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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녀 - 안동김씨 동추공 김종숙 지녀(烈女 安東金氏 同樞公 金宗淑 之女) 동추공 김종숙의 딸이며 문정공 김질의 누이께서는 매우 현숙하게 자라 세조때 목사와 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한 홍의달에게 출가한 이후 헌신적 부도로 홍씨가문을 이끌었으며, 특히 남편인 홍씨와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 홍의달이 자식도 없이 일찍 돌아가자 포천군 내촌면 음현리에 장사 지냈다. 그리하여 그는 한 여종을 데리고 항상 남편 묘를 돌보면서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였다. 그때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으로 결국 땅에 닿은 부위가 썩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하여 곡을 하던 중 하루는 큰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여종은 몹시 두려운 빛으로 이 사실을 알렸으나 그는 죽는 것이 소원인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느냐 하면서 오히려 태연하였다고 한다. 그후 호랑이는 매일 찾아와서 곡이 끝난 다음 새벽에서야 돌아가곤 하였다. 묘곡 3년을 마치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 오던날 호랑이도 집근처까지 따라 왔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뒤 나라에서 그녀의 절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열녀 정문을 내렸으며, 1476년(성종7년) 9월에 교(敎)를 받들어 「성화 12년 9월 14일 봉고 고행 성균관 사성 홍의달처 절부 안동김씨 정석」(成化 十二年九月十四日奉敎苦行 成均館 洪義達妻 節婦 安東金氏 旌石)이라는 비문을 화강암에 새겨 절부비를 세웠다. 비석은 포천군 내촌면 내리에 아버지 동추공 김종숙의 묘하 노변에 있으며 지방 문화재이다.
2)효자-영모당 김질(孝子 永慕堂 金質) (1496년 연산 2년∼1555년 명종 10년) 공의 호는 영모당이고 부령공 김종한의 현손이고 좌랑공 김귀덕의 증손자이다. 공은 1496년(연산2년) 1월 15일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찬의공 김복중의 외아들로 출생, 공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바르게 다스리고 총명하여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부모에 효도하고 매사에 예의가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공은 벼슬에 뜻은 없었으나 어머니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하니 어머니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진사시에 급제하고 사마벼슬에 올랐으나 공은 영모당을 따로 지어 부모에 효를 다하기 위하여 과업을 폐하려 하자 어진 선비들이 만류도 하고 또 벼슬에도 천거하였으나 끝까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등창이 발병하자 밤에는 빌고 잇몸으로 빨아 신통한 효험을 얻고,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는 인부를 쓰지 않고 몸소 묘소를 만들고 묽은 죽을 먹고 찬곳에서 시묘살이 하면서 매일 조석으로 성묘하며 곡을 하였다. 공은 제수로 쓸 술과 간장은 종노를 시키지 않고 손수 마련하여 봉제하며 부인을 멀리했다. 조부모의 상을 탈복하고서는 부안군 변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캐어 배에 싣고 와서 선영인 제청산 산소 주변에 치산을 하고는 후손에게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라고 하였다.
하루는 제수에 쓸 간장을 산쥐가 흐려놓아 공은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미물들을 감동시키지 못한 나의 죄라고 통곡하니 그 날밤 산쥐떼가 장독아래에 와서 다 죽었다고 하며, 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생전에 즐기시던 꿩을 구하러 저자에 가려 하였으나, 폭설로 인하여 가지 못해 통곡하니 꿩이 스스로 부엌으로 날아들어 제사에 쓰게 되었으며, 한겨울에 폭설이 내렸으나 묘소주변에 한점의 눈도 내리지 않아 향리 주민과 선비들은 이런 기이한 일은 공의 효감에 감복하여서라고 하며 그의 땅을 일러 제청산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이 연안을 샅샅이 훑어 사당 서원 모두가 잿더미가 되었는데 영모당 현판[효자 진사 김질지려]을 보고 감히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은 항상 예의가 두터운 풍속이라 하여 온갖 바른 행실을 몸에 익히고, 역, 시, 서, 춘추, 예, 탁, 중국의 6경과 소학, 가례, 효경, 경전과 사기 등을 즐겨 탐독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항상지식이나 견문 또는 식견이 변변치 않은 선비가 되지 않으려고 인성과 천리를 논한 유교철학에도 속속들이 파고들어 연구하였으며, 후손들을 위하여 "영모록"과 "육사자책설"의 두권의 책을 지었다. 공은 쌍호(전라도, 충청도)에서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감화되어 예경과 제의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할 것을 강론하고 항상 근면하였으며, 학자인 하서 김인후는 공의 집에 편액하기를 「영모당」이라고 하였고 "차영모당"이란 시 한수가 영모당에 현판되어 있고, 미암 유희춘은 평소 공을 사모하다가 무장현감으로 와서 공과 서로 학문을 즐겼으며, 선정을 베풀고 떠날 때는 많은 백성들이 아쉬워하니 공은 이별의 시 한수를 적었고 유미암은 화답한 시한수가 현재 영모당에 현판되어 있다.
고봉 기대승과 송천 양응정 등의 선비들과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선비들은 공을 일러 영모당 선생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는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충렬 효행을 물어오매 본도 안찰사 졸당 민성휘는 공이 효에 으뜸이라고 천거함에 1546년(명종원년) 명나라 황제가 친필로 [효자 진사 김질 지려 가정 병오 천조 정려]라고 사액하여 현재 봉안각에 현판되어 있고, 정문을 명하고 특별히 포상하였다.
공의 효가 천하에 알려지자 도내 선비와 유림들이 사당 세울 것을 제청하였으며, 향중에서 도암사우를 일으켜 지금까지 유림이 향사하고 있다. 김하서, 유미암, 기고봉은 같은 당세의 제군자들에게 고증을 들어 참판인 포암 윤봉조가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지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재 황윤석이 비문을 찬술하고 해사 김성근이 "영모당" 현판을 썼다. 이글은 영모당 행장, 영가세적, 포암집, 한국사 대사전 등에서 간추린 내용임. 서기 1731년에 편찬한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1998년 4월 23일에 공의 16세손인 김만길이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 찾음, 도암사, 현존물 1.사당 2,사당삼문 3.영모당 4.동재 5.서재, 6.효자 현판 봉안각, 7.현무재 김익철 녹권 봉안각, 8.영모당 솟을대문, 9.홍살문 10.묘정비 11.하마비 12.관리사.
<金質 行狀> : <圃巖集>(윤봉조 저. 1990년 복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002. 7. 24. 항용(제) 사진 제공)
3)충신-충민공 김흠(忠愍公 金欽) 1557년(명종12년)에 감찰공 김침의 5세손이며, 부위공 김승석(金承碩)의 아드님으로 출생. 공은 25세에 진사가 되고 1583년(선조16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후 괴산 현감을 거쳐 청주목사를 지냈다. 재임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명으로 신립 장군의 휘하에서 군자감정으로 감군하면서 충주 싸움에서 항적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민공이다. 그리하여 공의 칼과 의북을 수습하여 황해도 금천에 초혼장을 하였으나 남북분단으로 충청남도 논산군 상월면 산성리에 설단하여 세일 향사하고 있다.
<충민재>(재실.윤만(문). 2002. 6. 자료 조사 제공) <표충비>(윤만(문). 2002. 7. 6. 자료 조사 제공)
4)충신(忠臣)-김숙현(金淑賢) 효소공 김작의 6세손이며 장령공 김식의 증손이고 김담(金談)의 장남. 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순절하였다.
5)효자-괴헌공 김몽상(孝子 槐軒公 金夢相) 공의 호는 괴헌이고 목사공 김적의 9세손이며, 통덕랑공 김필영(金必榮)의 장남, 공께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께서 병환에 계시면 연일 식사를 하지 않아 부모님께서도 그 정성에 못이겨 식사를 하셨고, 부모님이 식사를 드시는 것을 보고 자신도 식사를 들었다고 한다. 부친께서 병환으로 계실 때 평상시 붕어회를 좋아 하시었으나 때가 마침 엄동이라 집앞 작은 연못을 배회하면서 눈물을 훌리며 슬프게 소원하니 붕어 한 마리가 얼음위로 뛰어나와 그를 잡아서 부모님께 공양하였다. 이른봄에 또 고사리를 원하여 산에 올라가 애원하니 고사리가 나타나서 부모님을 공양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생활이 검소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만년에 가계가 풍요하게 되었다. 손자의 돌날 자손들이 좋은 옷과 반찬을 말하자 공께서 눈시울을 적시면서 내부모가 계실때 가난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한번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여 드렸는데 우리가 어찌 입에 맞는 음식 찾으랴 하였다. 또한 공이 청렴공평하여 향리에서 쟁송이 있을 시는 관에 가기 전에 공과 먼저 협의 결정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효성을 가상히 여겨 순조께서 효자정려를 명하시어 현재 강릉시 교동에 세워져 있다.
6)열녀-강릉김씨(烈女 江陵 金氏) 부인은 목사공 김적의 9세손인 괴헌공 김몽상의 부인이다. 부인께서는 효성심과 우애하는 효도가 향도에서 현저하시었다. 부인께서 부군의 병환을 당하여 병환이 점점 위독함에 목욕재계하고 7주야를 울면서 기도하여 가로되, 황천은 나의 정성을 살피소서 하면서 열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부군의 입에 넣어 드리니, 차차 맥이 통하고 회생하여 5개월이나 연명하고 돌아가셨다. 부인께서는 3년간 조석으로 제사를 집례하고 탈상 후에도 스스로 죄인이라 자책하여 30여년간을 두문불출하다가 득병하니 회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아들 3형제가 울면서 약을 잡수실 것을 애원하였으나 오히려 꾸짖으면서, 너희들 부친께서 돌아가실 때 같이 죽지 못하였음은 오직 너희들 때문이었는데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어서 아프거늘 어찌 약을 먹고 살길 바라겠느냐 하시며 끝내 약을 잡수시지 않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에 나라에서는 1807년(순조7년) 정려를 세워 열행을 현양하라 명하였다.
7)효자-취은공 김석진(孝子 醉隱公 金錫晋) 공의 호는 취은이고 괴헌공 김몽상의 장남. 공은 성품이 유사하고 총명하고 이어오는 가훈에 따라 효성이 지극하고 부친이 득병하니 약으로서 인삼과 쑥이 있어야 함으로서 옷을 벗지 않으시고 뜬눈으로 밤을 세우면서 산에 올라 하늘에 기도하니, 신명이 감명하여 이튿날 아침에 삼팔이 행상이 쁹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어젯밤에 어느 여점에서 묵었는데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모촌 김씨 집에서 인삼과 복령을 구하니 급히 가보라 하며 가는 길까지 가르쳐주는 고로 이곳에 쁹아 왔다고 하여 곧 삼과 복령을 구하여 부친께 공양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공의 효성이 지극한 소치라고 하였다. 부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은 두건과 요질을 벗지 않고 죽으로서 소식하고 모든 예의를 다하였다. 부모님의 병환으로 20여년간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간병에 몰두하였다. 부모님상을 당하여도 애통한 마음은 언제나 같았고 상이 끝난 후에도 성묘를 하기 소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서 알고 순조7년에 정려를 명하였다.
8)열녀-강릉최씨(烈女 江陵 崔氏) 부인은 목사공 김적의 10세손 취은공 김석진의 부인이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며 남편을 위한 열행이 갸륵하여 어느해 부군이 득병하여 위증하니 성의를 다해 치료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다. 이에 부인께서 바깥마당에 단을 모아 눈물로 하늘에 기도하기를 남달리 뛰어난 효자를 살려줄 것을 애원하고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부군의 입에 넣으니 병세가 차도있어 수개월을 연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서 알고 순조께서 1807년에 정려를 세워 열행을 영세에 전하도록 명하였다.
9)효자-성재공 김구(孝子 省齋公 金坵) 공의 호는 성재이고 목사공 11세손으로 취은공 김석진의 아드님. 공께서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함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어린 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에 죽을 먹고 슬피통곡함으로 선고인 취은공께서 등을 어르만지며 가로되 상중에 죽을 먹는 것은 가규도 금하지 않았다. 후일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3년간 슬퍼하고 오히려 초상때와 같은 예의를 갖추었다. 단장을 다하지 못하여 지내오다가 좋은 명당자리를 구산하여 비로소 안장하였다. 공께서 병고로 6년 동안에 위험한 고비를 넘기던 중 꿈에 노인과 선고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좋은 처방이 있으니 첫 번째는 잉어이고 두 번째는 소고기로 보하고 세 번째는 복어로 너의 목숨을 구하겠노라 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옷이 땀에 젖어 옷을 벗으니 신명이 느끼는 바라 다섯 사람이 또한 효행으로서 어버이를 모시듯이 깨어보니, 옷에 땀이 차있고 옷을 벗으니 신명이 느끼는 바라 공의 동생 5인이 또한 효행으로써 어버이를 모시듯이 형을 모시니 매사가 옳게 진행되어 집안 화목하더라. 공이 돌아가며 조부 괴헌공 김몽상, 조비 강릉김씨, 고위 취은공 김석진, 비위 강릉 최씨와 공에 이르기까지 3세에 걸친 효와 열행이 지극함으로 1807년(순조7년) 나라에서 3세3효2열의 정려를 내려 강릉시 교동 성곡에 열효각을 세우다.
10)충신-증판서공 김유선(忠臣, 贈判書公 金有宣) 공은 감찰공의 11세손이며 통덕랑공 김덕문 장남, 천성이 강직하고 청렴 결백하고 불의에 굴할줄 모르는 사인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수학하여 사림에서 명망이 높으시더니 유생의 신분으로 1760년(영조36년)에 있었던 사도세자사건에 영조대왕께서 행하심이 윤리에 옳치 못하다고 1762년(영38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이해 영남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당년 6월 18일에 그곳에서 순절하였다. 그후 정조가 즉위하자 공의 충의에 갸륵하게 여겨 장예원 주사 엄주원을 보내 치제한바 있다.
11)효자-삼성공 김훤(孝子 三省公 金糶) 공의 호는 삼성이고 효소공 13세손이며 김숭주의 차남, 청주 궁현에서 출생, 공은 천성이 온후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교훈에 어긋하는 일이 없고 효성이 지극하여 하루의 식사를 부모님이 먼저 드신 후에야 하였다 한다. 이웃사람들은 반드시 대효를 이룰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급기야 장성함에 부모님의 구미에 맞는 식찬으로 성의를 다해 공양하였다 한다. 어느해 모친께서 병환이 나셔서 눕게 되시자 병간호에 정성을 다했으나 병세는 차도가 없이 위독하여 백약이 무효함을 아시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모친의 입에 넘겨드렸더니 마침내 회생하였으나 그후 만 하루만에 돌아가시니 슬퍼함이 보는 이 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3년상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묘를 매일 3년 동안 빠짐없이 하셨다. 지방사림에서 효행을 조정에 추천하여 순조 그해 효자 정려를 명하였고 지방사림들이 1958년 10월에 효자비를 세웠다.
12)5대 효자-김진태(五代 孝子 金鎭泰) 공은 대경공 김영의 14세손이며 5대째 효자 효부로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한 집안이다. 효자 김진태 공은 효를 몸소 행하여 효의 모범이 된 분이시다. 공의 고조모이신 경주정씨께서 효부로 나라에서 정려문을 하사하였고 증조모이신 전의 이씨께서도 효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조모이신 양조 함씨도 세상이 선망한 효부이시다. 아버지이신 김장년은 영조43년(1767년)에 나셨으니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도광 11년(1831년) 8월 예조입안에 보면 김장년은 아버지의 병이 깊어 여러해 고생하시니 약을 다려 주야로 복용케 하고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흘려 넣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향중에서 장례를 모시고 조석 성묘 통곡하니 효자가 분명하고, 어머니가 발병하시자 항상 편안하시게 간호하여 주민과 선비들의 칭송이 자자하여 「효자정문」을 1830년(순조30년) 5월4일 하사하였다. 공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서 발병하자 어머니의 대변을 달고 쓴맛을 보고 혼수 상태가 되니 손가락을 잘라 흘러 넣으니 하늘이 효감하여 회생하였다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조석으로 성묘하였다고 한다. 그후 대홍수로 전답이 산사태로 무너지고 주위 집들이 전파되는데 이집만은 대대로 내려오는 효성이 하늘이 감동하여 보호하였다는 향리주민들의 소리다. 포천의 선비 이경한외 황종학 이석재가 1872년6월에 통문을 돌리고 그해 11월에 이경한 외 71명이 연명으로 성주에게 효행표창 단자를 올렸다. 그 이듬해 4월에 이경한외 105명의 연명으로 순찰사에게 단자를 다시 올렸다. 나라에서 단자에 의하여 1887년(고종 24년) 4월 3일에 「효자정려」를 내렸다. 공의 5세손인 김재훈(金在勳)이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정리에 살고 있으며, 옛날에 대대로 내려온 정려는 전란으로 없어지고 정려문, 효자표창, 단자, 순찰사의 동지문, 상언 등을 고히 간직하고 있다.
13)효자 증교관공 김성추·효부 김해김씨(孝子 贈 敎官公 金成秋·金海金氏) 공은 문정공의 14대손으로 통정랑공 김계묵의 아들이고 김희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4살 때 숙부인 김계묵께서 부인 안동권씨를 남겨두고 17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시자 숙부님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모께서 18세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삶의 보람을 어린 아들의 성장에서 찾으려고 행동하고 관심을 기울여 엄한 교육을 시켜서 의젓한 선비의 자질을 갖추도록 키웠다. 공께서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지혜가 있어 어머니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면서 가장으로써 도리를 닦아 성년이 되어서 현모양처의 자질을 갖춘 김해김씨를 배필로 맞아 들였다.
두 부부는 효심이 지극하여 홀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언행에 더욱 조심을 하면서 외롭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비록 가난했지만 나들이를 하고 오면 반드시 보고들은 사실을 일일이 고해 올렸고 좋아하시는 반찬과 과일을 계절따라 수시로 사다가 대접해 드리는 등 항시 마음을 편안하게 극진히 모셨으며, 부부 화합하여 열심히 일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공의 나이 37세때 첫아들 규찬을 얻게 되니 집안에 경사였다. 이듬해 공께서 우연히 병을 얻어 병석에 눕게 되자 부인이 백방으로 좋다는 약을 구하여 지성을 다해서 간호를 해드렸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부인의 정성도 무심한채 세상을 떠나시니 고부의 대성 통곡하는 모습은 보는 이마다 슬프게 하였다 한다. 부인은 노시모님이 마음 상할까 슬픔을 억누르고 아들을 잃고 시름에 잠겨 있는 노시모님을 위해 좋아하시는 고기반찬 등을 제때에 식사를 하시도록 봉양해 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어린 아들 양육에도 각별한 관심을 써서 성장해서 아비없는 호로자식이란 악담을 듣지 않도록 자애로움에서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이러던 중 시모님께서 고령으로 바깥출입이 부자유스럽게 되자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수시로 갈아입히는 등 오히려 부군의 생전보다 더욱 극진히 모셨다. 이와 같은 두 부부의 효행을 본받아 후일에 아들부부 역시 큰효를 행하였다. 이러한 두분의 효행이 인근 향리에 알려져 출천의 효자효부라고 여러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전해져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고종께서 이 부부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1905년(고종광무9년)에 효자효부의 정려문을 내리고 공께서 증 종사랑 중학교 교관 벼슬을 내려서 후세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14)효자-증 교관공 김규찬·효부 전주최씨(孝子 贈 敎官公 金奎贊 孝婦 全州 崔氏) 공은 문정공 김질의 16세손이며 교관공 김성추의 아들이고 부인은 효부, 전주최씨는 자부이다. 공은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엄숙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총명하시며 남달리 효심이 많았다. 어머니의 효행을 지켜보고 부친께서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말을 들어서 깨닫고 시전 육아편을 읽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깨닫고 되새기며 스스로 채칙을 하면서 홀어머니를 지성껏 모셨다. 성년이 되어 인자하고 부덕을 겸비한 한 살 아래인 전주최씨와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화합하여 양친께서 행했던 효성을 본받아 홀어머니를 외롭지 않게 홀어머니의 방에 부인과 같이 들어가 잠자리를 보살피며 편안히 주무세요 인사를 하고 새벽이 되면 세수물을 떠올린 후 문안 인사를 공손히 하기를 매일 잊지 않으셨다.
가난했지만 구미에 맞는 반찬으로 봉양해 드렸다. 부인 최씨는 청춘에 홀로 되시어 윗대 어른들을 모시고 생활을 해와서 성품이 변해 괄괄하고 잔말이 많아 졌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어려운 살림에 종사하였다. 1년 내내 여름철에도 하루 삼시 밥을 지어 공양하였다. 모친께서 62세때 타계하시니 공은 1년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않고 비통해 하였고, 청춘에 홀로 되시어 어린 자식을 키운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명복을 빌었다. 이처럼 김성추와 김규찬 부자와 두 부부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지방사림에서 2세에 걸친 이분들의 효행을 높이 찬양하고 2세 효자부부 발천문을 조정에 주선하여 나라에서 이들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1905년(고종광무9년)에 효자효부의 정려문을 내리고 공의 부자에게는 종사랑 중학교 교관 벼슬의 교지를 내려 2세 2효자 2효부의 정려문이 현재 전남 곡성군 곡성읍 죽동리 242의 2번지에 세워져 있고 이곳에 안동김씨 2세4효 정려비를 세웠다.
15)열녀-고령신씨(烈女 高靈 申氏) 효소공 김작 16세손이며 김용규의 장자 김언명의 부인이다. 신여사는 고령신씨의 가문에서 안동김씨 문중으로 출가후 어느해 우연히 부군이 득병하여 수년간 병고로 고생을 할 때 정성과 명의를 찾아다니며 좋은 약을 구해다 드려도 성심에 비하여 차도가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근처의 대천(홍천강)에서 백일동안을 정성껏 기도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차도가 없으매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유서를 남기고 부군의 명을 대신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후 남편은 병세가 스스로 차도있어 후일에 완쾌되어 재혼까지 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한다. 조정에서 알게 되어 1854년(철종5년)에 열녀문을 하사하였다.
16)효부-무안 박복식 여사(孝婦 茂安 朴福植 女史) 박복식 여사는 1936년 11월 14일 선비의 집안 박영선의 따님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였고 품행이 단정하여 부모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법이 없는 훌륭한 가문에서 부도를 닦다가 22세때 문정공의 18세손인 김흥회씨에게 출가해왔다. 집요한 가정살림에 노시부모님을 모시는데 예의범절과 정성이 남과 달랐다. 매사에 있어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행하고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이 날 있었던 일을 일일이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분수에 맞도록 처리하였으며, 특히 집안의 인화단결에 성심을 다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이웃간 대소사간에 공손한 인사 범절, 부드러운 언행, 사리에 맞는 협동심을 솔선하여 주부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이웃 향리의 어르신들로부터 착한 효부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전해지자 1984년 5월에 수원시장으로부터 경로효행과 선행을 높이 치하하여 표창하고 효부상을 주어 타인의 귀감이 되도록 하다.
17)절효부-한양조씨(節孝婦 漢陽 趙氏) 부인은 효소공 18세손인 김진회의 재취부인이다. 한양조씨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나 덕망이 높으신 부모님의 슬하에서 부모에 대한 훌륭한 교훈을 받고 안동김씨 집안에 출가해왔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인자하고 총명한 여사는 효성심이 지극하여 90세가 되는 노시모님을 친모처럼 모시듯이 매일 구미에 맞는 식찬으로 공양해 드렸고, 항시 옆에서 일일이 시중을 들어 불편함이없도록 하였으며, 동네에서 있었던 미담과 재미있는 소설 등을 읽어드리고 효도를 하여 향리 어른들께서 대효부라 칭찬했다. 어느해 노시모께서 득병하여 눕게 되자 성심을 다해서 간호를 하였으나 무심하게도 별세하시자 애통해 하는 것을 보고 눈물짓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나이 30세가 되던 6.25전란때 불행하게도 부군이 사망하니 애석하고 비통한 심정을 하늘이나 알까? 당하지 않으면 아는 사람은 헤아리지 못할 일이다. 여사는 소생하나 없이 청춘과부의 몸이 되어 전실소생 아들과 어린 질녀들을 양육할 입장인지라 친자식같이 근검절약하고 소박한 살림으로 아들은 대학을, 질녀는 여고를 졸업시키고, 60세가 넘도록 고생을 낙으로 여기었고, 이웃사람들이 공을 치하하였으나 초지일관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라 겸손해했다고 한다. 출천의 효부요 절부로서 이러한 사실이 청원군에서 널리 알려지자 방방곡곡마다 칭송이 자자하여 이에 청주 향교(전교 이형복)가 1981년 2월에 표창하였다.
18) 현감공 김근 선조 묘지명 소개 (2005. 2. 18. 주회(안) 제공) 출전 : 東州先生文集 卷之八 誌銘 抱川縣監金公墓誌銘 幷序
君子旣?行修飭有立矣。不幸?於下僚。死而子孫弱。無以表見當世。其終泯然已乎。其所與交果賢達名人。其子孫果純明業其家。亦言其人有德。若抱川縣監金公始沒。其孤定平君甫十一歲。屬兵荒事遽。言與行卒闇?不傳。定平君以爲至痛焉。公與栗谷文成公,西厓文忠公,梧里文忠公俱同年契厚。蓋梧里相旣大?。猶眷眷不置。定平君歷臺閣。號長德。子姓且蕃。是足以槪見公平生與?遺云。公祖上洛公方慶逮士衡及?。仍父子入相。傳富平守諱誠童,護軍諱濾。是生刑曹參議諱?沈。寔爲公考。?全義李氏。以嘉靖戊戌生公。諱瑾。字叔溫。少刻志力學。與弟判書公瓚相師友。每擧必居上列。至庭對危得之。竟失不第。久乃拜金吾郞。考蒲爲直長尙方。旣罷。復拜金吾,掌樂直長,內贍主簿。出爲抱川縣。?官淸平。邑無疵?。至壬辰海寇躪畿輔。民咸雉?逃。縣境無一跡。公山藏谷竄。不肯出封界一步。吏胥亦隨公防衛。死不肯相舍。及朝廷替用武吏。公間走江都。官?至舟次。始涕泣乃退。倉卒能得人如此。體察使?公爲屬。委以賑饑民。時流餓顚連。?氣相染汚。觸死盈壑。公手操?粥。 菴廬不懈。遂?疾。以甲午四月。卒洪州逆旅。方兵鋒梗路。無以襄事。土人奉棺材以殮。指善地以葬。後定平君旣壯。始克移兆。從參議公之?。實龍仁光敎山。夫人?唐金氏?。公先後娶。朴氏一女。適姜企。金氏二子。長孝建。卽定平君。生四男。曰鎬。曰鐄。餘幼。二女適金坤粹,李慶?。次忠建。生二男。曰?。曰鋼。三女未行。嗚呼。天道至難知也。赫赫以喪。涓涓以長。若存若亡。其後乃昌。孰謂?爾遺孤能立身成宗。治墓道埋銘辭。追孝於五六十年之後。以爲千萬世不朽計。可謂能子矣。銘曰。
木惟分柯。榮悴異時。一氣同體。迭盛更衰。允矣金公。天倫競爽。季奮其庸。公?以喪。蓄德不曜。受報若戾。季胤中熄。公顯厥世。孝子啓慶。朝組郡?。夙夜承事。??罔缺。彼農力田。有種必穫。爲善或怠。視此幽石。
형태서지 권수제 東州先生集 판심제 東州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肅宗年間刊行 권책 前集 8권, 詩集 24권, 文集 10권, 別集 1권 합 43권 13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1×15.7(㎝)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613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94 저자 성명 이민구(李敏求) 생년 1589년(선조 22) 몰년 1670년(현종 11) 자 子時 호 東州, 觀海 본관 全州
19) 선교랑 김성진 선조님 묘표 (2005. 2. 19. 주회(안) 제공) 출전 : 宋子大全 卷一百九十八 墓表 宣敎郞金公墓表
公諱聲振。字汝遠。姓金氏。其先出自新羅敬順王。麗朝有方慶最大顯。封上洛公。其後至本朝。猶冠冕相承。公高祖麒瑞。別坐。上洛公十世孫也。曾祖濟。祖獻光。皆別提。考工曹正郞恪。?平山申氏。其考縣監季衡也。公生於萬曆丁丑。沒於崇禎癸未。配坡平尹氏。後歿而?焉。忠義衛應瑞女。墓在淸州治西古樂洞。公稟性質實。絶無虛矯。四歲失恃。後遭考喪。?設祭以終三年。雖非禮之正。亦可見其誠篤矣。常力田自給。無求於世。又睦於宗族。鄕黨稱之。子璹。進士。次?,玖,琦。四女。適宋時熹,權大胄,監役宋奎河,判校尹塏。余與公連姻通家。今?,玖?余書于墓石云。
형태서지 권수제 宋子大全 판심제 宋子大全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787年刊 권책 卷首, 目錄 2권, 原集 215권, 附錄 19권 합 102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2.5×17.8(㎝)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3542 총간집수
저자 성명 송시열(宋時烈) 생년 1607년(선조 40) 몰년 1689년(숙종 15) 자 英甫 호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 橋山老父 본관 恩津 시호 文正 아명 聖賚
20) 김욱 선조님 묘지 소개 (2005. 2. 19. 주회(안) 제공) 출전 : 孤山先生文集卷之七 墓誌銘 安東金公墓誌
公諱稶。字茂叔。安東人。高麗僉議中贊忠烈公方慶 之後。有諱士衡。佐我太祖,康獻大王成開國之勳。名在丹書。官至左政丞。諡翼元。曾祖諱就礪。贈某官。祖諱仁達。有雋才早世。士林惜之。贈某官。考諱宗文。通德郞行掌隷院司議。?卽我王父通訓大夫軍資監主簿諱珍之第二女。公生于皇明萬曆丙辰六月十五日。爲人沈靜。無疾言遽色。口不言人是非。少時文筆俱優。亦不以技藝自多。嘗一參鄕解。更不事進取之業。足跡不出於鄕邦。事親極其誠謹。未明而起。終日侍側。人不見其有惰慢之容。雖號爲法家大族。至於庭?之禮。鮮有能及公者。噫。以公資稟之美。加之以學問之力。使之爲有體有用之全材。則人之論公者。豈但許之以善人而已哉。壬申五月十八日。考終于醴泉郡之高坪里第。享年七十七。公之室孺人順天金氏。縣監?之女。順德淑行。克配君子。先公幾年某甲某月某日歿。生二男四女。男長海鵬。次海容。女長適光州金世煥。次適聞韶金學時。次適全州柳孟輝。次適醴泉權。側室男五人。海望,海英,海潤,海昌,海雄。海鵬娶?山金氏。某官時卨之女。生二男。長用秋。次用成。海容娶聞韶金氏。生員邦烈之女。生二男六女。男長用錫。餘幼。金世煥生二男二女。男長致祥。次致慶。女長適鄭之?。季幼。金學時生三男一女。男長世?。餘幼。柳孟輝生三男三女。女長適李德身。餘幼。權生一男二女。皆幼。內外孫曾男女如干人。公歿之年九月二十四日庚午。葬于郡之東雷澤村巽向之原。距家五里而近。孺人墓。在安東府?山縣之西。
형태서지 권수제 孤山先生文集 판심제 孤山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775年刊 권책 原集 8권, 附錄 2권 합 5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0.9×16.4(㎝) 어미 上雜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도서번호 ?松D1-A1675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26
저자 성명 이유장(李惟樟) 생년 1625년(인조 3) 몰년 1701년(숙종 27) 자 夏卿 호 孤山, 磨崖, 懶庵, 芋園, 芋圃, 四益堂 본관 全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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