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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서신에 답장 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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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01-04-11 07:31 조회2,5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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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구)안동김씨 홈페이지입니다. 문의하신 두 분은 신안동김씨이십니다.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시지요. 간단한 인물 소개만 해 드립니다. 신안동김씨 홈페이지를 좀더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1.김상용(金尙容/1561~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경택(景擇). 호 선원(仙源)·풍계(楓溪). 시호 문충(文忠).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으며, 상신(相臣)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응교(應敎) 등을 역임하고, 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였으며, 98년(선조 31)에 승지(承旨)가 되고, 그해 겨울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주(定州)·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를 거쳐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32년(인조 10)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허락받았다. 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선원유고(仙源遺稿)》, 저서에 《독례수초(讀禮隨抄)》, 작품으로 글씨에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平壤) 《군수 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豊德) 등이 있다.



2.김상헌(金尙憲/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시강원사서(司書)·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광해군 대에도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는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廢母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 상을 맞아 물러나 있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도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38년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 《남사록(南錄)》 등이 있고, 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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