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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元史)로 읽는 충렬공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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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6-02-06 16:32 조회2,2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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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元史)로 읽는 충렬공 02

고려사에, 충렬공께서는 “옛 친구를 잊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로 은혜를 베푼 사람에 대해서는 늘 고마움을 되새기며 보답하려고 하셨다. 그 좋은 예로 원나라의 명재상 안동(安童)과의 일화를 들 수 있다.
재상 안동은 원사(元史)에 따르면 천재적인 명재상일 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물욕이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나이 49세에 병으로 죽자 그 아들 올도대(兀都帶)는 각계각층에서 들어온 부의물을 모두 정중히 사절하고 소박한 수레에 시신을 모시고 선영에 아버지 안동을 안장하였다고 한다. 

먼저 고려사 기록을 보자.(고려사 열전 / 김방경)

丞相安童素與本國有恩者, 時在朔方故不齎國贐行. 方慶以銀盂 苧布遺其夫人. 夫人曰 莫是金相邪. 自丞相北去, 絶無國贐. 非公誰數婦人. 前此進奉使必齎國贐以行, 或有羨餘爲使者率私用, 方慶嘗爲進奉使悉還之.

승상 안동(安童)은 평소에 우리 나라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는데 때마침 북방[朔方]에 나가서 원나라 조정에 없었기에 고려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 술잔[銀盂]과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이것은 김 재상(김방경)께서 보내 주신 게 아닌가? 승상(안동)께서 북방으로 가신 뒤에는 나라(고려)에서 보내는 선물이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나를 생각해 주시겠는가?” 하면서 고마워하였다. 이전에 원나라에 진봉사(進奉使)로 간 사람들은 반드시 나라에서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갔는데, 혹 남는 것이 있으면 대개 사사로이 썼다. 그러나 김방경이 진봉사로 갔을 때에는 남은 것을 모두 나라에 반납하였다.

• 은 술잔과 모시 베 : 원나라 세조에게서 받은 하사품을 충렬공께서 재상 안동의 부인에게 모두 선물하셨으니, 나라의 재물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았다.

안동이 어떤 인물이기에 충렬공께서는 황제의 하사품을 모두 선물로 보내셨을까? 그것도 고려 조정에서조차 미처 나라의 선물을 챙기지 않을 정도로 잊혀진 인물이었는데…….

다시 원사 열전의 한 구절을 보자.(원사 열전 / 안동)

新校本元史/列傳/卷一百二十六 列傳第十三/安童

安童[兀都帶]

安童, 木華黎四世孫, 霸突魯長子也.中統初, 世祖追錄元勳, 召入長宿衛, 年方十三, 位在百僚上. …… 四年, 執阿里不哥黨千餘, 將置之法, 安童侍側, 帝語之曰:「朕欲置此屬於死地, 何如?」對曰:「人各為其主, 陛下甫定大難, 遽以私憾殺人, 將何以懷服未附.」帝驚曰:「卿年少, 何從得老成語, 此言正與朕意合.」由是深重之.

안동[아들 올도대]

안동은 목화려(木華黎)의 4세손으로 패돌노(霸突魯)의 큰아들이다. 중통(中統) 초기에, 세조(쿠빌라이)가 원훈(元勳)을 추록할 때 불려들여 늘 숙위케 했는데, 바야흐로 나이 13세에 지위가 백관들의 위에 있게 되었다. …… 중통 4년에 아리불가(阿里不哥)의 무리 1,000여 명을 붙잡아 장차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하였다. 안동이 곁에서 모시고 있는데, 세조가 “짐이 이 무리들을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안동이 “사람은 각각 그 주인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비로소 큰 소란을 바로잡으려고 하시는데, 갑자기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신다면 장차 아직 귀부하지 않은 자들을 어찌 따르게 하고 복종케 하시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놀라 “경은 아직 나이도 적은데, 어떻게 이처럼 현명한 말[老成語]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이 정녕 짐의 뜻에 맞도다.” 하고, 이로 인해 그를 더욱 중하게 여겼다. 

“향 싼 종이에서 향내 난다.” 하였다. 현인(賢人) 안동을 그리워하신 충렬공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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