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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8. 19. 윤만(문) 제공) 朝鮮前期 鄕樂의 三絃 傳統.(宋 芳 松)
‥‥‥‥‥‥‥‥‥‥‥‥‥‥‥‥‥<목 차>‥‥‥‥‥‥‥‥‥‥‥‥‥‥‥‥ Ⅰ. 머리말 : 鄕樂 三絃의 音樂史的 位置 Ⅱ. 高麗社會의 三絃과 朝鮮社會의 一局面 Ⅲ. 朝鮮社會에서 演奏된 三絃의 音樂文化 1. 선비社會의 거문고 傳統 2. 伽倻琴과 琵琶의 傅統 Ⅳ. 맺는말 : 辯榮 三絃의 새로운 理解 ‥‥‥‥‥‥‥‥‥‥‥‥‥‥‥‥‥‥‥‥‥‥‥‥‥‥‥‥‥‥‥‥‥‥‥‥‥‥
Ⅰ. 머리말 : 鄕樂 三絃의 音樂史的 位置 --(생 략)-- Ⅱ. 高麗社會의 三紘과 朝鮮社會의 一局面 --(생 략)-- Ⅲ. 朝鮮社會에서 演奏된 三紘의 音樂文化 --1, 선비社會의 거문고 傳統 --(전 략)-- --조선 전기 선비사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거문고 전통은 고려사회의 선비들에 의해서 형성된 전통의 계승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거문고가 선비의 삶에 차지하는 위치가 이와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실례를 아래의 인용문에서 찾을 수 있다.
<사료 6-가> 무풍정 이총의 자는 백원이며, 태종의 증손이다. 시에 능하고 글시를 잘 쓰며, 또 거문고를 잘 탄다. 양화도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어망을 가지고 항상 손수 고깃배를 저어서 시인과 선비를 맞아 날로 시를 모은 것이 무려 천백편이나 되었다.27) 茂豊福正摠字百源, 太宗之曾孫, 能詩書善彈琴, 別楊花渡, 具小艇漁網, 常自剌漁船, 激詩人客, 日致好詩, 舞慮千百篇,『국역대동야승』, 卷2.360(海東野言), 卷2.643).
<사료 6-나> 김유 자고는 말하기를, "나는 친구를 역방하려고 하지 않으니, 내 집이 족히 손님을 모실만 하고, 나의 재산이 잔치 차리기에 족하며, 항상 꽃피는 아침이나 달뜨는 저녁에 좋은 손님과 좋은 친구를 맞아 술통을 열고 술자리를 베풀어, 이마지가 타는 거문고와 도선길의 당비파와 송전수의 향비파와 허오가 부는 젓대와 가흥란과 경천금의 노래로 황효성이 옆에서 지휘하고, 혹은 독주하거나 합주하며, 이 때에 손님과 더불어 술잔을 서로 주고 받으며 마음껏 이야기하고 시짓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28)
<사료 6-다> 상공 윤자신은 윤장원공의 재종질이다. …(중략)…마침 장원이 참모를 쓰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손으로 거문고를 희롱하며, 입으로 시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중략)…
--그 관원은 다시 정색하고 말하기를, "장옥견 선생이 남양부백이 되었는데, 일찍부터 가야금과 노래 잘 하는 종 다섯을 곁에 두고 매달 한 사람겐 교대로 서울에 보내, 한 달씩 마음껏 놀고 오게 하였습니다. …(이하 생략)."29) --태종의 증손 무풍정 이총(李摠 歿1504)와 풍류생활에 관한 <사료 6-가>는 『해동야언』(海東野言) 권2에서 인용한 사료이고, 김유(金紐 1420년생)의 멋진 삶을 보여주는 <사료 6-나>는『용재총화』권10에서 뽑은 기사이며,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稿)에서 발췌한 상공(相公) 윤자신(尹自新 1529∼1601)의 기사에 나오는 장옥견(張玉見) 선생에 관한 기사가 <사료 6-다>이다. 첫째인용문에서 거문고가 시인과 선비의 시회(詩會)에서도 중요한 악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남원부사 장옥견에 관한 세째 인용문은 가야금이 계집종에 의해서도 연주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런데 김유의 풍류놀이는 성종 당시 악기 명인을 보여줄 뿐 아니라, 거문고와 다른 악기와의 합주 및 독주라는 연주 형태를 말해주기 때문에,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먼저 풍류놀이의 주인공 김유에 대한 다음의 인용문을 검토한 후에 그가 생존했을 때의 풍류놀이에 대해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사료 7-가> 김유.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고이며, 호는 금헌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또 중시와 등준시 두 과에 합격하여 이조참판이 되었다. 시 글씨 거문고를 잘하여 사람들이 삼절이라고 지목하였다. 또 음율에도 정통했으며, 일찌기 반궁 곧 성균관 북쪽 골짜기에 쌍계재를 짓고 봄마다 벗을 맞이하여 시를 읊고 늘어지게 노래부르며 한가로이 지냈다. …(중략)… 자고가 쌍계에서재를 짓고 거문고와 글씨로서 스스로 즐겼는데, 그 정신을 맑게하고 생각을 고요하게 하니, 그 ---------------- 28) 金紐子固曰, 予則不欲歷訪友人, 予家足以容客, 予財足以辦宴, 每於花朝月夕, 池佳賓良朋, 開楢置酒, 李 知彈琴, 都善吉唐琵琶, 宋田守鄕琵琶, 許語吹笛, 駕鴻輕千金唱歌, 黃孝誠從旁指揮, 或獨奏或合奏, 於是於客酌酒相酬, 縱談占聯, 此予所樂也, 『국역대동야승』, 권1.243(『용齋叢話』, 卷10.658). 29) 尹相公自新, 尹公長源再從侄 …(中略)… 尹公一日挾風騷問於長源, 額寢帽, 出坐小軒, 手弄瑤琴, …(中略)… 其人斂容而言曰, 張先生玉見爲南陽府伯, 嘗有婢使能琴歌者五人, 逐月送一人洛中, 使之遊樂, 盡月而返,『국역대동야승』, 권 2.13-14(『五山說林草稿』, 500). 張玉見선생의 계집종의 琴을『국역대동야승』에서는 거문고로 번역되었으나, 필자는 그것을 伽耶琴으로 해석했는데,그러한 해석에 대한 상론은 본고의 Ⅲ의 2항 참조.
정신을 보존하고 성정을 기르는 것은 비록 산림 속에 사는 선비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30)
<사료 7-나> 김자고는 거문고를 잘 하는 사람이다. 은갑을 주휘를 세우고 장고를 곁들여 궁성의 몇 곡조를 연주하면, 조용히 흐르는 봄구름이 하늘에 깔린 듯하고, 호탕히 흐르는 훈풍이 들판을 휩쓰는 듯하며, 또 문득 변하여 날리고 격함이 천둥치고 비가 쏟아져 산악을 뒤흔드는 듯 하고, 성난 물결이 천지를 박차고 솟구치는 듯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서 머리카락을 뼈쭉하게 만든다. 맑고또렷한 가락이 끊기는 듯 이어져 한 고비를 이르면, 다시 바람이 자고 물결이 가라 앉고 하늘이 트여 해가 비치는 듯하고, 그 옛스럽고 순박하고 담백한 맛이 대개 당우 삼대의 하늘에 있는 듯하다.31)
<사료 7-다> 종실 무풍정 이총의 자는 백원인데, 스스로 구로주인이라 호하였다. 마음이 척당하여 구속받지 않았고, 진나라 때의 풍도가 있었다. 서사를 읽고 시문을 배웠으며, 음율을 알아서 함께 그 오묘함이 극에 달했다. 참판 김유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감탄하기를, "정말로 궁중의 목단이 맑게 갠 날 화려하게 활짝 핀 듯하다"고 하니, 유추 임흥이 말하기를, "재상 김는 음율을 알아듣는 귀가 있다"하였다.32)
<사료 7-라> 종실 수천부정 이정은이 날마다 시와 술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로 스스로 흥겨워하고, 시문과 음율이 백원과 이름이 같았다. 대유 김굉필의 책망을 듣고 그들과 모든 구습을 버리고, 짐짓 속태를 꾸미고 두문불출하며 감연히 그 친구들과 끊었더니, 과연 홀로 무사히 보존하였다. 참판 김유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솜씨가 시냇가에서 피어 있는 매화의 격조와 같다"고하였다.33) --시·글씨·거문고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기 때문에 삼절(프絶)로 지목됐던 참판 김유(金紐 1420年生)는 세조(1455∼1468)때 등과하여 이조참판을 지냈는데, 명나라 성화(成化 1465∼1487) 연간에 거문고에 뛰어났던 유추(有秋) 임흥(任興)·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백원(百源) 이총(李摠)·국문(國聞) 정자지(鄭子芝) 중에서34) 백원과 정중의 거문고를 비판한사실을 보면,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섰던 선비로 추정된다. 김유가 선초 선 ---------------- 30) 金紐 安東人. 字子固. 號琴軒我 光廟朝登第. 又擢重試. 登俊試二科. 爲吏首參判. 能詩善書能琴. 人以三絶目之. 又曉音律. 嘗於泮宮北谷. 作雙溪齋. 每春激朋賦詩. 歌自適. …(中略)… 子固構書齋于雙溪. 以琴書自娛. 其澄神靜慮. 保眞養性. 雖山林隱逸之士. 無以過之.『국역대동야승』, 권5.177-78(『海東雜錄』, 卷2.32). 31) 金子固能琴著也. 銀甲促珠徽. 爲鼓宮聲之數引. 油油乎若春雲之敷空. 浩浩乎若薰風之拂野. 又忽變之. 而激之. 如迅霆驟雨震蕩乎山岳. 驚濤巨浪蹴湧乎天地. 令人酸易而毛竪. 及乎 如繹如以至於一成. 則又如風恬波定天開日曜. 而其淳古淡澹之旨. 蓋在於唐虞三代之天矣.『국역대동야승』,귄5.170-71 (『海東雜錄』). 32) 宗室茂豊正摠子百源, 自號鷗鶩主人, 倜 不 , 有普時風, 讀書史, 學詩文, 解音律, 俱極其妙, 金參判紐聞琴聲嘆曰, 政如宮中牧丹爛慢靖天, 有秋曰金宰相有耳,『국역대동야승』, 권2.380(『海東野言』, 卷2.653). 33) 宗室秀泉副正貞恩, 日以詩酒琴琶自娛, 時文音律, 與百源齋名, 聞大猷責我, 盡葉舊習, 故作俗態, 閉門不出, 不敢與親故通, 果獨保參判金紐聞琴嘆曰, 手 政如潤邊梅花格,『국역대동야승』,권2.349-50 (『海東野言』, 卷2.639). 34)『국역대동야승』, 권2.350(『海東野言』, 卷2.639),
비들 중에서 특히 거문고 명인의 한 사람이었음을 <사료 7-다>에서 "궁중의 목단이 맑게 갠 날 화려하게 활짝 핀 듯하다"고 백원의 거문고 소리에 대한 비판이나 <사료 7-라>에서 정중의 거문고 소리에 대해서 "시냇가에 피어 있는 매화의 격조와 같다"는 그의 예리한 비판을 근거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우기 조준(趙浚)이『금헌기』(琴軒記)에서 인용하여 『해동잡록』(海東雜錄)에 기록한 <사료 7-나>의 기사는 김유가 연주한 거문고 음악의 성격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장고 반주에 맞추어 김유가 연주한 거문고 음악에 관해서, "조용히 흐르는 봄구름이 하늘에 깔린 듯하고, 호탕히 흐르는 훈풍이 들판을 휩쓰는 듯하고, 성난 물결이 천지를 박차고솟구치는 듯하여, 듣는 이의 머리카락을 뼈쭉하게 만든다"는 거문고가락의 묘사가 좀 과장된 듯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김유의 거문고 음악에 대한 그런 묘사는 앞서 제시한 <사료 3>에서 악사 이마지의 거문고가락에 관한 문학적 묘사를 상기시키므로, 그의 거문고 음악은 노래의 반주 음악이라기 보다는 거문고 독주곡일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리가 그러하다면, 김유 같은 선비 출신의 거문고 명인이 악사 이마지 같은 악공 출신의 거문고 명인에게서 독주곡을 배워서 연주했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이렇듯 거문고 명인의 경지에 이른 참판 김유가 생존시에 음악인들과 즐긴 풍류놀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 6-나>의 기사에 대하여 상론할 차례이다. --다음 항목에서 가야금과 비파의 논의 때 제시되겠지만, 김유의 풍류놀이에 참여한 이마지(李 知)·도선길(都善吉)·송전수(宋田守)·허오(許吾)·가홍란(駕鴻 )·경천금(輕千金)·황효성(黃孝誠)은 모두 성종(1469∼1494) 때 풍류방(風流房)에서 유명했던 음악인 들이었다.35) 이마지의 거문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상론한 바 있고, 가홍란과 경천금은 모두 노래를잘 불렀던 기녀 곧 가기(歌妓)였음이 분명하다. 도선길은 당비파의 명수였고, 향비파의 명수였던 송전수는 그의 아버지였던 전악(典樂) 송태평(宋太平)의 향비파 기법을 전수하였다. --송전수의 본명은 송천수(宋天守)였는데, 의영고(義盈庫)의 종이었으나, 세조가 조카를 밀어내고 등극할 때 조그마한 공을 세워서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되어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게 풍류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음악인이었다.36) 장악원(掌樂院)의 악공 허오는 세조조에 이미 젓대의 명수로 알려졌기 때문에, 세조의 명을 받들어 그가 젓대로 계면조(界面調)곡을 연주하면 듣는 이가 모두슬퍼했다는 기록37)으로 ---------------- 35) 이들에 관한 사료의 번역 및 학술정보는 본고의 <사료 12-가> 및 각주 62 참조. 36)『世祖實錄』, 卷5.2b4(2.88). 괄호 안에 있는 숫자는 번역본의『세조실록』卷2의 88쪽을 의미함. 이하같음. 37) 『世祖實錄』, 卷1.1b8(1.10).
보아서 대단한 젓대의 명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악공 허오도 세조의 등극시에 작은 공을 세운 원종공신의 한 사람이었으므로,38) 송전수처럼 그도 천인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스럽게 젓대의 명수로 활약할 수 있었으며, 또 김유의 풍류놀이에도 초청되었다고 이해되는 바이다.
--전악 황효성은 본래 허오처럼 의영고의 종이었는데, 세조의 등극 때에 작은 공을 세워서 원종공신의 한 사람으로 되어 노적(奴籍)에서 풀려나 허오나 송전수처럼 자유스러운 몸으로 풍류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음악인이었고,39) 또 김유의 풍류놀이에도 함께 동참하여 음악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향비파의 명수 송전수, 젓대의 명수 허오, 음율에 밝았던 황효성, 이 세 음악인은비록 장악원 소속의 전악 또는 악공들이었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세조가 등극할 당시에 원종공신의 대열에 올라서 천인의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스러운 음악인 들이었음을 확인하였고, 이들이 성종 당시에도 김유의 풍류놀이에 참여하여 선비들과 함께 풍류활동을 전개하면서 어울렸다고 이해하였다. --『대동야승』에 전하는 사료를 근거로 조선전기 향악의 삼현 가운데 거문고의 전통에 대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 선비사회의 풍류문화에서 거문고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확고부동했음을 여러가지 실례를 통하여 알아보았다. 선비들의 문집에서 거문고가 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금(琴)이라고도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런 금은 가야금이나중국의 칠현금으로 풀이될 수 없고, 거문고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먼저 밝혔다. 고려사회 문사들의 경우처럼 거문고가 조선 전기 선비사회에서 필수적인 사예(國藝:碁·琴·書· )나 육예(六藝: 禮·樂·射 ·御·書·數)의 하나로 취급되었으며, 성종 당시 젊은 선비들은 거문고를 악사 이마지처럼 유명한 명인을 직접 모셔다가 배우거나 찾아가서 배웠음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선비들이 배운 거문고음악이 대체로 풍입송(風入松) 같은 노래의 반주음악이었으리라고 추정되었지만, 참판 김유같은 거문고 명인은 거문고 독주곡을 익혀서 연주했음도 보았다. 김일손·성현·임흥·이총·이정은·정주·한충·임성정·신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비들이 거문고 음악을 통해서 스스로 심신을 다스리고 삶의 즐거움을 누리기도했으나, 도선길·송전수·허오·황효성 같은 그 당시의 명인들과 더불어 풍류놀이에 어울려 호탕한 풍류생활을 즐기기도 했음을 김유의 경우를 근거로 알아 보았다. 향악 삼현의 이러한 거문고 전통이 조선전기에 갑자기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선비사회의 거문고 전통에서 전승되어 발전시킨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 38) 『世宗實錄』, 卷39.15b2(9.349) 39) 『世宗實錄』, 卷2.68a3(1.246) 및 卷5.2b3(2.87).
-2. 伽耶琴과 琵琶의 傳統 --(전 략)-- --<사료 12-나> 김유 자고는 말하기를, "나는 친구를 역방하려고 하지 않으니, 내집이 족히 손님을 모실만 하고, 나의 재산이 잔치차리기에 족하여, 항상 꽃피는아침이나 달뜨는 저녁에 좋은 손님과 좋은 친구를 맞아 술통을 열고 술자리를 베풀어, 이마지가 타는 거문고와 도선길의 당비파와 송전수의 향비파와 허오가 부는 젓대와 가홍란과 경천금의 노래로 황효성이 옆에서 지휘하고 흑은독주하거나 합주하며, 이 때에 손님과 더불어 술잔을 서로 수고 받으며 마음껏 이야기하고 시짓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다" 하였다.63) --향비파 명인과 당비파 명인에 관한 <사료 12-가>와 참판 김유의 풍류놀이에 대한 <사료 12-나>는 모두 『용재총화』 권1과 권10에서 인용된 기사이다. 두 인용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첫째 선비나 서인이 음악을 배울 때 반드시 비파를 먼저 배운다는 성현의 언급이고, 둘째는 당비파에 비해서 향비파를 제대로 연주하는 명인이 성종(1469∼1495) 당시에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며,세째로 당비파가 향비파·거문고·젓대 같은 향악기와 더불어 연주되었다는 점이다. --선비나 서인이 풍류생활의 첫걸음을 비파로 시작해서 배운다는 성현의 언급에서 그 비파가 향비파인지 당비파인지 문맥상으로 분명하지 않지만, 당비파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첫째 향비파는 거문고처럼 술대로 연주해야 하므로 잘타지 못하면,들을 수 없다는 성현의 언급에서, 당비파가 상대적으로 배우기 쉽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고, 둘째로 송전수 이후에 그와비길만한 향비파의 명수가 없다는 언급에서도 향비파보다 당비파가 널리 인기를 얻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며, 세째 이유는 아래에서 지적될 것이다. --당비파가 향악의 노래반주나 향악기의 합주에서도 연주된 사실은『악학궤범』과『금합 ---------------- 63) 『국역대동야승』, 卷1.243 (『용齋叢話』, 卷10.658). 원문은 본고의 각주 28 참조.
보』(琴合字譜)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밝히 말해서,『악학궤범』권7에 의하면, 당비파가 방향·당적·당필율·아쟁·통소등과 같은 당악기와 함께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에 설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종 당시만 해도 향악과 당악에 두루 사용되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악학궤범』권7의 당악기 13종 중에서 박·교방고·장고·당비파· 아쟁·태평소, 이상 여섯 당악기가 당악과 향악에서 모두 연주되었다는 사실은 당악의 향악화를 입증하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음악학계에 이미 제시된 바 있다.64) 성종 때 향악에서 연주됐던 이런 당비파의 전통이 그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우리는 1572년(선조 5)에 편찬된 안상(安 )의『금합자보』에서 발견할 수 있다.65) 당비파의 이러한 지식을 상기할 때, 그것이 향비파보다 조선전기에 널리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문헌에 기록된 비파는 향비파라기보다도 당비파로 해석되는 편이 무난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대동야승』에 기록된 비파에 관한 몇가지 기사를 여러 각도에서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향악 삼현의 하나인 비파가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선비사회에서 애용되었던 사실을 알았다 . 고려사회의 선비들이 거문고 이외에 가야금을 애용한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조선 전기의 선비들이 가야금대신에 비파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보아 고료사회의 삼현전통이 조선왕조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변천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초기 성종 때만해도향비파와 당비파가 모두 연주되기는 했으나, 당비파가 향비파보다 선비사회에서 널리 애용됐음을 알았고, 문헌에 보이는 비파는 향비파라기 보다도 당비파로 해석해도 무난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Ⅳ. 맺는말 : 鄕樂 三絃의 새로운 理解 --고려사회의 향악 중에서 삼현의 전통이 어떠한 양상으로 어떻게 조선사회에 전승되었는 지를 밝힘으로써, 조선전기의 향악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보고자 함이 본고의 목적이었다.『대동야승』의 음악기사를 기본사료로 삼고『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부차적인 사료로 삼아서, 거문고 및 가야금과 비파 이상 두 항목으로 나누어 관련된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고려의 선비사회에서 형성된 향악의삼현 전통이 조선왕조의 선비사회에 그대로 전승되었으나, 그 삼현의 전통이 조선전기의 선비사회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 64) 상론은 拙著,『韓國音樂通史』, 335-38쪽 참조. 65) 安 『琴合字譜』, 165-74쪽에 있는 琵琶慢大葉의 악보 참조. 필자가 참조한 영인본은 1974년에 서울대음대 국악학연구회에서『한국음악학자료총서』제7집으로 펴낸 것임. 국립국악원에서 1987년에 펴낸『금합자보』의 영인본은『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22집의 66-68쪽 참조.
정립된 삼현의 전통에 대하여 자세히 점검한 결과를 여기에 정리하면서, 향악 삼현의 전통이 조선 음악사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음악사적 관점에서 찾아서 마무리지을까 한다. --향악의 삼현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거문고가 고려의 선비사회에서 정립된 전통을 거의 그대로 조선왕조의 선비사회에 전해준 대표적인 향악기로 드러났다. 그러나 가야금과 비파의 전통은 거문고의 경우와 달리 조선 선비사회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았다. 밝히 지적하자면, 가야금은 고려선비들이 갖추고자 했던 사예(四藝)의 하나로 애용되었고, 비파는 고려사회의 기녀들에 의해서애용되었지만, 조선왕조에 이르러 가야금은 천인 출신의 기녀나 악공에 의해서 애용되었고, 비파는 오히려 선비사회에서 애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선비들이 가야금 대신에 비파를 애용하였고, 그 대신 기녀나 악공들이 가야금을 좋아했다는 삼현의 새로운 전통이 조선 전기 궁중밖의 향악문화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제 삼현의 음악문화가 조선 전기의 선비사회에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좀더 자세히 정리해보자. --조선전기 선비사회의 풍류문화에서 차지하고 있던 거문고의 위치가 가야금이나 비파에 비해서 확고부동했음을 여러 실례를 통해서 알아보았다. 거문고가 선비들의 문집에서 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금(琴)으로 기록되었는데, 선비사회의 풍류와 관련된 금은 가야금이나 중국의 칠현금으로 풀이되어서는 안되고 거문고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혀 놓았다. 고려선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거문고가 조선전기의 선비사회에서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사예(四藝)나 육예(六藝)의 하나로 취급되었는데, 성종 당시 젊은 선비들은 악사 이마지 같은 명인들에게 거문고를 배웠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배운 선비들의 거문고음악이 대체로 풍입송(風入松) 같은 노래의 반주음악이었으리라고 추정됐지만, 참판 김유 같은 선비는 독주곡을 배워서 연주함으로써, 당대의 명인으로 꼽히기도 했음을 보았다. 대부분의 선비들이 거문고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심신을 다듬고 삶의 낙을 누리기도 했지만, 김유 같은 선비는 그 당시의 명창 명인들과 어울려 풍류놀이를 즐기기도 했음을 알아보았다. --『대동야승』의 문집 속에서 기녀(妓女)와 관련하여 언급된 금(琴)은 거문고로 해석되기 보다도 가야금으로 풀이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어서 가야금이 거문고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조선 전기의 선비사회에서 애용되지 못했고, 그 대신에 천인 출신의 기녀나 악공들에 의해서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와 반대로 비파는 거문고처럼 선비의 사예나 육예의 하나로 애용된 사실에대하여 언급하였고, 선비들이 애용한 비파가 향비파라기 보다는 당비파임을 밝히고서는, 문집에 나오는 비파틀 당비파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어놓았다. --조선 전기 선비사회의 풍류문화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했던 거문고·가야금·비파의 전통이 비록 고려사회의 선비들이 만든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 선비들이 물려받은 삼현의 전통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시킴으로써, 조선음악사의 새로운시대를 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삼현의 새 전통이 다시 조선후기 풍류방(風流房)의 전통으로 이어져 갔다고 이해되어야하지 않을까 한다. 조선 전기에 정립된 향악 삼현의 전통이 어떻게 조선후기 풍류방의 음악문화로 전승되면서 조선음악사의 새 시대로 발전되어 나갔는지는 앞으로 음악사학적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거문고 악보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때, 조선후기 풍류방의 음악문화가 조선 전기 선비사회의 삼현전통 가운데 특히 거문고 전통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음악사의 흐름 속에서 향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사회의 풍류문화를 그러한 시각에서 조명해보면, 조선 전기 선비사회에서 전승된 삼현의 전통이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며, 더구나 그것은 조선 전기 향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다고 하겠다. 조선사회에서 형성된 향악의 삼현전통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는 바이다. (1989년 9뭘 12일) 《출전 : http://210.95.200.103/BookData/300009/03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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