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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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4-12-08 05:26 조회2,660회 댓글1건본문
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2
남인(南人)의 영수, 허적 선생 묘소와 별모를 참배하다
소태면 오량리의 양천허씨 묘역은 청룡사지 주차장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나지막한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소태면 오량리는 양천허씨 세거지로 이곳에 숙종 때 남인정권의 영수 허적(許積) 선생의 묘소와 아버지 허한(許僴) 선생 묘소가 모셔져 있습니다.
▲ 청룡사지 인근의 양천허씨 묘역
도로 옆 근래 무덤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낮은 산인 데에다 오솔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서 오르기가 쉽습니다. 길을 계속 따라가면 허한 선생 묘소로, 중간에 오른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면 허적 선생 묘소로 가게 됩니다.
▲ 양천허씨 묘역으로 가는 길
길 끝에 다다르면 왼쪽으로 허한 선생 묘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남향받이 산록이 온통 잔디로 덮여 있는데, 묘역이 어마어마해서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석물도 규모가 크고 잘 보존돼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듭니다. 허한 선생은 1574년(선조 7년)에 태어나 1642년(인조 20년)에 졸하였습니다. 자(字)는 의보(毅甫), 호는 향오(香塢)이며, 지중추부사 허담(許聃) 선생의 아들입니다. 배위는 임란 당시 강원도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국하신 문숙공(휘 悌甲) 할아버지의 따님인 증정경부인 안동김씨입니다. 문영공의 외후손인 정구(鄭逑) 선생을 비롯해 장현광(張顯光)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벼슬살이를 시작해 고산현감 등을 역임하고 이천도호부사에 이르렀으며, 아들 허적 선생의 귀함으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시와 그림에 뛰어난 것으로 전해지는데, 호랑이 그림을 특히 잘 그렸다고 합니다.
▲ 허한 선생 묘소 향하는 일행
▲ 멀리 허적 선생 묘소가 보인다.
▲ 허한 선생 묘 Ⓒ개미실사랑방
▲ 허한 선생 묘. 석물이 잘 보존돼 있다.
▲ 허한 선생 묘갈. 키를 넘는 거대한 크기이다.
▲ 허한 선생 묘역을 설명하는 완식 충주문중회 회장
▲ 영환 안사연 회장이 비문을 설명하고 있다.
▲ 태영 부회장이 허한 선생에 대한 상세내용을 설명하는 장면. 태영 부회장이 공들여 자료집을 준비한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완식 회장에 의하면, 허한 선생 묘는 약 7년 전에 도굴을 당한 것 같다고 합니다. 봉분 서쪽을 거의 70도 각도로 파고 들어가 광중까지 접근해서 회곽까지 깼는데, 다행히 소나무 관이 두꺼워 깨지 못했으나 부장품은 관 바깥에 넣기 때문에 도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때 완식 회장이 도굴 흔적을 발견 즉시 서울의 양천허씨대종회에 연락해 묘소를 다시 수습했다고 합니다.
▲ 완식 회장이 도굴 흔적을 설명하고 있다.
허한 선생 묘를 참배한 뒤 산길을 되짚어 허적 선생 묘역으로 향합니다. 허적 선생은 1610년(광해군 2년)에 태어나 1680년(숙종 6년)에 졸하였습니다. 자(字)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ㆍ휴옹(休翁)입니다. 초배는 이서(李ॳ•) 선생의 따님 광주이씨, 계배는 민지익(閔之釴) 선생의 따님 여흥민씨입니다.
▲ 허적 선생 묘소로 가는 길
허적 선생은 잘 아시다시피 숙종 때 남인(南人) 정권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남인은 동인(東人)에서 갈라져 나온 정파로서 서인(西人)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서인은 동인에게 정치적으로 수세였는데, 동인(東人)인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동인을 숙청해 정철 선생 중심의 서인 정권이 대두했습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고, 정치는 물거품과 같다죠. 정철 선생이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 소생의 왕자가 없으므로 후궁인 공빈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을 후계자로 세우자고 건의하면서 정치적 회오리가 몰아칩니다. 선조는 인빈김씨 소생인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정철 선생의 건의가 어심(御心)을 거슬렀던 모양입니다.
이때 정철 선생을 강경하게 처벌하자는 강경파가 북인(北人), 온건파가 남인(南人)이 됩니다. 남인은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인 우성전 선생과 유성룡 선생 등이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1602년(선조 35년)에 북인 정인홍이 유성룡 선생을 탄핵하면서 광해군 때에는 북인정권이 들어섭니다. 하지만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는 인조를 옹립한 서인이 줄곧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효종이 승하하면서 예송논쟁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환국(換局) 즉 정권교체의 결정타가 될 줄을.
예송논쟁은 표면적인 복상문제가 아니라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 숙종과 송시열 선생 중심 서인 세력의 대립, 조선과 청나라의 갈등을 이용한 병권(兵權) 장악, 일반 백성과 사대부의 사회적 갈등, 임란 이후 사회변화의 제문제점 등등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고 하는데요. 제가 잘 몰라서 설명드리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다만 예송논쟁을 계기로 1675년(숙종 1년)부터 1680년(숙종 6년)까지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송시열 선생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탁남의 영수가 바로 허적 선생인데요. 할아버지 허잠(許潛) 선생이 시호(諡號)를 받자 그 축하연을 베풀었는데요. 때마침 비가 와서 임금이 쓰는 기름먹인 천막을 가져다 썼답니다. 숙종은 그것도 모르고 비가 오니 기름먹인 천막을 빌려 주라고 했는데, 임금의 윤허도 없이 이미 가져다 썼다는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했답니다. 이 일로 허적 선생이 대죄하던 중 서자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이 발생합니다. 허견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비행을 저질러 원성이 자자했답니다. 그가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선군(福善君)과 내왕을 했는데, 수세에 몰린 서인의 공작정치로 허견과 복선군의 내왕이 역모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허적 선생도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 뒤 1689년(숙종 15년) 선생의 억울함을 알게 된 숙종이 무고를 한 김익훈(金益勳)과 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신원하였습니다.
허적 선생의 묘는 아버지 허한 선생에 비하면 규모나 석물이 훨씬 작습니다. 영의정을 지낸 분의 묘소로는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묘표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양천 허 공 적 지묘(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陽川許公積之墓)’라 적고 옆에 배위 두 분은 ‘증정경부인 광주이씨(贈貞敬夫人光州李氏)’와 ‘정경부인 여흥민씨(貞敬夫人驪興閔氏)’로 적혀 있습니다. 초배 광주이씨는 정경부인의 품계를 받기 전에 돌아가시고 나중에 증직된 때문에 ‘증(贈)’이라 적은 듯합니다.
▲ 허적 선생 묘소. 배위 두 분을 함께 모신 삼합장묘이다. Ⓒ개미실사랑방
▲ 허적 선생 묘표 Ⓒ개미실사랑방
▲ 허적 선생 묘소를 답사하는 일행
두 분 선생의 묘를 참배하고 산을 내려와 소태초등학교 못미처 묵재공 허적 별묘(默齋公 許積 別廟)로 향합니다. 이곳은 행오(杏塢) 허한 선생과 영의정 묵재(默齋) 허적 선생을 배향한 사당으로 두 분의 영정(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이 모셔져 있습니다.
별묘 입구에 도착하니 앞마당이 넓어서 주차하기 좋습니다. 입구 쪽에 허적 선생의 할아버지 허잠 선생 신도비가 서 있습니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표석에 2008년 2월 25일 오량리 195-1번지에서 이곳 오량리 674번지 사당 앞으로 옮겨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비문은 부제학 민창도(閔昌道) 선생이 짓고, 글씨는 판서 이징구(李徵龜) 선생 필적입니다. 높직한 기단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얹었는데, 용마루 중앙 부분을 동그란 공처럼 깎아서 눈길을 끕니다. 좌우에 이수(螭首 : 뿔 없는 용)를 새긴 걸 보니 가운데 공 모양은 여의주인가 봅니다. 비문을 잠시 살펴보고 사당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유명한 분이니 어딘가에 원문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실려 있는 곳이 없네요. 비문 촬영하신 분 사진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허잠 선생 신도비
▲ 옥개석 용마루 좌우에 이수(螭首)를 새기고, 중앙에 여의주를 배치하였다.
▲ 신도비의 유잠 선생 휘(諱) 부분
사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오른쪽에 낡은 기와집이 있습니다. 시멘트 기와로 바뀌기는 했지만 집채는 규모가 큰 ㄱ자 형태의 한옥입니다. 앞에는 좌우에 행랑칸을 거느린 솟을대문입니다. 아쉽게도 오른쪽 행랑칸은 허물어지고 없습니다. 예전에 관리사로 쓰이던 건물인 것 같습니다. 사당이 잠겨 있어 영정은 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옆 건물에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안동김씨 할머니 위패입니다.
▲ 사당 앞의 허물어진 한옥
▲ 사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 허적 선생 사당
▲ 안동김씨 위패
조선시대 영정은 대체로 정면을 바라보는 데 비해 허한 선생 영정은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서 얼굴 왼쪽이 더 잘 보이는 형태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셀카 찍을 때 얼짱 각도라고나 할까요. 관모도 둥그스름하게 처리해서 어딘지 모르게 민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관복은 쪽빛 계통으로 옷주름이 비교적 자세합니다. 의자도 나무의 목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다른 영정들에서 보이는 의자와 비교할 때 이채로운 점이라고 하네요. 전체적으로 좀이 슬어 훼손이 심하다고 합니다. 길이 147㎝, 폭 63㎝ 크기입니다.
▲ 허한 선생 영정
조선시대 영정은 오늘날의 비디오나 사진을 방불케 하는데요. 머리카락 하나, 얼굴의 검버섯 하나까지 똑같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정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정을 보고 있으면 인품이나 성격은 물론 평소 생활태도까지 떠올릴 수 있다고 하는데요. 얼굴색이나 얼굴의 종기 같은 것을 의사들이 보고 앓고 있는 병까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허적 선생 영정은 길이 162㎝, 폭 83.5㎝인데, 의자에 앉은 모습입니다. 허한 선생 영정처럼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서 부자간에 같은 각도입니다. 짙은 녹갈색 관복에 구름 문양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흉배는 쌍학을 수놓고, 주위에 화려한 모란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실물로 보면 참 화려할 것 같습니다. 발 아래에 호랑이가죽을 깔았습니다.
▲ 허적 선생 영정
오량리 양천허씨 묘역과 별묘를 참배하고, 11:50분경 이번 답사에 가장 중요한 엄정면 논동 선영으로 향합니다.
사진 윤만, 윤식 / 글 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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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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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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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식 충주문중회장님 연락을 받고, 허한 선생 묘소 설명 중 도굴 관련 내용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