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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02---김흔 2 (1278년 아버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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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0 13:11 조회1,40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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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께서는 위득유, 노진의 등에 의한 무고사건으로 홍다구에 의한 심한 고문과 대청도 유배를 당하고 67세때 1278년 7월초에 장순룡과 함께 상도(개평부)에 도착하여 무고사건에 대한 해명후 충렬왕 일행과 함께 연도(대도,북경,대명부)를 거쳐 동경(요양)을 거쳐 9월초에 고려에 돌아 오셨습니다. 이때 둘째아들 김흔도 백령도에 유배되었다가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에 다녀 오셨습니다.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충렬왕 무인 4년(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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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을 문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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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병진일에 왕이 흔도, 홍다구를 흥국사에 모이게 하고 김방경을 문초하였으나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므로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에 귀양 보내었다.

경신일에 왕이 궁궐 내에서 친히 기도를 드렸다.

계해일에 장군 인후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김방경을 귀양 보낸 것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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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황제가 해동청(매) 한 연(連-한 쌍)과 부마 금인(駙馬金印)과 말 안장을 주었다. 왕이 동궁(東宮)에서 전송연의 술을 마시었다.

계묘일에 왕이 하직하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겁설(숙위의 뜻) 단안(丹安), 독구(禿丘)로 하여금 북경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또 탈탈아 등 세 명의 관원을 보내 동문 밖에서 전송하게 하였으며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왕을 따라 귀국하라 하였다. 황태자 역시 사람을 보내 전송하였으며 황자 탈환(脫歡), 황녀 망가대도 모두 이르렀다. 여러 관원들이 달달(達達)의 노래와 춤으로 왕을 위로하면서 술잔을 권하니 왕은 홀적 가운데서 노래를 잘 하는 자를 시켜 감황은곡(感皇恩曲-은덕을 감사하는 곡조)을 불러서 답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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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무인 4년(1278), 송 제병(帝昺) 상흥(祥興) 원년ㆍ원 지원 15년

○ 장순룡과 백거가 원 나라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왕을 뵙고 아뢰기를, "다구가 황제께 군사 3천 명을 더 보내 달라고 청하여 그 중 2천 5백 명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는데, 황제가 왕이 아뢴 것을 허락하여 도로 철수하게 명하였으며, 다구가 또 전라도에 탈탈화손(脫脫禾孫)을 두도록 청하였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고, 또 칙명으로 김방경 부자와 득유ㆍ진의 등이 왕을 따라 조정에 들게 하여 대질 변명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따라가는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이분희와 이습이 아뢰기를, "흔도와 다구가 원래 이 일을 따지기를 싫어하였으니, 지금 비록 성지(聖旨)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들은 필시 칙명의 문서가 없다 하여 듣지 않을 것인즉, 조정에 들어가서 다시 청한 후에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원수부에서 듣지 않는다면, 성지를 어기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죄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순룡을 보내어 방경 등을 불렀다.


국인이 본래 분희 형제가 다구와 사이가 나쁜 것을 의심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더욱 믿게 되었다. 순룡이 방경 부자와 득유ㆍ진의를 데리고 원 나라로 가는데,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진의는 혀가 짓물러 죽었다.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내가 득유 ?문에 이렇게 되었다." 하니, 득유가 이 말을 듣고서 침식을 잃고 늘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한숨만 쉬었다.


○ 황제가 왕에게 해동청(海東靑) 1연(連)과 부마(駙馬)의 금인(金印)과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고, 황후는 공주에게 채단 한 수레를 하사하며, 겁설(怯薛) 단안독구(旦安禿丘)에게 호송하게 하였다. 북경에 이르러 김방경에게 명해서 왕을 따라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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