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원공파(사형)

본문

p02.png 10.익원공 김사형 후예 인물사

   1)밀직사사공 김승(密直司使公 金陞) (1366년 고려공민왕 15년∼1436년 조선 세종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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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직사사공 김승 설단묘비(경기. 양평. 양서. 목왕리)

 

공은 익원공 김사형의 둘째 아들이다. 벼슬은 음사로 출사하여 1393년(태조2년) 사헌부 중승에 제수된 후 승정원 우부승지로서 1395년 3월 조선 개국 원종 공신에 책훈되고 1398년 1월 중추원사 동지밀직사사겸 도평의사에 이르렀으며, 손자 문정공 김질의 훈귀(勳貴)로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 부인은 정부인 광산 김씨로 보리공신 광성군 김정의 따님이고, 공의 묘소는 장단군 판문리였으나 실전. 부인의 묘소는 양주군 팔묘리였으나 실전하여 1770년(영조46년)에 양주군 진접읍 팔야리 손자인 효소공 김작의 묘소의 상단에 설단하고 세일 향사하다가 1985년에 선고인 익원공 묘하에 설단하였다.

 

 2)호군공 김종준(護軍公 金宗浚) (1390년 고려공양왕 2년∼1465년 조선 세조 11년)

공은 밀직사사공의 장자로 출생. 벼슬은 오위호군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다.

 

 3)참의공 김황(參議公 金璜) (1419년 세종 1년∼1489년 성종 20년)

참판공 김종준의 장자로 출생. 벼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원봉조청행이조참의에 이르다

 

 4)참판공 김계지(參判公 金繼智) (1444년 세종 26년∼1501년 연산 7년)

참의공 김황의 장남, 벼슬은 진원 현감, 증 이조참판이었다. (익원공 김사형종손 신미파보 1권 34쪽))

 

 5)부령공 김종한(部令公 金宗漢) (1393년 조선 태조 2년∼1469년 예종 1년)

공은 밀직사사공 김승의 차남으로 출생,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부령(部令)에 이르고 묘소는 익원공 묘하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전북 고창군 공음면 장곡리 선영에 설단하고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6)좌랑공 김귀덕(佐郞公 金貴德) (1420년 세종 2년∼1477년 성종 8년)

공의 초명은 유(瑜)이고 부령공 김종한의 장자로 출생, 벼슬은 음사로 출사하여 공조좌랑에 이르다.

 

7)현무재 김익철(賢武齋 金益哲)

공은 1575년(선조8년) 전북 고창군 공음에서 좌랑공 김귀덕의 7세손인 김상(金常)의 3남으로 출생. 공은 1592년(선조2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주부로서 임진왜란 당시 선조께서 의주로 파천할때 80리길을 업어 뫼신 공으로 원종일등과 선무호종공신에 책훈되고 녹권이 하사되어 지금까지 도암사 내 녹권봉안각에 봉안되어 있다. 공은 1638년(인조16년) 9월 13일에 향수 63세로 타계하여 도암사에 배향되었다.

 

8)전첨공 김종윤(典籤公 金宗潤) (1396년 태조 5년∼1464년 세조 10년)

공은 밀직사사공 김승의 3남으로 출생, 벼슬은 종친부 전첨에 이르다. 묘소는 포천에서 실전하여 충북 괴산군에 설단하여 세향을 지내고 있다.

 

9)정랑공 김일성(正郞公 金日省) (1422년 세종 4년∼1484년 성종 15년)

공은 감찰공 김침의 8세손인 김적(金績)의 장자로 출생. 공은 1666년(현종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1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형조정랑과 괴산군수를 역임하였고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문장력이 뛰어나 노동삼걸(魯東三傑)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10)감찰공 김침(監察公 金琛) (1624년 인조 20년∼1715년 숙종 41년)

공은 전첨공 김종윤의 장남, 벼슬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다.

 

11)부정공 김인(副正公 金璘) (1425년 세종 7년∼1485년 성종 16년)

공은 전첨공 김종윤의 차남, 벼슬은 부정에 이르다.

 

12)대경공 김영(大卿公 金瑛) (1429년 세종 11년∼1492년 성종 23년)

전첨공 김종윤의 3남, 벼슬은 대경에 이르다.

   

13)동추공 김종숙(同樞公 金宗淑) (1400년 정종 2년∼1471년 성종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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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2008. 7. 15. 항용(제) 제공)

 

공은 밀직사사공 김승의 제4자로 출생, 벼슬은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474년(성종5년) 3월에 정헌대부 의정부 찬성을 지낸 후 아드님인 좌의정 문정공 김질의 훈로로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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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추공 김종숙 지묘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내리. 2003. 11. 2. 태서(익) 제공)

 

  <풍수지리협회  탐방대회 사진> (2008. 9. 29. 좌회(익) 제공)

    *학두비천형(鶴頭飛天形)의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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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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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후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 上洛府院君 金 石質의 부친)의 졸기(卒記)> (2003. 10. 8. 윤만(문) 제공)

≪출전 : 성종실록 7권 성종 원년 9월13일(무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이 졸(卒)하였다.

--부음을 듣고 명하여 쌀·콩 아울러 30석, 종이 1백권, 석회(石灰) 40석, 송지(松脂) 3두, 유둔(油芚) 3장을 내려 주었다.

--김종숙은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石質)의 아버지인데, 김질 때문에 특별히 내려 주는 것이었다.

 

  <동추공 만장> (2006. 1. 26. 영환(문) 제공)

    출전 : 점필재집 시집 제6권   

김 중추 종숙에 대한 만장[金中樞宗淑挽章]상락군(上洛君)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짓다.

 

겸손하고 공손하며 또 근신하여 / 謙恭仍謹愼

세상살이가 절로 화락하였네 / 處世自怡然

지절은 옛 어진이를 본받았고 / 志節追前烈

가업은 어진 아들에게 맡겼는데 / 箕裘付後賢

삼괴의 상서(주1)가 이미 응했으니 / 三槐祥已應

만석군의 미담(주2)을 전할 만하구나 / 萬石美堪傳

즐거운 일은 청상(주3)으로 다하였고 / 樂事窮淸賞

흐르는 세월은 노년에 맡기었네 / 流光任暮年

붉은 비단에 막 성을 기록했는데(주4)/ 紅羅 재(겨우재)記姓

갑자기 황학 타고 신선이 되었도다(주5)/ 黃鶴忽遊仙

동쪽 교외의 길에 멍하니 섰노니 / 소(心+召)장(心+長)東郊道

슬픈 바람이 밤 샘에 떨어지누나 / 酸風落夜泉

 

 <주>

주1 삼괴의 상서 : 재상이 나올 조짐을 뜻함. 삼괴는 세 그루의 괴나무인데, 주(周) 나라 때 외조(外朝)에 이 나무 세 그루를 심어놓고 삼공(三公)이 이 나무를 향해 앉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주2 만석군의 미담 : 한(漢) 나라 때 석분(石奮)이 그의 아들인 건(建)·갑(甲)·을(乙)·경(慶) 등 4형제와 함께 모두 공경하고 근신하기로 명망이 높았고, 또 아들 4형제와 함께 모두 벼슬이 이천 석(二千石)에 이르렀으므로, 그를 만석군이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三》

주3 청상 : 여기서는 특히 경치 좋은 산수(山水)를 유람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4 붉은 비단에 막 성을 기록했는데 : 무관(武官)이 되었음을 뜻함. 송(宋) 나라 때 악비(岳飛)가 장군이 되어 역적 이성(李成)을 토벌할 적에 붉은 비단으로 기치(旗幟)를 삼고 그 위에다 자기의 성인 악(岳) 자를 수놓아가지고 출전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三百六十五》

주5 황학 타고 신선이 되었도다 : 사람의 죽음을 뜻함. 촉(蜀) 나라 비문위(費文褘)가 신선이 되어 황학을 타고 황학산에서 쉬어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점필재:김종직1431(세종 13)∼1492(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밀양출신.

 

14)문정공 김질(文靖公 金石質) (1422년 세종 4년∼1478년 성종 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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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2008. 7. 15. 항용(제) 제공)

 

공의 호는 쌍곡(雙谷) 동추공 김종숙의 장남, 1450년 세종 32년 식년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서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 따님이다.

 

후일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장인인 정찬손의 강압을 받아 그의 사실을 고변하여 훼절하기도 하였으나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좌익공신 3등에 책훈되고 판군기감사로 승진되었다. 그후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1459년에 병조참판이 되면서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다음에 세조의 두차례에 걸친 서도순행을 위한 평안도 황해도 순찰사가 되었으며 1461년에 평안도, 안동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1463년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병조와 형조의 판서를 거쳐 1466년(세조12년)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되었으며 다음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9년(예종1년)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471년에 상(王)을 잘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 2등과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74년에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어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은 세조의 병제 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사에도 참여하였다. 1465년에는 병전을 교열하였으며 1470년에는 이전(吏典)의 교정도 맡았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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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사진(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음현리. 2003. 11. 2. 태서(익) 사진 제공)

 

* <문정공의 매씨의 열녀비 사진> (2003. 11. 2. 태서(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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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길안군 김의동(吉安君 金義童)

공은 문정공 김질의 장남, 벼슬은 음사로 출사하여 여주목사를 지냈으며, 습봉은 길안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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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안군 김의동 지묘(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음현리. 2003. 11. 2. 태서(익) 제공)

 

16)대사헌공 김성동(大司憲公 金誠童) (1452년 문종 2년∼1495년 연산 1년)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명보(明甫). 아버지는 좌의정 질(石質)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적성현령을 지내던 중 그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부평부사에 임명되어 직무를 잘 처리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칭송받았다.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취임한 지 2년이 되기도 전에 선정이 조정에 보고되어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공무에 성실하고 인품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모두 재상감이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곧 몰하였다. 박처륜(朴處綸)과 함께 성종대에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관리로 지칭되었다.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용齋叢話. 〈李迎春〉

 

▣ 낙포세적 (2002, 안동김씨 익원공파종회 간. p14 ) 기록내용

대사헌공  김성동 (1452년 문종2년 ∼ 1495년 연산1년)

공은 문정공 김질의 4남. 적성현령때인 1492년(성종23년)에 식년시에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부평부사에 임명되었다. 부임한지 2년만에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44세로 타계하니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직곳리 : 대사헌공  김성동 지묘, 신도비, 재실

 

 <묘소 및 재실 사진 소개> (  1차-2002. 12. 27.   2차-2003. 10. 25. 태서(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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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직곳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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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공 김성동 신도비(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17)효소공 김작(孝昭公 金石昔) (1425년 세종 7년∼1498년 연산 4년)

 

형조판서 김작이 졸하니 철조하고 부의와 제사를 내리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김작은 자가 위경이며, 안동인으로 정승 김사형의 증손이다. 1447년 정통 정묘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4년 경태 갑술년에 문음으로 선공 녹사에 제배되었다가 전농 직장으로 옮겼다. 1458년 천순 무인년에 통례문 봉례랑에 승직되고, 얼마 안되어 감찰에 옮겼다가 공조 정랑으로 전직되었다. 임오년에는 종부 소윤으로 승직되었다가 사헌 장령으로 전직되었다. 1465년 성화 을유년에는 대호군으로 옮겼다가 춘천 부사가 되어 나갔으며, 무자년에 군기감 정에 제배되었다. 정유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통정 대부 병조 참지에 승직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로 옮겼으며, 여러번 옮겨 도승지에 이르렀다. 무술년에는 그일로서 파직되었다가, 경자년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며, 이조 참의·형조 참의를 역임하다가, 임인년에 가선 대부 예조 참판으로 승직되었다. 계묘년에는 경기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가, 갑진년에 가정 대부 병조 참판으로 승직되었는데, 얼마 안되어 수지중추부사로 옮겼다. 정미년에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특별히 자헌 대부 형조 판서에 승직되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향년 62세이다. 효소라고 시호하니, 자혜로우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을 효라 하고, 용의가 공순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라 한다. 김작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선비묘가 있는 포천의 쌍곡에 경당유지(慶堂遺趾)가 있었다. 한양과의 거리가 가히 70리나 되는데도 공무의 여가에 문득 가서 정성하였다. 가신과 명절에는 매양 형제들과 더불어 술잔을 받들어 축수를 하였다.

 

18)장령공 김식(掌令公 金湜)

공의 호는 야은(野隱), 효소공 김작의 손자이며 통례원 찬의공 김맹함의 3남, 공은 1506(중종1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동생인 김엄(金淹), 김형(金炯)이 무과에 급제한지 2년후의 일로 6형제중 세분이나 급제하는 영광된 일이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처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당시에 세도 간신배들이 정사를 문란케 함으로 이들의 그릇됨을 왕에게 진소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공주군 탄천면 송학리 학동으로 낙향하였다. 학동에서 은거하던 중 어느해 가을에 당숙인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에게서 전라감사 부임 행차길에 그곳을 찾아 다시 출사토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공은 묵묵히 면화(綿花)대를 꺽어들고 낙향한 연유가 면화(免禍)에 있음을 밝히니 공의 굳은 의지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후 공의 5세손인 사과공 김이정 때에 부여읍 유촌 석탄으로 이거한 이래 왕진(旺津)들을 터전삼아 수많은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학동 유허지에는 유허비가 건립되었다.

 

19)목사공 김적(牧使公 金石責) (1428년 세종 10년∼1499년 연산 5년)

공은 동추공 김종숙의 3남, 벼슬은 음사로 출사하여 경기도 여주 목사를 역임하였고 보조공신에 책훈되고 후일에 장자인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의 훈로로 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영가부원군에 봉해졌다.

    

20)문경공 만보당 김수동(文敬公 晩保堂 金壽童) (1457년 세조 3년∼1512년 중종 7년)

공의 호는 만보당이며 목사공 김적의 장남, 공은 시사에 밝아 1474년(성종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3년후 식년시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문과 정자, 주서 그리고 의정부 사인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에 전임되고 전한 직제학, 부제학을 역임하고 1497년(연산3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받고 전라도 관찰사와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4권을 가지고 왔다.

 

그뒤 경상도와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 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등의 요직을 거쳐 1504년(연산10년) 47세때 이조판서에 오르다. 이해 갑자 사화가 일어난바 공은 폐비 윤씨에게 회릉진숭(懷陵進崇)할 것을 주장하여 시행한 사실로 인하여 연산군의 신임을 얻어 정헌대부에 가자가 되었다. 1506년 어머니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바로 연산군의 폭정기간이라 정치가 문란하여져 인심이 흉흉할 뿐 아니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충간하는 중신들은 모두 처형 당하는 참변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원만하고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인화력도 좋아 화를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문신들을 감싸주어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무사하게 해주었다고 전한다. 공도 이해 연산12년에 연산군 폭정을 바로 잡기 위한 인조반정에 계부인 풍양군 김무와 동생 영안군 김수경과 함께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 2등에 책훈되고 이어서 좌의정을 거쳐 1510년(중종5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때 일어난 왜변(倭變)의 진압을 총지휘하여 평정케 하였다. 1512년에 서거하니 봉호 영가부원군 시호는 문경공이다. 묘소는 대구시 동구 송정동 장등산에 안장되고 향사일은 음 2월 한식일과 10월 15일인바 지역유림들이 향사하고 있다.

 

21)참의공 김언침(參議公 金彦침) (1514. 중종9--1584. 선조12)

 

22)관찰사 김억령(觀察使 金億齡) (1529년 중종 24년∼1589년 선조 22년)

 

공은 문정공 김질의 증손자이며 목사공 김언의 차남, 생원 진사과에 모두 합격한 후 1552년(명종7년) 24세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승정원 좌승지 지제교를 거쳐 강원도와 황해도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공은 문중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1580년(선조13년) 경진년에 우리 안동 김씨 족보의 효시인 안동 김씨 성보(安東 金氏 姓譜)발간을 주관하고 그 서문을 찬술하였다. 이것이 경진보다 안동김씨 성보(31cm×38cm)의 일부 훼손된 부분을 대종회에서 안렴사공파 김윤회 전부회장 주관으로 복원하여 영인본을 1982년에 발행하여 후예들에게 배포하였다. 원본은 대종회에서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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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의 최초의 족보-경진보

 

23)현감공 김 근(縣監公 金瑾) (1538.  --1594   )

 

24)효헌공 김찬(효헌공 김찬) (1543. 중종38--1599. 선조32)

 

25)승지공 김백령(承旨公 金百齡) (2003. 11.5. 태서(익) 제공)

 

26)판결사공 김효건 (1584--1666)

 

27)영의정 낙흥부원군 김자점(領議政 洛興府院君 金自點) (1588년 선조 21년∼1651년 효종 2년)

 

 공의 호는 낙서(洛西)이고 익원공 김사형 9세손이고 문정공 김질의 증손자, 관찰사공 김억령의 친손자, 현감공 김탁(金琢)의 차남. 이처럼 화려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벼슬은 음사로 등용되고 병조좌랑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는 등 대북 세력시 맞서다가 그들에 의하여 밀려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도원수로서 북진을 지키는 책임을 맡아 강홍립, 최명길 등과 함께 친청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림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병자호란때 참패의 원인을 공에게 묻는 듯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공은 1623년에 있은 인조반정때 그의 주역으로서 정사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정의 논공 때문에 불평이 생겼으니 반정에 찬·반파로 인하여 공을 중심으로한 낙당과, 원두표를 중심으로한 원당으로 갈라졌으니 낙당을 공서, 원당을 훈서 또는 청서로 칭하여 서인이 분열되고 서로 대립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1627년 1월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고 순검사 임진수어사로 활약하였으며, 1630년 한성 판윤에 이르고 1633년에 도원수가 되었다. 이어서 1642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공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이 인조의 딸 효명옹주와 혼인함으로서 공서의 세력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 공으로 인하여 1643년에 판의금부사를 거처 우의정에 오르고 어영청도사도 겸했다. 1646년(인조24년)에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낙흥부원군에 봉해졌다. 사은사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오기도 했다.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 충청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서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 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또 전국의 치산을 잘하여 서울 홍제원에 낮에도 범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인조께서 심히 걱정하고 공에게 명하사 대책을 강구하라 하심에 온돌방을 연구하여 장안 세도가는 물론 백성들에게 까지 권장함으로서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유례없는 온돌방 생활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1650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경려의 상소에 따라 송준길 등이 가세하여 김자점이 국정을 희롱하여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을 올려 파직되어 강원도 홍천과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이로 인하여 정계는 다시 송시열, 김상헌, 송준길 등을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그뒤 이어 해원령 영 과 진사 신호 등이 김자점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음으로 그를 살려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효종도 할 수 없이 1651년(효종2년) 역적의 누명을 씌워 처형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들은 그 연류를 두려워하여 먼지방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고 심지어 족보와 조상의 문적까지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 구안동 김씨 가문은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고 말았다.

 

이로서 원당이 득세하여 신안동 김씨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형제가 상신에 올라 세도를 잡음으로서 이후 순조―헌종―철종대에까지 걸쳐 60년간 신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이 대옥사를 신문한 사람이 원당 중심의 인물인 원두표였으니, 권력을 잡기 위한 치열했던 시대의 정치세력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김자점 관련 자료 소개>

 

(1)<자점보 관련 자료 소개>(2002. 3.4. 영환(문) 조사 자료 제공)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 의 우뚝 솟은 백족산이 있고 이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가 자점보 인데 조선 인조 임금때 인조 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것 휘두르다 역적 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이 쌓았다하여 자점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금반형은 묘자리중에 으뜸으로 김자점이 젊었을때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총애로 득세하자 부친의 묘를 그곳에 썼다. 그런데 금반형의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려 보이는 곳에 큰물이 있어야 되는데청미천만으로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뭄이 들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뽑아 써서 근처 일대가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수 있었다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의 길이는 약5백미터 폭은 넓은 곳은 6미터 좁은 곳은 약 2미터 가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용수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이 전설로 보아 김자점공은 치수에도 많은 공이 있었음에도 역적으로 몰린 다음 이렇게 윤색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아울러 김자점공의 새로운 자료 발굴에도 관심을 갖을 필요가 있겠으며, 당쟁속에서 희생된 선조의 넋을  다시 한번 기려본다.

 

                                                                <자점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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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점보>(경기도 장호원 소재. 2002. 11. 윤만(문) 제공)     <백족산>(경기도 장호원 소재. 2002. 11. 윤만(문) 제공)

 

(2)<설화소개>

<설화-소식고개> (성산동) (2002. 3. 태서(익) 조사 제공)

마포구 성산동 지금의 신촌 농협지점 부근에 있던 고개를 소식고개라 하였다. 이 고개의 명칭 유래를 알려면 먼저 야동(冶洞)의 유래부터 살펴야 한다.

성산동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북부 연희방 성외 성산리계 중동·야지동·후동·무이동·야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야동 곧 풀무골은 현재 성산시영아파트∼불광천 건너 상암동으로 가는 길목 일대였다.

조선 효종 때 김자점(金自點)이 역모를 일으키기 위해 군사자금을 마련하고자 이 일대에 위조엽전을 만들던 사주전(私鑄錢)을 설치하고, 병기를 제작하기 위해 풀무간을 만들었으므로 여기를 풀무골이라 불렀다. 소식고개는 이 풀무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고개에 보초를 세워두고 도성 쪽을 바라보며 망을 보게 하였으므로 소식고개라 하였다 한다. 소식은 곧 오늘날의 정보를 뜻하는 것으로 ‘도성의 정보를 알고자 망을 보던 고개’라는 뜻이다. 소식고개와 풀무골 주변은 김자점이 역모죄로 처형당하면서 주변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이 실시되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대부분 논·밭이었던 이 일대에서 녹슨 엽전이 적지 않게 발견되곤 하였다 한다.

여기서 감자점에 관련된 사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광해군 14년(1622) 이귀(李貴)·김유(金) 등과 더불어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김자점은 인조가 즉위하자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집권 공서파(功西派)의 영수(領袖)가 되어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淸西派)를 탄압하였다. 또한 그의 손자 김세룡(金世龍)을 인조의 후궁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혼인시켜 외척이 된 뒤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전횡하기에 이르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평소 김자점의 독주를 비판하던 대사간 김여경(金餘慶)과 집의 송준길(宋浚吉)·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몰래 청나라에 보내 조선이 장차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임을 알리고, 아울러 김상헌과 김집(金集)이 청나라를 배척하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청나라에 보내 양국 사이를 이간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나라는 즉시 군사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사자를 보내 그 진부를 가리려 하였다. 효종의 기민한 수습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조정에서는 그를 엄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그의 죄상이 드러나자 광양에 유배하였다.

이어 효종 2년(1651) 진사 신호(申壕) 등이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사실을 고하자 효종은 친국(親鞫) 끝에 김자점과 그의 아들 익()이 일부 정신(廷臣)과 각지의 수령 및 지방 장수들과 역모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곧 그들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한 죄상이 드러났다. 김자점 및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이에 따라 공서파는 몰락하고 그에 대신하여 청서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어쨌든 이곳 성산동에 김자점역모사건과 관련되는 고개이름과 전설이 남아 전해진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설화-김자점 탄생 전설>(2002. 3. 태서(익) 조사. 제공)

예로부터 낙안에 전하여 오는 전설에 의하면 김자점에 대한 전설이 많으나 그 중 몇 편을 옮겨 본다.

옛날 낙안 고을에 해마다 15살 가량의 처녀를 제물로 받쳐야만 고을이 무사하다 하여 제를 지내 오고 있었다. 감자점의 부친이 낙안 고을 사또로 부임하여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제물을 바치던 당(堂)집을 헐어 버렸다. 이때 찬바람이 일어나며 커다란 지네란 놈이 대들보에 메달려 있었다.「이놈의 조화 로고」하면서 사또가 칼을 빼어 지네를 마디마디 토막을 내어 버렸다. 본시 지네란 놈은 몸이 끊어져도 다시 살아나는 놈이라 하여 후환을 없엘 요량으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끓이게 하여 죽여 버렸다.

그런데 지네를 토막 낼때 사또의 두 눈 사이에 지네 피가 튀어 얼룩져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 지지 않아 몹시 불쾌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지네 피의 얼룩이 자연이 없어졌다. 그런데 어느날 부인이 수태를 갖었다고 들었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 아이였다. 기상이 출중하고 늠름한데다 총명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미간에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지네 핏자국의 얼룩 그대로 였다. 이것이 과연 좋은일 인지 불길한 징조인지 몰라 궁금해하면서도 아이가 너무나 영특하므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지냈다.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후에 자점은 일국의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결국 역모를 꾀하다 처형되었다. 그의 집이 있었던 곳은 역적의 집이라 하여 소(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은 저수지로 개축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마을을 못 등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낙안땅이었으나 지금은 벌교읍에 속해 있다.(구전)

 

 <설화-김낙치 전설>(2002. 2. 28. 태서(익) 조사. 제공)

점낙치는 장성읍 매화동 장성여중에서 충무동으로 넘어가는 장성여중 앞 고갯길을 말하는데 김자점(金自點)이 죽은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에 전해오는 말로는 자점이 역모로 몰리자 몸을 피하여 고향이자 처가인 장성에 은신하려다 관군에 쫒기어 점락치에서 3질 낭떠러지로 떨어져 잡혔다고 한다. 그는 8시를 당하여 죽었는데 시신을 8도에 각각 효시토록 하였다. 전라도 운반책이 어느 산골에 이르러 갈림길을 만나 망설이고 있으니 뒤에서 "이놈아, 아랫길로 가거라 " 하는 소리가 들려 아랫길로 갔다. 조금 가다가 '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윗길 바위위에 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 이 양반 유명하다더니 토막난 시신도 사람을 살리네 ."라고 감탄하여 단광리 앞산 좋은 자리를 잡아 장사지냈다고 한다. 김자점의 생년은 정확히 전하지 않고 대략 1580년(선조13) 무렵으로 보며, 관향은 안동이며 혈통은 사육신을 고변하여 유명해진 김질(金瓆)의 5대손이다. 우리 장성에 생가터라고 전하는 곳이 장성읍 안평리 장동 116-1번지(비적골)와 서삼면 한실 등 두 곳이 있는데, 승주군 낙안면 못 등을 비롯한 전국 여러 곳에 출생 전설이 있다고 한다.

 

김자점은 1622년(광해14)인조반정 때 1등공신이 되어 동부승지를 거쳐 도원수가 되고 영의정까지 되었다. 자점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 망암 변이 중의 큰 사위가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일화가 잇다. 정혼한 뒤 큰 딸이 자점이 관상을 보고는 "얼굴은 잘 보셨는데, 뒤가 반공상이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딸은 "이미 정혼한 터이온데, 어찌하겠습니까? 소녀에게 비책이 있사오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는 것이 있다. 자점이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을 때 처가도 조사를 받았는데 암하필법(手製紙粉校, 병풍처럼 접은 종이 속에 가루로 글씨를 써서 읽은 후 천을 떠들면 지워지는 서찰)을 써 근거인멸로 화를 면하였다 한다. 장성읍 안평 2리에는 대마등이 있는데 이 곳은 자점이 도원수 영의정으로 있을 때, 고향에 내려오면 수많은 배알객들의 말을 메어 놓은 자리라 하며, 서삼면 태봉산에는 그가 친구들과 말을 달리며 무예를 길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부천시 원통이고개 전설>(2002. 11. 28. 주회(안) 제공)

★김자점(金自點)이 ♠황해와 김포쪽의 한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파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이 고개만 아니면 수로를 낼텐데 원통하구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는 내용

*부천시 인터넷 검색 결과

원통이 고개: 부평구의 경인국도상에 있는 고개.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지명으로 원래 이곳에는 원통사(圓通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데, "원통하다"는 말에서 변형된 전설이 여러 가지 있다.

첫째는 수로를 못내어 원통하다는 이이야기이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자점(金自點)이 황해와 김포쪽의 한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파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이 고개만 아니면 수로를 낼텐데 원통하구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수로를 파다가 실패했던 이는 김안로(金安老)였지만 전설에는 ★김자점이 등장한다.

 

<황해도 사리원의 수리사업과 자점보>(2002. 11. 28. 주회(안) 제공)

인조21년(서기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배수까지 갖춘 기록이 있다.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 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간척지 사료작물 재배기술 및 문제점 (축산기술연구소 초지사료과 연구관 임영철)

<우리나라의 간척 역사>

우리 조상들이 간척지 영농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1600여년전 신라시대부터 였으며, 간척 자원개발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고려조 고종22년(서기1235년)에 몽고병 침입으로 강화파천 후에 강화를 방어하기 위하여 연안의 제방축조가 고려사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고, 그 후에 간척농지 개발에 대한 것은 고종35년(서기1248년)에 병마판관 ★김방경이 ♠안북촌(현 평북안주) 용도에 축조하여 간척농지를 경작하므로서 몽고 병란시 식량을 조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256년에는 군량미 확보책으로 ♠강화도내 제포, 와포, 초포, 이포에 제방을 축조하였다.

 

이조에 와서는 태종14년(서기1414년)에 경기 통진지구(현김포)에 간척지 약 200여석 직이를 사축하였던 기록이 있고, 인조21년(서기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개배수까지 갖춘 기록이 있다.

 

*또 다른 자료([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에 인조21년(1643년)에는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보(於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점보 및 온돌방>(2002. 10. 30. 태서(익) 제공)

<전 략>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또 전국의 치산을 잘하여 서울 홍제원에 낮에도 범이 출모한다는 소문에 인조께서 심히 걱정을 하고 공에게 명하여 대책을 강구하라 하심에 백성을 편안케하였다.

 또 온돌방을 연구하여 장안 세도가는 물론 백성들에게 까지 권장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유례없는 온돌방 생활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28)풍양군 김무(豊陽君 金石武) (1441년 세종 23년∼1514년 중종 9년)

 

공은 동추공 김종숙의 4남 공은 조카인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과 영안군 김수경이 함께 1506년 연산의 폭정을 바로 잡기 위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세운 공으로 정국공신에 책훈되었다. 그 뒤 정헌대부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풍양군에 봉해졌다. 공직생활중에도 너무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로서 청백록에 올라 있다. 그리하여 후손은 물론 세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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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군 김무 지묘(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내리) (2003. 11. 2. 태서(익) 제공)

 

29)백범 김구 선생(白凡 金九先生) (1876년 고종13년∼1949년. 74세)

 

김구선생은 초명이 창수(昌洙)(會), 호는 백범이고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이며, 참의공 김황의 18세손으로 전 교통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신(金信)의 선친이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보명재하, 在夏)과 어머니 현풍곽씨 곽낙원(郭樂園)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배웠고, 17세에 과거보러 갔다가 풍기가 문란하여 분개하여 돌아와 18세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교도 700명을 끌고서 탐관오리들과 싸우다가, 안중근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공에게 가서 고능선 선생의 지도를 받으니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해 8월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손에 시해되자 울분한 생각을 참지 못하고, 표연히 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 각처를 유랑하다가 국내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 이듬해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사간첩 육군중위 토전양란이란 자를 죽임으로서 지난해 국모를 시해한 원한을 풀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해 내부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인천감옥에 옥살이를 하는동안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해가며 옥바라지를 한 것은 특기할 일이거니와 선생은 사형결정 혹은 집행 보류 등 앞날이 확정되지 않은 채로 23세인 해 3월 7일밤에 탈옥을 감행하여 방랑하다가 공주마곡사에서 스님이 된 것도 또한 기구한 운명이다.

 

몇 년 후에 속세로 돌아와 아버지를 여의고, 예수를 믿고 해주 최준례와 결혼하니 29세였다. 30세에 을사 매국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와 이준 등과 함께 조약 철회를 상소했으나, 여의치않자 이동영,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일으켰다.

 

36세때 사내총독 암살사건에 앞서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어 17년 징역 판결을 받고 옥에 있을 때, 왜경은 선생을 새로 산 밭의 돌맹이 같은 자라 했으나, 어머님이 찾아와 네가 경기 감사가 된것 보다 더 기쁘다고 했으며, 선생은 항상 눈물로 구국 기도를 하되 우리나라가 독립되어 우리 정부청사를 쓸고 닦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소서 하고 기원하였으며, 차츰 형기가 줄어39세 7월에 가석방되어 몇해동안 교육에 전념하였다.

 

44세때 3.1만세 운동이 일어나 분연히 결심하고서 조국을 떠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조국 광복을 위한 해외 활동이 시작되었다. 51세에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니 국내에서 민족단일전선으로 신간회가 결성된 해이다. 그 이듬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니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파괴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56세 되던 해 겨울 이봉창 의사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저격하는데 쓸 자금과 수류탄을 주어 동경으로 보내어 이듬해 1932년 1월 8일 왜왕을 저격케 하였으나 불행이도 적중하지 못하고, 이봉창 의사는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10일에 32세로 순국하였다.

 

선생은 계속하여 다시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같은해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만주침략의 괴수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케하여 우리민족의 애국투쟁 정신을 크게 떨쳤으나, 윤봉길 의사는 왜놈의 형장에서 12월 19일 25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신임을 얻게 되어 중국 장개석 총동과 서로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독립군 특별반을 두어 한중합작으로 항일투쟁에 대처할 것을 합의했으며, 63세때 임시정부 주석이 되고 그해 5월 일본 특무기관의 꼭두각시가 된 반역자의 총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가 소생하니 줄기찬 뜻은 꺾일 수가 없었다.

 

다음해에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각 정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취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으나 70세되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역사는 하루아침에 바뀌어졌다. 그러나 세상을 여윈 동지들, 어머니, 그리고 부인과 맏아들 인(仁)이 광복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 것이 슬펐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11월 23일, 망명생활 27년만에 조국땅을 밟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모스코바 삼상 회의에서 발표한 한국 신탁 통치안에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듬해 71세에는 민주의원 총리가 되고 다음해에는 국민의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조국의 분단이 영구화 될 것을 걱정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73세 되던해 4월 19일에는 통일을 위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의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통일은 차츰 멀어만 갔건마는 선생은 변함도 굽힘도 없이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말과 글로 외치며, 무릇 역사 행진이란 그 방향을 출발점으로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됨을 애타게 부르짖다가, 그 이듬해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교장에서 흉한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두시니, 국민은 큰 지도자를 잃었고 통일과업은 역사의 숙제로 남게 되었고, 드디어는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등 날이 갈수록 앞길이 어두어져만 갔다. 그러나 우리 가슴속에 새긴 선생의 뜻과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더욱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 현시점에서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매년 양력 6월 26일 효창공원 묘소에서 추모제(신미보 1권 78쪽, 기미대보 8권 48쪽).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효창운동장 옆에 대지면적 5,552평, 건물 연건평 2,929평, 지하층 지하1층 주차장, 사무실, 자료실, 전기기계실 등 지상층 1,844평, 지상 2층 전시실, 전시홀, 다목적실, 회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사기간은 2001.5.12∼2002.10.5(17개월), 총 사업비는 180억원(국고보조금 160억, 모금 20억)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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