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孝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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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7-12 17:53 조회2,120회 댓글0건본문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상서 한림학사를 역임하시고 서예사에 있어서 신라 김생에 다음간다는 탄연의 제자로 고려중기에 서예에 일가를 이루신 충렬공 金方慶의 아버지이신 상서공 金孝印과 관련된 자료를 여기저기서 모아서 올려 보았습니다.
⊙ 우리 안동김씨 족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高麗熙宗 戊辰文科 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知制誥 追封 金紫光祿大夫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修文殿太學士 判吏兵部御史臺事 中書令 高宗癸丑11月15日卒
○配金官國大夫人 金寧宋氏 父神虎衛精勇郞將 耆
○公性嚴毅 善隸字 文章事業 傑出一世 事見勝覽 師事致仕 英烈公琴儀 名冠士林 早年登第 世稱琴學士 玉筍門生 筆跡在 淸河內延寺 靈巖道甲寺 康津月南寺 遺基等地 而俱以君命書碑文
○고려희종 무진문과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지제고 추봉 금자광록대부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수문전태학사 판리병부어사대사 중서령 고종계축11월15일졸
○배금관국대부인 금녕송씨 부신호위정용랑장 기
○공성엄의 선예자 문장사업 걸출일세 사견승람 사사치사 영열공금의 명관사림 조년등제 세칭금학사 옥순문생 필적 재 청하내연사 영암도갑사 강진월남사 유기등지 이구이군명서비문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해석을 의뢰한 결과 다음과 같이 답변이 왔습니다.
○公性嚴毅 善隸字 文章事業 傑出一世 事見勝覽 師事致仕英烈公琴儀 名冠士林 早年登第 世稱琴學士 玉筍門生 筆跡在 淸河內延寺 靈巖道甲寺 康津月南寺 遺基等地 而俱以君命書碑文
공은 성품이 엄숙하고 굳셌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문장(文章)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傑出)하였으니, 그 일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보인다.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 둔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름이 사림에서 으뜸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에서 칭하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필적이 청하(淸河)의 내연사(內延寺), 영암(靈巖)의 도갑사(道甲寺), 강진(康津)의 월남사(月南寺) 등지에 있는데, 모두 임금의 명으로 비명(碑銘)을 쓴 것이다.
* 琴儀 : 1153~1230. 初名은 克儀, 字는 節之, 本官은 奉化, 諡號는 英烈.
* 琴學士玉筍門生 : 금학사의 옥순과 같이 뛰어난 문생들. 경기체가의 첫 장의 일부.
⊙ 디지털한국학 (http://www.koreandb.net/) 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김효인(金孝印)
?∼1253(고종 40). 고려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방경(方慶)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학문에 전심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231년(고종 18) 몽고군이 고려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몽고측의 첩문(牒文)을 인수하는 일을 맡았으며,
1250년에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벼슬은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尹龍爀〉
⊙ 1997년 고려숭의회에서 발행한 [보유 고려사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림학사 金孝印 (1192-1253)
본관은 안동이니 장야서승겸 직사관 민성의 아들이며, 명장 상락공 방경의 아버지이다.
성격이 엄의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일찍이 영렬공 금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희종4년 (1208) 문과에 급제하니 사림의 으뜸이요, 금학사의 옥순문생이라 칭송하였다.
벼슬이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에 이르렀으며, 아들 방경의 현귀로 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 수문전태학사 판이병부 어사대사 중서령에 증직되었다.
왕명으로 쓴 비문이 경북 청하의 보경사, 전남 영암의 도갑사, 강진의 월남사에 전한다.
아들은 방경, 지경, 현경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묘지명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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