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외갓댁 고모댁 (32)청송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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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16 12:05 조회1,687회 댓글0건본문
본관은 청송(靑松)·풍산(豊山)·삼척(三陟)·부유(富有)·의령(宜寧)·전주(全州)의 6본이다. 청송심씨가 대종으로서 심씨는 대개 청송을
유일본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언제 분적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심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4명, 상신 15명, 문형(文衡:大提學) 2명, 왕비 3명, 부마 4명을 배출하여 조선 10대 벌열(閥閱)의 하나로
꼽히며, 풍산심씨의 상신 2명을 제외하고 전부 청송심씨에서 나왔다.
청송심씨 시조는 고려시대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이며, 그의 증손인 고려 말의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와
전리판서(典理判書) 심원부(沈元符) 형제 때에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크게 갈린다.
경파인 심덕부는 조선 개국 후에 좌의정을 지내고 그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냈다. 향파인 심원부의 자손들은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심원부의 유훈을 지켜 대대로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하였다.
경파는 '서울집'이라고도 부르는데,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도총제공파(都摠制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성주지사공파(成州知事公派)
·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안효공파(安孝公派)·청원군파(靑原君派)·동지총공파(同知摠公派)의 7파로 갈라진다.
그 중에서도 넷째 심징(沈澄)과 다섯째 심온(沈溫)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심온은 세종의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을 지냈으며,
여섯째 심종(沈淙)은 태조 이성계의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심온은 태종의 외척세력 숙청에 의해 누명을 받고 사사당하였다. 그의 작은아들
심회(沈澮)도 영의정을 지냈는데 심덕부까지 넣으면 3대가 영의정을 지낸 셈이다.
심회의 후손에서 상신 8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 부마 1명을 냈으며, 심징의 후손에서 영의정 1명, 부마 2명을 냈고, 심온의 큰아들
심준(沈濬)의 후손에서 영의정과 좌의정이 1명씩 나왔다. 심회의 증손 연원(連源), 통원(通源) 형제가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내
형제상(兄弟相)으로 이름났다.
심연원의 아들 심강(沈鋼)은 명종의 국구, 여섯째 아들 충겸(忠謙)이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심열(沈悅)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심열의 현손 심호(沈浩)는 경종의 국구, 연원의 둘째 아우 봉원(逢源)의 손자 희수(喜壽)는 선조 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의겸(義謙)은 영의정 심연원의 손자이며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으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서 분당(東西分黨)의 발단이 된
장본인이다. 심씨는 선조 때를 고비로 하여 사색당쟁의 주역 또는 조역으로 등장하였다.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乾川洞)에 산다 하여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고, 의겸이 서쪽(貞洞)에 산다 하여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그러나 같은 문중에서도 학통(學統) 관계나 혼인으로 인하여 파가 갈라져 대립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서인인 청송심씨
중에서도 현종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광수(光洙),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재(沈梓) 등은 남인(南人)의 과격파였으며,
관찰사·예조판서를 지낸 심단(沈檀)은 남인이면서 소론(少論)과 가까워 노론(老論)에 의하여 실각, 유배되었다. 심의겸은 동·서 분당의
장본인이 되었으나 원래는 붕당(朋黨)의 형성을 꺼려했으며, 명종 때 그의 외숙인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키려 할 때 이를 사전에
막아내기도 하였다.
의겸 형 인겸(沈仁謙)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영조 때의 영의정 수현(壽賢)과 이조판서 택현(宅賢)은 6대손, 정조 때의
영의정 환지(煥之)와 예조판서 풍지(豊之)는 8대손, 영조의 부마 능건(能建)은 9대손, 고종 때의 영의정 순택(舜澤)과 예조판서
경택(敬澤)은 11대손이다.
한편, 풍산심씨의 심정(沈貞)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유배, 사사되었다. 그의 아들 사손(思遜)·사순(思順) 형제와 손자 수경(守慶)은 명신으로 이름났다.
그밖에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냈으나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주살된 청송심씨의 기원(器遠), 이조판서를 지낸 삼척심씨의
언광(彦光), 선조 개국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부유심씨 효생(孝生)과 그의 아들로 호조판서·함북도순검사(咸北道巡檢使)를
역임한 도원(道源) 등이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2만 3677가구에 인구 13만 4169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2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5만 2084가구로 전국 가구 구성비 0.5%, 순위는 274성 중 제31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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