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치(金 緻)1577(선조10)∼1625(인조3)--(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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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봉공 소개 및 연보

2. 주요 사진자료 소개

3. 주요 자료 소개 - 1) 심곡비결

 2) 수교

 3) 교지소개

 4) 남봉집

 5) 제주 방선문 마애시

 6) 제주 박물관 자료

 7) 묘비문 소개

 8) 제주 유적 답사기

 9) 제주 유적 시문

10) 주요 시문

11) 각종 전설 소개

12) 남봉공 행장

13) 구 묘갈 탁본

4.각종 문헌 자료 소개 - 1) 증보 경상도 선생안

 2) 연려실기술

 3) 훈도방주자동지

 

본문

p11.png 1. 남봉공 소개 및 연보

가. 남봉공 소개

 

조선의 문신.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심곡(深谷). 제학공(휘 익달) 후손으로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증영의정 충무공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했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吏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다.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후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한때 대북(大北)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동래부사 (東萊府使)를 거쳐 1625년(인조3)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안흥군(安興君)에 봉해졌다. 천문(天文)에 밝았으며 저서로 <심곡비결(深谷秘訣)>과 시문집 <남봉집(南峰集)>이 전한다. 묘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 1674년(현종 15년)에 세워진 묘갈이 있는데 묘갈문은 아들 김득신(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녀사위(孫壻)인 최선(崔渲)이 썼다.

 

나. 연보

 1) 1577(선조10). 7. 7. : 출생

 2) 1597(선조30) : 알성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 정자

 3) 1599(선조 32) : 춘방(春坊) 설서(設書), 사서(司書), 병조 좌랑, 홍문관 수찬사, 헌부 지평을 거쳐 해미 읍재(海美邑宰)로 나가 은덕(恩德)과 위엄을 아울러 베풂

 4) 1608(선조 41) : 옥당(玉堂), 미원(薇垣)으로 들어가고 이조 좌랑,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5) 1609(광해군1) : 제주 판관(濟州判官), 성균관 사예(司藝)와 종부시(宗簿寺), 사복시(司僕寺) 정(正) 역임.

 6) 1631(광해군5) : 영남 균전사 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 병조 참지(兵曹參知),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이조 참의

 7) 1615(광해군7) : 양대부인(養大夫人)의 상을 당함

 8) 1618(광해군10) :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으나 광해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9) 1622(인조1) :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동래(東萊) 부사에 임명. 읍민들이 구기로 된 비석을 세워 줌. 왜(倭)에게 연향(宴餉)의 음식을 대접할 때 정결하게 하였고, 세폐(歲幣)를 바칠 때에도 그 마땅함을 얻어, 왜(倭) 역시 공의 덕에 감복하여 보검과 진기한 기물(器物)을 보내옴.

10) 1625(인조 3) :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11) 1625(인조 3). 5. 27 : 묵은 병이 재발하여 안동 객사(客舍)에서 졸, 향년 49세. 청안현(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사.

      *1657(효종 8) :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지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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