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조 음성공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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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1-07-11 05:50 조회1,917회 댓글0건본문
음성공의 諱(휘)는 震綱(진강)이시니 문온공의 六世孫(육세손)이고 경상좌병사공
諱(휘) 胤宗(윤종)의 次子(차자)이시다. 벼슬이 사헌부 감찰을 거쳐 통훈대부 위계에
오르셨고 晩年(만년)에 음성현감으로 봉직하셨으며 묘를 개미실(甘美谷)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모시고 그 墓下(묘하)에서 자손들이 世居(세거)하여 왔으므로
음성공을 우리의 鄕祖(향조)로 모시고 있다.
향조 음성공의 長子(장자)께서 諱(휘)는 大화(대화)이시니 박학하시고 정의로우시고
효성이 지극하셨다 한다. 父公(부공)께서 환후가 위독하시자 혼신의 정성으로 侍湯
(시탕)하시었으나 보람없이 애석하게 별세하시니 개미실(甘美谷)에 禮葬(례장)하고
三年喪中(삼년상중) 侍墓(시묘)살이를 하셨는데 묘막(묘옆에 풀로 가려 지은 장막)
에서 三日一粥(삼일일죽)으로 연명하시며 3년간 한시도 자리를 뜨시지 않으시고 哀哭
(애곡)하시니 그 효성을 京鄕一圓(경향일원)에 널리서 칭송과 존경을 받으셨다 전해
지고 있다.
그후 40여세에 벼슬길에 오르시어 사헌부 감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통훈대부
위계에 오르셨으나 光海虐政(광해학정)에 밀려 외직인 하양현감으로 전직되어 지방
수령으로서 선정을 하며 公務(공무)에 충실하셨으나 날로 혹심하여 지는 광해학정에
시달리다 못하여 수차에 亘(긍)한 항변으로 충간하면서 고민하던 중 위로하러 온
有志住民(유지주민)에게 老軀臥病(노구와병)으로 治政(치정)할 수 없어 퇴임하였다고
신임수령에게 이르라 하시고 先考墓下(선고묘하) 개미실(현 상평리)로 귀향 은거하시
다가 仁祖改玉(인조개옥) 후에 복권과 아울러 이조참의에 特贈(특증)되셨다.
하양공께서는 묘하에서 자손의 후학을 열심히 훈육하시면서 한편 많은 뽕나무를
심어 蠶業(잠업)을 이룩하여 길쌈(명주비단을 짬)을 권장하는 등 삶에 기반을 마련하
시고 鄕村(향촌)의 근본과 자손만대가 영원히 번성토록 하기 위하여 하양공께서 스스
로 雅號(아호)를 桑齋(상재)라 하시고 다음과 같이 先考墓下(선고묘하)의 마을을 命名
(명명)하여 남기셨다.
稱其村曰桑村(칭기촌왈상촌) 뽕나무 심은 이 마을을 상촌이라 부르고
名其里曰助桑(명기리왈조상) 그 동리 이름을 조상리라 하라.
그래서 현재 상평리의 이름이 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하양공의 선정
의 치적과 거룩하신 행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남 河陽(하양)에 鄕賢祠(향현사)를 짓
고 祭享(제향)을 받들고 있다.
안동김씨대사성공파음성공후손종친회 발행 "안동김씨 대사성공파 음성공자손 계보"중
에서(1990년 10월)
諱(휘) 胤宗(윤종)의 次子(차자)이시다. 벼슬이 사헌부 감찰을 거쳐 통훈대부 위계에
오르셨고 晩年(만년)에 음성현감으로 봉직하셨으며 묘를 개미실(甘美谷)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모시고 그 墓下(묘하)에서 자손들이 世居(세거)하여 왔으므로
음성공을 우리의 鄕祖(향조)로 모시고 있다.
향조 음성공의 長子(장자)께서 諱(휘)는 大화(대화)이시니 박학하시고 정의로우시고
효성이 지극하셨다 한다. 父公(부공)께서 환후가 위독하시자 혼신의 정성으로 侍湯
(시탕)하시었으나 보람없이 애석하게 별세하시니 개미실(甘美谷)에 禮葬(례장)하고
三年喪中(삼년상중) 侍墓(시묘)살이를 하셨는데 묘막(묘옆에 풀로 가려 지은 장막)
에서 三日一粥(삼일일죽)으로 연명하시며 3년간 한시도 자리를 뜨시지 않으시고 哀哭
(애곡)하시니 그 효성을 京鄕一圓(경향일원)에 널리서 칭송과 존경을 받으셨다 전해
지고 있다.
그후 40여세에 벼슬길에 오르시어 사헌부 감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통훈대부
위계에 오르셨으나 光海虐政(광해학정)에 밀려 외직인 하양현감으로 전직되어 지방
수령으로서 선정을 하며 公務(공무)에 충실하셨으나 날로 혹심하여 지는 광해학정에
시달리다 못하여 수차에 亘(긍)한 항변으로 충간하면서 고민하던 중 위로하러 온
有志住民(유지주민)에게 老軀臥病(노구와병)으로 治政(치정)할 수 없어 퇴임하였다고
신임수령에게 이르라 하시고 先考墓下(선고묘하) 개미실(현 상평리)로 귀향 은거하시
다가 仁祖改玉(인조개옥) 후에 복권과 아울러 이조참의에 特贈(특증)되셨다.
하양공께서는 묘하에서 자손의 후학을 열심히 훈육하시면서 한편 많은 뽕나무를
심어 蠶業(잠업)을 이룩하여 길쌈(명주비단을 짬)을 권장하는 등 삶에 기반을 마련하
시고 鄕村(향촌)의 근본과 자손만대가 영원히 번성토록 하기 위하여 하양공께서 스스
로 雅號(아호)를 桑齋(상재)라 하시고 다음과 같이 先考墓下(선고묘하)의 마을을 命名
(명명)하여 남기셨다.
稱其村曰桑村(칭기촌왈상촌) 뽕나무 심은 이 마을을 상촌이라 부르고
名其里曰助桑(명기리왈조상) 그 동리 이름을 조상리라 하라.
그래서 현재 상평리의 이름이 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하양공의 선정
의 치적과 거룩하신 행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남 河陽(하양)에 鄕賢祠(향현사)를 짓
고 祭享(제향)을 받들고 있다.
안동김씨대사성공파음성공후손종친회 발행 "안동김씨 대사성공파 음성공자손 계보"중
에서(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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