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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7 개성윤공파조 단소 향
좁은 산길을 달려 고개를 넘으니 다리가 하나 나옵니다.(다리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물이 많이 불었습니다. 평소에는 맑은 물이 흘러 다음에는 이곳에서 도시락을 먹기로 했습니다. 다리에서 하류 쪽으로 산과 산 사이에 빠꼼하게 아파트가 뚜렷합니다. 그곳이 도평리라고 합니다. 이곳도 광주 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선김의 집성촌 중 한 곳이랍니다.
◆13:33 단소 입구 도착
입구를 찾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마을이 제법 큰데, <중앙석유상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집 왼쪽으로 좁은 도로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골목으로 올라가지 말고, 오른쪽을 보면 산기슭에 <인산 김현윤(仁山 金賢潤) 선생 송덕비>가 보입니다.
인산 선생은 우리 선김의 일가입니다. 송덕비에는 인산 선생이 평안도에서 내려와 지월리에 개성윤공파조 할아버지의 단소를 조성하고 족보를 편찬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발용 종친께서 고생 고생하시며 여러 차례 답사하지 않았으면, 참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과정은 발용 종친께서 게시판에 올리신 글(개성윤공파 七霖 先祖님 壇墓를 찿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3:45 개성윤공파조 단소 도착
개성윤공파조 할아버지 단소 주위는 밤나무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날은 더워도 절기는 속일 수 없는 것인지, 간밤에 불어닥친 강풍에 밤송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두어 송이 까 보았더니, 밤알이 굵직굵직 여물었습니다.
산 위로 20여m 올라가자 파조 할아버지 단소가 나타났습니다. 비록 단소가 크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단아했습니다.
비문에는 <고려 봉익대부 개성윤 안동공 휘 칠림지단(高麗 奉翊大夫 開城尹 安東公 諱 七霖之壇)>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포와 잔을 올리고 재배를 마치니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실묘에 참배를 하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후일을 기약하며 엄미리 계곡의 벽수장으로 향했습니다.
<영단 및 비석>
<입구의 김현윤 선생 송덕비>
<개성윤공 참배후 영단 앞에서>
*개성윤공 시제 안사연 참배기--태영(문온공파) 작성. 발용(군사공파) 촬영
1. 일시 : 2002. 10. 13. 11:30--14:00
2. 장소 :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3. 참가자 : 1)개성윤공파 19명(남-12. 여-7)
2)안사연 6명(무순)-- 발용(군), 태영(군), 항용(제), 영윤(문), 윤만(문), 태영(문)
4. 참배기
지난 8월 개성윤공 휘 칠림(七霖) 할아버지 단소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현지를 답사한 발용 종친의 노고 덕분에 10월 12일(일요일) 개성윤공 시제에 수도권에 살고 있는 안사연 회원 7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워낙 시간이 촉박해 발용 종친의 연락을 받은 항용 종친께서 하루 전인 11일 오후 늦게 <긴급>으로 참배 공고를 했는데도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이 공고와 전화 연락을 받고 아침 일찍 만사를 제쳐놓고 윤만, 태영(군) 종친께서 합류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계신 여러 분들께서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참석자(존칭 생략, 무순) --군사공파 발용, 태영, 제학공파 항용 익원공파 은회, 문온공파 영윤, 윤만, 태영
밤새 천둥 번개가 요란해 걱정이 컸는데, 막상 날이 밝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활짝 개어 있었습니다. 마치 가을 소풍날 같은 날씨였습니다. 개성윤공파 종친들께서는 대부분 북한에 거주하셔서 이 날 시제에는 많은 분들이 모이시지는 못했습니다만, 월남 2세인 청·장년층이 다수 참석해 앞날을 밝게 했습니다.
12시경 개성윤공 할아버지 단소에서는 이미 정성껏 마련한 제물의 진설이 거의 끝난 상태였습니다. 안사연 회원 일행이 도착하자 개성윤공파 어르신들께서 함박 웃음을 지으시며 반갑게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낯익은 분이 계셨습니다. 지난 9월 1일 서운관정공파 경수마을 선조묘역 참배시 뵈었던 서운관정공파 부회장님께서도 개성윤공 할아버지 시제에 참석하시기 위해 미리 도착해 계셨습니다. 경수마을이 지척이기에 잊지 않고 참석하셨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뭉클하고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습니다.
곧바로 시제가 시작되었는데, 휘 칠림 할아버지의 바로 동생분이 군사공 휘 칠양(七陽) 할아버지이시기에 안사연 회원 중 군사공파 종친께서 아헌관을 맡아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발용 종친께서는 사진을 담당하셨기에 종사에 익숙하신 태영(군) 종친께서 의관을 갖추었습니다. 항용 종친께서는 마침 집사 한 사람이 모자라 집사를 보셨습니다.
시제에 이어 창식 전임회장과 상국 신임회장께서 결산보고를 마치고 서운관정공파 부회장님과 우리 안사연 회원을 일일이 소개해 주셨습니다. 개성윤공파 어르신들께서는 거듭 거듭 고맙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소개가 끝나고 발용 종친께서 준비한 안사연 홈페이지 복사물을 배부한 다음 항용 종친께서 안사연 모임 및 그 동안의 활동 등의 소개와 함께 개성윤공파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렸습니다. 시제에 참여한 개성윤공파 종성(鐘成:재 항렬), 이경(履暻:식 항렬) 등 월남 2세들이 앞으로 적극 참여하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울러 안사연 회원들은 즉석에서 회비를 모아 12만원을 시제에 보태시도록 하였습니다.
개성윤공파는 파명에 <개성>이란 낱말이 들어 있어 막연히 개성에 많이 거주하시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평안북도 박천군에 오래 세거하셨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대성이어서 박천군의 각 면(面)에 우리 일가분들이 살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평북 정주, 영변, 태천 등지와 평남 숙천에도 오래 세거했는데, 평남 숙천의 경우에는 약 150호 정도 사셨다고 합니다. 특히 <평북 박천군 양가면 유대>라는 곳이 해안가 포구인데, 이곳에는 개성윤공 할아버지를 기리는 비와 비각(碑閣)이 있다고 합니다.
이토록 많은 분들이 평안도 지역에 거주하셨는데, 월남한 분들은 약 270호 정도뿐이라고 합니다. 남한 지역의 개성윤공파 종회는 1957∼1958년경 결성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현윤 종친의 공로가 컸다고 합니다. 이분은 바로 개성윤공 할아버지 단소 입구에 있는 송덕비(人山 金賢潤선생 송덕비)의 주인공이십니다. 현윤 종친께서는 월남 후 동대문시장에서 일육상회라는 의류 점포를 운영하셨는데, 전국 판매망을 갖출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답니다. 바로 그분 소유의 12,000평 중 1,800평을 매입, 분할 등기해 개성윤공 할아버지 단소를 조성했다고 합니다.
개성윤공파보는 월남 후 2차례 수단을 받아 발간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광복 전 파보를 저본으로 삼았답니다. 혈혈단신 월남한 개성윤공파 일가분들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맛있고 뜻깊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