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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환묘표(金奐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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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9-01-18 22:04 조회1,57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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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영조 13)에 세워진 김환(金奐)의 묘표이다. 찬자는 권중경(權重經, 1658~1728 )이고, 서자는 김환의 손자인 김가신(金可臣)이다. 권중경은 본관은 안동, 자는 도일(道一), 호는 정묵당(靜默堂)·손재(巽齋)이다. 사서에 임명되고, 교리 · 헌납 · 이조좌랑을 거쳐 수찬 ·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사간 ·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대사성에 승진했다가 이조참의가 되었다.

김환(1577~1617)의 자(字)는 연명(然明)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경자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임인(壬寅)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발탁되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서 부정자(副正字),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지냈으며 그 때에 으레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을 겸임하였다. 육품에 올라서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 · 직강(直講) · 사예(司藝) · 사성(司成)을 역임하였고 병조(兵曺)의 좌랑(佐郞) · 정랑(正郞)을 거쳐서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 ·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집의(執義),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다시 발탁되어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가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校理)를 역임하였고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기주관(記注官), 편수관(編修官), 종부시(宗簿寺) 사복시(司僕寺) 정(正)을 예겸(例兼)하였다. 외직으로는 연원찰방(連源察訪), 황해도사(黃海都事), 경기도사(京畿都事)를 역임하였다.

묘표의 초반부에는 김환의 성품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곧은 절개, 효성, 청렴함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반부에서는 김환의 가계와 관직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며, 후반부에서는 그의 자손들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 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홍문관(行弘文館) 교리(校理) 김공(金公) 환(奐)의 묘
숙인(淑人) 평산(平山) 신씨(申氏)는 오른쪽에 합부함.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홍문관(行弘文館) 교리(校理)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김공(金公)의 묘갈(墓碣)
숙인(淑人)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오른쪽에 합부함
사위 통정대부(通政大夫) 원임이조참의(原任吏曺參議) 지제교(知製敎) 권중경(權重經)이 삼가 글을 지었고,
손자 가신(可臣)이 삼가 글씨를 썼다.

해는 임자년으로 나는 소자(小子)로 나이가 15세였는데 공에게 사위로 들어갔다. 공은 나를 돌보아 주심이 깊었고 나도 두터이 생각하였다. 6년 뒤에 공은 돌아가셨고 지금까지 49년이 지났다. 세대는 짐짓 바뀌어 변하여서 세태도 변화하여 전배들의 풍류도 꿈결 같았다. 매번 공이 즐겁게 웃는 모습을 떠올릴 적마다 어찌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성품이 간이(簡易)하고 깨끗하고 고요하여 조금도 더러운 기운이 없었다. 집은 본래 풍족하였지만 한 터럭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아서 거처와 피복이 맑은 것이 한사(寒士)와 같아서 재물을 보기를 똥과 같이 보았다. 공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셨다.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받드는 데 지극한 효성으로 하였다. 모부인은 성품이 엄격하였으므로 공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자신의 기질을 눌러서 모부인을 좌우에서 봉양함에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다. 자매 다섯 사람이 모두 궁핍하여 집꼴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공은 일일이 두루 베푸셔서 궁핍하지 않게 하셨고 자매의 아들과 딸들을 다 거두어들이기를 자신이 낳은 자식을 대하듯이 하셨다. 공(公)이 평소에 거처하실 적에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이 하시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은 듯이 하셨지만 공이 조정에 서는 데 이르러서는 절개있게 자신을 세우셔서 세가임을 내세우지 않고 단신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켰다. 대성(臺省)에 있을 때에 조(趙)와 이(李)가 다툴 적에 귀세가(貴勢家)들은 이씨에게 편들어 조를 억누르려고 하자 공은 중론을 물리치고 두 사람 모두를 배척하여 조(趙)와 이(李)가 모두 조정에서 출척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대단하고 여겼다. 공은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강송(講誦)을 잘하여 상의 마음을 열어 비옥하게 하고 보탬이 넓고 많게 하니 상이 그를 심히 중용하였다. 무릇 옥서(玉署)에 의망하였을 적에 비록 부합하지 않았으나 상이 반드시 하점(下點)하여서 이 때문에 공은 연달아 3년 동안 옥당에서 옮기지 않으니 상께서 공을 총애하심이 이와 같았다. 공은 출입을 삼가고 교유를 즐기지 않으시며 매번 주렴이 쳐진 각사 깊은 곳에서 밤늦도록 독서하였다. 나 소자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천하의 온갖 일 중에서 한 권의 책을 읽는 것 만한 일이 없다”라고 하셨다. 만력(萬曆) 정축년 4월 24일에 공은 태어나셔서 경자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임인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발탁되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서 부정자(副正字),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지냈으며 그때에 으레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겸임하였다. 육품에 올라서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 · 직강(直講) · 사예(司藝) · 사성(司成)을 역임하였고, 병조(兵曺)의 좌랑(佐郞) · 정랑(正郞)을 거쳐서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 ·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집의(執義),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다시 발탁되어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가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校理)를 역임하였고,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기주관(記注官), 편수관(編修官), 종부시(宗簿寺) 사복시(司僕寺) 정(正)을 예겸(例兼)하였다. 외직으로는 연원찰방(連源察訪), 황해도사(黃海都事), 경기도사(京畿都事)를 역임하였다. 이것은 공의 관직을 거친 순서이다. 공(公)은 성이 김씨(金氏)이고 휘(諱)가 환(奐)이며 자(字)가 연명(然明)이며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안동김씨는 2개의 파가 있는데 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증조(曾祖)는 이름이 대섭(大涉)이니 의금부도사(義禁莩事)이고, 조(祖)는 이름이 확(ghkr001.jpg)이니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냈으며, 호(號)는 금사(金沙)이다. 선고는 이름이 정지(鼎之)이고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지냈다. 비(妣)는 여흥(驪興) 이씨(李氏)이니 문(文) 군기시정(軍器寺正) 지굉(志宏)의 딸이다. 정사년 9월 22일에 공은 졸(卒)하였다. 나이가 41세였다. 영평현(永平縣) 남쪽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원배(原配)는 평산(平山) 신씨(申氏)로 문도사(文都事) 최(最)의 딸이니 동양도위(東陽都尉) 익성(翊聖)의 손녀이며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외증손이다. 무인년 12월 초4일에 태어나서 나이 15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공을 섬기는 데 완순(婉順)하여 예가 있었으며 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에도 매우 효도하여 곡진하게 환심을 얻었다. 신축년 정월 초4일에 졸(卒)하였다. 나이 84세이다. 공의 묘 오른쪽에 합부하였다. 아들 1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아들은 경복(慶復)이고 딸은 문(文) 참의(參議) 권중경(權重經)과 진사(進士) 박경언(朴慶彦)에게 시집갔다. 경복에게는 후사가 없어서 족자(族子) 가신(可臣)으로 후사를 삼았다. 딸 한 사람은 유학(幼學) 이제백(李齊白)에게 시집갔다. 서출(庶出)은 아들이 3명인 보신(輔臣), 필신(弼臣), 익신(翊臣)이며, 딸은 2명이니 류연지(柳然之) 한봉흠(韓鳳欽)에게 시집갔다. 권중경(權重經)은 아들이 1명이니 세달(世達)이고 딸은 7명이다. 사위로는 진사(進土) 엄경적(嚴慶迪)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고 심주관(沈周觀)은 급제하였으며 류래(柳徠)는 유학(幼學)이다. 그밖에 이선수(李善壽), 윤사용(尹師容)[진사(進士)], 박지문(朴趾文), 정도융(鄭道隆)이 있다. 박경언(朴慶彦)은 후사가 없어서 형의 아들 이신(履新)을 후사로 삼았다. 가신(可臣)은 아들 둘이 있는데 형(瀅)과 철(澈)이다. 이제백(李齊白)은 후사가 없어서 동생의 아들 종성(宗城)으로 후사를 삼았다. 딸 둘이 있었는데 권탐(權眈)과 류당(柳讜)에게 시집갔다.

숭정(崇禎) 기원후 두번째 정사년(丁巳年) 월 일 세우다.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조(祖)는 이름이 호문(護文)이니-->확(穫)의 오기(誤記)입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수정하였습니다.

솔내영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영환
작성일

  문온공의 종손이신 철원부사공 휘 확 선조님의 글자가 인터넷에서 지윈되지 않습니다.
확 의 맞는 글자는 矱 입니다.  복사해서 붙이니까 제대로 나오네요.  여기에서 복사하여 붙이면 될 듯 한데 한번 시도해 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