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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을 생각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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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5-04-07 10:13 조회1,6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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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백예순아홉 번째 이야기
2015년 4월 6일 (월)
후손을 생각하는 마음

[번역문]

현곡 조위한은 우스갯말을 잘하였다. 광해군 때에 여러 공(公)과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마침 조보(朝報)가 당도하여 조정에서 모후의 폐위를 주청하는 논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여러 공이 술잔을 물리치고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시경』에 ‘내 앞도 아니요, 내 뒤도 아니로다.’ 하더니, 우리가 이 일을 직접 보게 될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하니, 현곡이 서슴없이 말하기를, “시인이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구려. 나는 오직 우리가 당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하였다.

여러 공이 놀라며 말하기를, “무슨 말씀이오?” 하니, 현곡이 말하기를, “우리 앞에 이런 세상이 있었다면 우리 조상님들이 좋지 않은 때를 만난 탄식을 하셨을 테고, 우리 뒤에 이런 세상이 있게 되면 우리 자손들이 현명하게 잘 대처할 것인지 기약할 수 없을 것이오.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또한 어찌 우리만큼 잘할 수 있겠소? 이런 세상을 미루어 우리 앞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불효의 혐의가 있을 것이고, 우리 뒤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손을 사랑하지 않은 잘못이 있을 것이오. 그래서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고 우리가 당하게 된 것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오.” 하였다.

여러 공이 마침내 눈물을 훔치며 빙그레 웃고 말하기를, “그대의 말을 들으니 조금 마음이 풀리는구려.” 하였다. 현곡의 이 말은 통곡하는 것보다 더 슬프다고 할 만하나 끌어다 비유한 것은 참으로 좋다.


[원문]

 

趙玄谷緯韓善談諧. 當昏朝時, 嘗與諸公會飮, 會朝報來到, 知有廷請廢母后之議. 諸公却杯長吁曰: “詩云: ‘不自我先, 不自我後’, 豈意於吾身親見是事?” 玄谷遽曰: “詩人亦不深思之言也. 吾獨以適丁吾身爲幸矣.”
諸公愕曰: “是何言也?” 玄谷曰: “自我先有是世, 則是吾先祖有不辰之歎; 自我後有是世, 則吾子孫賢不肖難期. 其明哲保身, 又何能如我耶? 推是世, 欲在我先者, 有不孝之嫌; 欲在我後者, 有不慈之失. 不先不後, 適丁吾身, 吾以爲幸矣.”
諸公遂拭淚莞爾曰: “聞君之語, 差可自解.” 玄谷此言, 可謂甚於痛哭. 而然引喩儘好.


- 김주신(金柱臣, 1661~1721), 「산언(散言)」, 『수곡집(壽谷集)』제11권

 


위의 이야기는 광해군 때의 일이다. 광해군이 임진왜란을 잘 수습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균형 잡힌 외교를 하여 자국의 이익을 취하는 등 자질과 실력을 갖춘 유능한 왕이었다는 사실은 그동안의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광해군 자신의 정통성의 한계이다. 결국 광해군은 정통성의 한계를 정당한 방법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대북정권과 함께 무리한 행보를 하고 만다. 성군(聖君)의 자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치 생존을 위해 자기방어에 급급해야 했던 현실적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폐모(廢母)! 그동안 왕실에서 폐비(廢妃)는 있었어도 폐모라는 강상(綱常)을 범하는 충격적인 조처는 없었다. 효(孝)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말이다. 강상죄가 반역죄에 버금가는 처벌을 받았던 이러한 시대에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무리한 행보가 국모를 폐위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제 기대할 수 있는 사회적 보호망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안위를 장담하지 못하는 공포 분위기였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위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한 일화이다.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은 일평생 대외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만한 큰 전쟁을 모두 치렀으며, 대내적으로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수많은 옥사를 겪어 냈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귀결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삶을 보냈다. 수많은 위기를 모면하고 고초를 겪으면서 외적인 고생보다 더한 정신적 고뇌와 심리적 고통을 견뎌 냈을 것이 틀림없다. 민족의 수난기요 정치적 혼란기를 살아낸 조위한의 한 마디가 바로 “우리가 당한 것이 다행”이라는 말이다. 윗글의 저자 김주신은 이 말 한마디가 통곡하는 것보다 더 슬프다고 하였거니와 힘들고 어려운 일은 차라리 내가 당할지언정 부모나 자식이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조위한의 어진 마음씨가 가슴을 울린다.

그런데 얼마 전 영화 ‘국제시장’을 보다가 이와 비슷한 대사가 나와서 매우 인상 깊었다. 주인공 덕수는 또한 우리나라의 긴 역사에서 파란만장한 격변기를 보낸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을 지켜 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이 세대에게 주어진 책임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배고픔과 고역을 견디고 죽음의 문턱을 몇 번씩 넘나들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한 주인공 덕수가 힘겨운 인생의 끝자락에서 한 한마디가 바로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세대는 멀리 광해군 시절의 조위한 세대부터 가까이로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 세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험난함을 몸으로 견뎌낸 윗대의 헌신 덕분에 지금까지 큰 시련 없이 잘 살아왔다. 또한, 윗대가 남겨준 경제적 기반을 이어받아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 심상찮게 대두되는 청소년들의 문제 행동, 그리고 꿈과 낭만은 접어 두고 취업 때문에 고뇌하는 20대 젊은이들을 바라볼 때면 윗대가 물려준 터전에서 과연 우리는 아랫대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반성 어린 회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풍성하고 윤택한 정신적 유산이 아닌 황량한 물질만능주의만 남겨준 것은 아닌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글쓴이 : 선종순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전주분원 전문위원
  • 주요 역서
    • - 『심리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조선왕조실록 번역 및 재번역 사업 참여
      - 『국역 기언』 제2책,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종묘의궤』,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사가집』 제13책, 한국고전번역원, 2009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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