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안사연 여름캠프 해설자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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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50 조회1,086회 댓글0건본문
<자료7> 7. 김영수(金永綬) (1) 통제사 김공 휘 영수 타루비문(統制使 金公 諱 永綬 墮淚碑文) - 타루비(墮淚碑) : 비석을 보면 눈물이 흐른다는 뜻 - 공(公)이 통제사(統制使)가 된지 6삭만에 졸서(卒逝)하였다. 정종(正宗) 10년 병오(丙午)에 비(碑)를 세워 옛적에는 마구리(馬九里)에 있었더니 왕년(往年)에 충렬사(忠烈祠)앞에 옮겨 세웠다가 지금은 세병관내에 세워졌다. 六朔이營 / 육삭(六朔) 동안 영(營)에 계시면서<육삭(六朔) : 6달> 一心圖報 / 일심(一心)으로 보은(報恩)을 도모 했네<보은(報恩):나라에 대한 은덕> 身無兼衣 / 몸에는 겸의(兼衣)가 없고<겸의(兼衣) : 두벌 옷> 言不及私 / 말씀에는 사(私)에 미치지 않으셨네. 規畵未半 / 구획(區劃)에 아직 반(半)이 되지 못했는데,<구획(區劃) : 부임의 뜻> 公何遠棄 / 공(公)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버렸을까? 父老咸嗟 / 부로(父老)는 모두가 슬퍼하고<부로(父老) : 나이많은 이에대한 존칭> 士卒相弔 / 사졸(士卒)들은 서로서로 조문했네.<사졸(士卒): 사관과 군졸> ☞ 이 : 사졸이(호두머리+位) : 임할이 (2) 환선대(喚仙臺) 방선문 안쪽 바위에 있는 목사 김영수(金永綬)의 친필이다. 신선을 찾아온 문(訪仙門)을 들어섰는데 신선은 만나지 못하니 불러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 옆에다 절구까지 한수 지어 새겼다. 방선문과 마주해서 가장 알맞게 붙여진 이름이다. 글씨까지 활달한 초서체로 써서 선기(仙氣)를 더 느끼게 한다.<심재집(心齋集)>에는 본각에 대한 언급은 없고 방선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우선대(遇仙臺)’가 있다고 했다. 방선문으로부터 안으로 한번 거듭되는 층층한 절벽을 넘으면 또 편편한 반석이 있어 누대와 같다. 이름하여 우선대라 한다.(自訪仙而入踰一重層壁又有盤石如臺名曰遇仙) 이라는 문맥으로 보아 이 환선대는 아닌듯 하다. 방선문의 안쪽을 자세히 살폈으나 우선대는 찾지 못하였다. 어쩌면 예부터 신선을 만난다(遇仙)는 제액(題額)에 불만을 품은 김영수 목사가 신선을 부른다(喚仙)로 고쳐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3) 喚仙臺(신선을 부르는 대) 萬壑乾坤大 / 깊은 골짜기는 천지의 위대함이요 石門日月閑 / 견고한 돌문은 해와 달의 한가로움이라 曾云無特地 / 일찍이 일컫기를 배필 없던 삼신인의 땅 其箇有神山 / 그것은 바로 신령스런 산이 있음이라 花老已春冬 / 꽃 시들어 봄은 어느새 겨울로 바뀌어도 岩賞太古歡 / 바위는 여전히 태고의 기쁨 지닌 채 있다네 戞然鳴發意 / 알연한 학 울음소리 품은 뜻 잘 울려주니 知是在仙間 / 이런 이치 깨달음 선계의 경지 들어섰음이라 己亥(1779. 정조3) 春 金永綬 (4) 觀德亭(金永綬) : 원문 해독 및 번역<김익수(제) - 제주도 문화재 위원) 西去南來尺劒遊 / 서쪽을 떠나 남쪽으로 와 단검차고 巡狩하니 暮年官酒細傾憂 / 늙은 나이 관가의 술잔에 수심 겨워 鐘鳴故國三千歲 / 탐라 옛 나라 시작한지 아득한 세월 島屹重溟五百秋 / 넓은 바다 섬 다스린 지 5백년 牽進驊류疑漢渥 / 名馬를 끌어다 바친 것 漢의 渥洼神馬일 것이며 包盈橘柚等楊州 / 가득히 싼 귤은 揚州에 견줄 것이니 悠悠往跡山河在 / 지나간 자취 아득하건만 산천은 예대로 皓首殘孫淚不收 / 흰머리 노인, 잔약한 자손들 눈물 거둘 수 없네. 주 : 화류-(화:馬+華, (준마이름)화. 류:馬+留, (말)류).명마의 일종. 여기서는 제주에서 매년 바치는 진 공마를 뜻함. 漢渥-漢武帝가 渥洼水(중국 섬서성에 있는 하천의 이름)에서 얻었다는 神馬 楊州-중국의 귤의 산지인 揚州 (5)望京樓(金永綬) : 원문 해독 및 번역<김익수(제) - 제주도 문화재 위원) 快閣登臨愜壯遊 / 시원한 누각에 올라 즐겁고 장쾌한 전망 三山人說在瀛洲 / 사람들 말하길 三神山은 瀛洲에 있다고 하네 少時龍劒衝牛宿 / 젊은 날의 기개 龍泉劒으로 견우성을 찌를 듯 했건만 脫歲金丹夢玉樓 / 나이를 벗어나는 金丹 짓는 옥루의 꿈을 꾸네 客館多年無好味 / 客館에서 멋없이 보낸 몇 년 重溟何日有歸舟 / 넓은 바다 언제면 배타고 돌아갈까 北瞻宸極心逾耿 /북극성 바라보니 마음 더욱 초초해 紫氣遙運禁苑浮 / 자색기운 실어다 궁궐에 띄웠으면.... 주 : 望京樓-명종때 을미사변을 일으킨 왜구들이 퇴각하며 제주성을 포위했을 때 목사 金秀文이 왜구선박을 급습하여 공을 세우자 어사를 보내 공을 치하하자 그 보답으로 세운 목관아에 있던 이층 다락. 금년에 문화재청에서 복원하게 된다. 金丹-신선이 만드는 불로장생약. 玉樓-신선의 누각. 宸極-북극성. 제왕의 뜻. 禁苑-출입이 금지된 정원. 궁궐의 뜻. (6)관덕정(觀德亭) 관덕정은 제주시의 중심지인 중앙로터리에서 서쪽 공항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옆면 4칸,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다. 이 곳은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풀거나 또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창건 당시의 현판 '觀德亭'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썼는데 불에 타 없어지고 그 뒤에는 선조때 우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 가 쓴 액자가 걸렸었다고 한다. 현재 그 안에 걸려있는 액자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탐라형승(耽羅形勝)' 네 글자는 제주방어사를 지낸 김영수(金永綬)의 글이다. (7)용연(龍淵) 용연은 용두암에서 동쪽으로 약 200미터 떨어진 한천 하류에 있는 맑은 못으로 깊숙이 파고든 이 용연 양편에 병풍처럼 펼처진 높이 7-8 미터의 기암절벽 밑에 드리운 잔잔한 수면은 가히 환상적이다. 옛날 선비들은 여기에다 배를 띄워 낚시를 즐겼는가 하면, 시인묵객들이 달밤에 주연을 베풀고서 시흥을 돋구었다고 해서 '용연야범'이라 하며 영주10경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口名何太古 雲소九龍淵 (소:金肖)으로 시작되는 20행의 목사 김영수(金永綬)의 시가 암각되어 있다. 가까이서 살필 수 없기 때문에 10여자가 판독이 어렵다. 말미에 ‘목사 김영수가 경자년 봄에 취해서 쓴다’ 라고 기록 되어 있어 떠나기 전 해인 정조4년(1780)년 봄에 지어서 새겼음을 알 수 있다. 【마애시】 원문 해독 및 번역<김익수(제) - 제주도 문화재 위원) 1. 龍淵 1. 龍淵-- 先韻 五言律詩 격名何太古 / 오지병 모양 어찌 예부터 이름 불렸는가(격-월변 없는 膈. 오지 격, 솥 격) 雲鎖九龍淵 / 구름 걷힌 구룡연못 居五須居九 / 구오(九五)는 용비재천(龍飛在天)이거늘 出天悔在田 / 하늘로 솟아오르다 재전(在田)이라 후회되네. 行藏得中成 / 움직임 감추어 중정(中正)을 얻으니 權頭體方圓 / 머리와 몸체 균형 잡혀 모나고 둥그네 一理明無昧 / 하나의 이치 밝힘에도 몽매하니 物然我亦愁 / 만물 그러하니 나 또한 수심에 잠기네. 偸閑肩輿過 / 한가한 틈타 가마 타고 지나노라니 特地遠人烟 / 별천지 인가와 멀리 떨어지고 海闊千年國 / 바다가 펼쳐진 천년 된 고장 龍藏九曲淵 / 용은 아홉 굽이진 연못에 잠겼으니 古名眞有意 / 옛 이름 진정 의미가 있어 今賞豈非緣 / 오늘의 구경 어찌 인연이 아니랴. 雲雨急不返 / 이별이 아쉬워 급히 돌아가지 못하는데 朝日已西天 / 아침해는 이미 서산에 기우네.
2. 東韻 五言絶句 龍湫回九轉 / 용못<龍湫>는 아홉굽이 돌고 돌다가 不幸海相通 / 불행히 바다와 서로 통하네 莫遣秋花水 / 가을꽃 물에 떠보내지 마라 恐牽世客蓬 / 떠도는 나그네 속세에 얽힐지 모르니.... 金永綬 醉題于 김영수 庚子春 子 樂圓 경자년(1780. 정조4) 봄 아들 낙원 (8)여수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麗水湖左水營守城-設事蹟碑] 1779년(정조 3) 전라남도 여수지방의 사병(士兵)들과 의승(義僧)들이 뜻을 모아 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세운 비. 지정번호 : 전남문화재자료 제202호(1998. 8.13) 소재지 : 전남 여수시 연등동 376 크기 : 높이 167.5㎝, 너비 63.5㎝ 소유자 : 유상열 비문에 이 비는, 1773년(영조 49) 호남좌수사로 부임한 김영수(金永綬)가 전라좌수영성을 대대적으로 개축·보강하고, 군사를 정비하였으며, 군기·잡물 등을 마련하고, 월과미(月課米:중앙에서 지방 관아에 매달 부과하는 세금)와 털 없는 겉벼 등을 백성들한테 거두지 않고 마련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9)전라좌수영성(全羅左水營城) 전라좌수영은 북쪽의 종고산(鍾鼓山)을 후진으로 배경삼고, 남동쪽의 얕은 예암산을 안산으로 하여 산줄기와 그 사이에 생긴 경사대지 위에 축조한 일종의 평지석성이다. 남, 동 및 서쪽에 성문을 내고 남문 밖이 바로 바다와 면하게 하여 성체의 형상은 원형에 가깝다. 영성(營城)은 1774년 절도사 김영수(金永綬)가 수축공사를 할 당시에 곡성(曲城)이 6처라 하였으며, 여기에 각각 포루(鋪樓) 6채를 세우고 화포기(火砲器) 6좌(坐)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허섬(許暹)의 「호좌수영지」에는 1847년 당시 영성(營城) 내의 시설과 규모에 대해서 기록해 두었을 뿐 아니라 첨부한 영성도(營城圖)를 통하여 당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현재는 복개되어 도심 간선도로가 된 굴강(屈江)을 따라 남문에서 망해루(望海樓)와 진남관으로 이르는 남북축은 그대로 유지되며, 서문에서 군자동과 중앙동의 경계인 골목길은 망해루에 이르고, 다시 여기서 진남관 동쪽 담장을 따라서 동헌에 이르러 동사동과 관문동의 경계인 골목길을 따라서 동문에 이르는데, 도중에 중영(中營)과 장대(將臺)인 고소대(姑蘇臺), 기타 건물들로 연결된다. 이러한 가로망이 당시의 삼교차로(三交叉路)를 이루던 영성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서 지금은 골목길로 변하여 남아 있다. (10)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績碑) (유적) <전략> 영조 임오년(1762) 통제사 김영수(金永綬)公이 흥해군수로 부임한 후 11개의 보를 막으니 太平, (?)洞, 枾木, 都, 德城, (?)재, 예(?), 城谷, 小長生, 大谷, 南(?)등이다. 군수 김 공이 보를 막을 때에 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 일을 시키면서 입을 옷과 신고 다니는 신발까지도 현장 가까운 곳에 가져다놓고 기숙하면서 새벽 일찍 공사장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며, 일하는 자 가운데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현전(縣錢)으로 상을 주며 쇠고기와 술대접을 해가면서 노고를 치하함에 마치 군대를 통솔하는 것 같이 하였고, 때로는 백성들이 여가를 가지도록 해가면서 일년에 보 11개소를 막았다. 농사를 다 지은 후에는 태평들에서 수세100석을 거두어 살기 어려운 김상철(金尙喆)등을 도와주고 10석은 민폐를 끼친 자에게 혜택을 주는 등 골고루 백성들에게 은혜를 미치게 하니 그의 공적은 보를 막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금은 소장생보와 대곡보가 없어졌으나 당시 공적은 백성들이 칭송했었다. 공은 본디 안동사람으로 무과 급제하여 여러 고을 수령으로 다니면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진력한 기록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다가 죄가 있다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얼마 후 임금께 죄를 용서받아 통제사(統制使)를 제수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곧 남을 속이지 않았으므로 임금에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으리라, 이런 사실을 들어본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기를 원하지 않으리요. 애석하게도 당시 보를 막은 김공은 벌써 늙어버렸으니 흥해군수로 재직 당시 보를 막은 업적은 거의 기록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백성들의 간청에 의하면 공적을 특서(特書)하여 성상(聖上)에게도 알리고 흥해 백성들에게도 고하는 도다. (원문생략) 正祖10年(1786)丙午 五月 郡守 昌寧 成大中 謹記 築堤監官 閑良 金信得 竪石都監 折衝 崔奎炯 (11)제주성지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제주시에서 소유하고 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는 왜선이 침범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목사 성윤문(成允文)은 성벽을 5척(약 1.5m) 더 높여 쌓고, 포루(砲樓)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1780년(정조 4)에는 목사 김영수(金永綬)가 산 아래 하천 주변과 그 밖의 하천 주변에 익성(翼成)과 보(堡)를 쌓았으며, 이후 계속 수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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