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孝印 ②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1-07-14 22:23 조회2,224회 댓글0건본문
고려 고종조에 서예에 이름을 남기신 金孝印 할아버지와 관련된 기록을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1927년)과 김기승이 지은 [신고 한국서예사](1975년) 에서 발췌하여 올려 보았습니다.
▣ 근역서화징 (1927, 오세창)
81. 김효인(金孝印)
安東人이니 官은 兵部尙書 翰林學士라
性이 嚴毅하고 少志學하며 善書하다 (♠高麗史)
高宗十一年甲申에 建한 寶鏡寺圓眞國師碑는 李松老가 撰하고 寶文閣校勘金孝印이 書幷題額하니 在淸河內延山이라 (♠海東金石總目)
自體는 微帶肉(수미대육)이나 而骨力이 圓勁(원경)하고 淸婉可愛(청완가애)하다 (♠書鯖)]
본관은 안동.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도 잘 썼다 (♠고려사)
고종11년 갑신(1224)에 세운 보경사 원진국사비는 이송로가 글을 짓고 보문각 교감 김효인이 글씨 및 전액을 썼으니 청하 내연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글씨체는 비록 조금 살이 쪘으나 그래도 골력이 원만하고 굳세며 맑고 아리따워 사랑할 만하다. (♠서청)
도55 김효인 <보경사원진국사비> [대동금석서]
도56 <보경사원진국사비> 전경, 경상북도 영일군 보경사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정음사)
⊙ 서예부흥의 3대기수
(고려) 고종시대에는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따라서 서예도 중기말의 침체상태에서 재흥의 활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즉 고종대 반세기간에 서예부흥의 3대기수가 나타났다. 우선 문호 이규보를 비롯하여 집권자 최이, 한림학사 병부상서 김효인등 3거두가 모두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 3대가 중에서도 김효인의 글씨가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書跡도 두 개의 名碑에 남아 있다. 김효인은 일세의 문장가이기도 했었는데 文才, 書才를 兼全한 것이 이규보와 쌍벽을 이룬 존재였다. 그러나 글은 역시 문호 이규보의 존재가 더 컸고 글씨는 김효인이 더욱 빛나는 존재였다.
⊙김효인의 두 개 名碑의 書跡
김효인( -1253)의 본관은 안동, 충렬공 김방경의 아버지. 벼슬은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隸書를 잘 쓴 당대의 명필이었다. [書鯖]에서 그의 書風을 "自體 微帶肉 而骨力圓勁 淸婉可愛"라고 평하였다. 그가 쓴 書跡이 보경사의 원진국사탑비와 송광사의 진각국사 원소탑비에 遺存되어 있다.
♠ 원진국사탑비는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중산리의 보경사 경내에 서있다. 이 비에 대하여 [大東金石書]에는 "보경비 재청하내연산 보경사원진국사비 김효인書 이송로文 남송영종 가정17년 갑신립 여강종13년야"라고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연대와 찬자명에 두가지 잘못이 있다. 동비문 말미의 각자에는 "갑신5월일 사문혜숙등 입석" 이라고 있다. 여기 있는 갑신년은 [대동금석서]의 남송영종 가정17년 갑신과 부합된다. 그러나 고려연호로는 강종13년이 아니고 고종11년(1224)에 해당된다. 강종은 재위 3년밖에 안되며 동3년이 고종원년과 겹쳤던 것이다.
또 비문을 쓴 사람이 李松老로 되어 있으나 고종대에 국사의 비문을 쓴 명사는 李公老였고, 이송노라는 인물은 없었다. 이공로는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던 문신으로서 몰년이 고종11년(1224)이다. 이 비석이 선 같은 해이며, 그는 이 비문을 쓰고 그해 중에 죽었던 것이 분명하다.
본비는 높이가 5척 7촌, 폭이 3척 4촌이며 부석위에 서 있다. 비문에 의하면 유가출신의 원진은 속성이 신씨, 휘가 승형, 자가 영회..... <중략>
♠ 김효인이 碑書를 쓴 또 하나의 진각국사 圓炤(원소)탑비는 전라남도 순천군 송광면 송광사에 있다. 그러나 이 비는 일찍이 倒潰(도궤)되어서 斷石(단석)으로 유존되어 있는데 비신 하반부의 좌반부뿐이다. 단석은 고가 3척8촌, 횡이 2척1촌인데 거기 잔존한 비문은 16행이다. 진각은 속성이 최씨, 휘가 혜심, 자가 영을, 스스로 무의자라 호하였다. .... <중략>
고종21년 (1234)에 그가 월등사에 병으로 눕자 왕은 시의를 보내었고 당시의 집권자 진양공 최이도 문병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26일에 병석에서 일어나서 단좌 미소하면서 입적하였다. 왕은 진각국사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立碑연대는 그 이듬해 (1234)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