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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삶이 고단해도 뜻을 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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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6-02-18 17:21 조회2,06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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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世說新語] [353] 조병추달(操柄推達)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553년 8월 대사성 김주(金澍, 1512~1563)가 사은사로 북경에 머물 때였다. 밤중에 '주역'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밤 불 밝힌 방 하나가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를 불러 연유를 물었다. 그의 고향은 절강성(浙江省) 서쪽 지방인데,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북경에 온 수험생이었다. 시험에 낙방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심양(瀋陽)의 관서(官署)에서 날품을 팔며 다음 과거를 준비한다고 했다. 김주는 그에게 비단을 선물하고 즉석에서 조선 부채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써서 주었다

削以竹, 取其節也  대나무로 깎은 것은 절개를 취함이요,
塗以紙, 取其潔也  종이를 바른 것은 깨끗함을 취해서라네.
束厥頭, 一以貫也  머리 쪽을 묶음은 초지일관(初志一貫)의 뜻이고,
廣厥尾, 殊所萬也  꼬리 쪽을 넓게 한 건 만 가지 다름을 보임이라.
風飄飄, 熱可濯也  바람을 살랑 살랑 일일으키면 더위를 씻어주고,
塵漠漠, 汚可却也  먼지가 자욱할 때는 더러움을 물리칠 수 있지.
操者柄, 施在我也  자루를 잡을 때는 베품이 내게 있으니,[操柄]
用必時, 推達可也  필요할 때에 쓴다면 미루어 달할 수 있다.[推達]
惟萬物, 具太極也  오로지 저 만물은 태극을 갖췄으니,
究一理, 爰有得也  한 이치 궁구하면 이에 얻음이 있을진저.
! 賣兔猶足以作易  ! 날품 팔며 오히려 '주역' 공부 너끈하니,
盍於玆扇以爲則  어이 이 부채로 법도 삼지 않으리.

부채는 살이 하나로 꿰어져 손잡이가 되고, 좌르륵 펴면 가지런히 펼쳐진다. 여기서 그는 '주역'의 이일만수(理一萬殊)를 읽었다. 하나의 이치가 만물 속에 저마다의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다. 그러니 조병추달(操柄推達), 즉 자루[]를 꽉 잡고서 확장하여 어디든 이를 수가 있으리라. 그대가 지금은 품을 팔며 고단하나 이렇듯 공부에 힘쓰니 앞날이 크게 열리리라는 덕담이었다.

10년 뒤인 1563년 5월에 동지중추부사  김주가 변무사(辨誣使)로 다시 북경에 갔다. 하루는 한 재상이 사신의 숙소로 김주를 찾아왔다. 살펴보니 예전 '주역'을 외우던 그 품팔이꾼이었다. 김주의 격려에 고무되어 부채를 쥐고 공부해 과거에 급제해서 예부시랑이 되어 있었다. 그의 주선으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조병추달
! 자루를 꽉 잡고 필요할 때 미루어 쓴다. 눈앞의 삶이 고단해도 뜻을 꺾지 않는다.


김주(金澍)
1512(중종 7)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할아버지는 성()이고, 아버지는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이며, 어머니는 이팽수(李彭穗)의 딸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중종 34)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주 [金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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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原題)는 제선자명(題扇子銘)으로 우암집(寓庵集)에 명(銘)만 있고 연유(緣由)는 실려있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약간의 윤색(潤色)을 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