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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안동김씨 김순(金恂)계의 정치활동과 성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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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작성일24-06-03 21:26 조회34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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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白頤正, 李齊賢 가계와 연결된 金恂 2女의 통혼권
 
○白文節?~1282==▲李世柱女                                  ○權溥1262~1346==▲柳陞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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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頤正1247~1323==▲김순2女        ○李齊賢1287~1367==▲권부2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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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이정女==○李達尊1313~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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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德林 ○李壽林 ○李學林 ▲女==奇仁傑
 
요컨대 충렬왕대 宰相이었던 김방경의 영향으로 김순은 공암허씨의 딸과 혼인할 수 있었다. 그가 공암허씨의 딸과 혼인한 이래 그의 자녀들의 혼인으로 이천신씨, 청주한씨, 남양홍씨, 문화유씨, 안동권씨, 경주이씨 등 당시 세족가문들과의 통혼권이 형성되었다. 그 중 괄목할 만한 통혼권 확대를 가져온 것은 김순과 딸들의 혼인이었다.
김순의 혼인은 공암허씨 통혼권과 연결되어 1차적인 통혼권 확대를 가져왔으며, 딸들의 혼인은 남양홍씨 홍규와의 중첩된 통혼권을 형성케 하여 고려 내부에서의 정치적 위상을 향상시키고 원 조정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통혼권 형성은 명문가문과 통혼권을 확대·재생산하는 고려전기의 권력유지 수단이 통용되고 있다는 점과 원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원과 관련된 가계와의 통혼권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시대성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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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高麗史 권107, 列傳20 權㫜 附溥. “子準皐煦謙, 壻齊賢宗室璹珣皆封君, 子宗頂祝髮, 亦封廣福君, 世號一家九封君.”

Ⅲ. 金恂系의 특징과 위상
 
1) 金永旽의 정치도감 활동
 
金永旽(1285~1348)은 김순에 이어 代를 거듭해 科擧에 합격하였고,121)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대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江陵府錄事를 거쳐122) 典法摠郎, 都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으며,123) 1340년(충혜왕 후원년) 한 차례 知貢擧가 되어 同知貢擧 安軸과 함께 李公遂 등 12명을 뽑았다.124) 그리고 曹頔이 瀋陽王 暠를 옹립하고자 난을 일으키자(1339) 이를 진압하고 1342년 공신으로 봉해졌다.125)
충혜왕대는 충혜왕의 폐행과 충숙왕과의 重祚, 立省論의 제기 문제로 혼란이 계속된 시기로,126) 계속된 충혜왕의 失政은 충목왕대 整治都監의 설치로 이어졌다. 이때 김영돈이 정치도감 판사를 역임하며 개혁을 주도하여 주목된다.
충혜왕에 이어 충목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당시 정국은 재상들인 蔡河中, 韓宗愈, 李齊賢 등이 주도하였다. 이제현으로 대표되는 세력들은 일찍이 政房을 혁파하고, 銓注權을 典理司와 軍簿司로 이관할 것을 건의하였고,127) 1344년 12월 마침내 정방이 혁파되기에 이르렀다.128) 그러나 이듬해 정월 德寧公主에 의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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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高麗史 권73, 志27 選擧1 科目1 凡選場 忠烈王 31년 5월;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永旽, “忠烈王末登第.”
122)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永旽, “始除江陵府錄事.”
123) 김영돈묘지명 . “典校副令移典法摠郞.”, “庚辰. 襲位, □都僉議評理.”
124) 高麗史 권73, 志27 選擧1 科目1 凡選場 忠惠王 후1년.
125) 高麗史 권36, 世家36 忠惠王 후3년 6월 庚子朔.
126) 충혜왕이 즉위하였을 때 5차 입성론이 제기되었다. 이 입성론은 충숙왕 측근세력인蔣伯祥과 梁載가 일으킨 것이었으며, 이후 盧康忠, 王誼, 王榮 등이 다시 한 번 6차입성론을 제기하였는데, 이들은 충숙왕과 제휴하여 충혜왕 세력과 대립한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 7차 입성론은 1343년 충혜왕 실정을 원인으로 하여 반충혜왕 세력이었던 李芸, 曹益淸, 奇轍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렇듯 이 시기는 충숙왕과 충혜왕 세력갈등이 극대화된 시기라 하겠다(金塘澤, 1994, 高麗 忠惠王과 元의 갈등 , 歷史學報 142; 1998, 충혜왕과 元의 갈등 , 元干涉下의 高麗政治史, 一潮閣, 101~124쪽; 김혜원, 1998, 고려후기 瀋王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13~123쪽).
127) 高麗史 권110, 列傳23 李齊賢. “政房之名, 起于權臣之世, 非古制也, 當革政房, 歸之典理軍簿.”
128) 高麗史 권75, 志29 選擧3 銓注 凡選法 忠穆王 즉위년 12월. “罷政房, 歸文武銓注于典理軍簿, 尋復政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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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복구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129)얼마 지나지 않아 원 順帝가 고려의 폐정 개혁을 명하여 整治都監이 설치되었다. 王煦와 김영돈이 원 순제로부터 직접 정치의 임무를 맡으면서130) 개혁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들과 함께 安軸, 金光轍이 정치도감 判事로 임명되었다.131) 정치도감은 田民 문제를 비롯한 각종 비리에 대한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개혁을 표방하였는데,132) 이는 정치도감의 구성원들이 이전과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정치도감의 속관들은 대다수 한미한 가문 출신이자 朱子性理學을 기초로 한 과거합격자들로 구성되었다.133) 이러한 구성은 이들이 개혁에 있어 확고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실제로 金㺶를 비롯한 정치도감의 속관들이 권세가들의 奪占이나 뇌물 수수를 적발하여 처벌하기도 하였던 사실에서 확인된다.134) 이들을 대표하는 김영돈 또한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본 장에서는 김영돈의 인적관계와 성향을 검토하고 정치도감 활동에 있어 그의 역할과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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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김난옥, 2010, 충혜왕비 덕녕공주의 정치적 역할과 위상 , 한국인물사연구 14, 165쪽.
130)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3년 2월. “元遣使, 賜王煦金永旽衣酒及鈔, 敦勸整治.”
131) 高麗史 권37, 世家37 忠穆王 3년 2월 己丑. “置整治都監, 以雞林郡公王煦, 左政丞金永旽, 贊成事安軸, 判密直司事金光轍爲判事, 鄭珚等三十三人爲屬官.”
132) 高柄翊, 1961·1962,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 , 歷史學報 14·19; 1970, 東亞交涉史의硏究, 서울대出版部. 閔賢九, 1976, 整治都監의 設置經緯 , 國民大學校 論文集 11; 1980, 整治都監의 性格 , 東方學志 23.金塘澤, 1995, 元 干涉期末의 反元的 분위기와 高麗 政治史의 전개 , 歷史學報146; 1998, 앞의 책. 李益柱, 1996, 高麗·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변은숙, 2004, 고려 충목왕대 정치도감과 정치세력―整治都監의 整治官을 중심으로― , 중앙사론 14·15.
133) 閔賢九, 1980, 앞 논문, 133~138쪽.
134)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3년 3월. “初, 利川縣吏以公田賂政丞蔡河中理問尹繼宗, 至是, 按廉金㺶截吏耳, 將徇于道內, 牒報都監. 錄事安吉祥懷繼宗舊恩, 不以告. 煦永旽怒批其頰, 鳴鼓黜之.”;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3년 夏4월. “整治都監杖奇皇后族奇柱, 下巡軍. 柱嘗席勢肆虐, 中外苦之. 及置整治都監, 自知其罪, 逃匿楊廣道, 按廉金㺶捕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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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장 큰 사회경제적인 모순은 권세가들의 부정부패에서 기인하여, 지배층들이 이를 바로잡기 어려웠다. 특히 당시 정리의 대상이 되는 대다수가 蔡河中, 奇三萬, 盧頙, 辛裔 등 원과의 관련성을 가진 인물들이었던 것으로 보아135)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원 순제는 이를 강력하게 처리하길 원했고, 자신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으면서도 그들을 압도할 만한 위엄과 권한이 있는 인물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걸맞는 인물이 바로 김영돈이었던 것이다.
원 丞相 別里哥不花와의 관련성이 김영돈을 등용하는 주요 요건이 되었음과 동시에 그가 가지고 있던 고려내의 지위도 한 몫 하였다. 그는 僉議令 金方慶의 손자로, 判三司事 金恂의 장자였다. 또한 그는 이미 1342년 58세의 나이에 上洛府院君으로 봉해져136) 공로를 인정받는 원로였다. 이미 조정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이러한 지위를 가진 김영돈은 원 순제가 원하는 정리활동에 적임자로 판단되어 다시 등용된 것이다.
먼저, 별리가불화의 관련성은 김영돈이 원과 고려 조정을 연결할 수 있다는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관련하여 충혜왕이 폐위되는 시점에 원에서 별리가불화가 中書左丞相으로 임명된 사실이 주목된다.137) 김영돈은 별리가불화와 매제와 처남 사이로 연결되어 원에 자주 왕래하며 원 조정과 친밀한 성향을 보였다. 김순 가계 인물들과 별리가불화의 밀접한 관계는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된다.
 
라-1) (鄭誧가) 이후 燕都를 여행할 때 丞相 別里哥不花는 (그를) 한 번 보고 크게아끼며 황제에게 천거하려 하였다.138)
 
라-2) 김영후의 매제인 別里哥不花가 당시 平章이었는데, 왕과 이종사촌형제[姨兄弟]였으므로 김영후에게 鈔 100錠, 비단 15필, 紵布 30필을 하사하여 보냈다.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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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閔賢九, 1980, 앞 논문, 103~108쪽.
136) 高麗史 권36, 世家36 忠惠王 後3년 6월 庚子朔.
137) 元史 권41, 本紀41 順帝4 至正 3년 12월 丁未. “以別兒怯不花為中書左丞相.”
138) 高麗史 권106, 列傳19 鄭瑎 附誧. “後遊燕都, 丞相別哥不花, 一見大愛, 將薦于帝.”
139) 高麗史 권124, 列傳37 嬖幸 申靑. “永煦妹壻別哥不花, 時爲平章, 於王兩姨兄弟故, 賜永煦鈔一百錠, 綾一十五匹, 紵布三十匹, 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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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1)에서 원 승상인 별리가불화가 김순의 외손인 鄭誧를 매우 아껴 원 순제에게 추천하였으며, 라-2)에서 1321년 김영후가 申靑의 하옥 사실을 원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매제인 별리가불화가 원의 平章으로 있어 鈔 100정,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하사하여 보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영후 뿐 만 아니라 김영돈 또한 1339년 사신으로 원에 들어가 머무르다가 충혜왕이 원 조정에 들어올 때 수행하였으며140) 1346년 원에 하정사로 파견되기도 하는 등141) 원에 자주 왕래하며 별리가불화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142)
그간의 연구에서 당시 폐정을 개혁하고자 한 이제현과 정치도감 속관들의 성리학적 경향에 집중하다보니143) 김영돈은 親元的이고 개혁에도 소극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또한 기황후-별리가불화-김영돈의 연결관계가 정치도감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밝혀지고144) 정치도감과 정동행성의 대립 구도가 강조되면서 김영돈은 사회적 모순의 제거보다 정동행성과의 권력투쟁에 집중한 인물로 평가되었다.145) 그런데 김영돈의 정치도감 활동상을 살펴보면, 그는 정치도감 판사로 임명되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개혁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김영돈의 개혁적인 성향을 부정하는 요인으로 당시 이제현과 왕후는 정방의 혁파를 주장한 반면146) 김영돈과 김영후는 政房提調를 역임하여147) 인사권을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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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김영돈묘지명 . “後入朝就從負絏.”
141) 高麗史 권37, 世家37 忠穆王 2년 9월 甲申. “遣贊成事金永旽如元, 請親朝賀正, 兼謝衣酒.”
142) 김영돈과 별리가불화와의 연관성은 정치관의 인적관계를 분석하면서 구체적으로 서술된 바 있다(이정란, 2005, 政治都監 활동에서 드러난 家 속의 개인과 그의 행동방식 , 韓國史學報 21). 해당연구에서는 원의 정치상황을 고려해 별리가불화는 기황후와 같은 정치노선을 구사하고 있었고, 이에 기황후-별리가불화-김영돈으로 이어지는 관계를형성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에 김영돈이 정치도감의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이유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반면, 기황후와 별리가불화의 관계성을 부정하며 당시 고려 내 기황후 세력이 설 자리가 없어지면서 정동행성에 집결하게 되었고, 이후정치도감과 대립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한 연구도 있다(신은제, 2009, 14세기 전반 원의 정국동향과 고려의 정치도감 , 한국중세사연구 26).
143) 김인호, 1999, 高麗後期 士大夫의 經世論 硏究, 혜안.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 역사와 현실 15.박종기, 2003, 원간섭기 사회현실과 개혁론의 전개 , 역사와 현실 49.
144) 이정란, 2005, 앞 논문, 300~308쪽.
145) 신은제, 2009, 앞 논문, 220쪽.
146)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즉위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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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던 점이 지적된다.148) 당시 정방에 인사권이 집중되며 폐단으로 지적되고 있음은 명백하나 김영돈과 김영후가 정방제조를 역임하고 있다고 하여 개혁의 일선에 있던 인물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또한 정방제조의 임명은 정치도감 판사를 역임하기 직전에 이루어지면서 정치도감 판사로서의 실권을 실어주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149) 아울러 실제로 정치도감 활동에 있어서 征東行省理問所와 직접 대립하거나 奇三萬의 죄를 치죄하고자 주장하는 것은 김영돈이었다.
 
마-1) (충목왕 3년, 1347, 4월) 征東行省理問所에서 整治都監官 佐郞 徐浩와 校勘田祿生을 가두었다. 처음에 전 忠州 判官 崔純寶가 奇三萬의 일을 보고하였는데,기삼만이 죽자 그 처가 행성에 고소하였고, 행성이 왕에게 말하여 서호와 전녹생을감옥에 가둔 것이다. 김영돈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관을 가두셨습니까.”라고말하였다. 왕이, “기삼만이 남의 땅 5결을 빼앗은 것이 어찌 죽음에 이를 만한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김영돈이, “기삼만은 세력을 믿고 악한 행동을 자행하였으니,어찌 다만 남의 땅 5결을 빼앗은 것뿐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理問 河有源을불러 대변하게 하였다. 김영돈이, “우리는 황제의 명을 친히 받들어 먼저 가장 악한자들을 다스리는 것이니, 서호와 전녹생이 무슨 죄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스스로 행성의 감옥에 갇히니, 왕이 명하여 그를 내보내었다.150)
 
마-1)은 정동행성이문소에서 기삼만이 옥사한 것을 두고 정치관들을 가두자, 김영돈이 충목왕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고 이윽고 스스로 하옥된 내용이다. 이때 김영돈은 원 황제의 명으로 정치를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정치관들의 죄가 없음을 주장하였는데, 정치도감 활동의 정당성과 처벌의 부당함을 몸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곧 이를 호소하는 글을 올려 첨의부를 통해 원의 중서성에 전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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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高麗史 권37, 世家37 忠穆王 3년 2월 甲午. “以左政丞金永旽, 贊成事李君侅, 右代言鄭思度, 提調政房.”
148) 신은제, 2009, 앞 논문, 215~218쪽.
149) 김창현, 1998, 政房提調의 등장과 정방의 置廢 , 高麗後期 政房 硏究,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150)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3년 4월. “行省理問所, 囚整治都監官佐郞徐浩校勘田祿生. 初前忠州判官崔純寶, 告奇三萬之事, 及三萬死, 其妻訴行省, 行省白王, 囚浩祿生于獄. 金永旽曰, 殿下何囚整治官. 王曰, 三萬奪人田五結, 何至於死. 永旽曰, 三萬怙勢恣惡, 奚止奪人田五結哉. 召理問河有源對辨. 永旽曰, 我等親奉帝命, 先治元惡, 浩祿生奚罪焉. 乃自繫行省獄, 王命出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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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요청하였다.151) 그리고 이어 왕후와 함께 원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이문소의 저지로 실패하였고, 때마침 원의 兀理不花가 고려에 와서 정치의 임무에 대해 상을 내리자 이문소는 가두었던 정치관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152)그러나 결과적으로 정치도감이 2년만에 폐지되고, 1347년(충목왕 3) 10월 원은 사신을 보내 기삼만 옥사사건에 대해 白文寶 등 정치도감에 관련된 여러 인물을 처벌하였다. 처벌 대상은 아래와 같다.
 
마-2) (충목왕 3년, 1347, 10월) 원에서 기삼만의 죽음 때문에 直省舍人 僧家奴를 보내어 정치관 白文寶, 申君平, 全成安, 河楫, 南宮敏, 趙臣玉, 金達祥, 盧仲孚,李天伯, 許湜, 李承閏, 安克仁, 鄭光度, 吳璟, 徐浩, 田祿生에게 장형을 가하였다.오직 安軸과 王煦만이 황제의 명으로 면제되었으며, 전 密直 金光轍, 전 大護軍 李元具는 병으로 장형을 면하였다. 황제가 이어 璽書를 내려서 정치도감을 다시 설치하게 하고 왕후로 하여금 判事가 되게 하였다. 이때 김영돈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였는데, 왕후는 더불어 따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므로, 황제가 이를 꾸짖고왕후에게 위임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153)
 
마-2)에서 安軸과 王煦는 원 순제의 명으로, 金光轍과 李元具는 와병을 이유로 면제되었으며, 이때 김영돈은 이미 정계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곧 원 순제는 정치도감을 다시 설치하게 하고 김영돈이 아닌 왕후로 하여금 판사직을 역임하게 하였는데, 김영돈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자 꾸짖었다고 한다. 김영돈이 어떠한 의견을 고집하였던 것인지는 사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이전 김영돈의 성향으로 볼 때, 또 다시 강력하게 정동행성이문소와 맞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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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3년 5월. “王煦金永旽呈書僉議府曰, 我等親奉帝命, 整治本國. 今行省理問所以奇三萬之死歸咎都監, 囚徐浩田祿生, 而理問河有源挾私枉問, 必欲誣服. 自今, 不能整治, 冀轉達中書省.”
152)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3년 6월. “王煦金永旽如元, 理問所累遣人, 追執煦永旽以歸, 悉囚整治都監官, 問殺奇三萬之故. 適帝遣中書省右司都事兀理不花等, 賜衣酒于王及煦永旽, 以賞整治. 煦永旽至洞仙驛, 遇兀理不花乃還. 不花以帝命問整治幾何. 理問所聞之, 釋所囚官. 未幾, 徐浩誣服, 復囚整治官吳璟陳永緖安克仁李元具全成安于獄, 尋釋之.”
153) 高麗史節要 권25, 忠穆王 3년 10월. “元以三萬之死遣直省舍人僧家奴, 杖整治官白文寶申君平全成安河楫南宮敏趙臣玉金達祥盧仲孚李天伯許湜李承閏安克仁鄭光度吳璟徐浩田祿生. 惟安軸王煦以帝命原之, 前密直金光轍前大護軍李元具以病免杖. 帝仍降璽書, 復置整治都監, 令王煦判事. 時金永旽執己見, 煦恥與較, 故帝詰之, 委煦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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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하였고, 왕후와 이제현은 그렇지 않았기에 왕후로 하여금 이를 위임하여 다스리게 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정동행성이문소와의 대립으로 정치의 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는 없었지만 김영돈은 실제적인 변화를 위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정도로 개혁에 열정적인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더불어 김영돈을 포함해 정치도감의 속관 중 많은 인원이 과거출신자이며, 김영돈과 인적관계로 맺어진 다수의 인물들이 정치도감 활동에 포함되어 있었다.154)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당시 朱子性理學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거에 합격한 이들이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었으며, 그 중심에 김영돈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순의 외손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신진사류들과 교유한 상황도 참고된다. 김순 1女와 鄭瑎 소생인 鄭誧의 경우, 장인 崔文度의 영향으로 李穀, 李達尊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소양을 겸비하였다.155) 그리고 김순의 2女는 원으로부터 주자성리학을 수용한 白頤正과 혼인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李達尊과 혼인하면서 이러한 교유의 관계망이 두루 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이정은 원에서 충선왕을 모시며, 유행하던 성리학을 들여와 고려에 소개한 인물이었고,156)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으로서 원의 萬卷堂에서 姚燧, 閻復, 元明善, 趙孟頫 등 漢族 출신 문인들과 교류하였기 때문이다.157)
이들은 공통적으로 원에서 유행하던 실천론적 성격의 학문을 고려 정치에도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계망은 정포와 백이정의 딸과 3촌 관계에 있던 김영돈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들과 통혼권으로 연결되었다고 하여 같은 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원 조정에서 주자성리학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학문의 전수 또는 영향이 혈연이나 지역적 연고, 교유관계 등 제한적인 범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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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정치도감의 속관 중 鄭珚, 郭㻒, 金㺶, 金英利, 許湜, 朴光厚가 김영돈과 인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정연은 외증조는 김방경이며, 곽균은 김영돈과 사돈지간, 김두는 홍언박, 이달존 등과 교류하였고, 김영리는 김영돈과 5촌관계, 박광후는 정포 등과 교류하였음이 확인되었다(이정란, 2005, 앞 논문, 313~322쪽).
155) 高麗史 권108, 列傳21 崔誠之 附文度. “宿衛元朝, 樂觀濂洛性理之書, 事親孝.”
156) 高麗史 권106, 列傳19 白文節 附頤正. “時程朱之學, 始行中國, 未及東方, 頤正在元, 得而學之, 東還, 李齊賢朴忠佐, 首先師受.”
157) 高麗史 권110, 列傳23 李齊賢. “以太尉留燕邸, 構萬卷堂, 書史自娛. 因曰, 京師文學之士, 皆天下之選, 吾府中未有其人, 是吾羞也. 召齊賢至都. 時姚燧閻復元明善趙孟頫等, 咸游王門, 齊賢相從, 學益進, 燧等稱嘆不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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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158) 김영돈 또한 이들과 인적으로 교유하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충혜왕~충목왕대에 원과의 관계가 밀접해졌고, 정국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때 김영돈은 선대에 형성된 인적관계망을 바탕으로 원과 고려를 오가며 활약하였고, 그가 가지고 있던 고려 내의 지위는 정치도감 판사를 맡아 정리의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였다.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주장하던 김영돈은 정동행성이문소와 대립하며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개혁은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치활동은 이후 신진사류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2) 金士衡의 조선 건국 참여
 
충정왕이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사망하자 1351년(공민왕 즉위)에 공민왕이 즉위하였다. 공민왕은 田民 문제를 비롯해 사회문제들을 개선하고 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政房을 혁파하고, 文·武의 銓注를 각각 典理司와 軍簿司로 귀속시켰으며,159) 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는160) 등 체계적인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였다.161)공민왕대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는 新進士類들이 활약하여 사회 제반의 모순을 제거하고, 위화도회군을 거쳐 조선이 건국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본 장에서는 공민왕대부터 고려말까지의 개혁과 김순계 인물들의 정치활동 양상을 살펴보고, 이들이 어떻게 사회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지배층의 주류를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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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이익주, 2001, 14세기 전반 성리학 수용과 이제현의 정치활동 , 典農史論 7, 271쪽.
159) 高麗史節要 권26, 恭愍王 원년 2월. “罷政房, 歸文武銓注於典理軍簿.”
160) 高麗史 권77, 志31 百官2 諸司都監各色 田民辨正都監. “恭愍王元年, 又置.”
161) 공민왕 즉위 초 정국운영 및 개혁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이 참고된다.
閔賢九, 1981, 高麗 恭愍王의 卽位背景 ,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洪榮義, 1990·1992, 恭愍王 初期 改革政治와 政治勢力의 推移(上)·(下)―元年·5年의改革方案을 중심으로― , 史學硏究 42, 43·44.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 역사와 현실 15.
최연식, 1995, 공민왕의 정치적 지향과 정치운영 , 역사와현실 15.
신은제, 2010, 공민왕 즉위 초 정국의 동향과 전민변정 , 한국중세사연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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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였는지 검토할 것이다. 이 무렵 안동김씨 김순계에서는 2대 金永煦를 필두로 하여 3대 金縝, 4대 金士安, 金士衡 등이 활동하였다.
다음 바-1), 2) 사료들은 1352년 이루어진 書筵과 관련된 사료이다.162) 공민왕은 서연을 열어 스스로가 유교적 이상 군주상에 걸맞은 인물임을 보이고 이를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주장하려 하였다.163) 이때 김순계에서는 김영후가 서연에 참여하였다. 김영후는 1345년(충목왕 원년) 이미 左政丞(종1품)에 오른 뒤164) 福昌府院君의 봉군을 받은 원로였다.165)
 
바-1) (공민왕 원년, 1352, 8월 己未) 왕이 書筵을 열어 寧川府院君 李凌幹과 金海府院君 李齊賢, 福昌府院君 金永煦, 漢陽府院君 韓宗愈, 延安府院君 印承旦, 前僉議政丞 李君侅, 政丞致仕 孫琦, 前 贊成事 許伯, 金資, 安山君 安震, 菁川君 鄭乙輔, 永昌君 金承澤, 永山君 張沆, 樂浪君 李遷善, 密直副使 安牧, 典理判書 白文寶에게 윤번으로 侍讀하게 하였다. 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원로대신과 大夫와 士는번갈아 入侍하여 경전, 역사서와 法言에 대해 강론하도록 하라. 무릇 권세가들이빼앗은 田宅과 奴婢로써 해를 묵힌 소송과 억울하고 지체된 옥사를 잘 살펴서 처리하라. 僉議와 監察은 나의 눈이나 귀와 같으니 현 정치의 잘잘못과 백성에게 이롭고 해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숨기지 말고 말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166)
 
바-2) (공민왕 원년, 1352, 8월) 印承旦이 書筵에 입시하여 辨整都監을 혁파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대답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도둑[穿窬]이 밤에 다니면서 달이 밝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권호들이 畿縣의 公田을 빼앗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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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고려시대 書筵은 왕의 세자가 공부하던 곳을 의미한다. 본래 국왕이 공부하는 곳은 經筵이라 하였는데, 원간섭기에 이르러 명칭이 경연에서 서연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왕대까지는 서연과 경연을 혼용해 사용하다가 공양왕대 경연으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도현철, 2006, 이색의 서연 강의 , 역사와현실 62, 25~26쪽).
163) 최연식, 1995, 앞 논문, 88~91쪽.
164) 高麗史 권37, 世家37 忠穆王 원년 4월 丁卯. “以金永煦爲左政丞.”
165)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永煦. “永煦初封福昌府院君.”
166) 高麗史 권38, 世家38 恭愍王 원년 8월 己未. “開書筵, 以寧川府院君李凌幹, 金海府院君李齊賢, 福昌府院君金永煦, 漢陽府院君韓宗愈, 延安府院君印承旦, 前僉議政丞李君侅, 政丞致仕孫琦, 前贊成事許伯金資, 安山君安震, 菁川君鄭乙輔, 永昌君金承澤, 永山君張沆, 樂浪君李遷善, 密直副使安牧, 典理判書白文寶, 更日侍讀. 敎曰, 元老大臣大夫士, 輪次入侍, 進講經史法言. 凡權勢所奪, 田宅奴婢, 積年之訟, 與夫寃滯之獄, 其審治之. 僉議監察, 是予耳目, 時政得失, 民閒利害, 直言勿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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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인승단이 점유한 것이 특히 많아서 변정도감에서 그 전답을 거두어들이고 이어서 여러 해 동안 쌓인 조세를 추징하였으므로, 인승단이 이를 미워하였다. 다른날, 金永煦가 또 그것을 혁파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아름다운 말을 듣고자 하여서 서연을 열었는데, 경들이 말하는 바는 실로 내 마음과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을 칭하고 안으로 들어갔다.167)
바-1)에서 공민왕은 서연을 열어 원로대신들로 하여금 윤번으로 시독하게 하고, 田民과 관련된 일을 명백히 처리하며 僉議府와 監察司는 정치에 관한 모든 일을 숨기지 말고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의 계획은 전민변정도감 설치로 이어졌으나 그 활동은 수월하지 않았다. 바-2)에서 인승단과 김영후는 공민왕의 의견에 반하며 전민변정도감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인승단이 畿縣의 많은 公田을 탈취해 차지하고 있었는데, 전민변정도감에서 토지를 회수하고 조세까지 추징하니 반발한 것이다.
한편, 김영후가 앞서 충목왕대 정치도감에서 전민변정을 시행할 때는 반기를 들지 않았다가 공민왕대에 크게 반대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전민의 대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충목왕대 전민의 대상이 기씨 일가를 비롯한 부원배 세력이었다면, 공민왕대에는 김영후를 비롯한 충목왕 세력 또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료들이 주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현을 비롯한 원로들도 전민의 문제는 단지 整治의 하나라고 여겨 이보다 인사권의 문제, 즉 정방의 혁파를 주장하였다.168) 당시 전민 문제는 대다수 신료들에게 주요 개혁 안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김영후는 충목왕대까지는 기씨 일가를 비롯한 부원배를 척결하는데 동의하는 태도를 취하였지만, 공민왕대에 이르러 개혁의 방향이 원로들을 향하자 이에 반발하였다. 이후 그는 1356년 원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169) 별다른 행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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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高麗史節要 恭愍王 원년 8월. “印承旦入侍書筵, 請罷辨整都監, 王不應, 但曰, 穿窬夜行, 惡月之明. 時, 權豪奪畿縣公田, 承旦所占尤多, 辨整都監收其田, 仍追累年之租, 故承旦惡之. 他日, 金永煦又請罷之, 王曰, 予欲聞嘉言, 故設書筵, 卿等所言實乖予心. 遂稱疾入內.”
168) 高麗史 권124, 列傳37 嬖幸 康允忠. “耆老以爲, 聽斷田民之訟, 只爲整治之一事. 必先整治選法, 中外之官, 各得其人, 令監察擧劾非違, 然後可以上副帝意.”
169) 高麗史 권39, 世家39 恭愍王 5년 2월 甲戌. “遣福昌府院君金永煦如元, 謝功臣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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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지지 않고 1361년 졸하였다.170)
결국 이러한 개혁은 신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가 1356년 본격적인 개혁정치가 이루어지며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71) 이때 공민왕은 대외적으로 反元,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화와 사회경제적 모순의 혁파를 목표로 하여 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고172) 원의 연호를 정지시켰으며,173) 관제도 文宗代의 제도로 환원하였다.174) 그 결과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개혁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1359, 1361) 紅巾賊이 침입하고, 1363년 金鏞 등이 일으킨 興王寺의 난으로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면서 이는 중단되었다.
이후 1365년 신돈이 중앙정계에 급부상하며 정국을 주도하자 다시금 개혁이 추진되었다. 신돈은 중앙정계와 연고가 없던 인물로,175) 보다 파격적인 개혁을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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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高麗史 권39, 世家39 恭愍王 10년 5월 壬戌. “上洛侯金永煦卒.”
171) 공민왕 5년 개혁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이 참고된다. 閔賢九, 1989, 高麗 恭愍王의 反元的 改革政治에 대한 一考察―背景과 弊端 , 震檀學報 68.閔賢九, 1992, 高麗 恭愍王代 反元的 改革政治의 展開過程 , 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一潮閣. 閔賢九, 1994, 高麗 恭愍王代의 誅奇轍功臣 에 대한 檢討―反元的 改革政治의 主導勢力― ,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金塘澤, 1995, 元 干涉期末의 反元的 분위기와 高麗 政治史의 전개 , 歷史學報146; 1998, 元干涉下의 高麗政治史, 一潮閣. 李益柱, 1996, ‘世祖舊制’의 청산과 新興儒臣의 성장 , 高麗·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년대 들어서 당시 국제정세와 관련해 공민왕 5년의 개혁이 과연 反元的이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다음의 연구들이 참고된다. 김경록, 2007,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 역사와현실 64.李康漢, 2009,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 大東文化硏究 65.崔鍾奭, 2010,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몽골(원)관계의 재검토―‘원간섭기’와의 연속성을 중심으로― , 역사교육 116.이명미, 2011, 공민왕대 초반 군주권 재구축 시도와 奇氏一家: 1356년(공민왕 5) 개혁을 중심으로 , 한국문화 53.이익주, 2015, 1356년 공민왕 反元政治 再論 , 歷史學報 225.
172) 高麗史 권39, 世家39 恭愍王 5년 5월. “罷征東行中書省理問所.”
173) 高麗史 권39, 世家39 恭愍王 5년 6월 乙亥. “停至正年號.”
174) 高麗史 권39, 世家39 恭愍王 5년 秋7월 丁亥. “復改官制.”
175) 高麗史 권132, 列傳45 叛逆 辛旽. “初王在位久, 宰相多不稱志, 嘗以爲, 世臣大族, 親黨根連, 互爲掩蔽, 草野新進, 矯情飾行, 以釣名, 及貴顯, 恥門地單寒, 連姻大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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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었다. 그는 內宰樞制를 신설하여 기존 세족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의 축소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데 기여하였으며,176) 전민변정도감을 재설치해 사회경제적 폐단을 개선하고자 하였다.177)
이때 김영돈의 아들인 金縝은 신돈의 당여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371년 신돈이 모반으로 밀고 당하자178) 그의 당여로 지목되어 杖流刑에 처해졌다.179) 관련하여 김영돈 묘지명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高麗史 列傳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신돈의 개혁이 실패하자 가문이 변혁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걸림돌이 되어 김진 계열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라 이해된다.180)
반면, 金愃系의 金齊顏은 신돈과 대립하여 金精, 金興祖 등과 함께 신돈 살해를 모의하다 1368년 결국 제거되었다.181) 그는 김진과 달리 高麗史 김방경 열전에 附記되어있을 뿐 아니라 과거급제자출신으로 左正言을 역임한 곧은 기개를 가진 인물로 기술되어 있다.182) 이는 후대의 성리학적 명분론과 인식에 의해 그들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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弃其初. 儒生柔懦少剛, 又稱門生座主同年, 黨比徇情, 三者皆不足用. 思得離世獨立之人大用之, 以革因循之弊. 及見旽, 以爲得道寡欲, 且賤微無親比, 任以大事, 則必徑情, 無所顧藉, 遂拔於髡緇, 授國政而不疑.”
176) 朴龍雲, 1976, 高麗의 中樞院 硏究 , 韓國史硏究 12; 2001, 高麗時代 中樞院 硏究,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69쪽.
177) 高麗史 권132, 列傳45 叛逆 辛旽. “旽請置田民辨整都監, 自爲判事, 榜諭中外曰, 比來, 紀綱大壞, 貪墨成風, 宗廟學校倉庫寺社祿轉軍須田, 及國人世業田民, 豪强之家, 奪占幾盡. 或已決仍執, 或認民爲隷, 州縣驛吏官奴百姓之逃役者, 悉皆漏隱, 大置農莊, 病民瘠國, 感召水旱, 癘疫不息. 今設都監, 俾之推整, 京中限十五日, 諸道四十日, 其知非自改者勿問, 過限事覺者紏治, 妄訴者反坐. 令出, 權豪多以所奪田民還其主, 中外忻然. 旽閒一日至都監, 仁任春富以下聽決焉.”
178) 高麗史 권43, 世家43 恭愍王 20년 秋7월 丙辰. “選部議郞李韌上匿名書, 告辛旽謀逆, 鞫其黨奇顯崔思遠鄭龜漢陳允儉奇仲脩等, 誅之.”
179) 高麗史 권132, 列傳45 叛逆 辛旽; 高麗史 권43, 世家43 恭愍王 20년 秋7월 丙子. “誅辛旽黨李春富金蘭李云牧編配其子. 又斬旽子二歲兒及奇顯子仲平, 杖流金縝及大護軍金鼎.” 180) 이정란, 2007, 辛旽 黨與 家門의 조상 감추기와 褒貶論 , 韓國史學報 27, 296~297쪽.
181) 高麗史 권132, 列傳45 叛逆 辛旽; 高麗史節要 권 28, 恭愍王 17년 10월. “辛旽殺前密直副使金精金興祖趙思恭兪思義等. 初, 精等與金齊顔金龜寶李元林尹希宗等謀誅旽. 思恭泄謀於所善前洪州牧使鄭賱, 賱與提學韓蕆告侍中李春富, 春富入告王, 乃命繫巡軍獄, 竝杖流于外, 旽追遣人於路皆縊殺之.”
182)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齊顔. “登第, 恭愍王十三年, 爲左正言. 時內竪韓暉李龜壽, 以邊功, 超拜僉議評理, 管機密, 甚寵幸, 諫官不署告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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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가가 엇갈리게 된 것으로, 결과적으로 가문의 성장에 주요 견인 역할을 하던 김순계의 서술이 줄어들고, 김선계인 김제안, 김구용이 행적이 두드러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김영후의 손자인 김사안, 김사형이 우왕~공양왕대 정계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조선 건국과 관련되면서 그들의 존재가 후대에 다시금 강조되었다. 김사안과 김사형은 祖父 김영후의 소신에 따라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정계에 입문하였다.183) 먼저, 김사안은 1388년(창왕 즉위)에 李穡, 李崇仁 등과 明에 하례사로 가 정월을 하례하고 명의 監國과 고려 자제들의 國學 입학을 청하였으며,184) 全羅道都觀察使 등을 역임하다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 졸하였다.185)
한편, 김사형은 과거 급제자 출신으로 趙浚 등과 臺諫으로 활동하며 성장하였고,186) 尹彛·李初 사건의 처리 과정에도 개입하는187) 등 여말 주요 안건에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다음의 사료는 그가 공양왕대 경연에 참여한 기록이다.
 
사-1) (공양왕 2년, 1390, 正月 丙子) 처음으로 經筵을 열었고, 沈德符와 李成桂를 領經筵事로, 鄭夢周, 鄭道傳을 知經筵事로, 金士衡, 朴宜中을 同知經筵事로, 李行, 成石瑢, 閔開, 李士渭를 叅贊官으로, 尹紹宗, 李詹을 講讀官으로, 禹洪得, 韓尙敬, 申元弼을 撿討官으로 임명하여, 네 번 나누어 進講하게 하였다.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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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永煦. “其孫士安士衡, 年皆踰冠, 或謂永煦曰, 盍爲之求官. 對曰, 子弟果賢與, 國家自用之, 苟不賢與, 雖得之, 可保乎. 聞者皆服.”
184) 高麗史 권137, 列傳50 昌王 즉위년 10월. “遣門下侍中李穡, 簽書密直司事李崇仁, 同知密直金士安, 如京師賀正.”
185) 高麗史 권46, 世家46 恭讓王 3년 9월 庚寅. “前全羅道都觀察使金士安卒, 輟朝三日, 謚忠康.”
186)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士衡. “辛禑三年, 爲執義, 與趙浚安翊金湊崔崇謙等, 同在臺諫, 時稱得人.”; 高麗史節要 권33, 禑王 14년 8월; 高麗史節要 권34 恭讓王원년 9월; 高麗史節要 권34, 恭讓王 2년 閏4월.
187)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士衡. “又上䟽言, 尹彝李初之黨, 皆已遠竄, 而禹玄寶權仲和張夏慶補等, 尙在都下. 不宜罪同罰異, 請一切逐之. …… 士衡等嗾刑曹, 以夢周右彝初黨謀害所司, 劾之.”
188) 高麗史 권45, 世家45 恭讓王 2년 正月 丙子. “始開經筵, 以沈德符及我太祖領經筵事, 鄭夢周鄭道傳知經筵事, 金士衡朴宜中同知經筵事, 李行成石瑢閔開李士渭叅贊官, 尹紹宗李詹講讀官, 禹洪得韓尙敬申元弼撿討官, 分四番進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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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에서는 공양왕대 처음으로 경연을 열고, 경연관들을 임명하고 있다. 이 시기 경연은 원의 압제에서 벗어나 그 명칭을 書筵에서 경연으로 바로 잡았음과 동시에 조선시대 경연제도의 모태가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관원은 領事(2인), 知事(2인), 同知事(2인), 叅贊官(4인), 講讀官(2인), 撿討官(4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김사형은 同知經筵事로 임명되어 李成桂, 鄭夢周, 鄭道傳 등과 함께 강론을 맡게 되었다. 이때 김사형이 書經의 無逸篇 을 강론하며 ‘敬’을 마음의 근본으로 삼고 게으름을 경계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는데,189) 주자성리학을 정치에 적용하고자 하는 신진사류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이후 그는 훗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치 노선을 함께 하며 人物推辨都監의 提調官으로서 奴婢의 推辨을 담당하고,190) 조선 건국 직전 三司左使에 제배되었다.191)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는 1등개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192) 그는 조선초 태조로부터 말과 칼을 하사받을 정도로193)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요컨대 공민왕대부터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김순계 인물들은 지배층의 주류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2대 김영후는 書筵에서 공민왕의 의견에 반대할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원로대신의 자리에 있었다. 3대 김진의 경우, 신돈의 당여가 되어 개혁에 참여하였다가 그 존재가 축소되어 기록되기도 하였지만, 4대 김사형이 대간으로서 활약하고, 정계생활에 있어 이성계, 조준, 정도전 등과 어울리며 조선 건국세력이 되자 다시 중심에 자리잡았다. 이상으로 공민왕대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김순계 인물들의 정치활동 양상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안동김씨 김순계는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김순계는 김방경 이래로 권문으로 등장하여 점차 세족화되며 성장한 세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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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士衡. “恭讓嘗御經筵, 講無逸, 士衡曰, 大抵, 耽樂者享年短, 無逸者享年長, 理固然也. 天子一身, 係天下安危, 諸侯一身, 係一國安危, 故爲人上者, 宜以敬爲心, 以逸爲戒. 蓋無逸則百姓以寧, 故祖宗陰佑, 天亦保之. 耽樂則百姓不寧, 故祖宗陰怒, 天亦不佑. 此享國長短之所以異也.”
190) 高麗史 권46, 世家46 恭讓王 3년 10월 丁卯. “以我太祖及鄭夢周金士衡, 爲人物推辨都監提調官.”
191) 高麗史 권46, 世家46 恭讓王 4년 丁巳. “李元紘金士衡爲三司左右使.”
192) 太祖實錄 권1, 1년 8월 20일 己巳.
193) 太祖實錄 권8, 4년 7월 17일 戊申. “賜左政丞趙浚, 右政丞金士衡, 判三司鄭道傳, 文忠甫所獻馬各一匹.”; 太祖實錄 권8, 4년 12월 20일 己酉. “賜左政丞趙浚, 右政丞金士衡, 判三司事鄭道傳劍各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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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들은 여러 왕대에 걸쳐 개혁정치를 수행하고 주류의 흐름을 잃지 않으며 세족으로서의 위상을 향유하였다. 이러한 위상은 고려말까지 유지되었는데, 당시의 평가를 보여주는 사료들을 통해 고려말 지배층의 성격 변화와 안동김씨 김순계의 종합적인 존재 양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후기~조선초 김순계 위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들이 참고된다.
 
아-1) 文敬(許珙)은 “내 딸은 반드시 복을 누릴 것이니 꺼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좋은 사위를 택하여 처로 삼게 하니, 上洛郡 文英公 金恂이다. 김씨와 허씨는 모두大族이다.194)
 
아-2) (김영돈의) 친족과 외족[內外]은 지위가 높고 현달하였지만 스스로 거만하지않고, 옷을 입어도 화려하지 않았다.195)
 
아-3) 密直 許綱의 처 金氏는 上洛君 金永煦의 손녀이다. 허강이 죽자 신돈이 그문벌을 탐내서 혼인하고자 하였는데, 김씨가 듣고 말하기를, “내 남편은 평생 여색에 눈길을 준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차마 배신하겠는가. 기어이 더럽히려고 한다면 나는 자결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가 되었다. 신돈이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196)
 
아-4) 上洛府院君 金士衡이 卒하였다. 김사형의 字는 平甫인데, 安東府 사람이다.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高祖 金方慶은 僉議中贊 上洛公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 재상이었고, 祖父 金永煦는 僉議政丞 上洛侯였다.197)
 
먼저 아-1)은 김순처허씨묘지명 으로 김순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안동김씨와 공암허씨의 위상이 드러난다. 당시 공암허씨는 宰相之宗으로 선정된 이후 왕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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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김순처허씨묘지명 . “文敬曰, 吾此女後必享福無嫌也. 擇佳婿妻, 故相上洛君文英金公諱恂. 金許皆大族也.”
195) 김영돈묘지명 , “不以內外尊顯, 自多衣不爲華.”
196) 高麗史 권132, 列傳45 叛逆 辛旽, “密直許綱妻金氏, 上洛君永煦孫也, 綱死, 旽慕其門閥, 欲娶之, 金聞之曰, 我公平生未嘗睨粉黛, 妾何忍背耶! 必欲汚, 我當自刎. 遂斷髮爲尼. 旽聞而止.”
197) 太宗實錄 권14, 7년 7월 30일 辛巳, “上洛府院君 金士衡卒. 士衡字平甫, 安東府人, 奕世貴顯. 高祖方慶, 僉議中贊上洛公, 有文武全才, 爲時賢相. 祖永煦, 僉議政丞上洛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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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통혼권까지 형성한 대표 세족 가문이었다.198) 안동김씨 가문은 이와 대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2)에서는 김영돈대(충렬왕대 후반~충목왕대) 안동김씨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영돈의 외족은 공암허씨, 처족은 이천신씨로, 모두 지위가 높고 현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아울러 거만하지 않고 화려한 옷을 즐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성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3)은 공민왕대 신돈이 김영후의 손녀인 김씨의 門閥을 탐내 그녀와 혼인하고자 하였으나, 김씨가 비구니가 되면서 포기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공민왕 중후반기에 이르러서 김순계는 세족으로 자리잡아 여러 가문에서 탐내는 문벌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위세는 조선초기까지도 꾸준히 유지되어 아-4) 김사형의 졸기에서는 그의 가문 또한 대대로 귀하고 현달한 가문[奕世貴顯]이라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은 고려후기 김순계의 위상은 각각의 구성원들이 정치활동에 있어 항상 중심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후기는 원과의 관계를 비롯해 각 왕대별로 대립이 난무하고 잦은 官制의 변화와 사회경제적인 모순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이때에 변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항상 주류에 자리하였던 김순계의 저력은 1대 김순에 이어 2대 김영돈, 4대 김사형 등이 대대로 과거에 합격하여 지식인 지배층의 자리에서 멀어지지 않았고,199) 원 조정 및 고려 세족들과의 중첩된 통혼권을 형성하여 견고한 인적관계망을 구축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당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최고의 名門으로 자리잡은 가문으로 안동권씨 가문이 있다. 안동권씨는 충선왕대 權溥의 활약에 힘입어 크게 현달하였다.200) 권부 자체가 원에서 주자성리학을 수용하고 四書集註를 간행하여 고려의 성리학 보급에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였지만, 충렬왕의 전시문생이었던 출신의 배경과 왕실과 연이어 맺은 혼인관계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이후 그의 가문은 아들들과 사위들이 모두 君으로 봉해져 ‘一家九封君(한 가문에 아홉 군)’이라 칭해질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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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본고의 Ⅱ장 참고. 1308년 순비 허씨와 충선왕이 혼인하고(高麗史 권89, 列傳2 后妃2 忠宣王 后妃 順妃 許氏), 許悰(琮)과 충선왕의 딸인 壽春翁主가 혼인하면서(高麗史권105, 列傳18 許珙 附悰) 허공 가계는 충선왕과 이중혼인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로써왕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당대 세족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게 되었다.
199) 3대 김진의 과거합격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00) 朴龍雲, 2005, 安東權氏의 사례를 통해 본 高麗社會의 一斷面―‘成化譜'를 참고로 하여― , 歷史敎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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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였다.201)안동김씨 가문의 경우 김방경 이래 김순계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순은 권부와 마찬가지로 1279년(충렬왕 5) 과거출신으로 충렬왕에 의해 등용되어 충선왕 세력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으며, 그와 그의 자손들이 공암허씨, 남양홍씨, 안동권씨, 경주이씨 등 여러 세족 가문과 통혼권을 형성하면서 가문이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비록 고려 왕실과의 직접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지 못하였지만, 당시 고려 내부에서의 정치적 위상을 향상시키고 원 조정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한 것이다.
물론 공민왕대 이후 김선계의 3대 金昴와 4대 金九容 등이 신진사류로 활약하며 안동김씨 가문의 이미지 변혁에 기여하면서 가문의 견인 역할을 내주게 되었지만 이 또한 궁극적으로 안동김씨 가문이 세족 가문으로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김사형이 조선개국공신이 되는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고려후기와 조선초기 지배층의 연속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에 고려후기와 조선전기까지 지배층의 구조와 구성이 변화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202) 그런데 이를 달리 해석하면,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기존 지배층이 어떻게 대응하고 권력을 재생산해나갔는가 그 전략과 구조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시대의 흐름에 따른 지배층의 생존 전략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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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高麗史 권107, 列傳20 權㫜 附溥, “子準皐煦謙, 壻齊賢宗室璹珣皆封君, 子宗頂祝髮, 亦封廣福君, 世號一家九封君.”
202) John B. Duncan, 2000, The Origins of the Choson Dynasty,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2013, 조선왕조의 기원, 너머북--------------------------------------------------------------------
 
맺음말
 
본 논문은 고려후기 성장한 정치세력의 형성과 변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金恂系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14세기 고려가 원에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받게 되면서 지배층은 새로이 재편되었다. 이때 김순계 인물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정치활동을 이어나가고 인적관계망을 형성하여 꾸준히 높은 위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金方慶의 막내아들인 김순은 고려 내에서 활동한 고려 내부 관인의 단면을 보여주기에 의미가 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忠宣王이 세자인 시절부터 世子府관직을 역임하며, 1298년(충선왕 즉위) 당시 충선왕 개혁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忠烈王이 복위된 이후에도 등용되어 정계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듬해 韓希愈 무고사건이 벌어지고 1300년 김방경마저 사망하면서 고향인 安東으로 내려가 한거하게 되었다.
또한 급변하는 麗-元관계 속에서 김순계 인물들이 당시 세족들과의 통혼권을 형성하여 권세를 유지하였음이 주목된다. 김순은 孔巖許氏 許珙의 딸과 혼인해 세족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으며, 이후 그의 자손들은 利川申氏, 淸州韓氏, 南陽洪氏, 安東權氏, 慶州李氏 등 당시 세족들과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중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딸들의 혼인이었으며, 남양홍씨 洪奎와의 중첩된 통혼권을 형성하여 고려 내부에서의 정치적 위상을 향상시키고 원 조정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심화되면서 당시 지배층들은 관직 및 인적관계망을 바탕으로 원과의 관련성을 강조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순계 인물들 또한 선대에 형성된 견고한 인적관계망을 바탕으로 원의 지배층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갈 수 있었다. 특히, 김영돈은 원에 자주 왕래하며 別里哥不花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整治都監 判事를 역임하며 忠穆王의 개혁정치를 수행해 나갔다.
恭愍王代에는 2대 金永煦를 필두로 하여 3대 金縝, 4대 金士安, 金士衡 등이 활동하였다. 김영후는 書筵에서 공민왕의 의견에 반대할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원로대신이었으며, 김진은 辛旽의 당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사형- 49 -은 朱子性理學을 정치에 적용하고자 하는 新進士類로서 李成桂, 趙浚, 鄭道傳 등과 어울리며 여말 주요 사건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조선건국에 참여하며 1등개국공신이 되었다.
이상으로 김순계 인물들은 왕실과의 통혼권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지속적인 개혁활동과 여타 세족들과의 중첩된 통혼권 형성, 그리고 신진사류로의 전환 등이 시대의 흐름과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고려후기 지배층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고려후기 김순계 인물들은 사회모순을 개혁하려는 지식인 계층으로서 고려에서 조선초로 이어지는 지배층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김순계의 성장은 고려후기 혼돈의 정치상황과 지배층의 인적관계망 및 권력재생산 구조, 여말선초 지배세력의 성격변화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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