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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 율리 좌구산 (귀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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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02 11:32 조회1,19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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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 율리 좌구산 (귀석산)


김치(金緻 : 1577~1625)는 충남 병천면 백전리에서 괴산 능촌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전하는데 -----

◀(대록지 : 안정복이 1779년에 편찬한 목천현 읍지)

목천 백계(栢溪)가에 관어정(觀漁亭)이 있는데, 감사 김치(金緻, 1577-1611)가 지었다. 김중산(金重山)이 상량문을 지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

◀(김득신 묘갈명)

(목천 거주) 향선생(鄕先生)인 후천(朽淺) 황종해공(黃宗海公)이 공(公, =김득신)을 매우 중히 여기고 어질다 여겼다. 상서(尙書)를 지낸 (묘 목천)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이 소시적 안흥군(安興君, =김치, 1577-1625)에게 배울 때 서로 사귀는데 지극히 즐거워했다.


○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기 전 어느 여름날 심기원이 그를 찾아와서 능양군(인조)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기에 이곳 율리의 물치폭포에서 목욕한 후 소반에 보를 놓고 점을 쳐 보니 임금이 될 쾌인지라 이를 극비로 하고 반정을 일으킬 날을 잡아 주는데 천파일로 잡아주고 심기원의 심복이 될 것을 다짐한다. 그 후 인조는 1623년 3월 13일 밤에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의 병력 700여명과 능양군이 이끄는 친병과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여명이 합세해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다.


○ 김치의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으로, 낙향하거나 유배갔을 때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증평 율리에 전해 오기를,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낸 보천에서 율리에 이른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深谷을 그의 호로 정했을 가능성과 유배를 당했을 때 어떠한 연고가 있어 율리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 1625년 남봉공이 돌아가시자 이곳 율리에 장례를 모시고, 아들 김득신은 3년간 시묘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책상자를 짊어지고 산사(山寺)에 가서 읽지 못한 책을 반드시 만 번을 읽었다. 백이전(伯夷傳)을 수십만 번을 읽었다. 이로 인해서 작은 서재의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다.


○ 율리 거주 백곡 후손가에 가전되어 오기를, 증평읍 내성동(현 삼성동) 또는 남하리 서당골(현재의 경모재)에 백곡이 어릴때 다닌 서당이 있었다고 하나, 어떤 연고인지는 알 수 없다. (외조부 목첨, 처부 김성발 *충암 김정의 4세손)


○ 김득신의 호는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인데, 청안에서 좌구산 동쪽으로 청천가는 곳에 백곡(柏谷)이라는 옛 지명이 있음을 볼 때, 이때 백곡(栢谷)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단 조부(휘 충갑)의 유배시 정착지인 병천 가전리에 백전(栢田)이라는 지명이 있고,

<취묵당기>에 壬寅년(=1662년) 8월 가을에 木州(=충남 천안 목천)의 栢谷莊(=?) 으로부터 槐州(=괴산)의 방하현(=능촌리 방아재)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김득신과 친교가 많았던 이득곤(1587-?)이 1616년세운 식파정이 있는 곳에 백곡(栢谷)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20여년 지나 식파정기를 지으면서 백곡노인(栢谷老人)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있다.


좌구산을 귀석산이라고도 하고, 백곡이 율리에 거주하는 시기에 귀석사가 있었음을 볼때, 이때 귀석산인(龜石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한 듯하다. 백곡집에 보면 율리, 죽리, 용강리 곡강, 청안을 오가며 지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


1674년에 김치의 묘갈을 세웠는데, 아들인 柏谷 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 사위인 崔 渲이 써서 세운 것이다.


○ 좌구산 넘어 청안향교 옆 청안사마소에 김득신 위패가 배향되어 있고, 증평읍내에서 남하리 죽리 남차리 율리 가는 한적하고 시골 정취 물씬 풍기는 예쁜 도로가 <백곡로>로 명명되었다. 2002년 5월, 증평문화원 주관 백곡김득신기념사업회 추진으로 <백곡 김득신 학술 연구 발표회>, <백곡 기념 백일장 대회> 등이 열렸고, <청풍명월을 노래한 김득신의 시> 책자를 간행하였다. 2004년 11월, 증평에서 김득신 탄생 400주년 기념 <김득신의 생애와 문학> 학술 발표회가 열렸다.



<율리>

은자(隱者) 마을 봉천이는 봉씨(俸氏)마을 이루었고

좌구산 물치폭포 심곡따라 흐르는데

이산지고(離山地高) 불이던가 구석사(龜石寺)를 지어놓고

가모솥을 굽던 자리 솔점말이 되었구나. 

 

큰 사람 머문 곳에 지명 이름 다양하고

미원장터 넘나들던 분저재길 큰 길 되고

밤티고개를 넘어가면 청천마을 이른다네

삼거리 머물면서 옛 추억을 더듬는다.

*밤고개 : 밤티 동쪽에서 청천으로 넘어 가는 큰 고개.

*분저재 : 삼거리 남쪽에서 청원군 미원으로 가는 고개.

*율리사지 : 1644년(인조22)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불입상.

*구석사(龜石寺) : 절골에 있는 조선조 초의 절로 청안현 남쪽 산이 높아 남향은 불이므로 불을 다스리는 것은 물, 물의 수족지신인 거북을 따서 구석사를 세웠다고 한다. 구석사는 지금은 폐찰 되고 당시 있던 탑신, 축대, 우물 등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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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상석
작성일

  지식창고에서 어느새 거미줄을 놓듯 줄줄--줄 다양한 논고가 만들어졌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