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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서예가. 자는 경삼(京參), 호는 동고(東皐), 서운관정공(휘 綏)의 후손으로 대사헌 희수(希壽)의 아들. 20 세 전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25년(중종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검열(檢閱)·정자를 거쳐 1530년 저작(著作)으로 김안로(金 安老)의 석방을 비난했다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자 문의(文義)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기용, 직제학(直提學)에 이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론(學論)에 밝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왕희지 · 왕헌지의 전기(傳記) · 필적(筆蹟)을 가지고 학습하였다. 조정의 각종 전책(典冊)과 고관명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 부자가 모두 명필로서 그의 필적으로 글씨를 새겨 간행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으며, 경기도 광주의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파주의〈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등이 그의 글씨이다. 묘는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81번지 광곡산에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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