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제 26회, 안사연 정기산행(하남)-미리보기- 민응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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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12-10 18:45 조회1,355회 댓글0건본문
민응협(閔應協) : 1597년(선조 30) ∼ 1663년(현종 4)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인보(寅甫)이고 호는 명고(鳴皐)이다. 봉정대부 민영(閔畔)의 아들이며, 외가는 목은 이색의 후예로서, 어머니는 부제학을 역임한 이균(李均)의 손녀이자, 교관(敎官) 이습(李習)의 딸이다. 5세에 처음으로 글을 썼으며 쉽게 암송하였다. 광해군 때 아버지가 공부하기를 명하여 과거에 응시, 1617년(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방목에 올랐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어 1623년(인조 1) 비로소 성균관의 국자생으로 들어갔다.
1630년(인조 8) 동궁의 세마로 봉해졌으나 음직에 의한 선발이었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다가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10월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장릉(章陵)의 추숭(追崇)에 대한 의논을 엄정하게 하여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635년(인조 13) 6월 다시 홍문관에 들어갔다가 다음해에는 지평에 이어 전적(典籍)이 되었다. 같은해 겨울에 청군이 갑자기 들이닥쳐 임금의 어가(御駕)가 남한산성에 이르렀는데 민응협이 어사(御史)로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1637년(인조 15) 정월 서울이 무너지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이 청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양식을 삼태기에 담아 정성을 다하였으며, 세자와 두 대군이 심양(瀋陽)으로 인질로 가게 되자 문학(文學)으로 동행하였다. 1638년(인조 16) 11월 세자가 심양에 있으면서 민응협을 보내어 정조문안례(正朝問安禮)를 거행하였다.
이어 1639년(인조 17) 3월 사간, 4월 수찬, 5월 장령, 6월 수찬, 7월 장령, 10월 부교리, 12월 사간, 1640년(인조 18) 정월 부교리, 4월 교리, 5월 부응교, 1642년(인조 20) 10월 교리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644년(인조 22)에는 광주(光州)목사가 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갔다가 다음해 4월 집의가 되었다. 같은해 5월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왜신접대를 수행하였다. 1645년(인조 23) 윤6월 사간, 8월 집의, 9월 교리, 10월 사간, 12월 교리, 1646년(인조 24) 정월 사간, 부응교, 8월 사간을 거쳐 같은달 동래부사가 되어 형률 집행에 매우 근엄하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때 왜관(倭館)의 담이 헐리자, 일본인들이 이를 이용해 왜관을 넓혀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하여 그들의 기세를 꺾었다.
1648년(인조 26) 10월, 그는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 조광원(趙光瑗)이 일본인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유로 동래부사에서 파직되었다. 당시 다대포첨사 조광원은 왜관 짓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조광원이 말을 타고 문에 이르는 것을 본 일본인이 자기들을 얕잡아 본다고 여겨 조광원을 때렸던 것이다. 이 일을 들은 인조는 크게 노하여 훈도(訓導)와 별차(別差)를 잡아들이고 나라를 욕되게 한 조광원의 죄를 다스리고 동래부사 민응협의 직위를 파면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당시 동부승지 이시만(李時萬)은 “민응협이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깨끗하고 일을 조처하는 것이 강명한 사람이니 쉽게 교체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그의 파면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민응협이 전부터 일을 조처하는 것이 허술하고 졸렬하여 담장을 물려 달라는 청을 엄히 배척하지 못했으니, 왜노(倭奴)가 행패를 부린 것이 필시 이 사람에게서 연유되었을 것이”라면서 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2월 다시 동래부사가 되었다.
1650년(효종 1) 8월 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자 사헌부에서 탄핵을 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1651년(효종 2) 예조참의·대사성·대사간을 거쳐 다음해 10월 다시 대사간, 1653년(효종 4) 10월 이조참의, 1654년(효종 5) 2월 대사간, 다음해 6월 도승지, 8월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657년(효종 8) 7월 강화유수, 1658년(효종 9) 5월 대사헌을 거쳤으나 같은해 11월 강화유수 시절 강도(江都)에 있으면서 군향미를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탄핵받아 연안(延安)으로 유배당하였다. 현종대에 들어서 그는 다시 1660년(현종 1) 12월 대사성으로, 다음해 2월 병조참판, 3월 대사헌이 되었다가 8월 패초(牌招)하였는데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11월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다음달 영릉을 봉심할 때,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 왕이 크게 화를 내 옥리(獄吏)에게 회부한 지 여러 날만에 파직되었다. 1663년(현종 4) 2월 다시 대사헌에 임용되었으나 상소하여 교체되었다.
이해 11월 죽전동(竹前洞) 집에서 죽었는데 이때 나이 67세였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첫째 딸은 용천부사(龍川府使) 한유(韓休)에게 시집갔고, 첫째 아들 민희(閔熙)는 좌의정에, 둘째 아들 민점(閔點)(하담공의 사위)은 좌찬성 겸 대제학(左贊成兼大提學)에 이르렀으며, 둘째 딸은 판결사(判決事) 이후(李煦)에게, 셋째 딸은 학사(學士) 김대헌(金大獻)에게 시집갔다. 막내아들 민암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묘는 하남시 춘궁동에 있으며 막내아들이 찬한 신도비와 함께 그의 묘역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閔應協神道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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