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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선조님의 묘지호-분청사기 (2001. 8. 27. 김 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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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50 조회1,1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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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분청사기는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히 발전된 도자기로서 골동품세계시장인 [소더비] 경매장에서도 그보다 더오래된 고려청자보다도 더 높게 평가되며 질박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기법이 우리 민족을 닮은 듯 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청사기로 된 지석은 별로 발견 된 일이 없는데 문온공의 아드님이며 성천도호부부사를 지내신 휘 明理 선조의 묘지가 있어 이에 소개합니다.

우선 분청사기에 대하여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실물은 문온공파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아직 문화재계나 도자기학계, 금석문학계 어느곳에도 보고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선하여 우리 홈페이지 가족에게 먼저 사진으로나마 공개합니다.

紛靑象嵌正統4年銘圓筒形安東金公明理墓誌銘 해설

1.유사한 도자기 묘지로 정통14년(1449년)에 제작된 "분청삼감정통14년명원통형묘지"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매우 조잡하다.
이를 보고 우선 이름지었다.

2.粉靑沙器=紛粧廻靑沙器의 줄인말로, 이말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우리나라 유일의 미술사학자였던 고유섭 선생께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지마(三島)"란 용어에 반대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3.紛靑沙器 陶磁器史=고려말 퇴락해가는 14세기 상감청자의 뒤를이어발생하였고 15세기 초 조선왕조의 기반이 튼튼히 닦여진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새롭게 서서히 탈바꿈하였다.  세종대왕 때에는 기법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그 절정기에 이른다.  15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 생산의 官窯가 국가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분청사기는 16세기에 들어와 점점 백자에 흡수된다.  14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 약 200년간 조선 도자기 공예 중 독특한 아름다움을 생산해 낸다.  다른 나라에서는 청자에서 백자로 곧바로 이행되는데 우리나라만이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중에 분청사기를 갖고 있으며 귀족적이며 섬세한 청자, 유교적 이념을 내포하고 풍만한 기형의 백자와는 달리 해학적이며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힘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4.제작시기=銘文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正統四年은 서기 1439년이며 세종 21년이다.  분청사기의 절정기인 중기에 제작되었다.  그 중기중에서도 가장 발전기(1420-1450년)에 해당하며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유산과 업적을 남긴 세종(1418-1450년)때이다.

5.제작장소="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가 139개,도기소가 185개 모두 324개소가 있다고 되어있다.  분청사기는 자기소에 속하며 지금 현재 확인된 곳으로는 약 10여개소가 있는데, 가마터로서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수리, 관음리, 중부면 번천리, 남종면 삼성리, 초월면 학동리,충남 공주군 의당면 가산리, 중흥리, 연기군 창라리, 기룡리, 쌍류리, 공주군 반포면 온천리,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경남 진양군 효자리, 사천군 구암리, 고양군 송전리, 양산군 화제리, 가산리 등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자기의 질을 상품,중품,하품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경기도에서는 광주군 중부면 번천리가 상품 생산지에 해당된다.  "김명리 묘지"가 어느곳에서 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만 묘지의 내용이나 도자기 표면에 기법(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번천리, 퇴촌면 도수리의 가마터에서 나오는 陶片는 주로 象嵌, 印花 문양이 주를 이른다.)을 볼 때 경기도  광주일원에서 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6.제작기법=몸체에는 글씨를 상감하고, 윗 부분에는 연꽃봉우리 모양으로 따로 만들어 붙였으며, 연잎으로 추측되는 삼각형의 문양을 투각하고 그 주위에 삼각 모양을 따라 음각선을 넣었다.

7.상감기법=12세기 중엽 이후로부터 13-14세기를 거처 15세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에 까지 적용되는 기법이며 한국의 대표적이고 독특한 무늬기법이다.  조각한 음각선에 정선된 백토를 넣어 다시 깎아내고 도자기 표면과 같이 다듬는다.

8.원통형 묘지가 온전히 발견된 예가 없고 기면 전체에 작고 정갈한 글씨를 상감한 예도 드물다.  陶磁器史 編年으로나 또 글씨체나 기형, 기법으로 상당히 중요한 도자기로 사료되어 史界에 공표하여 문화재로서 지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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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청사기의 자료는 도자기사 및 국립중앙박물관 발행도서, 이조도자백자편,이조도자분청사기편(계간미술 발행)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으나 잘못된 점은 연락하여 주시면 다음에 참조하도록 하겠습니다.

*李朝도자기,李朝백자등 李朝를 붙이는 것은 일제가 朝鮮의 권위를 낮추기 위해 써온 말로서 朝鮮도자기, 朝鮮백자, 朝鮮왕조등으로 써야 합니다.  다만 책이름이 그렇게 되어 있어 (그것도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 "계간미술"에서 그렇게 쓰다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용하였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 김영환  서울 557-0543  016-363-0543  solnae@paxnet.co.kr.

실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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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도호부사 안동김공 명리 묘지명을 번역하여 올립니다.

여기에서 살펴보면 그당시의 안동김문과 다는 집안과의 혼맥을 대강 알수 있습니다. 특히 광산김씨: 부사공의 사위인 김철산과 그의 아들인 김국광은 광산김씨의 홈페이지에서도 광산김씨의 정신적 기둥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 5대손이 바로 사계 김장생입니다.  그밖에 화순 최씨, 경주이씨, 청주한씨 등 자세한
혼맥(우리의 외가, 또는 우리가 외가인)은 다음 기회에 다시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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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 奉政大夫 成川都護府副使 兼 勸農副使 安住 左翼兵馬團鍊副使 金公 明理 墓地銘
조선국 봉정대부 성천도호부부사 겸 권농부사 안주 좌익병마단련부사 김공 명리 묘지명

  공의 성은 金이요, 諱는 明理이니 安東인이시다.  신라 경순왕 김부의 15대손인 고려국 문하시중상락군개국공 金方慶1)의 5대손이시다. 증조의 諱는 金承澤이시니 직량동덕좌리공신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諡 良簡公이시며,할아버지의 諱는 金昴이시니, 추봉 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 중대광 上洛君이시며, 아버지의 諱는 金九容2)이시니,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이시다.  어머니는 추봉 봉익대부 밀직부사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 통직랑 예의정랑 南陽 洪義元의 따님니시다.  공은 1361년(고려공민왕10년)에 태어나시었다.  나이 9세에 음보로 총릉직에 출사하시었고 15세에 이승상과 같이 진사시에 급제하시었으며, 서기 1384년(고려우왕10년)4월1일에 아버지 척약재께서 전교시판사의 신분으로 요동도사에 행례사로 가시었다가 명나라 조정에서 고려의 세공마가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황제의 명으로 대리위에 귀양되어 가시는 도중에 병환으로 돌아가시었다.  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픈 상중에도 생원과에 황현등과 함께 제4등으로 급제하시어 낭장에 제수되시고 이어   중랑장에 승진하시었다.  사헌부 감찰,호조좌랑,사헌부 지평을 하시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하신뒤 진양대도호부 판관을 거치시고 옥주군사에 나가시었다.  공은 백성을 다스리시매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관대하시고 또한 사랑하시니 만기가 되어 떠나실 때 백성들이 길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여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도관과 정랑에 잠깐 계시다 호조의 군자소감에 오르시었는데 다시 경기 및 경상도의 경력을 지내시고 경창부 소윤을 하시다가 경기도 탄곡리에 퇴거하시어 호를 炭谷野수라 하시었다.  이로부터 여러차례 조정에 나오시기를 권고 받았으나 사양하시다 서기 1427년(조선세종9년)가을에 성천도호부부사를 역임하시었는데 또다시 사임을 청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더니 겨울에 질병을 말하여 사임되시니 다시 탄동에 되돌아오시었다.  서기 1438년(세종20년)12월 23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이때 나이 71세이시었다.  부인 경주이씨께서는 공에 앞서 서기 1409년(태종9년)겨울에 돌아가시었으니 묘를 광주 둔촌 목동의 산기슭에 모시었는데, 1439년(세종21년)12월16일에 탄동소재 공의 묘소 남쪽에이장하시니 이는 공의 유언에 따라 행한 것이다. 공의 천성은 관후하시었고 풍의가 엄중하시었으니 타인의 실수를 탓하지 않고 부귀만을 탐하는 것은 대장부답지 못하다하였으며, 자제의 실수가 있었어도 즉시 질책하지 않으시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시었으며 의복은 필히 검소하고 음식은 정선하여 드시었으며 겨울에도 아무리 추워도 난로를 멀리하시고,여름에 무더위에도 부채를 쓰지 아니하시었으며, 틈만 나면 독서하시고 스스로 꽃씨를 뿌려 조석으로 손수 물을 주시며, 또 좋은 때 친구를 맞아하셔 술상을 극진히 대접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늙어서는 마땅히 물러나야 하며 재산을 불리려고 함은 곧 원수를 기르는 일인지라 이를 구하지 말고 또 출세하려 발버둥 치지 말라"하시었다.
  부인 이씨게서는 당성보리익찬공신 중대광 계림군이시며 시호는 文靖公 호는 霽亭이신 李達衷3)의 따님이시니 3남 4녀를 낳으시었다. 장남은 金孟獻4)이니 조봉대부 전농시 소윤 겸 지제교이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차남은 金仲舒5)이니 승사랑 전구서 부승이니 무오년에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삼남은 金季友6)니 무공랑 예문관 봉교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사재감 직장 權煊7)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좌군사직 南景福8)에게, 삼녀는 사선서 직장 金鐵山9)에게, 4녀는 중군 부사직 崔善文10)에게 각각 출가하었다.소윤 맹헌의 부인은 가선대부 동지중추원사 李思儉11)의 딸로서 3남3녀를 낳으니 金自정12),金自壤13),金自堉14)이고 장녀는 尹흔15)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부승 金仲舒의 부인은 중훈대부 합천군사 金礎16)의 딸로 1남을 낳으니 金自완17)인데 아직 어리다.  봉교 金季友의 부인은 선략호군 郭仲義18)의 딸로서 1남1녀를 낳으니 아들은 金自均19)이요, 딸은 아직 어리다.  큰사위 權煊은 5남늘 낳으니,생원 權국20,權擴21),權塡22),權抱,權 이며 장녀는 별시위 李孟智에 출가하였고, 둘째사위 좌군사직 南景福은 3남을 낳으니 南문,南暲,南暖이고 3녀중 큰딸은 郭伸餘에게 출가하였다. 셋째사위 사선서 직장 金鐵山은 4남을 낳으니 생원 金國光23),金謙光24),金廷光 金景光이고 딸 둘은 아직 어리며,金國光의 부인은 호군 黃保身25)의 딸로서 1남1녀를 두니 아들은 金유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넷째사위 중군부사직 崔善文은 4남3녀를 낳으니 崔漢公,崔漢侯,崔漢伯,崔漢男인데 모두 어리고,장녀는 부사정 呂仁甫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여인보는 1남을 낳으니 呂範이니 아직 어리다.소윤 金孟獻과 봉교 金季友는 모두 나와 같이 공부한 同年이다.  소윤 金孟獻이 나에게 찾아와 墓誌를 써주기를 극진히 청하여오니 나는 소윤 김맹헌과는 동문수학하고 같이 출사한 아주 교분이 두터운 사이인지라 감히 졸문이나마 사양치 못하고 썼노라.


서기 1439년(조선세종21년) 10월 하순


중훈대부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세자 우보덕 완산인 柳義孫2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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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방경 1212(강종1)-1300(충렬왕26) 고려후기의 명장, 시호는 충렬공 삼별초의 난 평정, 고려와원나라의 연합군 도원수로서 일본 정벌  
안동김씨의 중시조
2)김구용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고려말기의 정치가,성리학자,호 척약재,시호 문온공,안동김씨 문온공파 파조.
3)이달충.?--1385(우왕11) 본관 경주 시호 문정공, 호 제정, 계림부원군. 제정집이있음
4)김맹헌. 문과 대과 급제  예문관 직제학
5)김중서.  생원과 급제  호조참의
6)김계우. 문과 대과 급제  의정부 사인
7)권 훤. 안동인
8)남경복. 의령인
9)김철산. 광산김씨. 사헌부지평,광성부원군.
10)최선문. 화순최씨, 시호 문혜공
11)이사검. ?-1446(세종28) 양성이씨,시호 공소공 지중추원사
12)김자정. 직장
13)김자양. 내섬시첨정 호조참의
14)김자육. 무후
15.윤흔. 펴평윤씨. 현령
16)김초.경주김씨. 군수
17)김자완. 사헌 감찰. 임피현령
18)곽중의. 청주곽씨; 호군. 판서
19)김자균. 진천 현감
20)권국. 현감
21)권확. 호군
22)권전. 판서
23)김국광. 1415(태종15)-1480(성종11) 광산김씨.시호 정정공. 좌의정. 광산부원군. 6세손이 사계 김장생
24)김겸광. 1419-1490 시호 공안공. 예조판서. 광성군.
25)황보신. 황희 정승의 아들
26)류의손:1398(태조7)-1450(세종32) 조선 세종때의 문관, 자는 효숙,호는 회헌, 본관은 전주, 세종때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감찰에 이르렀고, 집현전수찬이 되어 1436년(세종18) 중시에 2등 급제, 직제학에 이르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아 승정원 동부승지에 뽑히고, 도승지가 되었으며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무고 사건으로 파직되매 세종이 슬퍼한 끝에 예조참판을 내리고 병이 심하여 몸이 쇠약하매 왕이 친히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권했다 한다.

원문은 생략하였으며 문온공파 전회장님니신 재승씨의 번역을 기초로 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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