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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29. 발용(군) 제공) <경북나드리 http://www.gbtour.net/ 에 소개 된 안동ㆍ의성지역의 우리선조님>
1) 김방경 호 : 본연 본관 : 안동 출생일 : 1212년(강종 1년) 사망일 : 1300년(충렬왕 26년) 시대 : 고려시대
김방경 장군은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명장이다. 장군이 오직 나라를 위한 뜨거운 충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외적을 막아 싸우던 당시의 고려는 몽고의 침입, 삼별초의 난, 왜구의 노략질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나라 위해 몸바친 장군의 애국 애민의 정신은 길이 후손에게 나라 사랑의 산 교훈이 될 것이다. 장군의 자는 본연이고 시호는 충렬이며 본관은 안동이니 신라 경순왕의 후에 한림학사 효인의 아들로 121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독서에 열중하고 학문을 닦아 소년 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열 여섯 살의 어린 몸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벼슬이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 판관으로 있을 때 몽고병의 침입을 위도에서 막아 잘 싸워 이름을 드날렸다. 특히 장군은 성품이 충직하고 대범했으며 학문이 높고 근면 검소하여 매사에 부하 장병들의 모범이 되었다. 1263년(원종 4년) 전라남도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고, 또 서북면 병마사로 부임하여 북쪽 지방을 평안히 다스렸고 이어 벼슬이 올라 형부상서가 되었다.
1270년 강화도에서 장군 배 중손이 삼별초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왕족인 승화 후 은을 왕으로 추대하자 장군은 추토사의 명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난군을 물리쳤고, 난군이 전라남도 진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자, 1271년 몽고군과 합세하여 이를 정벌하였고, 탐라도 까지 물러가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는 난군을 끝까지 추적하여 완전히 섬멸하였다. 1274년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장군은 63세의 연만한 몸이지만 고려군을 이끌고 참가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 본토로 향하였다. 그러나 원래 육지에서만 살아 온 몽고군은 해전에 약한 데다가 도중에 풍량을 만나 정벌을 포기하고 되돌아 오고 말았다.
1281년 장군은 고려군의 도원수로 몽고 장수 혼도, 다구와 함께 십만의 연합군을 거느리고 2차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이번에도 대 폭풍을 만나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수 많은 군사만 잃은 채 되돌아 왔다. 1295년 장군의 나이가 여든 넷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전쟁터에서 지낸 장군이지만 벼슬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벼슬을 물러난 장군은 국가가 어려운 시기에 새 임금을 모시고 충성을 다한 공으로 상락군 개국공에 봉하여졌다. 1300년 8월 여든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장군의 무덤은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있다. 그후 충선왕은 생전의 공을 기려 벽상삼한 삼중대광의 벼슬을 내리고 신도비를 세우고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 김돈 본관 : 안동 출생일 : 1385년(우왕 11년) 사망일 : 1440년(세종 22년) 시대 : 조선시대
문신, 천문학자, 본관은 안동, 고려의 첨의중찬 방경의 후손, 1417년(태종 10년) 왕명으로 서한이하 역대보계도를 찬진, 1434년(세종16년)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을 때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 이 밖에도 세종의 명으로 김조와 함께 간의대·보루각을 만들었다. 승지로 7년 간 있었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3) 김광수 호 : 국화/송은 본관 : 안동 출생일 : 1468년(세조 14년) 사망일 : 1563년(명종 18년) 시대 : 조선시대
1468년(세조 14년)에 난 김광수는 연산군때 저명한 시인이다. 자는 국화, 호는 송은, 본관은 안동, 임진왜란때 눈부신 활약을 하여 공을 세운 서애 유성룡은 그의 외손자다. 1501년(연산군 7년)에 진사가 되고 태학에서 학문을 익히다 연산정란을 예견하고는 더 이상 과거 볼 뜻과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채 향리(점곡면 사촌동)에 내려와 은둔 강학(隱遁講學)코자 기수 남안 병봉산록에 영귀정이란 정자를 이룩, 거기서 시가를 읊으며 조용하고 청빈한 삶을 보내면서 송은거사로 한평생 문장으로만 은거 수도, 존현 양사에 힘썼다.
그의 거실 서쪽에 우뚝 솟은 만년송 가까이서 숨에 산다고 하여 '송은'이라 자호하고, 1563년(명종18년) 소안 백발의 지상선처럼 타계하니 향년이 96세였다. 공의 저서 중 앞일을 예언한 화신국전과 작잠십장으로 자기 자신과 "너희들은 벼슬할 생각 말고 학문에 힘쓰라."고 자손은 경계한 경심장 등에 술회를 통해 그 생애와 사상을 충분히 엿 볼수 있다. 당시 공의 덕과 문장은 영남 일대에 이름이 떨쳐졌으며 그 후손 또한 도학 문장이 연세 상전하여 대소 등과한 이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저서로 '송은집', '경심잠' 등이 전해온다. 1685년(숙종 11년)에 향내 여러 선비들이 공의 잠덕을 추모하여 장대서원에 제향. 사족으로 경심십잠의 줄거리를 보면 사친(事親), 보군(輔君), 제묘(祭廟), 정가(正家), 우애(友愛), 근형(謹刑), 폐참(廢讒), 신색(愼色), 결우(結友), 안빈(安貧) 등의 10개조다.
4) 김사원 호 : 경인/만취당 출생일 : 1539년(중종 34년) 사망일 : 1601년(선조 34년) 시대 : 조선시대
1539년(중종 34년)10월 2일 점곡면 사촌동에서 태어난 김사원은 송은 광수의 증손이다. 자는 경인(경인), 호는 만취당(만취당), 관향은 안동, 공은 천성이 인자하여 이웃에 어려운 이를 보면 부모한테 알려 힘껏 도와 주었다. 일찌기 여러 아이들과 놀적에 가마귀떼가 부르짖어 가보니 길가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어 측은하게 여겨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집에 달려와 어른들에게 알려 하인으로 하여금 장사 지내게 했다. 사친(事親)에 있어 효도를 다해 무고히 부모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며 친척한테도 은의를 베풀고 원근 출입시는 매양 공손하고 겸양하여 노소로부터 사랑과 공경을 받았다.
늘 송은공을 받들고 의방지훈을 들었으며 자라서는 퇴계 이황에세 수업하여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사람으로서 닦아야 할 학문에만 전념했다. 스승(퇴계)이 돌아가자 흑립소의(黑笠素衣)로 3년간 즐거운 데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흉년이 들어 밥을 굶는 이에게 식량을 빌려줘 가난으로 갚지 못하면 여럿이 보는데서 차용증서를 불태워버려 원근에서 공의 집을 '김씨 의창'이라 일컬었다.
임진란때 의성 정재장으로 활약하고 난후 이재민은 구하니 그 혜택을 입은 이가 농사지어 사례하고자 했다. 그는 웃으며 "먹지 못하는 여러분을 생각하여 준 것이지 갚기 바랐겠느냐"고 타이르곤 그냥 돌려 보냈고 한번은 저물어 구걸온 이가 있어 살펴보니 나병환자라 꺼리지 않고 방에 들어오라고 하여 잠재워 보냈는데 얼마 후 한 미장부가 찾아와선 전날 나환자로 변장해 왔던 사람이라면서 그를 시험해본 것이라 하며 정중히 사과하곤 "후세에 복많이 받으리라"는 말을 남긴 뒤 자취를 감춘 적도 있었다. 집 옆 오래된 소나무는 늦도록 푸르다고 '만취당'이라 자호했다. 1601년(선조 34년) 6월 14일 63세로 별세, 부인은 영양남씨, 일직임씨, 안동권씨다.
5) 김사정 호 : 정숙/후송재 본관 : 안동 출생일 : 1552년(명종 7년) 사망일 : 1620년(광해군 12년) 시대 : 조선시대
공의 자는 정숙(正叔), 호는 후송재(後松齋)며 본관은 안동이다. 1552년(명종 7년)에 점곡면 사촌동에서 출생, 일찌기 태학에서 수업하였으나 연산 정변을 보고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와서 은거 수도하여 도학과 시례(詩禮)로 영남 일대에 명성이 높았던 송은 광수의 증손이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업은 닦았으며 퇴계의 덕을 사모하고 본 받아서 그 도와 학문을 익혔던 것이다. 재예(才藝)와 총명히 과인(過人)하였으나 가훈에 따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후진 양성에만 힘쓰다가 1592년(선조 25년) 국란이 나자 중형 사형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창녕 하와산성서 섶깔고 맹서하되 '피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섶을 불살라도 뜻은 재가 되지 않으리라'는 한 싯구를 남기고 대적 분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난 후 고향에 돌아와 계속 후진 장학과 저작에 힘쓰다가 1620년(광해군 12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69였다. 그 후 2백 30여 년이 지난 철종때 영남 우림들이 공의 훈공을 잊지 못하여 사실을 상소하였더니 '도학이 고명하여 다른 사람의 수범됨이 진실하고 충의가 특이하니 그 노적이 높도다'란 전교와 함께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후공재집과 계문예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창의록과 망우당 동고록에 공의 사실이 실려 있다.
6) 김양범 호 : 사련/만동 시대 : 조선시대
자 사련, 호 만동이며 생진 양시에 모두 입방 점곡면 사촌동서 산진과 전주유씨 내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과 벼슬이 연세상승한 가정서 정훈을 이어 받고 조부의 가르침을 받아 당시 많은 선비들이 추종, 후덕고행으로 애린교화에 힘써 후진을 길렀고 시혜불보로 향민들 가운데 감복하는 이가 많아 이웃 명고동(속칭 만동골)에 그 문생들이 스승의 거처가 협착함을 민망히 여겨 3간집을 세우니 이것이 만동서숙이다. 만년엔 이곳을 별저로 삼고 훈학했으며 명사내왕도 잦았다고 한다.
7) 김오응 호 : 송서/구은 시대 : 조선시대
자 송서, 호 구은, 관향 안동, 재개 출륜하여 12,3세 때 사서삼경에 정통하였고 문사와 필법이 널리 알려짐. 25세 때 문과 급제한 이래 남학훈도, 성균관 학유, 사헌부감찰, 병조좌랑겸 춘추관 기사관 통훈대부 병조좌랑겸 춘추관기주관 등을 역임. 1728년(영조 4년) 정희량의 반란 이후로 사론이 분분했을 적에 영남소수로 직언충간하여 조의를 바로 잡았고 전영남이 신원됨. 함평현감으로 재임시에 선정 폄.
8) 김종덕 호 : 도언/천사 출생일 : 1724년(경종 4년) 사망일 : 1797년(정조 21년) 시대 : 조선시대
1724년(경종 4년) 7월 28일 점곡면 사촌동서 난 김종덕의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 고려 중흥공신 상락군 방경의 후예로 송은 광수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안동인 남응이고 어머니는 순천 김씨다. 그는 남보다 재주가 뛰어나 언어 행동을 항상 스승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학문을 익힘에도 소홀함이 없었고 뜻세움이 또한 원대했다.
효우의 행실도 남달라 6, 7세때 가마귀 소리가 들리면 악기가 서린단 남의 말을 듣고는 매양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모한테 해가 돌아갈까 실색하고 두려워했다 한다. 한 번은 여러 동생과 공부하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감염되었지만 억지로 먼저 일어나 몸져 누운 동생들이 완쾌되도록 백방으로 힘썼고, 부모 마음을 항상 편히 하고 그 거처하는 방의 문을 바르거나 구들고치는 것을 다른 이한테 시키지 않고 자기가 늙을 때까지 손수 하였고. 퇴도(退陶)의 학문을 사숙창명한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입재 정종로, 후산 이종수와 세칭 호문 삼종의 한 사람이다.
30세 때(1753년) 사마시에 합격, 통뮨아 왔을 때 마침 남의 글을 쓰고 있어 그 글을 다 마무리한 뒤에야 뜯어보는 신중성도 보였다. 1789년(정조 1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태지의 유자정(1890년 소실)에서 학문을 강론, 원근 안동, 예안, 예천, 청송 등지에 많은 문사들이 나게 했다.
1797년(정조 21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74, 천사 문집, 성학 정로, 공문 일통, 석학 정장, 정론 고증, 초려 문답, 예서 등의 저서가 전한다. 공의 사후 18년 사림서 불천위로 정하였다.
9) 김종발 호 : 경온/용연 시대 : 조선시대
자 경온 호 용연 안동인 남응과 순천 김씨의 3남으로 점곡면 사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면서부터 천품이 영매하고 도량이 넓으며 학문 연마에 정진, 일찍이 백씨(종덕), 중씨(종경), 계씨(종섭)와 함께 대산 이상정 문하에서 경서 익혀 사훈을 실천하고 도학 또한 고명했다. 1777년(정조 원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사헌부 장령에 그쳤으나 임금(정조)이 그의 행의가 특이하고 학문 높다고 칭송하며 여러 번 불렀지만 사양하고 향리서 후진 가르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문집과 예서 등이 전함.
10) 김회 호 : 거원/경암 시대 : 조선시대
자 거원 호 경암 관향 안동. 15세 때 임진란을 당해 아버지 따라 의진으로 가는 도중 진주 촉석루에 올라 "칼집고 남루에 오르니 사나이가 나라 위해 몸 바칠 기회로다"란 시 읊어 강개한 뜻을 보임. 26세 때 생원시에 합격 태학에 들어가 수학한 뒤 성균관 학유를 거쳐 박사 겸 양현고 직장에 제수되었으나 광해 난정 피해 벼슬 버리고 귀향. 1618년 8월에 성절 사서장관겸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어 연경을 다녀왔고, 1627년에는 동경교수가 되어 퇴폐한 학풍을 진작 55세 땐 형조정랑으로 소명 받았으나 칭병불부 은거수덕으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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