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의 역사 유적지 안내1-충민사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04-28 10:05 조회1,207회 댓글0건본문
충민사는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위패와 묘소가 있는 사당이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교통안내
1.괴산읍에서 올 경우 : 괴산읍에서 충주 방향으로 약 10Km 쯤 좌측으로 강건너에 있다.
2.중부 내륙 고속도로에서 올 경우 : 괴산(수안보)로 나와 괴산 방면으로 우회전-큰 고개를 넘어 감물을 지나-또 한 고개를 넘어- 우측으로 강과 연하여 가는 도로를 만나면(이곳 까지 약 10분)-우측으로 난 길에 안내판(충민사)이 있음(잘 살펴야 함, 그냥 지나칠 수 있음)
김시민(金時敏) 1554(명종9)∼1592(선조25).
조선의 무신. 字는 면오(勉吾),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출생. 1578년(선조11) 무과(武 科)에 급제,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軍事)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자 관직을 버렸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고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 이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3만여의 사상자를 내고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 전투 후 순찰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얼마후에 몰하였다.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괴산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주요 자료 소개>
1. 사진 자료 소개
1)충민사 경내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 전경>
*<충민사 소개>
1)종목 : 시도기념물 12호. 2)문화재지정일 : 1976.12.21 3)장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
3)소유 : 사유.
4)해설 :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충숙공(忠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으로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건립하였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의 자(字)는 면오(勉吾),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嶺南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錦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받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김제갑(1525∼1592) 선생의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명종(明宗) 8년(155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명종 10년(1555)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가 되고 병조좌랑(兵曹佐郎)을 거쳐 선조(宣祖) 14년(1581)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아들과 부인도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시민장군 유적 정화 기념비> <좌-충무공 신도비. 우-김제갑 비>
<중문-寶武門> <사당 충민사>
<교지-영의정 추증> <묘소>
<영정>
1998년 4월, 역사적 고증과 영정부문 국내 제1인자이신 장우성화백께서 수개월의 각고 끝에 완성하여 충민사 (충북 괴산)에 봉안하였다.
<사당 내 위패>
<사당 내 진주성 그림 액자>
<신도비>
<충무공 신도비>
<충민사내의 구사당(일명 충렬사)>
충민사 경내에 있으며 충무공과 문숙공(휘 제갑)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현 충민사 자리에 조선 선조때부터 있어온 사우(불천지위)로 충민사 중건(1978)으로 그 우측에 이축돼 있다.
<구 사당 내의 충무공 위패>
<충민사 내의 구사당내 향사 장면(2003. 5. 8.)> (2004. 5. 9. 성수(제) 제공)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