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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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9. 문온공 관련 각종 문헌 자료 모음

 

  1)[신증동국여지승람] 내의 김구용(金九容) 자료 소개 (2003. 4. 10. 윤만(문) 자료 제공)

 

▣ 제2권 p49<여주목 산천(山川)>

--승산(勝山) : 주 남쪽 5리에 있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청산에 들불이 침노하니, 소나무와 삼(杉)나무가 다 타버리고 다시 마음이 상하누나. 지난해 철쭉꽃이 피던 곳, 울창하게 도리어 잡목 숲을 이뤘네.” 하였다.

 

▣ 제2권 p63<여주목 불우(佛宇)>

--보은사(報恩寺) : 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다. 옛 신륵사인데, 벽돌 탑이 있으므로 속칭 벽절이라 한다. (중략)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나무 돛대는 갈대 여울을 돌고, 소나무 배를 돌다리에 매었구나. 맑은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밝은 달은 긴 강에 찼네. 설법하니 용도 응당 들을 것이요, 참선하니 호랑이도 스스로 엎드리네. 오가며 그윽한 흥이 있으니, 이끼 길이 배창에 접했네.“ 하였다.

 

▣ 제2권 p81-p83<여주목 고적(古蹟)>

--사우당(四友堂) : 마암(馬巖)에 있다. 임원준이 당(堂)을 짓고, 이름을 사우(四友)라 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전략)-----근자에 김선생 경지(敬之)가 여강(驪江)에 계셔 그 당(堂)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설(雪)·월(月)·풍(風)·화(花)를 위한 것이었는데, 뒤에 강(江)·산(山)을 다하여 육우(六友)라 하였다. 그 벗함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숭상하는 것이 다 선생이 벗한 바가 인륜 일용(人倫 日用)의 떳떳한 데 있고, 형색(形色)이 완호(玩好)한 데 있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니, 벗을 취하는 도리가 이에 극진 하였다.(하략)-----

 

▣ 제2권 p83-p85<여주목 고적(古蹟)>

--침류정(沈流亭) : 천령(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 (전략)-----○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이암(伊庵)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 위에서 책을 베고 조노라.“ 하였다. ○또, ”못을 파고 버들을 심고 초가 정자를 지었으니, 푸르름이 축축하여 개이려 하지 않네. 문득 은대(銀臺)에 놀던 화월(花月)의 꿈을 깨치니 녹음에서 가끔가다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 하였다. ○또, ”꿈은 아직도 봉황지(鳳凰池)를 싸고 도는데, 집을 구하고 밭을 구하여 푸른 물가를 찾았네. 구구히 성자(姓字) 감출 것 없다. 금어초목(金魚草木)이 이미 알고 있네. 하였다. ○또, “조각배 짧은 노로 가시사립 두들기니, 비오는 밤에 도리어 물 위 마을이 아득하구나. 묻노니 금사가 어느 곳이뇨. 등불이 숲을 격한 언덕에 깜박거리네.” 하였다.

 

▣ 제2권 p85-p88<여주목 고적(古蹟)>

--육우당(六友堂) : 천령현에 있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여강에 귀양와 당(堂)을 짓고 육우(六友)라 이름하였다. 이색(李穡)의 기문에,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가 그 당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대체로 강절선생(康節先生 ; 소옹<邵雍> 송대의 철학자)의 설월풍화(雪月風花)를 취한 것이다.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하기 청하나, 그것을 배우기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함이 오래되었다. 그가 여흥(驪興)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지금 우리 외가에 있는데, 강산의 아름다움이 나를 조석으로 위로하는 것이, 홀로 설월풍화(雪月風花) 만이 아닌 까닭으로 여기에 강산을 더하여 육우(六友)라 하였으니, 선생은 가르침을 주시요.’하였다. 내 말하기를, ‘내가 쇠하여 병든지 오래였다. 위로 천시(天時)가 이변하여도 내 모르고, 아래로 지리(地理)가 허물어져도 내 모를 뿐이다. 강절(康節)의 학문은 수리(數理)에 깊은 것인데, 이제 비록 강, 산 두 자로써 그 위에 더 써서 강절과 같지 아니함을 보인다. 그러나 역(易)의 육룡(六龍). 육허(六虛)는 강절의 학문이 나은 것이니, 이 <육(六)>을 또한 강절에게 돌릴 뿐이다. 비록 그러나 이미 <강절의 학>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찌 말이 없겠는가 말하자면 산은 우리 인자(仁者)가 즐기는 것이니 산을 보고 내 인(仁)을 가지고, 물은 우리 지자(智者)가 즐기는 것으로 강을 보면 지(智)가 있는 것이다. 눈이 겨울의 따뜻함을 누르는 것은, 나의 기운을 가운데 보전시키고, 달이 밤에 밝은 빛을 내는 것은, 나의 몸이 편안함을 보존함이다. 바람은 팔방이 있어 각각 철따라 나의 망녕되게 움직임이 없는 것이요, 꽃은 사시가 있어 각각 유(類)로서 모이니, 내가 차례를 잃음이 없는 것이다. 또 더욱 경지씨는 마음이 깨끗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고, 또 사는 곳이 산이 밝고 물이 푸르르니, 밝은 거울과 비단 병풍이라 일러도 욕됨이 없을 것이다. 눈은 고주사립(孤舟簑笠)에서 더욱 아름답고, 달은 높은 다락 술자리에서 더욱 아름답고, 바람은 낚시줄에[釣絲] 있어서 그 맑은 것이 더욱 맑고 꽃은 서탑(書榻)에서 그 그윽함이 더욱 그윽하여 지는 것으로, 네 철의 좋은 경개가 각각 그 극치를 다하여 강산의 사이에 경위(經緯 ; 가로.세로)하였다. 경지는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강에 배타고 짚신신고 산에 올라 낙화(洛花)를 세고, 청풍에 서서 눈을 밟고 중은 찾고, 달을 대하여 손을 부르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극치를 다함이오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獨步)하는 분이다. 동지(同志)를 벗함에 있어서도 위로 옛사람을 벗으로 하니, 옛사람을 하나 둘로 헤일 수 없는 것이요, 벗을 현금에 구하면 우리 같은 이로 어찌 적다하겠는가. 그러나 경지씨의 취한 것이 이와 같으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하는 분이다. 비록 그러나 천지는 부모요, 물(物)은 나의 한편이니, 어디에 가서 벗하지 못하겠소. 더욱 대축(大畜蓋)의 산과 습감(習坎)의 물은 강습하여 많이 아는 것이랴,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다.’하고 이에 육우당기에 짓는다.” 하였다. ○정추(鄭樞)의 부에, “저 여강 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당(堂)이 있어 장려하구나. 아, 탁월한 높은 사람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손을 모았구나. 그 벗함은 오직 여섯인데 보통 사람이 친할 만한 것이 아니네. 고인(高人)이 더불어 평소에 그들과 서로 알음이여, 흉금이 속세의 티끌을 끊었네. 아, 아름답구나. 저 양양하게 먼 흐름이여, 흐름이 근원이 있어 쉬지 안누나. 저 높고 아래가 두터움이여, 높으나 위태롭지 아니하여 편안한 집일세. 저 꽃다운 꽃봉우리의 찬란함이여, 골고루 멀리 비치는구나, 손이(巽二)가 맑은 바람을 명하고, 등륙(騰六)은 곧 나쁜 것을 가리어 숨겨 주누나. 서·동과 남·북이 모두 그 어진 덕을 자랑하고 빛내누나. 손과 주인의 서로 접함이여, 어찌 웃음소리도 하하 하는고. 말을 주고 받는 담봉(談鋒)이 우뢰같음이여, 혹 낮을 다하고 저녘에 늦도록 하는구나. 만일 그 거처를 말하자면 태극(太極)을 집으로 하였고, 그 족속을 상고하면 육막(六幕 ; 천지 사방을 말한다)에 두루했네. 천지가 이미 개벽됨으로부터 형상이 나타나 법도대로로다. 세속은 어두워서 늘 함께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구나. 아, 나의 혼미함이여, 저 장님과 무엇이 다르랴. 아름답 다, 상락(上洛)의 원손(元孫)이여, 일찍이 주역에 연구가가 있었도다. 양붕(良朋)을 알아서 굳게 맺음이여, 진심으로 얻었음으로다. 이에 육일노인(六一老人)이 있어서 그 행함이 빨라 자취없구나. 이미 팔구(八區)를 두루 보고는 고향에 들려서 수일동안 묵었구나. 드디어 당에 올라 손에게 읍하고,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어질구나, 그대가 여섯을 벗함이여. 진실로 초월하게 세속에 벗어 낫구나. 그러나 그 득실(得失)에 어찌 말이 없겠는가. 바야흐로 그 기둥에 의지하니 물결이 밝고, 발을 걷으니 산이 푸르구나. 봄동산에 흩어진 것은 홍록(紅錄)이요, 가을 하늘에 걸린 것은 희고 깨끗한 달일세. 바야흐로 무더울 때는 맑게 물결이 부딧치네. 겨울의 따뜻함을 누름이여, 흰 것을 뿌리누나. 이 때에 혹 술을 대하며 쟁(箏)을 타고, 혹 난간에 기대여 피리소리를 듣누나. 정신이 화열하고 뜻이 맞으니 이 즐거움이 어찌 다하랴. 물에 가까이 함을 즐기면 옷이 젖고, 자주 위험한 산을 타면 나막신이 꺾어진다. 색을 너무 사랑하면 천성을 치는[伐]것이오, 밝음을 구경하는 것이 심하면 눈을 상하고, 시원한 것을 먹기를 좋아하면 병이 나고, 찬 것을 항상 범하면 동상(凍傷)을 입는다. 내 일찍이 공자의 <말씀을> 들으니, ’친구도 <충고를> 자주하면 소원해 진다.‘ 한다. 그 함괘(咸卦) 동동(憧憧)함이여, 성인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 아니네. 일반 사람의 정이 서로 좋아함이여, 마음이 험하여 헤아릴 수 없구나. 처음 사귀매 아교같이 붙었다가, 문득 노하여 눈을 흘기네. 이제 그 원인를 찾아보니, 물(物)과 내가 적이 된 까닭이네. 비록 여섯 벗이 맑다 하나 적이 되니 일반이라. 덕을 한결같이 한 대인이 있음이여, 천지를 초월하여 독립했구나. 그 등을 등지니 그 몸을 보지 못하거든, 하물며 와서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음에랴. 어찌 그대의 여섯 벗을 버리고, 대인을 따라서 배우지 않는가. 하니 ’주인이 이에 들판을 돌아보고, 빙그fp 웃고 말하기를, 그대의 하는 말은, 내 들은 것과 다르네. 저 방(方)과 물(物)이 유(類)로 모이고, 무리로 나뉘어 져서 법칙 없음이 없는 것일세. 대체로 대인의 학문은 반드시 비고 교요한데, 저 벗의 좋고 좋지 아니함은 내 자신으로부터 손익(損益)할 것이네. 그 물(物)이 없는 미묘한 진리에 돌아가 숨는 것보다, 차라리 손과 더불어 즐김이 나을 것일세.‘하고, 이어 노래하기를 , ’달이 비침이여, 산 언덕이로다, 바람이 슬슬 불어 옴이여, 강이 스스로 물결치누나. 꽃은 말을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눈 물[雪水]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이에 서로 크게 웃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인지 알 수 없네.‘ 하였다.” 했다.

 

▣ 제2권 p92<여주목 우거 고려>

--김구용(金九容) : 민사평(閔思平)의 외손이다.

 

▣ 제3권 p429<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

--김구용(金九容) : 방경(方慶)의 증손(曾孫 ; 高孫의 오기)이며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누진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힘써서 후학(後學)들을 진학(進學)하게 하여 교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비록 휴가로 집에 있을 때라도 여러 생도들의 질문(質問)하러 오는 자가 잇따라 있었다. 우왕(禑王) 때에 이인임(李仁任)이 북원(北元)의 사자(使者)를 맞아들이고자 하거늘 구용(九容)이 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글을 도당(都堂)에 올려 <북원의 사자>를 물리치려고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조지 아니하였다. 곧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얼마 않되어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기더니, 뒤에 명나라에 가는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가다가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경사(京師)로 가서, 대리위(代理衛)로 귀양가 그 곳에서 병졸(病卒)하였다.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하였다.

☞ 주(註) : 대리위(代理衛)에서 병졸(病卒)하신 것이 아니고 귀양 도중에 노주(氵+盧州)에서 돌아가셨다.

 

▣ 제5권 p480<강릉대도호부 형승>

--산수<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하였다.

 

▣ 제5권 p511<강릉대도호부 제영>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 영주 가깝고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 영주 가깝고, 높은 영(嶺)은 하늘을 만질 듯 태산화산(泰山華山)인가 의심한다.“ 하였다.

--흰모래 푸른데 물가의 섬은 : 앞 사람 <김구용>의 시에, "깃빨도 선명하게 물결에 비치니, 자고 새가 놀라 날아서 해당화 떨어진다. 흰모래 푸른데 물가의 섬은, 송교 (松喬)제자의 집인가 의심된다.“ 하였다.

☞ 주(註) : 송교(松喬)는 모두 옛날의 신선으로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 두사람이다.

 

▣ 제5권 p526<삼척도호부 제영>

--깨끗한 강산은 나와 같이 맑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강과 산 나와 같이 맑은데, 누대 가는 곳마다 관현(管絃) 소리 들리네. 좋은 말에 고운 계집을 태운 것이 아니면, 삼한(三韓)이 태평하다 누가 말하리.

 

▣ 제5권 p567<고성군 역원>

--대강역(大康驛) : 옛 안창현(安昌縣)에 있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우정(郵亭)은 눈[雪] 속에 좋은데, 서로 보니 봄 빛이 푸르네. 모래가 평평한데 푸른 소나무 총총히 들어섰고, 언덕이 넓으니 기이한 돌도 많은네. 동쪽에는 만리의 물결이 뒤엎고, 서쪽에는 천 층 벽이 깎아섰네. 내가 와서 손님이 상종하기 잦으니, 정장역(鄭莊驛)이 아닌가 하노라.“ 하였다.

☞ 주(註) : 정장역-한나라의 정당시라는 사람이 자기 집으로 오는 큰 길 몇 백리 안쪽에는 모두 마차를 대기시켰다가 찾아오는 사람을 태워 왔다 한다. 그래서 그 마차가 대기한 곳을 정장역이라 하였다.

 

▣ 제6권 p175<영흥대도호부 고적>

--희우루(喜雨樓)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담한 가을 빛 속에 해가 잠기고, 몽몽(濛濛)한 바다 기운이 숲 기운과 섞이어 내리네. 천리 안계(眼界) 속에 농상(農桑)이 풍요하니, 옛 날의 강폭(强暴)한 자들이 몇 번이나 전비(前非)를 뉘우쳤는가.“ 하였다.

 

▣ 제6권 p213<덕원도호부 제영>

--북녘 바람이 철관(鐵關)의 정을 불러 일으키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만리 창파(滄波)에 한 정자[초정(草亭)], 북녘 바람이 철관의 정을 불러 일으키네. 백 년동안 범과 이리 떼가 둔(屯)쳤던 이 곳, 이제 닭울고 개 짖는 소리가 의구(依舊)하구나.“ 하였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2)제정 이달충(문온공의 사돈)의 척약재시 발(跋)  (2005. 3. 21. 영윤(문) 제공)

  출전 : 동문선 제102권

  * 제 김안렴 시권 후(題金按廉詩卷後)

 

이달충(李達衷)

 내가 계축년 가을에 산중으로부터 오니, 벗 김군 경지(敬之)가 즐겨 객사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관동(關東)을 안찰함에 있어 교유하던 벗들이 서(序)와 시로서 나의 이별길에 은총과 영광을 빛나게 하였으나, 오직 그대만은 서로 기러기와 제비처럼 어긋나서 한 마디 말도 얻지 못하였으니, 자못 마음에 한스럽고 불만하다. 청컨대 권축(卷軸) 뒤에 발을 해달라.” 하고, 소매 속에서 한 두루마리를 내어 보이는데 다 한때의 거필(鉅筆)들이다. 우리 경지의 재능과 덕의 아름다움과 여러분의 높이 포상하고 면려하는 뜻에는 이미 미진한 것이 없으니, 누가 다시 그 사이에 말을 하리요.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바다를 본 자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놀던 자에게는 말을 하기 어렵다.” 하였거니와, 경지가 공훈 있고 덕을 쌓은 가문에서 성장하고, 도덕 문장의 숲속에서 한가롭게 마음껏 놀았는데, 이제 관동지방의 사명을 받들어 회우(淮右) 일대를 관광하게 되었으니, 흉금이 더욱 활짝 열리고, 그 기상이 웅대하고 호탕함을 더할 것이니, 우리 제배들이 눈을 씻고 그의 귀환을 기다려야 할 것은 대개 속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 어찌 감히 소 발자국의 물을 가지고서 넓고 큰 물을 말하며, 개미집 두둑을 가지고서 높은 산을 말하며, 거칠은 음식을 가지고서 진미를 말하며, 갈대 피리를 가지고서 비단 비파를 말하리요. 백치가 아니면 곧 미치광이라고 반드시 괴탄할 것이다. 내가 장차 글을 쓰려다가 문득 다시 그치고 했던 까닭은 바로 이것이었다. 경지의 청탁이 두어 차례 이르러 이것으로써 책임을 면하고자 발하는 바이다.

 

3) 김구용과 여주 (2001. 3. 2. 주회(안) 제공)

 

3.1절에 여주에 다녀 왔습니다.

여주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과 효종대왕릉인 녕릉이 있고 시내 곳곳에 세종과 관련된 조형물과 간판등이 산재해 있어 마치 세종의 고향 같습니다.

또한 옛부터 勝景으로 이름난 여강이 흐르고 있고 강안의 신륵사에는 여말 유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목은 이색이 여강에서 의문의 생을 마감한 곳이어서 그의 유허지 같습니다.

 

그리고 여주는 우리 (구)안동김씨 문온공파 파조이신 척약재 김구용(1338-1384) 선조와도 관련이 아주 많은 곳입니다. 우선 그의 외가가 이곳 여주이고 급얌(及菴) 민사평(閔思平)의 외손으로 이곳에서 익재 이제현, 우곡 정자후 등에게 직접 배우며 성장하였고,

 

1375년(고려 우왕1년) 삼사우윤에 제수되었으나 , 이인임 일파와의 言事로 죽주(현 안성시 이죽면 죽산리)에 유배되었다가 모향인 여흥군(현 여주)으로 옮겨 7년을 한거하면서 매일 詩酒로서 自樂하고 그 거소에 六友堂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곳이며,

 

그의 시집인 [척약재학음집]의 번역서인 성범중의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 (1997 울산대학교 출판부)에 보면 여강루, 신륵사, 고달사, 천녕 등 여주와 관련된 시작이 많이 있고, 평생 여흥을 매우 아끼고 그리워하였다고 합니다.

 

여주대교 건너기전에 남한강의 상류인 여강이 나오고 이 여강의 이름을 낳게 한 마암바위가 강변에 절벽을 이루며 우뚝 솟아있습니다. 그 위에는 2층 누각 한 채가 번듯하게 서 있는데 지금은 영월루(경기도문화재자료 제37)라 부르고 있는데, 영월루는 원래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당시 군수가 파손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 누각을 현 위치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육우당은 김구용이 여주에 귀양와서 지은 당 이름으로 서거정의 [사우당기], 이색의 [육우당기]에 기록이 남아 있는데, 조선전기 부자간신이었던 임사홍의 아비 임원준(1423-1500)이 이곳을 차지하고 사우당을 지어놓고 당대 문장인 서거정(1420-1488)에게 사우당기를 짓게 하였던 곳으로 이곳 영월루 자리가 김구용의 육우당 자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목은 이색이 지은 신륵사 경내에 있는 나옹화상(1320-1376)의 사리탑비인 [보제존자사리석종비]에는 이의 건립에 동참하였던 사부대중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는데 '前 三司右尹 金九容"이 새겨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여주와 김구용 선조와 관련된 자료나 정보가 있으신 분은 공유 바랍니다.  

 

 4) 여흥군 부인 묘지명 (2001. 12. 5. 영환(문) 제공)

 

척약재 선조의 어머니는 급암 민사평의 무남독녀이신 여흥군부인이십니다. 자료에는 김묘(문온공;척약재;의 아버님)처 민씨 묘지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흥군부인 민씨 할머니의 묘소는 여주 남 십리 에 모셔저 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실전하고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주 발산 근처에 수차 답사한 결과 비슷한 묘소를 찾았으나 조선 중기에 썼다는 다른 집안 묘이었습니다. 왜 비슷하다라고 추정하는냐 하면 고려시대의 묘는 거의 장방형의 사각 무덤인데 이 묘가 사각 묘이어서 고려시대 묘임에 틀림 없을 터이데 묘주인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라니 의심이 들었습니다.

묘지는 고려시대는 주로 장망형이고 조선초기에는 육각형의 묘소가 잠깐 등장하다가(익원공묘소) 원형으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여흥군부인 할머님 묘소도 찾지 못하고 묘지도 실물이 전해오지 않습니다. 문온공파에서는 포천 금수정 경내에 상락군 휘 묘 할아버님과 여흥군부인의 설단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여흥군부인 묘지명을 번역하여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흥군부인 묘지명은 동문선에 기록 되어 있고, 목은집에도 기록 되어있으며 문온공파 세보 권 1 에도 기록 되어 있어서 원문은 생략하니 원문이 필요하신 분은 위 자료를 찾아보시거나 본인에게 연락하시면 제공 하겠습니다.

 

.驪興郡夫人 閔氏 墓誌銘

 

나의 벗 김구용씨가 금년 윤 5월 갑진 이래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추봉 삼한국부인)민씨를 조모 김씨(영창군 시 양간공 휘 承澤 배위; 추봉 낭랑국부인 경주김씨)의 묘소에서 바로 그 서쪽 십수보 되는 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미 그의 장자인 참군사 明善을 그 곳에 보내고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여 왔다.

나는 김구용씨와 지내는 도의상 사양하지 않고 그 집안의 가계상황을 살펴보았더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시 문온공 及菴선생이신 휘 思平은 부인의 아버지요, 광정대부 부 밀직사사 시 문순공 휘 적은 조부이시며, 도첨의찬성사 시 충순공 휘 宗儒은 그의 증조부가 되시며,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호 竹軒 언양김공 倫은 외조부가 되시니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바이다. 부인께서 그러한 명문가에 태어나시어 견문을 익혀 배우시고 모든 일을 한결같이 하시니 이 모두가 그의 어머님의 법도를 본받았음인지라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를 다하였고, 조석문안은 병환 중일지라도 그치는 일이 없어 종족이 모두 칭송하였었다. 서기 1361년 겨울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개성에서 남쪽 여흥 땅에 내려갈 때 부인이 그의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가셨는데 그의 어머님의 평안함이 평소 급암댁에 계시는 것과 같았다. 그 후 부인께서는 여흥의 고향에서 10여년을 살으셨는데 더욱 부지런히 섬기셨으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부인의 아들과 사위들이 서울(개경)로 돌아오시도록 간청하였으나 부인은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친정 어머님을 이 곳 여흥 땅에 묻어두고 내가 가버린다면 묘소의 첨소를 궐하게 되니 내 어찌 견디리랴. 내 어찌 견디리랴." 하시었다. 그 후 5월 계사일에 부인이 병환으로 개성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이었다. 구용씨가 또한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은 청덕하시어 지식이 높은 분을 두텁게 존경하시고 부모에겐 오래도록 봉양하시기를 즐기셨는데 이제 어머님 마저 돌아가셨으니 어찌 하리오." 하였다.

이에 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착하신 어머님이시었도다." 문온공 급암 선생께서는 비록 아들이 없었으나 이러한 따님을 낳으심으로써 구용씨 댁과 서로 역사의 전승을 이루었으니 가히 어지시다고 말하지 않을수 있으리오. 아들 삼형제를 두셨는데 장자 九容은 전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 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이요 차남은 齊顔인바 중의대부 병부랑중 겸 첨서하남강북등처행 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사천김씨 시조 김부의 아버지)이며, 다음 삼남은 九德(안정공)은 전 좌우위보승산원이다. 딸이 아홉이니 전 밀직사부사 金士安, 전 개성윤 李장로, 전 종부령 崔有慶, 전 낭장 許灝, 전 부령 許선, 박사 李存斯, 문하주서 金贍에게 각각 출가하고, 다음은 미혼이다.(8녀 사윤 金千壽 9녀 부정 崔自河) 명(묘지의 끝에 쓰는 그 사람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에 이르되

 

만물은 필연히 그 근본으로 돌아가라니

죽음이란 끝이 아니도다

여흥 민씨는 이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돌아가셨으니

 

저 강이 구비쳐 흐르는 것처럼 어찌 끝이 있단 말이요

 

좋은 것 모두 갖추었으니

이는 영가(안동의 옛 이름)김씨의 가풍이 되리라

 

문충보절찬화공신 숭록대부 정당문학 집현전 태학사 지 춘추관사

겸 성균관 대사성 한산 牧隱 李穡 씀.

 

 5)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와 문온공 김구용선조  (2002. 1. 31. 영환(문) 제공)

 

여주 신륵사에 가면 보물로 지정된 보제존자석종과 석종비를 만날 수 있다. 이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것만도 도합 6개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볼만하다.

여기 석종비에 보면 시주자 명단에 척약재 김구용 할아버님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매우 반갑기 그지 없다.

이는 본 홈 개설후 초반에 주회씨께서 여주신륵사를 다녀와서 쓰신 글이 있는데 오늘 다시 항용씨께서 동국대학교에서 확인하신 탁본 내용이 있어 다시 한번 정리하여 본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는 고려말 보제존자 (혜근 나옹선사) 스님의 묘탑인 석종(보물제228호)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서, 목은 이색이 글을 짓고 한수가 글씨를 썼다.

내용은 여흥군신륵사보제사리석종기 와 보제존자진당시병서로 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당시의 주지 및 대중스님, 석수, 목수 시주자명단등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보물 22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중 시주자 명단에 전 삼사좌윤 김구용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비문에서는 희미하여 직접 확인하기가 어렵고 탁본에서는 확연히 볼 수 있으며 신륵사 입구에 있는 여주시자료관에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자료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神勒寺普濟尊者石鐘]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종.

지정번호 : 보물 제228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높이 1.9m

종류 : 석종

보물 제228호. 높이 1.9m.

화강석으로 제작된 이 석종은 먼저 지상에 석축(石築)으로 넓은 건축기단(建築基壇)을 축조하고 상면 외주(上面外周)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돌려 갑석(甲石)을 삼고 전면과 양측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이 기단 상면에는 박석(薄石)을 깔고 그 중앙에 2매의 판석(板石)을 얹어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을 마련하였으며, 탄신과 접하는 곳에는 원형 몰딩이 조각되었다. 탑신은 원래의 종형(鐘形)에서 퇴화되어 위가 잘라진 포탄같이 되어 있으며 표면에는 장식이 없고 탑신의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다. 탑 꼭대기에는 화염무늬[火焰文]를 모각(模刻)한 낮은 보주(寶珠)가 얹혀 있을 뿐이다.

 

이 석종을 중심으로 전면에 석등, 후면에 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석종형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팔각문당형(八角門堂形)의 부도형식(浮屠形式)이 고려시대에 일부 새로운 양식으로 가미되었다가 그 말엽에 이르러 완전히 바뀌어 전혀 새로운 형식이 된 것인데, 이 석종은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 혜근(慧勤)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종형 부도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묘비(墓碑).

지정번호 : 보물 제229호

소재지 : 경기 여주군(驪州郡) 신륵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종류 : 묘비

 

보물 제229호.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비신은 대리석이고,

비대(碑臺)와 옥개(屋蓋)는 화강석이다. 비표(碑表)는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驪興郡神勒寺普濟舍利石鐘記)’로 시작되는 석종기와 ‘보제존자 진당시 병서

(普濟尊者眞堂詩幷序)’로 시작되는 진당시로 양분되어 있고, 이면(裏面)에는 수월사(水月寺) ·보광사(普光寺) 주지를 비롯하여 석수(石手) ·목수(木手)에 이르기까지 약 200명이 열기되어 있다.

서자(書者)는 한수(韓脩)이며, 이 비의 서체가 안노공풍(顔魯公風)의 해서임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전체의 조형은 이 절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와 같으나 대석이 1단의 앙련대(仰蓮臺)를 가졌으며, 개석(蓋石)에 옥개부 공포(屋蓋部 包)와 와구(瓦溝)가 조출(彫出)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정제(整齊)되어 있다. 대장각기비보다는 불과 4년 앞서는 것이다.

 

혜근 [惠(慧)勤, 1320 ~ 1376]

고려 말의 고승(高僧).

호 : 나옹(懶翁) 시호 선각(禪覺)

별칭 : 초명 원혜(元慧)

출생지 : 경북 영해(寧海)

속성 아(牙). 초명 원혜(元慧). 호 나옹(懶翁). 시호 선각(禪覺). 영해(寧海) 출생.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平山處林)과  천암 원장(千巖元長)에게서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선(禪)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가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때, 나옹은 중국에서 선의 기개를 떨치고 1358년(공민왕 7) 귀국, 1361년 왕의 요청으로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사찰을 지켰는데, 그 뒤는 광명사(廣明寺)와 회암사(檜巖寺)에 머물렀다.

1371년 왕사(王師)가 되어 회암사에 있으면서, 1376년(우왕 2)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대혼란이 일자, 조정에서 밀양(密陽) 영원사(瑩源寺)로이주하도록 하였는데, 가는 도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죽었다.

 

신륵사 [神勒寺]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北內面)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말사

창건시기 :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

창건자 : 원효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창송리 228, 0337-85-6916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당 ·육각정 등이 있다.

 

 6) 名(명). 字(자). 號(호) 그리고 척약재와 백범.(2002. 2. 23. 윤만(문) 제공)

 

옛날부터 우리 선현들은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敬名思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 자. 호가 무엇이고 이참에 문온공(구용)의 호 척약재와 김구선생님의 호 백범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名(명=이름)은 아기가 출생한 후 3개월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아기의 오른손을 잡고 吉祥(길상=좋고도 복된)한 글자를 골라 명명한 것이 명으로 "군자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명을 바꾸지 않는다."하여 부모 사후의 개명은 자식으로서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성인의 이름은 임금. 스승. 아버지만이 부를 수 있었을 뿐이고, 그 외의 사람이 명을 부르면 그를 모독하거나 멸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을 아명이라 하고 살아계신 분의 이름을 銜字(함자)라 하며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諱字(휘자)라 합니다.

字(자)는《禮記(예기)》에 "남자는 20세에 冠禮(관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다." "여자가 혼인을 약속하면  禮(계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다." 라고 하고 그 註(주)에, "관

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 이다." "출가를 약속하였으면 15세에 계례를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20세에 계례를 행하는데 이 또한 성년이 되는 의식이므로 자를 짓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름을 소중이 여기는 관념 때문에 성인이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어서 출생한 후 부터 갖게된 명 외에 누구나 널리 부를 수 있는 별도의 칭호가 필요하게 되어 자를 지었다는 것이지요.

남자의 관례는 머리를 가다듬어 관을 쓰는 의식이고, 여자의 계례는 머리를 꾸며서 비녀를 꽂는 의식입니다. 예전에는 혼례보다 관례를 더 중요시 했다고 합니다.

號(호)는 명이나 자외에 누구나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칭호로 영어의 PENNAME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아호와 당호로 나누는데 아호란 예술가들이 시문이나 서화 등에 쓰는 본명외의 우아한 호라는 뜻으로, 당호는 堂宇(당우)의 명칭이지만 이것이 그 당우의 주인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였으나 후세에 모두 같은 의미로 쓰여졌으므로 호로 일괄하여 사용하여도 무방합니다. 명이나 자는 부모나 존장자나 스승이 지어준 것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지어진 것이나, 호는 자신이 지을 수도 있고, 타인이 지어줄 수도 있지요. 호는 대체로 은사들이 자신의 성명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호를 짓고 이름을 감춘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諡號(시호) : 시호도 넓은 의미에서는 호의 일종이나 일반적인 호와는 달리 사후에 생시의 행적을 참작하여 국가에서 죽은이에게 내려준 칭호입니다. 즉, 시호란 왕을 비롯하여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고관이나 유현에게 국왕이 사후에 부쳐준 칭호로서 사후에는 생시에 불리워지던 명을 휘하게 되는 까닭에 시호를 지어 명 대신 부르게 되며,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을 이름을 바꾸어주는 은전, 즉 易名之典(역명지전)이라하여 당사자나 자손이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살아있을 때나 사망한 후에나 타인이 어떤 사람을 지칭할 때에 자나 호나 시호 등을 붙여서 부르지 않고 이름만을 부르는 경우 그를 멸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척若齋說(척약재설)

성균관의 직강인 金伯誾(김백은) 군이 《주역》乾卦(건괘) 九三(구삼) 爻辭(효사)의 '척약' 두글자를 따서 그 서재의 이름을 붙이고 나에게 설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어찌 족히 《주역》의 깊은 뜻을 드러내어 군의 서재의 이름을 지은 취지에 맞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서재에 대하여는 놀고 휴식하는 의미를 붙이기도 하고, 좋아하며 즐기는 의미를 붙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물건의 명칭을 붙이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나는 일찍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남의 걱정을 보고 자기의 걱정으로 생각하며, 남이 두려워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경계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며, 이러한 생각이 조금만 나타나도 나의 기운은 언짢아져서 움츠러든다. 내가 이를 모두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기운을 자연스럽게 가지면, 그런 뒤에 나의 기운은 쾌할하여지고 조금도 움츠러진 곳이 없게 된다.

맹자가 기를 길러서 저해함이 없게한 방법은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척약재의 뜻을 보면 그 마음이 벌써 동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 치우쳐 있으면 언제나 그 정상적인 것을 지니지 못하고, 두려워하거나 공경하거나 거만하거나 태만함에 따라서 언제나 치우쳐지는 것인데, 군의 마음에는 이러한 상태가 없는 줄로 나는 안다. 내가 어찌 마음을 움직이겠는가.

군이 이미 국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고, 여러 학생은 반드시 도학이 있는 학자에게 나아가서 학문을 닦는다. 도학이 있기를 희망하는 자는 학문을 반드시 닦으며 덕을 반드시 향상시킬 것이다. 닦아서 발전되지 못하면 반드시 걱정하며 두려워할 것이요,

향상시키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걱정하며 두려워할 것이다. 종일토록 노력하여 저녁에 까지 이르며, 저녁에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위태롭게 여기는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마음이 두려움을 가지어 정상적인 상태를 갖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과거에 동요되던 나의 마음이 도리어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그 걱정하며 두려워 한다는 뜻의 ' (척)'자는 마음 心(심)자와 바꿀 易(역)자를 합하여 만든 글자다. 대저 마음은 언제나 보통 때에 아무렇게나 가지게 되는데, 보통 때에 마음을 반드시 바꾸어〔易〕가지는 것은, 경계하고 삼가며 공경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경계하고 삼가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학문을 닦지 못하여 덕이 향상되지 못함을 두려워할 것이니, 그리하면 닦기를 반드시 널리하며 향상하기를 반드시 높이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높으면 크게 될 수 있으며, 넓으면 장구하게 될 것이다. 처음은 걱정하며 두려워하다가 발전함을 알아서 장구하며 크게 되는 경지에까지 발전하여 끝내 아무런 허물이 없게 되며, 끝을 알아서 태연히 여기에 처하게 되면, 이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것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乾卦(건괘)의 九三(구삼) 爻(효)는 이중으로 강한 것이어서 훌륭한 덕이 벌써 나타나고 사람들이 그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위치인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진퇴와 동작과 휴식에 있어서 반드시 그 도에 맞게하며, 날마다 주의하며 두려워하여 남을 위하여 충성스럽지 않은 일이 없었는가, 사람과 사귀면서 믿음성 없게 한 일이 없었는가를 열심히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충성과 믿음이란 덕을 향상시키는 것이며, 충성과 믿음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한가지 생각이라도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함이 학문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듯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게 된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척若齋(척약재)에 대하여 이렇게 說(설)을 지었으니 그대는 노력하기를 바란다.

 

白文寶記

(원문과 번역문이 문온공파 임신세보 pp184∼187/1992와 '선현들의 자와 호'/신용호.

강헌규/전통문화연구회/1997.에 있는 바, 문중외 자료를 소개하기 위하여 후자에서 번역문을 소개함)

이것은 려말 성리학자 김구용이《주역》乾卦(건괘) 九三(구삼) 爻辭(효사)의 "終日乾乾 夕척若 려無咎(종일건건 석척약 려무구=종일토록 진덕수업에 노력하고 저녁때에 이르러서도 마진함이 없었는가 두려워 한다면 곤란한 일이 닥쳐도 허물이 없게 된다.)"에서 따서 호를 척약재라 짓고, 백문보에게 청하여 받은 호의 해설입니다. 부동심을 가지고 進退動息(진퇴동식)에 항시 두려운 듯 조심하여 孝悌忠信(효제충신)에 노력한다면 훌륭한 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 것이지요.

 

白凡(백범) 金九(김구)선생님의 號(호) 백범은 선생께서 스스로 지으신 호로서 그 뜻과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다시한번 새로운 결심을 가질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름을 '龜(구)'자를 '九'자로 고치고, 호를 '白凡(백범)'이라 하니, 이것은 白丁(백정)의 '白'과 凡人(범인)의 '凡'자를 딴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그 호에 대하여 "가장 미천한 사람까지 모두 나와 함께 애국심을 가져야겠다는 것이 나의 소원임을 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거니와, 그 이름, 그 호는 이 때(1913년) 감옥에서 지은 것이었다.

(원전 :《한국인의 인간상》6, 근대선현자편, p.413, 출전 : '선현들의 자와 호'/신용호.

강헌규/전통문화연구회/1997)

 

백범일지에서는

1913년 안명근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언도 받았는데 감형에 감형이 되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이제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을 다녀 나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을 金龜(김구)를 고쳐 金九(김구)라 하고 당호 蓮下(연하)를 버리고 白凡(백범)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 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끝"

 

 7)고려말 충의열전  義節(의절)편 (2002. 2. 28. 은회(익) 제공)

 

金七陽 (칠양), 호는 康隱(강은), 공은 안동인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 후(厚)의 아들이요 밀직사사  승용(密直司使  承用)의 손자이다.

 

공(公)은 젊어서부터 재주와 덕망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강구하여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와  재종인  척약재  김구용 (척若齋  金九容),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종유(從遊)하여 그 의리 명분을 같이 하였다.

 

려말에 늦게나마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한 후에는 절의를 지켜 강진(康津)  금릉산(金陵山)  선묘하(先墓下)에  은거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조참의 (吏曹參議)를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公)이 모든 아들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 "나는 옛 고려국의 세신(世臣)으로

 

비록 나라와 함께 망하지는 못하였더라도 너희들이 학문을 닦아 충성으로 새나라의 성왕(聖王)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아들  진(瞋)과 돈(墩) 형제는 과연  친명을 쫓아  조세(早歲)에 등과(登科)하여 모두 제학(提學)이 되었다.

 

 8)포은이 언짢은 기색을 했다?(東人詩話) (2002. 3. 8. 영환(문) 제공)

 

척약재 김구용 할아버님은 도은 이숭인과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절친한 사이이셨으며, 함께 고려말 성균관을 중영하고 같이 학문을 가르치셨습니다. 도은 이숭인이 지은 [중구감회]라는 시에 대하여 후일 사가정 서거정선생께서 논평을 하신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東人詩話(동인시화)   徐居正,  卷下

 

李陶隱重九感懷詩 巨年重九龍山전  座客望若登神仙

達可放哥徹寥廓 敬之下筆橫雲煙 達可則圃隱

敬之則척若齋也 陶隱於圃隱 獨讚其哥 而不及詩

雖以圃隱之大道 顔有不悅處 古之大人君子 以詩自重如此

 

陶隱 李崇仁의 詩 中에 "重九感懷"가 있는데

 

작년 구월구일 龍山 산마루에서(秋興亭에서) 巨年重九龍山 

앉아계신분 바라보니 神仙이 오르는 듯     座客望若登神仙

達可의 노래는 寂寞한 하늘을 꿰뚫었고     達可放歌徹寥廓  

敬之의 글솜씨는 구름과 연기속에 노니네   敬之下筆橫雲烟

 

 달가는 포은 정몽주요, 경지는 척약재 김구용이다.

 

도은이 포은에 대하여 유독 그의 노래를 칭찬하고 그의 시에 대하여서는 칭찬하지 않아서 포은같이 큰 도량을 가진 사람도 언짢아 하였으니,  옛 대인군자가 시를 칭찬함에 자중함이 이와 같았다.

 

東人詩話 上下,奎 (奎1552), 徐居正(朝鮮)撰.

          1冊 木板本 33×22cm.

          四周單邊 半郭:22.4×17.9cm.

          有界 12行 20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四佳亭 徐居正(1420∼1488)이 신라 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의  詩話를  편집한 책이다.

원래 1477년(成宗 8)에 刊印하있는데 1636년(仁祖 14)에 初刊本이  兵火로  거의 없어지고 원본의 板本에 잘못된 것이 많이 있으므로 廣陵 李必榮이  1639년에  改刊하였다.

 이 책은 1664년(顯宗 5)에 改刊本을 토대로 慶州에서 重刊한  것이다.  

 

徐居正의 字는 剛中이요 初字는 子元이며 號는 四佳亭·亭亭亭이고 本貫은 達城이다.  權近의 外孫으로 1444년(世宗 26)에 式年文科에 及第하여 司宰監直長,  工曹,  禮曹의  參議를 지내고 吏曹參議로 1460년(世祖 6) 謝恩使로 明나라에 가서 그 곳 學者들과 文章과  詩를 論하여 海東의 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大司憲을 지내고 1464년  조선  시대 최초로 兩館大提學이 되었으며 1466년 拔英試에 또 壯元했다. 이후  六曹의  判書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佐理功臣 3등으로 達城君에  봉해졌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 수차 銓衡을 담당했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세조 때 ≪經國大典≫, ≪東國通鑑≫, 성종 때 ≪東國與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고 왕명으로 ≪鄕藥集成方≫을 국역했고, 性理學을 비롯하여 天文, 地理, 醫藥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東文選≫에 조선초까지의 詩文을 選集하여 漢文學을  集成했다.

謚號는 文忠, 大邱의 龜岩書院에 祭享케 했다.

  卷頭에 1474년에  晋山  姜希孟이  쓴 序文과 1477년에 崔淑精이 쓴 後序와 1475년에 쓴 金守溫의 序文이 있고 卷上에는   宋太祖와 李太祖의 微時의 詩句를 들어 제왕의 문장을 말하고,  이어서  文昌侯  崔致遠, 文烈公 金富軾. 諫議 鄭知常 등의 詩話로부터 僧 幼庵, 動安居士 李承休, 益齋  李齊賢등의 詩話에 唐宋代의 詩까지 곁들여 詩에 관한 逸話를 기록하였다. 卷下에는 高麗  光·顯宗 이후 四六文은 盛했으나 益齋, 稼亭, 牧隱, 圃隱 등에 이르러 性理學이  倡明되었다는 이야기로 始作되어 鄭司諫 李相國 등의 詩話, 朴贊成과 妓女와의 詩話 등  詩話 多數가 실려 있다. 끝에는 李必榮의 跋이 있다.

  四佳亭 徐居正의 豊富한  知識으로  우리나라의 詩話를 모아 엮은것으로 우리나라 野史를 살펴 보는 데 좋은 참고가 되며  漢文學史 연구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9)상주에 문온공(구용)의 유허가 있다는데. (2002. 6. 9. 윤만(문) 제공)

 

  <상주시군지) pp 1667 제15편 인물. 제2절 고려.

 

○ 金九容(김구용) 初名(초명)은 齋閔(재민 : 옮긴이 註 - 齋閔은 齊閔(제민)의 오기임), 方慶(방경)의 後孫(후손)이다. 李仁任(이인임)에게 放逐(방축)되어 驪興(여흥)에 살다가 江湖(강호)로 두루 다녔으며 벼슬이 判典校(판전교)에 올랐다. 우왕 10년(1384)에 行禮使(행례사)로 明(명)에 가다가 遼東(요동)에서 總兵(총병) 潘敬(반경)에게 잡혀 京師(경사)로 押送(압송)중 明帝(太祖)의 命(명)으로 代理獄(대리옥 : 옮긴이 註 - 代理獄은 代理衛(대리위)의 오기임)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노주에 이르러 病(병) 卒(졸)하였다. 若齋集(척약재집)이 있다.  若齋(척약재)는 永嘉(영가)가 本貫(본관)인데 본 州(주)의 沙谷(사곡)과 佳里坊(가리방)에 그의 遺墟(유허)가 있다고 傳(전)해 오니 永嘉(영가)에서 이곳으로 移居(이거)한 것인지 아니면 尙州(상주)가 예전에 安東府(안동부)로 있을 때 永嘉(영가)가 邑號(읍호)였는지 또는 그가 安東(안동)에서 係出(계출)하였으므로 本貫(본관)으로 따라 부른 것인지 未詳(미상)하다.

 

 10) <예천군지> 기록 내용 (2002. 6. 26. 윤만(문) 제공)

 

예천군지/예천군지편찬위원회/1988.

 

▣ 소천서원(蘇川書院) pp770~771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 금천변(錦川邊)에 있으며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을 제향(祭享) 했다. 숙종(肅宗)은 그의 공을 기리고 향리(鄕里)의 성화천(省火川)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왕(王) 22년(1696)에 소천(蘇川)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5년 뒤인 숙종 27년(1701) 2월 19일에 소천서원(蘇川書院)을 세웠다.

--당시 숭덕사(崇德祠)와 전교당(典敎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해 왔으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18년 향의(鄕議)에 따라 서원의 서편에서 공(公)이 강의하던 자리에 청원정(淸遠亭)을 재건했고 1966년 서원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전교당(典敎堂)은 정면 4칸, 측면 15칸(1.5칸의 오기로 추정됨) 팔작지붕이며 숭덕사(崇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5칸 맞배지붕으로 진사 김해(金楷)가 상량문(上樑文)을 찬(撰)하였다.

 

▣ 청원정(淸遠亭) pp788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 소천(蘇川)마을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5칸 목조와가(木造瓦家) 팔작지붕으로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의 유덕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1918년에 재건된 정자이다. 초창연대(初創年代)는 조선 초기로 알려지고 있는데 퇴계(退溪)의 시와 의성(義城) 김소락(金紹洛)의 중수기(重修記)가 있고 뒷 편에 있는 바위에는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청원정(淸遠亭)」삼자(三字)를 전서(篆書)로 음각(陰刻)해 놓았다.

 

☞ 청원정 중수기[역문] (출전 : 문온공파 임신세보 권1)

--산이 있어 천장(千丈)을 우뚝 솟아 소백(小白)에서 옮아 오니 무이(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삼강(三江)에서 회합(會合)하니 낙동강(洛東江) 상류(上流)를 성화(省火)라하고 정자(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청원(淸遠)이라(예기의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온 준말로『맑지 않음이 세속인지라』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하는 곳이라) 실로 축산군(竺山君)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선생이 만년(晩年)에 휴노(休老)하실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청원정(淸遠亭)이라 3자(三字)를 세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평필(平筆)이니라. (이하 생략)(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역내) ※ 소재지가 군지는 무이리, 파보는 가야리로 상이한 이유 확인 요.

 

☞ 주(註) (출전 : 문온공파 임신세보 권1)

--수안김씨의 관(貫)은 충렬공 휘 방경(方慶)의 제1자인 휘 선(愃)을 시조로 하고 있으니, 안동김씨의 종문(宗門)이라 볼 수 있다. 공민왕 17년 서기1368년 10월에 신돈(辛旽)의 폭정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척약재(惕若齋)의 아우인 제안(齊顔)과 김정(金精, 양간공 휘 승택(承澤)의 장형인 도첨의사사 휘 자(資)의 독자인 휘 위(爲, 일명 위(渭))의 손인 휘 득남(得男)의 제3자 밀직부사 정(精))은 조사공(趙思恭), 유사의(愈思義) 등과 더불어 신돈(辛旽)을 없애기로 모의하였었는데 이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두 역살(逆殺)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김정계(金精系)는 수안김씨로 제안계(齊顔系)는 사천김씨로 후손들이 분관(分貫)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김정(金精)의 어머니되시는 휘 득남(得男)의 배위(拜位)는 축산군부인(竺山君夫人) 용궁전씨(龍宮全氏)로서 그의 부(父)가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이다.(수안김씨 족보) 이로 보아 국파(菊坡)의 본댁은 개경이었으니 척약재(惕若齋)와는 교분이 두터웠던 사돈지간(査頓之間)의 인척관계(姻戚關係)에 있었다. 척약제(惕若齋)께서는 위에 보이는 바 명필(名筆)이었으니 국파(菊坡)선생이 편액제(扁額題) 3자(字)의 부탁함은 극히 자연스러웠던 일이라 추리(推理)할 수 있다.

 

▣ 물계서당(勿溪書堂) pp773

--감천면(甘泉面) 관현동(官峴洞) 홍고개 마을에 있으며 정면 3칸, 부연팔작(附椽八作)집으로 누각식(樓閣式) 건조물(建造物)이다. 이 서당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물한동(勿閑洞 ; 現 水閑洞)에 세우고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위패를 봉안하였는데 1670년에 다시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봉향(奉享)하였으며 1672년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과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揚震)을 추향(追享)하여 4위를 모셨다가 천전(泉田 ; 샘밭)으로 이건(移建)했다.

--그 뒤 창건(創建) 208년만에 훼철(毁撤)되고 1962년에 면내(面內)의 유림(儒林) 등에 의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2002. 6.24)

 

 11)<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내의 기록 (2002. 8. 27. 주회(안) 제공)

 

김구용(金九容)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척08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등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어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떠날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하였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牧隱集, 惺#수04詩話, 警修堂集, 韓國漢文學史(李家源, 民衆書館, 1961). 〈朴天圭〉

 

 12)<둔촌유고> 속의 척약재 관련 시 (2002. 10. 26. 11. 4. 태영(군) 제공)

 

寄若齋 / 기약재

 

當日同年在勝山 / 당일동년재승산

追尋幾度過前灣 / 추심기도과전만

如今江北無相識 / 여금강북무상식

回首京華거可攀 / 회수경화거가반 거:言+巨(어찌거)

 

척약재에게 부치다.

지난날 동년(同年)이 승산(勝山)에 있을 적엔,

몇번이나 그를 찾아 앞 나루를 건넜건만.

지금은 강북에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서울을 돌아다볼 뿐 반연(攀緣)할 길 없구려.

遁村(둔촌) 李集(이집)

 

答李遁村 / 답이둔촌 (이둔촌에게 답하다.)

 

茅屋蕭條倚碧山 / 모옥소조의벽산

秋波渺渺菊花灣 / 추파묘묘국화만

客中感학용無力 / 객중감학용무력 (학질학)(게으를용)

遙憶風流恨未攀 / 요억풍류한미반

 

띳집 하나 쓸쓸히 푸른 산에 기대 있는데,

국화 핀 물굽이엔 추파(秋波)만이 아득 하구나.

객중(客中)에 학질 걸려 기력도 없으면서,

멀리 풍류(風流)를 그리며 어울리지 못함을 한 하노라.

 

秋風吹起梁千山 / 추풍취기량천산

江水澄淸九十灣 / 강수징청구십만

曲渚崇丘渾不俗 / 곡저숭구혼불속

若爲携手共제攀 / 약위휴수공제반 (오를제)

 

가을 바람 불어닥쳐 천산(千山)을 물들이고,

아홉 열 물굽이엔 강물이 맑기만 하구나.

굽이진 물가 높다란 언덕은 하나같이 속되지 않나니,

그대와 함께라면 올라볼 만도 하겠네.

척약재 김구용

 

寄敬之 / 경지에게 부치다.

 

故人家住碧江濱 / 그대의 집은 푸른 강가에 있나니,

門外漁도隱白빈 / 문밖의 백빈 속엔 고깃배 숨겨 있겠지. (거루도)(개구리밥빈)

膾縷순絲應厭어 / 생선회 냉이 무침이랑 먹고도 남으리니, (순채순)(배부를어)

有時分我莫辭頻 / 이따금 내게도 나눠주되 작다고는 말게나.

 

백빈:흰꽃이 피는 부평초(浮萍草)

遁村 李集(둔촌 이집)

 

答李遁村 / 둔촌에게 답하다.

 

結屋應須近水濱 / 집이라면 으레껏 물 가까이에 지어야 하느니,

門前苔徑接靑빈 / 문앞의 이끼낀 길 푸른 마름과 연하게 되지. (개구리밥빈)

蘭舟桂棹同遊慣 / 난주계도(蘭舟桂棹)로 어울려놀기도 하려니와,

순菜로魚共食頻 / 냉이국 농어회 자주자주 먹게도 되지. (순채순)(농어로)

 

난주계도(蘭舟桂棹): 목난(木蘭)으로 만든 배와 계수나무로 만든 상앗대.

척약재 김구용

 

遁村遺稿에서 옮김.

 

 13) <동문선>내의 척약재 시문 (2002. 12. 2. 주회(안) 제공)

 

오언율시 (五言律詩)

--기해년 홍적 (己亥年紅賊) 1권-436

--송 곽구주 검교 (送郭九疇檢校) 1권-436

--송 정당 시승지 임 충주 (送鄭當寺丞之任忠州) 1권-436

칠언율시 (七言律詩)

--둔촌 기시루편 차운록정 (遁村寄詩累篇次韻錄呈) 2권-247

--송 강릉 서렴사 (送江陵徐廉使) 2권-247

칠언절구 (七言絶句)

--무창 (武昌) 2권-507

--야박 양자강 (夜泊揚子江) 2권-507

--야장 (夜莊) 2권-507

 

 14)개성지역 금석문중에서 척약재 관련 자료 (2002. 12. 11. 영환(문) 제공).

 

◇민씨선산비(閔氏先山碑) 한천문(寒泉文) 감로사(甘露寺)

◇민씨선묘기사비(閔氏先墓記事碑) 도암문(陶菴文) / 백남서(白男書)

*척약재 외갓댁(급암 민사평)

 

◇민대광변비(閔大匡卞碑) 전포(錢浦)

민변:척약재 외할아버지(민사평)의 이복동생

민사평,민변의 아버지 민적은 초취부인이 충렬공의 둘째 아드님 김흔의 따님인데

민사평을 낳고 돌아가시고, 재취부인에게서 민변을 낳았음. 민변의 아들이 민제이며

민제의 딸이 원경왕후민씨(태종 이방원의 부인)임

 

◇허야당금표(許埜堂錦表) 다대동(多大洞)

야당 허금은 척약재와 절친한 사이로서 [寄許野堂錦=허야당에게]라는 시가 있음

 

◇이석탄존오갈(李石灘存吾碣) 대덕산낙사원(大德山樂師院)

석탄 이존오는 척약재(문온공, 김구용)과 절친한 사이. 이존오에 대한 4편의 시 있음

이존오의 동생 이존사는 척약재의 매부임

 

 15)영통사 (靈通寺 ) 에서 정몽주와 자면서.. 김구용 (2002. 12. 11. 영환(문) 제공)

 

夏日同達可宿靈通寺 하일동달가숙영통사(여름날 달가(정몽주)와 함께 영통사에서 자며)

 

避暑山中宿 피서산중숙   더위피해 산 속에서 자는데

凄凉興轉新 처량흥전신  시원하니 흥이 절로 나고

松軒臨淨水 송헌임정수  정자는 물가에 닿아있고

笞逕絶纖塵 태경절섬진  이끼 낀 길 속세와 멀어졌네

座石聞幽鳥 좌석문유조  돌위에 앉으니 새소리 처량한데

扶 愧此身 부공괴차신  지팡이 짚은 이몸 부끄럽지만

白雲深遠谷 백운심원곡  흰 구름 깊은 계곡에서

恐有羽衣人 공유우의인  선녀 나올까 두려워진다네

 

공=竹+工+우부방)

 

  16)영통사 (靈通寺 ) 소개 (2002. 12. 11. 영환(문) 제공)

 

영통사지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기슭의 영통동(靈通洞)에 있었던 절. 1027년(현종 18)에 창건하였으며, 1036년(정종 2)에 왕이 자식 넷이 있을 경우에는 한 자식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법을 제정한 뒤 이 절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경률(經律)을 익히는 한편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만들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1065년에 이 절에서 출가하였고, 그의 입적 후인 1125년(인조 3)에는 비를 이 절에 건립하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이 절에서 많은 참배를 갖게 되었다.

 

인종을 비롯하여 영종·신종·충렬왕·충선왕·공민왕 등은 자주 이 절에 행차하여 분향하였을 뿐 아니라 이 절과 인연이 깊은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진영각을 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재(齋)나 기신도량(忌晨道場)이 많이 개설되었다.

 

특히 인종은 이 절을 크게 사모하여 그 어느 왕보다 자주 행향(行香)하였는데, 1146년 정월에는 화엄회(華嚴會)를 열게 하고 친히 지은 불소(佛疏)를 신하들 앞에서 설하였다. 그러나 폐사시기에 관해서는 전혀 전래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로는 대각국사비명(大覺國師碑銘)을 비롯하여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과 동삼층석탑 등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절에는 고려 문종의 화상과 홍자번(洪自藩)의 화상이 있었다고 하며, 서루(西樓)의 경치는 송도에서 제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절을 대상으로 읊은 이규보(李奎報)·★김구용(金九容)·변계량(卞季良)·석월창(釋月窓)·권근(權近)·이원(李原)·성임(成任)·이승소(李承召) 등의 시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韓國寺刹全書(權相老 編,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17)급암집 서 (2003. 1. 19. 윤식(문) 제공)

 

척약재 할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로, 척약재 할아버지께서 백문보 선생께 외조부이신 급암 민사평 공의 문집 서문을 부탁한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2002년 9월 27일 윤만 대부님께서 올리신 <급암(민사평)시집서>와 내용이 약간 다른 데 그 이유는 좀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급암집서(及庵集序)

 

백문보(白文寶)

 

내가 상주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급암(及庵)의 외손자 김군 백은(金君伯誾)이 『급암시고(及庵詩藁)』를 편집하여 가지고 와 나에게 보였다. 내가 그것을 읽어 보고, 나 자신도 모르게 읊조리는 것만으로 부족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급암이 저술한 것이 어찌 이것밖에 되지 않겠는가?” 하니, 김군이 말하기를, “한원(翰苑)에서부터 윤각(綸閣)?상부(相府)의 벼슬에 이르기까지 시를 읊은 것이 여러 천백 수가 되었는데, 난리를 당해 이미 모두 잃어버렸고, 오직 만년에 시를 지으시면 반드시 소자에게 명령해서 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책 고리짝에 수장하여서 피난을 갈 때도 감히 잘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은퇴해서 이것을 편찬해서 오언 칠언시 몇 수를 얻었으니, 그 손때 때문에 온전치 못할까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감히 책에 서문을 쓰기를 구하여서 다른 날에 동인문집을 계속 편찬할 때를 대비하여 이 글 중에 좋은 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러한가. 내가 급암과 친해서 이따금 모여서 술을 먹게 되면 서로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시구(詩句)를 서로 준 것이 또한 많았는데 모두 아득해서 기억을 할 수 없거늘 어지러운 난리통에 불타 버린 나머지라도 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가상하게도 그 외손자가 잘 기술을 해서 이러한 편찬물을 보존하였으니 또한 나의 마음을 감발시킬 만하다. 대개 시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인지라 흥기시킬 만하며 관찰할 만하고 가깝게는 부모를 섬길 수 있고, 멀게는 임금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시가 성정에서 나와야만 비로소 시라고 말할 수 있으니, 저 말로만 시라고 하는 것은 많은 것을 자랑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경쟁하는 것으로 그 말을 꽃처럼 아름답게 꾸미

나, 보고 감동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며, 그 시가 작가의 성정에는 가깝지 않으니 바로 쓸모가 없는 군더더기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 중에는 오로지 문장을 다듬는 것만을 힘써서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하니 비록 고심하여 좋은 장구를 찾으나 가슴이 유연해질 수 없다. 그리하여 만에 하나쯤의 시구(詩句)를 찾아서 곱고 매끄러운 것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뜻이 이러한 데 제한을 받은 자는 겨우 수십 편만 읽으면 마음이 이미 권태로워져서 보고 싶지가 않게 된다. 내가 급암의 시에 대해 읽을 적에는 나도 모르게 읊조리는 것만으로 부족하게 여겨지니 이른바 선심(善心)을 흥기시킬 수 있으며 세상의 문화를 관람할 수 있다는 것에 모두 그 뜻을 얻은 것이다. 애석하다. 전 문장이 세상에 전할 수 없게 됨이”라고 하였다. 우선 내가 본 바로써 유서자(類書者)에게 고하고 이 서문을 짓는다.

 

及庵集序(급암집서)

 

白文寶(백문보)

 

余居尙(여거상)이러니 一日(일일)에 及庵之外孫(급암지외손) 김군백은(金君伯誾)이 編及庵詩藁(편급암시고)하야 휴이시여(携以示余)어늘 余(여)ㅣ 독지(讀之)하고 不覺吟詠之不足曰(불각음영지부족왈) 所著何止是歟(소저하지시여)아 金君曰(김군왈) 自翰苑(자한원)으로 至綸閣相府(지윤각상부)히 歌詩之多(가시지다)ㅣ 累千百首(누천백수)러니 (책받침+台)喪亂(태상난)하야 旣皆失之(기개실지)하고 唯晩年有詩( 만년유시)면 必命小子書(필명소자서)하시니 卽藏諸(대竹머리+司)(대竹머리+상자방몸+夾)(즉장제사협)하야 以及播越(이급파월)하야도 不敢忘也(불감망야)라 今退而編之(금퇴이편지)하야 得五七言若干首(득오칠언약간수)호니 惜其手澤之不全也(석기수택지부전야)라 敢求敍篇端(감구서편단)하노니 他日(타일)에 備續東人文集(비속동인문집)하야 (두인변+卑)不沒其善焉(비불몰기선언)이 가야(可也)라 하더라.

余曰(여왈) 其然(기연)가 余與及庵善(여여급암선)하야 往往集盃杓(왕왕집배표)이면 未嘗不附(미상불부)라 而詩句之贈(이시구지증)도 亦不爲不多(역불위불다)로대 皆茫然不可記矣(개망연불가기의)어든 其可求之亂兵(火+畏)燼之餘乎(기가구지난병외신지여호)아 연(然)이나 尙嘉(상가)는 其孫(기손)이 能繼述(능계술)하야 (이존차편)하니 亦足以感發吾心(역족이감발오심)이로다 蓋詩(개시)는 언지(言誌)라 가이흥(可以興)이며 가이관(可以觀)이오 邇之事父(이지사부)하고 遠之事君(원지사군)이라 則皆本乎性情(즉개본호성정)이라야 方可謂之詩(방가위지시)니 彼以言辭而已者(피이언사이이자)는 以誇多(이과다)로 鬪靡(투미)하야 英華其詞(영화기사)나 不至於觀感(부지어관감)하며 不近於性情(불근어성정)하니 則乃無用之贅言也(즉내무용지췌언야)니라 고(故)로 世之人(세지인)에 有專務章句(유전무장구)하야 悅人耳目(열인이목)하니 誰苦心覓好(수고심멱호)나 不能胸次悠然(불능흉차유연)이라 而得萬一索句姸滑(이득만일삭구연활)이라도 其志(기지)ㅣ 局于此者(국우차자)는 (겨우 재)讀過數十篇(재독과수십편)이면 心已倦於再覽矣(심이권어재람의)라 余於及庵之詩(여어급암지시)에 讀之不覺吟詠之不足(독지불각음영지부족)이로니 所謂可而興(소위가이흥)이며 可以觀者(가이관자)ㅣ 皆得其義矣(개득기의의)로다 석호(惜乎)라 專章之不得傳於世也(전장지불득전어세야)여 姑而所見(고이소견)으로 告夫類書者(고부류서자)하고 爲之序(위지서)하노라

 

※원문 중의 'ㅣ'는 한글 자모 'ㅣ(이)'임. 고어문에 나타남.

   <보기> 余(여)ㅣ

 

※출전: 조남권.황재국 공역, 『한국고전비평론 자료집Ⅰ』, 태학사, 86~87쪽, 148쪽.

 

 18)[목은집에 전하는 문온공 김구용관련 자료명] (2003. 1. 19. 윤만(문) 제공)

 

제가 올린 <급암시집서>는 (한국사상대전집 제19권<목은집>/이색 저. 이석구 역/양우당/1988)에 있는 자료입니다. 참고로 목은집에 있는 문온공(김구용)관련 자료명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 (pp153-154) 육우당기(六友堂記) 번역문과 원문.<김구용의 여주 거소>

2. (pp243-244) 송강릉도안렴김선생시서(送江陵道按廉金先生詩序) 번역문과 원문.<김구용관련>

3. (pp274-275) 급암시집서(及菴詩集序) 번역문과 원문<김구용 외조부 민사평 시집>

4. (pp284-286) 선수집서(選粹集序) ) 번역문과 원문<김구용 : 고금의 시문을 몇 의 책으로 모음>

5. (pp286-288) 주관육익서(周官六翼序) ) 번역문과 원문<김구용 : 전장(典章)을 구해 모아서 한권의 책으로 만듬)

6. (pp375-376) 척약재명 위김경지작(척若齋銘 爲金敬之作) 번역문과 원문.<김구용관련>

7. (pp383-384) 제척약재학음후(題척若齋學吟後) 번역문과 원문.<김구용 시집>

8. (pp387-388) 발급암시집(跋及菴詩集) 번역문과 원문.<김구용 외조부 민사평 시집> "끝"

 

 19) 척약재 선조님의 명과 자에 대해 (2003. 1. 21. 윤만(문) 제공)

 

자료를 찾아보다 발견한 사실(1)<이야기의 개설>

--국회님의 척약재(惕若齋) 할아버지 명(名)과 자(字)의 글을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 보다가 엄청난 사실 하나를 발견하여 안사연 식구들과 종인께 올립니다.

--먼저 국회님은 척약재 할아버지의 초명(初名)은 제민(齊閔), 자(字)를 백은(伯誾) 그리고 개명하여 명(名)을 구용(九容), 자(字)를 경지(敬之)라 하였다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일리있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온공파 임신세보(1992년)에 구용(九容)을 확인하니 초명(初名) 백은(伯誾), 자 경지(敬之) 호(號) 척약재(惕若齋)·육우당(六友堂)·여강어우(驪江漁友) 초명(初名) 제민(齊閔)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1월19일 본 게시판에 올린 목은집 중 척약재 할아버지께서 쓰신 책자로 알려진 선수집서 (選粹集序)·주관육익서(周官六翼序)가 생각나 다시한번 확인해 보니 경숙(敬叔)이란 명(名)이 여러군데 있을 뿐 구용(九容)·백은(伯誾)·경지(敬之)·척약재(惕若齋)·육우당(六友堂)·여강어우(驪江漁友)·제민(齊閔) 등의 명(名) 또는 자(字)는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울산대 성범중(成範重) 교수가 지은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惕若齋 金九容의 文學世界)>를 살펴보니 p35에“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초명(初名)은 제민(齊閔), 자가 경지(敬之)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 그건 그렇고 그 다음 p38를 보니 오늘의 핵심이야기인 선수집(選粹集)·주관육익(周官六翼)에 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선수집(選粹集)과 주관육익(周官六翼)은 작년초 영환 대부님께서 내가 올해 찾고자 하는 문집 목록 중 ‘나 죽을 때까지 계속’이라 하실만큼 강조하신 책으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한편 김구용(金九容)은 『선수집(選粹集)』과 『주관육익(周官六翼)』의 찬자(撰者)라고 알려져 왔었지만⑬, 허흥식(許興植)에 의해 이 두 책의 찬자(撰者)가 김구용(金九容)과 동 시대인이었던 김지(金祉)[초명(初名) 지(祗)]라고 밝혀 졌기 때문에⑭ 여기에서는 이 두 책에 대해서는 논급하지 않기로 하겠다.“라는 기록이었습니다.

 

주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해동문헌록(海東文獻錄)』 등에서 이 두 책자의 저자 또는 편자를 김구용이라 하였고, 그 후 이홍직(李弘稙)의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事典, 신구문화사)』 등에서도 그것을 답습하였다. 그러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民族文化大百科事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이 사실을 바로 잡았다.

주⑭ : 허흥식(許興植),『김지(金祉)의 선수집(選粹集)·주관육익(周官六翼)과 그 가치(價値)』(「규장각」4, 서울대학교도서관, 1981) 참조.

--따라서 먼저 선수집서(選粹集序)와 주관육익서(周官六翼序)를 소개하고 이어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民族文化大百科事典,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허흥식(許興植)의『김지(金祉)의 선수집(選粹集)·주관육익(周官六翼)과 그 가치(價値)』(「규장각」4, 서울대학교도서관, 1981)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20)洪萬宗의 小華詩評과 척약재 (2003. 3. 19. 영환(문) 제공)

 

(원문 생략)

 

번역

고려조의 작자들은 제각기 일가를 이루어서 일일이 다 들 수는 없다. 石澗 趙云吃이 고려조 시인 12명을 평했다.

侍中 김부식은 典雅하고, 學士 정지상은 婉麗하고, 老峰 김극기는 巧妙하고, 雙明齋 이인로는 淸麗하고, 梅湖 진화는 濃艶하고, 洪厓 홍간은 淸邵하고, 益齋 이제현은 精힐(結+頁)하고 척약재 金九容은 淸贍하고, 포은 정몽주는 豪放하고, 도은 이숭인은 온(酉+溫-삼수변=술빚을온)藉(깔개자)하여 제각기 이름을  드날렸다. 그러나 백운 이규보가 雄贍하고 목은 이색이 雅健하여 특히 걸출한 작가이다.

...중략..

 

고려조의 詩 五字聯 가운데 아름다운 것은 다음과 같다.

...........중략......

 

어부가 떠난 뒤에는 외로운 배만 남아 있고 (漁翁去後孤舟在)

산에 달 오르자 조그만 집은 텅 비었네.. (山月來時小閣虛)

 

이 시는 김구용의 [幽居]이다. 고려조 시의 격조를 위에 시를 한 번 맛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小華詩評 卷 上에서 옮김

 

 21)척약재잠 (2003. 3. 24. 영환(문) 제공)

 

惕若齋箴      李達衷

 

毋不敬 毋自欺 馭朽索 攀古枝 進知退 安思危 厲無咎 念在玆

무불경 무자기 어후삭 반고지 진지퇴 안사위 려무구 념재자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어야하며

스스로 속임이 없어야한다.

썩은 새끼로 말을 다루듯(조심)하라 *1

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린듯(조심)하고*2

나아갈 때 물러설 줄을 알아야 하고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불편한 일이 있어도 재앙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생각이 (늘) 이에 있으라

 

*1(썩을 새끼를 갖고 여섯 마리 말을 다루듯 위태롭고 조심된다. -書經-)

*2(東晉의 명사들이 모여서 위태로움에 대해서 시를 짓는데, 그 중 한 사람이“백살된 노인이 높은 나무의 마른 가지에 매달려 있다”고 했다)

 

이달충(李達衷)

?~1385(우왕 11). 고려말의 유학자■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지중(止中), 호는 제정(霽亭). 첨의참리(僉議參理) 천(#천45)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서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호부상서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호부상서로 있던 1360년 팔관회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으나, 훌륭한 학자였으므로 1366년에 밀직제학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신돈이 전횡하던 때에 그에게 주색을 일삼는다고 공석에서 직언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신돈이 주살(誅殺)된 뒤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1385년(우왕1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는 《제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김구용과 사돈(아들 김명리의 장인)이며,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돈독한 사이였음

 

 22)惕若齋銘 (2003. 3. 25. 영환(문) 제공)

 

三峰  鄭道傳

 

此心之微, 出入無鄕, 惟敬斯存, 孰知其方, 操之大蹙,

차심지미, 출입무향, 유경사존, 숙지기방, 조지대축,

개睡昏昏, 一念或放, 惟絲之棼, 必有事焉, 終日乾乾.

개수혼혼, 일념혹방, 유사지분, 필유사언, 종일건건.

[개=앉아서졸 개=目+去+皿]

 

이 마음이 隱微(은미)함은 들고남에 고향이 없고, 오직 공경만이 이를 간직하는 것이니, 뉘라서 그 방법을 알리요, 다루는일 크게 잘못해 정신잃고 졸고 앉아 있다해도, 한번생각 혹시라도 방종하면 실타래처럼 엉켜버리니 반드시 일에 있어서 종일 부지런하고 부지런할지어다.

 

 23) 惕若齋銘 (2003. 3. 26. 영환(문) 제공)

 

惕若齋銘-爲金敬之作       李穡

 

上帝之臨, 嚴師之劫, 所存(*1)惟明, 虎尾之蹈, 春氷之涉,

상제지임 엄사지겁,  소존유명,    호미지도, 춘빙지보

所察惟精, 匪明斯昏, 匪精斯雜, 驕吝之萌, 侈然自放,

소찰유정, 비명사혼, 비정사잡, 교린지맹, 치연자방,

殆哉岌岌, 乃罔之生, 惟敬之甫, 念玆以惕, 爲居室名,

태재급급, 내망지생, 유경지보, 념자이척, 위거실명,

周爻孔彖, 動持息夾, 盤水之盈, 凡學(*2)之患, 中而或跲,

주효공단, 동지식협, 반수지영, 범학지환,    중이혹겁,

當致厥成, 友以輔仁, 忠告是及, 敢鞠斯銘.

당치궐성, 우이보인, 충고시급, 감국사명.

 

*1;척약재집에는 所存, 목은집에는 所在로 되어 있음

*2;척약재집에는 凡學, 목은집에는 況學으로 되어 있음

 

척약재명-김경지(김구용)를 위해 지음     목은 이색

 

상제(上帝)가 강림(降臨)하신 듯, 엄한 스승을 겁내듯 하여 어데서나 밝으라.  범의 꼬리를 밟듯, 봄에 어름 위를 건느 듯, 살피기를 정(精)하라. 밝음이 아니면 어둡고, 정(精)함이 아니면 부잡되어 교만하고 인색한 것이 생긴다.  스스로 방자하면 아슬아슬 위태롭게되고 속이면서 살게 된다.  오직 공경[敬]이 제일이니 이것을 생각하여 두려워[惕]하는 뜻으로  거처하는 집 이름을 만들었다.  주공(周公)의 효사(爻辭)요, 공자(公子)의 단사(彖辭)이다.  움직일 때나 쉴 때나, 항상 물이 가득한 쟁반을 받드는 것처럼 하여, 맞거나 혹은 어지러지는 것이지만,  마땅히 성취하도록 하라.  벗이란 인(仁)을 도우는 것이니 충고함에 미치므로  감히 이 명을 짓노라.

 

惕若齋銘       鄭夢周

 

惟天之行, 日九萬程, 須臾有間,

유천지행, 일구만정, 수유유간,

物便不生, 逝者如斯, 袞袞無已,

물편부생, 서자여사, 곤곤무이,

一念作病, 血脈中否, 君子畏之,

일념작병, 혈맥중부, 군자외지,

夕惕乾乾, 積力之極, 對越在天.

석척건건, 적력지극, 대월재천.

 

척약재명       포은 정몽주

 

하늘에 운항하는 것이 하루 구만리라.

잠깐이라도 간단(間斷)이 있다면, 물(物)은 나지 못한다.  

운행하는 것은 이와 같아서 쉬지 못한다.  

잠깐동안이라도 병이 생기면 혈맥이 중단되는 것이다.  

군자가 그를 무서워하여

[낮에는 부지런하고] 밤에는 두렵게 반성하여

공부를 지극히 쌓으면 하늘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24)<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여주 지도 (2003. 4. 10. 윤식 제공)

 

안강 씨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옛 여주현, 천녕현 지도입니다.

 

▣ 김윤식 - 윤만 대부님 올리신 글에 나타난 것처럼 여주현 옆에 있는 마암(馬巖)에 있던 사우당은 임원준이 소요하던 곳이고, 척약재 할아버지께서 지내셨던 사우당 곧, <김선생 경지(敬之)가 여강(驪江)에 계셔 그 당(堂)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설(雪)·월(月)·풍(風)·화(花)를 위한 것이었는데, 뒤에 강(江)·산(山)을 더하여 육우(六友)라 하였다> 한 곳은 죽산에서 발원한 물이 음죽을 거쳐 여주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까만 작은 점으로 표시된 '천녕(川寧)' 인근으로 추정됩니다.

▣ 김윤만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여강에 귀양왔다."와 여주문화원 발행 금사면지 지명유래에 금사면은 "본래 천령현의 지역으로 예종 원년(1469)에 여주목에 편입되었다."로 보아 본 지도 천령을 지나 합수머리 지점인 금사면 이포리 여주강변 어느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 김윤식 - 예, 저도 합수 지점의 여주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25)[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구용(金九容) 기록 내용 (2003. 4. 10. 윤만(문) 제공)

 

▣ 제1권 p523<개성부 하 제영(題詠)>

--소쇄산천활화개(瀟灑山川活畫開)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연기가 비끼고 산 아지랑이 부드러워 누대(樓臺)를 숨겼는데, 소쇄한 산천은 살아 있는 그림같이 펼쳐졌네. 아침해가 구름 위로 올라오니 빛이 더욱 찬란하고 개인 구름이 땅에 낮게 내리니 그림자가 흔들거린다. 동쪽으로 달리고 서쪽으로 달리는 의관(衣冠)들은 성하고 만호 천문(萬戶千門)은 붉고 푸른 무더기네. 이 나라의 허다한 호걸들이 가련하다. 누가 세상을 건질 재주를 펼까." 하였다.

 

▣ 제2권 p49<여주목 산천(山川)>

--승산(勝山) : 주 남쪽 5리에 있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청산에 들불이 침노하니, 소나무와 삼(杉)나무가 다 타버리고 다시 마음이 상하누나. 지난해 철쭉꽃이 피던 곳, 울창하게 도리어 잡목 숲을 이뤘네.” 하였다.

 

▣ 제2권 p63<여주목 불우(佛宇)>

--보은사(報恩寺) : 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다. 옛 신륵사인데, 벽돌 탑이 있으므로 속칭 벽절이라 한다. (중략)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나무 돛대는 갈대 여울을 돌고, 소나무 배를 돌다리에 매었구나. 맑은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밝은 달은 긴 강에 찼네. 설법하니 용도 응당 들을 것이요, 참선하니 호랑이도 스스로 엎드리네. 오가며 그윽한 흥이 있으니, 이끼 길이 배창에 접했네.“ 하였다.

 

▣ 제2권 p81-p83<여주목 고적(古蹟)>

--사우당(四友堂) : 마암(馬巖)에 있다. 임원준이 당(堂)을 짓고, 이름을 사우(四友)라 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전략)-----근자에 김선생 경지(敬之)가 여강(驪江)에 계셔 그 당(堂)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설(雪)·월(月)·풍(風)·화(花)를 위한 것이었는데, 뒤에 강(江)·산(山)을 다하여 육우(六友)라 하였다. 그 벗함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숭상하는 것이 다 선생이 벗한 바가 인륜 일용(人倫 日用)의 떳떳한 데 있고, 형색(形色)이 완호(玩好)한 데 있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니, 벗을 취하는 도리가 이에 극진 하였다.(하략)-----

 

▣ 제2권 p83-p85<여주목 고적(古蹟)>

--침류정(沈流亭) : 천령(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 (전략)-----○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이암(伊庵)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 위에서 책을 베고 조노라.“ 하였다. ○또, ”못을 파고 버들을 심고 초가 정자를 지었으니, 푸르름이 축축하여 개이려 하지 않네. 문득 은대(銀臺)에 놀던 화월(花月)의 꿈을 깨치니 녹음에서 가끔가다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 하였다. ○또, ”꿈은 아직도 봉황지(鳳凰池)를 싸고 도는데, 집을 구하고 밭을 구하여 푸른 물가를 찾았네. 구구히 성자(姓字) 감출 것 없다. 금어초목(金魚草木)이 이미 알고 있네. 하였다. ○또, “조각배 짧은 노로 가시사립 두들기니, 비오는 밤에 도리어 물 위 마을이 아득하구나. 묻노니 금사가 어느 곳이뇨. 등불이 숲을 격한 언덕에 깜박거리네.” 하였다.

 

▣ 제2권 p85-p88<여주목 고적(古蹟)>

--육우당(六友堂) : 천령현에 있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여강에 귀양와 당(堂)을 짓고 육우(六友)라 이름하였다. 이색(李穡)의 기문에,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가 그 당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대체로 강절선생(康節先生 ; 소옹<邵雍> 송대의 철학자)의 설월풍화(雪月風花)를 취한 것이다.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하기 청하나, 그것을 배우기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함이 오래되었다. 그가 여흥(驪興)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지금 우리 외가에 있는데, 강산의 아름다움이 나를 조석으로 위로하는 것이, 홀로 설월풍화(雪月風花) 만이 아닌 까닭으로 여기에 강산을 더하여 육우(六友)라 하였으니, 선생은 가르침을 주시요.’하였다. 내 말하기를, ‘내가 쇠하여 병든지 오래였다. 위로 천시(天時)가 이변하여도 내 모르고, 아래로 지리(地理)가 허물어져도 내 모를 뿐이다. 강절(康節)의 학문은 수리(數理)에 깊은 것인데, 이제 비록 강, 산 두 자로써 그 위에 더 써서 강절과 같지 아니함을 보인다. 그러나 역(易)의 육룡(六龍). 육허(六虛)는 강절의 학문이 나은 것이니, 이 <육(六)>을 또한 강절에게 돌릴 뿐이다. 비록 그러나 이미 <강절의 학>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찌 말이 없겠는가 말하자면 산은 우리 인자(仁者)가 즐기는 것이니 산을 보고 내 인(仁)을 가지고, 물은 우리 지자(智者)가 즐기는 것으로 강을 보면 지(智)가 있는 것이다. 눈이 겨울의 따뜻함을 누르는 것은, 나의 기운을 가운데 보전시키고, 달이 밤에 밝은 빛을 내는 것은, 나의 몸이 편안함을 보존함이다. 바람은 팔방이 있어 각각 철따라 나의 망녕되게 움직임이 없는 것이요, 꽃은 사시가 있어 각각 유(類)로서 모이니, 내가 차례를 잃음이 없는 것이다. 또 더욱 경지씨는 마음이 깨끗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고, 또 사는 곳이 산이 밝고 물이 푸르르니, 밝은 거울과 비단 병풍이라 일러도 욕됨이 없을 것이다. 눈은 고주사립(孤舟簑笠)에서 더욱 아름답고, 달은 높은 다락 술자리에서 더욱 아름답고, 바람은 낚시줄에[釣絲] 있어서 그 맑은 것이 더욱 맑고 꽃은 서탑(書榻)에서 그 그윽함이 더욱 그윽하여 지는 것으로, 네 철의 좋은 경개가 각각 그 극치를 다하여 강산의 사이에 경위(經緯 ; 가로.세로)하였다. 경지는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강에 배타고 짚신신고 산에 올라 낙화(洛花)를 세고, 청풍에 서서 눈을 밟고 중은 찾고, 달을 대하여 손을 부르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극치를 다함이오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獨步)하는 분이다. 동지(同志)를 벗함에 있어서도 위로 옛사람을 벗으로 하니, 옛사람을 하나 둘로 헤일 수 없는 것이요, 벗을 현금에 구하면 우리 같은 이로 어찌 적다하겠는가. 그러나 경지씨의 취한 것이 이와 같으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하는 분이다. 비록 그러나 천지는 부모요, 물(物)은 나의 한편이니, 어디에 가서 벗하지 못하겠소. 더욱 대축(大畜蓋)의 산과 습감(習坎)의 물은 강습하여 많이 아는 것이랴,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다.’하고 이에 육우당기에 짓는다.” 하였다. ○정추(鄭樞)의 부에, “저 여강 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당(堂)이 있어 장려하구나. 아, 탁월한 높은 사람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손을 모았구나. 그 벗함은 오직 여섯인데 보통 사람이 친할 만한 것이 아니네. 고인(高人)이 더불어 평소에 그들과 서로 알음이여, 흉금이 속세의 티끌을 끊었네. 아, 아름답구나. 저 양양하게 먼 흐름이여, 흐름이 근원이 있어 쉬지 안누나. 저 높고 아래가 두터움이여, 높으나 위태롭지 아니하여 편안한 집일세. 저 꽃다운 꽃봉우리의 찬란함이여, 골고루 멀리 비치는구나, 손이(巽二)가 맑은 바람을 명하고, 등륙(騰六)은 곧 나쁜 것을 가리어 숨겨 주누나. 서·동과 남·북이 모두 그 어진 덕을 자랑하고 빛내누나. 손과 주인의 서로 접함이여, 어찌 웃음소리도 하하 하는고. 말을 주고 받는 담봉(談鋒)이 우뢰같음이여, 혹 낮을 다하고 저녘에 늦도록 하는구나. 만일 그 거처를 말하자면 태극(太極)을 집으로 하였고, 그 족속을 상고하면 육막(六幕 ; 천지 사방을 말한다)에 두루했네. 천지가 이미 개벽됨으로부터 형상이 나타나 법도대로로다. 세속은 어두워서 늘 함께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구나. 아, 나의 혼미함이여, 저 장님과 무엇이 다르랴. 아름답 다, 상락(上洛)의 원손(元孫)이여, 일찍이 주역에 연구가가 있었도다. 양붕(良朋)을 알아서 굳게 맺음이여, 진심으로 얻었음으로다. 이에 육일노인(六一老人)이 있어서 그 행함이 빨라 자취없구나. 이미 팔구(八區)를 두루 보고는 고향에 들려서 수일동안 묵었구나. 드디어 당에 올라 손에게 읍하고,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어질구나, 그대가 여섯을 벗함이여. 진실로 초월하게 세속에 벗어 낫구나. 그러나 그 득실(得失)에 어찌 말이 없겠는가. 바야흐로 그 기둥에 의지하니 물결이 밝고, 발을 걷으니 산이 푸르구나. 봄동산에 흩어진 것은 홍록(紅錄)이요, 가을 하늘에 걸린 것은 희고 깨끗한 달일세. 바야흐로 무더울 때는 맑게 물결이 부딧치네. 겨울의 따뜻함을 누름이여, 흰 것을 뿌리누나. 이 때에 혹 술을 대하며 쟁(箏)을 타고, 혹 난간에 기대여 피리소리를 듣누나. 정신이 화열하고 뜻이 맞으니 이 즐거움이 어찌 다하랴. 물에 가까이 함을 즐기면 옷이 젖고, 자주 위험한 산을 타면 나막신이 꺾어진다. 색을 너무 사랑하면 천성을 치는[伐]것이오, 밝음을 구경하는 것이 심하면 눈을 상하고, 시원한 것을 먹기를 좋아하면 병이 나고, 찬 것을 항상 범하면 동상(凍傷)을 입는다. 내 일찍이 공자의 <말씀을> 들으니, ’친구도 <충고를> 자주하면 소원해 진다.‘ 한다. 그 함괘(咸卦) 동동(憧憧)함이여, 성인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 아니네. 일반 사람의 정이 서로 좋아함이여, 마음이 험하여 헤아릴 수 없구나. 처음 사귀매 아교같이 붙었다가, 문득 노하여 눈을 흘기네. 이제 그 원인를 찾아보니, 물(物)과 내가 적이 된 까닭이네. 비록 여섯 벗이 맑다 하나 적이 되니 일반이라. 덕을 한결같이 한 대인이 있음이여, 천지를 초월하여 독립했구나. 그 등을 등지니 그 몸을 보지 못하거든, 하물며 와서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음에랴. 어찌 그대의 여섯 벗을 버리고, 대인을 따라서 배우지 않는가. 하니 ’주인이 이에 들판을 돌아보고, 빙그fp 웃고 말하기를, 그대의 하는 말은, 내 들은 것과 다르네. 저 방(方)과 물(物)이 유(類)로 모이고, 무리로 나뉘어 져서 법칙 없음이 없는 것일세. 대체로 대인의 학문은 반드시 비고 교요한데, 저 벗의 좋고 좋지 아니함은 내 자신으로부터 손익(損益)할 것이네. 그 물(物)이 없는 미묘한 진리에 돌아가 숨는 것보다, 차라리 손과 더불어 즐김이 나을 것일세.‘하고, 이어 노래하기를 , ’달이 비침이여, 산 언덕이로다, 바람이 슬슬 불어 옴이여, 강이 스스로 물결치누나. 꽃은 말을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눈 물[雪水]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이에 서로 크게 웃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인지 알 수 없네.‘ 하였다.” 했다.

 

▣ 제2권 p92<여주목 우거 고려>

--김구용(金九容) : 민사평(閔思平)의 외손이다.

 

▣ 제2권 p342<장단도호부 불우(佛宇)>

--영통사(靈通寺) :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골 안이 깊숙하고 산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으며 물이 이리저리 굽이쳐 흐르고 나무가 우거졌다. 그 서루(西樓)의 뛰어난 경치는 송도(松都)의 제일이다. 절에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승통의천탑명(僧統義天塔銘)이 있고, 또 고려 문종(文宗)의 화상과 홍자번(洪自藩)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시에, --<생략>--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더위 피해 산중에 자니, 서늘하여 흥이 더욱 새롭구나. 솔 난간은 깨끗한 물 굽어보고, 이끼 낀 길엔 티끌 한 점 없네. 돌에 앉아 새 소리 듣고, 막대기에 의지하니 이 몸이 부끄럽구나. 흰 구름 깊고 먼 골엔 아마 신선이 있을 테지." 하였다.

 

▣ 제2권 p443<충주목 제영(題詠)>

--월악산고천표묘(月岳山高天縹緲)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월악산은 높은데 하늘은 까마득하고, 김생사(金生寺)는 오랜데 물은 졸졸 흐른다." 하였다. 맥수치초구(麥秀雉初雊) : 김구용의 시에, "구름을 더위잡고 어지러운 고개를 뚫고, 물결을 횡단하여 긴 내를 걷는다. 보리가 패어나니 꿩이 처음으로 울고, 뽕잎이 드무니 누에가 이미 잔다. 묵은 다리에는 다시 설 판자가 없고, 파리한 말은 채찍을 사양하지 않는다. 가고 가매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니, 앞마을에 흰 연기가 난다." 하였다.

 

▣ 제2권 p562<보은현 불우(佛宇)>

--속리사(俗離寺) : 속리산 서쪽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詩)에, "달마암(達磨巖) 곁에 들불 하나 밝았는데, 문 열고 향 피우니 마음 다시 맑아라. 혼자 깊은 밤에 앉아 잠 못 이루니, 창 앞에 흐르는 물 솔바람 소리와 섞여 들리네." 하였다.

 

▣ 제3권 p278<경주부 인물(人物) 고려(高麗)>

--이존오(李存吾) : 자는 순경(順卿)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하여 뜻과 절조가 있었다.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서기(水原書記)에 임명되고, 선발되어 사한(史翰)에 보직(補職)되었다.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 등과 서로 잘 지냈으며, 강론(講論)을 쉬는 날이 없었다.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고, 15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신돈이 정권을 잡아 참람하고 불법(不法)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존오가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요망한 물건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극언(極言)하였다. 그때 신돈이 임금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존오가 신돈을 지목하여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같이 무례한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상에서 내려 앉았다. 임금이 더욱 성내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시켰다. 국인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이존오는 참 정언(正言)이다." 하였다. 뒤에 공주(公州) 석탄(石灘)에 살면서 근심과 분함으로 병에 걸렸다. 위독해졌을 때에,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도 기세가 성한가?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겠다." 하더니, 자리에 다시 눕기도 전에 죽으니, 나이 31세였다 죽은 지 석 달만에 신돈이 처형되었다. 임금이 그의 충성을 사모하여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증직하였다.

 

▣ 제3권 p421<안동대도호부 역원(驛院)>

--옹천역(甕泉驛) : 부의 북쪽 34리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말 타고 가는 앞에 보이는 풍경은 손의 심정을 괴롭게 하여, 시내와 산의 경치는 가는 곳마다 그림 같구나. 시(詩)를 외우며 천천히 우거진 풀 사이 길을 가노라니 홀연히 한 나무 매화(梅花)가 있어 눈부시네.” 하였다.

 

▣ 제3권 p429<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

--김구용(金九容) : 방경(方慶)의 증손(曾孫 ; 高孫의 오기)이며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급제하고 벼슬이 누진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힘써서 후학(後學)들을 진학(進學)하게 하여 교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비록 휴가로 집에 있을 때라도 여러 생도들의 질문(質問)하러 오는 자가 잇따라 있었다. 우왕(禑王) 때에 이인임(李仁任)이 북원(北元)의 사자(使者)를 맞아들이고자 하거늘 구용(九容)이 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글을 도당(都堂)에 올려 <북원의 사자>를 물리치려고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조지 아니하였다. 곧 죽주(竹州)로 귀양갔다가 얼마 않되어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기더니, 뒤에 명나라에 가는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가다가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경사(京師)로 가서, 대리위(代理衛)로 귀양가 그 곳에서 병졸(病卒)하였다.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하였다.

☞ 주(註) : 대리위(代理衛)에서 병졸(病卒)하신 것이 아니고 귀양 도중에 노주(氵+盧州)에서 돌아가셨다.

 

▣ 제5권 p480<강릉대도호부 형승>

--산수<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하였다.

 

▣ 제5권 p511<강릉대도호부 제영>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 영주 가깝고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큰 물결 땅을 말아오는데 봉래 영주 가깝고, 높은 영(嶺)은 하늘을 만질 듯 태산화산(泰山華山)인가 의심한다.“ 하였다.

--흰모래 푸른데 물가의 섬은 : 앞 사람 <김구용>의 시에, "깃빨도 선명하게 물결에 비치니, 자고 새가 놀라 날아서 해당화 떨어진다. 흰모래 푸른데 물가의 섬은, 송교 (松喬)제자의 집인가 의심된다.“ 하였다.

☞ 주(註) : 송교(松喬)는 모두 옛날의 신선으로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 두사람이다.

 

▣ 제5권 p526<삼척도호부 제영>

--깨끗한 강산은 나와 같이 맑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강과 산 나와 같이 맑은데, 누대 가는 곳마다 관현(管絃) 소리 들리네. 좋은 말에 고운 계집을 태운 것이 아니면, 삼한(三韓)이 태평하다 누가 말하리.

 

▣ 제5권 p565<고성군 산천(山川)>

--삼일포(三日浦) : 안축(安軸)의 기문에, "삼일포가 고성 북쪽 7ㆍ8리에 있는데 밖으로는 중첩한 봉우리들이 둘러쌌으며 그 안에 36봉이 있다. 동학(洞壑)이 맑고 그윽하며 소나무와 돌이 기이하고 옛되다. 물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푸른 돌이 평평하니 옛날 네 신선이 여기서 놀며 3일간이나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여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물 남쪽에 또 작은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 돌 감실[龕]이 있으며, 봉우리의 북쪽 벼랑 벽에 단서(丹書) 여섯 자가 있으니, '영랑도 남석행(永朗徒南石行)'이라 하였다. 작은 섬에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는데 존무사(存撫使) 박공(朴公)이 그 위에 지으니 곧 사선정이다." 하였다.--(중략)--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물 가운데 정자는 고요하매 세상 생각 엷어지니, 구름 사이에서 신선 부를 듯. 다행히도 사군(使君 원님)의 마음이 저 달 같으니, 난간을 의지하여 종일토록 돌아갈 줄 모르네. ○ 36봉에 가을비 개이니, 한 구역의 선경(仙境)이 맑기도 하구나. 날이 기운다고 쉽사리 배 돌리지 말 것이, 단풍나무 언덕, 소나무 물가에서 달 밝기를 기다리자꾸나." 하였다.

 

▣ 제5권 p567<고성군 역원>

--대강역(大康驛) : 옛 안창현(安昌縣)에 있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우정(郵亭)은 눈[雪] 속에 좋은데, 서로 보니 봄 빛이 푸르네. 모래가 평평한데 푸른 소나무 총총히 들어섰고, 언덕이 넓으니 기이한 돌도 많은네. 동쪽에는 만리의 물결이 뒤엎고, 서쪽에는 천 층 벽이 깎아섰네. 내가 와서 손님이 상종하기 잦으니, 정장역(鄭莊驛)이 아닌가 하노라.“ 하였다.

☞ 주(註) : 정장역-한나라의 정당시라는 사람이 자기 집으로 오는 큰 길 몇 백리 안쪽에는 모두 마차를 대기시켰다가 찾아오는 사람을 태워 왔다 한다. 그래서 그 마차가 대기한 곳을 정장역이라 하였다.

 

▣ 제6권 p175<영흥대도호부 고작>

--희우루(喜雨樓)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담한 가을 빛 속에 해가 잠기고, 몽몽(濛濛)한 바다 기운이 숲 기운과 섞이어 내리네. 천리 안계(眼界) 속에 농상(農桑)이 풍요하니, 옛 날의 강폭(强暴)한 자들이 몇 번이나 전비(前非)를 뉘우쳤는가.“ 하였다.

 

▣ 제6권 p213<덕원도호부 제영>

--북녘 바람이 철관(鐵關)의 정을 불러 일으키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만리 창파(滄波)에 한 정자[초정(草亭)], 북녘 바람이 철관의 정을 불러 일으키네. 백 년동안 범과 이리 떼가 둔(屯)쳤던 이 곳, 이제 닭울고 개 짖는 소리가 의구(依舊)하구나.“ 하였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26) 江陵山水甲天下--뉴그린 소주에 새겨진 시구 원문 (2003. 5. 10. 윤만(문) 제공)

 

◎ 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44<강릉대도호부 형승>

--산수<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하였다.

--[원문] “山水甲天下 金九容詩江陵山水甲天下”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5/민족문화추진회/1982 p480》

 

◎ [강릉으로 돌아가는 김한보 생원을 보내며①(送金漢寶生員歸江陵)]

江陵山水甲天下(강릉산수갑천하) : 강릉의 산수는 천하의 으뜸이라

天台羅浮誠可亞(천태라부성가아) : 천태산②·라부산③에 참으로 버금가네

洪濤卷地近蓬瀛(홍도권지근봉영) : 넓은 파도가 땅을 말아오니 봉래산④·영주산⑤이 가깝고

峻嶺摩天疑泰華(준령마천의태화) : 높은 고개가 하늘을 깎아지르니 태산⑥·화산⑦인 듯싶네.

寒松亭上淸風微(한송정상청풍미) : 한송정⑧ 위에는 맑은 바람이 현묘한데

鏡浦臺前明月鎖(경포대전명월쇄) : 경포대⑨ 앞에는 밝은 달을 가두었네.

我昔觀風灠轡行(아석관풍남비행) : 나는 옛날의 풍속을 살피러⑩ 고삐잡고 나가서⑪

汀洲千里馳駿馬(정주천리치준마) : 물가 천리에 준마를 달렸네.

長松怪石照金鞍(장송괴석조금안) : 큰 소나무와 괴이한 바위가 금 안장에 비치었네.

羌笛纖歌傾玉斝(강적섬가경옥가) : 젓대소리와 가느다란 노래소리에 술잔을 기울였네

只今十年如夢中(지금십년여몽중) : 지금도 10년 세월이 꿈 속 같은데

京華塵土逢轗軻(경화진토봉감가) : 서울의 티끌 속에서 불우한 신세라네.

水門東畔老先生(수문동반노선생) : 수문 동쪽 둔덕의 늙은 선생은

風流儒稚眞長者(풍류유치진장자) : 풍류가 유아⑫하여 참으로 장자라네.

其孫漢寶遊成均(기손한보유성균) : 그 손자 한보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學業精明居上舍(학업정명거상사) : 학업이 정밀하고 밝아 상사⑬로 있네.

飄然一朝覲親歸(표연일조근친귀) : 표연히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뵈러 돌아가는데

回首秋雲更蕭灑(회수추운갱소쇄) : 돌아보니 가을 구름은 더욱 맑고 깨끗하네.

佳期空恨久蹉跎(가기공한구차타) : 아름다운 기약이 오랫동안 어그러져 덧없이 한스러우니

若見神仙爲我謝(약견신선위아사) : 만약 신선을 만난다면 나를 위해 사례드리게.

 

주① : 이 시는 일부가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권44, 『江陵大都護 府(강릉대도호부)』에 실려 있다.

주② : 天台山(천태산)은 중국 절강성 천태현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天台宗(천태종)의 聖地(성지)이다.

주③ : 羅浮山仙(라부산)은 중국 광동성 증성현에 있는 산으로 수나라의 趙師雄(조사응)이 梅林(매림)의 精靈(정령)인 羅浮仙(라부선)을 만난 곳이다.

주④ : 蓬萊山(봉래산)은 三神山(삼신산)의 하나이다.

주⑤ : 瀛洲山(영주산)은 三神山(삼신산)의 하나이다.

주⑥ : 泰山(태산)은 중국 산동성 봉안현에 있는 산으로 五嶽(오악)의 하나이다.

주⑦ : 華山(화산)은 중국 섬서성 화음현에 있는 산으로 五嶽(오악)의 하나이다.

주⑧ : 寒松亭(한송정)은 강원도 강릉 동쪽에 있던 정자로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였고, 소나무가 울창하였다고 한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돌아궁이[石竈(석조)]·돌절구[石臼(석구)]가 있는데, 곧 述郞仙人(술랑선인)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

주⑨ : 鏡浦臺(경포대) 강원도 강릉시 동북쪽에 위치한 樓臺(루대)로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1326년(충숙왕 13)에 朴淑(박숙)이 창건하고, 1508년(중종 3)에 韓汲(한급)이 移築(이축)했다.

주⑩ : 觀風(관풍)은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 백성들의 풍속과 인정을 살핀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방관으로 나감을 의미한다.

주⑪ : 灠轡(람비)는 ‘고삐를 잡는다’는 것으로 출발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뜻은 천하의 정치를 맑디 맑게 하려는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 즉 처음 벼슬길에 나갈 때 어지러운 정치를 刷新(쇄신)하겠다는 뜻을 품음을 말한다. 중국 후한의 范滂(범방)이 어지러운 익주의 政情(정정)을 案察(안찰)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천하를 澄淸(징청)하려는 뜻을 품고 출발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灠轡澄淸(남비징청)’이라고도 한다.

주⑫ : 원문에는 ‘儒稚(유치)’라고 되어 있으나 ‘儒雅(유아)’라야 의미가 통하므로 이렇게 새겼다. 이것은 ‘儒雅(유아)’의 誤刻(오각)인 듯하다.

주⑬ : 上舍(상사)는 生員(생원)이나 進士(진사)를 말한다.

 

《출전 :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성범중/울산대학교 출판부/1997 pp191-193》

 

 27)약재유고 서(若齋遺稿序)-삼봉집에서 (2003. 5. 13. 태서(익) 제공)

 

갑자년(1) 이후 작임

 

도전(道傳)이 하루는 망우(亡友) 약재(若齋 김구용(金九容) 자는 경지(敬之))의 유고(遺稿) 몇 권을 얻어서 눈물을 지으며 읽고는 이내 붓에 먹을 묻혀서 그 책 머리에 쓰기를, ‘동국 시인 김경지(金敬之)의 소작이다.’하였다.

그 글씨가 끝나기도 전에 손님이 힐책하기를,

“김 선생의 학술과 행의(行義)가 어찌 시인에 그칠 뿐이겠는가? 선생은 명문[世族] 집 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였고, 학문에 뜻을 둔 뒤에는 포은(圃隱) 정공(鄭公 정몽주(鄭夢周))ㆍ도은(陶隱) 이공(李公 이숭인(李崇仁))ㆍ정언(正言)이순경(李順卿) 등과 우의가 더욱 돈독하여 아침 저녁으로 강론하고 연마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 의리(義理)의 학이 이 두세 분으로 하여서 제창된 것이다.

국가에서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옛 제도를 경장(更張)하고 생원(生員)의 수를 더하여, 재상인 한산(韓山) 이공(李公 이색(李穡))을 사석(師席)의 맹주(盟主)로 하고 명유(名儒)들을 뽑아서 학관(學官)을 삼았는데, 선생이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직강(直講)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經)을 가지고 수업하는 자들이 앞에 열을 지었으며, 비록 휴가[休沐]중일지라도 질문하는 자들이 집에 잇달아 와서 많이 배우고 갔으니, 선생의 학술의 올바름이 어떠한가?

그리고 갑인(공민왕 23 1374)과 을묘(우왕 1 1375) 연간에 국가에 일이 많았는데 당시의 정승이 용사(用事)하므로, 선생이 글을 올려 그 잘잘못을 힘써 말하다가 답은 얻지 못하고 죽주(竹州 광주(廣州)의 속현임)로 정배(定配)되었으며, 준례에 의하여 외가인 여흥(驪興) 고을로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여강어부(驪江漁夫)’라 자호(自號)하고 그 거실에는 육우당(六友堂)

【안】 육우는 강(江)ㆍ산(山)ㆍ풍(風)ㆍ화(花)ㆍ설(雪)ㆍ월(月)을 말한다.

이라고 편액한 다음, 강산(江山)과 사시(四時)의 풍경을 즐긴 것이 무릇 7년이었다.

국가가 그 풍의(風義)를 고상히 여겨 불러들여 간관(諫官)을 제배하였다가 얼마 후 성균관(成均館)대사성을 제수하였는데 언책(言責)과 관수(官守)가 둘 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또 선생은 사신[專對]이 될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에게 예를 드리게 하였는데, 때마침 명(明)은 조정의 명으로써 사교를 허하지 아니하고, 선생을 운남(雲南)에다 유치하게 하여, 길을 떠나 사천(四川)의 노주(濾州)에 이르러서 병으로 여사(旅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 신우 갑자년(1384)에 의주 천호(義州千戶) 조계룡(曹桂龍)이 요동에 가니, 도지휘(都指揮)매의(梅義) 등이 속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 일에 늘 마음을 써서 도와주는데 너희 나라에서는 어찌 치사(致謝)를 않느냐.’는 말을 전해 듣고 신우가 구용(九容)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았다. 구용이 글을 받들고 요동에 가니, 매의와 총병 반경(潘敬) 등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는 사교가 없는 것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하고 포박을 지어 경사(京師)로 갔다. 그러자 황제가 대리위(大理衛)로 유배시켰는데 노주(濾州)영녕현(永寧縣)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선생이 처음 길을 떠날 때부터 병들어 죽을 때까지 험난한 만리 길을 가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조금도 걱정하거나 애달파하는 기색이 전연 없었으며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내가 집에서 아녀자(兒女子) 손에서 죽었으면 누가 알 것인가? 지금 만리 밖에서 왕사(王事)를 수행하다 죽게 되어서 중국 사람까지 나의 성명을 알게 되었으니 죽을 곳을 얻었다 할 만하다.’ 하고는 집안 일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선생의 행의 높음이 어떠한가?”

하였다.

도전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지마는 김경지의 학술과 행의는 사책[史牒]에 갖추어 실려 있고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으니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모두 알지 않겠는가?

그런데 시도(詩道)는 말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 오래이다. 아(雅)ㆍ송(頌)이 폐기된 뒤로 시인의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이 성하였고, 소명태자(昭明太子)(2)의 《문선(文選)》이 행해지자 그 폐단이 섬약(纖弱)에 치우쳤는데 당(唐)나라에 이르러 성률(聲律)(3)성률은 구본에는 율성(律聲)으로 되어 있음. 이 시작되면서 시체(詩體)가 크게 변하였으니 이태백(李太白)ㆍ두자미(杜子美)가 가장 탁월하다는 자이다.

송(宋)나라가 흥하여 진유(眞儒)가 쏟아져나와 경학과 도덕이 삼대(三代 하(夏)ㆍ는(殷)ㆍ주(周))를 따라갈 만하였다. 시(詩)에 있어서는 당률(唐律)을 계승해 받았으니, 근체시(近體詩)(4)라 하여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인데, 세상에서 시를 쓰는 자들이 혹은 그 소리만 얻고 그 맛은 잃기도 하며, 혹은 그 뜻은 있으나 그 문사(文詞)가 없으니, 과연 성정(性情)에서 나와 물(物)로써 흥(興)하고 유(類)로써 비(比)하여, 시인의 지취에서 어긋나지 않은 것은 거의 드물다고 하겠다. 중국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변두리 먼 곳이야 말할 나위나 있겠는가?

김경지의 외할아버지 급암(及菴) 민공(閔公 사평(思平))이 사학(詞學)을 잘하는데 더욱 당률(唐律)에 능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ㆍ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 같은 분들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김경지가 아침 저녁으로 곁에서 모셨으니 눈에 젖고 귀에 익어, 느끼고 열리어서 자득된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다.

도전이 일찍이 김경지가 시 짓는 것을 보았는데, 그 생각하는 것이 막연하여 사색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데 써놓은 것을 보면 넘쳐서 자득(自得)한 듯하였다. 그 시를 쓰는 데는 구름이 흐르고 새가 나는 듯하였으나, 그 시가 이뤄지면 청신하고도 아름다워서 자못 그의 인품과 유사하였으니, 김경지는 시도(詩道)에 있어서 가위 완성되었다 할 만하다.”

고 하니, 손님이 옳다고 하여 마침 이를 써서 서문으로 삼는다.

    

[1] 갑자년 : 고려 우왕(禑王) 10년(1384).

[2] 소명태자(昭明太子) : 양무제(梁武帝)소연(蕭衍)의 장자로 이름은 통(統)임. 그의 저서로 《문선(文選)》이 유명하다.

[3] 성률(聲律) : 문자(文字)의 사성(四聲)의 규율(規律)을 말한다. 한시(漢詩)의 율(律)ㆍ부(賦) 등을 이르는 말.

[4] 근체시(近體詩) : 한시의 율시(律詩)ㆍ절구(絶句) 등을 가리킴. 그 자 수, 구(句) 수가 한정되어 있으며 평측(平仄)이 또한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고시(古詩)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운 점이 있다.

 

출전:삼봉집

 

   *원문 소개 (2004. 3. 4. 은회(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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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문온공(文溫公) 김구용(金九容)의 졸기(卒記)  (2003. 10. 11. 윤만(문) 제공)

 

 ≪출전 : 동사강목 제16하 우왕10년12월(명 태조 홍무17, 1384)≫

 

--제(帝)가 본국의 요동행례사(遼東行禮使) 김구용(金九容)을 대리위(大理衛)로 유배하였는데, 도중에서 졸하였다.

 

--앞서 요동도지휘(遼東都指揮) 매의(梅義)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속여 말하기를, “내가 그대 나라 일에 항상 진력(盡力)하고 있는데 어째서 한번도 와서 사례하지 않는가?”하였다. 재상이 그 말을 믿고 구용을 행례사로 삼아 서장을 받들고 가게 하였는데, 요동에 이르니 총병(摠兵) 반경(潘敬)과 섭왕(葉旺)이 매의와 말하기를, “남의 신하된 자는 의리상 사교(私交)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하고는 잡아서 경사(京師)로 보내니, 제(帝)가 공마(貢馬)가 오지 않았다 하여 대리위로 유배하였는데, 노주(瀘州, 동사강복에는 여주로 잘못 번역함) 영녕현(永寧縣)에 이르러 병이 났다.

 

--죽을 무렵에,

 

좋은 말 오천 필이 언제나 도착하나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관 밖에는 풀만 무성하구나 / 桃花關外草芊芊

 

--한 시를 지으니, 나라 사람들이 듣고 불쌍하게 여겼다.

 

--≪척약재집(惕若齋集)≫ 이 세상에 전한다.

 

 29) <연려실 기술>내 기록 자료 종합 (2003. 10. 7. 윤만(문) 제공)

 

(1)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안동(安東) 물계서원(勿溪書院) 현종 신축년에 세웠다. : 김방경(金方慶)고려 첨의중찬(僉議中贊)이다.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ㆍ김응조(金應祖) 호는 학사(鶴沙), 참판을 지냈다. ㆍ김구용(金九容)호는 척약재(惕若齋), 전판교(典判校)를 지냈다. ㆍ김양진(金揚震)호는 허백당(虛白堂), 참판을 지냈다.

 

(2)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 고려 말에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하였다. 그런데 공(☞포은 정몽주)은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살이를 하고 슬픈 정과 예를 함께 다하니, 나라에서는 가상히 여겨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축년(1361) 병란 거란의 난[契丹之亂]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는데, 공민왕이 새로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고 석유(碩儒)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및 공을 선발해서 학관(學官)을 겸하도록 하고,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다. 공의 강설(講說)이 활발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하였다. 그래서 청강생들이 자못 의심하였는데, 뒤에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학설을 얻어보게 되자 공의 이론과 합치되므로 제유(諸儒)들이 탄복하였다. 이색이 칭찬하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치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도다.” 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 《명신록(名臣錄)》

 

(3)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성균관(成均館)

 

  신라에서는 국학(國學)ㆍ태학감(太學監)이라 하였다.

 

  고려에서는 국자감(國子監)이라고 하였다가, 국학(國學)ㆍ성균감(成均監)이라고 고쳤고, 얼마 안 되어서 감(監)을 고쳐서 관(館)이라 하였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해서 성균관을 설치하여 유생을 교도(敎導)하는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아울러 문관을 임용하였으며 그 소속으로 정록청(正錄廳)을 부설하였다.

 

  대사성(大司成)ㆍ좨주(祭酒)ㆍ악정(樂正)ㆍ직강(直講)ㆍ전부박사(典簿博士)ㆍ순유박사(淳諭博士)ㆍ진덕박사(進德博士)ㆍ학정(學正)ㆍ학록(學錄)ㆍ직학(直學)ㆍ학유(學諭)의 직제가 있었는데,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을 제조로 삼아 4품 이하의 관원과 유사(儒士)를 모아서 경사(經史)를 강습하게 하였다.

 

  뒤에 직제를 고쳐 정하여 지사(知事) 한 사람, 대제학이 으레 겸하였다.동지사(同知事) 두 사람, 다른 벼슬아치가 겸하였다.대사성 한 사람, 좨주(祭酒) 두 사람, 태종이 사성(司成)이라고 고쳤다.사예(司藝) 세 사람, 직강(直講) 네 사람, 전적(典籍) 열세 사람, 박사(博士) 세 사람, 학정(學正) 세 사람, 학록(學錄) 세 사람, 학유(學諭) 세 사람, 겸 박사(兼博士) 한 사람 의정부 사록(司錄)이 겸하였다. 으로 정하였다가 뒤에 다시 겸학정ㆍ겸학록ㆍ겸학유는 폐하고,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이하와 사학 훈도(四學訓導)로서 겸하게 하였다.

 

  태종이 좨주를 고쳐서 사성(司成)이라고 하고, 뒤에 사성ㆍ사예(司藝) 각 한 사람씩을 감원하였다.

 

○ 연산군이 박사 이하의 관직을 폐지하여 다른 관청에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중종 초년에 복구하였다.

 

○ 처음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학교가 오랫동안 폐지되었으므로 새로 성균관을 창설하여,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고, 거유(巨儒)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ㆍ정몽주(鄭夢周)를 뽑아서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였다. 《명신록》

 

(4)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집(文集)

 

최치원(崔致遠) 《계원필경(桂苑筆耕)》    최자(崔滋)시중(侍中) 《동인문기(東人文幾)》 몇 10권       최해(崔瀣)예산(猊山) 삼한귀감(三韓龜鑑)》 1질

 

김태현(金台鉉)시중(侍中) 《동국문감(東國文鑑)》 몇 10권       이규보(李奎報) 《이상국전후집(李相國前後集)》 몇 10권

이극기(李克己) 원외(員外) 《김거사집(金居士集)》 몇 10권       이인로(李仁老)대간(大諫) 《은대집(銀臺集)》 1질

최당(崔讜) 《쌍명재(雙明齋)》 1질       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閒集)》 2질인데, 고려조의 시화(詩話)이다.

최자(崔滋)졸옹(拙翁)ㆍ수태위(守太尉) 《보한집(補閒集)》 2질인데, 고려조의 시화이며 자신이 서문을 지었다.

최자 《농은집(農隱集)》       임춘(林椿) 《서하집단간(西河集斷簡)》 1질       이제현(李齊賢) 《익재집(益齋集)》 몇 10권

이제현 《역옹패설(櫟翁稗說)》 1질       예종(睿宗)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 1질. 곽여(郭輿) 등과 함께 창화(唱和)하였다.

이승휴(李承休)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1질       나흥유(羅興儒) 《중순당집(中順堂集)》 1질

승인(僧人) 《식영암집(息影菴集)》 1질       중[僧] 굉연(宏演) 《죽간집(竹磵集)》 1질. 나옹(懶翁)의 제자 구양현(歐陽玄)ㆍ위소(危素) 두 학사가 서문을 지었다.

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이인복(李仁復) 《초은집(樵隱集)》 1질       정몽주(鄭夢周) 《포은집(圃隱集)》 1질

이숭인(李崇仁) 《도은집(陶隱集)》 2질       이달충(李達衷) 《제정집(霽亭集)》 1질       정보(鄭誧) 《운곡집(雲谷集)》 1질

정추(鄭樞) 《원재집(圓齋集)》 1질       유숙(柳淑) 《사암집(思庵集)》 1질       정총(鄭摠) 《복재집(復齋集)》 1질

이방직(李邦直) 《의곡집(義谷集)》 1질       이원굉(李元紘) 《춘곡집(春谷集)》 1질       염흥방(廉興邦) 《동정집(東亭集)》 1질

염정수(廉廷秀) 《훤정집(萱庭集)》 1질       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몇 10권       변계량(卞季良) 《춘정집(春亭集)》 몇 10권

정도전(鄭道傳) 《삼봉집(三峯集)》 몇 10권       박의중(朴宜中) 《부재집(負齋集)》 1질       이첨(李詹) 《쌍매당집(雙梅堂集)》 몇 10질

정이오(鄭以吾) 《교은집(郊隱集)》 7권       김구용(金九容) 《척약재집(惕若齋集)》 1질       한수(韓脩) 《유항집(柳巷集)》 1질

중[僧] 선탄(禪坦) 《선탄집(禪坦集)》       성석린(成石磷) 《독곡집(獨谷集)》 2질       성석인(成石珚) 《상곡집(桑谷集)》 1질

권우(權遇) 《매헌집(梅軒集)》 2질       이집(李集) 《둔촌집(遁村集)》 1질       설손(偰遜) 《근사재집(近思齋集)》

유관(柳觀)관(寬)으로 고쳤다. 《하정집(夏亭集)》 1질       이암(李嵓)ㆍ강(岡)ㆍ원(原) 세 사람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정해(鄭偕) 《팔계집(八溪集)》        중[僧] 둔우(屯雨) 《천봉집(千峯集)》 1질       설장수(偰長壽) 《운재집(芸齋集)》 1질

중[僧] 성민(省敏) 《계정집(桂庭集)》 1질       유방선(柳芳善) 《태재집(泰齋集)》 1질       윤택(尹澤) 《율정집(栗亭集)》 1질

윤회(尹淮) 《청경집(淸卿集)》 1질       황희(黃喜) 《방헌집(厖軒集)》 1질       함부림(咸傅霖) 《난계집(蘭溪集)》 1질

강회백(姜淮伯) 《통정집(通亭集)》 1질       강석덕(姜碩德) 《완역집(玩易集)》 1질       강희안(姜希顔) 《인재집(仁齋集)》 1질

강희안 《양화소록(養花小錄)》 1질       이혜(李惠) 《단활집(短豁集)》       신숙주(申叔舟) 《보한재집(保閑齋集)》 2질

권람(權擥) 《소한당집(所閑堂集)》 2질       최항(崔恒) 《태허정집(太虛亭集)》 2질       김수온(金守溫) 《식우집(拭疣集)》 2질

서거정(徐居正) 《사가정집(四佳亭集)》 몇 10권       서거정 《동문선(東文選)》       강희맹(姜希孟) 《사숙재집(私淑齋集)》 몇 10권

성임(成任)문안(文安) 《안재집(安齋集)》 1질       성간(成侃) 《진일집(眞逸集)》 1질       

이상은 모두 《용재총화(慵齋叢話)》에 기재된 것이다.

 

(5)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잠룡 때의 일

 

○ 이때(☞ 신우 5년 기미에 왜적의 배 5백 척이 하삼도(下三道)에 침범하였을 때) 태조가 이기고 돌아오니,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시를 지어 하례하기를,

“적을 소탕하기 참으로 썩은 나무 꺾기나 마찬가지,

삼한의 기쁜 기색, 여러분에게 달렸소.

임금 향한 그 충성에는 안개 걷혔고

청구(靑邱)에 떨치는 그 위엄에 바다가 잔잔하오.

빛난 자리에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노래요,

능연각(凌煙閣) 높은 집엔 영웅의 화상 그리리.

병든 이내 몸, 교외까지 나가 맞지는 못하고,

앉아서 새 시를 읊어 높은 공 송축하오.”〔掃賊眞將拉朽同〕

하였다.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적이 기세 꺾기를 우레와도 같이 하니

그 절제는 모두 우리 공이 한 거라네.

상서로운 안개 피어올라 독한 안개 스러지고,

서릿바람 싸늘하여 장군의 위풍 도왔네.

섬 오랑캐 낙담하니 우리 군용 성하고,

이웃 나라 무서워하니 사기 더욱 웅장하네.

온 나라 의관들 다투어 서로 축하하니,

 

삼한 만대를 태평케 한 공일세” 라 하였으며, 성균좨주(成均祭酒)권근(權近)의 시에, “3천 명이 한마음으로 용감히 싸웠으니, 지금 같은 군율(軍律) 다 공에게서 나왔네. 나라에 바친 충성은 밝기가 해를 꿰뚫고 적봉(賊鋒)을 꺾은 용맹은 찬기운 바람이 나네. 붉은 활주D-011 빛나고 빛나 임금의 은혜와 영광 중하고, 백우전(白羽箭) 우뚝하여 기세도 웅장하네. 한번의 개선으로 국가가 안정되니, 말 위에서 기특한 공 세우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하였다. 《동각잡기》

 

 30)추흥정(秋興亭) 관련 자료 모음 (2004. 3. 9. 영환(문) 제공)

    (1)추흥정기(秋興亭記) 이숭인

 

 용산(龍山)은 본래부터 산수(山水)를 즐길 수 있는 경치가 있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란다. 강에는 배가 운행하고 육지에는 수레가 통행하여 이틀 밤낮이면 경도(京都)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 별장을 마련하는 귀인들이 많다. 전(前) 봉익(奉翊) 김공(金公)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여기에 쉬고 있는 지가 이미 오래다. 살고 있는 집 동쪽에서 우연히 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였다. 높고 길게 굽어서 형상이 배를 엎어 놓은것 같다. 드디어 그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소나무를 베어 서까래를 걸고 띠풀을 베어 지붕을 덮었다. 땅이 높고 모진 곳은 평평하게 만들고 나무가 빽빽하게 가리운 것은 성기게 솎아내니 두루 돌아다니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이에 김 비감(金秘監)에게 정자의 이름을 청하여 추흥정(秋興亭)이라는 석 자를 써서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그 한두 가지 그럴 듯한 것을 찾아서 글을 쓴다.

천지의 운행은 무궁하고 사계절의 경치는 서로 같지 않다. 우리의 즐거움도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건대, 이 정자는 봄날에 비로소 따뜻하고 동풍(東風)이 화창하게 불 때면 숲의 꽃과 들의 풀들이 붉고 깨끗하며 푸르고 고울 것이다. 여기에서 높은 소리로 노래 부르며 오락가락하면 한가한 마음은 마치 ‘나는 증점을 허여한다.’는 기상이 있을 것이다. 뜨거운 햇빛이 공중에서 흘러내려 쇠라도 녹이고 돌이라도 녹일것 같으며 대지(大地)는 이글거리는 화로 속과 같다. 이때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그늘 밑에서 맑은 바람을 타고 옷깃을 나부끼며 산보(散步)하면 시원하고 호한한 것이 마치 열어구(列禦寇)가 바람을 타고 노는 것같을 것이다. 차가운 기운은 얼어붙고 외로운 기러기는 구름 속에서 울고 등륙(?六)이 재주를 피우니주D-001 강과 하늘이 한 빛이다. 조각배를 타고 오락가락하면서 높은 회포와 아담한 운치는 섬중(剡中)에 가는 것주D-002과 비슷하거늘 김 비감(金?監)은 어찌 유독 추흥(秋興 가을의 흥취)을 선택하였는가.

대체로 여름은 뜨겁고 겨울은 추워서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지만 오직 봄철의 온화함과 가을의 청량함은 사람에게 알맞다. 하지만 온화한 기운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나태함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 욕수(?收)주D-003가 명령을 관장하고 맑은 상성(商聲)이 음률 맞출 때 같으면 하늘 끝과 땅끝은 맑고 밝고 시원하게 트인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나타나면 비록 부귀와 공명과 같은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도 변하여 맑고 서늘한 기분이 된다. 4계절의 경치 중에 가을보다 더 좋은 것은 없고, 가을의 경치는 이 정자에서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김 비감이 명명한 뜻도 여기에 있는 것인가.

봉익 김공은 이미 장년(壯年)에 중국에서 벼슬하여 그가 사귄 사람들은 모두가 고량진미를 먹으며 초헌을 타고 면관(冕冠)을 쓴 부귀한 무리들이며, 그의 노닐고 관람한 것은 다 높고 사치스럽고, 넓고 큰 것의 최대한 것이었다. 이제 안락하게 걷어 마음속에 간직하고 상쾌하며 시원한 기분으로 한 점의 먼지도 없으니, 대개 맑은 자이다. 추흥이라는 현판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봄, 여름, 겨울의 이 정자의 좋은 경치를 그대가 곡진하게 드러내어서 남김이 없게 하면서 추흥(秋興)의 아름다움은 제시만 하고 결론을 말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다른 날 김 비감을 이끌고 복건(幅巾)과 청려장으로 이 정자에 공(公)을 찾아가서, 무릉(茂陵)의 기사주D-004를 노래하고 안인(安仁)의 부(賦)주D-005를 화답하게 되면 추흥설(秋興說)은 좌우에서 취하여 씀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를 기문으로 쓴다.

 

[주 D-001] 등륙(?六)이 재주를 피우니 : 등륙(騰六)은 눈을 내리게 하는 신(神)이니 재주를 피운다는 말은 눈을 내리게 하였다는 말이다.

[주 D-002] 섬중(剡中)에 가는 것 : 섬중(剡中)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회계현(會稽縣)의 산음(山陰) 땅이니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곳에 대안도(戴安道)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왕자유(王子猷)라는 사람이 눈 오는 날 밤에 대안도 생각이 나서 눈을 맞아 가며 찾아 가다가 그 문 앞에까지 갔다가 흥취가 다하여 주인을 찾지도 아니하고 그냥 돌아갔다는 고사이다.

[주 D-003] 욕수(?收) : 서쪽의 신(神)으로, 가을의 신이다. 하늘에서 형벌을 맡음.

[주 D-004] 무릉(茂陵)의 기사 : 무릉(茂陵)은 한(漢) 나라 무제(武帝)의 능 이름이니, 여기에 무릉이라 함은 무제를 말한다. 그는 추풍사(秋風辭)라는 노래를 지었다.

[주 D-005] 안인(安仁)의 부(賦) : 안인(安仁)은 진(晋) 나라의 반악(潘岳)이란 사람의 자(字)이다. 〈추흥부(秋興賦)〉라는 작품을 썼다.

 

  (2)추흥정시(秋興亭詩)  

 

                         김구용

 봉익대부 김공이 한양의 용산에 물러나 살면서 기거하는 집의 동쪽에 정자를 얽었다. 내가 麗江에서 돌아와 그 정자에 올라가서 배회하고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튿날 공이 나에게 그것에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개경에 들어가자 子安 이숭인 댁에 모여서 그 정자의 이름이 지녀야 할 뜻을 논의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용산은 매우 비옥하고 풍요하여 무릇 나오는 물건이 특별히 풍요롭고 부드럽다. 또 고기 잡는 것과 벼농사 짓는 모습을 노닐며 감상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공이 이것을 즐기며 여기서 사니 '추흥'이라고 이름을 짓는게 어떤가?"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이에 붓을 먹에 적셔 세 글자를 쓰고, 인하여 자(이숭인)에게 기문을 지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과 함께 시를 읊었다.

 

용산의 가을 빛에 사람의 마음이 담담한데

구름은 깨끄사혹 강은 맑으며 풀과 나무가 무성하네

하루가 다 가도록 높은 정자에서 누구와 함께 하는가

항쌍의 학과 한 벌의 거문고라네

 

龍山秋色淡人心 용산추색담인심 雲淨江澄草樹深(웅정강징추수심)

竟日高亭誰是伴(경일고정누시반) (一雙野鶴一張琴) 일쌍야학일장금

 

이하 생략

 

  (3)삼봉집 제1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추흥정에 제하다[題秋興亭]

 

【안】 정자는 용산강(龍山江)에 있는데 이숭인(李崇仁)의 기(記)에 의하면 김봉익(金奉翊)이 이 정자를 창건하고, 김비감(金秘監)이 추흥(秋興)이라 편액(扁額)했다고 하였다.

 

김후는 본래부터 아상을 지녀 / 金侯有雅尙

산수 좋은 고을로 돌아왔네 / 歸來山水鄕

높은 데 올라 높은 정자를 짓고 / 登高構危亭

낮과 밤을 여기서 노닌다오 / 日夕此??

기이한 봉우리를 우러러보고 / 仰視峯巒奇

기나긴 강 흐름을 내려다보면 / 俯看江流長

벼와 기장 벌판을 덮고 / 禾黍被原野

솔과 국화 길가에 가득하네 / 松菊滿道傍

서포에 지는 해는 붉고 엷은데 / 落日淡西浦

동산에 흰 달이 둥실 떠오고 / 素月生東岡

청려장 손에 들고 구경나가니 / 藜杖極孤賞

옷깃에 선들기운 스며들어 / 衫袖領新凉

가을바람에 이는 무한한 흥은 / 秋風無限興

넓고 커서 헤아릴 길이 없네 / 浩然不可量

삼봉 그 아래에 내 집이 있어 / 我家三峯下

두 곳은 멀리 서로 바라다보이니 / 兩地遙相望

어느 때 그곳으로 돌아가서 / 何當歸去來

한 번 웃고 술잔 함께 들어 볼거나 / 一笑共深觴

 

  (4)양촌선생문집 제3권.   시 詩

 

용산(龍山)의 추흥정(秋興亭)에 기제(寄題)하다

 

농가는 쉴새없이 괴롬만 맛보더니/田家作苦不曾休

벼 곡식 익어가자 수확 있어 기쁘구려/禾稼成時喜有秋

정자에 앉은 나도 이 기쁨 함께 하여/亭上我能同此樂

산중의 사람들과 서로 만나 노니노라/山中人亦可相遊

들 바람 우수우수 갓 위에 불어오고/野風颯颯吹烏帽

강 비는 부슬부슬 낚싯배에 뿌리누나/江雨蕭蕭灑釣舟

어찌하면 임을 따라 깨끗이 돌아가서/安得從公一歸去

산수로 벗을 삼아 십년 시름 녹일거나/登臨消盡十年愁

 

  31) <동사략>내의 문온공 자료 소개 (2004. 3. 12. 은회(익) 제공)

 

  (1)乙卯廢主禑元年

 

 開書筵,

 

以 田祿生, 李茂方等, 爲 師傅, 宦者 金玄, 曰 暇 日宜停講, 禑, 曰讀書非細事何可廢也, 讀 大學, 問 右副代言 尹邦彦, 曰詩云穆穆文王於緝熙敬, 止何義也, 邦彦不能對, 禑曰予嘗謂儒者通經書今乃爾耶, 自後禑昵近宦官宮妾, 不親士大夫, 識者憂之, 定考績法, 以田野闢戶口增賦役均詞訟簡盜賊息五事爲殿最蓋本於 元朝六事黜陟之法

 

○ 北元使來-遣 黃裳 成石磷等, 謝遣之流 鄭道傳, 朴尙衷, 田祿生, 李詹, 鄭夢周 金九容等, 先是, 李仁任與百官聯名爲書將呈 北元, 中書省左代言 林樸, 典校令 朴尙衷 典儀令 鄭道傳以爲先王決策事南, 今不當事北, 竝不署名, 旣而 北元<9권01_0356-2>遣使來, 曰前王背我歸明, 故赦爾國弒王之罪, 於是, 宰相 李仁任 慶復興 池奫等欲迎之,

 

 三司左尹 金九容, 典理摠郞 李崇仁, 典儀令 鄭道傳, 三司判官 權近等上書都堂, 曰若迎 元使, 一國臣民皆陷於亂賊之罪, 他日何面目見先王於地下, 仁任等却不受令 道傳往迎 元使, 道傳詣 復興第謂, 曰我當斬使首而來, 不然則縛送于大 明 辭頗不遜, 仁任等怒, 乃流 道傳于會津, 繼而 鄭夢周 朴尙衷等上疏極言迎 北使之不可, 尙衷復上疏極陳 李仁任主張事北之議之罪, 請誅之, 獻納 李詹 全伯英等亦上書,

 

請誅 仁任, 會有阿 仁任者上書, 請鞫 李詹等, 於是, 遂下 詹 伯英于獄, 使 崔瑩 池奫鞫之, 辭連 朴尙衷 田祿生等皆杖流之, 仁任又奏流 鄭夢周 金九容 李崇仁, 權近, 鄭思道, 李成林等, 近, 恭愍朝年十八登第, 唱名入庭王怒, 曰彼少者亦登第耶, 李穡對, 曰將大用不可少之也

 

  (2)辛未忠惠王元年 <8권01_0346-1>

 

以 李穡爲 成均大司成, 鄭夢周爲 博士

 

穡, 增置生員擇經術之士, 鄭夢周, 金九容, 朴尙衷 朴宜中, 李崇仁等, 皆以他官兼敎官, 先是, 館生不過數十, 穡更定學式每日坐明倫堂, 分經授業, 講畢相與論難忘倦, 於是, 學者坌集, 相與觀感程朱性理之學始興焉, 夢周延日人, 襲明之後也, 時,

 

經書至東方者惟朱子集註耳, 夢周講說發越, 超出人意, 聞者頗疑, 及得胡炳文四書通無不脗合, 諸儒尤加歎服, 李穡亟稱之, 曰 夢周論理, 橫說豎說無非當理, 推爲東方理學之祖, 九容 承澤之孫也,

 

  (3)乙卯廢主禑元年 <9권01_0365-2>

 

 明流 遼東行禮使 金九容于 大理衛, 道卒,

 

 先是, 本國 義州人至 遼東, 遼東指揮梅義紿之, 曰我於爾國事每盡心, 爾國何不致謝耶, 禑遂遣 九容爲 行禮使, 齎幣如 遼東, 遼東諸將以爲人臣, 義無私交, 何得乃爾, 執 九容送京師, 帝命流大 理衛行, 至 瀘州, 永寧縣病卒, 九容好學善詞章, 有惕若齋集行于世,

 

  32) 제 척약재학음 후(題惕若齋學吟後) (2004. 3. 14. 태서(익) 제공)

 

동문선 제102권  발(跋)

 

이색(李穡)

 

급암(及菴) 민(閔)선생의 시의 조어(造語)가 화평 담담하고, 용의(用意)가 정하고 깊었는데, 당시 익재(益齋) 선생과 우곡(愚谷) 선생이 죽헌(竹軒) 정승과 더불어 한 마을에 살고 있어 철동 삼암(鐵洞三菴)이라 불렀으나, 급암은 죽헌의 사위이다. 죽헌이 서거하고 급암이 또 그 집에 와서 사니, 삼암의 칭호가 끊이지 않아서 한 세상이 모두 종주로 높였다. 나는 뒤늦게 났으나, 다행히 평시에 모두 그 분들의 도덕의 광휘에 교접함을 얻어 한 평생 태산 북두같이 귀의하여 사모할 것으로 삼았으니, 다행한 중에 다행한 일이다. 익재 선생이 매양 탄미하여 말하기를, “급암의 시법(詩法)은 스스로 천연의 의치(意致)를 얻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졸옹(拙翁)언명보(彦明父)는 성질이 호방 활달하고, 사람들에게 허여함에 적었으나, 유독 급암만을 몹시 사랑하여 외출하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취침하면 침상을 마주하였으며, 집사람에게 있고 없는 것과 생산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으며, 또 같이 술을 즐기고, 또한 같이 즐겼다.” 하였다. 내가 급암의 문하에 왕래할 때는 급암의 나이가 이미 쇠하였으나, 부드럽고 한아한 군자여서 항상 후진(後進)을 끌어 들이기를 뒤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하루는 높은 행차로 누추한 내 집에 굽혀와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해가 진 뒤에 갔다. 나는 지금까지 감히 이를 잊지 못한다. 외손 김경지(金敬之)씨가 급암 선생의 집에서 생장하였고, 향학(向學)하게 되어서도 또 급암에게 배워 익재ㆍ우곡에게도 친히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다북쑥이 삼[痲]속에 나면 붙들어 매지 않아도 곧게 클 것은 사세의 필연한 바이고 더구나 타고난 자질이 정수하고 아름다워 제배(儕輩)들이 따를 수 없다. 이제 그 〈학음(學吟)〉을 보니, 더욱 그의 시법이 급암과 혹사함을 알겠다. 아, 시를 어찌 쉽게 말하며, 문장이라 이르랴, 학문이라 이르랴. 아, 시를 어찌 쉽게 말하리요.

 

 33) [古文산책] 척약재와 총욕약경  (2004. 12. 19. 발용(군) 제공)

 

출전 : [부산일보 2004-11-1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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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기 학자 가운데 김구용(金九容·1338~1384)이란 분이 있다.  이 분의 호가 '척약재(小易若齋)'다.

 

'척(小易)'은 '젓삽다'는 뜻으로서 매사에 '조심스럽고 삼가며 살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가 척약재로 자호하자 스승과 벗들이 한마디씩 해주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열 눈이 보고 있고 열 손이 가리키네. 전전긍긍 자신을 지탱하며 처음처럼 끝까지 삼가시게'(한복·韓復)  

'불경하지 말고 자신도 속이지 마오. 썩은 동아줄 잡은 듯 마른 가지를 잡은 듯 하게나'( 이달충·李達衷)

'범의 꼬리 밟은 듯 살얼음을 건너는 듯 오직 정밀하게 살펴라'(이색·李穡)

'마음 혹여 놓으면 실타래처럼 엉키리니 반드시 일삼아서 종일토록 애쓰오'(정도전·鄭道傳)

 '저 물도 밤낮을 쉬지 않고 넘실넘실 흐르는데, 그대 마음 흔들리면 혈맥은 막히리'(정몽주·鄭夢周)

 

한결같이 초심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항상 조심하라는 당부다. 뜻 밖에도 여기엔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등 당대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정치적, 경제적 개혁에 온몸을 던졌지만 오히려 외세에 붙어 연명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던 기득권의 강력한 저항으로 수세로 몰리고 있었다.

 

말 한 마디조차 억압의 빌미가 되었기에 이들은 늘 긴장 속에 살았다. 특히 일상은 더욱 주의해야 했다. 그래서 백문보(白文寶)는 김구용에게 ''척(小易)'자 는 마음 심(心)과 쉬울 이(易)로 되어 있다. 마음은 일상적인 데에서 소홀하기 십상(척약재설)이라며 일상에서 학업을 닦고 덕성을 수양하라고 충고했다. 일상에 대한 경계다.

 

나는 '척'자를 볼 때마다 '총욕약경(寵辱若驚)'(노자)이 생각난다 . 이것은 '남에게 총애를 받는 것과 모욕을 당하는 것은 모두 사람에게 죽음과 같다'는 뜻이다.

 

'경'은 말이 깜짝 놀라 아주 위태롭다는 뜻이다. 거의 죽음에 가깝다는 말이다. 모욕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존엄을 해치며 죽음으로 몰아 가기도 한다지만 총애는 좋은 것이 아니던가? 뜻밖에도 총애도 모욕처럼 사람의 존엄을 해친다. 이 관계에서 주인은 총애하는 사람이다. 그 총애를 받는 나는, 나의 주인에서 '남 '으로 변한다. 남이 되어버린 나! 여기에 총애의 비극이 있다.

 

우리는 총애를 받기 위하여 굽실거린다. 혹시라도 총애를 잃을까 안절부절 하다 끝내는 자존심도 팽개친 채 총애를 구걸하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 총애를 위해 나이도 잊은 채 무릎꿇고 굽실대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던가? 이처럼 자존(自尊)을 잃고 주인됨을 잃은 자는 생명력을 소실한 사자(死者)다.

 

나의 생명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념의 전도(顚倒)다.

 

척약재에게 당부하던 말들 또한 이런 사태를 우려한 충고는 아니었을까? 편안한 일상과 의심 없이 수긍하는 통념 속에서 나 자신은 어느새 남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젓사올 뿐인져!

 

34) 양촌 권근이 지은 문온공 배위에 대한 만사  (2005. 1. 12. 윤만(문) 제공)

 

여인의 죽음 앞에

                            권 근

 

꽃다운 나이에

부녀자의 도를 닦아

언제나 온 집안을

화목케 하였는데

슬프도다. 남편을

기다리던 중에

훌쩍 하늘 나라로

떠나고 마셨구려

높은 당엔 아직도

부친이 계시는데

곡하고 울어야할

아들 외려 없어서

이 한을 차마

말로 하기 어렵지만

들으면 누구라도

슬퍼하지 않으랴

 

<金中樞妻氏挽辭(김중추처씨만사)>

 

  이 시는 선배 척약재 김구용<?若齋 金九容(1338~1384)>의 부인이 세상을 뜨자, 이를 조문하기 위해 양촌 권근(陽村 權近(1352~1409)>이 지은 만가(挽歌)이다. 양촌이 스스로 붙인 주(注)에 의하면, 마침 이때 김구용은 명나라로 사신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출전 : 너도 내가 그립더냐(한국인의 1000년 사랑, 그 절절한 밀어들의 고갱이)/유영봉/늘푸른소나무》

 

35)문온공의 중국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2005. 1. 12. 주회(안) 제공)

 

■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1997, 성범중, 울산대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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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이 성절사인 정사 성원규(成元揆)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은 중국에서 명 태조가 즉위한 지 5년째인 1372년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약 1년이었다. 그의 문집에는 이 기간 중에 창작된 19題 22首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문집을 편찬한 둘째 아들 김명리가 밝힌 대로 여행길에 藁本(고본)을 잃어버리고 송경으로 돌아와서 추록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使行(사행) 중에 지었던 중요한 작품은 대개 재구되었을 것이므로 작품의 전반적 경향을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행의 과정과 구체적 내막은 명확히 밝힐 길이 없지만, 문집에 실린 작품들을 통해서 보면, 그는 평소에 앓던 소갈병(당뇨병) 때문에 중국에 가서도 매우 고생했던 것을 알 수 있고, 황제인 명 태조 주원장을 광록사(光錄寺)에서 배알하고 宣諭(선유)를 들었으며, 또 중국의 문사들과 만나 교유할 기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남경(南京)에서 자기보다 몇 달 전에 먼저 중국에 使行갔던 정몽주를 만났다. 정몽주는 1372년(공민왕21) 4월에 서장관으로 홍사범(洪師範)과 함께 명의 수도에 도착하였다가 8월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중(海中)에서 풍랑을 만났다. 배가 파선되어 홍사범은 익사하고 그는 다시 명의 수도로 되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김구용은 정몽주를 남경에서 만나 그 반가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고, 그와 함께 명승지를 관광하기도 했다. 특히 윤주(潤州 *현재의 중국 강소성 진강현) 감로사(甘露寺)의 다경루(多慶樓)에 올랐던 일은 후일 김구용이 죽은 후, 다시 중국에 갔던 정몽주가 이때의 일을 기억하는 작품을 남기게 하기도 했다.

 

●壬子九月。蘇州城下有感。/임자년 9월 소주성 아래에서 느낀 바 있어

*임자년은 1372년(공민왕 21)이다.

*소주(蘇州)는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중심 도시로서 옛날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가 싸웠던 곳이다.

*용만(龍巒)은 용문산(龍門山)을 가리킨다.

 

●夜泊楊子江 /밤에 양자강에 정박하다

*양자강(揚子江)은 장강(長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전체 길이는 5,400km이다.

 

●上汪丞相上 /왕승상께 올리다 2수

 

●禮部陶尙書 /예부의 도상서께 올리다

 

●賜宴 황제께서 /베푸는 잔치에 구호하다

 

●大倉病中。寄達可司成。/대창에서 병을 앓으면서 달가 사성에게 주다

 

*대창(大倉)은 성읍지에서 관에서 설치한 쌀을 저장하는 큰 창고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지명인 듯하다.

*달가(達可)는 포은 정몽주의 호이다. 정몽주는 김구용과 같이 사행을 떠난 것이 아니고 1372년(공민왕 21) 4월에 서장관으로 홍사범과 함께 명의 수도에 도착하였다가 8월의 회로에 해중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홍사범은 익사하고 그는 다시 명의 수도로 되돌아 간 적이 있다. 김구용이 정몽주를 만난 것은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贈譚友德秀才 /담우덕 수재에게 주다

 

●同達可送鄕僧悟上人歸金陵 /달가와 함께 금릉으로 돌아가는 향승 오상인을 보내며

*금릉(金陵)은 중국 강소성 남경(南京) 부근의 지명이다.

*장산(蔣山)은 중국 강소성 남경의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종산(鍾山)의 별명이다. 漢나라 말기에 장자문이 이 산 아래에서 도적에게 피살되자 오 대제가 그를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종산을 장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金陵街上 /금릉 시가에서

 

●癸丑四月。自大倉召至京師。賜宴光祿寺。奉天門下面聽宜兪。復用前韻。/계축년 4월 대창으로부터 경사로 불려 오니 광록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봉천문 아래에서 황제를 뵙고 선유를 들었다. 앞의 운자를 다시 써서 짓다. 2수

 

*계축년은 1373년(공민왕 22)이다.

*경사(京師)는 서울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명나라의 수도인 남경을 가리킨다.

*광록사(光錄寺)는 중국의 고대 관서로서 궁전 金門의 일을 담당하던 곳이다.

 

●潤州甘露寺多景樓次韻 /윤주의 감로사 다경루에서 차운하다 2수

*윤주(潤州)는 현재의 중국 강소성 진강현(鎭江縣)이다.

*감로사(甘露寺)는 중국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북고산(北固山) 후봉(後峯) 위에 있는 절이다. 삼국시대 동오 감로 원년(26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후 여러 차례 허물어짐과 건립됨이 계속되었다. 산꼭대기의 능운정(凌雲亭)을 강유위(康有爲)가 고쳐서 강산제일정(江山第一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 다경루는 감로사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김구용은 이때 정몽주와 함께 온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는 김구용이 죽은 후, 다시 이곳 가까이 와서 그를 추억하는 작품을 남겼다.

 

▶현재

 

*진강(鎭江, 전장) 인구 289만명

 

남경(南京, 난징)에서 딱 한 시간 거리인 진강은 식초 산지로 유명한데, 거리에서 그 향기가 떠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기차역 주변이 심하다. 진강의 최대 매력은 金山公園(진샨꿍위안)으로 이곳의 사찰들이 많은 신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구시가지는 大西路(따시루) 근처로 어슬렁거리기에 무척 재미있는 곳이다. 특히 길 서쪽 끝으로 가봐야 한다. 장강(창장)변에 새로 생긴 산책길도 역시 걷기 좋다.

 

*북고산 공원(北固山 公園, 베이구샨 꿍위안)

 

이 공원은 감로사(甘露寺, 간루쓰)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당나라 때 처음 세워진 철탑이 있다. 한때는 13m 높이를 자랑했지만, 화재, 번개, 문화대혁명 중에 광분했던 홍위병에 의해 수난을 당했다.

 

●金山寺 /금산사

 

*금산사(金山寺)는 중국 강소성 진강시 서북쪽 금산에 있는 절로 동진 때 처음 건립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택심사(澤心寺)이지만, 당나라 때부터 통칭 금산사라 했다. 송 천희 년간에 천자가 금산사에 몽유한 것으로 인해 용유사(龍遊寺)라 사명(賜名)했고, 청 강희제가 남쪽 지방을 순수할 때 강천선사(江天禪寺)라 사명했다. 왕안석의 유금산사(遊金山寺) 시가 유명하다.

 

▶현재

 

*금산공원(金山公園, 진샨꿍위안)

 

이 공원은 금산사(金山寺, 진샨쓰)를 통해 8각 7층탑인 자수탑(慈壽塔, 츠서우타)으로 올라가는 불자들의 행렬로 계단이 가득 찬다. 이 절의 이름은 공원 입구의 대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금덩어리로 변한 선종의 승려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산에는 네 개의 동굴이 있는데 이중에 <백사 이야기>라는 중국 동화에 나오는 불해(佛海, 포하이)와 백룡(白龍, 바이룽)이 그려진 곳이 있다. 2번 버스를 타고 끝까지 가면 금산(金山, 진샨)에 닿는다.

 

●龍江關有懷。用達可韻。/용강관에서 회포가 있어 달가의 운을 쓰다

*용강관(龍江關)은 중국 강소성 강녕성(江寧城) 의봉문(儀鳳門) 밖에 있는 관문(關門)이다. 김구용은 1372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남경에 갔을때 용강관(龍江關)을 들른 적이 있고 거기서 지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高郵州次達可韻 /고우주에서 달가의 시에 차운하다

*고우주(高郵州)는 중국 강소성 강도현(江都縣) 북쪽에 있는 고을이다.

 

●過沂州。贈施伯起判官。/기주를 지나며 시백기 판관에게 주다

*기주(沂州)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에 있던 고을이다.

 

●龍潭縣。示蘇至善。/용담현에서 소지선에게 보여 주다

 

●途中 /길을 가며

*요동(遼東)은 중국 진대의 군명으로 현재의 심양(瀋陽)의 동남쪽 지역이다. 요하(遼河)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요동이라 부르는데, 발해와 황해 사이에 돌출해 있다. 현재의 요동반도라 부른다.

 

●定遼衛。送伴行王奏差儀還金陵。/정료 위에서 동반하다가 의례에 따라 금릉으로 돌아가는 왕주강을 보내며

 

●蓋牟城。寄大倉朱秀才。曾以玉燈爲贈。/개모성에서 일찍이 옥등을 주었던 대창의 주수재에게 주다

*개모성(蓋牟城)은 옛 고구려의 성으로 요녕성(遼寧省) 개평현(蓋平縣)에 있었다.

*대창(大倉)은 성읍지에서 관에서 설치한 쌀을 저장하는 큰 창고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지명인 듯하다.

*요양(遼陽)은 중국 요녕성(遼寧省) 심양현(瀋陽縣) 서남쪽의 땅이다.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1997, 성범중, 울산대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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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이 행례사로 떠난 것은 1384년 1월 15일이었고 그가 병사한 것은 7월 11일이었다. 그가 남경으로 압송되어 가서 유배길을 떠난 것은 적어도 한 달쯤 뒤였을 것이기 때문에 운남 유배한시는 약 5개월에 걸친 기간 중에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문집에는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이 31題 45首가 실려 있다.

 

운남 유배한시는 중국의 元 明 교체기에 외교상의 문제가 야기됨으로써 명 태조에 의해 운남성의 대리위로 유배되던 김구용이 남경을 출발하여 사천성(四川省)의 노주(노州)에서 병사할 때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창작한 31題 45首의 한시를 가리킨다.

 

유배를 당하게 된 이유는 행례사로 요동에 갔던 김구용이 고려와 요동의 도지휘사 사이에 사사로이 교통하였다는 점과 그 자문에 ‘馬五十匹’을 ‘馬五千匹’로 잘못 적어서 명 태조가 ‘말 오천필’을 요구하였으나 그것을 조달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려 조정에서의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바탕에 깔려 있고, 친명파에 속하는 김구용에 대해 친원파였던 이인임 등이 명 태조의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결국 유배당하게 된 사정이 있었다.

 

●將。?江而上。寓懷錄呈給事中兩鎭撫三位官人。/장차 운남으로 가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회포를 담아 급사중과 2명의 진무 등 세 관인께 적어 드리다.

 

*운남(雲南)은 중국 서남 변경에 있는 성(省)으로 묘족, 태족, 라라족, 회족 등이 대다수이다. 성도(省都)는 곤명(昆明)이다.

 

*대리(大理)는 중국 운남 최초의 왕국이었던 ?국(?眞國)의 영토였고, 그 뒤를 이은 남조국과 대리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원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리로(大理路)를 설치했는데, 명나라에서는 路를 府로 고쳐 대리부로 삼았다.

 

●采石 /채석

채석(采石)은 중국 안휘성(安徽省) 당도현(當塗縣)에 있는 산으로 우저산(牛渚山)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鎭도 있었고, 또 이 산 아래 흐르는 강 가운데 돌출한 곳은 채석기(采石磯)라고 하는데 이곳은 송의 오윤문이 金의 군대를 대파한 곳이기도 하다. 이 채석기에는 여러 고적이 있는데, 그 중에는 태백루(太白樓, 일명 적선루, 태백사, 청련사)는 이백(李白)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채석강(采石江)은 중국 안휘성에 있는 강이다. 채석강은 당의 시인 이백이 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뛰어 들어 빠져 죽었다고 전해지는 강이다.

 

●觀音? /관음굴

 

●黃州 /황주

*황주(黃州)는 중국 호북성(湖北省) 황강고성(黃岡故城) 한주현(漢?縣)의 땅이다.

*제안성(齊安城)은 호북성 황강현(黃岡縣)의 서북에 우이치한 제안군(齊安郡)에 있다.

 

●武昌 /무창

*무창(武昌)은 중국 호북성에 있다.

*황학루(黃鶴樓)는 중국 호북성 무창현 황학기(黃鶴磯) 위에 있는 누대이다.

*대별산(大別山)은 중국 북령산계(北嶺山系)에 속하는 산맥의 이름이다.

 

▶현재

 

무한(武漢, 우한) ---군대 정찰탑으로 쓰였던 황학루(黃鶴樓, 황허러우 ☎8887 5179)는 무한(우한) 창장(장강) 대교의 남쪽 끝에 있으며 기억할만한 경계 표지 중의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진 51m 높이의 이 탑은 과거 이백과 같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도 강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때의 얘기다. 요즘 이 5층탑은 관광객에게 바가지 씌우는 명승지에 더 가깝다. 도시를 도는 64번 2층 버스가 탑 근처에 선다. 1,4,10번 버스를 타도 된다. 황학루(황허러우) 아래 우뤄루가 시작되는 곳에 쑨원 동상이 서 있는 작은 광장이 있다. 이 동상 뒤에는 식민지 시대 빨간 벽돌 건물인 우창기의기념관(辛亥革命武昌起義紀念館, 신하이거밍 우창 치이 지니엔관)이 있다. 우창 기의는 1911년 10월 10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청 왕조가 문을 내렸다. 쑨원은 당시 중국에 있지도 않았지만,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중국에 돌아왔다. 우뤄루 동쪽으로 나가면 멋진 명나라식 건축물인 장춘관(長春觀, 창춘관 ☎8280 1399) 이 있다. 이 도교 사원은 한나라 때 지어진 이후 당, 송 시대에 여러 번 재건축되었다. 정원 가운데에는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의 동상이 아주 사려깊은 모습으로 서 있다.

 

●岳陽樓 /악양루

*악양루(岳陽樓)는 중국 호남성(湖南省) 북부 동정호(洞庭湖) 동안(東岸)에 위치한 악양성(岳陽城)의 서문 위에 있는 누각이다.

*동정호(洞庭湖)는 중국 호남성 북부에 위치한 거대한 담수호이다. 三方이 산지로 둘려 있고, 북쪽은 양자강을 거쳐 호강평야에 이른다. 절강, 자수, 원강, 예수 등의 여러 강이 흘러든다. 겨울과 봄에는 물이 적어지고, 여름과 겨울에는 물이 불어난다.

 

▶현재

 

*악양(岳陽, 웨양) 인구 510만

 

웨양은 충칭과 우한 사이를 흐르는 창강의 페리호들이 모이는 항구이다. 우한-광저우 철도노선이 이 작은 도시를 지나므로 광저우로 가는 길이라면 배를 타고 우한까지 가는 대신 여기에 내릴 수 있다.

 

웨양은 강으로 이어지는 둥팅호수(洞庭湖)의 북동쪽 가, 창강의 남쪽에 있다. 웨양은 중국에서 2번째로 넓은 민물 호수인 둥팅후(洞庭湖)와 맞닿아 있다. 호수 안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인전차銀針茶(은바늘차)’ 가 자라는 군산도(君山島, 쥔산다오)이다. 인전차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찻잎이 바늘처럼 가늘게 표면에 뜨면서 독특한 향내를 풍긴다.

 

*웨양탑(岳陽樓, 웨양러우)는 도시의 주된 건축물로 당나라 때 처음 지어진 후 몇 번의 개조를 거친 사원이다. 탑 안에는 금으로 만든 사원의 복제 건물이 있다. 탑이 있는 공원은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인데, 일본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 탑이 나오는 유명한 시를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장료 가격이 무색하게 별 볼거리가 없다.

 

●感懷 /감회

*도화관(桃花關)은 중국 강소성 오현성(吳縣城) 내에 있는 도화오(桃花塢)에 있다.

 

●悼亡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운남(雲南)은 중국 서남 변경에 있는 성(省)으로 묘족, 태족, 라라족, 회족 등이 대다수이다. 성도(省都)는 공명(昆明)이다.

 

●新月 /초생달

 

●贈石首縣尹 /석수 현윤에게 주다

*석수(石首)는 중국 호북성 공안현(公安縣)의 동남쪽에 있던 縣 이름이다.

 

●端午 /단오

*율라수(?羅水, ?멱라수)는 중국 호남성에 있는 강으로 율수(?멱수)와 나수가 합쳐진 것이다. [이소(離騷)]를 지은 楚의 굴원(屈原 B.C. 약 343-290)이 투신 자살한 곳이다.

 

●荊州 /형주

*형주(荊州)는 우공(禹貢 9州의 하나로 현재의 중국 호남, 호북, 광서, 귀주 지역이다.

*강릉(江陵)은 중국 호북성 강릉현(江陵縣)을 가리킨다.

*운남(雲南)은 중국 서남 변경에 있는 성(省)으로 묘족, 태족, 라라족, 회족 등이 대다수이다. 성도(省都)는 공명(昆明)이다.

*동정호(洞庭湖)는 중국 호남성 북부에 위치한 거대한 담수호이다. 三方이 산지로 둘려 있고, 북쪽은 양자강을 거쳐 호강평야에 이른다. 절강, 자수, 원강, 예수 등의 여러 강이 흘러든다. 겨울과 봄에는 물이 적어지고, 여름과 겨울에는 물이 불어난다.

*파릉(巴陵)은 중국 호남성 악양현(岳陽縣)의 옛 이름이다.

 

●曳船 /배를 끌며

*사천(四川)은 중국 촉(蜀)의 지역 즉 사천성(四川省)을 가리킨다.

*용관(龍關)은 용강관(龍江關)을 가리키는 듯하다. 김구용은 1372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남경에 갔을때 용강관(龍江關)을 들른 적이 있고 거기서 지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용강관은 중국 강소성 강녕성(江寧城) 의봉문(儀鳳門) 밖에 있었다.

 

●江水 /강물

*양자강(揚子江)은 장강(長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전체 길이는 5,400km이다.

*무산(巫山)은 중국 사천성 ?기주부 무산현(巫山縣)의 동쪽에 있다.

 

●贈李仲正 /이중정에게 주다

 

●潘家谿驛 /반가계역 2수

 

●蟬 /매미

 

●帆急 /돛단배가 빨라서

 

●夜 /밤

*양자강(揚子江)은 장강(長江)이라고도 하는데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전체 길이는 5,400km이다.

 

●十二壁 /십이벽

 

●峽州 /협주

*협주(峽州)는 중국 호북성 의창현(宜昌縣)에 있던 고을 이름이다.

*이릉(夷陵)은 중국 호북성 의창현으로 漢代에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楚 先王의 묘가 있다.

 

▶현재

 

*의창(宜昌, 이창) 인구 399만

 

유명한 삼협 바로 아래에 있는 이창(의창)은 창장(장강) 상류로 이어지는 관문이며 수나라 때까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1877년 영국과 맺은 조약으로 이 도시는 문호를 개방했으며 구시가지의 남동쪽 강변을 따라 조계지가 조성되었다. 오늘날 이창(의창)은 40km 상류로 올라간 삼두평(三斗坪, 산더우핑)에 세워진 삼협 수력 발전소의 관문으로 유명하다.

 

*삼협댐

 

2009년 완공 예정인 이 댐은 댐을 구경해보고 싶은 관광객이나 거대한 바위를 부수는 진기한 광경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 가볼만 하다.

 

●野草 /들 풀

 

●遣興 /심심풀이

 

●河伯 /하백

 

●入峽 /골짜기에 들어가며

*파산(巴山)은 중국 호북성에 있다.

 

●黃陵廟 /황릉묘

*황릉묘(黃陵廟)는 중국 호북성 의창현의 서쪽 황우협(黃牛峽)에 있는 사당으로, 삼국시대에 촉(蜀)에서 세웠는데 거기에는 神龜와 金蓮花가 있고, 제갈량이 쓴 <황릉묘기(黃陵廟記)>가 있다고 한다.

 

●大峽灘 /대협탄

 

●遣興 /심심풀이

 

●馬峽 /마협

*삼협(三峽)은 중국 촉 땅의 세 협곡으로 무협 구당협 서릉협을 가리킨다.

*파촉(巴蜀)은 중국 사천 지방의 별칭으로 파(巴)는 지금의 사천성 중경(重慶) 지방이고, 촉(蜀)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지방이다.

 

●峽行 /골짜기를 가며

 

●望歸州城 /귀주성을 바라보며

*귀주(歸州)는 중국 호북성 ?귀현(?歸縣)의 옛 이름이다

 

[월드리포트] 삼협댐 저수… 중국 문화재 구출 대작전

수몰되는 유적 1180곳 … 전문가 1200명·1억2000만弗 투입

張飛사당은 32㎞서쪽으로 옮겨 …白帝城은 보강공사 거쳐 섬으로

김기철기자 kichul@chosun.com  

입력 : 2003.05.13 19:49 53' / 수정 : 2003.05.14 03:19 44'

 

▲ 당나라 때부터 문인들이 남긴 시문 등 3만자의 글씨가 새겨진 바이허량. 삼협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중국 정부가 1700만달러를 들여 수중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삼협댐은 높이 181m에 총 저수량만 393억㎥이다. 1994년 착공됐다. 이 공사로 댐이 있는 후베이성(湖北省) 싼더우핑(三斗坪)에서 쓰촨성 충칭(重慶)까지 길이 662㎞의 거대 호수가 탄생한다. 13개 도시와 150여개 마을을 포함, 632㎢의 육지가 물에 잠긴다.

 

『수몰 위기의 문화재를 구출하라!』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양쯔강 삼협(三峽)댐이 6월 1일 물채우기(저수·貯水)에 들어가는 것을 앞두고, 수몰 위기에 놓인 문화 유적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특파원을 보내 긴급 점검에 들어갔고,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문주간지 ‘파이스턴 이코너믹 리뷰’도 지난달 현지르포를 내보냈다. 저수는 6월 중순쯤이면 수위(해발)가 135m에 이르고 댐이 완성되는 2009년 이후에는 여름에 145m, 겨울에 175m를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댐 본체가 있는 후베이성(湖北省) 싼더우핑(三斗坪)에서 충칭(重慶)까지 길이 662㎞짜리 거대 호수가 탄생하면서 632㎢의 육지가 매몰된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삼협댐 건설의 영향을 받는 문화재는 약 1180건. 이 중 지상건축물 246건은 문화 가치에 따라 이전되거나 현지보존, 폐기처분된다. 삼협댐이 착공된 1994년부터 문화재 전문가 1200여명을 투입한 중국 정부는 유적 보호를 위해 1억2000만달러의 예산을 배정했고, 「수중박물관」건설까지 내놓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의 무대로 유명한 양쯔강 중상류에는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유적이 수두룩하다. 양쯔강의 수호신으로 숭배받는 장페이먀오(張飛廟)와 촉의 유비(劉備)가 죽으면서 제갈공명에게 후사를 부탁했다는 바이디청(白帝城)이 대표적이다. 송나라 때 세워진 장페이먀오는 원래 자리에서 32㎞ 서쪽으로 옮겨졌고, 바이디청은 현재 위치에 보존돼 수위가 높아진 양쯔강 속의 외딴 섬처럼 남게 된다. 양쯔강의 격류를 견디기 위해 바이디청 안에 구멍을 뚫어 콘크리트를 주입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돌산 위에 건립된 높이 56m의 목조건축인 스바오짜이(石寶寨)도 양쯔강 수위가 175m에 달하면 정문이 절반 가까이 물에 잠기기 때문에 성 주위에 제방을 만드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1700년의 역사를 가진 따창꾸쩐(大昌古鎭)도 5㎞ 떨어진 고지대로 옮겨졌다.

 

유적 보호를 위해 「수중박물관」까지 건립된다. 바이허량(白鶴梁)은 당나라 때부터 문인들의 시문과 글씨 등 약 3만자를 강 바닥의 돌에 새긴 유적. 그동안에도 갈수기인 겨울에만 관람이 가능했다. 강 바닥에 완전히

 

잠기게 될 바이허량을 보호하기 위해 나온 방안이 수중박물관이다. 신화사는 지난 2월 중국 정부가 1700만달러의 예산을 들여 수중박물관을 착공, 2005년 완공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길이 1.6㎞, 폭 15m인 바이허량의 중심부를 거대한 철근콘크리트 용기로 둘러싸고, 수중터널을 만들어 참관하게 한다는 것. 충칭에는 내년 말 개관 목표로 삼협의 문화재 약 30만점을 전시할 삼협 박물관이 건설되고 있다. 공사비는 약 1000억원으로 면적은 4만㎡ 정도다.

 

수몰 예정 지역에 대한 현장 조사가 집중되면서 발굴 소식도 잇따르고 있다. 2002년 11월에는 쓰촨성 동부의 쭝(忠)현에서 중국 5000년 역사 유물이 시대별로 모두 포함돼 「지하의 중국통사」란 별명까지 얻은 유적이 발굴됐다. 여기서는 신석기시대, 하(夏), 상(商), 주(周)부터 청(淸)대까지 각 시대의 유물이 대량 출토됐다. 삼협댐의 문화재 구출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긴급한 발굴이 필요한 유적 면적은 1만3000㎢. 작년 말까지 6000㎢를 조사했을 뿐이다. 도굴꾼과도 경쟁해야 한다. 스촨성 펑제(奉節)현의 상관(上關)유적에선 100㎡마다 도굴 구멍이 평균 7개, 많게는 20개까지 보인다는 것. 아사히신문은 『50년 이상 걸릴 발굴 작업을 10년 만에 끝내는 것은 문제다. 부담이 크다』는 왕촨핑(王川平) 충칭시 문물국(文物局) 부국장의 얘기를 전했다.

 

삼협댐은?

 

삼협댐은 높이 181m에 총저수량만 393억㎥이다. 1994년 착공됐다. 연간 발전량은 847억㎾로 세계 최대 규모. 댐 건설로 양자강 중하류 지역의 홍수방지와 무한, 상해, 광동성에의 전력 공급, 수위 상승에 따른 수송력 강화 등의 효과를 기대하지만, 환경 오염, 문화재 파괴를 이유로 반대도 거셌다. 삼협댐 공사로 13개 도시와 1500여개 마을이 물에 잠기고, 이주대상 주민만 113만명에 달한다

 

삼협댐(Three Gorges Dam) 개요

 

삼협댐은 湖北省 宜昌縣 三斗坪鎭에 건설되고 있다. 거대한 중국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강은 중국의 가장 큰 강이다. 그 길이가 6,300㎞에 달하고, 유역의 면적이 180만㎢로 중국 육지총면적의 19%를 차지하고 있다. 전 인구의 1/3을 양육하는 젖줄이며, 전국 수자원의 1/3을 생산해내고 있다. 수력자원은 전국의 53%를 개발하고, 내륙 선박항 운물량은 전국의 70%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강 유역의 빈번한 수 해는 장강 중·하류는 물론 중국 전체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있다. 역사상으로 볼 때 10년 주기로 발생한 매차례의 크고 작은 홍수재해는 중·하류지역 주민의 생 명과 재산에 큰 손실을 가져왔고 중국 경 제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장강 유역의 홍수 피해에 대해서 중국 정부에 서는 많은 해결 방안을 강구해 왔다. 그 중에서 삼협댐 건설은 그 직·간접적인 효과를 놓고 볼 때 최선의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금세기 최대의 수자원 사업인 삼협댐이 지난 1993년 12월 14일 건설공사가 정식으로 착수함으로서 건설 공사에 또 하나의 금자탑을 쌓아나가고 있다. 중국 양자강 상류 중경에서 600km 하류 협곡인 삼협(三峽)에 건설중인 본 댐은 착공되기까지 수많은 검토가 있었고 그때마다 많은 난관에 봉착하여 처음 거론된 이후 실로 75년만에 공사를 착수한 것이다.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업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양자강(長江, Yangtze or Long River)의 삼협댐(三峽, Sanxai or Three Gorges Dam) 건설공사는 길이 2300M, 높이 185M, 총 공사비용이 730억 달러이며, 공사기간만도 17년(1993-2009년)이나 소요되는 단일댐 공사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국내 댐 중 최장길이를 갖는 남강댐(99년 11월 준공, 1198M)과 최고높이인 소양강댐(123M) 등과 비교시 홍수조절능력은 약 45배(삼협댐 222억㎥, 소양강댐 5억㎥)에 이른다.

 

◈ 삼협이란?

 

양자강 한 가운데 토막 2백㎞ 협곡을 삼협이라 한다. 구당협-무협-서능협 등 세협곡으로 되어있다 해서 삼협이라는 것이 정설이나 이설도 많다. 삼협에는 원숭이 후손인 야인이 나고 굴원 같은 의인이 났으며 왕소군 같은 미인이 났다 하여 삼협이라는 설도 있다. 촉, 위, 오나라가 이 곳에서 서로 국경을 마주한 삼국지의 무대라 해서 삼협이란 말을 얻었다는 설도 있EK.

 

36)  世係行事要略 (2005. 2. 1.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先君?若齋世係行事要略[金明理]

 

先君姓金氏。諱九容。字敬之。古諱齊閔。號?若齋。所居堂曰六友。安東人也。父諱昻。重大匡上洛君。祖諱承澤。直亮同德佐理功臣,三重大匡都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致仕。贈諡良簡公。曾祖諱?(선)。元忠端力安社保定功臣,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上將軍。高祖諱方慶。宣授中奉大夫,管高麗軍征東都元帥,推忠靖亂定遠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左贊,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諡忠烈公。母輸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上護軍,諡文溫公及菴閔思平之女也。娶通直郞禮儀正郞南陽洪義元之女。生三男。曰明善。曰明理。曰明允焉。至元戊寅十二月辛卯。先君生。至正十三年癸巳。年十六。宋天奉監試。中擧子科新進士等。詣闕肅拜。上親試賦牧丹詩。先君居其首。上奇之。賜職散員。十五年乙未安乙起榜。登科拜德寧府注簿。歲癸卯。拜正言。移獻納。洪武元年戊申。拜典校副令。歲辛亥。拜民部議郞兼成均直講。秋。承命爲江陵道按廉使。五年壬子。遷摠部議郞。秋八月聖節日。使書狀官入朝。冬又拜典校令。癸丑秋七月。還國。八年乙卯。拜三司左尹。七月。以言事竄于竹州。移母鄕驪興郡。閑居七年。以樂江山雪月風花之興。乃六友堂者自此始也。歲辛酉。國家尙其風義。召拜左司議大夫。壬戌春。拜成均大司成。移判典校寺事。十七年甲子正月十五日。奉使行禮遼東都指揮司事。以本國遲緩獻馬事流于大理衛。行至西川南境瀘州永寧縣江門站。七月十一日。以病卒于旅次。年四十七歲。先君生長于外祖及菴文溫公家。早知好學。旣長。遊於士林。聲價聞于中外。交遊如圃隱鄭達可,陶隱李子安,三峯鄭宗之,浩亭河大臨。相與講論切磋而友善尤篤焉。先君所著詩與文不爲不多矣。先兄未嘗侍側。予亦幼弱。故未能盡記之。今此刊行若干詩。乃手書遺稿及得於他人所傳誦者也。夫子之於親。疾病則奉藥以盡其誠。屬?則斂殯以盡其哀。尙未嘗頃刻而忘于懷。?余時方幼稚。未能從于行。而先君捐生於異域萬里之外。卒不聞啓足之言。但日把遺稿。讀之三復。聲氣宛若。手澤尙新。嗚呼痛哉。追慕愈深。每念刊行。涕泗交?已有年矣。於洪武戊寅秋。來?晉陽。適觀察趙公璞用吾家所藏詩通?。?余命工?梓。賴其餘力。刊此遺稿。且先君世係與夫行事之迹。爲子孫者不可不和也。故倂記于卷端。建文二年庚辰十二月旣望。男通善郞晉陽大都護府判官兼勸農兵馬團練判官明理。謹誌。

 

형태서지

 

권수제 ?若齋先生學吟集(原集)  판심제 ?若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400年刊   권책 2권 1책   행자의 수 12행 17자   반곽의 크기 18.8×14.1(㎝)   어미 上下下向黑魚尾   소장처 趙誠穆   도서번호 보물 1004호   총간집수  

 

권수제 ?若齋遺稿外集(外集)  판심제 ?若齋集   간종 활자본   간행년도 1884年刊   권책 2권 1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0.6×14.8(㎝)   어미 上白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도서번호 한45―가―20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

 

저자

 

성명 김구용(金九容)    생년 1338년(고려 충숙왕 복위 7)    몰년 1384년(우왕 10)    자 敬之    호 ?若齋    본관 安東    초명 齊閔

 

 37) 척약재 상소문 (2005. 3. 4. 영환(문) 제공)

   출전 : <貞齋逸稿> (박의중저)

貞齋先生逸穡卷之二      附錄  

   척若齋金九容上疏        

 

    伏以臣至愚極陋。才學掃如。病伏田里。恒人不齒。不意誤恩承召。來往道路。觀者譏笑多矣。爲臣之計。豈不知量力揆分。甘心邱壑。杜門事親。養?種黍。優游此生。忘世肆志之爲便。而貪戀寵榮。已去復來。不但人笑之。臣亦自笑之。惟是聖君一念。根於秉?。銷?不得。遲回輦下。不忍遽歸者。亦何心哉。天恩罔極。圖報無路。苟有一毫裨益吾君。則 摩頂放踵。亦且不辭。目見時事。已至於不可爲之地。痛心?懷。私自出涕。此而不言。臣實有罪。嗚呼。殿下之國。危哉危哉。滿江風雨。漏船載溺。而副手梢工。誰勝其任。思之慓慓。見之慘慘。不言則心塞。欲言則言長也。門下侍中鄭夢周,藝文提學朴宜中,翰林李穡。精忠節義。道德事業。求之前代。復有幾人。雖在千載之上。亦可尊而敬之。愛而慕之。精神會之。夢寐求之。懦可立。頑可起。貪可廉。足以爲百世之師。而雖謂之昭乎日月不足以爲明。萃乎泰山不足以爲高。不爲過語矣。退在田野。淸名懿聲。藏佩一身。士林仰如北斗。天下問其死生。如此而生。如此而死。其誰敢侮之。其誰敢辱之。殿下尊之敬之。致之以誠。仰之以禮。?而後至。則此豈貧戀官爵。亦豈喜敗國事者哉。以爲當今可言者非一。而惟是天官進退人材擧措。實關治道之大。故見其行私。一言斥之。實三臣愛君忠國之心。所以不能自已者也。河時萬,卞貞基,馬仁國。何人也。譏之斥之。侮之辱之。悖理?性。至於如此。臣未知其心之所在也。至於前博士金得榮。一回邪人也。權勢在倖門。則甘爲門客。多結子弟。而惟所欲之。 辭曰無他謫議。未免因循者。一字一句。無非抑揚。陰附銓官。顯斥大臣。臣切痛之。且時萬之輩。爲自欺其心。又欺其君。則侵侮大臣。使不安於朝者。亦非細事也。小人之惡。莫甚於欺其心。臣子之罪。莫大於欺其君。今日之禍。莫甚於護其黨。殿下何不痛絶之。明示好惡之正。而必待於前門下侍中鄭夢周,藝文提學朴宜中,翰林李穡忠諫之疏。而只罷馬仁國。又不加罪於河時萬乎。是故。數人暗窺殿下之淺深。又爲之張皇辭說。隱然有譏斥大臣之志。臣實愍之。嗚呼。殿下之國危哉。天下之名儒。被人譏侮。攻斥。至於如此。而朝廷大臣。視之尋常。則其他亦復何說。臣恐有志識之士。恐入山林之深而不肯來矣。來者亦望望去之矣。此三臣。天下之名儒。士林之領袖也。況明主之千載一時。三臣之退。人心所在也。正陰陽交爭。風雨方晦之日。而皆思退歸。不念國家。則奈聖恩何。奈社稷宗廟何。不敢不盡其學問淺深。而杜門講學。消遣世念。若將終身。至被先朝累召之勤。而不敢一出者。豈是忘君父樂違慢哉。夫子使漆雕開仕。曰。吾斯之未能信。三臣蓋有所受也。頃者首被新命。眷意甚惻。國有大?。不敢不來。及拜淸宦。累辭不獲。則出謝之後。卽請入對者。亦豈欲納師友之私疑。敍平生之堅誓者哉。殿下悔悟。深自咎責。至遣承旨。勉留慇懃。待士之禮。?出百王。所以風動四方。感激人心。而謗誣此臣之言。從而出矣。然殿下待時日復光。不以常規。而此臣之自處。不稱其禮。則反爲殿下之羞矣。一出城門。則終於退歸而已。若復貪慕殊眷欲去不去。着已掛之冠。帶已致之職。入已出之門。偃然行號唱於道路。則人復謂之何哉。廉恥禮節。關係世道。此臣雖欲自輕。奈朝廷何。古人之言曰。將軍有揖客。顧不重歟。殿下之待士。愈卑愈盛。此臣之自處。愈高愈懿。世間無大耳目。故以爲創見而異之。又有不樂士流者。從而和之。譏議嘲罵。溢世盈耳。使殿下之禮意。不勝權輿。而士林之?望。至於落 。臣切歎之。三臣歸臥林泉。怡養自適。樂與村秀才尋行數墨。等功名於浮雲。終吾生而??。亦不負天界矣。惟是殿下旣失此老於山林之後。又不致士千里之外。則臣恐國家之事。稅駕無所也。殿下何不特下召旨。曲盡誠意。期於必致而後已乎。臣於公退之暇。見其動靜。則前後進退。節次曲折。大?言之。至於流涕曰。聖眷如許而終乃退歸。潔身亂倫。非爲自使計也。低回復留。恐爲朋黨之禍將及己也。已曉其心之所在矣。嗚呼。聖賢之學。帝王之治。固殿下今日急務。而臣不暇進其一言。而乃敢汲汲於此者。三臣之朝夕講求。乃可以進學功明治道。故甘受一時之謗。冒瀆哀?之中。而冀殿下授以相當之職。勿輕許遞。詢以當爲之事。而必務聽從焉。臣之前後所進儀禮二冊儀註甚詳。其中朝?祭及群臣喪服等三事。最不可闕者。竟不見施。識者恨之。欲聖殿下更議大臣。斷然行之。第無少憾於大事焉。竊謂三事。實是大節目。而殿下猶此不行。則聖賢之學。帝王之治。雖日進其說而恐無補於受用之地。此臣所以感於中而達於上也。伏願殿下加察焉。

 

 38)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2005. 3. 7. 발용(군) 제공)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9와 『동문선(東文選)』 권128에 실려 있으며, 1379년(우왕 5)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민씨(閔氏 : 1324~1379)는 김묘(金昴)의 처이다.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에 봉해졌다. 증조부는 종유(宗儒), 조부는 적(?), 아버지는 사평(思平)이다. 외조(外祖)는 김윤(金倫)이다.

 

아들이 3명으로, 장남은 구용(九容), 차남은 제안(齊顔), 구덕(九德)이다. 딸은 9명이다. 각각 김사안(金士安), 이창로(李彰路), 최유경(崔有慶), 허호(許顥), 허의(許誼), 이존사(李存斯), 김첨(金瞻)에게 출가했다. 나머지 둘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참고로 민씨의 증조부 종유(宗儒), 조부 적(?), 아버지 사평(思平) 및 처 김씨의 묘지명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379년(우왕5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색(李穡) / 미상 / 미상

 

<判讀文>

 

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吾友金九容氏以今年閏五月甲辰葬其母驪興郡夫人閔氏于祖母金氏之塋直其西十數步旣而走其子?軍事明善求銘予義不辭按其狀輪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諡文溫及菴先生諱思平其考也匡靖大夫密直司使諡文順諱迪其大父也僉議贊成事諡忠順諱宗儒其曾大父也都僉議政丞諡貞烈竹軒金公諱倫其外祖也內外赫然一國所慕而夫人生於其問習熟見聞凡所當爲壹是皆以母則爲本事父母甚孝朝昏定省不以疾病廢宗族稱之辛丑冬避賊南遷奉母以行母安焉如在室中其後居驪興十有餘年事之益勤母旣歿矣夫人之子壻每請還京夫人涕泣曰吾母葬於斯吾去矣拜掃闕矣吾何忍焉吾何忍焉五月癸巳以病歿年五十六九容氏又曰吾父淸德畏人之知喜於晦養母今亡焉嗚呼奈何穡曰賢哉金母也文溫公雖無子有是女以生九容氏宅相成遷史傳可不謂賢哉男三人長九容前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脩官次齊顔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校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次九德前左右衛保勝散員女九人適密直副使金士安前開城尹李彰路前宗簿令崔有慶前郞將許顥前副令許誼兼博士李存斯門下注書金瞻次未適其銘曰物歸其根其生不窮驪興閔氏葬于其中江之??曷其有終與之俱長永嘉之風

 

 〔출전:『牧隱文藁』권19〕  

 

<해독문>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 5, 1379) 윤5월 갑진(甲辰)일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의 묘역에 장사하였다. 거리가 서로 십 수보였다. 그리고 아들 참군사(參軍事) 명선(明善)을 보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都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시호가 문온(文溫))인 급암(及菴)선생 사평(思平)이 부인의 아버지이다.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使)로 시호가 문순(文順)인 적(?)이 부인의 할아버지이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호가 충순(忠順)인 종유(宗儒)는 부인의 증조부이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인 죽헌(竹軒) 김윤(金倫)은 부인의 외조(外祖)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인은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나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였다. 마땅히 할 일에는 한결같이 어머니의 규범을 근본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병이 들었어도 놓치지 않았다. 친척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길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10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못할 것인데, 내 어찌 차마 떠날고.”하였다.

 

5월 계사(癸巳)일 병으로 별세하셨다. 나이 56세였다. 구용(九容)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시며 어두운데서 기르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할꼬.”하였다. 색(穡 : 묘지명 찬자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구용)의 어머니여, 문온공(민사평)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외조카(宅相)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완성했으니, 가히 어질다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아들이 3인이다. 장남 구용(九容)은 전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前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 充春秋館編修官)이다. 다음 제안(齊顔)은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 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 中書兵部郎中 兼 僉署 河南江北等處 行樞密院事 奉善大夫 典校副令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그 다음은 구덕(九德)으로 전좌우위 보승산원(前左右衛 保勝散員)이다. 딸이 9인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부령(前副令) 허의(許誼),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각각 출가했다.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물건이 뿌리로 돌아갔으니 그 삶은 무궁하도다.

여흥민씨를 그 가운데 장사하니, 강물은 흘러흘러 어찌 쉴 때가 있으리요.

그와 함께 길지어다. 영가(永嘉)의 풍(風)이요.

 

39)  윤지표(문온공 처조부) 묘지명 (2005. 6. 3. 영환(문) 제공)

 

출전 :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해평군 시충간 윤공 묘지명 병서 (海平君諡忠簡尹公墓誌銘 幷序 )  

 

 선산(善山)의 속현 해평(海平)의 명망 있는 대족(大族)은 윤(尹)씨이다. 휘(諱)가 군정(君正)인 분은 고왕(高王)과 원왕(元王)을 내리 섬겨,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에 이르렀고, 휘 만비(萬庇)는 충렬왕을 섬겨 기사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최종 벼슬이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상호군이었다. 휘 석(碩)은 정승공(政丞公)으로 전에 원 나라의 사자가 왔는데, 정승공이 당시 별장으로 있으면서 잔인(盞人 술잔을 전하는 사람)으로 임금

 

앞에 모시고 섰더니, 사자는 두 왕자(王子)가 원 나라 조정에 입시하라는 천자의 교지를 전하였다. 정승이 이를 듣고 홀로 ꡐ나는 마땅히 아우를 따르리라.ꡑ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고하였더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ꡒ너의 계책은 잘못인 것 같다. 왕자를 쫓는다는 것은 뒷날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형이 있는데 아우가 나라를 소유하는 법이 있느냐.ꡓ 하였다. 공은 다시 고하기를, ꡒ저도 그런 줄은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우를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  기나그 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계책을 결정한 까닭입니다.

 

ꡓ 하니, 아버지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형은 원자

 

(元子)로 일찍이 사망하였고 아우는 바로 충숙왕(忠肅王)인 것이다. 공이 왕자를 따라 원 나라 서울에 가니, 요좌(僚佐)로서 공보다 높은 자가 없었고, 그 뒤에 벼슬이 도첨의 우정승 판전리사사(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에 이르러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고, 자급은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충근절의 동덕찬화 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의 호를 하사받아 또한 공보다 나은 자가 없었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일로 어찌 천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천자가 공의 이름을 듣고서 특별히 진국상장군 고려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都元帥)를 제수하여 특별히 총애하였다. 해평부원군이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 이백년(李百年)의 딸과 결혼하여, 지대(至大) 경술년 4월 계해일에 공을 낳았다. 연우(延祐) 경신년에 공의 나이 11세로 태운사 진전직(泰雲寺眞殿直)에 보직되고, 15세에 사설직장(司設直長)에 보직되었으며, 16세에 낭장에 제수되고, 19세에 호군에 임명되니, 영릉(永陵 충혜왕)을 따라 원 나라에 있던 다음해였다. 이때 진저(晉邸)주D-001가 죽고 문종(文宗)이 강남으로부터 먼저 궁에 들어와서, 지위를 정하고서 명종(明宗)을 북방으로부터 맞아들이는데, 문종이 교외로 나아가서 위로할 때에 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가 독약 넣은 술을 바쳐 명종이 한밤중에 붕(崩)하니, 육군(六軍)이 소란하였다. 공이 재상 조익청(曹益淸)이군해(李君?) 등 관원 등과 더불어 충혜왕을 도우니, 임금이 이에 의지하여 두려워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신의 철권(鐵卷)을 하사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에 대호군에 오르니 공의 나이 21세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승진되고, 명릉(明陵 충목왕)이 즉위하던 5월에 상호군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다. 다음해 4월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기니, 왕 정승(王政丞)이 조정의 권한을 잡고 옛법을 써서 문관의 선임은 전리(典理)로 돌려보내고, 무관의 선임은 군부로 돌려보내니, 공이 정승을 보좌함에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다음해 평양윤(平壤尹)으로 나갔는데, 공이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을 시험한 것으로, 겨우 1년 만에 치적을 이루어 다시 지밀직(知密直)으로 부르니, 이때 공의 나이 38세였다. 현릉(玄陵) 5년에 두 번 지밀직사사가 되었고, 그해 겨울에 표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갔는데, 이는 원 나라에서 의복을 하사한 사은(謝恩)의 사절이었다.

 

18년에 세 번 지밀직사사를 역임하였고, 홍무(洪武) 경술년에 밀직사에 승진되고, 다음해 지문하성사 상의회의 도감사(知門下省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으며, 또 다음해에 평리(評理)로 승진하고, 겨울에는 중대광 해평군(重大匡海平君)에 봉하였다. 염곡성(廉曲城) 윤칠원(尹漆原) 등 여러 기로(耆老)들과 결사(結社)하여, 조용히 논 지 10여 년, 임술 9월에 병을 얻어 10월 9일에 단정하게 앉아서 서거하니, 공의 나이 73세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남과 간격이 없었으며, 몽고어(蒙古語)에 대략 통하였고, 공의 행동도 북방사람과 흡사하였다. 정사에 있어서는 대체를 따르려고 힘쓰고, 너무 각박하지 않은 장자(長者)였다. 공이 무릇 두 번 장가갔으니,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조(趙)씨는 대광첨의찬성사 상의보문각대제학시 문극공(大匡僉議贊成事商議寶文閣大提學諡文克公) 연수(延壽)의 딸이요, 이(李)씨는 대광 월성군(大匡月城郡) 휘 천(?)의 딸이다. 조씨가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 보(寶)는 벼슬이 응양대호군에 이르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이 진(珍)인데, 중대광 해평군(重大匡海平君)이다. 손자 손녀 몇 명이 있으니, 응양대호군의 아들 가관(可觀)은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으로 경상도 부원수로 나가 있고, 딸 하나는 위위주부(尉衛主簿) 이지(李持)에게로 출가하였다.

 

해평군의 아들 창(彰)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며, 다음 신(莘)은 지금 덕창부 사인(德昌府舍人)이며, 다음 수(須)는 지금 춘추 검열(春秋檢閱)이고, 큰 딸은 판사(判事)김구용(金九容)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낭장 홍윤복(洪潤福)에게로 갔으며, 그 다음은 사설서령(司設暑令) 성보(成溥)에게로 시집갔다. 이씨 부인은 자녀가 없었다. 증손과 증손녀 몇 명이 있으니 누구 누구이다.

 

 공이 표문을 받들고 사은사로 갈 때에 나는 서장관으로 따라갔으며, 공의 큰 아들은 나와 동갑이다. 그러므로 공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것이다. 내가 요행이 추부(樞府)로 들어가니 공이 다시 복직하여 나와 동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예전처럼 공을 섬겼고, 공도 또한 아들같이 나를 대하였으니, 내가 공의 분묘에 명을 써야 마땅하고, 공의 막내아들 정당공(政堂公)이 이제 습봉(襲封)되었고 그가 지공거로 있을 때에 또 내 아들 종선(種善)을 선발하여 문생으로 삼았으니, 또 어찌 명을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한다.

 

해평의 윤씨가 / 海平之尹

고왕과 원왕을 도우니 / 左右高元

군자의 은택으로 / 君子之澤

흐르는 경사가 끊임이 없도다 / 流慶源源

원수공이 / 惟元帥公

우뚝히 시중이 되었고 / 蔚爲侍中

충간공이 뒤를 이으니 / 忠簡承之

장자의 풍모가 있어 / 有長者風

젊어서는 재덕이 뛰어났고 / 少而翹英

늙어서는 영화를 누렸네 / 老而享榮

막내가 뒤이어 정승 되고 / 季子繼相

또 문형을 맡았네 / 而典文衡

손자는 중추에 제수되고 / 孫拜中樞

바닷가를 절충하였네 / 折衝海隅

공의 가문은 / 惟公之門

중도에 맞아 / 弛張攸俱

무릇 하늘이 상서를 내림은 / 凡厥降祥

오직 착함을 표창함이리라 / 惟善是彰

공에게 아부함이 아니로다 / 我非諛公

공은 길이 이 무덤에 편안하시리 / 公永于藏

 

[주 D-001] 진저(晉邸) : 원 나라 황족으로 후에 황제가 될 사람 진왕임.

  *윤지표(문온공 처조부) 묘지명 원문(2005. 6. 4. 발용(군) 제공)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권17 및 『동문선(東文選)』권127에 실려 있으며, 1382년(우왕 8)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윤지표(尹之彪, 1310~1382)는 선주(善州) 속현 해평현(海平縣 : 지금의 경북 구미시 해평면 일대) 사람이다. 증조는 군정(君正), 조부는 만비(萬庇), 아버지는 석(碩)이다. 어머니 이씨는 백년(百年)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윤지표는 충혜왕·충목왕·공민왕 때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충혜왕을 원나라에서 시종하였으며, 충목왕 때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몽고어에 능통하였다. 말년에 염제신(廉悌臣), 윤환(尹桓) 등 여러 원로들과 결사(結社)를 조직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윤지표는 두 번 혼인하였다. 첫째 부인 조씨(趙氏)는 연수(延壽)의 딸이다. 둘째 부인 이씨는 천(蒨)의 딸이다. 조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보(寶)와 진(珎)이다.

 

海平君諡忠簡尹公墓誌銘幷序 (李 穡)

 

善之海平望姓尹氏也諱君正歷事高王元王官至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諱萬庇事忠烈王爲己巳一等功臣卒官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上護軍諱碩政丞公也朝廷使者至政丞時爲別將以盞人立于王前使者傳旨兩王子入侍天庭政丞聞之黙自念吾當從弟歸告尊公尊公曰兒計失矣所以從王子者爲後日計也兄在而弟先有國乎公又告曰吾亦知其然然吾見少則敬心生見長則否此所以決吾策也尊公不復語長元子早亡少忠肅王也公從朝京師僚佐未有居公右者其後歷官至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封海平府院君階壁上三韓三重大匡賜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之號亦未有居公之右者君臣遭逢千載一時豈非天乎其後天子聞公名特授鎭國上將軍高麗都元帥以寵異之海平娶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李公諱百年之女以至大庚戌四月癸亥生公延祐庚申公年十一而補泰雲寺眞殿直十五而補司設直長十六而授郞將十九而拜護軍從永陵在朝之明年也時晋邸陟遐文宗自江南先入宮正位迎明宗于朔方文宗出勞于野丞相燕帖木兒進毒酒明宗中夜崩六軍亂公與宰相曹益淸李君侅等官左右永陵永陵恃以無恐賜功臣鐵券至順庚午陞大護軍公年廿一也至正辛巳進判司僕寺事明陵卽位之五月拜上護軍冬陞軍簿判書明年四月遷典理判書王政丞當國用舊法文選歸之典理武選歸之軍簿公佐政丞無豪髮私明年出尹平壤試公臨民也甫一期而政成以知密直召公年三十八矣玄陵之五年再知密直司事其冬奉表朝于京師謝賜衣也十八年三知密直司事洪武庚戌進密直使明年知門下省事商議會議都監事又明年進評理冬封重大匡海平君與廉曲城尹漆原諸老結社從容者十餘年而壬戌九月感疾十月初九日端坐而逝公年七十又三矣公禀性寬厚不立崖岸略通蒙古語擧止如北庭人於政事務遵大體而不苛細盖長者也公凡再娶平壤郡夫人趙氏大匡僉議贊成事商議寶文閣大提學諡文克諱延壽之女李氏大匡月城君諱蒨之女趙氏生男二人長曰寶官至鷹揚大護軍先歿次曰珍重大匡海平君孫男女若干人鷹揚男曰可觀今爲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出爲慶尙道副元帥一女適尉衛注簿李持海平君男曰彰今爲典理佐郞次曰莘今爲德昌府舍人次曰須今爲春秋檢閱長女適判事金九容次適郞將洪潤福次適司設署令成溥李夫人無子曾孫男女若干人某某公之奉表謝恩也予爲書狀官公之長子予同甲也故父事公予僥倖入樞府而公復職爲同寮然予之事公也如昔而公亦視予猶子吾宜銘公公之季子政堂公今嗣封其知貢擧也又取豚犬種善爲門生銘又可辭諸銘曰

海平之尹左右高元君子之澤流慶源源惟元帥公蔚爲侍中忠簡承之有長者風少而翹英老而享榮季子繼相而典文衡孫拜中樞折衝海隅惟公之門弛張攸俱凡厥降祥惟善是彰我非諛公公永于藏

 

 40) 언양군부인(민사평 배위)묘지명 (2005. 6. 8. 영환(문) 제공)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이 본향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취려(就礪)이니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위열(威烈)이요, 증조(曾祖)의 이름은 전(佺)이니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익대(翊戴)요, 조부의 휘는 변(?)이니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서 시호는 문신(文愼)이요, 아버지의 휘는 윤(倫)이니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崔)씨이니,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문헌공(文憲公)충(沖)의 13세손이요, 부지밀직사사 서(瑞)의 딸이다.

13세에 민(閔)씨의 집으로 시집와서 며느리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천성이 엄하여 자제를 교도하는 데도 반드시 예로써 하여 친척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도한다.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김묘(金昴)에게 출가시키니, 김묘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18세손이다. 김씨의 자녀로 아들은 제민(齊閔)제안(齊顔)구덕(九德)이 있고, 딸은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과, 전 개성 윤 이창로(李彰路)와, 전 종부령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허호(許顥)와, 전 전객부령허의(許誼)와, 낭장 겸 박사이존사(李存斯)와 문하 주서김섬(金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이 이름을 구용(九容)이라 고치고 그 아들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명선(明善)을 보내어 행장에 의하여 명(銘)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ꡒ우리 외조부 급암공(及菴公)은 천성이 순진하고 솔직하여 장벽을 세우지 않고 날로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으며, 집안의 살림살이는 묻지 않고 오직 부인에게만 맡겼는데, 부인께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서도 오직 날짜를 부족하게 여겼다. 또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ꡐ남편을 섬기는 예는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공경하는 마음 한 가지만 지킬 것이며, 의복과 음식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되, 오직 그때에 맞도록 하면 될 것이다.ꡑ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ꡐ민공이 성정에 맡겨 술 마시고 마음껏 자적하는 것은 그 부인이 안에서 집안일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ꡑ 하였던 것이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비록 부인보다 연치가 많았으나 또한 부인을 꺼려하여 감히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첨서밀직(簽書密直)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머니와 같이 섬겼다. 기해년에 급암공이 돌아가고 겨우 3년 상을 마치자 신축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손자 제안(齊顔)이 옳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느냐.ꡑ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함이 그 아버지의 풍도에 있었다 한다. 갑인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급암(及菴)의 장사 때에 시로써 만사(挽詞)를 도운 바 있었으니 부인의 묘명(墓銘)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다."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여강의 서쪽 / 驪江之西

발산 양지에 / 鉢山之陽

급암의 부인 / 及菴之室

김씨를 장사하였다 / 金氏攸藏

위열공의 가풍이 / 威烈之風

정렬공에 이르러 더욱 떨쳤으니 / 振于貞烈

규문이 엄숙하여 / 閨門肅然

문채도 있고 절조도 있었다 / 有文有節

오직 너희 자손들은 / 惟爾子孫

그이 마음을 잘 간직하고 / 惟心之存

또 부도를 실추하지 말아서 / 無墜婦則

구천의 여령을 위로하도록 하라 / 以慰九原

하였다.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원문> (2005. 6. 8. 발용(군) 제공)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幷 序) (李穡)

 

夫人姓金氏彦陽郡人高祖諱就礪大師門下侍郞諡威烈曾祖諱佺太傅門下侍郞諡翊戴祖諱賆都僉議叅理諡文愼父諱倫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謚貞烈母卞韓國大夫人崔氏大儒中書令文憲公諱冲十三世孫副知密直司事諱瑞之女也年十三歸閔氏盡婦職性嚴敎子弟必以禮宗族至今稱之生一女適判軍器寺事金昴新羅王諱傅十八世孫也金氏子男曰齊閔曰齊顔曰九德女適密直副使金士安前開城尹李彰路前宗簿令崔有慶前郞將許顥前典客副令許誼郞將兼博士李存斯門下注書金瞻次未適齊閔改九容遺其子興威衛錄事明善以狀徵銘且曰吾外祖及菴公性眞率不立崖岸日以詩酒自適不問家人生産而惟夫人之是聽夫人議酒食以娛外祖之心亦惟日不足也敎女孫必曰事夫之禮自始至老惟守一敬而己至於衣食必精必潔惟其時可矣故當時語曰閔公之放曠夫人理於內故也彦陽伯敬直雖長於夫人亦憚夫人不敢少慢簽書密直希祖與諸弟皆母事之歲已亥及菴公旣歿喪甫畢避辛丑紅賊于嶺南還居驪興嘗自嘆曰吾孫齊顔不得其死吾何顔復入京邑乎其剛烈有父風云歲甲寅秋九月十九日以病卒年七十三歲也以其年十二月十五日葬于郡南鉢山之西及菴之葬予甞以詩相其挽夫人之墓銘其可辭曰然銘曰

驪江之西鉢山之陽及菴之室金氏攸藏威烈之風振于貞烈閩門肅然有文有節惟爾子孫惟心之存無墜婦則以慰九原

 

〔출전:『牧隱文藁』권16〕

 

41)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및 석종비  (2005. 8. 8. 윤만(문) 제공)

 

   2005. 8. 7(일) 원주 당숙(재면) 문상 후 귀경 길에 잠시 여주 신륵사를 찾았습니다. 고향이 여주에서 가까운 감곡인 까닭에 학생 때부터 가끔씩 들렸던 벽절(그 지방에서는 신륵사를 흔히 벽절이라고 부름)입니다만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벽절을 생각하는 마음이 사믓 달라져 있습니다.

 

  벽절에는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데 특히 조사당 뒤편에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과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석종비 그리고 보물 제231호 석등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보제존자석종비의 시주자 명단에 문온공(척약재) 할아버지의 휘가 ‘前三司左尹 金九容’으로 명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답사 기념으로 상기 보물 사진 한 장을 올려 봅니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2002.01.31. 김영환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와 김구용 선조’와 2005.03.09. 김태영 ‘신륵사 보제존자사리석종기 번역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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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소개  (2005. 8. 10. 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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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존자의 석종 바로 뒤쪽에는 보제존자 나옹의 묘비가 있다.

 

보제존자는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가는 도중 이곳에서 입적하여 그 묘역을 마련하고 또 묘비를 건립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여증군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驪興郡神勒寺 普濟舍利 石鐘記)로 시작되는 그 첫줄에 잘 나와있다.

 

이 비는 총높이 212cm로서 비신은 121cm에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신의 폭은 61cm, 기단과 비받침대 및 지붕돌은 모두 화강석이며, 약 200여명의 문도 및 관계 도속(道俗)의 명단이 보여 주목되고 있다.

 

img src=이 비에는 약 200여명의 문도 및 관계 도속(道俗)의 명단이 보여 주목되고 있다. 비문의 자경(字徑)은 약 2.2cm, 해서(楷書)로 기록되었다.비신의 보호를 위해 돌기둥을 비신 주위에 돌리고 있음이 주목된다.

 

비대는 2단의 기단위에 일석으로 조성되었다. 비문의 하대부분은 운문을 나타냈고 그 위에는 전후 5엽의 복판연화문을 조각했고, 이와 같은 화문은 측면에서도 1엽씩 있으며 그리고 사우(四隅)에도 각각 1엽씩 나타나 있으므로 도합 16엽의 연화문으로써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화의 조각형식은 상대부분에서도 앙련의 모습만을 취할 뿐 동일 수량을 나타냈는데 전후에 각각2, 도합6구역의 안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동물무늬를 조각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 상부의 옥개부에는 공포와 와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으로 용 등을 조각하는 비두(碑頭)의 예와 대조된다.

 

비문은 당대를 대표하는 문필가 이색과 명필 한수가 각각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이는 명품이다.

 

42) <여주 이호촌의 김안국> (2005. 8. 16. 주회(안) 제공)

 

<디지털한국학>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선시대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

 

1519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가 있어 화는 면하고 파직되었으며, 1537년에 다시 기용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병조판서(兵曹判書)·좌참찬(左參贊)·대제학(大提學)·찬성(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1) 1519~1527년 (경기 이천 부발면에 은거)

 

<이천시지, 2004>

 

김안국(金安國)

 

1519년(중종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지도인물들이 대부분 죽음을 당했지만 때마침 전라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가 있었던 탓에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당했다.

 

1528년(중종23년) 여주 이포로 거주지를 옮기기까지 9년간 이천에 살면서 주고받은 많은 시와 문장이 모재집 속에 실려 있고, 이포에 있을 때도 이천을 자주 왕래하였다.

 

이후 1527년(중종22) 겨울 여주의 금사면으로 옮겨갈 때까지 8년 동안 이곳(이천 부발면)에 머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성리학의 보급과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다.

 

2) 1528~1537년 (경기 여주 이호촌에 은거)

 

<디지털한국학>

 

퇴계 이황(1501-1571)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퇴계학연구 (퇴계정전) 제10집> (1990, 국제퇴계학회 경상북도지부)

 

-----그 뒤로 16년이 흐른 뒤에 퇴계는 33세의 청년 학자가 되어 고향의 대선배인 충재 권발과 함께 여주의 梨湖村에 은거하고 있던 모재를 다시 찾았다. 이때 충재는 밀양부사로 도임하는 길이고 퇴계는 귀성길이었다. 모재는 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樓岩이라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으며 麗江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우암집>

 

○ 22세 1533년 계사

 

---가을에 여주로 가서 선영에 성분하였다. 이어서 모재 김안국을 梨湖村에서 배알하니, 모재는 깊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이별에 즈음하여 눈으로 전송하면서, "이 사람의 문장은 마땅히 乖崖(괴애) 김수온과 人占畢(점필) 김종직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모재집>(김안국)

 

김지 묘갈명 (1534년)

 

---공(=김지)은 나(=김안국)의 선인(先人, =참봉 金連))과 연배로서 우의(友義)도 두터웠으니 응당히 세의(世誼)가 돈독(敦篤)해야만 할 것이나 나는 조고(早孤)하여 가세(家勢)도 영락(零丁)해졌고 벼슬길로 나가서도 또한 어긋나서 마침내 공의 문(門)에 진배(進拜)하여 통가자제(通家子弟)의 예의도 닦지 못한 것이 항상 한이었는데 지금 승지군(承旨君, =김공예)이 청하는데 졸문(拙文)이라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행장(來狀)에 의해서 대강 비문을 지었으니 이것으로써 태만한 죄를 사(辭)할까 하나이다.

 

3) 1700년대 전반 : 이호(梨湖)의 유지(遺址)? 달관(達官) 김모(金某)?

 

▣ 육우당구기기(六友堂舊基記) 고조고(高祖考) 추술(追述) ▣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금 종형(從兄) 시경(始慶, 1659-1735)씨가 황려(黃驪)에 가서 살면서 우연히 마을 사람과 시사(時事)를 말하게 되었고, 이호(梨湖)에서 한 유지(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선조(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달관(達官) 김모(金某)의 점유가 되었으니 추심(推尋)하여 얻을 수 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선조께서 노닐던 곳을 분명히 알았으니 그 땅은 마음에서 떠니지 않고 가슴에 차 있을 것이다. 더구나 종형(從兄)이 거주하는 곳과 선조의 고기(古基)가 불과 하루 아침에 다다를 가까운 곳이니, 그 우러르고 탄식하고 또 기뻐하고 느끼는 것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가 아니다. 아, 지난날 나의 소유(所有)였던 것이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오늘 타인의 소유가 후세에 우리집 물건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무릇 우리 동종(同宗)은 나의 말을 잊지말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여주읍지의 자료>(2005. 8. 17. 윤식(문) 제공)

여주읍지에서 육우당 터와 관련된 자료만 발췌했습니다.

김여채는 나중에 알았습니다. 안동인이라 하는데 우리 쪽 선조님이신지, 후안동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김지는 말년에 경기도 김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안국의 후손은 김안국과 그 동생으로 인해 이곳으로 입향하게 되었답니다.

 

◇방리

  ☆금사면 - (여주읍치에서) 서북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형승

  ☆이포진 - (여주읍치에서) 서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누정

  ☆육우당 - 천녕현에 있다. 척약재 김구용이 여강에 유배되어 집(육우당)을 짓고 살았다. 오래 되어 허물어져 없다.

  ☆범사당(泛傞亭) - 금사 이호(梨湖)에 있다. 모재 김안국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살았다. 오래 되어 허물어졌다.

◇인물

  ☆김  묘 - 급암(민사평)의 반자(半子 : 사위). 관직이 좌복야에 이르렀다.

  ☆김구용 - 김묘의 아들. 민사평의 외손.

  ☆김제안 - 김묘의 아들. 관직이 대복경에 이르렀다.

  ☆이  집 - 호는 둔촌, 봉서정(鳳棲亭)에 살았다.

  ☆이존오 - 호는 장사(長沙). 고산(孤山 : 고산사=고산서원)에 살았다.

  ☆김안국 - 호는 모재. 범사당에 머물렀다.

  ☆김지(金漬) - 좌정언이다. 유배되어 왔다.

  ☆김여채(金汝采) - 모우(慕雨)의 아들이다. 관직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 지명유래

   (금사면은 여주군의 서북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1. 이포리(梨浦里)

 

* 이포리(梨浦里) : 이포리는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세곡과 물화를 싣고 풀던 큰 나룻터였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배나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배나무 이(梨)자와 물가 포(浦)자를 합쳐 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는 배개나루·배나루·배개 또는 이포진으로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구말·천양·근정리·서원·뒷골이 병합되어 이포리를 이루게 되었다. 현재는 법정리로 분리하여 수굿말·큰말을 1리로, 근정리·뒷골·서원을 2리로 나누고 있다.

 

☞ 이포(梨浦)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1914년 이후의 일이고 원래는 이호(梨湖)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문헌에 이호로 표기된 것을 자칫 강천면 이호리로 착각하기 쉽다. 강천면 이호(梨湖)의 원래 지명은 배미(梨山)이다. 배는 산(山)을 뜻하는 것인데 배 이(梨)자를 쓰게되어 유래나 전설에 엉뚱한 배(梨)나 배(舟 : 나룻배) 등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이 곳을 배개(山邊) + 나루(津) = 배갯나루(山 가생이 나루라는 뜻)라고 부르고 또는 배나루(梨津), 배개(山)의 뜻을 이포(梨浦)라고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 천령(川寧)이 여주로 병합되기 이전 고려 때부터 묵객들의 저서에 으레 시 몇 수씩은 올라있는 곳이다.

 

   다른 지방의 이름 중에도 배(梨·舟)자가 붙은 지명이 무수하게 많다. 배말(梨村)·배내(梨川)·배고개(舟峴)·배미(梨山)·배안말(村)·배골(舟谷)·배꼬지(梨花)·배다리(舟橋洞)·배내고개(舟峴) 등 이러한 지명은 모두 산(山)과 관계된 지명인데 모두 이(梨)자나 주(舟)자를 붙인 것이다.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의 시 “이호(梨湖)에서 양화(楊花)로 거슬러 가면서”, 동정 염흥방의 시 “침류정 사절”, 둔촌 이집의 시, ahrr은 이색의 시, 백운거사 이규보의 시, 가정 이곡, 척약재 김구용 외 많은 명인들의 시에 모두 이포(梨浦)가 아니고 이호(梨湖)라고 표기하였다.

 

   또한 나루터면 으레 모래톱(백사장)변이기 마련인데 배자가 붙은 나루터는 배가 바로 산(山)에 닿게 되는 곳을 말한다.

 

* 개터 : 이포초등학교 앞 갯가에 있는 들로 그 앞에 하천이 흐르고 있다.

☞ 개(浦) = 강이나 바다에 물이 드나드는 곳.

* 곰바위 : 이포다리 근처에 있는 곰처럼 생긴 바위.

* 곰부리 : 이포다리 근처에 있는 모롱이.

☞ 곰(큰) + 부리(부랭이, 모퉁이)

* 근정리(近汀里) : 천양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금사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

☞ 정(汀) = 물가 정

* 근정리 고개 : 근정리 북쪽에 있는 고개로 현재 지서 앞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양마을과 이어지고 있다.

* 기천서원(沂川書院) : 모현사 참조.

*김 안국 재실<사당> :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모재 김안국을 추향하는 사당.

* 대촌(大村) : 큰말 참조.

* 뒷골 : 기천서원 뒤쪽에 있는 마을.

* 뒷굴 : 뒷골 참조.

* 뒷능 : 수굿말 뒤쪽에 있는 산.

☞ 능(陵) = 보통 각 마을에서는 왕능을 연상하나 지명에서는 산능선을 뜻하는 것이 많다.

* 마상끝<산> : 이포리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말을 놓아 먹였던 곳이라고 한다.

☞ 마(큰) + 상(산) + 골(谷)

* 말방다리 : 이포리 뒷골에 있는 산으로 병자호란 때 홍명구(洪命耈)가 금화(金化)지역에서 전사하였는데 말이 주인의 시체의 머리를 물고 이곳까지 왔다고 전해진다.

☞ 말(큰) + 방(귀퉁이) + 다리(들) + 산 = 큰머리 고래의 산.

* 모현사(慕賢祠) :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 15의2번지에 있다. 처음에는 마암서원이라 하여 조선 선조 13년(1580)에 건축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세워서 인조 3년(1625)에 기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 후 화재로 인하여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877년 4월 김영진씨가 사재(私財)를 기울이고 99인의 기금으로 다시 세워 모현사로 개명하여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외 7인의 명현을 봉안했으며, 봄·가을로 제향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옛 명현의 덕을 추모하게 하였다.

 

   현판은 서은(西隱) 장홍식(張鴻植)이 새겼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제향을 올리는 명현은 다음과 같다.

                           문경공(文敬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충공(文忠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증영의정(贈領議政)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

                           문숙공(文肅公) 수몽(守夢) 정엽(鄭燁)

                           문정공(文靖公) 택당(擇堂) 이식(李植)

                           충열공(忠烈公) 나재(懶齋) 홍명구(洪命耈)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 묘련암(妙蓮庵) : 이포리 수굿말 뒤에 있는 암자로 원래의 암자는 폐사되었다.

* 박석고개 : 천양 마을 북쪽에 있는 고개로 마을 뒤쪽 새로난 길과 이어진다.

☞ 박(받 : 山) + 석(새 : 間)

* 배개 : 이포리 참조.

* 배나루 : 이포리 참조.

* 범사정(泛槎亭) : 금사면 이포리에 세워졌던 정자로 모재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나 점동면 원부에 은거할 때 세워졌던 건물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벼락바위 : 이포 근정리에 있는 바위로 벼락을 맞았다고 하여 벼락바위로 불리우며 바위가 강쪽으로 돌출되어 강물이 굽이쳐 흐르며 물살이 빨라 옛날 이곳을 왕래하던 배들이 종종 부딪쳐서 침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비석거리 : 비선거리 참조

* 비선거리 : 이포리 뒷골에 있는 들로 남양홍씨인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신도비(神道碑)가 있는 부근을 말한다.

* 삼선당 : 금사면 이포리 192번지인 서원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에 세워진 것은 고려 말기라고 전해지며 원래 삼선은 성황신·산신·용왕신을 일컫는 말이나 이 마을의 전설을 통해 볼 때 동민을 안녕케하는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최씨 부부와 그의 묘소를 잡아준 나옹선사 및 산신을 제사하는 당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협소한 초옥이었던 것을 주민 오도성이 세웠다가 다시 기와집으로 세운 것이 1728년 무신정변 때 소실되었고, 그 후 주민들이 협력하여 새로 3칸을 세움으로서 1칸은 영정을 봉안하고 2칸은 비워두고 있다. 또한 삼선당의 부근에는 전설과 관련된 최씨 묘소와 침벽루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새뫼 : 새매 참조.

☞ 새(가운데 사이) + 뫼(山)

* 새매앞 : 수부촌 뒤쪽의 태봉 밑에 있는 산등성이.

* 새터 : 서원 서남쪽에 새로된 마을을 말함.

* 서원(書院) : 천양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기천서원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

* 성선암(聖禪庵) : 천양 동북쪽에 있는 절로 조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 소탱이꿈치 : 큰말(천양) 앞에 있는 빨래터로 깊은 소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소탱이 = 소댕이, 소덩이(沼가 있는 목)

* 수굿말 : 이포에서 오래된 마을중 하나로서 뒷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포대교와 함께 남한강 물가를 향하여 있는 마을.

☞ 수(물水) + 구지(곶이 튀어 나온 곳) = 수구지 - 수곶이 - 수구

* 수부말 : 수굿말 참조

* 수부촌(水夫村) : 수굿말 참조

* 술천성지 : 금사면 외평리와 외포리 사이에 태봉이라고 부르는 해발 285m의 산에 있다.(하략)

* 아랫말 : 수굿말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아랫벌 : 천양 아래쪽에 있는 들.

* 여수고개 : 이포리 수굿말에서 외평리로 넘어가는 산길로 옛날 고개 근처에 여우가 많이 나타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여수(느린머리) - 너수(汝) - 여수

* 옻물터 : 이포리 수굿말에 있는 약물터로 약수가 옻오른데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우렁바위 : 이포 천양마을에서 이포대교로 가는 길 오른쪽 아래의 강에 있는 바위로서 강물이 많을 때면 물에 잠겼다가 강물이 적을 때에만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우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우렁 = 울림

* 웃말 : 수굿말 위쪽의 마을.

* 육우당(六友堂) :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 김구용(1338-1384)이 우거하던 곳이다. 그는 고려와 명나라의 국교가 난관에 봉착하자 행례사(사신)로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요동에서 체포되어 남경으로 압송되었고, 그 후 명제의 명령으로 대리로 귀양을 갔었으며 고국으로 귀환한 후 여주 영녕현으로 와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먼저 친명파로 북원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로 유배된 바 있었다. 석방된 후에는 여주 외가에 있으면서 천령에 당을 지었는데 처음에 설(雪)·월(月)·풍(風)·화(花)의 네가지 벗을 삼아 사우당(四友堂)이라 하였다가 강(江)·산(山)을 더하여 육우당(六友堂)이라 하였고 목은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받았다. 이후 어느 시기에 훼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척약재(惕若齋) 할아버지께서는 중국 윈난성 따리(대리)로 귀양을 가시다가 1384년(우왕 10) 사천성 노주 영녕현 강문점(氵+盧州 永寧縣 江門坫)에서 병환이 나시어 47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귀환을 하지 못하셨고, 육우당은 1375년(우왕 1) 언사로 죽주(竹州)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어머니의 고향인 여흥군(驪興郡)으로 이배되었을 때 지으셨다.《출처 : 가보》

 

* 원촌(阮村) : 서원 참조.

☞ 원(院) = 옛날 여관의 역할을 하던 곳.

* 은행나무 : 삼선당 뒤쪽에 있는 은행나무로 이포리 나룻터 위쪽 강변 암석 위에 서있으며 지상에서 2m까지 썩은 홈이 있고 수목의 상단은 고사되어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높이 35m, 나무둘레가 5.8m로서 고려시대 나옹선사가 이 나무 위의 산을 오르면서 바위틈에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천령최씨의 시조묘와 관련되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나무속에는 귀달린 뱀이 산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나옹선사가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줄 알아라”하고 이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 이포(梨浦) : 이포리 참조

* 이포나루터 : 이포 천양 앞에 있는 나루터로 과거에는 강 건너편 대신면 천서리 강가로 철선이 건너다니던 곳으로 사람은 물론 자동차까지도 유일한 도강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포대교가 개통되어 그 입구에 이포나루터라고 적혀진 조그만 표석만이 남아있어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이포느티나무 : 이포리 281번지에 있는 느티나무로 현재 금사 농협 앞쪽 도로변에 있다. 수령은 500년, 높이가 20m, 나무 둘레가 2.8m로 현재 김창선씨가 소유하고 있으며 지상 1m 높이에 태와 같은 둘레가 있으며 수간에 길게 홈이 나 있다. 이 나무 또한 나옹선사의 전설과 관련되어 강변의 은행나무와 함께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장터거리 : 큰말 또는 대촌으로 부르기도 하며 과거 이포장이 열렸던 장소로 마을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 절고개 : 수굿말에서 외평리 묘련암으로 가는 고개.

* 제비다리 : 이포2리에 소재하고 있는 현 복지회관에서 천양마을로 가는 방향에 있는 다리로서 현재는 새 도로가 나있어 없어졌으며 주변에 주유소가 위치하고 있다.

☞ 제비 = 좁은

* 차말(車馬) : 천양에서 삼선암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빨래터.

☞ 차(찬물) + 말(마을)

* 천령 : 천양 참조

☞ 처음 지명은 성지매로서 이후 술천, 기천, 천령 순으로 지명이 변하였다.

* 천양(川陽, 天陽) : 이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그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무열왕이 663년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곳에 술천성을 쌓고 지방 군단인 골내근정을 드었으며, 경덕왕 16년(757)에는 천령현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천양에는 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마을을 천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천령이 변음되어 천양으로 불리운 것 같다.

 

* 침벽루(枕碧樓) : 이포리 삼선당 옆에 세워진 누각으로 옛날에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훌륭한 시와 문장을 지었던 곳으로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목선을 타고 오는 왜병들과 맞서 이곳의 의병들이 싸워 승리를 거둔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94년 이포리에 거주하고 있던 뜻있는 인사들이 과거의 누각 터에 새로 세운 것이 현재 남아있다.

* 큰말 : 대촌, 장터거리라고도 불리우며 천양의 가장 큰 마을로 예전에는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 탑선대 : 이포장터 뒤쪽 산에 있는 고목아래의 지역으로 과거에는 탑이 있었다고 한다.

* 태봉<산> : 수굿말의 묘련암 뒤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옛날 왕자의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후곡(後谷) : 뒷굴 참조

 

2. 궁리

<이하 생략>

 

《출전 : 금사면지/여주문화원/1998》

 

 43) 문온공의 또다른 자와 호의 기록 (2005. 8. 12. 영환(문) 제공)

 

출처 : 東國相案姓彙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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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는 사화, 호는 명호 시는 문충이라고 되어 있다. 처음 본 자료이어 좀더 연구할 가치가 있음

 

*<육유당 찾기 보조자료> --김안국의 묘비명 (2005. 11. 29. 윤식(문) 제공)

 

윤만 대부님께서 올리신 <가보>의 '육우당구기기 고조고 추술(六友堂舊基記 高祖考 追述)' 중 ‘달관 김모’로 추정되는 김안국의 묘비명(<국역 국조인물고> 제5집 10~11쪽)입니다.

 

‘육우당구기기 고조고 추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從兄 始慶 씨가 黃驪에 가서 살면서 우연히 마을 사람과 時事를 말하게 되었고, 梨湖에서 한 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達官 金某의 점유가 되었으니 推尋하여 얻을 수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선조께서 노닐던 곳을 분명히 알았으니 그 땅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가슴에 차 있을 것이다. 더구나 從兄이 거주하는 곳과 선조의 古基가 불과 하루아침에 다다를 가까운 곳이니, 그 우러르고 탄식하고 또 기뻐하고 느끼는 것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가 아니다. 아, 지난 날 나의 所有였던 것이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오늘 타인의 소유가 후세에 우리 집 물건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우리 同宗은 나의 말을 잊지 말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김안국(金安國)

 

비명(碑銘)     정사룡(鄭士龍) 지음

 

- 전략 -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는 의정부에 들어와 우참찬(右參贊)이 되어 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임하였으며, 여름에는 전라도 관찰사에 특별히 제수되어 떠나려 할 때 편전(便殿)에서 불러 만나보고는 ‘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치적의 효과가 대단히 드러났으므로 특별히 선택해서 임명하는 것뿐이다.’라고 유시하였다. 공은 명을 받들어 선정(宣政)하는 이외에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게 된 조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비교하여 더욱 두루 미침이 더하였다. 이 해 겨울에 조광조 등이 귀양을 가자, 공 역시 파직되어 이천(利川)에 있는 촌장(村庄)에 물러나 살면서 조그마한 집을 따로 지어서 ‘사일(思逸)’이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날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강론하자 제자들이 점점 번성하니, 당시의 의논들이 옳지 않게 여겨 더러 견책(譴責)을 하려 하였으나 공은 듣고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강학(講學)만 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 중종이 영릉(英陵 세종의 능)에 전알(展謁)하러 갈 때 길이 이천(利川)을 경유하므로, 공이 의복을 정제하여 입고 도로 왼편에 엎드려 어가(御駕)가 지나가도록 기다렸었다.

 

공이 일찍이 여주(驪州) 천녕(川寧) 물가에 나아가 터를 잡아 조그마한 집을 지어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사를 하여 그 곁에 초정(草亭)을 만들어 놓고 멀리 산꼭대기에 올라가 의지하여 푸른 들판을 내려다보매 넓디넓은 뗏목을 타고 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정자를 ‘범사정(泛傞亭)’이라 명명하고, 또 옛 현인들이 풍취를 붙였던 물체를 취하여 여덟 가지 제영(題詠)을 삼아 그 당(堂)에 이름을 ‘팔이당(八怡堂)’이라 정해 놓고, 고을 사람이 술을 싣고 오는 자가 있으면 귀하고 천하거나 젊고 늙거나를 가릴 것 없이 번번이 그들과 더불어 실컷 마셨으며, 아침저녁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서 거닐며 시(詩)를 읊고 먼데를 바라보곤 하였는데, 앞으로 이렇게 수명을 마칠 것처럼 지낸 지가 19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은 일찍이 조금도 쇠퇴하지를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동지돈령부사로 옮겼으며, 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예조판서에 오르고 가을에는 다시 우참찬 겸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는데, 이어서 좌참찬에 승진하였다.

 

- 하략 -

 

44) 최.함 두 동년에게 준 잡언시 (2005. 9. 3. 영환(문) 제공)

 

  寄崔卜河,咸承慶兩同年。雜言(기 최복하 함승경 양동년 잡언)  

 鏡浦臺寒松亭(경포대한송정)。경포대 한송정은

 風更淸月更明(풍갱청월갱명)。바람은 맑고 달은 더욱 밝네

 携手游相對飮(휴수유상대음)。손잡고 노닐며 서로 마주하며 술마시니

 海棠花鷓鴣聲(해당화자고성)。해당화피고 자고새 소리 들리네

 何時一蹇驢(하시일건노)。그어느날 나귀타고

 吟嘯瞰滄溟(음소감창명)。시 읊으며 큰 포부 펼쳐보려나

 久知功名富貴(구지공명부귀)。그러나 이미 난 알았네 , 부귀공명이

 恰似浮雲輕(흡사부운경)。마치 뜬구름 같다는 것을...

 

 *同年=과거시험에 같이 합격한 사람.  함승경과 최복하는 척약재와 같이 대과에 합격했음.  군사공(김칠양)의 손자인 김계로의 처부=함부림, 처조부는 함승경.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중서,김계우

 김칠양-김돈-김계로(배위[=함부림의 따님)

 함승경-함부림-녀=김계로

 

*함부림(咸傅霖)

1360(공민왕 9)∼1410(태종 1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승경(承慶)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승진하여 정지(鄭地)·이림(李琳)·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우홍수(禹洪壽) 등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춘주지사(春州知事)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었다. 이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 그뒤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좌산기상시로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하여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도관찰출척사·예문관제학·동북면도순문사·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 등을 거쳐, 1404년(태종 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6년에 계림부윤·경상도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다음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였으며, 이치(吏治)에 능숙하여 관직을 맡을 때마다 칭송을 받았다.

1405년에는 앞서 1398년(태조 7)의 제1차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하였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45) <목은집> 속의 문온공 기록내용 (2005. 11. 12. 윤식(문) 제공)

 

 (1)제6권 - 1건 <40~41쪽>

 

 병 때문에 수일 동안 나가지 못했다가, 상당(上黨) 한공(韓公)을 초청하여 서봉(西峯)에 올라 꽃을 완상하고, 집에 이르러서는 또 예안군(醴安君) 우공(禹公)을 초청하여 함께 앉았는데, 이윽고 우공이 우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한 연구(聯句)를 읊기를, “꽃이 피어 만발하려 하거니, 내 늙었다고 어찌 쓸쓸하랴(花開將爛熳 我老豈蕭條)” 해 놓고, 술잔 주고받으며 담소(談笑)하느라 미처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술을 가지고 내 집에 찾아온 빈객(賓客)이 있어, 가동(家僮)이 달려와서 아뢰므로, 거기서 작별하고 나와 집으로 달려와서는 또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하여 그대로 쓰러져서 아침까지 자고 한 수를 채워 이루는 바이다. 내 집에 찾아온 빈객은 판도 판서(版圖判書) 정달가(鄭達可), 판합(判閤) 이사위(李士渭), 전(前) 좌윤(左尹) 김구용(金九容), 간의(諫議) 이숭인(李崇仁), 사성(司成) 최표(崔彪) 및 문생(門生)인 판사(判事) 최숭겸(崔崇謙), 대호군(大護軍) 염정수(廉廷秀)였다.

 

봄 경치는 천지에 가득하고

환호성은 시조에 널리었네

꽃이 피어 만발하려 하거니

내 늙었다고 어찌 쓸쓸하랴

석 잔 마시고 한창 흥겨운 판에

뭇 영재들이 또 나를 불러주네

고상한 풍류 그려봄직한 곳에

귀밑 가엔 흰 털이 흩날리누나

 

牧隱詩稿卷之二十一

 

 詩

 

  病不出數日矣。邀上黨韓公。登西峯賞花。旣至。又邀禮安君禹公同坐。旣而禹携我輩至其第設酌。默稿一聯曰。花開將爛熳。我老豈蕭條。獻酬談笑。未暇成篇。適有賓客携酒過陋巷。家僮走報。辭出馳歸又飮。大醉頹然達旦。足成 一首。賓客者。版圖判書鄭達可,判閤李士渭,前左尹金九容,諫議李崇仁,司成崔彪及門生判事崔崇謙,大護軍廉廷秀也。

 

春色盈天地。懽聲遍市朝。花開將爛熳。我老豈蕭條。三酌方乘興。群英又見招。風流堪畫處。鬢上素絲飄。

 

 (2)제7권 - 3건

 

1. <47~48쪽> 김경지(金敬之)를 생각하여 짓다

 

2. <136~137쪽> 예천군(醴泉君)의 부인 채씨(蔡氏)의 기단(忌旦)에 유 승제(柳承制)의 부인이 수정사(水精寺)에서 재(齋)를 올리는데, 나도 가서 참여하였다. 재를 마치고 나서는 성균관에 들어가 알성(謁聖)을 했는데, 그곳에 한 흑립(黑笠) 쓴 사람이 있었으나 그의 성명은 묻지 않았다. 비석을 보니 귀부(龜趺)가 없었다. 김경지(金敬之)를 방문하여 밀탕(蜜湯)을 마셨는데, 그의 아들 명선(明善)이 탕 그릇을 받들고 왔다. 이어서 용부 상의(庸夫商議)를 알현했는데, 판서(判書) 박원상(朴元祥)이 뒤따라왔고, 염정수(廉廷秀)는 나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간단히 술 한 잔 마시고 물에 밥을 말아먹고 취포(醉飽)하여 돌아왔다. 박공(朴公)은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3. <139~140쪽> 상당군(上黨君)이 누상(樓上)에 주식(酒食)을 베풀었는데, 김경지(金敬之)가 마침 오다

 

1. 47~48쪽

 

김경지(金敬之)를 생각하여 짓다

 

흰 구름 서로 쫓고 오만 산은 푸르러서

한 굽이 여강이 비단병풍 두른 듯하리니

그대는 어버이 생각나는 벼슬 사퇴하여

가을바람에 함께 거룻배를 노 젓고 싶네

옮겨 살면 회수의 탱자 될까가 염려지만

 

牧隱詩稿卷之二十四

 

 詩

 

有懷金敬之

 

白雲相逐萬山靑。一曲驪江遶錦屛。君政思親吾乞退。秋風準擬共揚舲。

移居只恐爲淮枳。慱物何須剖楚萍。到得漁人爭渡處。好將淳朴送殘齡。

 

2. 136~137쪽

 

예천군(醴泉君)의 부인 채씨(蔡氏)의 기단(忌旦)에 유 승제(柳承制)의 부인이 수정사(水精寺)에서 재(齋)를 올리는데, 나도 가서 참여하였다. 재를 마치고 나서는 성균관에 들어가 알성(謁聖)을 했는데, 그곳에 한 흑립(黑笠) 쓴 사람이 있었으나 그의 성명은 묻지 않았다. 비석을 보니 귀부(龜趺)가 없었다. 김경지(金敬之)를 방문하여 밀탕(蜜湯)을 마셨는데, 그의 아들 명선(明善)이 탕 그릇을 받들고 왔다. 이어서 용부 상의(庸夫商議)를 알현했는데, 판서(判書) 박원상(朴元祥)이 뒤따라왔고, 염정수(廉廷秀)는 나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간단히 술 한 잔 마시고 물에 밥을 말아먹고 취포(醉飽)하여 돌아왔다. 박공(朴公)은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동방의 상례 제례는 불교를 숭상하기에

채씨의 재연에 이 늙은이도 참여케 했네

돌아올 때는 돌다리에서 서로 헤어졌고

나는 성균관에 들러 귀부도 물어보았지

꿀물 공손히 올려라 천금 같은 아들이요

진수성찬 대접받아 종에게도 밥 먹였네

우여히 만난 박군은 도의 맛을 즐기어서

산택을 조아 파리한 신선 배우려 한다지

 

牧隱詩稿卷之二十五

 

 詩

 

  醴泉君夫人蔡氏忌旦。柳承制夫人設齋于水精寺。僕往參焉。旣罷。入成均館謁聖。一黑笠在。不問姓名。觀碑石。無龜趺。訪金敬之湯飮。子明善奉盌。謁權庸夫商議。朴判書元祥隨至。廉廷秀從僕者也。於是小酌水飯。醉飽而歸。朴公好神仙之術云。

 

東方喪祭尙浮屠。蔡氏齋筵著老夫。歸向石橋分馬首。入趨槐市訊龜趺。

蜜湯跪進千金子。珍膳仍霑白飯奴。邂逅朴君耽道味。欲從山澤學仙癯。

 

3. 139~140쪽

 

상당군(上黨君)이 누상(樓上)에 주식(酒食)을 베풀었는데, 김경지(金敬之)가 마침 오다

 

웅장 화려해라 송경은 장엄하고

적막하여라 유동은 깊기만 한데

두 사람이 막 마주해 술 마실 새

육우가 또 갑자기 찾아오누나

기럭 그림자는 문득 가을빛이요

닭 우는 소리는 또 저녁이 되었네

누각 거주가 이게 바로 선경이라

백운시를 서로 부르고 화답하네

 

牧隱詩稿卷之二十五

 

 詩

 

  上黨樓上設酒食。金敬之適至。

 

翼翼松京壯。寥寥柳洞深。兩人方對酌。六友忽相尋。

雁影俄秋色。雞聲又夕陰。樓居卽仙境。唱和白雲吟。

 

 (3)제8권 - 3건

 

1. <86~87쪽> 어제 정포은(鄭圃隱) 제학공(提學公)이 이 판각(李版閣) 사위(士渭)과 이 판사(李判事) 집(集)와 김 대간(金大諫) 구용(九容)과 나의 문생 최(崔) 숭겸(崇謙)와 함께 술을 들고 찾아와서는, 전례(前例)에 따라서 꽃구경을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이에 청사 북쪽에 배꽃이 반쯤 피어 있는 곳으로 가서 시 짓고 노래 부르며 매우 즐겁게 노닐었는데, 이튿날에 시 한 수를 지어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2. <103~105쪽> 김 대간(金大諫)이 나를 찾아와서, 어제는 상관(上官)이 술을 금했기 때문에 황봉주(黃封酒)를 마시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난 뒤에 육우(六友)에 대한 시 세 수를 지어 읊었다.

 

3. <319~320쪽> 3월 12일에 육우(六友) 김경지(金敬之)와 도은(陶隱) 이자안(李子安)의 초청을 받고 한 청성(韓淸城)과 함께 정포은(鄭圃隱)의 산정(山亭)에서 꽃구경을 하기로 하였는데, 포은이 사명(使命)을 받고 출타 중이었으므로 봉선사(奉先寺)의 송강(松岡)으로 가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은이 돌아왔고, 판사(判事) 권주(權鑄)와 판사 민제(閔霽)와 판사 이호연(李浩然)과 판사 이사영(李士潁)이 또 왔는데, 이들은 모두 경지와 미리 약속을 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들 종학(鍾學)을 급히 보내 동년(同年) 정원재(鄭圓齋)를 불러오게 하였으며, 동년(同年)인 판서 박진록(朴晉祿)과 판사 이석지(李釋之)와 계우(契友)인 판서 최원유(崔元儒)와 우윤(右尹) 이서원(李舒原)도 모두 경지의 초청을 받고 자리에 모였다. 소나무 아래에 바람이 많이 불었으므로 장막을 치고 피하면서 연구(聯句)를 짓고 술잔을 주고받노라니 해가 벌써 지려 하였다. 이 판사가 저녁밥을 차려 주어 배불리 먹고 취한 뒤에 달빛을 타고 돌아왔다.

 

1. 86~87쪽

 

어제 정포은(鄭圃隱) 제학공(提學公)이 이 판각(李版閣) 사위(士渭)과 이 판사(李判事) 집(集)와 김 대간(金大諫) 구용(九容)과 나의 문생 최(崔) 숭겸(崇謙)와 함께 술을 들고 찾아와서는, 전례(前例)에 따라서 꽃구경을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이에 청사 북쪽에 배꽃이 반쯤 피어 있는 곳으로 가서 시 짓고 노래 부르며 매우 즐겁게 노닐었는데, 이튿날에 시 한 수를 지어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작년에 술 차고 와서 꽃구경을 하였는데

올해에도 그 날짜에 서로들 또 모였어라

사문들 모두가 다생의 인연을 맺은 이들

내가 병들었어도 몇 잔은 들 수 있고말고

구름 잎사귀 희미해라 하얀 해를 가리우고

해맑은 꽃잎 선명해라 푸른 이끼 비춰 주네

살포시 취하면서 새삼 느끼는 임금님 은혜

하늘 마음 받들어 인재를 기쁘게 길러야지

 

牧隱詩稿卷之二十八

 

 詩

 

  昨鄭圃隱提學公與李判閣 士渭, 李判事 集, 金大諫 九容,吾門生崔 崇謙 携酒而來曰。賞花也。前例也。廳北梨花半開。嘯吟歎甚。明日吟成 一首。

 

去歲看花佩酒來。今年此日又相陪。斯文盡是多生契。我病猶能數擧杯。

雲葉稀微遮白日。晴葩的歷照蒼苔。微酣更覺君恩重。願奉天心樂育才。  

 

2. 103~105쪽

 

김 대간(金大諫)이 나를 찾아와서, 어제는 상관(上官)이 술을 금했기 때문에 황봉주(黃封酒)를 마시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난 뒤에 육우(六友)에 대한 시 세 수를 지어 읊었다.

 

시와 술로 멋대로 지내며 만년이 되었다만

나는야 금곡엔 침을 뱉고 평천을 벗하노라

급암이 남긴 운치에 그 누가 비슷할까마는

육우의 풍류가 그래도 전인보다 낫겠는걸

 

조정에서 바라는 건 바로 풍년이니

상운과 예천인들 어디에다 쓰겠는가

벼 익고 물고기 살지면 주금도 풀리리니

그때 술상 앞에 풍악 울려도 좋으리라

 

최소년의 나의 벗은 오직 간의뿐

날마다 홍보주를 샘물처럼 마시는데

육우의 풍류가 도리어 우습게도 보이나니

노대는 술 없이도 작약 앞에서 시 읊는걸

 

牧隱詩稿卷之二十九

 

 詩

 

  金大諫來訪云。昨日上官酒禁。故無黃封。旣去。吟得 三首 六友也。

詩酒淸狂到晚年。僕奴金谷與平泉。及菴餘韻誰能似。六友風流却勝前。

朝廷所欲是豐年。何用祥雲與醴泉。稻熟魚肥開酒禁。不妨琴瑟列樽前。

諫議唯吾最少年。黃封日日酒如泉。風流六友還堪笑。老大醒吟芍藥前。

 

3. 319~320쪽

 

3월 12일에 육우(六友) 김경지(金敬之)와 도은(陶隱) 이자안(李子安)의 초청을 받고 한 청성(韓淸城)과 함께 정포은(鄭圃隱)의 산정(山亭)에서 꽃구경을 하기로 하였는데, 포은이 사명(使命)을 받고 출타 중이었으므로 봉선사(奉先寺)의 송강(松岡)으로 가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은이 돌아왔고, 판사(判事) 권주(權鑄)와 판사 민제(閔霽)와 판사 이호연(李浩然)과 판사 이사영(李士潁)이 또 왔는데, 이들은 모두 경지와 미리 약속을 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들 종학(鍾學)을 급히 보내 동년(同年) 정원재(鄭圓齋)를 불러오게 하였으며, 동년(同年)인 판서 박진록(朴晉祿)과 판사 이석지(李釋之)와 계우(契友)인 판서 최원유(崔元儒)와 우윤(右尹) 이서원(李舒原)도 모두 경지의 초청을 받고 자리에 모였다. 소나무 아래에 바람이 많이 불었으므로 장막을 치고 피하면서 연구(聯句)를 짓고 술잔을 주고받노라니 해가 벌써 지려 하였다. 이 판사가 저녁밥을 차려 주어 배불리 먹고 취한 뒤에 달빛을 타고 돌아왔다.

 

하늘 아래 헤어진 뒤 머리칼 어느새 희끗희끗

소강의 시대에 소요유를 함께 즐기지 않으리요

멸절 때마다 여러분과 함께 모이는 이 자리에

노물이 맨 먼저 육우의 부름을 받았다나요

홀로 우뚝 선 듯해서 솔에 청풍이 불어오나 봐

햇빛 비추는 숲의 꽃은 전혀 나부끼지 않는데

후생이 두려워할 만하니 이 몸은 슬슬 떠나가서

거룩한 조정을 찬미하며 시나 한 수 읊어야겠네

 

牧隱詩稿卷之三十一

 

 詩

 

  三月十二日。六友金敬之,陶隱李子安。邀與韓淸城賞花于鄭陶隱山亭。圃隱以使事出。於是至奉先寺松岡。旣而圃隱回。權判事鑄,閔判事霽,李判事浩然,李判事士潁又至。此皆與敬之有約者也。僕馳豚犬種學。邀同年鄭圓齋。而同年朴判書晉祿,李判事釋之,契友崔判書元儒,李右尹舒原。皆以敬之之招而集。松下風多帷以避。聯句飛斝日將夕。李判事設晚食。醉飽乘月而歸。

 

天下分離鬢二毛。小康胡不共逍遙。良辰每與諸公會。老物先承六友招。

松樹來風如特立。林花映日未全飄。後生可畏吾將去。只把新詩美聖朝。

 

(4)제9권 - 1건

 

<28~29쪽>

 

유항과 함께 광양군(光陽君)을 초청해서 하과(夏課)의 시험을 치르는 제생(諸生)을 보러 갔는데, 비가 내려서 야외에 있기가 불편하기에 귀산사(龜山寺)로 장소를 옮겨 각촉부시(刻燭賦詩)를 행하였다. 교관(敎官)이 술자리를 마련했기에 약간 취해서 돌아왔는데, 이 날 수행한 사람은 유항의 차자(次子)인 상경(尙敬)과 나의 아들인 종학(鍾學)․종선(鍾善)과 문생인 송문중(宋文中)이었으며, 거기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은 김제(金淛), 강회중(姜淮仲), 신권(辛權), 박관(朴貫), 유겸(柳謙) 등이었다.

 

두 노인네 어슬렁거리며 찾아가서는

여러분을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어라

산에 오르니 우러나오는 도의 맛이여

각촉부시 역시 천재를 보려 함이러라

햇빛을 머금은 정초 우거진 창이요

술잔에 가득 담긴 솔바람 소리라니

그런데 앞으로 우리 사문과 명교가

혹시나 부러지고 무너지지는 않을는지

 

<참조>

 

유항(柳港) : 韓脩의 호

광양군 : 이무방(李茂芳)의 호

 

牧隱詩稿卷之三十二

 

 詩

 

  同柳巷邀光陽君。觀夏課諸生。有雨不宜露坐。乃於龜山寺。刻燭賦詩。敎官設酌。微醉而歸。從者柳巷次子尙敬,吾豚犬種學,種善,門生宋文中。而適値者金淛,姜淮仲,辛權,朴貫,柳謙也。

 

二老翶翔去。諸公邂逅來。登山生道味。刻燭見天才。庭草窓含日。松風滿酒杯。斯文與名敎。只恐兩摧頹。

 

목은집 제10권과 제11권의 자료는 두어 편을 제외하고는 이전에 여러 종친들께서 올려주신 내용들입니다. 번역문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중복되더라도 함께 올리니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5)제10권 - 4건

 

1. <71~74쪽> 육우당기

2. <179~180쪽> 경상도 안렴사로 부임하는 송 도관(宋都官) 명의(明誼)를 전송한 글

3. <180~182쪽> 강릉도 안렴사 김 선생을 전송한 시의 서문

4. <220~221쪽> 급암시집 서문

 

1. 71~74쪽

육우당기(六友堂記)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 씨가 자기 집의 이름을 사우(四友)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강절 선생(康節先生)의 눈과 달과 바람과 꽃을 취한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그 뜻을 해설하여 기문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나는 굳이 강절의 그러한 뜻을 본받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한가한 틈을 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그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가 여흥[驪興 여주(驪州)의 옛 이름]에 있으면서 나에게 글을 보내 오기를, “지금 우리 모친의 집에 와서 보니, 강과 산과 경치가 너무나도 좋기만 합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꼭 눈과 달과 바람과 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에, 강과 산을 보태어서 육우(六友)라고 하였으니, 선생께서 이에 대해 가르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몸이 쇠해서 병든 지가 오래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시(天時)가 위에서 끝없이 변화해도 나는 그저 명청하게 바라다보고 있을 따름이요, 지리(地理)가 밑에서 조용히 순응해도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강절의 학문을 보면 상수(象數)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 그대가 비록 강과 산을 맨 윗자리에 올려놓고서 강절과는 같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려 하고 있지만, 《주역》의 육룡(六龍)과 육허(六虛)에서 바로 강절의 학문이 나왔고 보면, 육우(六友)라는 것도 결국은 강절에게로 귀속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내가 일단 강절의 그러한 뜻을 본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보면 그와 같은 설명은 그만 두어야 할 텐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찌 할 말이 없기야 하겠는가.

 

  산은 우리 인자(仁者)가 좋아하는 바이니 산을 보면 우리의 인(仁)을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요, 물은 우리 지자(知者)가 좋아하는 바이니 강을 보면 우리의 지(智)를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은 겨울에 온기(溫氣)를 덮어서 감싸주니 겨울에도 우리 기운이 중화(中和)를 잃지 않도록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요, 달은 밤에 밝음을 내어 비춰 주니 밤에도 우리 몸이 다치지 않도록 보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바람은 팔방(八方)으로부터 각각 때에 맞게 불어 주니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요, 꽃은 사시(四時)에 따라 각자 같은 종류끼리 모여서 피는 모습을 보여 주니 아를 통해서 우리가 질서를 잃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경지(敬之) 씨로 말하면 가슴 속이 쇄락(洒落)해서 한 점 티끌도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거처하는 곳의 산과 물 역시 밝고 푸르기만 해서 밝은 거울이요 비단 병풍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인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눈은 외로운 배를 타고서 도롱이를 쓰고 있을 적에 더욱 멋이 있을 것이요, 달은 높은 다락 위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일 적에 더욱 흥취가 날 것이며, 바람은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을 적에 그 맑음을 한층 더 느끼게 될 것이요, 꽃은 책상머리 앞에서 바라볼 적에 그 그윽함을 한결 더 실감하게 될 것인데, 여기에 또 사시(四時)의 승경(勝景)이 한데 어우러져 각자 분위기를 한껏 돋우면서 강과 산 사이에 가로세로로 걸쳐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경지 씨가 어버이를 옆에서 모시는 여가에, 강에 배를 띄우든가 산에 올라가 본다거나, 떨어지는 꽃잎을 세어 보든가 맑은 바람을 맞으면서 서 있어 본다거나, 눈길을 밟고 승려를 찾아가든가 달을 마주하고서 객을 불러 보노라면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흥치를 한껏 돋우어 주리니, 이쯤 되면 경지 씨야말로 한세상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천지는 우리의 부모요 만물은 우리의 벗이니, 이렇게 본다면 어디를 간들 벗을 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또 더군다나 대축(大畜)의 산과 습감(習坎)의 물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강습(講習)하게 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많이 알게 해 주니, 진정 우리의 유익한 벗[益友]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내용으로 육우당기를 지어 주는 바이다.

 

牧隱文稿卷之三

 

 記

 

  六友堂記

 

永嘉金敬之氏名其堂曰四友。蓋取康節先生雪月風花也。請予說其義。予不願學也。且無暇。未之應久矣。其左驪興也。以書來曰。今之在吾母家也。江山之勝。慰吾於朝夕。非獨雪月風花而已。故益之以江山曰六友。先生其有以敎之。予曰。吾之衰病也久天。時變于上。吾懜然而已。地理隤于下。吾冥然而已。康節之學。深於數者也。令雖以江山冠之。示不康節同。然易之六龍六虛。爲康節之學之所從出。則是亦歸於康節而已。雖然。旣曰不願學。則舍是豈無言乎。曰。山吾仁者所樂也。見山則存吾仁。水吾智者所樂也。見江則存吾智。雪之壓冬溫。保吾氣之中也。月之生夜明。保吾體之寧也。風有八方。各以時至。則吾之無妄作也。花有四時。各以類聚。則吾之無失序也。又況敬之氏胸中洒落。無一點塵滓。又其所居。山明水綠。謂之明鏡錦屛。無忝也哉。雪也在孤舟蓑 爲益佳。月也在高樓樽酒爲益佳。風在釣絲。則其淸也益淸。花在書榻。則其幽也益幽。四時之勝。各極其極。以經緯乎江山之間。敬之氏侍側餘隙。舟乎江屩乎山。數落花立淸風。踏雪尋僧。對月招客。四時之樂。亦極其極矣。敬之氏其獨步一世者哉。友同志也。尙友乎古。則古之人不可以一二計求友乎。今則如吾儕者亦豈少哉。然敬之氏所取如此。敬之氏其獨步一世者哉。雖然。天地。父母也。物吾與也。何往而非友哉。又況大畜之山。習坎之水。講習多識。眞吾益友也哉。於是作六友堂記。

 

2. 179~180쪽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부임하는 송 도관(宋都官) 명의(明誼)를 전송한 글

 

  백성을 길러주는 사람으로는 장자(長者)만한 이가 없다. 조정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야 내가 어떻게 흠잡을 수가 없다고 하겠지만, 사절(使節)을 받들고 가서 사방을 순시하는 사람이야말로 장자를 엄하게 가려 뽑아서 보내야만 할 것이다. 그는 풍속의 미악(美惡)을 살펴서 표창하고 규탄함은 물론이요 수령의 현부(賢否)를 심사해서 권장하고 징계를 행할 수가 있으니, 그러고 보면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권한이 그의 손 안에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권한을 어떻게 하루라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내줄 수가 있겠는가.

 

  국가에서 경기(京畿) 바깥으로 팔도(八道)를 세우고는, 부(府)와 주(州)와 군(郡)과 현(縣)이 마치 바둑판처럼 그 주위를 에워싸게 하였다. 그리고 매년 봄가을이 되면 조신(朝臣) 8인을 가려 뽑아 팔도에 나누어 보냈는데, 그 사람이 이름만을 좋아하다 보면 백성들이 으레 불행하게 되고, 그 사람이 관대하게 포용하는 정사를 펼치게 되면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게 마련이었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서 선발해 보내는 일을 매번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여기에 선발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과거에 내가 양부(兩部)에 참여하여 이 선발을 함께 의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도관(都官)인 송군(宋君)의 이름도 미상불 그 속에 들어 있곤 하였다. 그런데 도관이 수상(首相)인 태제공(泰齋公)의 인친(姻親)이 되는 까닭에 실제로 쓰이지 못했으니, 이는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를 천거하는 자들이 날로 불어나는 바람에 형세상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사적(私的)인 관계가 공론을 이기지 못하는 하나의 증거라고도 하겠다.

 

  도관은 근후(謹厚)해서 장자(長者)의 풍도를 갖춘 데다가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특별히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런데 경상도로 말하면 옛날 신라(新羅)의 전역(全域)을 차지한 곳으로서, 산천의 풍기(風氣)가 오래도록 쌓여 새어 나가지 않은 가운데 백성들에게 전해진 선한 풍습이 아직까지도 보존되어 오고 있는 터이다. 따라서 다스릴 지역이 넓고 처리할 업무가 많다고는 하더라도 백성을 부리기가 쉬워서 일을 쉽게 수습할 수가 있으니, 이런 점에서는 어떤 다른 도(道)도 따라올 수가 없다 하겠다.

 

  도관이 오래도록 방백(方伯)으로 쓰임을 받지 못하다가 이번에 쓰이게 되면서 이 도를 맡게 되었으므로 나의 기쁨이 더욱 크기만 하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큰 물고기에게는 큰 바다가 안성맞춤이라고 하겠지만, 재단(裁斷)하는 솜씨가 형편없는 자에게는 한 필의 비단도 아까운 법이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에 이 도야말로 서로 걸맞는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만 혼자서 크게 기뻐할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사대부들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가 떠나는 것을 노래로 지어서 찬미하는 이들이 마치 물이 밀려오듯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첫머리를 장식하는 서문(序文)만은 꼭 졸렬한 나의 글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도관의 생각인데, 도관이 나와는 안면이 없는 관계로 대신 자신의 뜻을 전달케 하였으니, 나에게 전달해 준 사람은 바로 나의 동료인 김군 백은(金君 伯誾)이었다.

 

牧隱文稿卷之七

 

 序

 

  送慶尙道按廉宋都官序 明誼

 

長民者莫如長者。朝廷之上。吾無間然。立使節咨諏四方。其人不可不重也。風俗之美惡。得按而彰殫之。守令之賢否。得廉而勸懲之。是刑賞之所在也。夫刑賞之柄。豈可一日畀之非其人乎。國家自京畿外立八道。府州郡縣。棋布環拱。歲春秋。選朝臣八人者分遣之。其人近名。民必戚。其人寬裕有容。民必受其賜。朝廷知其如此也。每重玆選。非其人。罕有得者。曩余嘗參兩府。與義是選者非一再矣。都官宋君。未嘗不在其中。而都官爲首相泰齋公姻親。是以不果用是避嫌也。擧之者日衆。其勢莫之沮。私不得以勝公也。都官謹厚有長者風。且於吏才尤長。慶尙。古新羅全境。山川風氣。積而不洩。流風善習。尙有存者。雖曰地鉅事多。然民易使。事易輯。他道莫之先焉。都官久不用。用而得斯道也。予是以喜之深也。巨魚之漎大壑是受。衣工不良。匹錦可惜。斯人也斯道也。其不相稱矣乎。非獨予喜之深也。一時士大夫。莫不爲之喜也。故歌其行者源源而未已。序其首必以拙語。都官之意也。都官不吾面。而其意達于吾者。吾同僚金君伯誾也。

 

3. 180~182쪽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 김 선생을 전송한 시의 서문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로 청명(淸明)한 기운과 탁란(濁亂)한 기운이 서로 그 사이에서 쇠했다 성했다 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비록 호걸스러운 인사라 할지라도 ‘홀로 우뚝 서서 변화를 받지 않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다행히 청명한 기운이 성한 때에 태어나서 태평 시대를 만나게 될 경우에는, 살아서는 성현(聖賢)이 되고 죽어서는 밝은 신명이 되어 당세에 명성이 부함됨은 물론이요 후세에도 끝없는 은택을 끼쳐 주게 되겠지만, 불행히도 탁란한 기운이 성한 때에 태어나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 말세(末世)와 될 경우에는, 걸핏하면 화(禍)만 뒤따를 뿐이요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게 된 채 그저 목숨만 유지하다가 허망하게 죽고 말 따름이니, 이 또한 너무나도 애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해 온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겠다.

 

  그 동안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겨우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는데,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옛 이름]의 김씨(金氏) 형제도 그 중의 하나였으니, 백씨(伯氏)는 자(字)가 경지[敬之 김구용(金九容)]요 숙씨(叔氏)는 자가 중현[仲賢 김제안(金齊顔)]이었다. 두 분 모두 총명하여 뛰어난 재질을 지니고 있는 것은 똑같았으나, 다만 숙씨의 경우로 말하면 역적 신돈(辛旽)이 사납게 날뛰는 날을 당하여 영민하고 예리한 그 기질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따금씩 그 기질을 발휘하면서 분연히 일어나 빈손으로 맹수를 때려잡고 맨주먹으로 날카로운 칼날에 맞서려 하다가 끝내 화를 당한 나머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반면에 경지(敬之)는 편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거하면서 외물(外物)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이 수사[洙泗 공자의 고향으로 유가(儒家)를 뜻함.]의 가르침을 깊이 음미하였는데, 그 강령(綱領)과 조목(條目)이 모두 《대학(大學)》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가하고는 아침저녁으로 반복하여 공부하면서 빈틈없이 몸에 익혔다. 그리하여 사변(事變)에 응수할 적에도 한결같이 이에 입각해서 자신을 드러낸 결과, 이른바 자겸(自慊)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내 속에 들어 있는 기운을 배양함으로써 저 탁란한 기운에 녹아나지 않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러다 지금에 와서는 정치를 개혁하여 조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진 가운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떨쳐 일어나 생기를 띠게 되었는데, 경지가 바로 이런 때에 맨 먼저 조정에 선발되어 강릉도(江陵道)를 안찰하는 책임을 맡고서 한 도를 전제(專制)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선비의 크나큰 영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릉도로 말하면 백성이 순박하고 업무가 간소한 데다 기이하고 그윽한 경치가 또 빼어나서 천하의 으뜸이 되는 까닭에, 안렴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얻어서 즐겨 봤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경지 자신은 이를 평범한 일처럼 간주하기만 할 뿐 근심스러운 기색도 용모에 나타내지 않고 기쁜 표정도 안색에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홀로 우뚝 서서 변화를 받지 않는’ 경우와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조정의 사대부들이 그의 부임을 축하하며 노래 부르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경지의 마음 속 경지가 이러하다는 것을 안다고는 할 수 없겠기에, 여기에다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서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덧붙여서 일러둘 말이 또 하나 있다. 상이 바야흐로 학교를 일으켜서 교화(敎化)를 앞세우고 형명(刑名)을 뒤로 하고 있는데도 유술(儒術)의 효과가 환하게 드러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를 두고 오활(迕闊)하다면서 비방하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선생은 이미 《대학》에 밝다는 이름을 얻은 분이요, 게다가 성균관(成均館)의 교관(敎官)을 거쳐서 안렴사가 된 것이 또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보면, 선생이야말로 더욱 힘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나 역시 앞으로 《대학》의 실효(實效)가 어떻게 나타날지 눈을 씻고서 기다려 보려 한다.

 

牧隱文稿卷之七

 

 序

 

  送江陵道按廉金先生詩序

 

有天地來。淸明濁亂之氣。相爲消長於其間。雖豪傑之士。卓然不爲所變者甚鮮。是以。幸而與淸明之氣相遭乎大平之世。則生爲聖賢。沒爲明神。聲孚于時。流澤之岡極也。不幸而與濁亂之氣相薄乎衰否之季。則動而禍隨之。得不竝失。徒生徒死。不亦可哀之甚哉。予之念此蓋久。志予同者。數人而止耳。永嘉金氏兄弟。亦其一也。伯氏字敬之。叔氏字仲賢。甫聰明有俊才。二公如一。而叔氏當逆旽跋扈之日。不能抑其英銳之氣。時而用之。奮然欲以赤手擊猛戰。空拳御利刃。卒罹其禍而隕其身。敬之則恬靜自居。不牾於物。深有味於洙泗之旨。以爲綱目盡在大學書。朝夕反復。體之周密。酬應事變。一於是而發之。故其所謂自慊者。已無遺恨。其所以培養在吾之氣。而不爲彼氣之所爍焉者。蓋可知已。及今更化。朝著蕭穆。物於國者。振振有生意。而敬之首應廟選。按部江陵。專制一道之命。士之所甚榮。而江陵道民醇事簡。奇幽環偉之觀甲天下。爲按廉者之所願得而樂爲者。敬之自視如平時。憂不介乎容。喜不形乎色。殆所謂卓然不變者歟。朝之大夫士歌詠其行者。未必皆知敬之之所存如是也。故序其所以知者。而重有以告焉。上方興學。先敎化而後刑名。然儒之效不白久。世猶以迂闊詆訕之不止也。先生旣以明大學稱。由成均敎官爲按廉者。又自先生始。其尙勉之哉。予將刮目以竢夫大學之有實效。

 

4. 220~221쪽

 

《급암시집(及菴詩集)》 서문

 

육의(六義)가 일단 무시된 가운데 성률(聲律)과 대우(對偶)의 작법(作法)이 또 세상에 나오면서 시가 극도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시(古詩)가 변해서 제(齊)․양(梁)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가늘어지고 유약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율시(律詩) 역시 만당(晩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만 잘게 부서져서 좀스럽게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유독 두 공부[杜工部 두보(杜甫)]가 출현하여 여러 가지 시체(詩體)를 겸비하고서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작품으로 내놓곤 하였는데, 그 드높은 시풍(詩風)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고금(古今)의 모든 시들을 압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 사이에 초연히 묘오(妙悟)한 면모를 보이면서 세속의 흐름에 빠지지 않은 자로는 도연명(陶淵明)이나 맹호연(孟浩然) 같은 이들을 들 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어느 시대이고 간에 없기야 했겠는가마는, 그들의 시집이 편집되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드물기만 하였으므로 아쉬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도연명과 맹호연의 두 시집을 보더라도 겨우 약간의 시편(詩篇)만 남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불만스러운 탄식을 발하곤 하는데,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런 시집을 통해서나마 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사람들을 알 수가 있고, 그리하여 노두(老杜 두보의 별칭)로 하여금 천지 사이에서 자기 혼자 아름다움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였고 보면, 편집을 해서 후세에 전한 그 공로를 어찌 작게 평가할 수가 있겠는가.

 

  또 더군다나 당(唐) 나라의 한자[韓子 한유(韓愈)]나 송(宋) 나라의 증공(曾鞏)과 소식(蘇軾)으로 말하면, 천하에서 문사(文辭)를 잘 짓기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인데도 정작 시도(詩道)의 측면에서 보면 마음에 차지 않는 점이 있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유감으로 여겨 왔다. 그러고 보면 시다운 시에 대해서 또 어떻게 기교가 부족하다거나 양이 적다는 등의 이유를 가지고 따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되뇌어 온 지가 오래 되었는데, 급기야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선생의 시를 읽어 보고 나서는 이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선새의 시는 담박한 듯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화려한 듯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는데, 문자의 표현 속에 깃든 뜻이 참으로 심원해서 읽으면 읽으수록 더욱 맛이 우러났다. 그리하여 선생의 시도 어쩌면 초연히 묘오(妙悟)한 면모를 보이는 유파에 속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였으니, 후세에 전해질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선생의 외손(外孫)인 제민[齊閔 김구용(金九容)의 초명(初名)]과 제안(齊顔) 형제는 모두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왕년에 정신없이 피난을 떠날 적에도 이 시집을 분실하지 않고 제대로 간수하고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서문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가 그 뜻을 그지없이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그 시집의 첫머리에다 이렇게 서문을 써 주게 되었다.

 

牧隱文稿卷之九

 

 序

 

  及菴詩集序

 

六義旣廢。聲律對偶又作。詩變極矣。古詩之變。纖弱於齊,梁。律詩之變。破碎於晚唐。獨杜工部兼衆體而時出之。高風絶塵。橫蓋古今。其間超然妙悟。不陷流俗如陶淵明,孟浩然輩。代豈乏人哉。然編集罕傳。可惜也。今陶,孟二集。僅存若干篇。令人有不滿之嘆。然因是以知其人於千載之下。不使老杜專美天壤間。是則編集之傳。其功可小哉。又況唐之韓子。宋之曾,蘇。天下之名能文辭者也。而於詩道有慊。識者恨之。則詩之爲詩。又豈可以巧拙多寡論哉。予之誦此言久矣。及讀及菴先生之詩。益信先生詩似淡而非淺。似麗而非靡。措意良遠。愈讀愈有味。其亦超然妙悟之流歟。其傳也必矣。先生之外孫齊閔,齊顏。皆以文行名于時。去歲倉卒之行。能不失墜。又來求序。其志可尙已。予故題其卷首如此

 

  (6)제11권 - 14건

 

1. <70~71쪽> 김경지(金耕地之)에게 지어 준 척약재명(惕若齋明)

2. <85~87쪽> 척약재(惕若齋)의 학음(學吟) 뒤에 쓰다.

3. <93~94쪽> 급암(及菴)의 시집에 붙인 발문

4. <175~178쪽> 중대광(重大匡) 청성군(淸城君) 시(諡) 평간공(平簡公) 한공(韓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竝書)

5. <178~187쪽>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묘지명 병서

6. <187~190쪽>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金氏)의 묘지명 병서

7. <211~217쪽> 송당(松堂) 선생 김공(金公) 묘지명 병서

8. <217~221쪽> 해평군(海平君) 시(諡) 충간(忠簡) 윤공(尹公) 묘지명 병서

9. <222~230쪽> 유원(有元) 고려국(高麗國)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 중대광(重大匡) 서녕군(瑞寧君) 시(諡) 문희(文僖) 유공(柳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竝書)

10. <233~243쪽> 유원(有元) 자선대부(資善大夫)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 고려국(高麗國)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묘지명 병서

11. <243~247쪽> 파평군(坡平君) 윤공(尹公)의 묘지명 병서

12. <248~250쪽>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의 묘지명(墓誌銘) 병서(竝書)

13. <250~255쪽> 계림 부윤(鷄林府尹) 시(諡) 문경공(文敬公) 안 선생(安先生)의 묘지명 병서(竝書)

14. <288~295쪽> 정씨(鄭氏)의 가전(家傳)

 

1. 70~71쪽

 

김경지(金耕地之)에게 지어 준 척약재명(惕若齋明)

 

하느님이 임하신 듯 두려워하고

엄한 스승 대하듯 겁을 내면서

언제 어디서나 분명하게 행할지라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것처럼

봄날의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오직 정밀하게 살펴서 행할지라

분명하지 못하면 혼매해지고

정밀하지 못하면 난잡해져서

교만과 인색의 싹이 돋는 법

거드름 부리며 멋대로 행동하면

얼마나 아슬아슬 위태로울까

그 인생 의미가 없다 하리라

생각건대 우리 경지 씨 역시

바로 이 점을 두렵게 생각해서

거처에다 이런 이름 붙였으리라

주공의 효사와 공자의 단사

동정(動靜) 간에 항상 몸에 지니고서

물 가득한 쟁반을 받쳐 들듯 하라

더군다나 학자가 걱정할 것은

중도에 혹 그만두게 되는 것이니

모쪼록 끝까지 이루도록 할지어다

친구끼리는 서로 인을 도우면서

충고를 급하게 여기야 하는지라

감히 이렇게 명을 지어 권면하노라

 

牧隱文稿卷之十二

 

 銘

 

  惕若齋銘。爲金敬之作。

 

上帝之臨。嚴師之劫。所在惟明。虎尾之蹈。春氷之涉。所察惟精。

匪明斯昏。匪精斯雜。驕吝之萌。侈然自放。殆哉岌岌。乃罔之生。

惟敬之甫。念玆以惕。爲居室名。周爻孔彖。動持息夾。盤水之盈。

況學之患。中而或跲。當致厥成。友以輔仁。忠告是急。敢鞠斯銘。

 

2. 85~87쪽

 

척약재(惕若齋)의 학음(學吟) 뒤에 쓰다.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민 선생의 시를 보면, 언어의 표현이 평범하고 담박하면서도 그 속에 들어 있는 뜻은 정밀하고 심오하기만 하다. 당시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과 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 선생이 죽헌[竹軒 김륜(金倫)] 정승과 함께 같은 동네에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철동 삼암(鐵洞三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급암은 바로 죽헌의 사위인데, 죽헌이 세상을 떠나자 급암이 또 그 집에 와서 살았으므로, 삼암(三菴)의 칭호가 끊어지지 않은 가운데 한 세상의 종주(宗主)로 계속 추앙을 받게 되었다.

 

  나는 한참 늦게 태어났으면서도 다행히 평소에 만나 뵙고서 그분들 모두의 빛나는 도덕(道德)을 접하고는 종신토록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앙모(仰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행운 중에서도 기막힌 행운을 얻은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에 익재 선생이 매번 찬탄하면서 이르기를, “급암이 시 짓는 법을 보건대 천연(天然)의 정취를 스스로 터득하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졸옹(拙翁) 언명(彦明) 씨는 성품이 호방하고 활달해서 남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유독 급암만은 무척이나 아낀 나머지 노닐 적에는 말을 나란히 타고 다니고 잠잘 적에는 침상을 마주하고 하였다. 그 두 사람은 가인(家人)에게 집안의 살림살이를 물어보지 않는 것도 똑같았고, 술을 좋아하며 즐기는 것도 똑같았다.

 

  내가 급암의 문하에 드나들 적에는 급암의 연세가 벌써 노년에 접어든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암은 여전히 온화하면서도 한아(閑雅)한 군자의 모습을 잃지 않고서 혹시라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자신을 낮추어 후진(後進)을 이끌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높은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추한 나의 집까지 왕림하여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해져서야 헤어졌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을 감히 잊지 못하고 있다.

 

  김경지[金敬之 김구용(金九容)] 씨는 급암의 외손(外孫)이다. 그는 급암 선생의 집에서 생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자 또 급암에게 배우면서 익재와 우곡에게 직접 훈도를 받는 행운을 얻기까지 하였다. 본래 꾸불꾸불한 쑥도 삼밭 가운데에서 자라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지는 법이니, 이는 형세상 필연적인 이치이다. 또 더군다나 경지 씨로 말하면 타고난 자질이 워낙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동배(同輩)가 감히 끼어들 수도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금 경지 씨의 학음[學吟 습작시(習作詩)]를 살펴보건대, 그의 시법(詩法)이 급암과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더욱 알겠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훌륭한 부형이 있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시(詩)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시를 운운(云云)하고 있지만, 시라는 것이 어찌 문장만을 가리키는 것이겠으며 학문만을 가리키는 것이겠는가. 아, 시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牧隱文稿卷之十三

 

 書後

 

  題愓若齋學吟後

 

及菴閔先生詩。造語平淡。而用意精深。其時。益齋先生,愚谷先生與竹軒政丞居同里。號鐵洞三菴。及菴。竹軒壻也。竹軒仙去。而及菴又來居其第。三菴之稱未絶。一世宗之。予晚生。幸及平時。皆得接其道德之輝。以爲終身山斗之仰。蓋幸之幸也。益齋先生每嘆曰。及菴詩法。自得天趣。又言拙翁彥明父性放達。少許可。獨愛及菴甚。游聯騎。宿對床。不問家人有無生產。又同嗜酒。又同樂也。予之往來及菴之門也。及菴年已衰矣。而溫溫閑雅。俯引後進惟恐後。一日。狂高軒陋巷。坐樹陰移日而去。予至今未敢忘。外孫金敬之氏生長于及菴先生之家。及志學。又學于及菴。得以親炙益齋,愚谷。故其蓬生麻中。不扶而直。勢所必至。又況生質粹美。儕輩莫敢齒乎。今觀學吟。益知詩法絶類及菴。人樂有賢父兄。詎不信然。嗚呼。詩豈易言哉。文章云乎哉。學問云乎哉。嗚呼。詩豈易言哉。

 

3. 93~94쪽

급암(及菴)의 시집에 붙인 발문

 

  과거에 내가 이미 김씨 형제를 위해서 그들의 외조부인 급암(及菴) 선생의 시에 서문을 지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경지(敬之)와 성균관에 함께 있게 되었는데, 경지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틈이 날 때면 언제나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와 하루에 한 장씩 정서(正書)하면서 한더위에도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는, 내가 더욱 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는 경지가 외가(外家)에서 생장하였던 까닭에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진 데다가 천성적으로 문묵(文墨)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또 이처럼 부지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교정하면서 베껴 쓰는 일을 마치게 되었을 때, 마침 선생의 문인(門人)인 이 단공 이(李端公頤)가 경상도 안찰사가 되었으므로, 그 덕분에 목판에 새겨 간행하는 일을 이룰 수가 있었으니, 경지의 독실한 효성을 하늘이 알고서 도와 준 것이 아니겠는가.

 

  경지의 아우님은 중원(中原)에 들어가 유력(遊歷)하다가 하남왕(河南王)의 군문(軍門)에 상서(上書)한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한 상을 크게 받고, 중의대부(中議大夫)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中書兵部郎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의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귀국한 뒤에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경지는 이름을 구용(九容)이라고 고쳤는데, 지금 민부(民部)의 의랑(議郞)으로 옮겨졌으나 강관(講官)의 직책은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한다.

 

牧隱文稿卷之十三

 

 跋

 

  跋及菴詩集

 

曩予旣爲金氏兄弟序其外大父及菴先生之詩矣。及今與敬之同在成均。每見敬之受徒餘暇。輒屛靜處。日書一紙。豐暑不輟。予益重之。蓋敬之生長外家。故知慕尤深。性喜文墨。故不怠如此。繕寫甫訖。先生門人李端公頤適按慶尙。鋟梓之功。由玆克成。豈天相敬之篤孝之誠耶。弟公入游中原。上書河南王軍門。大蒙賞異。拜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旣歸。不幸而殞。敬之更名九容。今遷民部議郞。講官如故云。

 

4. 175~178쪽

중대광(重大匡) 청성군(淸城君) 시(諡) 평간공(平簡公) 한공(韓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竝書)

 

  상이 즉위한 지 14년째 되는 해에 평간공(平簡公)이 처음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에 신년을 하례할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낼 즈음에, 재신(宰臣)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지금 승상(丞相)이 황궁의 뜨락에 군사들을 배치해 놓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조근(朝覲)하여 회동(會同)하는 일이 다른 날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신들이 적당한 사신을 뽑아 보내기가 실로 어렵기에,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에게 청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 날 즉시 유지(有指)를 내려 “한모(韓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하고는, 공을 불러들여 면유(面諭)하기를 “정유년에 그대가 성절(聖節)을 축하하러 갔었는데, 떠날 때에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돌아와서도 허세를 부리며 속이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가상하게 여기면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으니, 이번에도 그대가 가서 공경하게 일을 행하고 오라.” 하니, 공이 두 번 절하고 사례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불초한 몸으로 추부(樞府)의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 다른 재능이 없어서 은혜에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신으로 가는 일을 어찌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과연 상의 뜻에 걸맞게 사명(使命)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봉군(封君)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서 쉬게 되었으나, 머지않아 다시 기용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차에, 느닷없이 이처럼 세상을 버리고 말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공은 성이 한씨(韓氏)이니, 대대로 청주(淸州)에서 살았다. 먼 선조인 난(蘭)은 개국 초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그 뒤에 가장 명성을 떨친 분으로 강(康)이 있는데, 원종(元宗) 때에 성균관에서 시험을 관장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을 보좌하여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를 맡았으며,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으니,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문혜가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를 낳고, 간의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악(渥)을 낳았으니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사숙은 일찍이 기발한 계책을 발휘하여 원(元)나라에서 참소를 받고 수난을 당하던 충숙왕(忠肅王)을 구하였고,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을 도와 두 번이나 총재(冢宰)를 지냈으며, 태묘(太廟)에 배향되었다. 사숙이 동지밀직 전리판서(同知密直典理判書) 원경(元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낳았다. 대순(大淳)은 죽을 때의 관직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였고, 중례(仲禮)와 방신(方信)은 모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공은 둘째 아들이었는데,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하였으므로 당시에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였다. 불법(佛法)을 배운 다른 아들은 각성(覺星)이라 하였는데, 그 역시 조계(曹溪)의 시승(詩僧)이었다.

 

  공의 휘는 공의(公義)요, 자는 의지(宜之)인데, 향년 59세로 생을 마쳤다.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남부 녹사(南部錄事)가 되었는데, 일찌감치 영릉의 지우(知遇)를 받고 호군(護軍)으로 뛰어오른 뒤에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 삼사우윤(大護軍三司右尹)에 이르렀다.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는 염담(恬淡)한 생활 태도 때문에 당시의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전주 목사(全州牧使)로 외방에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 때에 소부(小府)와 위위(衛尉)와 선공(繕工) 등 세 곳의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총릉[聰陵 충정왕(忠定王)] 때에 대언(代言)으로 발탁되었는데, 총릉이 왕위를 물려주던 날에 백마산(白馬山) 아래로 달려가서 음식을 바치고는 사사로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군신(君臣) 간에는 처음과 끝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금상(今上)이 공을 충성스럽게 여겨 오래 전부터 그 재능을 시험해 보려 하다가, 관제(官制)를 개편하고 나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였으며 얼마 뒤에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옮겨 주었다. 2년이 지나 형부(刑部)로 자리를 옮겼는데, 당시에 전지(田地)에 대한 송사(訟事)가 불법적으로 처리된다면서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다. 이에 공이 사안(事案)에 따라 재량껏 공정하게 해결해 주자 원망하는 소리가 사라졌다. 조당(朝堂)에서 관리들이 결재 서류를 싸들고 와서 서명을 청할 적에, 불가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반복해서 자신의 뜻을 보인 뒤에야 서명을 하곤 하였으니, 이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부인 경씨(慶氏)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의 딸이요 찬성사(贊成事) 정해(鄭瑎)의 외손인데, 주부(主婦)로서 화순(和順)하였고 모친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 수(脩)는 옛 성현으리 글을 좋아하고 문재(文才)가 출중하여 과거에 급제한 뒤에 관직(館職)을 역임하고 나서 지금 군부 판서(軍簿判書)로 재직 중이다. 다음 이(理) 역시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면서 지금 개성 판관(開城判官)으로 있다. 다음 제(齊)는 별장(別將)으로 지금 과거 공부 중이다. 딸 셋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종부 영(宗簿令) 김사겸(金士謙), 삼사우윤(三司右尹) 이창로(李彰路), 군부 판서 염흥방(廉興邦)이 사위들이다. 손자가 넷인데, 우복(祐復)은 별장이고, 다음은 선복(善復)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손녀는 다섯이다. 외손자는 김우(金禑)인데 권무(權務)이고, 외손녀는 둘이다.

 

  11월 갑신일에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산기슭에 장례를 행할 즈음에, 수(脩)와 흥방(興邦)이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부탁하였다. 공의 아들과 사위는 나의 벗이다. 벗의 부친의 묘지명을 내가 어떻게 차마 사양하겠는가. 공은 자상(慈祥)하고 근검(勤儉)하엿으며 모든 일을 예법에 따라 행하였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경륜을 가슴 속에 쌓아 두기만 하고 발휘하지 못한 채, 하루도 국정(國政)을 전담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긴 하지만 한 몸의 행동 모두가 예법에 합치되었고 자제들을 가르쳐서 성취시켰으며 죽은 뒤에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얻었고 보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후세에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유감이 없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문해공의 손자요

사숙공의 아들로서

훌륭한 형제들과 함께

선대의 아름다움 이어받았네

공이 총릉을 섬긴 걸 보오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나니

공의 충성심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그토록 발탁될 수 있었으리

황제의 뜨락에 조회한 것이 두 번

그때마다 임금님 뜻에 맞았나니

때를 얻었다고 사람들은 말했으나

공은 곧장 돌아와 집에서 쉬었다오

당시에 높고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텐데

그만 이 정도로 끝나고 마시다니

하늘의 도리를 뉘에게 물어볼까

내가 여기에다 시를 지어서

오는 세상에다 물어보리라

 

牧隱文稿卷之十六

 

 墓誌銘

 

  重大匡淸城君韓諡平簡公墓誌銘 幷序

 

上之十四年。平簡公始拜密直副使。其冬。將賀來歲正京師。宰臣入對。令丞相鎧甲殿庭。號令天下。朝覲會同。非他日比。臣等實難其使。謹昧死請。卽日有旨非韓某不可。召公入面諭曰。丁酉之賀聖節也。去無難也。來無躛言。予惟汝嘉。迄今不忘。汝往敬哉。公再拜謝。臣不肖備位樞府。無他材能以效萬一。敢使事之避。使還果稱旨。未幾封君就第。猶冀其起之不久也。嗚呼。遽至於斯乎。公姓韓氏。世爲淸州人。遠祖蘭。有功國初。號三韓功臣。其後最盛者曰康。在元王時。掌試成均。相忠烈王。兩知貢擧。中贊致仕。諡文惠。文惠生諫議大夫謝奇。諫議生上黨府院君渥。諡思肅。嘗以奇謀。脫忠肅王。明夷之中。相永陵再爲冢宰。配食大廟。思肅娶同知密直,典理判書元卿之女。生子五人。大淳。卒官知都僉議司事。仲禮,方信。皆政堂文學。公於次爲第二。兄友弟恭。時人慕之。學浮屠法者曰覺星。亦曹溪韻釋也。公諱公義。字宜之。享年五十九。初以門蔭。錄南部事。蚤爲永陵所知。超授護軍。累轉大護軍,三司右尹。安恬忤時輩。出牧全州。有惠政。明陵時。歷小府,衛尉,繕工三判事。聰陵擢代言。遜位之日。奏食白馬山下。私謂人曰。君臣須有終始。今上以爲忠。久欲試其能。官制行。拜散騎常侍。未久。改戶部尙書。再歲。遷刑部。訟田訟不法。群口迭咻。隨事裁遣。人無怨言。其在朝堂。吏抱成案請署。遇不可。反覆以示其意。然後署。蓋非偶然者。夫人慶氏。右代言斯萬之女。贊成事鄭瑎之外孫。爲婦爲母。以順以則。男三人。曰脩。好古而文。由及第歷館職。今爲軍簿判書。次理。亦及第有名。開城判官。次齊。別將。學擧業。女三人。皆先沒。宗簿令金士謙,三司右尹李彰路,軍簿判書廉興邦。其壻也。孫男四人。祐復。別將。次善復。餘幼。女五人。外孫男金禑。權務。女二人。將以十一月甲申。葬臨津縣瑞谷南麓。脩,興邦來乞銘。公之子壻。予友也。銘友之父。何忍辭諸。公慈祥勤儉。動循禮法。蘊而不發。經濟之具。一日不獲專乎國政。天也。雖然。身無擇行。敎子有成。歿得美諡。是足以傳諸其後矣。亦可以無憾也夫。銘曰。文惠之孫。思肅之子。振振弟兄。克世其美。公事聰陵。旣有終始。不問其忠。其能可使。再覲大庭。還必稱旨。衆曰時哉。公則退矣。維時巍巍。莫或尙此。而止於斯。孰徵其理。我庸詩之。以訊來世

 

 46) 정재선생일고 2권 부록에 수록된 척약재 할아버지 상소문  (2007. 3. 9. 윤식(문) 제공)

貞齋先生逸穡卷之二  

 

 附錄

 

愓若齋金九容上疏 008_518b

 

伏以臣至愚極陋。才學掃如。病伏田里。恒人不齒。不意誤恩承召。來往道路。觀者譏笑多矣。爲臣之計。豈不知量力揆分。甘心邱壑。杜門事親。養雞種黍。優游此生。忘世肆志之爲便。而貪戀寵榮。已去復來。不但人笑之。臣亦自笑之。惟是聖君一念。根於秉彝。銷鑠不得。遲回輦下。不忍遽歸者。亦何心哉。天恩罔極。圖報無路。苟有一毫裨益吾君。則摩頂放踵。亦且不辭。目見時事。已至於不可爲之地。痛心疚懷。私自出涕。此而不言。臣實有罪。嗚呼。殿下之國。危哉危哉。滿江風雨。漏船載溺。而副手梢工。誰勝其任。思之慓慓。見之慘慘。不言則心塞。欲言則言長也。門下侍中鄭夢周,藝文提學朴宜中,翰林李穡。精忠節義。道德事業。求之前代。復有幾人。雖在千載之上。亦可尊而敬之。愛而慕之。精神會之。夢寐求之。懦可立。頑可起。貪可廉。足以爲百世之師。而雖謂之昭乎日月不足以爲明。萃乎泰山不足以爲高。不爲過語矣。退在田野。淸名懿聲。藏佩一身。士林仰如北斗。天下問其死生。如此而生。如此而死。其誰敢侮之。其誰敢辱之。殿下尊之敬之。致之以誠。仰之以禮。強而後至。則此豈貧戀官爵。亦豈喜敗國事者哉。以爲當今可言者非一。而惟是天官進退人材擧措。實關治道之大。故見其行私。一言斥之。實三臣愛君忠國之心。所以不能自已者也。河時萬,卞貞基,馬仁國。何人也。譏之斥之。侮之辱之。悖理咈性。至於如此。臣未知其心之所在也。至於前博士金得榮。一回邪人也。權勢在倖門。則甘爲門客。多結子弟。而惟所欲之。辭曰無他謫議。未免因循者。一字一句。無非抑揚。陰附銓官。顯斥大臣。臣切痛之。且時萬之輩。爲自欺其心。又欺其君。則侵侮大臣。使不安於朝者。亦非細事也。小人之惡。莫甚於欺其心。臣子之罪。莫大於欺其君。今日之禍。莫甚於護其黨。殿下何不痛絶之。明示好惡之正。而必待於前門下侍中鄭夢周,藝文提學朴宜中,翰林李穡忠諫之疏。而只罷馬仁國。又不加罪於河時萬乎。是故。數人暗窺殿下之淺深。又爲之張皇辭說。隱然有譏斥大臣之志。臣實愍之。嗚呼。殿下之國危哉。天下之名儒。被人譏侮。攻斥。至於如此。而朝廷大臣。視之尋常。則其他亦復何說。臣恐有志識之士。恐入山林之深而不肯來矣。來者亦望望去之矣。此三臣。天下之名儒。士林之領袖也。況明主之千載一時。三臣之退。人心所在也。正陰陽交爭。風雨方晦之日。而皆思退歸。不念國家。則奈聖恩何。奈社稷宗廟何。不敢不盡其學問淺深。而杜門講學。消遣世念。若將終身。至被先朝累召之勤。而不敢一出者。豈是忘君父樂違慢哉。夫子使漆雕開仕。曰。吾斯之未能信。三臣蓋有所受也。頃者首被新命。眷意甚惻。國有大慼。不敢不來。及拜淸宦。累辭不獲。則出謝之後。卽請入對者。亦豈欲納師友之私疑。敍平生之堅誓者哉。殿下悔悟。深自咎責。至遣承旨。勉留慇懃。待士之禮。迥出百王。所以風動四方。感激人心。而謗誣此臣之言。從而出矣。然殿下待時日復光。不以常規。而此臣之自處。不稱其禮。則反爲殿下之羞矣。一出城門。則終於退歸而已。若復貪慕殊眷欲去不去。着已掛之冠。帶已致之職。入已出之門。偃然行號唱於道路。則人復謂之何哉。廉恥禮節。關係世道。此臣雖欲自輕。奈朝廷何。古人之言曰。將軍有揖客。顧不重歟。殿下之待士。愈卑愈盛。此臣之自處。愈高愈懿。世間無大耳目。故以爲創見而異之。又有不樂士流者。從而和之。譏議嘲罵。溢世盈耳。使殿下之禮意。不勝權輿。而士林之顒望。至於落 。臣切歎之。三臣歸臥林泉。怡養自適。樂與村秀才尋行數墨。等功名於浮雲。終吾生而徜徉。亦不負天界矣。惟是殿下旣失此老於山林之後。又不致士千里之外。則臣恐國家之事。稅駕無所也。殿下何不特下召旨。曲盡誠意。期於必致而後已乎。臣於公退之暇。見其動靜。則前後進退。節次曲折。大槩言之。至於流涕曰。聖眷如許而終乃退歸。潔身亂倫。非爲自使計也。低回復留。恐爲朋黨之禍將及己也。已曉其心之所在矣。嗚呼。聖賢之學。帝王之治。固殿下今日急務。而臣不暇進其一言。而乃敢汲汲於此者。三臣之朝夕講求。乃可以進學功明治道。故甘受一時之謗。冒瀆哀疚之中。而冀殿下授以相當之職。勿輕許遞。詢以當爲之事。而必務聽從焉。臣之前後所進儀禮二冊儀註甚詳。其中朝祔祭及群臣喪服等三事。最不可闕者。竟不見施。識者恨之。欲聖殿下更議大臣。斷然行之。第無少憾於大事焉。竊謂三事。實是大節目。而殿下猶此不行。則聖賢之學。帝王之治。雖日進其說而恐無補於受用之地。此臣所以感於中而達於上也。伏願殿下加察焉。

 

 * 위의 상소문 일부가 인용된 정재 박의중 신도비명의 일부

 

박의중 신도비명

 

<역해>

 

정재 박선생은 고려말에 바른 학문과 곧은 도를 행한 당시의 명현이었으며, 말년에 이르러 신복이 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조선조에 벼슬을 아니하였으니 큰 절의 탁연 하였도다. 이제 신도비를 크게 세움이 어찌 옳다 뿐이랴.

 

 선생의 휘는 의중이요 자는 자허요 정재는 그의 호니라. 문하시중 밀성부원군 언부가 9대조이며 그 5대손인 대관전직인 기보는 국사로 순절하였다.

 

 공은 그의 5대손이다. 검교군기감 함과 우정승 화와 판도총랑 인기는 중조와 조와 선친이다. 충숙왕 정축년에 나시어(一三三七年) 공민왕 임인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전의시의 직장에 제수되고 헌납과 사예등 여러직에 전임되었다.

 

 때에 성균관을 종건하고 학관을 엄선하였는데 목은이 대사성이 되고 선생은 포은, 반남, 척약재, 도은등과 함께 모두 다른 직에  있으면서 학관을 겸임하여 관생에게 경을 가르치며 정주의 학이 이로부터 흥성하였다.

 

 국정이 점차 어지러움에 선생이 사직하고 시골에서 삭거할대 척약재가 상소하여 이르되 [정몽주 이색 박의중의 정충절의와 도덕 사업은 전대에서 찾아봐도 몇 사람이나 있었으며, 비록 수천년 위에 있어서도 또한 가히 높이어 공경하고 사모할만 합니다. 전신을 모아 몽매속에서라도 찾아 나서면 나검한 자도 일어설 수 있고, 완악한 자도 또한 일어날 수있고, 탐욕하는 자도 청렴할지니 족히 백세의 사표이며 비록 일월이 밝다 하나 더하지도 못하고 태산도 이보다 더 높지 못하리라]하였다.

 

  47)문온공과 지제교공 국자감시 급제 자료 (2007. 3. 10. 윤식(문) 제공)

 

及菴先生詩集卷之二 / 律詩

奉和愚谷賀齊閔,齊顏連擧進士。

文章孝印有玄孫。 人道將來兩壯元。

乃祖陰功猶未已。 我家餘慶尙何言。

試期漸近崇文館。 受勑行看講虎門。

閭巷聚觀應歎美。 揷花飛蓋雁聯軒。

 - <급암시집>에서

 

 48) 문온공 급제 기록을 통해 본 지제교공의 감시 급제 시기 (2007. 3. 10. 윤식(문)제공)

 

及菴先生詩集卷之二 / 律詩

奉和愚谷賀齊閔齊顏連擧進士 우곡이 제민·제안 형제의 잇따른 진사 합격을 축하한 시를 받들어 화답하며

 

文章孝印有玄孫 문장 김효인 공에게 현손이 있으니

人道將來兩壯元 길거리에 장차 두 장원의 행차가 오리라.

乃祖陰功猶未已 조상의 음덕이 아직 다 미치지 않았으니

我家餘慶尙何言 내 집에 경사가 더 남았다고 어찌 말하지 않으리오.

試期漸近崇文館 숭문관에서 시험 치를 날짜가 점점 다가오니

受勑行看講虎門 임금님 명령 받아 금호문에서 강경과 치르는 것을 구경하리라.

閭巷聚觀應歎美 여염 사람들 모여들어 구경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데

揷花飛蓋雁聯軒 어사화 머리에 꽂고 바람에 살랑이는 일산(日傘)을 받으며 형제가 잇달아 수레에 오르네.

 

문온공(휘 구용)의 국자감시와 예부시 급제 시기는 『척약재학음집』에 기록돼 있습니다.

 

至元戊寅十二月辛卯 先君生

至正十三年癸巳 年十六 宋天奉監試 中擧子科

新進士等詣闕肅拜 上親試賦牧丹詩 先君居其首 上奇之 賜職散員

十五年乙未安乙起榜 登科拜德寧府注簿

지원 무인년 12월 신묘일에 선군(휘 구용)께서 태어나셨다. 지정 13년 계미년 16세 때 송천봉이 주관하는 시험에서 거자과에 합격하셨다. 신진사 등이 궁궐로 들어가 임금께 사은례를 드릴 때 주상께서 친히 목단시로 부(賦)를 시험하셨는데, 선군께서 그 첫째에 들으셨다. 주상께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 산원직을 내리셨다. (지정) 15년 을미년 안을기방에 등과하여 덕녕부 주부를 제수받으셨다.

 

이처럼 문온공께서는 공민왕 2년(1353년)에 국자감시를 거쳐 공민왕 4년(135년)에 예부시에 등과하셨습니다.

또한 지제교공(휘 제안)께서는 고려사 열전과 『고려열조등과록』 등의 기록을 토대로 공민왕 6년(1357년 정유년)에 급제하셨음이 확인되었습니다.(우리 홈 게시판 <지제교공(휘 제안)의 급제 시기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예부시의 예비고시 성격을 갖고 있는 국자감시에 지제교공께서 합격하신 시기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급암시집』을 다시 읽다가 위의 시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지제교공께서 예부시에 급제하신 1357년 사이에 시행된 국자감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민왕 2년(1353) 4월 - 시험관 : 집의(執義) 송천봉(宋天鳳) / 한달한(韓達漢) 등 82명 및 명경(明經) 5명 선발 (※문온공 16세, 지제교공 15세 이하)

■ 공민왕 4년(1355년) 정월 - 시험관 : 우대언 유숙(鏐淑) / 전익(全翊) 등 95명 선발 (※문온공 18세, 지제교공 17세 이하)

■ 공민왕 6년 3월(1357년) - 시험관 :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 / 이준(李竴) 등 98명 선발 (※문온공 20세, 지제교공 19세 이하)

 

급암공의 시(詩)에서 나타나듯이 지제교공은 문온공께서 공민왕 2년에 진사(進士)가 되신 후에 잇따라 거자(擧子)가 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제교공께서는 공민왕 6년에 예부시에 급제하시므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신 해는 공민왕 4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민왕 이전에 실시된 국자감시는 충목왕 3년(1347년 : 문온공 9세)이므로 지제교공께서 국자감시를 볼 연령대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충목왕 3년 4월 - 시험관 : 대언(代言) 정사탁(鄭思度) / 시부과(詩賦科) 박형(朴形) 등 52명, 십운시과(十韻詩科) 김득제(金得齊) 등 46명 선발

 

또한 문온공께서 거자가 되신 연령은 16세이므로 지제교공께서는 15세 이하라는 뜻이 됩니다. 고려조의 국자감시 합격자 중 연소자(年少者)들을 살펴보면 목은(이색) 선생이 14세, 익재(이제현) 선생이 15세로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지제교공께서 이들과 같은 연령으로 거자가 되셨다면 급암공께서 그 일도 시로 표현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지제교공께서 공민왕 4년에 거자가 되셨을 당시 연령은 16세 또는 17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현재 출생연도가 미상인 지제교공은 1339년 또는 1340년에 태어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온공 1338년(충숙왕 복위 7년)∼1384년(우왕 10년)

※지제교공 ?∼1368년(공민왕 17년)

 

<주(註)>

◆우곡(愚谷) : 정자후(鄭子厚). 『익재집』의 주석 중에 ‘우곡’을 ‘정이오(鄭以吾)’로 잘못 적은 사례가 있습니다. 정자후는 『익재집』을 비롯해 고려조 문인들의 문집이나 글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없는 실정입니다.

이 시의 제목으로 보아 우곡 선생이 문온공(휘 구용)과 지제교공(휘 제안) 형제가 연이어 국자감시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시를 급암공(휘 민사평)께 주자 그 화답시로 지은 것이 확실하나, 우곡 선생이 지은 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진사(進士) :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시(國子監試) 합격자, 조선시대에는 진사시(進士試) 합격자를 부르던 칭호.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엄격하게 구분하였으나, 국자감시와 예부시(禮部試)를 막론하고 과거 급제자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방에서 선발한 진사[鄕貢進士]처럼 국자감시 합격자가 아닌 경우에도 진사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국자감시 합격자와 예부시 합격자를 구분할 경우에는 국자감시 합격자만 진사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비해 당나라에서는 최종 시험인 예부시 합격자를,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과거 급제자에게 이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국자감시는 선거지에 진사시(進士試)·남성시(南省試)로도 기록되었다. 합격자는 예부시의 응시자격을 가지며 진사라 불렸다. 『고려의 과거제도』, 허흥식, 일조각, 43쪽)

 

◆「吳元卿墓誌」, 『韓國金石文追補』, 173쪽, “赴成均試 得進士名”  - 『고려의 과거제도』51쪽에서 재인용

 

◆국자감(國子監) 시험(고려사 선거지 기록)

이는 곧 진사 시험인데 덕종(德宗)이 처음으로 설치하고 부(賦)와 6운(韻) 및 10운 시(詩)를 시험 쳤다. 그 후에는 이를 혹은 성균시(成均試)라고도 하고, 혹은 남성시(南省試)라고도 하였다.

충선왕이 국자감시를 폐지하였고, 충숙왕 4년(1317)에 구재(九齋)의 삭시(朔試 매월 초하룻날 실시)로 대신하였다. 충숙왕 7년에 이를 거자시(擧子試)라 하였다. 국자감시에서 뽑는 인원 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공민왕 17년에 왕이 경서에 정통한 자를 뽑아 시험관을 삼으려 했는데, 신돈은 감찰대부 손용(孫湧)을,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은 판전교시사 이무방(李茂芳)과 권사복(權思復)을 추천하려고 하였다. 공민왕이 이들이 다투는 것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국자감 시험에서 선발하는 것은 대개 다 어린아이들이며 경서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가 아니므로 국가에 이익이 없다.”며 이를 폐지하였다. 우왕 2년(1377)에 다시 국자감시를 실시하였다.

우왕 11년(1386) 3월에 윤취가 선발한 자가 모두 권문세가의 젖내 나는 어린아이들라 당시 사람들이 이를 ‘분홍방(粉紅榜)’이라 희롱하였다. 이것은 아이들이 분홍 옷을 흔히 입는 데서 나온 말이다. -『북역 고려사』(선거지) 제7권, 105쪽)

 

◆현손 : 문온공이나 지제교공은 상서공(휘 효인)의 ‘이손(耳孫)’이십니다. 급암공께서 착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將來兩壯元 : 급암공의 외손자인 문온공과 지제교공이 국자감시 합격 후 예부시에 좋은 성적으로 등과할 것을 기원하는 시적(詩的) 표현인 듯합니다.

 

◆과거 급제자들의 축하 행사

고려시대 급제자들이 벌였던 종합적인 축하 행사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여러 문집을 통해 단편적인 기록들은 살펴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의 경우와 아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은 조선시대의 사례입니다.(『조선시대 문과급제자 연구』, 이원명, 국학자료원)

- 전략 -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합격자에게 급제 후 행사가 이어져 위로해 주었다. 즉, 급제자를 발표하는 출방(出榜)의식, 합격증인 홍패(紅牌)와 어사화 등을 하사 받는 방방례(放榜禮), 문무 대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베풀어지는 축하잔치인 은영례(恩榮禮) 및 기쁨을 주위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미의 유가행진(遊街行進)이 펼쳐졌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국왕과 종친, 문무 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근정전에서 의식인 창방의(唱榜儀)가 행해졌다. 시위병들이 둘러서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 급제자들의 부모들도 참관할 수도 있었다. 주악이 울리고 호명에 따라 광화문으로부터 문과 급제자가 전정에 들어와 오른편에, 무과 급제자가 왼편에 늘어서서 국왕에게 4배례를 드린다. 그러면 이조정랑은 문과 급제자에게, 병조정랑은 무과 급제자에게 각각 홍패를 준다. 그리고 다시 국왕이 어사화(御賜花)와 일산(日傘)과 주과(酒果)를 내린다[생원·진사는 예조에서 백패(白牌)를 주고 어사화와 주과(酒果)를 하사]. 이때 어사화는 삼등으로 급제한 담화랑(擔花郞)이 일등을 대표하여 국왕 앞에서 모자에 꽂을 어사화를 받아서 여러 신은(新恩)들에게 나누어 주어 꽂게 하였다.

또 문·무과 급제자에게 조정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주는데 이를 은영연(恩榮宴)이라 하였다. 동쪽에 문과 급제자, 서쪽에 무과 급제자가 갑·을·병과의 순으로 앉아서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기생들이 술을 권하고 광대들이 여러 가지 재주를 보여 주었다. 은영연은 의정부나 예조에서 행하여졌다.

은영연이 끝난 다음 날에는 문·무과 급제자들이 모두 문과 장원의 집에 모여 예궐(詣闕)하여 국왕에게 사은례를 드린다(생원·진사시는 생원시 장원 집에 모인다). 그 다음 날에는 급제자가 함께 무과 장원 집에 모여 성균관 문묘에 가서 공자의 신위에 참배하는 알성례를 치른다(생원·진사시 합격자의 경우는 지사시 장원 집에 모인다).

또 문희연(聞喜宴)이라 하여 친척·친지를 불러 잔치를 열기도 하고, 회문연(回文宴)이라 하여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평소의 지도에 감사하고, 자기를 뽑아 준 시관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座主·門生禮의 유풍이다.

그리고 대·소과를 막론하고 급제자에게는 3~5일간의 유가행진(일종의 시가행진)가 허락되었다. 유가는 일종의 시가행진인데 말을 타고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들을 천동(天童)이 앞에서 인도하고 악대의 음악을 연주하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才人)이 잡희를 부린다.

그리고 세종 11년(1429년)부터는 지방 출신의 급제자들을 위하여 영친의(榮親儀)를 행하였다. 이때 급제자가 고향에 내려가는 날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유가한다.

그러고 나서 향교에서 알성례를 마치면 수령이 급제자와 부모 및 동네 어른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관에서 홍패를 모시고 일생의 만사형통을 비는 ‘홍패고사’와 주연을 베풀었다.

부모가 돌아간 사람은 관가에서 주는 제물을 가지고 가서 묘를 찾아가 참배하게끔 하였다. 이처럼 급제자의 배출은 개인과 그의 가문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영광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숭문관(崇文館) : 고려 때 문신 중에서 학문이 뛰어난 자를 뽑아 학사(學士)로 임명하여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도록 설치한 관청.

초기에는 숭문관이라 칭하다가 995년(성종 14년) 홍문관으로 개칭되고 문신 중에서 학식이 뛰어난 자를 뽑아 학사(學士)로 임명하였다. 문종 때의 관제에 의하면 대학사(大學士)는 종2품, 학사는 정4품이었다.

이전에는 학사라고 하여도 대간(臺諫)·지제고(知制誥)가 아니면 시종할 수 없었으나, 1199년(신종 2년) 중서성의 상주로 모두 시신(侍臣)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1298년(충렬왕 24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홍문관에 학사·직학사(直學士)를 두었다가 다시 숭문관을 설치하여 학사를 두었다. 1367년(공민왕 16년) 공자(孔子)의 소상(塑像)을 모셔두기도 하였다. - 엠파스 및 네이버 백과사전

 

◆강(講) : 강과(講科), 강경과(講經科), 과거(科擧)를 뜻하는 말. 여기서는 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는 과거(국자감시)를 이르는 말로 쓰인 듯합니다.

 

◆조선조의 강경과(講經科) : 조선시대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유생·생원·진사를 대상으로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암송하게 하던 과거. 뒤에 전강(殿講)의 시초가 되었다. 전강은 1470년(성종 1년)에 선정전(宣政殿)에서 성균관유생들을 고강(考講)한 것이 시초인데, 『속대전』에 이르러 제도화되었다. - 엠파스 백과사전

 

◆호문(虎門) : 궁궐의 서쪽 문인 ‘금호문(金虎門)’을 줄여서 시적으로 표현한 말. 조선조 이궁인 창덕궁의 서문이 금호문인데,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과 같습니다. 주로 승정원의 승지나 홍문관, 교서관 등 궁중 안에 있는 관서(官署)에서 근무하는 벼슬아치들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현재의 경복궁 서문(영추문) 천장에는 서쪽 방위을 뜻하는 백호(白虎)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려 황성의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으로서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곳입니다.(『고려의 황도 개경』, 한국역사연구회, 창작과비평사, 51쪽 참조)

 

◆고려조의 과거시험 의식

다음은 동시대 인물인 익재 선생의 과거시험 의식에 대한 기록입니다.

옛날 제도에는 이부(二府)가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경(卿)ㆍ감(監)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보는 날에는 날이 밝기 전에, 지공거는 북쪽 의자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동지공거는 서쪽 의자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다. 감찰(監察)은 왕명을 받들고 와서 남쪽에 앉되 조금 서쪽으로 하여 동북쪽을 향하며, 장교(將校)는 기(旗)를 잡고 계단 아래에 나누어 선다.

과거 응시자들이 다 모이면 곧 문을 잠그고 공원리(貢院吏)가 응시자들의 이름을 불러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두 곳에 있게 한 다음에 동쪽과 서쪽에 나무를 세우고 그 나무에다 시험 제목을 써서 건다.

해가 사시(巳時)에 이르면 승선(承宣)이 금인(金印)을 받들고 도착한다. 동지공거가 그를 뜰에서 영접하여 서로 읍하고 나아가면, 지공거는 북벽(北壁) 뒤로 자리를 피한다. 승선은 동지공거와 함께 마루로 올라가 두 번 절하고 서로 안부를 물은 다음 또 두 번 절한다. 지공거가 나와서 북쪽 평상 아래의 자리 위에 앉으면 승선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지공거도 두 번 절한다. 승선이 지공거의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안부를 물으면 지공거는 앉은 자리에서 답례한다. 승선이 물러나 또 두 번 절하고 지공거도 두 번 절한다. 그렇게 한 뒤에 서로 읍하고 앉는다. 승선은 동쪽 의자에 앉아 서향하여 동지공거와 마주 대한다.

공원리가 응시자들이 바친 시권(試券)을 안고 와서 올리면 승선이 금인(金印)을 열어 그 시권에 인을 찍는다. 다음에 내시(內侍)가 임금이 내린 술을 가져오면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승선과 함께 하사한 것에 대해 절하고 평상에 나아가 마시고서 또 절하며 사은(謝恩)한다. 승선이 돌아가게 되면 동지공거가 뜰에서 읍하여 보낸다. 삼장(三場)을 다 이와 같이 한다. 제1장ㆍ제2장에는 승선이 와서 인이 찍힌 시권을 열어 시원(試院)에서 방(榜)을 내고 제3장은 임금의 염전(簾前)에서 방을 낸다.  -『국역 익재집Ⅱ』고전국역총서 198, 민족문화추진회, 104쪽

 

◆비개(飛蓋) : 바람에 흔들리는 일산(日傘)

 

 49) 급암공의 지제교공 감시 급제 관련시 (2007. 3. 10. 윤식(문) 제공)

 

及菴先生詩集卷之二

 律詩

至正乙未春正月。內相思菴柳學士掌司馬試。

精選英材。得人之盛。古所未聞。不勝歎美。謹成四韻詩 一首。奉呈左右。聊伸賀臆云。

 

春風玉筍爛盈門。 考閱精強更莫言。

行道揚名供子職。 進賢助化報君恩。

眼看多士皆英拔。 心喜愚孫不數犇。

明日禮闈新榜後。 定應賀客倍騰喧。

 

현재 공민왕 4년에 유숙 선생이 관장한 급자감시의 합격자는 장원 전익(全翊) 외에는 밝혀진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에 지제교공이 공민왕 4년 감시 거자임이 밝혀짐으로써 지제교공의 동년을 한 사람 더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高麗史74卷-志28-選擧2-科目2-國子試之額-019

恭愍王四年正月右代言柳淑取全翊等九十五人.

 

 50) 문온공의 교류인물-중구감회 (2006. 4. 10. 태영(군) 제공)

 

重九感懷

중구날에 느낌

 

去年重九龍山巓 坐客望若登神仙

達可放歌徹寥廓 敬之下筆橫雲烟

曾吾醉談聽不厭 子庚詩句淸且姸

民望長身鸞鶴姿 落帽起舞何翩旋

지난해 중구날엔 용산에 올랐었지

앉은 손님 바라봄에 신선 하늘에 오르는듯하이

달가(達可)는 노래 불러 고요를 깨고

경지(敬之)는 붓을 놀리니 구름 안개가 이네

증오(曾吾)의 취담은 들어 싫지 않고

자경(子庚)의 시귀는 맑고 아름다웠네

민망(民望)의 큰 키는 참으로 난새와 학의 자태처럼 아름다워

모자 떨어뜨리며 일어나 춤춤이 어쩌면 그리도 빙글 도는지

 

顧余亦是澹蕩者 痛飮不讓鯨吸川

美人年紀才二八 戴花細步踏華筵

人生歡樂惜此日 月明滿地猶未還

今年重九在流落 忍憶往事如夢間

나를 돌아 봄에 나 또한 호탕하여

고래가 물을 키듯 술을 통음 했노라

어여쁜 아가씨는 방년 겨우 열여섯

머리에 꽃꽂고 예쁜 걸음으로 꽃자리를 사분이 밟아라

인생의 즐거움 이날이 가는 것이 아까워

달빛 땅에 가득 차도록 돌아 갈줄 몰랐었지

올해 중구날은 떠도는 신세

문득 옛날 일이 꿈속 같아라

 

數子飄零各異縣 尺書寂寞長懸懸

古城一邱足登覽 黃花一枝且芳鮮

田夫野叟好看客 白酒不論靑銅錢

富貴貧賤從何有 掇花泛酒卽頹然

몇이는 헤어져 각기 멀리 귀양가 버리고

편지조차 없으니 정막하고 그리워라

옛성 언덕에 올라와 놀매

국화 한 가지 향기도 고와라

농부도 들늙은이도 손님을 따듯이 맞아

막걸리를 돈없이도 대접하네

부귀와 빈천은 어데서 왔는고

꽃꺽어 술에 띄워 곧 거나하게 취하여라

 

[註]

중구 重九…음력9월9일날 한가위 같이 좋은 명절이다.

달가 達可…정몽주의 字다  호는 포은(圃隱)

경지 敬之…김구용의 字다. 호는 척약재(惕若齋)

증오 曾吾  정도전의 별칭으로 호는 삼봉(三峰) 또다른 별칭으로 종지.

자허 子虛…박의중의 字다. 호는 정재(貞齋)

민망 民望…염정수의 字다. 호는 훤정(萱庭)

 

<도은선생문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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