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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유허지1-회곡동, 단호동, 소산동, 정하동 (2001. 7. 25. 김주회(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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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45 조회1,2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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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청 홈페이지 (http://www.andong.kyongbuk.kr/) 에서 찾아볼 수 있는 김방경 할아버지와 관련된 유허지 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 회곡동 (檜谷洞), 단호동(丹湖洞)


⊙ <안동김씨 (先金)>

시조는 金叔承, 신라 敬順王의 넷째아들 은열(殷說)의 둘째아들이며, 중시조 충열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은 경순왕의 9세손이다.


본래 寓居地(우거지)는 영가지 坊里편 府西조에 檜谷村이라고 소개되는 곳으로서, "下桂谷(현재의 풍산읍 계평리)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간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流傳하기를 충열공의 집터라고 한다"라고 記述하고 있다.


시조의 孫子인 利請은 안동태수를 역임하고 上洛君으로 봉해졌으며 여지승람에 안동(김씨)로 적을 받음이 공으로부터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안동의 또 다른 이름이 上洛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 또한 공으로부터이다.

忠烈公 金方慶(1212∼1300)은 일본 정벌 후 歸京하다가 영호루에 올라 지은 (동정일본과차복주등영호루)東征日本過次福州登映湖樓라는 시는 영호루 건립연대의 下限線을 밝혀주는 시이다. 묘우는 녹전면 죽송리에 있다. 先金의 貴는 모두 이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김흔(심방변+斤)은 金方慶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고, 鎭國上將軍, 都僉議使司에 이르렀으며, 上洛公을 계승하였고, 金恂은 高麗 忠烈朝에 장원급제로 출사하여 三重大匡에 이르렀다.


⊙ <청주정씨>

'영가지'에 의하면 청주정씨가 안동에 살기는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진 정 오와 우간의대부를 지낸 그 아우 정보 형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정책이 궁궐도감으로, 참소를 입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왕(충숙 왕)을 도운 공으로 청하군에 봉해지고 판도판서를 역임했는데, 이는 김방경의 아들인 상락군 김순의 사위로, 안동에 입향한 설헌 정오, 설곡 정보은 바로 이의 아들이다. 설헌은 문과급제로 공민왕의 사부, 첨의평리를 지내고, 그 아우 설곡은 진사, 문과로 충혜왕때 우간의대부를 지냈다.

'영가지' 방리편 회곡촌조에 '마을 어귀에 남향으로 된 큰 밭이 있으니, 예로부터 전하기를 충렬공이 여기서 살았는데, 설헌과 설곡형제도 외가로하여, 와서 살다'라고 했음을 보아, 설헌 형제가 이곳 회곡에 입향하게 되기는 그 외가의 반연이었음을 알수 있다.



▷ 회곡동 (檜谷洞)

뱃가·낙연(洛淵) : 회곡 아래에 있는 마을로 앞에 洛東江 물이 흐르고 낙연이라는 깊은 沼가 있는데 옛날에는 돛단배가 오르내렸으며 닻을 내려 머무르고 곡식과 소금 등 여러 가지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으로 지금까지 뱃가로 부르며 단호동으로 건너가는 나룻터이다


▷ 단호동(丹湖洞)

상락대(上洛臺) : 회곡 남쪽 강 건너 있으며 洛東江이 흐르고 마암절벽이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고려 후기의 명장 金方慶이 즐겨 유상하던 상락대는 豊山邑 丹湖洞 지경으로 남후면 검안 속칭 대애실 앞 眉川 물이 낙동강에 合流하는 목중이에서 서쪽으로 약 5里 지점이다.

강굽이가 북서로 꺾이는 아랫절마을 對岸. 길게 이어진 철길 절벽이 검푸른 강물, 沼를 굽어보며 굽이굽이 山水의 寄景이 펼쳐지는데 金方慶이 노닐던 상락대가 바로 여기이다.

상락대에서 江기슭을 거슬러 굽이를 돌아 오르면 江心에 드리운 절벽 위에 古色?은 한 채의 정자가 있는데 世宗대의 文臣 裵桓(杜門강洞 七十二賢인 裵尙志의 아들)이 은퇴하여 만년을 지내던 별장이다.

그 동쪽엔 馬岩이 있어 절벽이 천길이나 깎아지르고 마암 서쪽엔 石臺가 서려 돌아 그 기괴함이 이를 데 없다. 그 아래 못이 있는데 배를 대고 오르면 石臺는 수십명이 앉을만큼 넓다. 바위틈에는 부추가 많이 나 있는데 金方慶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지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강굽이 절벽 아래 깃든 上洛臺 一境은 江을 사이에 둔 들녁 저편에 마을이 빤히 건너다 보이지만 고요하고 깊숙한 맛은 그대로 속세를 멀리 떠난 심산 유곡이다.

등 뒤에는 온통 울창한 숲과 천길만길의 위태로운 절벽이 저 멀리에까지이어 뻗고 앞은 널따란 소를 이루어 검푸른 강물이 유유히 굽이치며 太古의 자연 그대로 원시의 정적이 고스란히 이어 흐르는 천고의 秘境이다.




▣ 소산동 (素山洞)

이 마을엔 고려개국공신 김선평(후안동)의 후손과 또 다른 한 갈래의 안동 김씨인 고려 후기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 공존하고 있는데 약 250여호의 마을이 거의 김선평의 후손으로 꾸려지고 있다.

素山에는 조선 중엽에 충열공의 11세손인 언준(彦濬)이 정착하였으며 현재는 약 10여호가 영가김씨(永嘉, 後安東金氏)들과 혼재하여 살고 있으며, 일부는 와룡, 회곡, 문경 산양 등지에 분가하여 살고 있다.

안동 소산에 世居하는 집은 익원공파로서 익원공 士衡은 永煦의 손자이다.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純忠紛議佐命開國功臣이 되고 태조 원년에는 左政丞으로 제수되었다. 권근, 이무, 이회 등과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世界地圖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를 제작하였다.

이 집안은 영가지에 보면 朝鮮 上界까지는 安東人物의 3분지 일을 차지하였고 조선에서도 가장 번성한 집안으로 꼽히었으나 中界以後로 오면서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 세가 약해 졌고, 落南이후에는 과거합격자를 거의 내지 못하였다.

단지 落南祖인 彦濬이 충좌위부사과를 지냈고, 孫子 就礪가 장예원판결사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자 仁達이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한다. 이후 用秋의 문장이 뛰어나 갈문록에 실렸고, 德胤, 宗洛이 문장이 높아 문집이 전함. 특히 宗洛의 호 三素齋는 이 집안의 宗家의 당호와 동일하며 壽職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받았다. 그리고 병자호란때 의병의 선봉으로 종군한 夢麟, 夢雄 형제의 활약상이 전한다.

안동에 있는 이 집안의 宗家인 三素齋(1674년 건립)는 경상북도 지방민속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안동 김씨의 대종가는 아니나 낙남 이후부터 서애의 외가인 의성군 점곡면 사촌의 안동 김씨(도평의공파) 집안과 번갈아 충열공의 향사를 맡아 주도적으로 지내 왔으므로 이후부터는 안동지방뿐 아니라 전국 선김의 중심적 역할을 하여 왔으며 대종회가 결성되면서부터는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특기할 점은 삼소재의 사랑은 槐堂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소산에 있는 대가들은 대문을 거의 설치하지 않고 대문이 들어설 지점에는 檜나무를 심어 그 경계로 삼았다. 이는 檜谷村(지금 풍산읍 회곡리)의 지명과 아울러 볼 때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정하동 (亭下洞)

영호루(映湖樓) : 고려 초기에 지은 이 건물은 강 북쪽 시내편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4차례의 큰 홍수에 유실이 되었으나,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다. 도심에서 걸어서 20분, 시내버스가 다니며 正方形의 넓다란 마루와 마루를 빙 둘러싼 난간이 갓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으며 둘레의 조경과 한 눈에 드는 먼 시계는 高山에라도 오른 듯 시원스럽다.

1000m나 되는 洛東江의 광활한 河福 동쪽 상류의 安東댐에서 배수가 있을 때는 눈부시는 백사장에 맑고 푸른 물굽이가 서쪽 하류를 향해 비단폭이 내달리는 長江 끝에 있는 이 정자에서 보면 먼 서산 마루에 내리는 태양과 타는 저녁놀이 물 위에 그 처절한 光芒을 드리운다.

이러한 悲壯美 때문에 창건이후 1000 여 년 동안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지금도 누각 안에는 禹 倬·鄭夢周·權 近·吉 再·李 滉 등 名賢들이 이 樓에 올라 지은 詩篇이 板刻에 걸려 있다. 누각의 정면에는 朴正熙 대통령의 한글 제액이, 북쪽에는 공민왕의 御筆 제액이 걸려 있어 嶺南樓·廣寒樓·矗石樓 등과 함께 나라 안의 손꼽히는 名樓 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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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마을지 下권에 실린 김방경 할아버지 관련 유허지 내용을 발췌하여 뽑아 보았습니다.



▣ 풍산면 회곡리


1)마을의 자연환경

풍산읍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남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남후면단호동, 북쪽으로 수곡동 막곡동을, 동남쪽은 계평동과 접하는 동리로서 낙동강이 북쪽을 흐름을 바꾸는 강 기슭의 구릉지대에 산재하는 촌락으로 형성되는 동리이다.


2)마을의 역사

본래 안동군 서선면 지역으로 전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회곡 또는 회곡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사동, 상계곡동, 증수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회곡동(리)라 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다.

영가지 안동부서의 방리조에
"회곡촌 : 하계곡 서쪽 얼마되지 않은 곳에 있다. 동리의 가운데를 조그마한 시내가 산에서 흘러내려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고산에서 흐르는 시내가 강과 합하는 곳에 충렬공 김방경 장군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어구에 남향의 화전이 있어 옛날부터 충렬공의 집터라고 전하여 왔으며 충렬공의 후손이 이 마을에 세거하면서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문극공 설헌 정오, 대사헌 정보가 이 마을이 외가 곳이 되어 우거하였다" 라 실리어 있다.

고려 명신 충렬공 김방경 장군이 노시던 곳으로 경관지로 알려진 낙동강의 절벽에 상락대가 마을 앞에 있다. 마을 앞의 소는 낙연이며, 그 앞에 단호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다. 상락대의 동편의 바위는 마암이라 가파른 절벽이 대의 경관을 더욱 높인다.



3)성씨별 가구분포

총 가구수 101가구, 안동권씨 14가구, 안동김씨 30가구,



▣ 남후면 단호리(丹湖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낙동강이 안동시 水下東을 돌아 서쪽으로 흐르면서 단호리에 이르면 북으로 흐름을 바꾸었다가 돌아서 남류하고는 풍산면의 마애리(麻厓里)를 돌고는 풍천면의 병산(屛山)으로 흘러간다.

안동시가에서는 서쪽 34번 국도로 松峴에서 남쪽으로 풍산읍 막곡리 계평리를 지나 회곡리에서 나루를 건너 오면 12km의 거리이다. 다르게 남쪽 5번 국도로 武陵에서 서쪽으로 개곡리 검암리를 거쳐 건지산 (표고 206m) 바로보면서 단호리의 벼탈으로 오면 15km의 거리이다.



2) 마을의 역사

영가지의 방리조에 실리기를
" <전략> 상락대는 안동부에서 25리가 되는 檜谷村(회곡촌)의 남쪽 강가의 벼랑이다. 상락군 김방경이 일찍이 遊賞(유상)했던 곳임으로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 동쪽에 馬巖(마암)이 있어 깍아 세운 듯 천길이나 되는 바위절벽이고, 마암의 서쪽은 돌로된 臺가 둘러있어 기이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울만치 아름답고, 아래쪽의 맑은 호수는 배를 띠울 만하고, 위쪽에는 수십인이 앉을만하다. 돌 사이에 菲菜(비채, 부추의 한가지)가 많이 살아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상락군이 심은 것이라 한다." 라 적고 있다.

洛江亭(낙강정)은 상락대 아래 公須浦(공수포) 위에 있다. 이조판서 마애 權(車+兒)가 지었다. 옛날에는 강정이라 했다. 지금은 그 옆에 判書淵(판서연)의 현판도 함께 걸려 있었다. 옛날에 퇴계가 마애를 이곳에서 만나 그 앞의 물을 판서연으로 이름짓고 현판을 썼다. 마애는 중종조의 명신이다.

퇴계의 시를 옮기면
小舟橫渡一江川 소주횡도일강천 자그마한 배로 강을 가로질러 건너와서
草屋中間謁退賢 초옥중간알퇴현 초옥 가운데서 벼슬을 물러난 어진분을 뵈옵는다
上洛臺前千丈水 상락대전천장수 상락대 앞의 천길으리 물은
從今換作判書淵 종금환작판서연 지금 판서연이라 이름 자구어 불러본다

웃단지 북쪽의 낙동강 가에 회곡으로 건너가는 회곡나루터가 있다.



3)성씨별 가구분포

총 가구수 138, 안동권씨 33, 안동김씨 11



4)마을의 특징

낙동강의 남쪽에 위치하여 좋은 경치의 상락대가 있고, 넓은 갯들이 있는 마을이다.




▣ 풍산면 소산리

2)마을의 역사

또 이 마을에는 충렬공 상락군 김방경 장군의 후예로 고려조에서 조선조에 걸쳐 많은 명현을 나은 안동김씨 (상락김씨)의 세거촌이며 그 종가 삼소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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