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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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4. 주요 행사 자료 소개

 2) 학술 심포지엄 내용-<충무공 金時敏 장군> (2002. 11. 29. 주회(안) 제공)

    발표자 : 김준기 (아우내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편.  

  <김시민 장군의 인간상>

(1) 김시민의 출생과 가계

김시민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勉吾(면오)이고 시호는 忠武이다. 서기 1554년(명종9년) 8월 27일 木川현 栢田동,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마을에서 金忠甲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李成春의 따님이다.

서기 1592년 12월 26일 (註: 일부 기록에는 10월 18일) 진주성대첩의 영광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이때의 나이 겨우 39세였다. 비록 짧은 일생이었으나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념으로 충의를 다한 장군이었다. 현재 진주의 彰烈사와 괴산의 忠愍사에서 제향이 봉행되고 있다.

 

김시민은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려의 충신 忠烈공 金方慶의 13세손이다.

부친인 金忠甲은 서기 1515년 서울의 終南산 하의 鑄字동에서 태어났다. 명가임을 알게 하는 김충갑 형제들에 얽힌 고사가 있어서 다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金忠甲은 생원 진사의 문과이고, 아우 孝甲도 생원 진사의 문과이며, 아우 友甲도 진사이고, 아우 悌甲도 문과이며, 아우 仁甲도 진사이다. 세상사람들이 일컫기를 "5甲이 紅牌 白牌로 9첩의 병품을 만들어 이름을 紅白屛(홍백병)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한번은 忠甲이 安岳(=?)군수로 있을 때 괴산에서 경사스러운 일로 조상의 묘소에 제향을 드리게 되었다. 그의 아우는 아산의 현감인 孝甲과 執義인 悌甲이 나와서 모였으나 그의 아들인 천안군수(=?)가 자리에 미치지 못하였다. 忠甲이 죄를 주려 하니 悌甲이 杖을 잡고 꿇어 앉아 이르기를 "군수 아버지가 군수 아들을 치죄하고자 하니 집의인 제가 감히 장을 잡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忠甲이 웃으면서 중지하였다. (국역 대록지 p91). 아름다운 일화로 전하여 오며 명가임을 알게 한다.

 

김시민은 후사가 없어서 장형인 時晦(시회)의 넷째아들 緻(치)를 양자로 하였으며, 손자인 得臣은 어릴 적부터 詩才가 뛰어 나더니 후일 문명을 날리는 시인이 되었다.

김시민의 외조부인 李成春은 참봉이었다.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동에서 살았으며 재산이 심히 부유하였다. 정자와 연못과 歌童과 舞妓가 그 번화함을 다 하였다고 하며 백전동 지역의 한 언덕과 한 골이 그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었다. 金忠甲이 西原(=?청주목)으로 유배되어 이곳을 지날 때 마침 喪配(상배)하였었기 때문에 李成春이 여서(=사위)를 삼게 되었다.

 

김씨의 세거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국역 대록지 p87) 명가의 김충갑은 불우했던 시절에 재산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김시민은 이곳에서 나서 자라면서 父(=김충갑), 祖(=김석)의 고향인 괴산을 왕래하면서 장성하였다.

 

후일 김시민의 논공에 대하여 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논쟁하여 오다가 110년만인 숙종조에 이르러 영의정 李濡(이유)의 장계에 의하여 김시민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상락부원군에 봉하게 되었으며 충무의 시호를 내리었다. 이러한 예우에 따라서 그의 조부와 부,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도 모두 증직의 영예가 내려졌다. 또한 특별 사면권을 주는 鐵券(철권)을 내려 후손을 더욱 예우하였다. 국가에서 공신에게 이렇게 예우한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충무공 김시민 이후로부터 金緻(김치)와 金時讓(김시양)과 金徽(김휘)와 金素(김소)가 모두 都元帥(도원수)가 되었으니 한 堂內에서 5元帥가 나기는 옛적부터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고 하였다. 충의로써 국가에 봉공하는 가문이 아닐 수 없다.

 

(2) 유년 시절의 일화

김시민은 어려서부터 활동적이어서 방안에서 글공부에 전년하는 것보다 밖에서 뛰어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성격은 영특하고 대담하였으며 영도력이 출중하였다. 그 시대에는 선비의 자손들에게는 글공부만을 철저히 강조하는 때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시대의 사조와는 관계없이 후일 위대한 무인이 될 강인한 성품이 이때부터 형성되어 갔다. 그의 8,9세 되던 때의 일화를 소개하여 그의 용기와 지략의 한 면을 엿보고자 한다.

 

(가) 전쟁놀이

김시민이 8세때의 일이다. 이웃 마을의 아이들과 부대를 짜서 길가에서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천안 고을의 원님이 지나가게 되었다. 이를 본 김시민은 한 아이를 시켜서 "여기는 진중이니 못간다" 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원님이 그 자리에서 내려서 김시민의 손을 잡으며 이마을 쓰다듬어 주고 김충갑에게 데리고 가서 크게 칭찬하면서 하는 말이 "진을 치고서 놀이를 하는 것은 의지와 기개가 보통이 아니라, 官長을 말에서 내리게 함은 그 기세가 가히 두렵고 모습이 雄傑함이 출중하니 前程이 만리라" 하였다.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정언신(相國)이 4명의 장수를 천거하면서 이순신, 김시민, 신립, 이억기는 명장 중에서도 上駟(상사)라 하였다. 또 조헌은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의 세 장수를 천거하면서 외부로 보내지 말고 있다가 때를 따라 완급을 보아서 쓰도록 하라 하였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실기 p141)

 

(나) 射蛇岩記

김시민의 遺基는 栢田에 있다. 앞에는 龜石과 雙槐樹가 있는데 괴수의 앞에는 큰 내가 있어서 潭水를 이루었고 담수가에는 큰 바위가 있다. 바위 안에는 큰 뱀의 굴이 있었는데 민간이나 가축이 물에 가까이 하면 뱀이 꼬리로 쳐서 잡아 먹었다.

시민이 나이 아홉 살에 마을 아이들과 더불어 弓矢를 끼고 가서 괴수에 의지하고 마을 아이들로 하여금 바위에 올라가게 하였다. 그들의 그림자를 물에 비추게 하니 큰 뱀이 물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마을 아이들을 향하였다.

그때에 시민이 재빠르게 3,4개의 화살을 연하여 쏘아 뱀을 죽였다. 10여일이나 뱀의 붉은 핏물이 흘렀으며 바위와 괴수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어른들도 뱀이 무서워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린 김시민은 흔히 이무기라고 하는 큰 뱀을 퇴치하여 마을의 근심을 해소하였다고 하니 그 담력과 용기가 출중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이다. (국역 대록지 p81)

 

위의 일화에서 보여준 智謀와 용기가 후일 김시민 장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건장하였다. 깨우침이 어질고 의지와 도량이 크고 높았다. 말을 큰 소리로 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여 불굴의 장군으로서의 기질이 다져져 갔다.

 

(3)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선계

 

<안동김씨 홈페이지>에서

나.<괴산의 안동김씨 유래 및 인물소개 >

1) 유래

괴산에 안동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전인 1519년 영상공(諱 ★錫)께서 이곳 괴산으로 피신하여 살게 된 데부터 시작하였다. 영상공은 1459년 서울 주자동(지금의 서울역 근처)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공은 당시 도학자로 명성 높았던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수업을 하였다. 그 후 나이 12세에 부친(=★휘 彦默 )께서 돌아 가셨지만 불타는 학구열로 학업하여 1519년(중종 14년, 영상공 26세)에 자랑스럽게도 성균관 진사에 급제하였고, 공은 道學 문장으로써 사림(士林)들로부터 명성이 높았다.

 

그 때 공은 공의 스승이요, 도학사상과 도학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를 조아 그의 사상과 정치적 실현을 위해 여러 젊은 선비들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 중종 14.. 훈구세력들이 이상정치(道學政治)를 주장하던 신흥 혁명적 세력인 조광조(趙光祖)일파를 몰아낸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의 하나. 남곤, 심정 등 훈구(勳舊)세력이 ★조광조, ★김식(金湜), ★김정(金淨)등의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가 일어났다.

 

이에 공은 급히 피신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때마침 모친(義城金氏)께서 자신의 친정일가들이 살고 있는 괴산으로 갈 것을 제의하자 이에 동의, 황급히 가족들을 이끌고 괴산으로 도피하였다. 이때 공의 매부인 ★이문건(李文楗, 호는 默齋, 당시 공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생이었음)도 함께 이곳 괴산으로 피신하였다.

 

공은 홀로 되신 ★모친(= )과 부인 ★행주기씨, 그리고 5세가 된 아들 ★충갑 등 가솔을 이끌고 괴산으로 낙향하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외가 일가들이 살고 있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였다. 공은 이 마을 원줄기 서남쪽 변두리에 집을 한 칸 마련하여 몇 년간 살게 되었다.

그 후 이웃 마을인 전법리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공의 이름을 따서 '금석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서 공은 몇가지 사업을 하였다. 첫째는 마을입구에 마을 이름을 알리는 里門 거리표를 세운 것이다. 공은 마을 이름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을 입구의 숲으로 부터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길 가 밭둑에 길이 5자(약 150cm), 넓이 약 2자(약 60cm) 되는 표석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둘째는 마을 입구쪽에 숲을 조성했던 일이다. 공은 이곳 전법리로 이사한 뒤 마을을 돌아보고 '이 마을은 입구가 너무 허하여 재물이 흘러 나가는 형국이기에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마을 지리를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로서는 마을 입구를 토성으로 쌓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주민 능력으로는 이를 감당키 어렵다고 하자 그 대용으로 나무숲을 조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마을 앞 허한 곳을 整地하고 산에 가서 느티나무, 참나무, 오리나무 등 어린 나무 수백 그루를 캐어 이곳에 심고 가꾸었다.

 

그 후 나무들이 자라고 숲이 울창해지자 마을은 점차 부촌으로 변해갔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좋아하며 고사목 보식은 물론 마을의 모든 재난을 방지해 주는 수호신 역할을 해 달라는 뜻으로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이 숲에 금줄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등 이곳을 수호·관리 해 오고 있다.

 

이곳에서 공은 5男 2女를 낳고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 결과 아들 모두는 과거에 합격하였고 크게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영광이 있었으며 문운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자녀들은 부친(=★김석)께서 학문수업을 받다가 공이 몰하자 공의 매부인 묵재 ★이문건(李文楗. 주:星州人. 호는 默齋. 趙光祖 문하생. 기묘사화로 9년간 停擧를 당하여 괴산 호암리(현 문광면 유평리)로 낙향, 은둔불사 하다가 별시문과하여 丞旨에 오름. 淸白吏에 녹선. 乙巳士禍로 성주에 23년간 유배. 유배지에서 사망. 괴산의 花巖書院에 배향됨. 詩書에 능함. 저서<默休唱酬>)에게서 공부하였다.

 

특히 四子 ★悌甲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으로부터 수업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 때 ★忠甲은 퇴계와 아주 친분이 두터웠고 자신이 직접 아우인 ★제갑을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공부시키기도 했다 한다.

 

一子 휘 ★忠甲은 안악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二子 휘 ★孝甲은 아산군수를 지냈고, 三子 휘 ★友甲은 진사로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홀로되신 할머니 ★의성김씨와 어머니 ★행주기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四子 휘 ★悌甲은 충청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원주목사로 재직중 임진란을 만나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부인과 아들 ★시백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숙의 시호를 받았다. 五子 휘 ★仁甲은 비안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 五子의 훌륭한 업적으로 인해 이들을 일컬어 특별히 오갑파(五甲派)라 하며 제학공파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공(=★김석)은 이곳에서 1534년(중종 29) 향년 40세로 몰하였고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일명 방아재) 개향산 자좌에 영면하였다. 그 후 공은 四子 문숙공 휘 ★제갑의 공훈(임란순절)과 孫 충무공 휘 ★시민의 공훈(임란 진주대첩)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래 이곳의 명칭은 방아재(砧嶺-동네 언덕에 연자방아가 있어서 불려진 명칭)였는데 영상공의 묘소를 쓴 이후(숙종때로 추정) 영상공의 묘(능)가 있다하여 '능촌'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이곳 괴산에는 영상공의 후손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고, 면면히 현재까지 거주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집단 세거지(世居地)를 다음 항에서 소개한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2/11/06 08:11 (from:211.204.3.152) 조회 : 85

성지순례(병천편)(3)

2. 병천면 가전리 백전동(잣밭) 제학공파 세거지 및 도정사

가. 개관

충남 천안시 백전면 가전리 일대는 제학공파 세거지로서 1545년 을사사화로 입향조이신 구암공(휘 충갑)께서 이곳(가전리 옆의 수신면 장산리)으로 유배 오면서부터 우리 안동김문의 世居는 시작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창평이씨들이 크게 번성해 있었는데 공은 喪配한 상태였기에 이곳의 부호요 명인이었던 참봉 이성춘의 녀와 혼인을 하였다.

 

그 후 이곳에서 충무공(휘 時敏), 감정공(휘 時愼), 교관공(휘 時進)을 낳았고 그 이후 안동김씨가 번성하기 시작하여 500여 년 간 제학공파의 세거지를 이루어 왔다. 한 때는 약 100여 호에 500여 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약 80여 호에 160여 명이 근동에 살고 있다.

 

이곳에는 문숙공(휘 영돈), 상락백공(휘 진)과 제학공(휘 익달)의 영단이 있으며, 선조님을 모시기 위한 도정사(桃汀祠-사당)와 영모재(永慕齋-재실)가 있고, 입향조와 그 후손들의 역사 유적과 묘소가 산재해 있다.

 

<제학공파 병천종중 간략 파계도>

方慶(忠烈公)-恂(文英公)-永暾(文肅公)-縝(上洛伯公)-益達(提學公)-顧(司諫公)-孟廉(監察公)-哲鈞(主簿公)-壽亨(丞旨公)-彦默(參判公)-錫(領相公)-忠甲(龜巖公)--

--1)時晦(富平公), 2)時覺(生員公), 3)時敏(忠武公), 4)時愼(監正公), 5)時進(敎官公),6)時若(昌城公)

 

다. 입향조 소개

*김충갑(金忠甲) 1515(중종10)∼1575(선조8)

字는 서초(恕初), 호는 구암(龜岩)·오죽산인(悟竹山人), 1545年(明宗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坪), 헌납(獻納), 북평사(北平事)를 거쳤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서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고, 서청주(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 약 20여 년간 유배되었다가 선조초에 방환(放還)되었다.

그 후 안악군수(安岳郡守)가 되었으며 요승 보우(妖僧普雨)를 벌할 것을 누차 상소한 바 있다. 충무공(휘 時敏) 장군의 부친이며 경상감사를 지낸 남봉공(휘 緻)의 조부이며 시인 백곡공(휘 得臣)의 증조부이다. 보조공신(輔祚功臣) 좌찬성(左贊成) 상락군(上洛君)에 추증되었다. 묘는 충북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서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천봉(遷封)하였다. 문집으로 <구암집(龜巖集)>이 전한다.

 

▣ 김윤만 - 병천 가전리 입향조가 구암 김충갑 할아버지신데 어찌 충주며 괴산에 산소를 모시게 되었습니까?

▣ 김항용 - 그 당시에는 명당을 찾아 음택을 마련한 것같습니다. 구암공과 충무공 모두 최초에는 충주의 살미에 묘소를 썼다가 최근, 충주댐 공사로 그곳이 수장되기에 다시 부친(휘 錫)의 묘소와 장자(휘 時晦)의 후손들과 근친 일가들이 집성해 살고 있는 괴산 능촌리(구암공 묘소)와 능촌리의 충민사(충무공 묘소)로 천봉한 것입니다. 구암공은 처음 배위에게서 1,2자를 괴산에서 낳고, 喪配 후 3,4,5자를 이곳 병천 출신이신 창평이씨에게서 낳으셨지요. 그래서 공은 장자가 있는 괴산과 이곳 병천을 왕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병천에는 구암공의 3자인 충무공(휘 時敏)과 5자인 교관공(휘 時進) 후손들이 주로 살고 있는 셈입니다.

 

<오갑파>

김석의 아들 5형제 (충갑, 효갑, 우갑, 제갑, 인갑) 중 사마시에 1충갑, 3우갑, 5인갑이 급제하였고,

문과에 1충갑, 2효갑, 4제갑이 급제하였습니다.

 

<사마방목> 기록내용

1. 김충갑(金忠甲) / 中宗 38 式年 進士

【시험년도】 중종(中宗) 38 (1543)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64   【본인성명】 김충갑(金忠甲)   【본인 자】 서초(恕初)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문과】 병오(丙午) 1546 증(增)*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석(金錫)    【부친과거】 성균진사(成均進士)

 

3. 김우갑(金友甲) / 明宗 10 式年 進士

【시험년도】 명종(明宗) 10 (1555)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90    【본인성명】 김우갑(金友甲)    【본인 자】 경초(敬初)    【본인생년】 임오(壬午) 1522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괴산(槐山)     【본인구존】 자시하(慈侍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석(金錫)    【부친과거】 성균진사(成均進士)     【안항(형)】 김충갑(金忠甲), 김효갑(金孝甲)     【안항(제)】 김제갑(金悌甲), 김인갑(金仁甲)

 

5. 김인갑(金仁甲) / 宣祖 01 增廣 進士

【시험년도】 선조(宣祖) 01 (1568) 증광(增廣) 진사(進士)    【합격등위】 2등 0010     【본인성명】 김인갑(金仁甲)     【본인 자】 선초(善初)     【본인생년】 갑오(甲午) 1534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자시하(慈侍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석(金錫)     【부친과거】 성균진사(成均進士)     【안항(형)】 김충갑(金忠甲), 김효갑(金孝甲), 김제갑(金悌甲)

 

 

<문과방목> 기록내용

 

1. 김충갑

김충갑(金忠甲) 명종1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충갑(金忠甲)의 성명(姓名)

김충갑(金忠甲) 선조1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시회(金時晦)의 부(父)

김충갑(金忠甲) 선조30년 알성시에 입격한 김치(金緻)의 조부(祖父)

김충갑(金忠甲) 광해군7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경(金絅)의 조부(祖父)

김충갑(金忠甲) 현종3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득신(金得臣)의 증조부(曾祖父)

 

김충갑(金忠甲)

명종(明宗)1년(1546년), 증광시(增廣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15년, 을해    자(字) 서초(恕初)    호(號) 귀암(龜岩)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석(金錫)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언묵(金彦默)    증조부(曾祖父) 김수형(金壽亨)    외조부(外祖父) 기형(奇逈)    처부(妻父) 김신동(金神童)     자(子) 김시회(金時晦)     제(弟) 김제갑(金悌甲)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43(계묘) 생원시/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헌납&(獻納&), 사예&(司藝&)

 

2. 김효갑

김효갑(金孝甲) 명종8년 별시에 입격한 김효갑(金孝甲)의 성명(姓名)

 

김효갑(金孝甲)

명종(明宗)8년(1553년), 별시(別試) 병과21(丙科2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20년, 경진 .   자(字) 행초(行初) .   호(號) .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석(金錫)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언묵(金彦默)    증조부(曾祖父) 김수형(金壽亨)    외조부(外祖父) 기형(奇逈)    처부(妻父) 정인옥(鄭仁沃)     형(兄) 김충갑(金忠甲)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40(경자)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좌랑&(佐郞&), 한림&(翰林&)     

 

4. 김제갑

김제갑(金悌甲) 명종8년 별시에 입격한 김제갑(金悌甲)의 성명(姓名)

김제갑(金悌甲) 선조21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시헌(金時獻)의 부(父)

김제갑(金悌甲) 인조11년 증광시에 입격한 허치(許穉)의 외조부(外祖父)

김제갑(金悌甲) 인조15년 정시에 입격한 허적(許積)의 외조부(外祖父)

 

김제갑(金悌甲)

명종(明宗)8년(1553년), 별시(別試) 병과27(丙科27)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25년, 을유    자(字) 순초(順初)     호(號) 의재(毅齋)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숙(文肅)

 

>>> 가족사항

부(父) 김석(金錫)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언묵(金彦默)    증조부(曾祖父) 김수형(金壽亨)    외조부(外祖父) 기형(奇逈)    처부(妻父) 윤개,진천군 이옥정(尹漑,晋川君 李玉貞)  형(兄) 김충갑(金忠甲)    자(子) 김시헌(金時獻)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계공랑(啓功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충청/감사&(忠淸/監司&)     

 

5. 김인갑

김인갑(金仁甲) 선조38년 정시에 입격한 김시언(金時言)의 부(父)

김인갑(金仁甲) 인조13년 알성시에 입격한 김소(金素)의 조부(祖父)

김인갑(金仁甲) 인조20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휘(金徽)의 조부(祖父)

김인갑(金仁甲) 숙종4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구만(金龜萬)의 증조부(曾祖父)

 

(4) 무과급제와 관직

김시민은 재략이 있고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1578년(선조11년) 김시민의 나이 25세때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훈련원판관이 되었을 때 병조판서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병조판서는 그 건의를 듣지 않고 논의과정에서 오히려 언성을 높이었다. 김시민은 상신한 일이 무시되어 버리자 즉시 일어나서 軍帽(군모)를 벗어 밟아 버리며 말하기를 "장부가 이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겠는가!" 하고는 관직을 떠나 버렸다. 생각이 깊고 넓었으며 책략이 기이하였으나 채택되지 아니하였으니 인재가 때를 만나지 못하였음이라 하겠다.

 

수년간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군기시판관이 되었을 때 ★이헌국 정승이 김시민에 대하여 말하기를 "국가에 특이한 그릇이 되리라" 하고는 임금께 천거하기를 "외부에 보내지 말고 내직에 머물게 하였다가 사태를 보아서 급한 데에 쓰소서" 하였다.

 

또한 ★정언신 정승과 ★조헌 선생은 "김시민은 적을 방어할 줄 알며 智謀方略(지모방략)이 명장 중에서도 으뜸이라" 하며 천거하였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실기 p.129)

 

서기 1583년 ★니탕개 등의 여진족이 침입하였을때는 ★정언신을 도와 도순찰사로 하고 그 막하에 장수로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뛰어난 무관들이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5) 충무공 김시민 장군 (진주판관으로 부임)

진주성 대첩 - (1)진주판관으로 부임

 

1591년 김시민이 진주판관으로 부임할 때에 그 행차가 출생지인 목천에 들어서게 되자 구경꾼들이 그 장엄한 광경을 보고 모두 부러워하였다. 이때에 김시민의 모친이 누구의 행차냐고 물었을 때에 집의 사람들의 말이 "부인의 자제가 진주판관이 되어 부임하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일찍이 그 어머니는 "문관의 집에서 무과에 오를 것이냐" 고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어머니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진주판관으로 부임하여서는 행정을 공평 정대하게 수행함에 관속들은 두려워하였으며, 덕과 의로써 백성을 다스렸다. 백성들이 감복하여 자제와 같이 순종하였다.

 

1592년 5월 하순에는 진주목사 ★이경이 지리산에서 병사하게 됨에 김시민으로 하여금 진주목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6) 충무공 김시민 장군 (판관, 목사)

●판관 判官

신라 ·고려 및 조선시대의 관직. -- <야후 홈페이지>

 

조선시대에는 종5품 관직으로 중앙 및 지방에 두었다.

중앙 관서에는 돈령부(敦寧府) ·한성부(漢城府) ·수원부(水原府) ·광주부(廣州府) ·상서원(尙瑞院) ·봉상시(奉常寺) ·사옹원(司饔院) ·내의원(內醫院) ·상의원(尙衣院) ·사복시(司僕寺) ·♠군기시(軍器寺) ·군자감(軍資監) ·관상감(觀象監) ·전의감(典醫監) ·사역원(司譯院) · 공감(繕工監) ·제용감(濟用監) ·전생서(典牲署)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예빈시(禮賓寺) ·♠훈련원 등에 두었다.

지방 관서에는 초기 각 도와 도호부에 판관을 두었으나, 뒤에 이를 폐지하고 경기도에 수운판관(水運判官), 충청 ·전라도에 해운판관을 두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경기 ·평안도를 제외한 ♠각 도 및 수원(水原) ·강화(江華) ·광주(廣州) ·춘천(春川) 등의 유수영(留守營)과 제주(濟州) ·경성(鏡城) ·청주(淸州) 등 ♠특정지역에 판관을 두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훈련원 訓鍊院

조선시대에 병사의 무재(武才)시험, 무예의 연습, 병서(兵書)의 강습을 맡아보던 관청.

1392년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서울 동대문운동장 부근의 명철방(明哲坊)에 설치하여, 처음에는 훈련관(訓鍊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