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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유허지3-안동 영호루, 예천 물계서원(2001. 7. 27. 김주회(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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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45 조회1,1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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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유허지 (안동 영호루)


안동시 낙동강 건너편 정하동의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映湖樓(영호루)는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건너편 당북동에 있었는데, 충렬공 金方慶께서 젊은 시절에 이곳에 올라 시와 풍월을 읊던 곳이고,

충렬공께서 일본을 정벌하실 때 안동(복주)를 지나시다 영호루에 올라 시를 지은 바 있고, 충렬공의 둘째아들 김흔(金 ) 장군과 충렬공의 현손(김방경-김선-김승용-김묘-김구용) 金九容이 영호루에 올라 충렬공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은 바도 있는 우리나라의(영남의) 3대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영호루 유허비 (안동시 당북동)

<문화유적총람 3편>
【유적명칭】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
【관리번호】760-230-231-024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유허비)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당북동
【시 대】고려시대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는 높이 179cm, 폭 61cm, 직경 31cm이며, 김일대가 글을 짓고, 남장수가 글을 썼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가부의 남쪽 관문인 이 곳이 영호루의 옛터다. 배야임수로서 앞으로 봉황암과 봉지산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낙동강 700리 맑게 흐르니 사시지경이 장관이라 춘화 경명에 파형이 문체를 이루고 호월천리에 상하 누경이 영수만경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영남 삼대루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그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여말에 건립되었으나 영호루는 고려 충렬왕 초년(1274) 명현 김방경이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안동에 들려 이 누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중엽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몽진하면서 이 누에 자주 소일하였고 환도후에 영호루 삼자의 어필을 하사하니 공민왕 17년(1368)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을 중건하고 액자에 금을 입혀 편액하였다.

120년 후 선종 19년(1488) 벼락으로 인하여 부사 김이 중수하였고 명조 2년(1547) 7월 홍수로 유실되어 5년후 부사 안한중이 복원하였다. 선조 38년(1605)에 두번째 유실되어 74년 후인 숙종 2년(1676)에 부사 맹서가 복원하였고 영조 51년(1775) 홍수로 세번째 유실되어 12년 후 무신에 부사 신익이 복원하였으며 정조 16년(1792) 홍수에 네번째 유실, 4년후 병진에 부사 이집두가 복원하였고

139년후 갑술 7월 홍수로 다섯번째 유실되어 36년후 1970년에 시장 김낙현이 재직시 강 건너 남암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참고문헌】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5, <<안동의 비석>>, 302-303.
【비 고】



▣ 映湖樓 (안동시 정하동 338-1번지)

<안동시 홈페이지>
영호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루의 하나로, 안동의 대표적인 누각이다. 고려 시대에 건축되었으며,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낙동 강 건너편에 있었다.

영호루는 울창한 숲과 낙동강의 푸르른 물,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진 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영호루에 서면 안동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공민왕 친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우탁, 퇴계, 토은, 야은 등의 시편등이 판각되어 있다.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피난 왔던 고려 공민왕이 난이 평정되자 개경으로 돌아가서 "영호루"라고 쓴 현판 글자를 내려 주었다. 이 현판을 걸기 위하여 1567년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낙의 규모를 더욱 확장하여 지었는데, 누가 강물에서 너무 가까이 있어 홍수로 인해 떠내려가고 다시 짓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다가, 1934년 갑술년 홍수 때는 건물이 완전히 떠내려 갔다.

현 영호루는 1970년 철근 콘크리트로 건축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한옥 누각이다. 누의 북쪽 면에는 공민완 친필 한자 현판 "映湖樓"를 걸고, 남쪽에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 한글 현판 "영호루"를 걸었다.




▣ 영호루에 올라 시를 지으신 세분 선조의 시편은 영환 종친께서 본 게시판에 올리신 내용이 해석도 잘 되어 있어 그대로 퍼서 올립니다.


安東에 대한 先祖님 세분의 詩
문온공 18세손 영환 young8kim@hanmail.net. 016-363-0543


⊙ 東征日本過福州 (忠烈公 方慶)


일본정복하러 가는 길에 안동을 지나며

山水無非舊眼淸 산과 물은 옛날 보던 맑음 그대로이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 또한 어릴 때 정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애틋하여라, 고국엔 옛 풍속 남아있어,
收拾絃歌慰我行 노래소리 모아서 내갈길 위로하네.




⊙ 登福州映湖樓 (都僉議公 흔 )


안동 영호루에 올라서

十載前遊入夢淸 옛날 놀던 일 꿈속에 환하게 들어 오며,
重來物色慰人情 다시 오매 풍경이 인정 위로하네.
壁間奉繼嚴君筆 벽에 걸린 아버님글 이어 쓰니,
堪타愚兒萬戶行 어리석은 아들 만호 걸음이 부끄럽네.




⊙ 安東客舍北樓次高祖上洛公詩韻 (文溫公 九容)


안동영호루에 고조 상락공 시의 운을 따서

先祖題詩字字淸 선조께서 지으신 시 글자마다 맑고 맑아,
重來此日更含情 오늘 다시 와서 보니 정감이 새로워라.
江山似有留連色 안동강산은 옛모습 그대로 어울러 있으니,
仍占春風末肯行 봄바람 기대서서 가기 싫을 뿐일세.

한자가 지원되지 않아 한글로 적은 글자 설명
흔=기뻐할 흔=心방변에 도끼斤을 합한 글자
타=속일타,방탕할탄,으쓱거릴 이=말씀言변에 어조사也를 합한 글자



<대종회 연혁>
1995
映湖樓에 게시했던 忠烈公 시문 현판이 유실되어 35萬원을 들여 새로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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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유허지  (예천 물계서원)


김방경 할아버지를 主壁(주벽)으로 현손(고손)인 척약재 김구용과 김진양, 김응조의 위패를 모시고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경북 예천의 勿溪書院은 1661년 설립하여 207년동안 운영하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북 예천유림에서는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여 서당을 세워 물계서원의 맥을 이어어고 있다고 합니다.

물계서원 관련자료를 간단히 모아 보았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물계서원 (勿溪書院)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에 있었던 서원. 1661년(현종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金方慶, 金九容, 金揚震, 金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廟宇(묘우), 강당, 동재, 서재, 奠祀廳(전사청), 神門(신문), 정문, 廚舍(주사) 등이 있었으며,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왔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으며,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전고대방, 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李東春>



<대종회보 제59호, 1998.1>
▣ 勿溪書堂(물계서당)  日(계일) 참석

물계서당은 당초 물계서원을 철폐한후 지역유림에서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여 서당을 세워 물계서원의 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이 물계서원에는 우리 중시조이신 충렬공과 충렬공의 현손 척약재 구용 양위분을 배향하여 왔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향되고 지금은 예천유림 주관으로 서당을 마련하여 옛 서원을 상기하며 추모행사로  日(계일)을 정하여 매년 음 12월 5일 유림 어른들과 우리 문중 종인들이 모여 하루를 즐기며 옛날을 추모하는 행사이다.

올해는 대종회 斗會 부회장님과 문온공파 부회장인 琮會 현종이 참석했는데 영남지방 종인 10여명이 참석하여 유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유림측에서는 우리 충렬공 할아버님이 主壁(주벽)이시며 영남의 인물이요, 존중하는 분이신데 우리 문중에서 소홀함을 극히 서운히 생각하고 있음이 역력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어떻게 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가 없어 참으로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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