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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안사연 여름캠프 해설자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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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49 조회9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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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5>

Ⅳ. 대안군(휘 은열) 단소


○ 김은열 묘지명(金殷說 墓誌銘)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로 시중 시랑이고 고려의 평장사인 은열이 무진년 3월 초 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이 어우러지는 북쪽언덕에 장례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굉(鍠)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鐘)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 태화(泰華)이다.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대안군 묘소 오늘날 위치 : 개성군 영남면 용흥리 화곡 오룡산 남쪽기슭

   《김녕김씨선원세계표(금녕군직계)》 


대안군 은열공 령단

 경순대왕릉 가는 길 우측에 대안군 은열공 령단이 있다. '령단봉안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보국대안군은 관조시며 명현조시고 태사공은 파조 1세시며 명현이신데 奉祀(봉사)함에 있어 고려조에는 봉사했었는지 모르나 조선조이래 于今(우금)까지 봉사한 사적이 없다. 시원조께 숭경지성이 희박하여 근본을 망각한 得罪罔極(득죄망극)함을 覺醒(각성)하여 령단 봉안하자는 발의에 후손들의 열성으로 웅대한 령단이 謹竪(근수)되고 辛巳(신사) 10월 20일에 역사적인 初有(초유)의 奉安祭(봉안제)를 봉행하였고 금후 매년 음 3월 4일에 享祀(향사)할 것이다. 此(차)를 기념하기 위하여 입석을 하고 (玄玄 : 자)에 헌성금을 협조한 후손들의 명단을 刻記(각기)하여 후세에 계승하고자 하는 바이다.

                                           서기 2002년 임오 3월 일

                                          경주김씨 태사공파종회 건립


  그리고 령단지 상단 중앙에는 「高麗輔國大安君侍中侍郞 平章事慶州金公諱殷說國大夫人慶州崔氏 之靈壇(고려보국대안군시중시랑 평장사경주김공휘은열 비국대부인경주최씨 지령단)」과「高麗國文純公檢校太師 慶州金公諱仁琯 配小國夫人利川徐氏 之靈壇(고려국문순공검교태사 경주김공휘인관 배소국부인이천서씨 지령단)」비갈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령단 비갈 좌우측에는 龜趺部(귀부부)에 용의 이수를 한 「高麗輔國大安君侍中侍郞 平章事慶州金公諱殷說 之靈壇碑(고려보국대안군시중시랑 평장사경주김공휘은열 지령단비)」와「高麗國文純公檢校 太師慶州金公諱仁琯 之靈壇碑(고려국문순공검교 태사경주김공휘인관 지령단비)」비석이 석양과 망주석 장명등과 함께 곡장에 둘러 쌓여 조성되어 있다.

Ⅴ. 자운서원(紫雲書院)


1. 자운서원

○ 종  목 : 시도기념물 45호

○ 소재지 :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율곡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루던 분으로 『격몽요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이 서원은 효종 1년(1650)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액서원 으로 ‘자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인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 그 뒤 서원 터에서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대문 격인 자운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지내기에 적합하다. 사당 안쪽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에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2.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77호

○ 소재지 :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이다. 비는 서원의 자운문 바깥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은 아랫단은 4장의 돌로 짜 맞추고, 윗단은 옆면과 윗면에 각각 구름과 연꽃무늬를 두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썼다.


3. 사임당 신씨 묘

○ 종  목 : 시도기념물 14호

○ 소재지 :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1504∼1551)의 묘소이다. 사임당은 당호(堂號:이름대신 허물없이 부르거나 쓰기 위해 지은 이름)로써,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경전에 능통하였으며, 7살 때 이미 산수도, 포도도를 그렸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 그의 화풍은 따를 자가 없었고, 글씨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율곡 선생 같은 훌륭한 대정치가이자 학자를 길러낸 어머니로서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남편 이원수와 합장되어 있는데, 묘 앞에는 묘비 ·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후에 새로 세운 까만 돌(烏石)로 만든 묘비 1기가 묘 뒤편에 있으며, 상석 앞부분은 화강암 바닥으로 단장하였다.


4. 율곡 이이선생 묘

○ 종  목 : 시도기념물 15호

○ 소재지 :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율곡(栗谷) 이이(1536∼1584)선생의 묘소이다.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 13년(1548)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모두 9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좌랑으로 처음 임명된 후 황해감사,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예견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연구의 태도로 삼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성리설』,『성학집요』,『격몽요결』등이 있다. 현재 묘역 에는 선생의 묘와 부인 곽산 노씨의 묘가 위·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묘 오른쪽에는 묘비 가 있고,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다. 후대에 묘비 1기가 추가되었으며,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가족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역장묘의 사례】

  조선전기에는 역장을 금하는 풍습이 없었고 조선전기의 풍수지리학 책 역시 역장 금기에 대한 내용은 없다. 풍수에서 역장을 금기시하기 시작한 것은 유교적 질서가 완성되는 조선후기 17세기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때부터 가부장적인 질서나 동성마을, 가족묘인 선산이란 개념도 생긴 것이고 선산에 한 가족의 묘를 쓰게 되면서 이 당시 유교적 관념에 따라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 묘를 쓰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역장을 금기시하는 것은 풍수학적인 이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조선후기 풍속에 따른 결과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역장묘의 사례 : 율곡 이이뿐 아니라, 예학의 거장 사계 김장생, 성리학자 우계 성혼, 학자이며 정치가인 월사 이정구의 묘가 역장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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