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 懷德縣監金公墓碣銘-拙翁集(洪聖民)

페이지 정보

김태영 작성일05-06-15 21:57 조회1,373회 댓글0건

본문

 

성 명】 홍성민(洪聖民)
【생몰년】 1536(중종 31)∼1594(선조 27)
【본 관】 남양(南陽) 홍(洪)
【자·호】 시가(時可), 졸옹(拙翁)
【시 호】 문정(文貞)
【저서·작품】 《졸옹집(拙翁集)》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36(중종 31)∼1594(선조 2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이다.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종 16년(1561)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564년에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정자(正字) · 교리(校理) 등을 거쳐 대사간(1567) · 호조 참판(1575) · 제학 · 예조 판서 ·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1591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선조 8년(1575)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溟)에 가서 종계개정(宗系改正 : 종계변무(宗系辨誣))을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이 일로 하여 1590년에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二等)에 책록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1591년 정철(鄭澈)이 건저(建儲)문제로 유배되자, 그 일당이라는 혐의로 삭탈관작(削奪官爵)되어 북변(北邊)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며 곧 방면되었다.
그는 매우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운 이(利)를 쫓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또 문행(文行)과 정술(政術)이 본받을 만했으며 명신(名臣)으로 칭송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졸옹집(拙翁集)》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海東名臣錄, 墓誌銘
【관련항목】 이산보(李山甫) 홍명하(洪命夏)

 

출전:서울600년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