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척약재의 예천과 여흥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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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7-03-22 22:37 조회1,291회 댓글1건본문
척약재와 어머니, 안동 피난 시기 (1361-1363)
1) (김구용 24세)
1361년 겨울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을 호종하여 복주(안동)으로 피난한 듯하다. 이때 어머니(민사평의 따님)가 친정 어머니(김륜의 따님)과 함께 영남(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추론1
1)경북 상주의 沙谷(사곡)과 佳里坊(가리방)에 그의 遺墟(유허) 가 있다고 또는 은거하였다고 傳(전)해 오고 있는 사실, 佳里坊은 당시 靑里縣에 속한 西北 북록 일대로 현재는 佳庄里(가장리) 일대라 짐작된다.
2)전원발의 청원정(경북 예천)을 방문 교유하며 친필 현판을 쓰기도 하고,
3)조선조 중기에 척약재께서 물계서원(경북 예천)에 배향되는 것은
이때의 피난생활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척약재는 개경에서(1363-1375), 죽주거쳐 여흥에서(1375-1381)
어머니(민씨)는 여흥에서(1363-1379)
2) (김구용 26세)
1363년 서울(개경)으로 올라와 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이즈음 어머니는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십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3) (김구용 33세) 1370년
어머니의 친정 어머니께서 갑인년(1370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개경)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안 할 것이니,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하였다.
4) (김구용 38세)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 *경기 죽산이 아니고 경북 예천일 가능성)에 유배되었다.
***추론2
1)경북 상주의 沙谷(사곡)과 佳里坊(가리방)에 그의 遺墟(유허) 가 있다고 또는 은거하였다고 傳(전)해 오고 있는 사실, 佳里坊은 당시 靑里縣에 속한 西北 북록 일대로 현재는 佳庄里(가장리) 일대라 짐작된다.
2)전원발의 청원정(경북 예천)을 방문 교유하며 친필 현판을 쓰기도 하고,
3)조선조 중기에 척약재께서 물계서원(경북 예천)에 배향되는 것,
4)여주 침류정(沈流亭, 천령(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을 읊은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라 한 것은
이때의 죽주(경북 예천)에서의 적거생활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5) ?
뒤에 모향(母鄕, 민사평 본댁이 있던 천령현, 현재의 금사면)인 여흥(驪興)으로 옮겨 7년간(1381년까지) 한거하였는데 이때 여강어우(驪江魚友)라 자호하고 강호에 노닐면서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六友堂)이라 이름하고 ---六友堂은 천령현, 현재의 금사면에 있었는데, 외가가 있던 곳이다---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육우당 위치>
▣ 육우당구기기(六友堂舊基記) 고조고(高祖考) 추술(追述) ▣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금 종형(從兄) 시경(始慶, 1659-1735)씨가 황려(黃驪)에 가서 살면서 우연히 마을 사람과 시사(時事)를 말하게 되었고, 이호(梨湖)에서 한 유지(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선조(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달관(達官) 김모(金某)의 점유가 되었으니 추심(推尋)하여 얻을 수 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선조께서 노닐던 곳을 분명히 알았으니---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은 조선 중기의 문사 모재(慕齋) 김안국(1478~1543)의 범사정(泛사亭)
▣ <계암일록 1 : 을사년 2월 1일>
---바다 같은 해담을 지나 십이탄에 다다르자 수심은 얕으나 강폭은 훨씬 넓어졌다. 여강 왼쪽에 있는 이포에 이르니 모재 김안국 선생이 살던 곳이다. 파사성을 지났다. ---
▣ 김영환 - 육우당은 척약재선조께서 여흥(지금의 여주)에 계실때 계신 당호입니다. 당시 천녕현(川寧縣)에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현재 금사면 금사리 이포대교 근처일 듯합니다. 현지에 답사도 하여보았지만 바위와 5-600년된 은행나무가 있는것도 확인하였습니다.
▣ 김윤식 - 죽산에서 발원한 물이 음죽을 거쳐 여주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까만 작은 점으로 표시된 '천녕(川寧)' 인근으로 추정됩니다. 합수 지점의 여주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6) (김구용 42세)
1379년 어머니(민사평의 딸)가 5월 계사일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6세였다. 김구용(金九容)이 윤 5월 갑진(甲辰)에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金氏, 김혼의 따님)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7) (김구용 44세)
1381년(우왕7년) 우왕(禑王)이 불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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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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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감사합니다.
제가 올린 글 중에서 잘못 본 곳이 있습니다.
<해담을 지나 십이탄에 다다르자>에서 <십이탄>이 아니라 <이십탄>입니다.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