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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남봉공 소개
조선의 문신.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심곡(深谷). 제학공(휘 익달) 후손으로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증영의정 충무공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했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吏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다.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후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한때 대북(大北)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동래부사 (東萊府使)를 거쳐 1625년(인조3)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안흥군(安興君)에 봉해졌다. 천문(天文)에 밝았으며 저서로 <심곡비결(深谷秘訣)>과 시문집 <남봉집(南峰集)>이 전한다. 묘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 1674년(현종 15년)에 세워진 묘갈이 있는데 묘갈문은 아들 김득신(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녀사위(孫壻)인 최선(崔渲)이 썼다.
나. 연보 1) 1577(선조10). 7. 7. : 출생 2) 1597(선조30) : 알성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 정자 3) 1599(선조 32) : 춘방(春坊) 설서(設書), 사서(司書), 병조 좌랑, 홍문관 수찬사, 헌부 지평을 거쳐 해미 읍재(海美邑宰)로 나가 은덕(恩德)과 위엄을 아울러 베풂 4) 1608(선조 41) : 옥당(玉堂), 미원(薇垣)으로 들어가고 이조 좌랑,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5) 1609(광해군1) : 제주 판관(濟州判官), 성균관 사예(司藝)와 종부시(宗簿寺), 사복시(司僕寺) 정(正) 역임. 6) 1631(광해군5) : 영남 균전사 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 병조 참지(兵曹參知),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이조 참의 7) 1615(광해군7) : 양대부인(養大夫人)의 상을 당함 8) 1618(광해군10) : 병조,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으나 광해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9) 1622(인조1) :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동래(東萊) 부사에 임명. 읍민들이 구기로 된 비석을 세워 줌. 왜(倭)에게 연향(宴餉)의 음식을 대접할 때 정결하게 하였고, 세폐(歲幣)를 바칠 때에도 그 마땅함을 얻어, 왜(倭) 역시 공의 덕에 감복하여 보검과 진기한 기물(器物)을 보내옴. 10) 1625(인조 3) :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11) 1625(인조 3). 5. 27 : 묵은 병이 재발하여 안동 객사(客舍)에서 졸, 향년 49세. 청안현(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사. *1657(효종 8) :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지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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