전이며 그 56년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전란과 정치적 혼미가 겹쳐 현실도피와 은둔을 위주하든 세태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산명수려한 주위환경은 시인묵객의 상찬을 자아내게 하였다. 농경사회로서의 경제적 기반은 위약하다 할 것이나 명문가성을 지키며 전통예속을 엄수해 오는 성손이었다. 루전해오는 선조님 중에도 그 행적이 기이하여 국가의 은전을 입은 분이 증공조참판공(휘 세달)이시니 어려운 형편에서도 1705년과 1951년에 공의 묘표를 건수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심히 왜소하고 오류가 로정되어 불가불 개수치 않을 수 없는 실정임으로 작추 종회의 결의로 이를 시행케 되었다. 과거 2차에 ○한 묘표중 오기된 것은 그 고증을 찾아 신중히 교정하였고 또는 보서에 준거하여 확인을 거쳐 시정하였음을 병기해 둔다. 새로히 마련한 묘갈은 공의 행적을 좀더 구체화하고 심사숙고를 거쳐 史實에 부합되도록 논리를 정제하였다. 따라서 공의 공로와 시대적 배경 등을 참조하여 하나의 교과서적 의미를 부여하여 후손들의 삶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하였음으로 1908자의 음기를 찬술한 대비가 마련된 것이다. 옛말에 인걸은 지령이라 하였으니 우리 종원들은 이 고장 조상의 음덕을 입어 전국 각지에서 꽃피워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思鄕의 정을 돈독히 하고 祖先 경모사상을 애중할 것을 切望하면서 좋은 계절을 택하여 이 묘원에 성묘하고 겸하여 자연을 즐겨보는 보람을 권장하는 바이다. ※고향 종중에 자기 소재가 밝혀지도록 노력 바람 海人+農(在華) 記
<공조참판 안동 김공(휘 世達) 묘갈명> (2006. 12. 29. 영윤(문) 제공) 출전 : 천안시 홈페이지 작성자 : 김찬회(찬자인 김재화님의 아드님), 작성일 : 2003. 4. 9. 아래의 碑文은 지난 3월 하순에 고향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현에 소재한 筆者에게 10대조 되시는 參判公의 山所를 莎草 하고 碑石을 改竪하면서 鐫刻한 것입니다. 내용과 관계없는 분들은 심심파적으로 읽어 보시면 비문의 작법과 실증적 사료에 의한 기술등 으로 文,史의 工夫에 一毫라도 도움이 될것이며 天安일원에 世居하는 수많은 安東金氏들은 宗中 傍祖의 史蹟記을 읽고 차제에 尊祖睦族 의 念을 갖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 글은 筆者의 家親이 撰하였으며 금년 춘추 九十이십니다.
贈嘉善大夫工曹參判安東金公墓碣銘幷序 公의 諱는 世達이요 字는 士章이며 貫은 安東大姓이니 新羅 敬順大王 에서 系出하였다. 高麗朝의 賢相名將으로 그 勳業이 靑史에 燦然한 上洛郡開國公 門下侍中(僉議中贊) 上將軍(都元帥) 諡 忠烈 諱 方慶은 十四代 中始祖이 고 麗末의 精忠大節로 杜門洞守義七十二賢에 드신 按廉使 梧隱公 諱 士廉은 十代派祖이니 名公鉅卿이 繼世輩出한 名門으로 世稱한다. 屢傳하여 贈 通政大夫 工曹參議 諱 繼貞은 武陵.桃源에 卜居入鄕하니 公의 曾祖이고 王考는 獻陵參奉 諱 麟瑞이며 考 諱 玭 은 行誼와 學問을 推重하여 通德郞에 追敍되시고 비(女+比)는 恭人 南原 梁氏로 居士 應湖의 女이니 聰慧貞純하고 孝事舅姑하여 鄕隣 이 敬服하였다. 公이 仁祖三年(一六二五)乙丑 九月 二十九日 鄕第에서 二男四女중 第二子로 生誕하시니 天資端雅하고 才藝가 英邁하여 早歲就學으로 工課가 日就月將하였기로 稱歎이 名振鄕閭하였다. 於時에 公의 再從叔인 成川都護府使 金언(玉+言)公이 그 才能을 寵愛하여 任所에 데려가 冊房에 두고 學業을 敎督하는 一方 小事를 寸補케 하니 公이 一心奮發하여 任務를 完遂하는지라 人皆賞讚하니라. 奈 何乎, 仁祖十四年(一六三六) 十二月 國運 비(不+口)塞으로 丙子胡亂이 勃發하여 疆土가 遑遑하고 마침내 胡敵의 大軍이 侵攻해 오므 로 民心이 渙散하여 收拾이 不可能한 地境에 이르렀다. 府使公이 急히官兵을 團束하여 順川으로 달려가 慈母山城을 前進防禦하던 觀察 使 洪命耉公에게 附屬해 주고 자신은 遑急히 돌아와 州內의 義兵을 招募하여 檜巖山城에 依據 成川의 防衛와 敵의 進路를 遮斷하는데 萬 全코자 하였으나 倉卒間에 大亂에 直面하니 民心이 凶雜히 潰亂되어 衆寡不敵의 窮地에 빠지게 되었다. 府使公이 胡敵의 戰勢 와 進路戰況과 防禦策을 記錄한 狀啓를 朝廷에 올리고자 할새 敵의 包圍網을 脫出할 可能性이 있는 幼少年인 再從姪(世達公)에게 下命하 고 내쳐 無事歸鄕토록 措處하였다. 公은 急히 行裝을 꾸려 山中으로 逃亡하여 小刀로 狀啓書札을 썰어서 麻繩과 비벼꼬아 짐끈을 만들 어 지고 至死爲限하고 京師로 晝夜倍道 치달아 올라갔다. 峻險한 山谷을 넘고 湍深한 江河를 건너 마침내 漢陽城에 當到하여 詣闕코 자 할새 守門將의 制止를 받자 重大使命임을 說得呼訴하고 期於이 朝廷에 들어가 行裝끈을 풀어 連輻하니 內容이 昭詳한지라, 여러 宰臣 이 奇特히 여겨 主上께 上奏함으로서 上께서 親히 引見하시어 그 行路難을 慰撫하고 `忠臣之家에 又有忠臣이라 賞讚하시며 `此兒가 長成 하는 대로 錄用토록 하라 윤음을 내리시었으니 公의 時年이 十三歲였다. 다시 戰況을 돌이켜 보건대 再從父 成川府使公은 及其 也 敵에 包圍되어 力戰血鬪하다가 大聲罵敵끝에 殉節하시니 城中 府民이 悲痛하여 마지않았다. 또한 平安觀察使 洪命耉公은 成川失陷의 悲報를 듣고 裨將으로 하여금 府使公의 遺骸를 거두어 返葬케 하고 二千兵力을 引率하여 金化 로 南下하였는데 그곳 역시 郡長이 淪溺하였고 城中이 空洞인지라 여기 萬景山城을 決戰場으로 殉職하니 遺恨千秋로다. 敵軍은 漢陽城 을 攻略하고 王駕避亂處인 南漢山城을 包圍하니 及其也 翌年(一六三七) 丁丑 正月 廣州 三田渡에서 仁祖大王이 淸太宗에게 恥辱的인 降伏 으로 丙子胡亂은 終末이 났다. 參判公은 일찌기 堪耐키 어려운 苦楚를 겪고 歸鄕했으나 그 生涯는 時代的으로 不運의 連續이었으니 戰亂 後의 民生苦와 끊임없는 黨爭으로 寧日이 없고 더욱이 同宗의 不祥事인 洛西公의 政治的 失脚으로 波及되는 壓力등 雄起할 意志와 勇力 을 銷沈한채 靑衿時節을 度日하게 되었다. 먼저 修己之學에 專心하는 한편 鄕黨諸生 啓導에 全力함을 畢生의 祖業으로 삼고 先訓에 따라 家業을 守成하면서 生涯를 忠善一貫하니 一鄕의 師表로 推仰되었다. 噫라, 公이 顯宗十五年(一六七四)甲寅 十一月 二十二日 享年五十으로 下世하시니 이곳 古縣 鷹峰山脈이 東走해 오고 博大川이 上峰山기슭을 휘어드는 向南 子坐之原에 體魄之藏을 모시었다. 肅宗四年(一六七八) 戊午에 先王의 윤음을 奉行하여 禮曹判書 雪峰 姜栢年公의 筵奏로 工曹參判에 贈職되시니 비로소 少年時節의 爲國忠節이 顯揚되고 宗門의 榮譽를 世傳케 되었다. 配 贈 貞夫人 文化柳氏는 士人 以健의 女로 閨範이 淑婉하며 貞和勤儉하였고 仁祖七年(一六二九) 己巳에 出生하여 肅宗三十年(一七ㅇ四) 甲申十 二月 二十九日 卒하시니 墓는 合폄되었다. 後嗣로는 斗山 斗柄 斗井의 三男二女를 生하고 孫은 長房에서 潤坤 致燁 致爀 致煜이며 伯 氏 諱 世敏이 斗栢 斗松의 二男一女를 生하였으니 自是로 孫勢가 蕃衍 昌盛하고 繼承하여 많은 英明俊才가 輩出하였다. 今玆 公 歿 後 三百三十年에 舊墓表가 矮小하고 誤謬가 露呈되어 改竪키로 宗議가 이루어져 後胤 不文으로 이를 補遺하며 삼가 銘을 바치노니, 關西千里 險難한길 晝夜不息 跋涉끝에 허위단심 狀啓奉行 闕門앞에 伏地하니, 主上께서 引見하사 行路難을 愛憫하고 忠臣之門 又有忠臣 優渥하신 傳敎셨네. 成川順川 金化고을 抗戰하신 殉節之士 한결같이 文臣이라 痛恨之事 그아닌가. 文武兼全 忠烈上祖 懿行따라 竭力하면 爲國爲先 雙全이요 富國强兵 成就하리.
檀記 四三三六年(二ㅇㅇ三) 癸未 三月 日 安東金氏大宗會 顧問 前 按廉使公派宗會長 九代孫 在 華 謹撰 參判公.隸下(諱 斗山 諱 以鉉) 三聯合 宗會 裔 孫 一 同 重竪
<김세달(金世達, 1625-1674)선조님 소개> (2006. 12. 29. 주회(안) 제공)
자는 士章,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의 11세손이며 괴산군 청천면 무능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그의 재종숙인 성천부사 ★김언의 임소책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637년 호병이 평안도의 요충인 성천고을을 침공하자 부사 김언이 관병을 단속하여 경골, 창암산성을 수호하는 한편, 의병을 널리모아 적의 대병과 혈전을 거듭하다가 전세가 급박하여 전황과 적세를 자세히 기록한 장계를 조정에 올리고져 할 때, 적의 포위망을 탈출할 가능성이 있는 소년인 공에게 전계할 것을 명하는 한편 어린 재종질로 하여금 무사 귀향토록 조처했다.
공은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장계서찰을 작은 칼로 썰어서 순서대로 심지를 꼬아 행장 질끈을 만들어 지고 죽기를 한하고 주야 배도하여 서울로 치달아 올라갔다. 경사에 이른 공은 행장끈을 풀어 연폭하니 내용이 소상하여 이를 조정에 올리니 왕이 들으시고 기특히 여겨 인견하고 성장후에 관직에 녹용토록 윤음을 내렸다.
병자호란 이후 사색당쟁으로 나라가 혼란하여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 은거하며 후학지도에 힘쓰며 여생을 마쳤다. 사후에 예조판서 운봉 ★강백년이 연주하여 공조참판에 증직되고 묘는 청천면 고성리에 있다. 문헌 : 현종실록 <괴산군지 (1990.8)>
♠강백년(姜栢年)
1603(선조 36)∼1681(숙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아버지는 주(#주43)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응서(應瑞)의 딸이다.
■ 참판공(세달) 묘갈중수
-일시 : 2003.3.11 -장소 : 충북 증평군 청천면 고성리 산68-21(외고현) 참판공 묘정 -내용 : 사초, 묘갈입석 및 고유제 봉행
◇증가선대부공조참판안동김공묘갈명병서 -2003년 계미 3월 일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 종회장 9대손 在華 근찬 -참판공 隸下(휘斗山 휘以鉉) 3연합 종회 裔孫일동 건수
◇묘갈 중수 추진위원 명단 -在華 : 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 종회장 -成會 : 참판공 종회 고문 -元會 : 참판공 종회 고문 -雄會 : 참판공 종회장 -泰晧 : 참판공 11대 宗嗣孫 -翊會 : 3연합종회 도유사 -粲會 : 참판공 종회 부회장 -英會 : 재청안동김씨 참봉공파 화수회장 -旨會 : 재청안동김씨 참봉공파 화수회 고문 및 전 회장
◇序言
우리 안동김씨가 무량(무릉도원)에 입향한 것은 1580년대(이조 선조13년)로서 약 420년전이 됨으로 임진왜란의 12년전이며 그 56년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전란과 정치적 혼미가 겹쳐 현실도피와 은둔을 위주하든 세태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산명수려한 주위환경은 시인묵객의 상찬을 자아내게 하였다.
농경사회로서의 경제적 기반은 위약하다 할 것이나 명문가성을 지키며 전통예속을 엄수해 오는 성손이었다. 루전해오는 선조님 중에도 그 행적이 기이하여 국가의 은전을 입은 분이 증공조참판공(휘 세달)이시니 어려운 형편에서도 1705년과 1951년에 공의 묘표를 건수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심히 왜소하고 오류가 로정되어 불가불 개수치 않을 수 없는 실정임으로 작추 종회의 결의로 이를 시행케 되었다.
과거 2차에 ○한 묘표중 오기된 것은 그 고증을 찾아 신중히 교정하였고 또는 보서에 준거하여 확인을 거쳐 시정하였음을 병기해 둔다.
새로히 마련한 묘갈은 공의 행적을 좀더 구체화하고 심사숙고를 거쳐 史實에 부합되도록 논리를 정제하였다. 따라서 공의 공로와 시대적 배경 등을 참조하여 하나의 교과서적 의미를 부여하여 후손들의 삶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하였음으로 1908자의 음기를 찬술한 대비가 마련된 것이다.
옛말에 인걸은 지령이라 하였으니 우리 종원들은 이 고장 조상의 음덕을 입어 전국 각지에서 꽃피워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思鄕의 정을 돈독히 하고 祖先 경모사상을 애중할 것을 切望하면서 좋은 계절을 택하여 이 묘원에 성묘하고 겸하여 자연을 즐겨보는 보람을 권장하는 바이다.
※고향 종중에 자기 소재가 밝혀지도록 노력 바람
海人+農(在華) 記
59) 김재철 (金在喆, 1907-1933) 한국연극사 연구의 선구자. 국문학자. 본관은 안동. 호는 노정(蘆汀). 1907년 8월 27일 충북 증평군 청천면 무릉리 출신 안동김씨 사원(思元)과 申氏 사이의 천석지기 부유한 집안의 장자로 태어났다.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고, 여말의 충절 오은 안렴사공 김사렴(金士廉)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에는 千字, 唐詩, 通鑑, 四子書 등을 읽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정 김재철 소개> (2005. 10. 16. 주회(안), 발용(군) 제공 자료 종합)
김재철(金在喆) 1907∼1932. 한국연극사 연구의 선구자·국문학자. 본관은 안동. 호는 노정(蘆汀). 충청북도 괴산 출생. 아버지는 사원(思元)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1921년 괴산공립보통학교, 1926년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법문학부 조선문학과에 진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평양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년 만에 죽었다. 학문적 업적으로는 논문으로 〈Palatalization에 대하여〉·〈조선어화(朝鮮語化)의 조선어(朝鮮語)〉가 있고, 저서로는 《조선연극사 朝鮮演劇史》 외에 민요·소설·김삿갓 등의 연구를 묶어 출간한 《노정잡고 蘆汀雜稿》가 있다. 《조선연극사》는 우리나라 연극사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재철 [金在喆, 1907~1932.1.27] 한국의 희곡작가·평론가. 호 노정(蘆汀). 별칭-한국 연극사 연구의 개척자. 국적-한국. 활동분야-국문학(희곡). 출생지-충북 괴산. 주요저서-《조선연극사》(1931)
호는 노정(蘆汀)이다. 1907년(순종 1)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같은 해 다시 법문학부에 입학해 조선문학을 전공하였다. 1932년 평양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던 중 이듬해 1월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한국 연극사 연구의 개척자로, 대학 재학 당시 졸업논문으로 집필한 《조선연극사(朝鮮演劇史)》는 최초의 한국 연극사로 평가받는다. 이 논문은 졸업 후인 1931년 4월 15일부터 6월 28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으나, 연재 도중 일제의 검열로 인해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 그가 죽은 뒤 1933년 '청진서적'에서 조선어문학회 총서의 하나로 출간되었는데, 당시에 이미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인에 의해 영역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조선연극사》 집필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1931년에는 이희승(李熙昇)·조윤제(趙潤濟)·김태준(金台俊)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를 창립하였다. 여러 편의 희곡도 집필하였으나 전하는 작품은 없고, 그가 죽은 이듬해 김태준·이희승 등 경성제국대학 동창들과 조선어문학회 학자들이 추모의 글과 사진을 묶어 비매품으로 출간한 《노정 기념첩》에 식민지 현실에서 조선사회를 비판적으로 노래한 몇 편의 시가 남아 있다. 이 기념첩은 2003년 발간된 《조선연극사》(동문선) 부록에 실려 있다.
■노정(蘆汀) 김재철(金在喆) 선생의 소전(小傳)---1939년 5월 1일, 金台俊 <조선연극사, 1939, 학예사> 저자(著者) 고 김재철(金在喆) 선생은 1907년 8월 27일 충북 괴산 읍내의 자택에서 고고(呱呱)의 소리를 들었다. 1918년 4월 괴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21년 3월 그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경성제일고보, 오늘의 경기중학에 입학하여 1926년 3월 졸업하여 같은 해 4월 경성대학 예과에 입학, 1928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그해 4월 같은 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박사의 지도하에 조선문학과를 전공하고 1931년 3월 이를 마친 후, 1932년 4월 평양사범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가 1933년 1월 27일 방년 27세를 일기로 장서(長逝)하셨다. 선생은 두뇌가 명석하고 기지에 장하여 그분 간 곳에 쾌활한 웃음소리가 터지지 않는 곳이 없고, 문학·음악, 기타 예술 부문에 섭렵하다가 최후에 조선의 연극을 연구하던 끝에 자기의 생각을 일괄한 것이, 즉 <♠조선연극사>이다. 기타 민요·소설·김삿갓 등의 연구가 있어 <♠노정잡고(蘆汀雜稿)>라는 명목으로 출판하여 사자(嗣子) 천회(千會)가 소장하고 있다. 노정(蘆汀)은 그의 학생 시대의 호(號)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부(父)는 사원(思元), 모(母)는 고령(高靈) 신(申)씨, 아래로 세 동생이 있다.
■ 조선연극사 김재철이 지은 책.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학총서 3집으로 1933년 5월에 간행된 한국연극통사서이며, 金台俊의 서문과 지은이의 小傳, 본문, 부록(꼭두각시극 각본)의 순서로 되어 있다. 김재철은 27세로 요절한 연극학도로서 그가 경성제국대학의 졸업논문으로 쓴 <한국연극의 사적 연구>가 바로 이 책이 되었다. 거의 미개척지였던 이 분야에 처음으로 학문적 고찰을 한 업적이며, 한국연극을 역사적 맥락에서 잡아보자는 의도 자체부터가 전혀 새로울 때 나온 저서이기도 하다. 문고판(학예춘추, 조선문고, 1939년 재판) 으로 230면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전통연극을 가면극과 인형극으로 양분하고, 거기에다 구극과 신극이라는 제목으로 신역극 이후의 개관을 덧붙여 놓은 매우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한국연극사 자체가 자료부족 및 연구방법론의 미확립으로 인하여 근래에 이르기까지 위와 같은 테두리를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책은 하나의 선국적 업적으로 별반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본문의 제1편 <가면극>은 삼국 이전부터 신라,고려 및 조선왕조에 이르는 사적 고찰을 한 뒤 산대가면극의 연극내용과 무대구조, 가면의 특성 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조선가면극의 계통에 대하여도 간단히 논하고 있는데, 史料의 섭렵이나 비교연극학적 접근에는 모자람이 많으나 여기서 거론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제2편 <인형극> 역시 개관과 내용, 그리고 계통을 논하고 있는데 이 책 말미에 꼭두각시극 각본을 채집하여 실은 것을 보아도 이 분야에의 저자의 깊은 관심을 알 수 있다. 제3편 <구극과 신극>은 개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원각사 창립시기를 1909년이라 하여 뒤에 수정되는 등 고증에 미비한 점이 있으나 대중연극까지 포함하여 신연극 이후의 모든 것을 망라한 것이 특색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어문학회 1931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 및 문학과 출신과 재학생들이 조직한 학회. 1924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는 1929년에 첫 졸업생인 조윤제(趙潤濟)를 내고, 이어 이희승(李熙昇, 2회), 김재철(金在喆, 3회), 이숭녕(李崇寧, 5회), 방종현(方鍾鉉, 6회)을 내었다. 이들은 1931년에 동인회(同人會)로서 조선어문학회를 발족하고, 그해 7월 회지인 조선어문학회보를 간행하였다. 같은해 10월에 제2호, 1932년 2월호 제3호, 4월에 제4호, 9월에 제5호, 1933년 2월에 제6호를 내었다. 7월에는 조선어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제7호를 내고는 회지간행이 중단되었다. 이들 회지의 아학관계 집필은 이희승, 이숭녕, 방종현, 김재철 등이었고, 문학은 조윤제 등이었다. 또한 이 회지는 <한글>이나 <정음(正音)> 보다 앞선 학술지였다. 참고문헌 조선어문학회보, 국어국문학회 30년사(국어국문학회, 1984)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연극사를 다시 펴내며---2003년 5월, 심우성 조선연극사의 저자 김재철 선생은 25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다 가시면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사를 편찬하였으니, 그 공로 영세에 남을 만한다. 이 책의 원전은 저자가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과의 졸업 논문으로 작성한 것인데, ♠1931년 4월 15일부터 6월 28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사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1933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조선어문학회 총서]의 하나로 청진서적에서 출간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내용과는 첨삭이 있었으니, 당시 연극계의 현황과 전망을 다룬 부분에서 검열·삭제된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 연극의 어제를 살피면서 진보적 안목으로 건설적 내일을 조망하고 있는 저자의 사관이 일제 침략자들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책은 1933년 청진서적에서 나온 후, ♠1939년에는 학예사에서 [조선문고]로 펴냈고, 필자(=공주민속극박물관장 심우성)가 ♠1970년 허름한 [복사본]으로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1백 부를 냈으며, ♠1974년 [민학총서]로 도서출판 민학사(발행 朴辰柱)에서 3백부를 복간한 바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우리 서가에 조선연극사는 없고, 간혹 고서점에서 보일 뿐이다.
이러할 즈음 1998년 평소 가까이 지내는 민요학자 이소라 선생을 통해 김돈식(金頓植, 1922년생) 선생으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김재철 선생의 일생을 담은 <♠노정기념첩(蘆汀記念帖)> (1934년, 편집 및 발행인 金在誠, 한성도서주식회사)을 입수하게 되니, 이런 기쁨이 있으랴. 기념첩과 함께 누렇게 바랜 [♠김재철 원고지]에 또박또박 쓰인 10여 편의 詩도 함께 있었다. 이 보물들은 김돈식 선생이 1940년경 경성저금관리소 위체계에 근무할 때 가까운 친구였던 김재웅(金在雄)씨로부터 ".....큰형님 자료이니 잘 보관해 달라" 는 부탁을 받고 50여 년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했다. 김재웅 씨는 그 길로 황해도 어딘가로 간다고 했단다.
2002년, 늦은 가을로 기억한다. 가까이 지내고 있는 부산 해운대 산부인과 홍숙희 원장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김재철 선생의 조카 김원회(金源會) 교수가 부산대학교에 근무중이라며 그가 쓴 <♠단기고사는 말한다> 라는 저서를 보내왔는데 [노정 김재철] 이라는 회고의 글이 실려 있지 않은가. 그로부터 김교수와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노정께서는 4형제로 재철(在喆), 재성(在誠), 재봉(在鳳), 재웅(在雄)인데, 김 교수는 둘째 재성의 아드님이니 노정 선생이 바로 백부이다.
노정의 아드님은 천회(千會, 1930년생)인데 1998년 별세했고, 부인 임방춘(林芳春, 1934년생) 여사와의 사이에 태임(泰任), 태동(泰東), 태석(泰碩)의 1녀 2남을 주었다. 임여사는 <♠노정기념첩>을 비롯하여 [♠사진자료], [♠신문기사 모음], [♠유고] 등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현재 따님인 대전대학 김태임 교수와 대전광역시 유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노정 선생의 묘소는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양곡리 자바실에 있다. 가계(家系)를 이처럼 소상히 밝힘은 그동안 선생에 관한 고구가 너무도 소홀했음에 후학들의 연구에 일조가 될까 함이다.
어렵사리 다시 증보·복간되는 조선연극사가 난삽하기 그지없는 오늘의 우리 연극계 체통을 찾는 데 큰 구실을 할 것을 확신한다. 전문서적 출판이 어려운 이 시기에 선뜻 마음을 쓰신 도서출판 동문선 신성대 사장과 그의 집념을 묵묵히 받침하고 있는 한인숙 주간에게 고마운 뜻을 듬뿍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뒤늦게 만났으면서도 오랜 이웃인 양 반겨 주시는 유족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린다. 이 글을 쓰는데 참조한 문건은 다음과 같다. 金在喆, <♠조선연극사>, 1939, 학예사 <♠노정기념첩>, 1934, 편집 및 발행인 金在誠, 한성도서주식회사 <♠노정추도호>, 조선어문학회, 논문집 제6호 이동영, <♠조선연극사고>, 1993, 일하 이원기선생 순국50주년 추모논총 金源會, <♠단기고사는 말한다>, 1994, 도서출판 전망 徐淵昊, <♠연극사 탐구의 선각자 김재철>, 2003, 동문선 刊 <조선연극사> 수록
■ 이외에도 노정 김재철 관련 자료 ◇<♠조선한문학사> 序 (1931.12, 金在喆) ◇<♠조선연극사> 서문 (1933.3.6, 신의주객사에서, 金台俊) ◇<鍾路의 카페 巡遊> <♠한 개의 돌이로다, 1971, 이희승, 휘문출판사> ◇<김재철의 조선연극사 연구> 중앙대학교 강사 정형호, ♠한국민속학 제28호 ◇<♠우리시대의 연극인> (2001, 서연호, 연극과인간) ◇<조선연극사> 김재철 지음 / 민속원 / ♠2001년 9월 ◇<조선연극사 - 문예신서 238> 김재철 지음 / 동문선 / ♠2003년 6월 ◇<♠조선연극사 (김재철, 1933년 5월 18일 발행, 조선어문학회)> ---2003년 6월 12일, 동문선, 공주민속극박물관의 후원으로 발간. ---제21회 전극연극제 기념도서 (2003.6.12-30, 공주문예회관, 주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한국연극협회)
■ 김재철 발표 논문---2003년 서연호 김재철은 <조선연극사> 이외에 수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전통극에 관한 논문으로는 <♠外使와 조선연극>(조선어문학회보 제1집, 1931.7)이 있다. 태종18년 중국 사신 육선재와 성종19년 동월이 내왕했을 때 산대희를 연출한 것을 밝히고, 아울러 영조대에 출간된 성호사설의 산대 기록을 통해서 사신 영접의 관례를 확인했다. 근대극에 관한 논문으로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전조>(신흥, 1931.12)가 있다. 대구의 가두극장, 개성의 대중극장, 해주의 연극공장, 경성의 이동식 소극장의 출현을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출발 단계로 보고, 특히 이동 극단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프로극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의 토랑크 극장, 전위자, 프롤레타리아 극장의 사례를 들었고, 러시아를 포함한 전 유럽의 프로극 경향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각 관극한 <탄갱부>와 <2층의 사나이>는 프로극을 이해하지 못하는 연극인들에 의해 공연된 것을 지적하고, 진정한 프로극이 성행하기를 기대했다. 문학에 관한 논문으로는 <♠방랑시인 김삿갓>(동아일보, 1930.12), <♠술과 문학자>(조선어문학회보, 1931.10) 등이 있다. 국어학에 관한 논문으로는 <♠구개음화에 대하여>(조선어문학회보 제4집, 1932.4)와 <♠조선어화와 조선어>(상동, 1932.9)를 발표했다. 전자에서는 완전히 구개음화된 단어를 비롯하여 연구개음화 및 방언에 나타나는 구개음화 현상을 기술했다. 후자에서는 한자어와 일본어의 국어화 및 고유어의 문제를 실증적으로 논했다. 민요에 과한 논문으로는 <♠민요 아리랑에 대하여>(조선일보, 1930.7.11) <♠조선민요만담>(신흥, 1931.7) <♠아리랑과 세태>(조선어문학회보, 1931.10)를 발표했다. 아리랑이 경복궁의 복원시에 부르던 노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근원 설화로 떠도는 '아이롱(我耳聾)' 혹은 경주에 있는 '알영정(閼英井)'에 관하여 논술했다. 민요 만담으로는 민요에 나타난 민중들의 절망, 한숨, 방탕의 반어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지적했다. 아리랑과 세태의 관계는 민중의 진실한 삶의 내용을 표출시키고 있는 점에서 주목했다. 이밖에도 미발표 희곡인 <♠국경> <♠이혼> <♠셋방살이와 메이데이> <♠R군에게> <♠양철집> <♠쓸데없는 걱정> 논설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국제적 결성> 등 상당량에 이른다.40) 이러한 작품들은 아직 학계에서 확인된 바 없다. 희곡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그가 평소 극작가를 지망했음을 알 수 있다. 김재철은 불과 2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러나 그의 <조선연극사>는 70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학문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연극사 연구 이외에도 그가 남긴 논문들은 큰 학자로서의 잠재력을 투시하게 된다. <조선연극사>에서 대량 삭제당한 부분은 신극 가운데서 프롤레타리아 연극 관련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가 남겼다고 하는 수편의 희곡 가운데서 단 한편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은 그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할 뿐이다. ---40) 자료, <김재철 추도문집>, 조선어문학회보 제6호, 조선어문학회, 1933.2.1 참조
■ 바다의아츰 (長箭港에서) 一九二九·三月) ---미발표 원고 중에서 --- 맑은 아츰 바다가엔 물결이 밀이여 부듸친다 모질게 닥치는 그 瞬間에 쇄- 하는 소리 부서지는 흰거품 --- 이엇다 끈첫다 높엇다 나젓다 詩를 읍조리는 물새의 노래 波濤의 소리와 伴奏하는 神秘로운 海洋의 曲 --- 푸른 물결 저 便 쪽엔 金빛의 煙氣가 잠겨 있다 바다를 뚤고 솟는 太陽 날카로운 햇쌀 天才畵家가 붓을 들고 巧妙하게 그려내인 水彩畵 젊으신 아가씨 바눌을 들고 곱게도 繡놓은 그것이다 --- 一葉片舟속에 잠들엇든 漁夫 기지개 끝에 櫓를 잡어 白帆에 바람을 가득 실고서 물결을 헤치여 어대로 인지 둥실둥실 떠나려간다
■ 노정 김재철 학술상 <노정 김재철 학술상>은 한국 최초의 연극사인 [조선연극사]를 쓴 노정(蘆汀) 김재철(金在喆, 1907∼1933)의 연구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한국극예술학회와 도서출판 연극과인간이 최근 공동 제정한 것이다. 2002년 2월 5일 동국대에서 제1회 시상식이, 2003년 1월 24일 한양대에서 제2회 학술상 시상식이 있었다. 한국극예술학회 홈페이지(http://www.kdrama.or.kr)에서 시상식 내용을 볼 수 있다. ◇2002년 제1회 수상자 및 저서 : 유민영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장, [한국연극운동사] ◇2003년 제2회 수상자 및 저서 : 서연호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 [한국가면극연구] 우리 연극사 연구의 개척자인 金在喆의 일대기는 그의 명성에 비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27세에 요절한 탓에 기록이 남지 않은 때문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그의 사후인 1934년에 편집된 [노정 기념첩]이 발견됨으로써 그의 문학수업과 연구활동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고, 대한민국 연극계에서 <노정 김재철 학술상> 제정 수상을 계기로 최근 활발한 자료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60) 김사달 (金思達, 1928-1984) 思達(1928-)은 의학박사, 국회문공위원, 서예가로 묘는 청천 도원리 방축산에 있고, 아들 在燦(1951-)은 의학박사, 在善(1957-)은 의학석사, 딸 在京(1957-)의 부군 신영관은 의학박사이다.
■ 서봉 김사달 박사 일대기 <영광은 햇빛처럼, 1990, 박형규 저, 범우사 간) 머리말 서봉 김사달 박사는 당대 우리나라의 才士로 가위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국민학교만 수학한 후 獨苦學으로 입신하여 여러 분야의 정상을 쟁취한 인간승리의 한 표본이다. 그는 애석하게도 57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나 그가 이룩한 업적은 실로 우리들 凡人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50평생으로 생을 마치지만 150년은 산 것만큼 일을 했다'고 했다. 이것은 결코 자만도 아니요 과장도 아니다. 그는 초중등학교 교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의학박사, 전문의, 대학교수, 보건행정가, 문교정책가, 국회 전문위원, 정치인, 저술가, 서화가, 문필가, 체육인, 도안사 겸 畵工, 필경사, 편집기술자, 심지어 태권도 명예 5단에 기합술과 최면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발자취를 남긴 奇人스러운 경력과 행적의 주인공이다. 그는 40여 권의 저서, 200여 편의 논문과 평론, 수백 편의 수필, 100여 개의 碑文과 懸板書, 수백 점의 서화 등을 남기고 체육상, 저작상, 수필문학상, 서예대상(국무총리상 및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특히 서예는 국전 심사위원까지 역임한 당대 명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人間勝利譜는 실로 그의 처절한 인간투쟁을 통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한 없는 감동과 경외의 念을 자아내게 하며, 더없이 값진 교훈과 분발심을 안겨준다. 그의 생애는 그대로 삶의 지혜이며 성공의 비결이다. 이에 나는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인간투쟁의 역정과 빛나는 생애를 그려 후진들의 귀감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감히 무딘 붓을 들었다. 그러나 필자의 둔필로 과연 얼마만큼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독자 여러분에게 전할 수 있을는지 두려움이 앞선다. 오직 江湖諸賢의 질정과 성원을 기대할 따름이다. 끝으로 이 책의 출판을 위해 애써주신 범우사의 윤형두 사장을 비롯한 관계인사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90년 5월 박형규
■ 김사달 연보 서봉 김사달 . 西峰 金思達 (1928-1984) 1928 충북 괴산生 1943-52 청주사범대강사 및 세광고등학교교사 1961-67 수도의대교수 1968 국회전문위원 1984 대한민국예술대전심사위원
1975 국전 국무총리상 1976 국전 문공부장관상 1977-78 국전 추천작가
1968 서화개인전 신문회관 1971 서화개인전(7.8-13) 중앙공보관 1971 서화개인전(7.15-20) 청주문화원 1971 서예개인전(7.23-30) 괴산문화원 1974 도서화개인전(7.9-15) 신문회관 1975 한.중서법전 대만 국부기념관 1976 한.일친선서도전 일본 동경,오사카 1977 한.중.일서예교류전 중국,일본등 1982-84 '82,'84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西峰 金思達은 의학박사로 서예가(書藝家)로서도 당대 이름을 떨쳤으며 그림도 잘 하였다. 국전서예부 문공부장관상, 국무총리상, 심사위원 역임하였다.
■ 김사달 박사 저서 목록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 (最新)英韓醫學辭典 宋仁鎬 ; 金基鉉 ; 金思達 共著 壽文社 1969 7603-17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 韓英獨 醫學辭典 金思達 編 乙酉文化社 1961 7783-8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 英韓醫學大辭典 金基鈴 ; 金思達 ; 白萬基 共編 壽文社 1973 7603-29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4 (壽文)英韓醫學辭典 金思達 ; 金基鈴 ; 白萬基 共編著 壽文社 1976 7603-36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5 解剖生理學槪要 金思達 著 白映社 1965 7720-12 서고자료신청대(보존) 일반도서 6 韓英獨醫學辭典 金思達 編 壽文社 단기4290[1957] 7603-11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7 胃腸病의 治療와 豫防 金思達 著 正音社 1970 7819-9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8 胃腸病의 新療法 金思達 著 韓一出版社 1962 7814-1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9 解副學用語 金思達 編 壽文社 단기4288[1955] 7603-6 서고자료신청대(보존) 일반도서 10 스포오츠醫學 金思達 著 壽文社 1963 799-19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1 (최신)인체해부도보 金思達 著 壽文社 단기4291[1958] 7720-6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2 대장부와 졸장부 金思達 平凡社 1979 3652-719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3 멋의 意味 金思達 著 汎友社 1976 3652-416-105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4 파스퇴르 라드 저 ; 김사달 역 世宗出版社 1974 041-151-52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5 머리가 좋아지는 책 金思達 著 創造社 1973 041-132-13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6 小의落水 金思達 著 수문사 1964 3652-102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7 思索하는 마음 金思達...等著 文光堂 1977 3652-525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8 재능을 기르는 법 金思達 著 海文社 1963 1413-7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19 (最新)人體解剖學圖譜 金思達 著 博愛出版社 檀紀4294[1961] 511.4-김531ㅇ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0 頭腦開發 金思達 著 創造社 1968 7916-7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1 養護衛生學 金思達 著 學生社 단기4287[1954] 545-7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2 無情한 바람아 이 등불을 끄지 말아다오 城戶禮 ; 金思達 번 徽文出版社 1963 3858-22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3 建康敎育 金思達 著 文豪社 1962 545-14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4 아빠全書 Fitzhugh Dodson 著 ; 金思達 譯 정음사 1976 5402-378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5 젊어지는 運動健康法 金思達 著 大潮閣 1977 799-77-23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6 西峯金思達博士書畵文集 金思達 著 瑞友 1986 648.3-김531ㅅ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7 純潔한 Sex 金思達 著 正音社 1971 334.225-1-2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8 우리들의 제三교실 김사달 저 소리 1983 5173-279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29 健康의 條件 365日 金思達 著 東亞出版社 1962 799-15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0 사랑의 育兒敎室 金思達 編 耕智社 1973 539-28-1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1 聖潔問題敎室 金思達 ; 金泰龍 共著 黎明社 1974 5304-15-9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2 科學論文作法 金思達 著 新興出版社 단기4291[1958] 709-10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3 보건위생 玄圭煥 ; 金思達 共著 考試學會 단기4289[1956] 5576-5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4 應用圖案集 金思達 著 學生社 단기4288[1955] 454-3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5 (컬러판)現代家庭大百科事典 兪鎭午 ; 金思達 ; 趙豊衍 共編 大榮出版社 1975 5303-76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6 좋은 아기를 낳는 家族計劃 金思達 著 新太陽社 1961 5166-4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37 現代育兒百科 金思達 編著 韓英出版社 1975 539-41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서봉 김사달 박사 일대기 <영광은 햇빛처럼> (1990, 박형규 저, 범우사 간)
61) 김장회(金章會)
章會1919-는 호春谷, 檜谷으로 문의향교전교, 유도회문의지부장, 덕천서원장, 대종회이사, 기산서원장, 사법서사를 역임하였고 아들 泰恒(태항)1938-은 호 恒山으로 충북도검도회장, 신협이사장을 지냈다.
■축 章會선생 송덕비 건수 지난 7월 5일 전안렴사공파 회장 및 대종회 운영위원이셨던 春谷 章會 현종의 송덕비를 청원군 문의면 면민일동이 수립하고 면민과 종친 다수의 참석리에 제막식이 있었다. <대종회보 제66호, 1999.10>
◇春谷 金章會선생 송덕비문 선철지훈이 언사필충하고 사사필경이라 하였나니 이를 익히기는 가능하되 이를 실천궁행하기는 어렵다할 것이로다. 여기 대인범백에 깊은 사려와 정념으로 성실을 다하고 범사처리에 경신과 성근으로 선후지책이 완벽한 고결지사가 있으니 곧 춘곡 김장회 선생이다. 그는 고려조의 현상명장으로 국사에 찬연한 위업을 남기신 상락군개국공 시충렬 휘방경을 중시조로 여말수절신 오은 안렴사공 휘사렴의 20대손으로 서기 1938년에 유서깊은 괴산 청천의 상재지향을 떠나 이곳에 이거하였다. 양성산이 준수하고 마구천이 용용하여 산자수명한 자연환경에 심취하였을뿐 아니라 그 15대조 휘 공께서 왕석에 문의현령에 위임하였던 연유를 경모하고 또한 자신은 법무사의 길을 정진하기 위함이었다. 미래 60여년의 광음과 팔십유삼의 ?로에 이르기까지 이곳 문향의 전통예속과 고석문물을 유지보존하고 이 지역 차세대의 계도발전을 위하여 심혈을 경주하였으니 풍성한 개황을 살펴본다. 1953년 문산리장의 소임을 맡고 있으면서 면내 각리의 로방계곡에 산재도괴되어 잡초에 묻히거나 망실될 우려가 있는 역대 수령방백의 선정,거사,공적,혜민등 비석 20여기가 방치되어 있음을 안타가이 여겨 이를 취집 문의초등학교 정변에 이수하고 도원리 입구로변에 ?도된 2기는 당국에 의뢰 재건하였는데 그후 대청댐 수몰로 인하여 그 모든 비석을 문의향교 옆으로 이수하고 성담 송선생 유허비까지 원 위치에서 약 10미터 위로 이수하여 선인들의 업적을 전승케 하였다. 1959년부터 1992년간에 문의향교의 전교와 유도회장에 재임하면서 도,군 당국의 지원을 얻어 계속 연차로 문묘 및 명륜당과 담장을 중보수하고 존사청과 홍전문을 신설하였으며 농지개혁령에 의하여 향교위토 전부가 소작인에게 분배되므로 유지관리가 위기에 당면하자 군당국과 교섭하여 문의시장내에 주택 및 점포1동을 매입하여 그 수익으로 근근 수호터니 1975년 수몰된 향교대지 및 점포보상금을 수령예치하였다가 미천리 121의 7 대지 99평 위에 철근조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석존대제 봉행과 문묘수호에 영구한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1980년에 이르러 문의향교를 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로 등록하였다. 1963년에는 당시 신관우 국회의원의 지원을 힘입어 남일면 고은교 외 8개부락의 소하천에 소교를 가설하여 동민의 편익을 제공하였고 한편 덕류의 외덕광원에 경로당을 신설하여 노인위락을 도모하였다. 1978년에는 문의지방의 가장 고아한 유물인 문산관을 문화재49호로 등록함과 동시에 수몰대책 당국과 절충하여 보상금을 지급받아 향교 옆으로 이건하고 아울러 석교2간을 가교하였다. 1980년에는 후곡리 연안이씨 문중의 이강영당 및 가호리 동복오씨 문중의 충효각 등을 요로에 건의하여 국,지방비의 지원을 받아 현 위치에 이건 복원하였으며, 1883년이래 1992년에 이르는 동안 문의향교에 충효교실을 연2회 개강하여 강사로서 청강생 천여 명을 배출하였으며, 1991년에는 문의향교지를 발간하여 요로기관과 후학에게 널리 배포하였으며, 1992년에는 지방순시차 내면한 당시 노태우 대통령께 지방민간인 초청간담 석상의 건의사항으로 미천리 앞 고수부지를 이용 체육광장을 조성할 것을 품청하여 이를 실현케 하였고, 그간의 공으로 장관,지사, 군수, 법원행정처장상 등을 수상하고, 1997년에는 청원군민대상 본상을 수상하였으며, 또한 지역노인회 운영과 면민 복지 증진에도 남다를 정성으로 진력하였다. 공의 지역개발과 발전에 기여한 성력과 막중한 적공은 서상 약기한 바와 같거니와 장중한 인격과 그 공적을 향려의 사표로 영원토록 기념하고저 면민 일동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99년 7월 25일 청원군 문의면 면민일동 수립
62) 金公藝(김공예, 1485-1537) ◇ 김공예 <1956 안동김씨보감> 승지공의 휘는 公藝요 자는 中雅니 판교공 丸의 증손이니 숙부 현감공 (계)에게 出系하니라. 공이 孝友하고 篤學하여 癸酉에 문과를 하니 甲戌에 현감공의 상을 당하고 복계(服門+癸)하고 壬午에 親老로써 괴주목사로 보직함을 乞求하고 甲午에 직제학으로 수찬관에 止하니 內憂를 당하여 侍墓중 丙申에 內外喪을 連遭하여 居廬(거려)하여 哀毁(애훼)하니 丁酉년에 졸하니라. 성돈재는 묘갈을 지으시고 同宗 동고는 서하니라 ◇ 김공예 <오창지> 공은 안렴사의 7세손인 현감 (계)의 아들이다.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양사(사헌부와 사간원), 춘방(세자시강원), 전한, 직제학, 지제교를 역임하고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예조참의에 이르렀는데, 청백함으로 스스로 지켰다. 연달아 부모상을 만나 여묘를 살며 지나치게 훼손하여 상중에 별세하였는데, 임종할 때에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함이 없고 오직 말씀하기를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내 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국가의 은혜를 받았는데 털끝만큼도 보답하지 못하니, 이것이 마음 아프다" 하였다. 묘갈문을 동재 성세창이 짓고 동고 김로가 썼는데 그 명문에 이르기를 "후왕의 후손이요, 덕과 경사를 쌓았네. 정기 모여 우리 공을 낳아 문벌이 다시 혁혁하네" 하였다.
■ 金公藝 墓碣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 (1485-1637)의 묘갈은 조선 중종34년(1539)에 청원군 오창읍 양지리 산소동에 우참찬 成世昌이 지은 비문을 홍문관 부수찬 金魯(=서운관정공파 김희수의 아들)가 써서 세웠는데 1915에 다시 세웠다.<청원의인풍(1991.2., 청주문화원)>
♠ 이문건 양아록의 저자 이문건 3대는 (이윤탁-이문건-이온) 안동김씨와 매우 밀접하다. (이문건의 부) 이윤탁의 처모(장모)가 안동김씨이고 *정확히 누구의 따님인지 미확인, 이문건의 배위는 안동김씨 敦伊로 (제학공파) 김언묵의 따님임. 즉 이문건은 김석의 매부이고, 김충갑 김효갑 김우갑 김제갑 김인갑의 고모부임 이온의 배위 경주김씨 鐘金은 (안렴사공파) 김공예의 누이인 안동김씨의 따님임. 즉 이온의 처모(장모)가 안동김씨이고, 처 외삼촌이 김공예이고, 처 외조부는 현령공 김지임
■ 조선왕조실록 기록 : 김공예 (1485-1537) 1 건... 중종 9년 (1514) 5 건... 중종 13년 (1518) 1 건... 중종 14년 (1519) 8 건... 중종 15년 (1520) 5 건... 중종 16년 (1521) 2 건... 중종 20년 (1525) 2 건... 중종 22년 (1527) 5 건... 중종 23년 (1528) 4 건... 중종 24년 (1529) 17 건... 중종 25년 (1530) 3 건... 중종 26년 (1531) 2 건... 중종 28년 (1533) 4 건... 중종 29년 (1534) ---[중종실록 권62, 중종23년 8월 20일(기미)] o 집의(執義) ★김공예(金公藝)가 추석때 청령위(淸寧尉) 옹주(翁主)가 문밖에 나갔다 돌아올적에 <여주>보재원(普濟院)에 머물렀는데, 한천위(漢川尉)와 안양군(安陽君) 부인이 호종(扈從)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외람된 짓을 하였으므로 추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름. ---[중종실록 권68, 중종25년 5월 16일(을사)] o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김공예(金公藝)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경기감사로 제수하여 백성을 구제하려 하였으나 사간원(司諫院)의 의논이 있어 개정 하였으므로 해로울 것이 없다고 전교함. <京畿道安金史資料集>
○ 김점(金點) (1514-1547) 공은 참의 공예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벼슬하여 참봉 충무위 부사과, 병절교위에 이르렀다. <오창지>
○ 김영(金瑛) 안렴사공 9대손 김영(王+英)은 참봉 奉點의 손자이고, 언정(彦禎)의 아들로 선조30년정유에 무과에 급제하고 판관을 지냈다 <오창지>, <안동김씨족보 등과방목>
63) 김홍립(金弘立, 1599-?1634) 공은 직제학 공예의 현손인데, 의표가 웅장하고 준수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인조 갑자년(1624)에 공산으로 호종하여 호위한 공으로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637) 동궁을 모시고 심양으로부터 돌아와 병으로 죽으니, 일사 이공(=?)은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제학공파 김번, 도평의공파 김회) "서쪽 변방의 풍진이 아직 가라앉지 못했으니, 장한 혼 응당 오고 갈 때가 있으리라" <오창지> 묘 진천 남파랑동이며, 유갈(후손 참봉 在悳 찬)이 있다.
64) 김복원(金復元, 1729-1808) 자 정지(貞之) 호忍窩(인와)로 증조부(曾祖父) 김광수(金光粹), 조부(祖父) 김재문(金載文), 부(父) 김덕현(金德鉉)의 아들로 영조(英祖)41년(1765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7(丙科27)에 급제하였으며, 묘는 오근 입동에 있고, 석상, 誌, 신도비, 묘갈이 있다. 공은 효우독학하여 숙의 金明鎭 흠탄한 바 있고, 간재 田愚 찬 갈, 참판 단운 閔丙承찬 신도비문이 있다. <파보> 공은 직제학 공예의 7세손이다. 을유년 문과에 올라 이조의 정랑과 좌랑, 사헌부와 사간원, 병조참의를 지내고 벼슬이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러 삼대를 추증하였다. <오창지>
■金復元신도비 돈녕부동지사 忍窩(인와) 金復元(1729-1808)의 신도비는 1978년 청원군 오창읍 괴정리 입동에 있는 그의 묘소 아래 세웠으며 비문은 고종20년 (1883)에 이조참판 閔丙承이 짓고 글씨는 1978년에 서봉 金思達이 썼다. <청원의인풍(1991.2., 청주문화원)>
■ 필적 ?467 金復元 - 仁同현감으로 재임 중 饌需를 선물한 친지에게 보낸 감사의 답서 - 18C후기 - 560 <전남도립 옥과미술관>
65) 김형집 (金亨集, 1772- ) 본관은 안동, 돈녕 김복원의 아들로 1772년(영조49)에 출생하였다. 효행이 탁이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삼재체용도(三才體用圖)를 만들었다 한다. 암행어사 김명진(金明鎭)이 흠찬한 바 있다. 아들인 명와 金駿榮 명 묘갈이 있다. <충청북도인물지 (1987)>
66) 김준영 (金準榮, 1793- ) 본관은 안동이며, 형집의 아들로 1793년(정조17)에 출생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천성이 순효하여 엄동 친환에 죽순을 구하여 공친 주효하였으므로 향당이 그 지효를 칭찬하였다. 계인당(繼忍堂)이라 자호하였다. 창암 朴魯重찬 비갈이 있다 <충청북도인물지 (1987)>
67) 김사우(金思禹, 1857-1907) 일명 김시묵(金時默) ◇金思禹 <오창지> 한학자이며, 본관은 안동, 자는 仁父, 호는 勇菴, 청원군 오창읍 주성리 출생으로 金好壁의 맏아들이다. 艮齋(간재)의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용암집 3권이 있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읍 주성리에 있으며 1987년 吳鼎煥이 짓고 재종손 金英會가 세운 묘갈이 있다.
◇ 김시묵 (金時默) <충청북도인물지 (1987)> 조선말기의 학자로 호는 용암(勇菴), 돈녕 복원(復元)의 현손인데 전간제(田艮齊)의 고제로 성리학에 밝고 문장에 뛰어나며 효우독행이 출중하였다. 유고에 사장(祠章) 2권, 성리설문답(性理說問答) 3권, 경증(經證) 1권, 비문(碑文) 1권 등 7권이 전한다. 성리학에서는 선사 간재를 뛰어 넘는다고 한다. 문헌 청주시지
◇金思禹 <청주를 노래한 한시 淸州吟 (임동철, 청주문화원 1998)> (1856-1907) 한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仁父, 호는 勇菴. 청원군 오창읍 주성리 인곡마을 출생으로 金好壁의 맏아들이다. 艮齋(간재) 田遇(전우)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향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勇菴遺稿] 3권이 있다.
♠전우(田愚) 1841-1922(헌종7-?) 본관 담양(潭陽) 자 자명(子明) 호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다른 이름 전경륜(田慶倫)/전경길(田慶吉)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정동·삼청동·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는데, 이때부터 ★임헌회(任憲晦)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임헌회를 직접 ▲아산의 신양(新陽)으로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에 따라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안자편 顔子篇》·《오현수언 五賢粹言》·《연원정종 淵源正宗》 등을 편찬하여 많은 학문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용암유고(勇庵遺稿) 조선말기의 학자 김사우(金思禹, 1857-1907)의 시문집. 7권 3책 활자본. 저자의 본관은 안동. 자는 인부(仁父), 호는 용암(勇庵). 아버지는 선공감역 호벽(好璧)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호준(浩準)의 딸이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체결 이후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효학(孝學)을 겸비한 학자로서 당시 학계에 명망이 높았다. 이책은 1984년 손자 덕회(德會), 명회(明會)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 모두 김세기(金世基)가 썼다. 권1-3은 서(書) 202편, 권4는 잡저 64편, 권5-6은 잡지(雜識)로 경설(經說) 7편, 권7은 서(序) 7편, 기(記) 3편, 명(銘) 1편, 발(跋) 1편, 제문 10편, 시 81수, 부록으로 행장, 행장발(行狀跋), 묘갈, 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書중 상간재선생(上艮齋先生), 답전선생(答田先生) 등은 대부분 학문에 관한 토론내용이다. 심성(心性)과 학문, 주기(主氣)와 허령심(虛靈心), 만물일체(萬物一體)와 이기(理氣), 체발(剃髮)과 의리(義理), 달덕(達德)과 이심(理心), 성사심제(性師心弟), 인심과 도심등 성리학 전반에 걸쳐 논의하고 있다. 사문문답(師門問答)은 지각과 마음, 각식(覺識)과 심지(心智), 지각과 성(性), 기정진(奇井鎭)의 견해 등을 다루고 있어 당시 전우학파(田愚學派)의 주기적 처지(主氣的 處地)를 살필 수 있다. 한편, 잡저의 명도식인편설(明道識仁篇說), 생지위성주설(生之謂性註說), 용력어인설(用力於仁說), 대학정심설(大學正心說), 달덕설(達德說), 취정록(就正錄) 등에서는 선현의 학설을 훈고(訓 )하여 이기의 문제를 다루었다. 추담별집부록(秋潭別集附錄)은 전우가 시의(時義)에 대하여 저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보낸 글들을 모은 것인데, 창의(倡義)와 도학(道學)의 문제를 논변한 내용으로 전우학파의 처세와 갈등을 고찰할 수 있다. 이밖에 잡지에서는 중용과 사서(四書)의 의의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시 유화양구곡운(遊華陽九曲韻), 덕산구곡(德山九曲), 십이난화(十二蘭畵), 십송화(十松畵) 등은 도학자의 심성수양을 의탁한 내용으로 주목된다. 전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용암유고 (국립중앙도서관, 전북대학교 도서관 소장) 1 勇菴遺稿. 1 - 3 金思禹 著 李邰雨 1984 古3648-10-458-1 - 3 고전운영실 고서 2 勇菴先生文集. 1 金思禹 著 景仁文化社 1999 kor 810.819-김532ㅇ-1 문학실 일반도서 5 勇菴先生文集. 2. 雪舟先生文集.. 1 金思禹 著 / 宋運會 著 景仁文化社 1999 kor 810.819-김532ㅇ-2 문학실 일반도서 天 目次 表紙 = 0 總目 = 1 序 = 5 卷之一書 = 7 卷之二書 = 109 地 257 目次 表紙 = 0 目錄 = 1 卷之三書 = 5 卷之四雜書 = 125 人 275 目次 表紙 = 0 目錄 = 1 卷之五雜識 = 5 卷之五經說 = 35 卷之六經說 = 103 卷之六四書問對 = 150 卷之七 = 209
■ 동림사에서 (金思禹) 청원군 옥산면 동림리의 상동림 마을에 있었던 古寺址 이 절은 곧 우리 선조이신 忍窩公(인와공 =金復元(1729-1808)) 께서 소시적에 일찍이 독서하던 곳인데 지금 두 세 사람의 동지와 더불어 이 곳에 머무르면서 학문을 강하니 대단히 감동하고 사모하여 인하여 본 바로써 시를 짓는다 桐林寺賦感 -寺卽我皇祖忍窩公少 ? 讀書處也 今與二三同志(木+妻)此講學極爲感慕因所視以賦之 瞻彼菴上松 첨피암상송 歲久枝盡(禾+ ) 세구지진 ? 獨帶舊日春 독대구일춘 恰如待我 흡여대아국 放策拾松子 방책습송자 子子深培植 자자심배식 我願雨露潤 아원우로윤 後猶今視昔 후유금시석 而我念皇祖 이아염황조 山空無往 산공무왕촉 推(周변)僕(玉변)當世志 ? ? 당세지 留與後人(亞+斤) 류여후인 ? 암자 위의 저 소나무를 보니 세월이 오래되어 나뭇가지가 다 뭉글어졌구나 홀로 옛날의 봄빛을 띠는 것이 꼭 나를 기다린 듯 하네 지팡이 내려 놓고 솔방울 줍는데 하나하나 깊이도 묻혀 있네 나의 바램은, 雨露가 윤택하여 오래도록 이 모습 남아 있기를 나의 선조를 생각하니 산은 공허하고 자취는 간 데 없네 세상의 뜻을 옥돌에 다듬어 놓고 후인에 주어 새기게 하리라 [勇菴遺稿] <청주를 노래한 한시 淸州吟 (임동철, 청주문화원 1998)>
○ 金在新의 처 청주한씨(1882-?) 효열비 청주한씨 효열비는 1976년 청원군 오창읍 창리 엄나무랭이에 金在新의 처 청주한씨(1882-?)의 절효를 기리어 세운 비이다. 비문은 노장우가 짓고 글씨는 族叔(족숙)인 西峰 金思達이 써서 세웠다. <청원의 인풍>(1991, 청원문화원, 향토사료 제1집)
○ 김덕회(金德會) 효자비 德會1921-는 호紹齋로 표창이 있으며 아들 泰亨1940-과 손자 憲植1966-은 오창 양지리에 세거하고 있다. ---추후 보완---
68) 김성회(金星會, 1914-) 송덕비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 공의 이름은 星會 호는 和谷이며 안동김씨 안렴사공 20대손으로 서기 1914년 갑인 6월 26일 출생하시어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巨孺에 이르셨고 1945년 8월 15일 일본통치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대한독립촉성회 진천군 이월면 부회장으로 활약하셨고 1948년 대한청년단 이월면 단장에 선출되시어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셨으며 1950년 6월 25일 동란 당시 향토방위대장으로 임명되시어 온갖 고난과 고초와 受侮(수포)를 당하면서 지역수호와 면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셨으며 1979년 이월면 제2대 노인회장으로 선출되어 노인의 복지증진은 물론 노인회의 숙원사업인 노인회관 건립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시다가 공사비가 부족하자 사재를 근저당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비용을 마련 전국 최초의 목조개와 건물로 대지 510평의 회관을 건립, 1981년 8월 18일 준공과 함께 노인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니 어찌 우리 노인들이 고맙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평생동안 오로지 나라와 지역발전은 물론 면민과 특히 노인을 위하여 헌신하셨기에 그 숭고한 정신과 높은 덕을 기리고저 이 비에 새겨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한다. 서기 2000년 경진 5월 14일, 화곡김공성회송덕비 건립위원회 건립 錦岩 李廷云 書 <진천의 금석문(비문)집 제2집> (2001.11, 진천문화원)
69) 김취(金吹) 공은 판교 환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양성현감에 이르렀다. <오창지>
70) 김암(金巖) 공은 안렴사공 사렴의 7대손이다. 선조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세포 만호에 제수되었는데, 임진년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죽으니 초혼하여 장례하였다. <오창지>
72) 김함(1490∼1538) 이 계열에서 연기에 인연을 마련하는 사람은 오은공의 6대손인 함(1490∼1538)이다. 그는 성균진사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배웠는데, 선생이 기묘사화를 당하자 인적이 뜸한 연기 금남면 봉기리로 낙향하여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진사공은 호를 梧齋(오재)라 하였고, 모친은 전의이씨이다. 어려서부터 문인의 자질이 뛰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성정하여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등 조선 사림계의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1516년(중종11) 진사가 되어 1518년에는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는데 유생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정암 조광조 선생을 구원하는 상소를 유생들과 함께 올렸다. 그러나 정암이 결국 피화를 당하자 연기 원수산 아래 봉기리로 낙향하여 명탄강의 경관 속에 은둔하였다. (진사공 비문의 찬자는 그가 원수산 밑에 은거하게 된 이유중에는 원수산이 상계 선조인 김흔 장군이 연기대첩시 승전의 공이 있던 구유적지였기 때문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진사공의 봉기에서의 은둔생활은 묘비문에 잘 그려져 있는데, 몇칸의 초가를 짓고 허름한 옷으로 책과 벗하면서 나무도 손수하고 낚시질도 하면서 풍류를 즐기다가 1538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진사공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는 후세 사람들은 공자와 주자가 모두 경술년에 탄생하였으니 후세의 성현도 경술년에 탄생할 것이라 하였는데, 공이 바로 경술생이고 재덕이 남달랐지만 세상을 잘못 만나 쓰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진사공 함의 유서가 깃든 봉기리에는 그의 묘소와 재실 '靜慕齋'가 있다. 진사공의 묘비는 14대손인 在秉이 부친 治默의 유지를 받들어 1968년 건립하였고, 비문은 卞榮寅이 짓고 14대손인 在鵬(재붕)이 썼다. 부인 은진송씨와의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謹祖(근조), 球祖(기조), 王+奇祖(구조)였고, 이들이 둔대파, 내판파, 봉기파로 구분된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성종13-중종14)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제학공파 김석, 김충갑, 김익, 안렴사공파 김함, 서운관정공파 김로 공께서 조광조의 문인이었거나 함께 활동하였고 1506년(중종원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중종반정을 이룬 공으로 책록되신 2등공신 (익원공파)金壽童(김수동), 3등공신 (익원공파)金壽卿(김수경), 4등에 추록 (익원공파)金,石+武(김무), 원종공신 (?분파)金百鈞(김백균) 중에서 김수동, 김수경, 김무는 1519년(중종14) 조광조의 건의로 삭훈되었다가 1519년 12월 전원 복작되었다
■ 靜慕齋(정모재)---진사공 김함의 재실
靜慕齋는 진사공의 유서가 깃든 재실로서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자 둔대, 내판, 봉기 3파가 뜻을 모으고 경향의 종족들이 성금을 내어 1976년 중건한 것인데, 靜慕의 뜻은 진사공이 스승인 정암 조광조 선생을 사모했던 마음을 이은 것이라 한다. 중건기는 在文+武이 지었다. 정모재 현판은 서봉 김사달 박사의 書이다.
금남 봉기리에 세거하면서 번창했던 진사공의 후손들은 후대에 점차 인근지역으로 분파되는데, 이중 장자 謹祖의 자손들은 이후 둔대에 터를 잡아 둔대파로 불리우게 되며, 둘째아들 球祖의 후손들은 내판에 터를 잡아 번창하여 내판파로 별칭된다. 그리고 막내인 王+奇祖의 후손들이 봉기리의 옛터를 지키며 봉기파로 불리우게 된다. 장파인 둔대파는 謹祖의 자 重蘭의 묘소가 둔대에 있기는 하지만, 현손 德永 이후의 묘소들이 둔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미루어 현손대에 둔대에 정착한 것으로 보여지고, 중파인 내판파는 계속 봉기에 거주하다가 球祖의 8세손인 有載, 有復 형제때에 내판으로 이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형제는 厚世의 아들로 有載(1726∼1762)의 묘소는 내판 상곡에 있고, 내판 덕현에 있는 충의위 有復(1740∼1815)의 묘비에 의하면 조부인 德正(임신∼?)이 공주 이인도찰방을 역임하였고 부친인 厚世가 내판으로 입향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가 어떤 이유로 내판으로 이거하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부인이 서산유씨이다. <宋毅燮 찬, 李錫永 서>
73) 金基喆의 처 밀양손씨와 며느리인 金聖欽(족보이름 榮聖)의 처 창령성씨 ■ 양세열녀 정려문 내판파의 중요 유적으로는 이 가계에서 배출한 양세열녀의 정려문이 있다. 이 정려는 金基喆의 처 밀양손씨와 며느리인 金聖欽(족보이름 榮聖)의 처 창령성씨의 양세 열녀정문으로 [양세정려기, 1905년 조진만 찬, 장태섭 서]와 [창령성씨 열녀정려기, 1912년 임동훈 찬, 최룡식 서]에 의하면 밀양손씨는 어려서부터 부덕을 익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가히 여자 선비의 기풍이 있다는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17세의 나이로 안동김문에 출가하여 청상이 되었으며 유복자를 낳아 기르면서 절도있는 상장제의와 3년상을 마치었다. 며느리인 창령성씨도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역시 유복자를 두고 남편과 사별하였다. 남편의 제사에 좋아하던 잉어를 구하여 올리는 등 예절과 지성을 다 하였고, 재물을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으며 아들 광묵의 교육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한다. 이같은 열행과 부덕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여 1904년 가을 장태섭의 발론으로 유림들이 본군에 천거하고 군수는 이를 감영에 보고하니 감영에서는 광묵의 3종숙인 榮王+睿를 시켜 장례원에 고하게 하였고, 마침내 열녀로서 포상을 받고 이듬해인 1905년에는 정려문 건립을 이룰 수 있었다. 정려문은 2칸으로 내부에는 1904년 내려진 2개의 명정현판이 걸려 있고, [양세정려기, 1905년]과 [열녀정려기, 1912년]이 걸려 있다. 이 정려는 1995년 서용석 군수와 홍순규 군수의 지원으로 개축되고 석축과 담장을 고쳐 잘 보존되고 있다. 한편 이같은 양세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손자인 在鳳, 在鵬 등은 1991년 정려 뒤편에 수성대를 쌓고 비를 세웠다. 이 수성대는 양세 효열의 기풍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으로 내판 안동김문의 가통과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74) 김담(金淡, 1562-임란) 1562(명종17)-? 자 淸叔, 호 樂齋, 안렴사공 10세손. 공은 벼슬이 장락정에 이르렀다. 임란을 당함에 古今島에서 倡義하여 곽재우와 더불어 도모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陣中에서 전사하였는데 10여일이나 안색이 불변하였다 한다. 아들 孝明이 負屍還葬하였고, 선무2등공신으로 책훈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강진 마량포구 앞 고금도 포구 앞으로는 고금도가 마량항을 보호하고 있는 듯 가로막고 있다. 고금도는 백범 김구 선생께서 1898년 당시 23세때 인천감옥을 탈옥한후 해남, 완도, 강진, 보성, 하동 등으로 삼남지방을 순례하실 때, 해남군 화산면 관두산 밑의 관동마을에서 해남 이진사가 주선한 배편으로 갔던 섬이라고 한다.
75) 김치옥 (金致玉, 1742-1827) 추모비 (1975) 소재 : 충북 영동군 황간면 牛川里 산30-2번지 공의 휘는 致玉이요 자는 汝聖이요 본관은 안동이요 고려말 충신 안렴사 휘士廉 공의 14세손이시니 서기 1742년 3월 4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龜尾(=회포리)에서 출생하시어 서기 1827년 6월 24일에 졸하시니 향년 86세이시다. 공께서는 천성이 인자하시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시어 선고 휘履 (이후)께서 별세하시니 애통하신 나머지 선고 묘소옆에 묘막을 건립하시고 3년간을 하루도 궐하심이 없이 시묘를 하시었다. 슬하에 錫勵 錫明 錫歸 錫範 등 네아들과 漢昇외 12명의 손들과 같이 이 蓮花洞 마을을 창설하셨다. 우리 후손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하여 이 할아버지의 미덕과 효성을 추모하는 나머지 삼가 이 비를 건립하노니 후손들은 이 할아버지의 유덕을 본받아 서로 화목단결하고 타의 시범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기 1975년 12월 12일 6대손 哲會 고손 仲默 5대손 在仁 5대손 在燻 외 후손 일동 건립 <안동김씨 화수록 제8집, 1999>
76)김린 ◇監察 김린(金)의 後裔 안동김씨는 420여년 전에 김린(金 )이 진천읍 장관리에 내주하였다.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의 증손 縣監(현감) 김린이 문종조(1451-1452) 생원급제하고 벼슬은 현감을 지내다 <상산인맥지><상산문화> 진천읍 장관리로 래주한 이래 사백여년 자손들이 군내 수백호 살고 있다. 김린의 증손 金孝騫(김효건)은 임진왜란때 執綱(집강)으로 倡義率民(창의솔민)하고 捕賊多級(포적다급)하여 증좌천성하였다. <진천향토지, 1992, 진천상산고적회>
77) 김효건(金孝騫)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의 義兵, 고려조의 충신 안렴사 金士廉의 6대손이며 린의 증손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1592년 (선조25) 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의 세로 북상하여 올라왔다. 왜군의 3진을 맡은 黑田長政의 군은 경남 창원을 거쳐 4월 25일에는 성주에 이르고 김천을 거쳐서 추풍령을 넘어서 영동, 옥천, 청주를 지나 진천을 거쳐서 죽산을 지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때 왜군이 진천으로 들어오니 현감 洪趾는 內浦로 피난 도만하고 경내에는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執綱 즉 鄕約所 또는 鄕廳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던 김효건은 진천현 안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山谷間 (지금의 태락리에서 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차단하고 복병을 대기시키고 있다가 고개를 넘어오는 왜병을 급히 몰아치니 상당수의 적이 포살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뒤에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상산지> <진천군지, 1994> <상산인맥지>
◇김효건(金孝騫)이 이끈 진천의병의 활약 김효건은 안동인으로 진천현감의 휘하에 執綱 (鄕約所 또는 鄕廳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할을 함) 이었다. 왜군의 제3진인 黑田長政 軍은 경남 창원을 통해 성주, 김천을 지나 영동, 옥천, 청주를 점령하고 진천으로 쳐들어 왔다. 이때 진천현감인 洪趾는 內浦로 도망하여 지휘할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집강 김효건이 의병을 모집하여 지금의 台洛里에서 院洞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을 매복하고 있다가 적병을 급습하여 타격을 주는 등 활약하였다. 그는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진천군지, 1994>
♠향청 鄕廳 : 조선시대 지방행정관서 단위로 둔 지방자치기관. 지방민을 대표하는 기구로, 군(郡)·현(縣)의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鄕吏:衙前)의 악폐를 막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차례 존폐를 거듭하다가, 1489년(성종 20)에 부활되었다. 우두머리는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1894년 이후 鄕長)라 하여 선거로 추천된 자를 임명하였는데, 좌수는 풍속 교정·향리규찰·정령시달(政令示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78) 김적(金適, 1564- ) 조선 중기의 문신, 안렴사 김사렴의 7대손이며 호는 牛川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1610년 (광해군2)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조정랑을 역임한 문장가이다. 광해군의 학정에 대하여 대의를 밝히고 정론을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천 서쪽 5리 지점에 江亭을 짓고 살았다. <진천군지>
◇김적은 안동인 안렴사 사렴의 7대손이라. 萬曆庚戌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이조정랑이었다. 혼조를 당하여 건의하되 대의를 밝히고 정론을 넓히며 從長善處하라고 말하여 權奸臣을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輿地에 말하기를 江亭이 고을 서쪽 5리에 있고 주인 정랑 김적이 文翰의 사람에 지나고 지조가 굳고 확실하여 혼조를 당해서 명리를 사양하였다. 호는 牛川이다. <상산문화> <상산인맥지>
◇조선문과방목 김적(金適) 광해군(光海君)2년(1610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 생년(生年) 1564년, 갑자 자(字) 선오(善吾)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부(父) 김효건(金孝騫) 조부(祖父) 김석명(金碩鳴) 증조부(曾祖父) 김철(金轍) (?진천파: 김린-김형손-김기, 황간파: 김려-김철수-김석령) 외조부(外祖父) 이박(李璞) 처부(妻父) 우희보(禹熙輔) 전력(前歷) 유학(幼學) 관직(官職) 정랑&(正郞&)
◇ 安東金公適墓碑 (위치:장관리) 公年甲子(1564)生 庚戌(1610)別試文科壯元 新增與地勝覽曰 文翰過人志操堅確 往在昏朝謝跡名利 崇禎後80년(1707,숙종33) 丁亥 4월 일 <진천의 금석문>
◇金適은 務安사람으로, 字는 善吾, 본관은 안동, 圻의 손자이다. 1610년(광해군2) 문과에 급제 정랑을 임명받았다. ★戊午(1618)收議때 抗直權奸하고 사임한 뒤 고향에 돌아와 후배양성에만 힘썼다. (人物考) <전라남도지 제3권, 1984>
♠戊午(1618)收議 反正軍의 수뇌들이 칼을 씻은 洗劍亭 광해군 15년(1623) 3월13일 새벽 김유, 李貴(이귀), 崔鳴吉(최명길), 金自點(★김자점 ), 沈器遠(심기원) 등이 쿠데타軍 6700명을 거느리고 弘濟院(홍제원:홍제동)에 모였다 . 綾陽君(능양군:나중의 仁祖)의 친병과 장단부사 李曙(이서)의 부하 700명도 합류했다. 이들은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대오를 가다듬고 깃발을 세웠다. 새벽 3시경이었다. 反正軍(반정군)은 洗劍亭(세검정:지금의 종로구 신영동)을 거쳐 彰義門(창의문:도성의 서북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진군했다 . 洗劍亭이란 반정군의 지도자 김유·이귀 등이 이곳을 흐르는 내에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덕궁을 수위하던 훈련대장 李弘立(이홍립)은 사전약속대로 궁문(돈화문)을 열어주고 몸을 피했다. 반정군이 궁궐에 난입하자 광해군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은 다음 내시에게 업혀 도망갔다가 생포되었다.
反正軍이 내세운 명분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가 형(임해군)과 아우(영창대군)를 죽이고 母后(모후:인목대비)를 폐한 反인륜적인 행위였고, 둘째는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後金=淸)와 교분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1618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西宮(서궁)이라고 낮춰 부르게 했다. 따라서 폐비 문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後金(후금)과의 관계 개선은 국가이익 확보에 있어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당시의 집권당 大北의 독주에 대한 반대 정파의 반격이었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주체세력은 광해군 시절에 배척을 받았던 西人들이었으며, 모두 李恒福(이항복:반정 당시 故人)의 문하 생들이었다. 西宮에 유폐되었다가 反正으로 궁중의 최고 어른이 된 인목대비는 자신의 소생 永昌大 君(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을 증오하여 『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며 『 목을 잘라 망령에 제사지내고 싶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만류로 광해군은 신문과 형벌을 겨우 면하고 강화 喬洞島(교동도)로 귀양을 갔다.
79) 김정길(金廷佶) 본관은 안동이요,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다. 1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밤낮없이 울고 있으니 적장이 "그대는 어찌 우는가"하고 물으니, 그는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에 맺혀 울고 있다"고 답하였다. 적장이 또 "너는 글을 배웠느냐?"고 물으니, 그는 "어찌 글을 배우지 않았겠느냐"고 답하였다. 왜장은 그에게 시를 지어 보라고 하였다. 그는 즉시
童子年將十有二(동자연장십유이) : 나의 나이는 12살인데 一朝庵作別萱위(일조암작별훤위) : 하루 아침에 부모님을 작별하게 되었구나 *庵-암자 암, 萱-원추리 훤, 위-대궐작은문 위) 可憐夜夜思親夢(가련야야사친몽) : 가련하다 밤마다 부모를 생각하는 꿈을 꾸니 長向吾家枕上飛(장향오가침상비) : 그 꿈은 멀리 나의 집으로 날아가 부모님 머리맡에 있노라
라고 지었다. 적장은 이 시를 보고 그 효성에 감동하여 석방하였다. 그는 적장에게 말하기를 "만약 다른 일본 군사를 만나면 부모님을 뵈옵기가 어렵겠으니 다른 일본 병사들이 나를 잡지 말라는 표를 하여 달라" 고 하였다.적장은 그의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으면서 "훌륭하도다. 표를 하여 달라는 말이여!" 하고 차고 있던 붉은 종이를 내주면서 다시 잡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끝내 그는 집에 돌아와 부모를 만나게 되었다. 그 뒤에 山東의 3개 면이 그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잘 지냈다. <진천군지> <내고장 전통가꾸기 (진천군편)> <충청북도인물지 (1987)> <상산인맥지>
◇족보기록 字子正丁丑生副護軍庚寅11.26卒壽74贈軍資監正墓方洛洞選坐有床石 配贈淑人淸州陽氏忌4.23父部將應春墓附 公年幼値壬亂被執於賊貝+武詩一絶以示思親之意賊將感其誠孝而釋之<무진보, 1988>
◇通政大夫 金廷佶 墓碑 公字子正安東人上洛公12代孫按廉使8代孫 判書吳仲和孫主簿世允外孫 壬辰倭亂被執作詩云 童子年長十有二 一朝宅作別萱闕 可於夜夜思親夢 長向吾家枕上飛 倭師感乎誠孝釋之 公曰 洛逢倭示何 倭師與以紅紙浚逢倭示 兮行棒棒一家與 +覺孝皆柬+ 免害累氣不中壽以天尊 配靖陵參奉淸 子立+木+ 收?應春女有6男1女 乾隆8年 癸亥 3月 日立 강개할 원통하고 슬플 강, 逢만날 봉, 浚깊을 빼앗을 준, 兮어조사 혜, 棒몽둥이 칠 봉, 강이름 장
◇贈 軍資監正公諱廷佶思親詩 (兒時値壬辰倭亂被執於賊將時 一絶以示思親之意賊將感而釋之) 童子年將十有二 동자연장십유이 一朝庵作別萱 일조암작별훤위 (庵-암자 암, 萱-원추리 훤, -대궐작은문 위) 可憐夜夜思親夢 가련야야사친몽 長向吾家枕上飛 장향오가침상비<안동김씨보감, 1957> ---군자감 정에 증직된 공은 이름이 연길임. 그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임. (어릴 때 임진왜란 당시 적장에게 사로잡혔을 때, 부모를 그리워하는 뜻을 담은 절구 한 수를 보여주었더니 적장이 감동하여 그를 석방해 주었다) ---제 나이 열 두살인데 하루 아침에 부모와 헤어졌어요 애처롭게도, 밤마다 부모님 꿈 꾸면서 멀리 우리 집을 향해 침상을 날아올라요.
80) 김천주, 김천장, 김성추, 김성옥 ( 金天柱 , 金天章 , 金聲秋 , 金聲玉, ) ( ? - 1728 영조4 ) 조선후기 영조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義擧殉節한 충신으로 진천군 문백면 사석리에 있는 4충문 旌閭에 倂旌되고 있다. 김천장과 김천주는 형제로서 안렴사 김사렴의 10세손이며, 김성옥은 김천장의 아들이고, 김성추는 김천주의 아들이니 형제이며 부자간으로 사석리에서 누대를 세거하여 왔다. 본관은 안동이다. 1728년 (영조4)에 청주에서 이인좌가 밀풍군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를 점령한 후 반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가늘 길에 진천 지방에 다다랐다. 반군이 밀려오자 진천현감은 아무런 군비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니 반군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懸衙를 점령하고는 역도 이지경을 현감에 임명하고 진천 북방을 수비케 하고 서울을 향하여 안성, 죽산 방면으로 북상하여 갔다. 이지경은 현감을 자칭하고 지방 청년들을 잡아다가 반군에 편입케 하고 군량미 명목으로 재산과 곡식을 마구 빼앗아 들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김천장, 김천주 형제는 아들과 조카가 되는 김성옥과 김성추를 불러놓고 "나라의 형세가 위기에 처했으니 일반 백성이라도 분발하여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忠義가 혁혁한 김씨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비록 국록은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때에 앉아만 있겠느냐" 고 말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인솔하고는 현아로 처들어갔다. 당황한 이지경은 뒷 內衙로 피신하고 역졸들은 달려나와 일대 접전을 벌였다. 김천장은 진두에서 큰 소리로 "역적의 괴수놈은 나오너라, 내 너의 목을 베리라" 고 외쳤다. 김천장은 용전분투하며 닥치는대로 적을 후려쳐 수명을 참살하는 동안 각 집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역도들이 몰려들어 矢石을 퍼부어댔다. 이때 김천장은 안부에 관통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싸우다가 쓰러졌다. 그의 아들 김성옥과 조카인 김성추는 김천장이 쓰러진 것을 보고 적군을 막아 싸우며 달려들어가 호위하며 衙門 밖으로 나와 퇴각하였다. 김천주와 성추 성옥등도 반군과 싸우다가 안면이 깨지는등 크게 다쳐 동지와 家童들에게 업혀 집까지 돌아왔으나 김천주와 성추 부자는 그날 밤에 숨지고 성옥은 3일 후에 죽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이들의 의거순절한 사실에 조정에 알려지자 김천장에게는 좌승지를 증직하고 旌閭를 명하는 동시에 祭需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의 아들 김성옥에게는 원종공신에 장사랑을 증직하였으며, 김천주 김성추 부자에게도 각각 증직하고 復戶를 명하였다. 1885년 (고종22)에 김천주와 김성옥, 김성추에게도 김천장의 정례에 倂旌케 하였으므로 이후 4충문이라 칭하였다. 이들이 인솔한 義軍들은 무기가 없어 칼, 도끼, 괭이, 쇠스랑을 들고 적소를 습격하였다고 하여 속칭 "쇠스랑 忠臣"이라고도 한다. <진천군지, 1994>
◇一門四忠 金天章의 후예 --天柱(천주) : 린의 5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척?대적하여 ?적순절하니 양무공신으로 책록되고 사충문에 정려하다. 증가선대부 예조참판 --天章(천장) : 린의 5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척?대적하여 ?적순절하니 양무공신으로 책록되고 사충문에 정려하다.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년참찬관하고 가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하다. --聲秋(성추) : 린의 6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죽창과 웅장으로 대항하니 사충문에 정려되고 증장사랑하다. --聲玉(성옥) : 린의 6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죽창과 웅장으로 대항하니 사충문에 정려되고 증장사랑하다.<상산인맥지>
◇안렴사 김사렴의 10대손인 김천장은 진천읍 사석리에 수대 세거하였으며 영조 술신 이인좌의 난에 형제자질이 일문사충하였다. 그 후손들이 우금 사석리에 세거하고 있다. 전 진천농고교사 金光默과 그제 법원판사 金良默(金良男)의 두 형제와 현충청북도의회의원 金慶會도 그 후손이다.<진천향토지, 1992, 진천상산고적회>
■ 안동김씨사충문 - 위 치 :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 - 관리자 : 김영달(金永達) - 수 량 : 1동 - 규 모 : 2평 - 재 료 : 맞배지붕 목조기와집 - 시 대 : 조선(朝鮮) 영조(英祖) 12년(1736)
이 정문은 충신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천주(金天柱)와 그의 아우 천장(天章), 아들 성추(聲秋), 조카 성옥(聲玉) 등 4명의 일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가 난(亂)을 일으켜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켰을 때 이지경(李之景)이 이 자칭 진천현감(鎭川縣監)이 되어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때 사석리(士石里) 여사(如沙)마을에 거주하던 김천주(金天柱), 천장(天章)형제가 자질(子姪) 성추(聲秋) 성옥(聲玉) 과 함께 의거할 뜻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무기도 없이 농기구인 괭이·쇠스랑등을 메고 진천현을 탈환하기 위하여 습격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국왕은 정문을 내리고 향제(享祭)케 하였으며, 그 뒤 그의 자질(子姪)인 성추 성옥도 고종(高宗) 22년(1885)에 병정(倂旌)케 하므로써 사충문(四忠門)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들이 싸울 때 쇠스랑으로 용전(勇戰)했다하여 속칭 [쇠스랑]충신이라고도 한다. 이 정문은 맛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그 규모는 2평 정도로 되어 있으며 1958년에 개축(改築) 하였다. ※ 자료: [文化財調書] [文化遺蹟總攬]p. 548 <진천군청 홈페이지>
<사진 자료> (2004. 3. 21. 안사연 탐방. 촬영 제공)
■ 일문사충사적 34 安東金씨★一門西忠(=진천파)史蹟 ★金在晩(=청천파) 譯 三精版社 1981 2515-125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국립중앙도서관>
목차 創刊辭 = 1 序文 = 9 跋文 = 27 一門四忠案內文 = 29 旌閭門寫眞 = 34 敎旨文 = 35 訴牒 = 37 祝毫 = 41 凡例 = 43 前集八篇英廟朝靖亂當甲年代事 禮川行狀序 = 55 幼學郭來復上疏文 = 91 右上疏文에 對한 批答 = 97 旌門序 = 109 進士辛敦復上疏文 = 119 狀達草 = 143 上啓下達文爲相考事 = 143 觀察使兼巡察使爲相考事狀啓文 = 166 司諫院正言鄭光殷上疏文 = 170 戊申五月初一日官文記錄忠州按武使題草 = 172 癸亥十一月日吏曺爲相考事 = 175 金節士傳 = 179 後集十三篇 其一二篇英廟朝靖亂當甲年代事 揚武討逆 頒敎文 = 209 楊武原從功臣錄券 = 229 其二六篇正廟朝靖亂十六年後甲年代事 御製表忠綸音 = 237 御製詩 = 243 갱進詩 = 247 表忠義典 = 257 諸臣謝上箋 = 261 御製表忠綸音跋 = 269 其三五篇 祭文 = 285 烏川鄭再河 = 287 烏川鄭櫓 = 291 寧原辛仁敦 = 299 挽章 = 305 李洙 = 307 鄭櫓 = 308 羅以夏 = 311 尹和鼎鎭川縣監 = 312 金璉器 = 314 柳商雨 = 315 宋來碩 = 316 柳浹 = 318 宋濂喆 = 319 劉大雅 = 320 閔德麟 = 324 李榮復 = 325 ★金光龍(=?) = 326 李春復 = 327 權榮 = 329 閔正洙 = 330 郭來復 = 331 朴昌明 = 332 金夏相 = 333 朝希愚 =334 鄭櫓追稿 = 335 鄭棹判書 = 336 李衡 = 338 宋允喆 = 339 宋朝杰 = 340 宋宗賢 = 342 金泳 = 343 李挺崑 = 344 李寅景 = 346 步韻 按致宅 = 347 趙尙華 = 349 趙永晦 = 351 韓汝斗 = 352 旌門序高宗乙酉特命加贈竝閭事 = 355 寅善君鄭文源 = 357 工曹參議族孫★好謙(=광기파) = 364 遺稿 = 371 過素沙壬辰戰場 = 373 禮川遺稿 = 375
81) 김구석(金龜錫) (1684-1774) 자는 聖應, 호는 樂樂窩(낙낙와),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에서 출생했다. 1725년 (영조1)에 진사가 되었으며, 1728년 양치도가 난을 일으키자 창의하여 토적하였는데 오히려 적신의 무고를 입어 어전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이치가 정연하고 언사가 명백하므로 왕이 잘못이 없음을 특?하고 恩顧(은고)를 내렸다. 이조판서가 그를 가리켜 이 사람이 진실로 鄕曲의 사대부라 하고 찬찬하여 기용코자 하였으나 연로함으로 사양하고 고향으로 退休하였다. 죽은 후에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괴산군지, 1990>
82) 김환극(金煥極) ◇ 본관은 安東, 按簾使 金士廉의 14대손으로 증평읍 남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해드리며 겨울에는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들어가 따뜻하게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의복을 입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병환으로 눕게 되자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증세를 파악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다.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하루도 빠짐없이 얼음물로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 드렸으나 급기야 상을 당하니 지극히 애통해하였다. 3년간 시묘하였는데 죽은 후에 嘉善大夫 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 <괴산군지, 1990> ◇ 김환극(金煥極)의 효행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서 출생한 김환극은 본관이 안동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항상 기쁘게 해드리며 겨울에는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들어가 따뜻하게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의복을 입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는 등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더니 부모님께서 병환으로 눕게되자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증세를 파악하고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으나 별로 효험이 없자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하루도 빠짐없이 얼음으로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드렸으나 급기야 상을 당하니 지극히 애통하였다. 장례후 3년간 시묘하였는데 사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의 증직을 받았다.<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 김환극부부 효비각 (金煥極夫婦 孝碑閣) ◇ --소재지 : 증평읍 용강3리 (용문리) -규모 : 정면 1칸, 측면 1칸 -건립시기 : 1926년 1972년 증평읍 남하1리 솔모루 마을에 효심이 지극한 김환극 (안동김씨)과 그의 처 광산김씨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비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崔燦翊)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李吉遠)이 썼다.<증평의 문화재, 1999> ◇ 김환극효비각은 1972년 증평읍 남하리 솔모루 마을에 효심이 지극한 김환극과 그의 처 광산김씨를 기리어 효비각을 세웠는데, 건물은 정면1칸 측면1칸 맛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이 썼다. 안동김공휘환극 유인광산김씨효비 ---(생략)--- <괴산군지, 1990>
83) 김의로(金義路) (1764-1848) ◇ 자는 正甫(정보), 본관은 안동으로 고려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14세손이며 효자 김환극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계모를 섬김에 있어 친모나 조금도 다름없이 효성으로 받드니 계모 또한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극진하였으며 예를 벗어남이 없었고 자녀들을 거느림에 있어서도 항상 자기 스스로가 먼저 모범을 보여 성실하고 법도있는 가풍을 이룩하였다. 향토 사림이 여러번 그의 특행을 증천하였고, 1887년 (고종29)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그의 사당과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고, 묘 옆에는 신도비가 있다. <괴산군지, 1990> ◇ 자는 正甫(정보), 본관은 안동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지극하며 학문을 좋아해서 문장이 높고 행실이 바르고 높을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계모를 섬김에 친 어머님과 다름없이 효성으로 받드니 계모 또한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였다. 그러다가 아버지상을 당하여 예에 따라 극진히 장례를 모신후 계모께서 돌아가시게 되자 얼굴색이 변하도록 슬퍼하면서 3년간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살며 애통함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자녀들의 교육은 忠 孝 列을 근본으로 자기 스스로가 먼저 모범을 보여 순박하고 참되며 범도있는 가풍을 이룩해서 장자도 효자, 딸도 효녀로 남양홍씨 가문에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바로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 열녀가 되었다. 이렇게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어 효자 열녀가 나오므로 지방의 선비들이 그의 행적을 추천하니 나라에서는 1887년에 증직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를 제수받았으며,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고, 묘 옆에 신도비가 있다.<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84) 김호구(金好九) ◇ 본관은 安東, 按簾使 金士廉의 17대손으로 부모를 봉양함에 지성이 극진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과거시험을 보러가던중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데 잡초속 팻말에 「藥劑」라 써 붙여 있으므로 행여나 하고 뜯어가지고 돌아와 시탕하여 드리니 차도가 있었다. 또 다시 병이 위증하여 생선을 해드리고자 연못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는데 홀연히 한 마리의 뱀이 무엇을 물고 물속에서 나와 그가 앉은 자리 위에 놓고 가므로 괴이히 여겨 그 물건을 시탕해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노환으로, 병이 위중하게 되자 변을 맛보고 단지 주혈하였으나 천수를 다하여 상을 당함에 3년동안 여막살이를 하고 소식하며 머리를 빗지 않았다. <괴산군지, 1990> ◇ 본관은 안동, 증평군 증평읍 죽리에서 태어난 효자이다. 부모님을 봉양함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 저녁으로 밥을 떠넣어 드렸으며 때때로 맛있는 음식을 손수 만들어 드렸다. 한번은 과거시험 볼 날이 박두하여 시험준비를 하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아버지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잡초중에 선뜻 醫劑(의제)라 써 붙인 풀이 있어 뜯어가지고 집에 돌아와 행여나 하고 다려 드렸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그후 얼마지나 또다시 병이 깊게 들었는데 물고기가 좋다하여 연못에 낚시를 담그고 앉아 있으니 갑자기 한 마리의 큰 뱀이 입에 무성를 물고 물위로 올라와 앉은 자리 옆에 놓고 가거늘 이상히 여겨 그 물건을 다려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또다시 몇 년이 지나 노환으로 병이 심하여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증세를 알아보며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으나 늙어서 일어난 병이라 효과가 없이 더욱 병환이 깊어 사경에 이르르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어 드렸으나 수명을 다하여 돌아가심에 3년동안 묘 옆에 묘막을 짓고 외부사람과의 접촉을 금하며 먹을 것 입을 것 심지어는 머리도 빗지 않고 고생을 하면서 애통해 하였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85) 金鳳演(김봉연, 1905.10.8-1993.12.5) 지역사회 봉사자 김봉연, 생활철학 - 숭조,성실,근검,겸양 구한말 국운이 기울던 1905년 증평읍 남하리 (솔모루)에서 출생해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청주농고를 졸업한 후 당시 대홍수로 논밭이 매몰될 때 안동김씨의 문중과 가족을 위해, 또 농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고향에 머물게 됐다고 하는 그는 외국유학을 갈수도 있었고 더불어 더 좋은 관직에서 일할 수 있지만 그는 묵묵히 고향을 지킨 인물로 지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 선생은 매사에 청렴결백하고 책임감이 강한 굳은 의지로 항상 약자를 도우며 생활해 왔고, "숭조,성실,근검,겸양"을 생활철학으로 평생 본을 보이며 살아 왔다. 12살에 결혼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자제들의 말로는 근검 절약해 선고의 뜻을 따르기가 대단히 힘겨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일러주던 일화가 있다. 지방선비가 서울에 가서 벼슬자리를 하나 얻어 보려고 대감집 식객으로 가서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 벼슬자리 하나씩을 마련해 주는데, 이 사람은 벼슬자리를 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주인대감을 찾아가 "저도 벼슬자리 하나만 마련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니 "자네는 감이 되지 못하네. 감이 안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는 수건을 보니 자네 혼자 수건을 다 버려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위하기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훈계했다고 한다. 선생은 일찍이 민주주의를 손수 실천했고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집안에서부터 예의범절을 실천했다. 됨됨이가 된 분을 대하면 우선 마음이 편하다. 마음의 문이 열린다. 주변이 깔끔하다. 노환 중에도 찾아오는 사람에게 예의를 잊지 않던 그 분! 화로에 불을 끄지 않고 성냥 한 개비를 아껴 쓰시던 분이다. 마지막 선생이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숨은 공을 세운 사람을 기록하지 못할 것 같다며 20여 분의 명단을 적어주고 "자네가 내가 할 일을 도와 주어서 고맙다"며 손을 잡아 주시던 일이 마지막이다. 또 손수 전화를 걸어 집안에 있는 미선나무와 능소화를 학교에 갔다 심어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하라던 일, 신문에 간지로 끼워진 광고물의 이면지를 재활용하시던 일들이 바로 선생이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던 모습이었다. 선생은 가정의례편람, 제례국해 등을 엮어 후손들에게 예절과 도덕성을 갖도록 하고, 증평, 도안의 향토사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 한편, 조언을 아끼지 않은 분으로 깊이 기억되기도 한다.
■ 공적비1 엽연초생산조합 구내 조합장 김봉연 송덕비 (1972, 조합원 일동)
■ 공적비2 1995년 4월 16일에는 증평문화원과 증평향토문화연구회 및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아 송산교 옆 소공원에 공적비를 세웠다.
86) 김도연 (金道演) 1998년 도연 賢宗은 문영공 종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도연 현종은 충렬공 23대손 안렴사공 19대손으로서 일찍이 漢學을 수학하고, 지역학교의 기성회장으로서 지역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각종 사회단체, 라이온스 크럽, 鄕校의 典校 등에서 크게 활약하여 봉사한 분이시다. 노인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대한노인회 지회장을 맡는등 사라져 가는 노인에 대한 관심을 사회에 불러 일으키는데 공헌하였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 용강리에 거주하였다. 그의 이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47년 증평고등학교 기성회장, 1955년 증평여자중학교 기성회장, 1962년 증평읍의회 부의장, 1965년 증평라이온스크럽 309지구 부총재, 1985년 청안향교 전교, 1989년 증평단군전 봉찬회장, 1991년 대한노인회 증평지회 부지회장, 1995년 대한노인회 증평지회 지회장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59호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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