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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8. 10. 글-윤식(문), 사진-항용(제), 정중(도) 제공)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과 전국의 일가분들의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2005년도 제4회 여름캠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올리며, 결과 보고를 드립니다. 이번 행사는 지난 해 충북 괴산 일대에 이어 충남 연기군(전서공파)과 홍성군(부사공파) 일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참여 종친은 지난 해와 비슷한 추세였으나, 안사연 자체 행사로 실시되던 여름캠프를 처음으로 대종회 주관으로 치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특히 대종회장님과 사무총장님, 그리고 인천종친회와 대구종친회는 물론 전서공파, 부사공파, 안렴사공파의 전․현직 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께서 대거 참석, 명실상부한 문중 주요행사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순한 일기를 무릅쓰고 바쁘신 가운데 참석하여 격려해 주신 어르신들께 거듭 감사 말씀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연로하신 재은 부사공파 전 회장님께서는 1박 2일 동안 함께하시며 참가 가족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더없는 영광으로 여기며 감사 말씀 올립니다. 이번 행사는 총괄기획을 담당한 상석 종친께서 연초부터 수차례에 걸쳐 답사지역을 치밀하게 점검하여 첫날 장대 같은 폭우에도 무난히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6월 12일 상석 종친을 비롯한 안사연 9명이 답사지역을 점검한 바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 대한 행사개요 및 세부일정은 게시판의 <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보고는 현지에서 듣고 본 내용을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시 : 2005년 8월 3일~8월 5일(2박 3일) ■장소 : 충남 연기, 홍성, 공주, 보령 일대 ■답사 지역
◆8월 3일(수) 전의면사무소 집결 → 연기군 학당골 전서공 묘역 → 점심식사 → 국촌리 연기대첩비 → 공산성 → 청양 칠갑산 까치내유원지 왕림회관(1박)
◆8월 4일(목) 칠갑산 장곡사 → 홍성군 은하봉 부사공 설단 → 점심식사 → 대천해수욕장 갯마을펜션(2박)
◆8월 5일(금) 보령시 호국사 → 점심식사 → 해산(귀가)
■참석자 : 무순, 존칭 생략, 괄호 안은 가족 ◆대종회 및 현지 종친(30여 명) ◆대종회 - 대종회장(홍식), 부회장(영만 안렴사공파종회장), 부회장(춘교 인천종친회장), 부회장(실경 대구종친회장), 사무총장(관묵) ◆현지 종친 - 전서공파, 부사공파, 안렴사공파 일가분 합(合) 25명 내외
☆전서공파 - 근성(파종회장) 자제, 수회(도유사) 외 10여 명 ☆부사공파 - 재은(전 파종회장), 재용(부사공파 종손) 2 명 ☆안렴사공파 - 오창 일원 종친 10여 명
◆여름캠프 참가 가족 : 총 18가족 28명(괄호 안은 가족)
☆밀직사사공 - 진회 ☆군사공 - 태우 ☆군사공 - 태영 ☆문온공 - 광도(태行 문온공 종손) ☆문온공 - 영환(부부동반) ☆문온공 - 윤만(회行) ☆문온공 - 윤식 ☆도평의공 - 억(회行 : 대구종친회 총무) ☆도평의공 - 정중 2명(부인) ☆제학공 - 상석 3명(재行 1녀 1남 슬빈, 선응) ☆제학공 - 항용 4명(부인, 1녀 1남 예진, 용진) ☆제학공 - 운기(용行) ☆안렴사공 - 성회(전 대종회 부회장) ☆안렴사공 - 용주(부인) ☆안렴사공 - 용준(1남 필교) ☆안렴사공 - 용환(1녀 은영) ☆익원공 - 은회 ☆익 원 공 - 완식
■답사 내용
▣8월 3일(수) ◆10:00시 전의면사무소 앞 08:50분 사무국장, 은회 종친, 윤식 등 3명의 종친을 시작으로 서울, 대구, 오창, 괴산 및 전의면 인근의 종친들께서 10:00시 정각 1차 집결지인 전의면사무소 앞에 속속 도착하였습니다. 어제부터 오락가락하는 빗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나마 10:00시 전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행사기간 중 집중호우가 예보돼 먼 길 달려오실 종친들 안전이 걱정되었습니다.
10:00가 넘어가자 후드득후드득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서둘러 참가가족들을 점검하고 10:40분 수회(전서공파 도유사) 종친을 선두로 전서공(휘 성목)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합니다. 대구종친회 종친들께서 일부 차량을 전의면사무소에 주차하고, 한 대로 합승했건만 차량 행렬이 대략 27~28대 가량의 대행렬입니다. 학당골로 향하는 도중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차창을 때리는 기세가 사나워집니다. 무엇보다 참가 가족들의 안전이 걱정스러웠지만, 선조님의 보살핌을 빌면서 선두차량을 따라 산길로 접어듭니다. 지리가 익숙지 못해 자세히 안내 드리지 못하는 점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거리가 짧아 10여 분 만인 10:50분경 전서공 묘역이 건너다보이는 길가에 무사히 도착, 차량들을 주차할 수 있었습니다.
◆10:50분~11:50분 전서공 묘역 차량을 주차한 곳에서 전서공 묘역(충남 연기군 전의면 미곡리 학당골)까지는 대략 도보로 5분 거리입니다. 그 사이 약간 누그러진 빗줄기가 묘역으로 올라가는 도중 다시 굵어졌습니다. 우산 속으로 파고드는 빗줄기로 어깨와 등이 흠뻑 비에 젖습니다. 운주산 기슭의 전서공 묘역에는 맨 위쪽에 장령공(휘 구) 할아버지 단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장령공 할아버지 묘소는 개성 인근으로 추정되나 실전하여 전서공 묘소 위에 설단한 것입니다. 그 아래쪽이 전서공(휘 성목)과 검교공(휘 휴) 묘소입니다.
충렬공부터 검교공까지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충렬공 → 1子 판서공(휘 선) → 2子 충숙공(휘 승용) → 2子 장령공(휘 구) → 1子 전서공(휘 성목:전서공파 파조) → 子 검교공(휘 휴)
장령공 설단에 도착하자 빗줄기는 폭우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큰절을 올리지 못하고 약식 배례를 거행했습니다. 종친들 중에는 폭우에도 아랑공하지 않고 큰절을 올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높디높은 숭조사상에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이어 문중사에 해박하신 영환 종친께서 장령공과 여말의 우리 문중에 대해 구수한 해설을 곁들이십니다.
▲장령공 설단 헌관 : 홍식(대종회장) 집례 : 항용 집사 : 윤만, 용주
억 종친(대구총무)경회종친(대구)
재사(타성문중)우측으로 돌아서면 묘역 입니다
홍식 대종회장님(중앙 흰색 양복)
우로부터 실경종친(대구회장) 억종친(대구총무) 영화종친(대구)
전서공 묘역앞에서 홍식 대종회장님
집례(항용 종친)
헌작(대종회장)
홍식 대종회장 인사
장령공 행장및 약력 보고(영환종친)
관묵 종친(대종회 사무총장)- 대종회 살림살이에 늘 수고 많으시며 특히 금년 제1 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행사에 많은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사진 김정중 / 글 김윤식>
전서공 묘소 장령공 설단 참배를 마치고 아래쪽 전서공(휘 성목) 할아버지 묘소로 이동하자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는 데에다 바람까지 순조롭지 않습니다. 그 빗속에서도 용준, 용환 형제분께서는 눈에 띄는 대로 잡풀을 뽑습니다. 묘하에 살고 계시는 전서공파 종인들께서는 안사연 일행이 사전점검차 들렀을 때에도 묘역 일대를 깨끗이 금초를 하셨건만, 그 사이 잡풀이 돋자 또 한 번 벌초를 하셨답니다. 아마도 올해 추석이나 시제 전에 다시 벌초를 하셔야 할 터인데, 그 정성에 놀랍기만 합니다. 전서공 묘소는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단 한 번도 실전되지 않고 수호되었습니다. 본래는 자그마했으나 1992년 사초로 잘 단장되었습니다. 당시 도유사 수회 종친께서는 사초작업에 전념하느라 미처 생업을 살피지 못해 키우던 돼지 100여 마리가 폐사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답니다. 호석을 두른 전서공 묘소는 둘레 30보, 전면 27보, 용미에서 제절까지 13보입니다. 석물은 망주석 2쌍(新 1쌍, 古 1쌍)과 장명등, 석양 1쌍, 문인석 1쌍, 상석(2보×1.5보) 등의 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고려조 봉분은 전방후원형이 일반적인데, 전서공 묘소는 규모만 지금보다 작을 뿐 둥근 형태였다고 도유사 수회 종친께서 들려 주십니다. 1992년 사초 당시 가슴 깊이까지 파 보니 숯이 채워져 있어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숯을 더 두르고 봉분을 높여 단장했다고 합니다. 가슴 높이의 고비(古碑)에는 ‘고려 전서공 안동김공 성목지묘 정부인 적봉미상 조씨부’로, 신비(新碑)에는 ‘고려 전서공 안동김공 성목지묘 정부인 흥양조씨 부’라 적혀 있습니다. 오랜 세월 할머니의 관향을 모르고 있었으나, 근래에 파보를 모실 무렵 전서공파 종인이 소장하고 있는 가첩에서 ‘흥양조씨 부 장령 문우(興陽趙氏父掌令文祐)’라는 기록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전서공 헌관 헌관 : 재은(부사공파 전 회장, 현 고문) 집례 : 항용 집사 : 억, 은회 해설 : 영환, 수회
학당공 묘소 학당은 검교공(휘 휴)의 호입니다. 학당공 할아버지 묘소는 전서공 묘와 비슷한 크기이며, 묘전에는 상석(2보×1.5보), 장명등, 석양 1쌍,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이 배치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문인석은 옛 석물로 고졸한 멋이 느껴집니다. 묘비에는 ‘고려검교안동김공휴지묘 정부인선산김씨부’라 적혀 있습니다. 묘비는 사초 당시 세운 비석 옆에 고비(古碑)가 서 있으며, 그 앞에 특이하게 생긴 거북 좌대가 있습니다. 가로 1보×폭 0.5보 크기의 거칠게 다듬은 거북 형태인데, 거북 등에 가로로 길게 홈이 파여 있습니다. 그 형태나 크기, 홈의 깊이로 봐서 비석보다는 묘표를 세웠던 것 같습니다. 참예자들이 학당공 묘소로 이동하자 억수같은 빗줄기가 퍼붓습니다.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고려 말의 충신 학당공께 예를 올립니다. 학당공께서는 정 포은 선생의 문인으로 여말에 국운이 기울자 여러 차례 조선 태조의 부름을 뿌리치고 운주산 아래 학당골로 은거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학당공께서는 수많은 충효자를 길러내셨는데, 막내(둘째) 사위가 순천인 박안생입니다. 박안생은 사육신으로 유명한 박팽년의 조부입니다. 학당공의 행적에 관한 상세 내용은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생략합니다.
▲학당공 헌관 헌관 : 실경(대구종친회장) 집례 : 항용 집사 : 태우, 태영 해설 : 영환, 수회
학당공 묘소 옆에는 문중발전에 공헌한 종인들의 공적비가 서 있습니다(三興 安東金公泰一功績碑, 春湖安東金公在旭功績碑, 泮谷安東金公在山功績碑, 小堂安東金公泰正功績碑). 이 공적비는 모두 1994년에 세운 것입니다. 그 옆에는 1981년에 건립한 고려검교김공유허비가 있습니다. 참례자 일동은 비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 학당공 묘소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11:55~12:20 학당공 유허비 학당공 묘소 아래쪽 민가는 학당공께서 이곳 운주산 아래에 은거하실 당시 사셨던 집터라고 합니다. 참예 종인들이 많고 일정상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하고 묘역 입구의 <학당김공유허비>로 향합니다. 휴허비로 가는 길가의 민가에는 참나리꽃과 봉숭아꽃, 참깨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허름한 토벽집 울에는 잘 익은 옥수수와 조경수로 재배 중인 어린 회나무가 빽빽이 들어 차 있습니다. 유허비는 1819년(순조 19년)에 처음 세워진 뒤 1896년(고종 13년) 다시 새긴 것입니다. 비문과 상세 내용은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으로 대신합니다. 본래 유허비가 있던 위치는 학당골에서 수고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덕고개)였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학당공께서는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포은 문인으로 그 뒤를 이를 수제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대학자셨습니다. 덕고개는 학당공의 큰아드님 참판공(휘 익정)에 관한 전설이 문중에 전해지고 있답니다. 참판공께서는 1396년(태조 5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셨는데, 관직에 계시는 동안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6년간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여 세조 때 정려를 받으시기도 했습니다. 참판공께서는 1435년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셨으나 현지에 부임하시기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참판공 묘소는 현 경기도 고양시의 고령사에서 3~4리(里) 떨어진 곳인데, 양곡리에 설단을 하고 혼백을 모셔 왔다고 합니다. 그 당시 고양시의 원 묘소에서 고유제를 지낸 후 혼백을 모시고 오면서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간다” 하시며 응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곳 전의면까지 모셔 오는 동안 내내 “간다”고 하시던 참판공께서 덕고개에 이르자 대답을 안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전서공파 종인들께서는 “아마 덕고개에 이르자 아버님 학당공(휘 휴)과 할아버님 전서공(휘 성목)께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일 것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고양시의 참판공 옛 묘소는 후손들께서 몇 차례 찾아가 살펴보았으나 석물이나 묘비 등은 찾을 길이 없고, 지석이라도 발견되기를 바랐으나 부장품도 모두 도굴된 상태라고 합니다. 현재 전서공파종회에서는 학당공 할아버지 휴허비를 쉬운 우리말로 풀이한 한글 유허비를 그 옆에 건립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제반 사항이 거의 완료된 상태라고 합니다. 유허비는 상단의 이수(용돋을새김 장식)과 비신(碑身)이 한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인데, 자획이 방금 새긴 듯 삐침 하나까지 반듯반듯해서 손을 대면 베일 것만 같습니다. 영환 종친과 전서공파 후손의 설명을 듣는 사이 비가 주춤해지더니 곧 멎었습니다. 이대로 비가 멎었으면 좋겠습니다.
◆12:20 학당골 출발, 고복저수지 향
학당공 유허비를 둘러본 참예자 일행은 차량을 주차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오락가락하던 비도 잠시 그쳤습니다. 이제 고복저수지 옆 연기대첩비로 향할 시간입니다. 서운한 마음에 전서공 할아버지 묘역을 돌아보니 안개구름이 운주산 정상을 휘감고 있습니다.
대열을 정비하고 12:20분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이 한적한 농로를 돌아나갑니다. 아뿔싸, 그 사이에 비꽃이 피더니 이내 소나기로 변합니다. 그 때문에 점심식사를 예약해 둔 고복저수지 인근 음식점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지나 오후 1시가 가까웠습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대종회장님을 시작으로 참예자들의 인사말이 이어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종회장님께서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여름캠프에 참여하신 종친들과 참예자 일행을 정성껏 맞이하신 전서공파 종친들께 감사”드린다는 인사말과 함께 문중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안사연 회원들의 연구와 그 동안의 성과를 치하하셨습니다.
대종회장님의 인사말씀 후 전서공파 도유사 수회 종친, 춘교 인천종친회장, 실경 대구종친회장, 재만 대구청장년회장, 성회 전 대종회 부회장, 재택 안렴사공파 전 회장, 관묵 사무총장, 재은 부사공파 전 회장, 영환 전 대종회 감사, 항용 홈페이지관리자, 상석 여름캠프 총괄기획자, 태흥 전의청년회장, 광도 문온공파 종손, 선회 문영공종회 총무, 태문 안렴사공파종회 총무 등의 인사말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항용 종친은 최근 경매 사이트에서 입수한 안렴사공파 최초의 파보인 갑자보를 화산군(휘 주) 문집 발간에 큰 공적을 남긴 용주 종친에게 기증하였습니다.(그 다음 날 대천해수욕장 모래밭에서 용주 종친은 서두 부분을 보니 안렴사공파 화산군문중에서 사용하는 파별 항렬자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소장해야 할 적임자에게 기증한 셈입니다.)
뒤따라 대종회장님의 건배 제의에 따라 가볍게 한 잔씩 한 후 점심을 들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나니 비에 젖은 몸이 훨씬 가뜬해졌습니다. 그런데 전서공파종회에서 여름캠프 행사로 전국의 종친들이 전서공 묘역을 방문한 답례로 52명이나 되는 참가자들의 점심식사비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늘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14:30~15:20 연기대첩비
점심식사 후 바로 옆 연기대첩비로 향했습니다. 이 연기대첩비는 우리 문중의 명장 중의 명장이신 김흔 상장군께서 합단적을 물리친 연기대첩을 기리기 위해 연기군청이 건립한 것입니다.(연기대첩에 대한 상세 내용은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연기군의 유일한 군립공원으로 정식 명칭은 연기대첩비공원이라고 합니다. 야외수영장과 소공연장을 갖추고 있어 지역민들이 많이 찾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흔 장군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흔 장군의 연기대첩비 건립은 해연 전 연기군총친회장을 비롯해 재붕 충남 문화재 전문위원, 재산 종친, 은회 종친 등 여러 종친들께서 김흔 선조님에 대한 자료를 발굴하고 책자를 펴내는 등 적극적인 노력에 의한 값진 결실이기도 합니다.
이 연기대첩비 외에 연기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종친들께서 1997년 5월에 연기대첩 현장인 정좌산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에 별도의 김흔 장군 연기대첩비를 세운바 있습니다.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에서 세운 ‘김흔 장군 연기대첩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 대박산 앞 정좌산은 고려 충렬왕 때 연기대첩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적이 고려로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다가 1291년(충렬왕 17) 5월 1일 이곳 연기 정좌산에 침입한 것을 격퇴시킨 연기지역에서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대승첩이었다.
적의 침입에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5월 2일 동이 틀 무렵 정좌산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너무 강력하게 저항함에 우리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후퇴하는 자는 엄히 참하리라” 하고 앞장 서 적의 예봉을 꺾고 진격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정좌산 전투에서 패주한 합단적은 남북으로 도주하였다가 5월 8일 전열을 재정비하여 원수산으로 다시 침략해 왔다. 원수산 전투에서는 한희유 장군이 앞장 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함으로써 전후 2년여에 걸친 합단의 침입은 종식을 고하였다.
이처럼 연기대첩은 합단적의 유린을 종식시킨 결정적 승전이었음에도, 후대에 이 대첩을 기념할 어떤 유적도 남겨놓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기대첩에 참여했던 김흔 장군은 안동김문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의 둘째 아들로 비록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연기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연기대첩지의 역사성을 기리고 아울러 방계의 조상을 기리는 깊은 뜻으로 이 비를 새겨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1997년 5월 공주대학교 교수 이해준 지음 충렬공 23대손 재산 씀 안동김씨 연기 종친회 세움
◆16:05~16:20 충청도 관찰사 선조님 불망비 15:20분 연기대첩비를 둘러보고 도유사 수회 종친 안내로 고복저수지를 출발, 16:05분 공산성에 도착하였습니다. 뜻밖에 공산성 입구 주차장에서 우리 일행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엄정 출신인 완식 종친이십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 한걸음에 공산성으로 달려나오신 모양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종친들께서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눕니다. 매표소에서 공산성의 서쪽 문인 금서루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역대 충청도 관찰사들의 불망비 수십 기가 서 있습니다. 공산성 인근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이곳에 모아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가문 선조님 중에서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신 분은 문숙공(휘 제갑)을 비롯해 관찰사공(휘 억령), 참판공(휘 시헌), 감사공(휘 소)이십니다. 이 네 분의 불망비는 본래 인근에 불망비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멸실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공주지역 종친들께서 지역종친회를 결성, 선조님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1992년에 다시 세웠답니다. 감사공은 ‘관찰사김공소거사비(觀察使金公素去思碑)’라 적혀 있고, 세 분은 ‘관찰사김공제갑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悌甲永世不忘碑)’, ‘관찰사김공억령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億永齡世不忘碑)’, ‘관찰사김공시헌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時獻永世不忘碑)’로 적혀 있습니다. 이 네 분 할아버지에 대한 상세 내용은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으로 대신합니다.
◆16:20~15:33 공북루 백일장 네 분 할아버지 불망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여름캠프 참가자들을 따뜻이 맞이해 하루 종일 애쓰신 수회 종친께서 돌아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서공파 종친들의 환대와 보살핌은 항상 가슴 속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우리 일행은 큰 박수로 수회 종친께 답례를 하고, 공산성 안의 공북루로 향했습니다. 조금 뒤 대구종친회 종친들께서도 인사를 하고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먼 길 무사히 귀가하시길 빕니다. 공북루 앞은 공주시를 관통하는 금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위례성을 떠나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도읍으로 삼은 도성이기도 합니다. 강 북쪽에서 공북루를 바라보면 금강 언덕 성벽에 그림 같은 정자가 앉아 있습니다. 공북루는 2층 누각 형태의 팔작집으로 내주가 없이 두리기둥 외주가 서 있어 누각 안쪽이 아주 넓습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 모여 앉아 ‘연기대첩비’를 시제로 백일장을 가졌습니다. 백일장 입상자 및 작품은 항용 종친께서 게시판에 올린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백일장(오행시) 작품 소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종친들께서 시제를 받고 멋진 시상을 떠올리는 사이에 발용 종친께서 전화를 주십니다. 어제 아침부터 벌써 서너 차례 주신 전화입니다. 회사 사정상 참석하지 못해 이곳 사정이 무척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그 마음 이심전심으로 전해져 옵니다.
◆17:33~18:50 공산성 출발, 칠갑산 숙소 착 저녁 시간으로 가고 있건만 한여름 길고 긴 낮이라 숙박지에 도착해서도 아직 해가 한 뼘쯤 남아 있었습니다. 칠갑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자랑거리인 작천리 까치내는 마침 아침 나절에 쏟아진 비 때문에 흙탕물이 흘러 아쉬웠습니다. 짐을 풀고 가볍게 몸을 씻고 나니 저녁식사가 푸짐하게 준비되었습니다. 대종회장님의 격려 말씀에 이어 식사와 함께 참가 가족들의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식사 후 20:50분경 대종회장님과 인천종친회장님, 사무총장님 등 문중 어르신 몇 분께서 상경하셨습니다. 늦은 시각에 일기마저 불순해 귀갓길 편히 가셨는지 내내 걱정스러웠습니다. 21:00분 항용 종친의 <예절의 기초-절하는 방법과 제복 벗고 입기> 강의 후 21:45분부터 어린 종친들을 위해 폭죽놀이를 가졌습니다.
■ 8월 4일(목) - 2일차 ◆09:10~09:40 장곡사 09:10분 숙소를 출발해 09:17분 장곡사에 도착했습니다. 장곡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천년 역사와 더불어 국보 2점, 보물 4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느 절과 달리 대웅전이 두 곳이라 특이하기도 합니다. 아래 대웅전에서 위 대웅전으로 향하는 돌계단으로 올라서자 수백 년 됨직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아래쪽 전각들을 모두 덮을 정도로 잘 자라 있습니다. 위쪽 대웅전에는 스님 한 분이 절을 올리는 중입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습니다.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땀에 젖은 부분이 검게 내비쳤습니다. 스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인간사는 재물욕을 비롯한 온갖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데...보잘것없는 그 욕심은 마치 칼날과 같아서 움켜쥐면 쥘수록 손이 베이고, 끌어안으면 끌어안을수록 가슴을 향해 파고드는 것을...요즘 제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런 처지입니다. 허무한 미망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편안해지기를 간절히 빌면서 장곡사를 나섭니다.
099:40~10:55 장곡사 출발, 부사공 묘역 착 착잡한 마음으로 장곡사를 벗어나 부사공 묘역으로 향합니다. 선두 차량에 재은 전 부사공파 회장님께서 동승하셔서 길 안내를 맡으셨습니다. 지난 번 사전점검 당시 일정에 쫓겨 답사하지 못해 길 안내를 드리지 못하는 점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부사공 재실은 민가 형태였는데 화재로 소실돼 여러 해 전에 단층 슬라브 형태로 새로 지었습니다. 재실에는 부사공 종손이신 희용(재行) 종친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맞절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재은 전 회장님과 종손으로부터 귀한 말씀을 듣습니다. 충남 홍성군 은하면 대천리 은하봉의 부사공(휘 천순) 할아버지 묘역에는 파조이신 부사공을 비롯해 좌랑공(휘 담), 미암공(휘 대래), 소위장군(휘 현), 예조참의(휘 진), 부위공(휘 홍윤), 판교공(휘 인상) 할아버지께서 모셔져 있습니다. 미암공 묘소는 실묘이며, 다른 할아버지들께서는 단소입니다. 이에 부사공파 종친들께서는 성금을 모아 1991년 4월 5일 미암공 위쪽에 부사공 이하 선조님들의 단소를 설단하게 되었답니다.
충렬공부터 부사공파 선조님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부 계대는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충렬공 → 1子 판서공(휘 선) → 2子 충숙공(휘 승용) → 2子 장령공(휘 구) → 2子 부사공(휘 천순) → 子 좌랑공(휘 담) → 子 미암공(휘 대래) → 1子 소위장군(휘 현), 2子 예조참의공(휘 진)
부사공 할아버지 단소를 설단하게 된 것은 미암공 할아버지 묘소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재은 전 회장님께서는 들려 주십니다. 또한 예조참의공(휘 진) 할아버지의 큰아드님 판교공(휘 인상)께서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풍천임씨 따님을 맞이하셨답니다. 이런 연유로 철원지역에 부사공파 종친들께서 세거하게 되었는데, 판교공의 장인은 후손이 없어 오늘날까지 외손봉사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실묘인 미암공 묘소에는 오래 된 묘표와 망주석 1쌍이 서 있습니다. 상석은 2보×1.5보, 두께 0.5보로 상당히 큰 편입니다. 고비의 글자는 풍화돼 알아볼 수는 있으나 상당히 마멸된 상태였습니다. 1995년에 새로 세운 묘비에는 비문을 영의정 남구만이 찬 병서하였으며, 1995년 을해년 10월에 개립(改立)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미암공에 대해서는 최근 태영 종친께서 귀한 자료를 발굴, 소개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 홈 게시판의 <김 교관(金敎官) 시권(詩卷)의 서문>와 <김교관(金敎官) 대래(大來)에게 주다> 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쪽 부호군공(휘 백영) 묘소에는 묘비와 망주석 1쌍, 상석(2보×1.5보)이 배치돼 있습니다.
▣ 부사공 묘역 헌관 ▲부 사 공 : 헌관 영환, 집례 항용, 집사 진회, 은회 ▲좌 랑 공 : 헌관 광도, 집례 항용, 집사 용준, 상석 ▲미 암 공 : 헌관 용주, 집례 항용, 집사 용환, 필교 ▲소위장군공 : 헌관 윤만,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예조참의공 : 헌관 태우,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부위공(휘 홍윤) : 헌관 진회,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장사랑공(휘 규) : 헌관 상석,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부호군공(휘 백영) : 헌관 태영,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부사공 묘역에서 참배를 마치고 13:30분 시가지로 되짚어 나와 시원한 냉면으로 달궈진 속을 식혔습니다. 이 자리에서 재은 전 회장님께서는 오늘 아침 심사한 백일장 입상자에게 대종회장님을 대리해 상장을 수여하셨습니다. 점심식사 후 다음 날 행사를 계속할 가족만 남고 다른 분들은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더운 여름날 노고가 크셨습니다. 무사히 귀가하시길 빕니다.
◆13:30~14:25 은하면 시가지 출발, 대천해수욕장 착 1박 2일 대종회 주관 공식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안사연 자체행사를 위해 7가족[영환(2명), 상석(3명), 태우, 항용(2명), 용주 3형제(6명), 윤식]이 14:25분 대천해수욕장 민박집 갯마을펜션에 도착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설이 훨씬 깨끗하고 에어컨도 ‘빵빵하게 잘 돌아가서’ 참가가족들은 한참 동안 에어컨을 틀어놓고 지친 몸을 쉴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 편히 쉴 곳 찾느라 여러 차례 대천에 내려와 민박집 일일이 살피신 상석 종친의 자상한 배려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몇몇 종친들 해수욕장으로 발 담그러 나간 사이에 상석 종친을 비롯한 몇 분이 인근 어판장에서 저녁 찬거리를 준비해 왔습니다. 항용·용주 종친 부인두 분께서 정성껏 마련하신 해물 매운탕으로 오랜만에 집에서 먹는 것 같은 저녁을 먹고 19:40분 제1회 대천해변음악축제를 구경하러 나섰습니다. 출연 가수들이 70~80년대를 풍미했던 윤형주, 송창식 등등 중년층이 열광하는 통기타 가수들입니다. 인산인해를 이룬 공연장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간신히 무대 옆쪽에 자리를 잡고 눈과 귀를 무대에 집중합니다. 둘다섯의 <밤배>, <긴머리 소녀> 등 옛 추억이 잔잔히 떠오르는 아련한 선율에 취했다 최성수가 등장하자 오빠부대 원조인 ‘중년 아줌마들’ 함성이 저녁 바다를 출렁이게 만들었습니다. 늘 웃는 얼굴 이용복은 <그 얼굴에 햇살을>과 <줄리아>로 보는 이들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었고, 그 뒤를 이어 하사와 병장, 김도향, 양하영, 송창식 등이 옛 생각을 물씬 묻어나게 했습니다. 우리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 신명이 나서 장단 맞추는 것 또한 그 날 분위기를 한층 흥겹게 만들었습니다.(딱딱한 콘크리트 계단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가 배겨서 혼났습니다.) 상석 종친께서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면, 무대가 막을 내릴 즈음 카메라가 객석 뒤쪽의 우리 일행을 아주 잠깐 포착했다고 하더군요. 그 날 그 분위기는 상석 종친께서 올리신 <아주 작은 행복-SBS 특집방송을 보다가>로 대신합니다.
해변축제 관람 직후 멀리 중국에 계신 주회 종친께서 상석 종친께 전화를 주셨습니다. 여름캠프 소식이 몹시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통화가 끝나고 얼마 후 가족들이 민박집으로 돌아오고, 영환 종친께서는 상경하셨습니다. 밤길이라 상경하시는 길 내내 걱정스러웠습니다. 아쉬운 작별 후 나머지 가족들은 바닷가로 몰려가 남아 있던 폭죽 터트리고 이야기꽃을 피운 다음 단잠에 빠졌습니다. 이 날 용주 종친께서는 화산군(휘 주) 할아버지 문집 간행을 추진할 당시 아무것도 없이 출발했는데, 후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는데,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화산군 할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듯한 기분을 여러 차례 느꼈다고 합니다.
8.5일(금) - 3일차 ◆10:30~11:10 대천 출발, 호국사 착 다들 피곤했는지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아침을 지어 먹고 10:30분 대천해수욕장을 빠져나와 마지막 답사지 호국사로 향합니다. 이곳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 도중에 길을 잃었는데, 성주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호국사에 대한 설명은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으로 대신합니다. 호국사 입구는 좁은 길이라 자칫 지나치기 쉽습니다. 입구에 무지개파크가든 간판이 있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서니 음식점 안마당이 아주 넓습니다. 그 앞에 개량한옥으로 지은 호국사가 있습니다. 민가 형태입니다. 그 뒤에 임란공신을 기리는 각종 비석과 임란공신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좌우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휘호 ‘조국수호(祖國守護)’비와 ‘진충보국(盡忠報國)’비가, 중앙에 ‘임란선무호성정난 일만구국공신제단(壬亂宣武扈聖靖難 一萬救國功臣祭壇)가 서 있습니다. 이외에 경내에 무명용사충혼비를 비롯해 여러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제단비(祭壇碑) 뒤쪽에 현재 임란공신 수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일만구국공신제단’이라 한 것으로 보아 10,000분의 위패를 모실 계획인가 봅니다. 호국사를 설립한 고 안병훈 선생의 큰 뜻을 조금이나 짐작케 합니다. 우리 일행은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해 수도 서울에 전각을 짓고 광복절에 개막식을 가져도 좋을 사업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위패는 2뼘×5치×3치(개략 치수) 크기의 오석(烏石)으로 본관과 휘자를 적었습니다. 우리 문중 할아버지로는 충무공(휘 時敏) 할아버지와 충민공(휘 欽) 할아버지 두 분이 모셔져 있습니다. 충민공 위패는 제1열 왼쪽에서 46번째, 충민공 위패는 왼쪽에서 49번째에 모셔져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충무공께서는 임란 당시 진주성을 수호하여 왜군이 이순신 장군의 배후를 치는 것을 막음으로써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셨습니다. 당시 충무공께서는 진주성 전투 직후 적병의 유탄에 의해 순국하셨습니다. 충민공께서는 신립 장군과 함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에 맞서시다 절통하게도 순국하셨습니다. 부족한 병력과 화력으로 장렬히 순국의 길을 택하신 두 분 선조님께 우리 일행은 묵념을 드립니다. 이외에도 제3열 오른쪽에 공신녹권이 커다란 돌판에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에 문숙공(휘 제갑) 할아버지 휘자가 새겨져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우리 문중 할아버지 외에 분적해 나간 성씨 중에서 수안김씨 김난서(金鸞瑞) 공(제1열 왼쪽에서 56번째)과 수성최씨 최희급(崔希伋) 공 및 최희량(崔希亮) 공 위패가 제3열 제7번째와 8번째에 각각 모셔져 있습니다. 수안김씨와는 2003년 제2회 여름캠프 행사로 400년 만의 감격적인 만남을 가진 바 있습니다. 당시 김난서 공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김난서 공의 김건 공께서는 이순신 장군 밑에서 적선을 격파하는 등 큰 공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장차 우리 문중에서 분적해 나간 성씨들 대표가 충렬공 향사에 참여하는 꿈을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큰일을 하시려니 작은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충무공 할아버지 위패가 제3열 왼쪽에서 43번째에 또 모셔져 있습니다.
▲호국사 찾아가는 길 △위치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안내 : 보령 시가지 → 성주시청(언덕길) → 성주터널(언덕길 계속) → 터널에서 1km(터널 빠져나오면서 내리막길) → 1km 지점(우 : 초가삼간 음식점, 좌 : 호국사 입구, 좁은 길, 무지개파크가든 간판 있음) △주의 : 내리막길이라 호국사 입구를 찾기 어려움. 언덕을 다 내려가면 3거리임. 이곳에서 U턴해서 다시 조금 올라가야 함. 길을 잃고 다시 찾느라 이곳에서 U턴 가능한지 확인 못함.
참배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잠시 산 속 그늘에 들어가 차가운 음료로 갈증을 달랜 다음 길을 되짚어 나와 서해안고속도로 인근의 냉면으로 허기를 달랬습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용주 종친께서 공조참판공(휘 오문) 할아버지 묘소에 관한 귀한 정보를 주셨습니다. 공조참판공께서는 안정공파 파조이신 휘 구덕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십니다. 현지 노인들의 말로는 공조참판공 할아버지 묘소가 여주의 안정공 묘하(여주군 가남면 원승리) 밭에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시원한 냉면을 먹고, 참가 가족들은 안전한 귀가를 위해 음식점 앞에서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습니다. 모든 분들 무사히 귀가하시기를 빌면서 서울로 향합니다. 안산에서 길을 바꿔 서울로 들어가 볼일을 본 다음 병원에 들렀다가 집에 도착하니 저녁시간입니다. 일정을 줄여 예년보다 시간에 덜 쫓기지는 하였으나, 2박 3일 동안의 기나긴 여정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지나갑니다. 더운 날 참여해 주신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 그리고 전서공파 종친들과 각지에서 참여해 주신 지역종친회 및 참가 가족 여러분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이상 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보고를 모두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김항용, 김정중 / 글 김윤식>
*제4회 여름캠프때 사용한 상장과 각종 유인물
이수증은 금년에 신설한 증서입니다. 1박 2일 전 과정을 이수한 종친들에게만 수여했습니다.
체험학습 확인서는 초 중 고 학생들에게만 발급하였습니다. 학교에 제출하여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도록 했으며 고입, 또는 대학입학시 유익한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습니다. 즉 학교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면 대학입학시 서류전형 점수에 가산점, 면접시 활용, 자기소개서 작성 또는 학과지원동기 작성시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참석 학생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자료입니다.
각종 상장도 역시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어 위와 같이 유익하게 활용됩니다.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백일장 작품 소개>
1. 실시일시 : 2005. 8. 3. 15:00시 2. 장소 : 충남 공주시 공산성 내 공북루(拱北樓) 3. 참석자 : 약 40여 명 4. 글제 : 연기대첩비 5. 작성방법 : 5행시로 글제를 각 행의 머리글로 삼아 작성 6. 작품심사 결과 : 청소년부만 심사함. 장원 1명, 나머지는 우수상으로 시상함 7. 작품 소개 (청소년부)-소개순서(무순)
1)김예진(제)-장원 연-연기 이 땅에서 700여 년 전 울렸던 그 한 마디 “돌격하라” 기-기세 꺾인 적에게 던진 김흔장군님의 불멸 함성 대-대장부의 크나큰 뜻이란 이것이리라 첩-첩첩산중, 그 분 혼 숨쉬는 정화산 비-비문을 가슴에 새기며 반짝이는 나의 눈
2)김필교(안) 연-연기대첩비로 5행시를 기-기차게 지어 볼란다 대-대단한 솜씨로 연기대 첩-첩비를 지으려 하니 비-비상하는 새를 따라 김흔장군 혼백이 여기 맴 돈다
3)김선응(제) 연-연기대상을 뽑는 날이었다 기-기분이 좋았다 대-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첩-첩첩이 옷을 입은 여자 때문에 2등을 했다. 그래서 비-비처럼 눈물이 쏟아졌던 일이 있었다.
4)김슬빈(제) 연-연기대첩비 그 기-기인 길이만 해도 성인남성의 5배 정도이다 대-대략 7000여 만원의 돈으로 만든 대 첩-첩비, 비록 700여 년이 지나 세운 대첩 비-비이지만 아름답고 웅장하구나
5)김은영(안) 연-연기대첩비를 보다. 우리 할아버지 김흔장군의 기-기가 느껴진다. 이 비는 연기고장을 대-대표하는 승 첩-첩비가 아닌가 비-비록 잘 알지 못해도 많이 배우고 돌아 가리라.
6)김용진(제) 연-연기에서의 합단적 토벌로 고려의 기-기강을 더 높여 주고 대-대 고려의 강력함을 보여준 대 첩-첩비를 통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비-비문에 아로 새겨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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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성인부) 1)김진회(밀) 연-연기처럼 휘날리며 기-기발한 전략으로 대-대승첩을 그리며 첩-첩첩 산중에 비-비호같이 합단을 물리친 자랑스런 김흔 선조님
2)김관묵(안) 연-연연세세 긴 세월 속에 기-기가 서린 선조님의 넋 대-대단원의 역사를 이룩하였네 첩-첩첩이 쌓인 이 그리움을 비-비분강개로 달래볼까나
3)김상석(제) 연-연연히 흐르는 금강가 공북루 기-기교 부려서 오행시 짓노니 대-대장군 선조님 상락공 차자로 첩-첩첩산 연기로 합단적 올 적에 비-비수를 휘둘러 고려를 구했네
4)김항용(제) 연-연기에 우뚝한 상락공 대첩비 기-기대어 그날 함성 듣고 있소이다 대-대첩 이뤄 이 땅 지킨 정화산 용맹 첩-첩첩이 역사 속에 살아 이어와 비-비문 속에 새겨진 혼백, 묵념하는 오늘이로다
5)김영환(문) 연-연기지역 안김 현종님들의 기-기막힌 숭조이념은 대-대단히 훌륭하시어 첩-첩첩이 쌓인 노력으로 비-비로소 큰 공을 이루셨다네
6)김태영(군) 연-연기군에 유명한 기-기념비는 김흔 선조님의 혼이 서린 대-대첩비라네 첩-첩첩이 비문을 바라보는 후손들 비-비를 맞으며 뭉클한 가슴이어라
7)김정중(도) 연-연기대첩을 아십니까 기-기록에만 보아 왔던 합단무리 물리친 대-대첩비를 읽고 또 더듬어 보니 첩-첩첩 산중에서 온 나그네의 비-비감한 심사를 어찌할꼬
8)김윤만(문) 연-연기군 전의지역 전서공 세거지에 기-기필코 찾아와서 묘역을 참배했네 대-대견타 안동김문 전국의 후손들 첩-첩첩이 둘러쌓인 산중의 명당터에 비-비석이 우뚝 섰네 김흔장군 연기대첩비
9)김완식(익) 연-연연이 이어져도 튼튼한 뿌리가 기-기상으로 솟구쳐 올라 대-大家, 大名門의 긍지 보이니 첩-첩첩 산중에 우뚝 선 안동김문의 비-비림(碑林)이 빛나도다
10)김영윤(문) 연-연기대첩비의 오행시제를 받아 기-기세좋게 시를 써내려가는 안김의 후예들 대-대대로 이어지는 명문의 후손들답게 첩-첩字의 난제를 무난히 넘어 비-비로소 저마다의 주옥같은 명시를 지어 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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