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김응하(金應河)

p05.png 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14) <철원군지(하)>(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 1992) 내의 자료

(2002. 7. 8. 윤만(문) 제공)

▣ 역사인물(역사인물) pp1841~1904.

○ 金應海(김응해)

-- 선조 21년(1588년)~현종 7년(1666년) 조선 인조 때의 장군. 자는 君瑞(군서). 본관은 안동. 應河(응하)의 아우. 광해 8년(1616년)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비롯하여 도총도사를 거쳐 희천군수가 되었고, 뒤에 강계부사를 거쳐 富學(부학). 仁同(인동). 定州(정주)를 두루 다스렸으며 청렴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別將(별장)이 되어 正方山城(정방산성)을 지켰으나, 12월에 적병이 직접 서울을 공격하매 기병 3백을 이끌고 길을 막고 분전하다가 적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부하의 응급구호를 받아 소생하였다. 뒤에 벼슬이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 金世翊(김세익)

-- 숙종 28년 임오(1702년)에 태어났다. 자는 聖佑(성우), 본관은 안동이며, 어영대장 김응해의 孫(손)으로 무과에 등제되었으며, 벼슬은 총융사를 역임했다.

 

○ 金重鼎(김중정)

-- 영조 5년 기유(1729년)에 태어났다. 자는 대수, 본관은 안동이며, 충무공 김응하장군의 曾孫(증손)으로 임오년(176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였으며 그후 병조판서에 花城君(화성군)으로 제수되었다.

 

○ 金重器(김중기)

-- 자는 大載(대재), 본관은 안동이며, 충무공 김응하장군의 曾孫(증손)이다. 숙종조시에 무과에 등제되었으며 벼슬은 嘉義大夫(가의대부) 병조참판겸 총융사, 동지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훈련대장 등의 여러관직을 역임했으나 뒤에 李麟佐의 亂(이인좌의 난)에 가담함.

 

○ 金 濰(김 유)

-- 자는 汝楫(여집) 본관은 안동이며 김응하장군의 4세손이며 순조 30년 경진(1830년)에 문과에 등제되었으며 벼슬은 한성부윤, 대사간을 역임했다.

 

○ 金 翕(김 흡)

-- 자는 和源(화원), 본관은 안동이며 순조 11년 신미(1811)에 어영대장 김응해의 4세손으로 태어났다. 관직은 어영대장을 역임했다. pp1902. 世翊(세익) 孫(손)이다.

 

○ 金 浹(김 협)

-- 순조 14년 갑술(1814년)에 태어 났으며 자는 潤甫(윤보), 본관은 안동이며 충무공 김응하장군의 4세손으로 술신년(1848년) 난에 출정하여 策輪忠揚功臣(책륜충양공신)에 책봉되고 花川君(화천군)을 제수받았으며 관직은 훈련대장,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 金善弼(김선필)

-- 고종 4년 정묘(1867)에 태어났다. 자는 仲弼(중필), 본관은 안동이며 어영대장 김응해의 8세손이다. 고종 26년 기축(188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도총부 도총관, 知三軍(지삼군)을 府事(부사), 강화 洋擾亂(양요난) 時(시) 鎭撫使(진무사)를 역임했다.

 

과거등제 인물.

○ 김응하 약력(조선 자 : 경희, 시호 : 충무, 관직 : 군수)

-- 1604년(선조 37년) 무과에 급제, 말직에서 전전하다가 병조판서 박승종의 추천으로 선전관이 되었으나 다음해 파직되었다. 1608년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자 그 비장으로 기용되었다. 1610년 다시 선전관, 이어 경원판관, 도총부 경력, 삼수군수, 북우후 등을 역임했다.

-- 1618년(광해군 10년) 건주위를 치기위해 명나라에서 원병 요청이 있자 선천군수로서 조방장이 되어 부원수 김경서 휘하에 들어갔다. 다음해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좌영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 3월 명나라 도독 유연이 명군 3만을 거느리고 부차령에서 패전하여 자결하자 조선군이 6만의 적군과 대전케 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해져 우영장 이일원은 달아나고 그는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군분투 끝에 전사했다.

-- 1620년 명나라 신종에 의해 요동백으로 추봉됨과 동시 처자에게 은이 하사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철원의 포충사, 종성의 행영사, 경원의 충렬사, 선천의 의열사에 제향되었다.(제15편 역사인물 제1장 제8절 참조)

 

○ 김응해 약력(조선 자 : 군서, 관직 : 어영대장)

-- 1616년(광해군 8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 도총부도사, 희천군수 등을 거쳐 1920년 강계부사에 이어 인동, 정주의 부사를 역임했고 청렴결백한 관리로 유명했다.

--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에 별장으로 정방산성을 수비, 서울로 직행 침입하는 적의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자결하려 했으나 부하의 응급구호로 소생했다. 그후 1647년 어영대장에 올랐다.

 

○ 김 협 : 김응하의 현손으로 무과에 등제되었으며 관직은 금위영천총(정3품)에 이르렀으며 영조 4년(1728년) 이인좌, 정희량 등의 반란의 잔당을 토벌하는데 무공을 세워 화천군에 봉했으며 가선대부에 오르다.(1941년 11월 30일 발행 강원도지)

 

▣ 도지정문화재.

관리번호(0412-1-23-1), 명칭.지정번호(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 도지정문화재 제105호), 소재지(철원군 화지리 산1-1 포충사), 내용(중복 생략), 관리자 및 소유자(국유 및 향교재단. 안동김씨 종중)

 

▣ 신 도 비.

관리번호(0412-4-18-3), 명칭.지정번호(김응하장군 신도비), 소재지(동송읍 하갈리), 내용(중복 생략), 관리자 및 소유자(안동김씨 종중)

 

▣ 명 비.

관리번호(0412-1-23-1), 명칭.지정번호(김응하장군 묘정비), 소재지(철원읍 화지리 포충사), 내용(문화재편 참고,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5호), 관리자 및 소유자(국유(향교재단))

 

▣ 사 우.

관리번호(0412-1-27-1), 명칭.지정번호(포충사), 소재지(철원읍 화지5리), 내용(중복으로 전략, 포충사는 대원군 집정시 내려졌던 “서원철폐령” 때에도 전국에 師表(사표)가 되어 보호되었던 47개 서원중 하나이기도 하나 현재 원 포충사가 있던 화전리 역촌동에는 주춧돌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관리자 및 소유자(안동김씨종중, 관내 유림, 철원군), 비고(1990년 사우 신축)

 

▣ 명 묘.

관리번호(0412-4-31-23), 관위(총융사), 품계(종2품), 피장자성명(김세익), 묘소재지(동송읍 길동)

관리번호(0412-4-31-27), 관위(요동백), 품계( ), 피장자성명(김응하), 묘소재지(동송읍 하갈리 군량봉)

관리번호(0412-4-31-34), 관위(병조참판), 품계(종2품), 피장자성명(金池四), 묘소재지(동송읍 하갈리 여우산) (※ 김응하장군은 金地四(지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는바 金池四와 金地四의 동일 인물 여부는 확인하지 못함)

관리번호(0412-4-31-37), 관위(훈련대장), 품계(종2품), 피장자성명(김중기), 묘소재지(동송읍 하갈리)

관리번호(0412-4-31-41), 관위(어영대장), 품계(종2품), 피장자성명(김응해), 묘소재지(동송읍 하갈리)

관리번호(0412-4-31-46), 관위(부 윤), 품계(종2품), 피장자성명(김 유), 묘소재지(동송읍 계산리)

관리번호(0412-4-31-47), 관위(도 총 관), 품계(정2품), 피장자성명(김중정), 묘소재지(동송읍 하갈리 조산)

관리번호(0412-4-31-60), 관위(병조판서), 품계(정2품), 피장자성명(김 협), 묘소재지(동송읍 동막리)

관리번호(0412-4-31-105, 관위(진 무 사), 품계(종2품), 피장자성명(김선필), 묘소재지(동송읍 이길리 사기막)

 

▣ 褒忠祠(포충사) pp1597~1603.

 

위 치

①원 위 치 : 철원읍 화전리 역촌동(동경 127° 13‘ 북위 38° 14’ 2“)

②현 위 치 : 철원읍 화지5리 산1-1번지(동경 127° 13‘ 3“ 북위 38° 13’)

건립연대 : 조선 현종 7년(1666) 병오<현종 9년 賜額(사액)>

소유 및 관리자 : 관내 유림, 철원군 및 안동김씨종중

연 혁 : 포충사는 조선 광해군 11년(1619)에 여진족 건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3000여 병력으로 6만의 적군과 접전 최후까지 용전분투, 40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 金應河(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현종 7년(1666)에 건립된 사당으로 자세한 연혁은 아래와 같다.

 

-- 조선 현종 7년(1666 병오)에 府(부)의 南(남) 4리 화전리 一峰山(일봉산) 기슭(역촌동)에 30간 규모의 祠宇(사우)를 건립하고, 현종 9년, 포충사로 賜額(사액)되다.

-- 현종 10년(1669) 명나라 神宗(신종)이 김장군을 遼東伯(요동백)으로 追封(추봉)하고 동년 6월 廟庭碑(묘정비)를 제작하다.

-- 숙종 9년(1683) 송시열(宋時烈) 撰(찬), 朴泰維(박태유) 書(서), 金壽恒(김수항)이 篆(전)한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정비를 사내에 건립하다.

-- 정조 21년(1797) 3월 29일 왕이 親筆御製(친필어제) 詩(시)를 하사, 공조판서 趙鎭寬(조진관)을 보내 懸板(현판)하였고 신위는 明帝贈(명제증) 遼東伯 忠武公 金應河 將軍 神位(요동백 충무공 김응하 장군 신위)로 賜額(사액)하다.

-- 일제시 祭器(제기) 및 鍮器類(유기류)를 倭人(왜인)에게 압수 당하였고, 8.15 해방후 人共(인공)치하에서 사액된 유산이 몰수 당하다.

-- 1950년 6.25동란으로 포충사가 全燒(전소)되다.

-- 1974년 11월 3군사령관 李世鎬(이세호) 대장이 묘정비를 3군사령부 연병장으로 이전하여 군인정신의 교본자료로 활용하다.

-- 1984년 4월 3일 유생 및 철원군수의 탁월한 노력으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曲巖山(곡암산) 기슭인 철원읍 화지리 산1-1번지에 묘정비를 환원 봉안 후 귀향향사를 거행하다. (민통선 북방 원위치는 군 작전지역이므로 불가능하여 현 위치에 이건됨)

-- 1990년 9월 29일 국회의원 金在淳(김재순), 철원군수 曺圭榮(조규영)과 복원사업추진위원 관내유생 제위의 탁월한 노력으로 신 포충사우를 현 묘정비 위치에 재건 지금에 이르다.

-- 현재 민통선 내에 있는 포충사지에는 묘정비 비대와 초석이 남아있고 祠址(사지)는 철원향교 유림재단에 속해 있어 보호되고 있다. 지금은 년 1회 철원향교대향 다음 날에 제향하는데 8.15 이전에는 1년에 2회(2월과 8월 중정일) 철원향교 전교 집례와 철원군수의 초헌으로 성대하게 지내왔으며 특히 전야제는 마을 남정네들이 싸리나무를 묶어 만든 횃불을 밝혀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더 돋구었으니이것을 炬火待令(거화대령)이라 한다.

-- 철원의 포충사외 김충무공을 제사했던 사당은 출전당시 군수로 있었던 평안도 宣川(선천)의 義烈祠(의열사)《숙종 23년(1697) 건, 영조 9년(1733) 4월 7일 사액 및 중수》에 김장군을 비롯하여 적에게 붙들렸으나 항복을 아니하고 죽은 창성부사 鄭奇男(정기남)과 선천출신의 430여명의 전사자들의 충렬을 추모 제사지내 왔으며 사당 두 기둥에는 “春秋大義日月精忠(춘추대의일월정충)”의 여덟글자와최후 결전의 고사에 따라 큰 버드나무 두 그루를 심어서 보는 사람의 감회를 깊게 하였다 한다.

-- 또한 昌城(창성)의 忠烈祠(충렬사)《숙종 21년(1695) 8월 1일 사액》와 함경도 鍾城(종성)의 行營祠(행영사)《현종 7년(1666) 건》에는 皇甫仁(황보인), 金宗瑞 (김종서)장군과 함께 김응하 장군을 봉향하였으며 慶源(경원)의 忠烈祠(충렬사)《숙종 18년(1629) 건》에는 工曹參判 貞武公 崔震立(공조참판 정무공 최진립)과 함께 김장군을 배향했으니 그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고 있는 곳이 많았음을알 수 있다.

 

▷ 記錄(기록)

정조대왕친필어시(6.25동란으로 소실)

男兒聲名聞四夷(남아성명문사이) 남아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니

遼東華誥海東姿(요동화고해동자) 요동백 추증의 빛나는 사령은 조선의 면목이라.

深河老柳如人立(심하노유여인립) 심한의 늙은 버드나무는 서 있는 사람과 같으니

如是將軍倚劍時(여시장군의검시) 알겠도다. 장군이 검을 잡았던 옛일을.

 

▷ 贈 判書 致祭文(증 판서 치제문)(광해군 11년 1619)

▷ 贈 領議政 致祭文(증 영의정 치제문)(광해군 12년 3월 10일)

▷ 鐵原 褒忠祠 奉安告文(철원 포충사 봉안고문)(현종 7년 1666년 9월 26일)

▷ 鐵原 褒忠祠 賜額 致祭文(철원 포충사 사액 치제문)(현종 9년 술신 1668)

▷ 御製 鐵原 褒忠祠 賜祭文(어제 철원 포충사 사제문)(정조 11년 정미 1787)

▷ 御製 祠板 賜祭文(어제 사판 사제문)(정조 21년 정사 1797)

 

(사진 1) : 포충사의 원위치지.

(사진 2) : 현 포충사우(철원읍 화지5리 산1-1)

 

■ 褒忠祠于銘誌(포충사우명지)

 

-- 포충사우는 372여 년전인 1618년 광해군 11년 여진족 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요청해 옴에 명나라를 지원코져 조정에서 군사 2만여명을 명군에 派遺(파유) 1619년 遼河(요하)를 건너 접전 전세 불리로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는 적에 투항하였으나 묘정비 주인공이신 좌영장 김응하 장군만은 항복을 단호히 거절, 3000여 병력으로 6만 적군과 접전 최후까지 용전분투 40세 일기로장렬히 柳下(류하)에서 전사 군인의 본분을 다 하시었다.

-- 조정에서는 김장군의 초인적인 의용을 찬양 영의정겸 충무공이라 추증함과 賜牌地(사패지)를 하사 명나라에서도 장군의 무공을 찬양 요동백을 봉하였다. 그 후 1666년 병오 헌종 7년 향리 一峰山瑩下(일봉산형하) 역촌동(현 화지리)에 사우를 건립하였고 정조대왕의 親筆御製 詩(친필어제 시)를 하사 趙鎭寬(조진관)을 보내어 현판하였고 신위는 明帝贈(명제증) 遼東伯 忠武公 金應河 將軍 神位(요동백충무공 김응하 장군 신위)로 賜額(사액)하시었다.

-- 본 군에서는 每歲(매세) 음 2월 8월 中丁日(중정일) 유생원 다수 춘추 봉향 참사 繼傳(계전)에 임하였다. 1683년 계해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 선생 撰(찬) 묘정비를 獻竪(헌수) 300여 년동안 보존되었으나 1950년 경인 6.25동란으로 인하여 포충사우는 소실되고 민통선 북방위치임에 자유로이 출입이 불가능하여 3군사령부 영내에 안치 묘정비를 현위치로 복원코저 懇切(간절)한 염원하에 본 유생원일동은 포충사 복원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 정계 요로에 진정 및 철원군수의 탁월한 노력에 환원케 되었으나 원위치 복귀가 불가함에 유생원 희생적인 出捐(출연)으로 현 敷地(부지) 위치에 묘정비를 1984년 4월 3일 복원 안치하였다. 포충사우를 건립코저 유생 제위는 항상 몽중 염원하였던 바 이 고장 출신 국회의원 金在淳(김재순), 철원군수 曺圭榮(조규영), 복원사업추진위원회 제위의 탁월한 노력과 유생원 제위 등이 중심, 재건에 박차를 가하여 오늘에 이르러 포충사우를 건립하였다.

       龍(용) 서기 1990경오년 음 8월 11일 丁酉戌座辰向(정유술좌진향) 午時(오시)

       立柱上樑(입주상량) 龜(구)(양력 9월 29일)

 

국회의원 金在淳(김재순)

철원군수 曺圭榮(조규영)

포충사복원사업추진위원회

위 원 장 金知律(김지율)

위 원 安俊鎬(안준호)

위 원 金圭章(김규장)

철원향교유생원일동

(※포충사우명지사본)

 

■ 忠武公 金應河將軍 追慕歌(충무공 김응하장군 추모가)

작사 : 金瑛培(김영배)

작곡 : 李玉順(이옥순)

 

1. 나라의 戚誼功臣(척의공신) 응하장군은

-- 외적을 무찔렀던 선봉의 용장

-- 압록강 300리 밖 부차령까지

-- 후금군 물리치며 세운 공적은

-- 장하셔라 충무공 김응하장군

-- 그 용맹 물려받은 우리 한겨레

 

2. 민족의 영웅이신 류하장군은0

-- 나라힘 기르기에 몸바친 명장

-- 심하의 요동에서 적을 막으며

-- 최후의 얼을 심어 나라지켰네

-- 이지셔라 충무공 김응하장군

-- 그 슬기 이어받은 이고장 후손

 

■ 褒忠祠 沿革(포충사 연혁)

서기 1666(현종 7년) : 철원읍 화전리 일봉산 기슭(역촌동)에 유림 및 김응하 장군 후손들에 의해 사우, 동. 서재, 삼문, 교직사 등 30여간 건립.

서기 1668(현종 9년) : 포충사로 사액되다.

서기 1669(현종 10년) : 명나라 신종께서 김응하장군을 요동백 추봉.

서기 1669 6월 : 김장군의 묘정비를 제작. 송시열 찬, 박태유 서, 김수항 전.

서기 1683(숙종 9년) : 묘정비를 사내에 건립.

서기 1797년 3월 29일(정조 21년)--1)왕이 친필어제 시를 하사, 공조판서 조진관을 보내 현판을 게양.

-- 2)위패는 명제가 증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장군 신위로 사액.

일제시 1910년~1945

-- 1)원장 김필제, 도유사 김윤식, 제유 생원들이 중심이 되어 하사 유산을 보존하였으며 매년 음 2월 8월 중정일 춘추봉향사 거행.

-- 2)제기 및 식기류(유기)를 전부 압수 당함.

서기 1945년 8월~1950년도(인공치하)

-- 1)사액되었던 유산은 몰수 당하였으며 사우의 봉향사는 폐쇄됨.

-- 2)6.25동란으로 사우는 전소됨.

-- 3)김장군의 영정 2점과 호패 2점은 유생은 金榮憲(김영헌)이 보관중에 있었으나 6.25 동란중에 消失(소실)됨.

서기 1974년 11월 : 철원 출신인 당시 3군 사령관 이세호 대장이 묘정비의 보호와 군인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용인의 3군사 연병장으로 이전.

서기 1977년 12월 25일

-- 1)철원 유림에서는 포충사 복원 및 묘정비 환원 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방면으로 관계기관에 건의와 추진 협조로 환원 및 복원사업에 박차를 가함.

-- 2)추진위원회 구성

-- 위원장 김지율, 부위원장 신윤호, 김두성,  -총무 안준호, 재무 김지홍, 선전 박영규, 감사 임백칠, 오시천.  -위원 남영하, 김규장, 김규현, 박세근, 엄영섭.

서기 1978년 3월 26일

-- 1)6.25동란으로 김장군의 위패가 소실된 것을 철원향교 전교인 菊軒(국헌) 金知律(김지율)의 전서로서 栗木板(율목판)으로 제작 봉안함.

-- 2)위패문

      -明帝 贈 遼東伯 忠武公 金應河將軍 神位(명제 증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장군 신위)

-- 3)철원향교 명륜당 묘정에서 유생원, 관, 민 다수 참석리에 위패 봉향제를 거행.

-- ①초헌관 김지율 ②아헌관 철원읍장 ③종헌관 김영배

서기 1984년 4월 1일

-- 1)철원군수 전동빈의 각별한 협조와 추진위원, 유생원들의 노력으로 3군사로부터 묘정비 환원 통보를 받음.

-- 2)원위치에 복원 계획하에 군부와 절충했으나 군작전지역이므로 불가하여 화지리 산1-1번지 1,200평을 군징발 보상금으로 인수하여 현위치에 부지를 마련하고 복원키로 결정.

-- 3)3군사로부터 인수받은 묘정비 환원향사를 1984년 4월 1일 오전 9시 3군사에서 민, 관, 군 다수 참석리에 집례자 오시천, 초헌관 3군사 부사령관, 아헌관 김지율, 종헌관 종손 김재홍 순으로 거행.

-- 4)묘정비는 군차량에 의해 오후 6시 현위치에 하역작업.

서기 1984년 4월 3일

-- 1)유생원, 종중, 민, 관 다수 참석리에 화지리 산1-1번지 부지에 묘정비 환원 봉안하다

-- 2)묘정비의 거북조각 석대밑에 오석으로 각자한 銘誌(명지 : 묘정비 참조)를 戌座辰向(술좌진향)으로 헌수 봉안함.

서기 1984년 음 8월 : 추계 향사시에는 현위치에서 환원 묘정비 위안 봉향제를 거행. ①초헌관 전동빈 ②아헌관 김지율 ③종헌관 敎育長(교육장)

서기 1985년 9월 13일 : 묘정비가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다.

서기 1985년 10월

-- ①포충사 진입로 300m 포장(시멘트)

-- ②묘정비 및 사우 보호책 266m 설치

-- ③부지정리 및 잔디 식재

-- ④석축 103m 구축 ※철원군비 700만원을 들여 시공했다.

서기 1990년 9월 29일

-- 1)포충사우의 복원사업공사는 별첨 설계도와 사업계획에 의거한 원장 김규장을 위시하여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국비 2400만원 지방비 2400만원을 보조받아 1991년 3월 28일 군수 및 각 기관단체장을 위시하여 유림 및 군민 다수 참석리에 준공되었다.

-- 2)국회의원 김재순, 철원군수 조규영, 복원사업추진위원, 유생원들의 탁월한 협와 노력으로 포충사가 재건되었다.

-- 3)사우의 상량목 내에는 銘誌(명지)를 봉안했다.

서기 1991년 3월 28일(음 2월 13일 중정일)

-- 1)포충사우 준공식 겸 춘계 향사에는 추진위원장 김지율, 국회의원 김재순, 철원군수 김창수, 각기관장 및 사회단체장, 유생원, 안동김씨종중, 관민 300여 명의 참석리에 성대히 거행.

-- ①준공식 ②춘계향사 ③위패봉안 ④영정봉안 ⑤현판게시

 

※사우에 봉안된 영정은 요동백 11대손인 김승환(81세 서울 강남구 도곡동)씨가 철원출신인 백만우 화백에게 의뢰하여 제작 봉안한 것이다.

 

역대 포충사 원장

※현종 7년(서기 1666년) 사우가 건립되면서 초대원장부터 조선조말까지의 원장 명단은 문헌이 없어 기록치 못하였으며 일제시부터 현대까지의 원장의 명단만 순서대로 열기한다.

1. 李錫瑩(이석형) 2. 金駜濟(김필제) 3. 高運河(고운화) 4. 尹秉周(윤병주) 5. 許 根(허 근) 6. 金景瑞(김경서) 7. 李泰潤(이태윤) 8. 安敎愼(안교신)  9. 安敎壽(안교수)10. 金允煥(김윤환)11. 金潤植(김윤식)12. 朴鳳圭(박봉규)  13.朴正錫(박정석)14. 金知律(김지율)15. 安俊鎬(안준호)16. 金圭章(김규장  

 

 ▣ 遼東伯 金應河將軍 廟庭碑(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 pp1536~1539.

 

지정번호 :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05호

지정일자 : 서기 1985년 9월 13일자

위 치

①원 위 치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278번지(역촌동)(동경 127。13‘ 북위 38。14’)

 ②임시위치 : 육군 제3군사령부 연병장(1974년 2월 3일)

 ③현 위 치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1-1번지(1984년 4월 3일) - (동경 127°13‘ 북위 38° 14’)

규 모 : 고 250㎝, 두께 33㎝   碑臺石(비대석) ~ 거북(대형) 조각받침(380㎝ × 283㎝)

재 료 : 비석~비신~烏石 屋蓋石(오석 옥개석)~화강암석. 臺石(대석)~복련을 한 장방형 화강암석

건립연대 : 崇禎己酉(숭정기유) 6월 立(입, 조선 현종 10년(1669) 6월 제작). 숙종 9년(1683)에 건립.

소유 및 관리 : 국유(향교재단)

 

--遼東伯(요동백) 金應河將軍(김응하 장군)의 廟庭碑(묘정비)는 조선조 광해군(1619) 때 명나라 建州衛(건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조영장으로 출정하여 이름을 떨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9년(1683)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향교골(전 철원부 서화전리 일봉산 밑 역촌동)에 세운 기념비이다.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여 정면을 응시한 거북이 조각받침을 한 위에 250㎝의 높이와 폭 98㎝, 두께 33㎝의 사면 비석으로 일대기를 현종 10년(1669) 6월 尤菴 宋時烈(우암 송시열, 좌의정)의 글과 사헌부 지평 朴泰維(박태유)의 글씨에 영의정 文谷 金壽恒(문곡 김수항)의 書題字(서제자)를 곁들여 제작하였다.

--당초에는 화지리 향교골 褒忠詞(포충사)에 함께 있었으나 6.25의 전화로 인하여 褒忠祠宇(포충사우)는 소실되고 碑(비)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고장 출신으로 육군 제3군사령관이었던 李世鎬(이세호) 장군이 1974년 2월 사령부 연병장으로 이전 보호중 1984년 4월 3일 철원의 儒生(유생) 및 철원군수의 노력으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曲巖山(곡암산) 기슭인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1-1번지에 봉안하였다. (별첨 비문 번역문)

 

--그후 1986년(10월 17일~11월 4일) 부지정리 423평, 잔디 이식 153㎡, 석축 236.5m 묘정비 보호망 30m, 잣나무 75주를 식재하여 주변 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990년(7월 30일~10월 26일)에 褒忠祠宇(포충사우 : 26.32㎡)를 철원군(군수 曺圭榮)에서 4,300만원의 예산을 들여 1991년 3월 28일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 忠武公 廟庭碑 銘誌(충무공 묘정비 명지)

--포충사묘정비는 서기 1683년 기해 10월에 尤菴 宋時烈(우암 송시열) 선생 謹撰(근찬) 이조 숙종 9년 화지리 278번지 書院(서원)마을에 건립 관민이 每歲春秋(매세춘추) 음 2월 8월 中丁日(중정일) 奉享參祀(봉향참사) 추모하다가 6.25동란으로 祠宇(사우)는 燒失(소실)되고 묘정비는 황량한 초야에 묻혀 훼손 위기에 처한 것을 제3군사령관의 배려로 3군사 연병장에 移安(이안)하여 전군에 교본으로 삼았었다.이에 철원군 儒生員(유생원)의 간절한 염원과 철원군수의 탁월한 노력으로 환원케 되었으나 원위치 복귀가 불가능함에 유생들의 희생적인 出捐(출연)으로 화지리 산1번지 1호 현 위치의 ○지 1,000평을 매입하고 우선 복원하는 바이다.

 

서기 1984년 갑자 4월 3일

포충사 복원사업 추진위원회

철원군수 전 동 빈

철원향교전교 김 지 율

추진위원 안 준 호

추진위원 김 규 장

충무공종손 김 재 홍

 

■褒忠詞廟庭碑(포충사묘정비) 左議政 尤菴 宋時烈 撰(좌의정 우암 송시열 찬)

 

(부사공 19대손 재원 역)

-- 신종황제 46년 만력 무오년(서기 1618년)에 건노(여진족 후금으로 뒤에 청이라 함)가 반하여 크게 천촉과 요○지방(현재 성도 중경 부근과 요동 북경 부근일대)의 군병을 발하고 도독 유정과 유격장군 교일기를 보내 정벌케 하고 우리나라에 청병하니 조선에서 2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강홍립으로 원수를 삼고 김경서로 부원수로 삼아 유 교 이장과 힘을 합하여 밤을 낮삼아 적을 치게 하니 이때 장군은선천군수로 좌영병을 거느리고 경서군에 예속되었다. 이듬해 기미년 2월 21일 요하를 건너 虜地(노지)에 들어가 부차령에 이르니 때에 황제가 연로하여 내관(내시)이 정무에 참여하고 전선에서는 전군의 행렬이 계속되지 못하고 또 모든 부대가 각자 공을 다투어 경진하다 패하니 部督(부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아군이 드디어 虜(노)와 더불어 충돌케 되니 장군은 수하병 3천명을 이끌고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 지휘하여 진을 벌릴 때 신기가 평상시와 같이 안휴하며 진이 이마 이루어지매 홍립에게 고하여 말하되 속히 우영장군 이일원에게 명하여 힘을 아울러 마저 싸우게 하라. 홍립이 우영장군 이일원으로 하여금 우영병을 이끌고 서로 돕게 하니 장군이 일원에게 이르기를 아군이 세약하니 험한 곳을 택하여 지형 지물을 이용치 않으면 반드시 패하리라 일원이 불응하였다. 적 수천기가 좌우영사이를 횡단하니 일원은 달아나고 조금있다 적 6만이 우리 군병앞 1리밖에 진을 칠새 정예로 뽑아 적의 앞으로 진격하여 장군이 명하여 포수로 전례를 삼고 일시에 총을 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적병이 퇴각하기 세 번에 이르렀다. 이때에 교 유격장군이 패하여 홍립진에 있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귀국위 보졸이 철기와 더불어 평지에서 당함이 능히 이와 같도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연기와 먼지가 4면에 차서 총과 활을 쏠 수 없게 되어(당시의 총은 火繩銃(화승총)으로 화승에 부시로 불을 대려서 쏨 큰 바람이 불면 쏠 수 없음) 적이 이에 힘을 다하여 돌격해 오니 아군이 순간에 무너졌으며 이때 장군은 손에 활을 들고 허리에 칼을 차고 홀로 류수하에 의지하니 두 군졸이 가지않고 한사람은 기를 잡고 한사람은 화살을 받들어 (김철현이 甲裏(갑리)에서 箭矢(전시) 300개를 바치고 장군과 同死(동사)를 원하다) 장군이 활을 쏘니 백발백중 맞고 맞으면 반드시 두세놈을 꾀장하니 적의 시체가 堆肥(퇴비)처럼 쌓이고 오랑캐의 귀한 장수가 많이 죽은 고로 적이 몹시 두려워 하였다. 장군이 중갑을 입었는데도 화실 꽂힌 것이 마치 고슴도치 같았으나 능히 뚫으지는 못하였다.

-- 화살이 이미 다 떨어져 드디어 칼로 적을 치니 一劍之下(일검지하)에 앞놈의 투구 쓴 대가리와 뒷놈의 갑옷 입은 허리가 割然(할연)이 아울러 떨어지니 그 소리가 산이 무너지는 것 같고 칼이 이르는 곳에 적병이 殲滅(섬멸)이라 이에 앞서 홍립이 譯官(역관) 河世國(하세국)을 노진에 보내 항복할 뜻을 전함으로 虜(노)가 급히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니 대저 화친을 권유코져 함이었다. 장군이 불응하고크게 홍립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의 무리는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리고 서로 돕지 않는다. 칼이 또한 부러지매 빈주먹으로 치니 오히려 奮(분)이 스스로 더하였다. 一賊(일적)이 뒤로 돌아 멀리서 창를 던지어 비로소 서서 운명함을 알았으니 이때가 바로 3월 초 4일이었다.

 

-- 오히려 칼자루를 꽉쥐고 노한 안색이 勃勃(발발)하여 풀어지지 않으니 적이 놀래어 서로 돌아보며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교 유격장군이 또한 자살하고 홍립 경서 일원 등은 다 갑옷을 벗고 虜酋(노추)에게 항복하니 이때 양진의 시체를 장사하니 장군은 홀로 썩지 않고 칼자루를 오히려 그 손에 굳게 쥐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사당을 龍灣江(용만강 : 압록강)상에 건립하고 廟庭(묘정)에비를 세우고 유가족을 보살피게 하였다.그 아우 응해가 형이 평상시 착용하던 의복으로 용만강상에 招魂(초혼)하고 (초혼시 “나 여기 나간다. 어서 가자”하는 장군의 음성이 낭낭하였다는 전설이 있음) 돌아와 그 의복으로 철원 선영하에 장례하니 그때 문인들이 다투어 挽狀(만장)을 썼다. 이듬해 경신년에 신종황제께서 거룩한 詔書(조서)를 보내고 벼슬을 증하여 요동백을 봉하고 유가족에게 백금을 하사하며 장군의 충절을 사람에게 계몽하는 등 대단히 행사가 놀라왔으며 그 사실이 충렬록(忠烈錄)에 다 기재되었고 그 후 潛谷(잠곡) 金相國(김상국)이 장군에 관한 사기와 전기를 수집하여 상하권(忠烈錄)을 작성 편입하였다. 국조명신록에 장군의 신장이 8척이요 언어가 적었으며 蓋世(개세)의 기품으로 음주가 數斗(수두)에 이르러도 志氣(지기)가 어지럽지 않고 용력이 절륜하여 18세시에는 맹호를 맨손으로 잡았는데 이때부터 시골 사람들이 장군이라고 별명을 불렀다. 또 금전을 탐내지 않음이 흙을 보는 것 같이하고 색을 피하기를 怨讎(원수)같이 하니 참된 호걸이요 위대하고 굳센 대장부라고 하겠다.

-- 집에 있을 때는 부모에게 효하고 동기간에 우애하고 14세되든 해에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임란중에 돌아가셔서 장지를 구하지 못하던 중 異僧(이승)이 지나가다가 그 슬퍼함을 보고 장지를 택하여 장사케 하였는데 그 그 장제의 예절이 비록 經生學士(경생학사)라도 이 보다 더 잘할 수가 없었다. 弟(제) 應海(응해)와 같이 힘써 농사를 짓고 낮이면 사냥하고 밤이면 병서를 공부하였다. 관찰사가 크게철원에서 무사를 소집하여 재주를 시험하였는데 그 때 장군의 나이 극히 어렸으나 문득 활을 쏠 때마다 과녁을 맞추니 관찰사가 매우 기특하게 여겨 무과보기를 권하여 마침내 급제하였고 萬曆(만력) 乙巳科에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득과 손실 우대와 천대에 관심이 없어 항상 마음이 담담하였다.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이 특별히 변방 수령으로 천거하여 임지로 떠날 때 貴家女(귀가녀)를 소개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 때 장군이 사절하며 말하기를 그 여자를 처와 동등으로 대우하면 명분이 紊亂(문란)할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드시 처보다 우대함을 바랄 것이다. 하고 頑强(완강)이 거절하였다.

 

-- 장군이 장년시에 선조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군중에 聲技繁華(성지번화)한 중에도 주색을 멀리함이 엄하였으며그 몸가짐과 행동을 절제함은 근엄하였다. 효종대왕 때에 弟(제) 應海(응해)가 或逆獄(혹역옥)에 연락이 있지 않았나 의심받은 일이 있었는데 왕께서 此人(차인)은 응하의 弟(제)이며 일찍이 병자호란 때에 군병이 패하니 스스로 목을 찔러 亂屍中(난시중)에 기절한 것을 구출하여 소생한 일이있는 사람인데 반드시 나라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 하여 즉석에서 북병사를 제수하였다. 대저 광해조 때에는 의리가 밝지 못하였으나 장군에 대하여는 감히 欽尙(흠상 :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는 등 행사를 말함)을 아니하지 못하였고 戎虜(융노)에 이르러서도 또한 장군의 충절에 탄복하였다.

-- 천자께서 惻然感動(측영감동)하여 이미 기재한 바 褒寵(포총 : 포는 표충(表忠), 총은 寵愛(총애)이 훌륭하였고 我朝(아조)에서는 역대왕의 旌褒事業(정포사업)이 극진하니 이는 前古(전고)에도 드믄 일이다. 崇禎(숭정) 정묘년에 장군을 모신 龍灣廟(용만묘)를 청나라가 헐어달라는 요청에 의하여 비와 함께 건물을 철거한 고로 今上王(금상왕) 병오년에 金應敎萬均(김응교만균)이 철원부사 당시에 비로소廟屋(묘옥)을 지어 忠魂(충혼)을 편안히 모시게 되었고 당시 군수 世龜(세구)와 병사 柳斐然(류비연)은 장군의 내외손인데 비를 세움에 있어 비문을 청해 옴에 기록하기를 대저 장군에 대하여 논평컨대

-- 장군의 絶倫勇力(절륜용력)으로 弓馬(궁마 : 무관)에 종사하였는데 적은 일에도 항상 勤愼하여 家道(가도)가 매우 바른 즉 그 근본이 또한 확립되었고 출신하여 官(관)이 있으면서도 待遇(대우)의 優劣(우열)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美童(미동) 官妓(관기) 官婢(관비) 등을 멀리하였다. 그 修身(수신)함이 또한 확고하였고 갑자기 대적을 만나 일만군병이 魂飛魄散(혼비백산)하여도 침착하게 진을 치고몸을 던져 적을 무찌르니 그 용력이 또한 크다. 적이 화친을 청하여 왔어도 듣지 않고 마침내 전사하니 그 의리가 또한 바르다. 삼군을 激動(격동)시켜 적을 향하여 다투어 전사하고 한사람도 발길을 돌려 물러서는 자가 없었은 즉 가히 삼군의 死力(사력)을 얻었다 하겠다. 柳河(류하)에 의지하여 적을 쏘고 화살이 떨어지면 칼로치고 칼이 부러지면 주먹으로 치니 가히 百夫(백부)의 防禦(방어)가 되었다. 전사 후 오히려 칼을 쥐고 안색이 산 사람같았고 시신이 오래토록 썩지 않았으니 그 충절하고 굳센 혼백이 또한 가히 죽엄을 따라 없어지지 읺고 영구히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이 문장이 장군의 위대함을 표현함에 부족하도다. 오직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의 大倫(대륜)과 천지간에 차있는 호연한 의기가 한데 뭉쳤으니 이른바 국민으로서 떳떳한 자라 하겠노라. 우리나라가 皇朝(황조)와 같이 3백년을 내려오며 신종황제에 이르러 壬亂時再造之恩(임란시재조지은)으로 말할 진대 의리로는 비록 형제지간이나 친 부자와 다를 바 없으니 우리나라 전국토의 一草一木(일초일목)에 이르기까지 帝德(제덕)이 힘을 입지 않은 자 없건마는 저 홍립 경서는 감히 밀지 운운하여 大義(대의)를 저버리고 逆(역)에 從(종)하여 我東方禮義之國(아동방예의지국)으로 하여금 禽獸(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장군의 전사가 없었더라면 장차 천하후세에 무슨 말로 從征之義(종정지의 : 원병을 파견진의)를 변명하리요. 그러면 장군의 전사는 천하의 大義(대의)를 밝혔고 천하의 大經(대경)을 세웠으니 日月(일월)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 기운이 滅(멸)하지 않고 山岳(산악)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 節槪(절개)가 없어지지 않고 河海(하해)가 마르지 않으면 그 功(공)이 이지러지지 않으니 하늘이 장군을 이 세상에 生(생)케 함은 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천하만세를 위함이요 춘추대경에 주황실을 높이고 夷狄(이적)을 배척하든 공맹의 사상을 재실천케 함이니 天(천)이 이미 장군에게 生(생)을 주었은 즉 하늘이 또한 생을 거둠이라. 혹자는 홍립이 구원치 않아 장군이 전사하였다고 원망하나 홍립의 힘이 어찌 장군의 만고충절에 도움이 되리요 장군의 諱(휘)는 應河(응하)요 자는 景羲(경희)니 조상 때에 안동에서 철원으로 이주하였으니 경순왕의 후손이요 고려 명장 方慶(방경)은 11대조가 된다. 부친은 증호조참판 地四(지사)요 萬曆(만력) 8년경진3월초3일에 탄생하고 40세되던 해 3월초4일에 전사하니 廟(묘)는 철원부 보개산 동쪽 화전리와 선천, 종성, 창성에 있다. 崇禎(숭정) 乙酉(을유) 6월 일(서기 1669년)

 

▣ 忠武公 金應河將軍의 神道碑(충무공 김응하장군의 신도비) pp1661~1662.

소 재 지 :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 여우산(군량봉)(동경 127。5‘ 북위 38。16’)

건립연대 : 광해군 11년(서기1619년) 9월 27일 立(입)

규 모 : 높이 150㎝, 폭 55㎝

재 료 : 烏石(오석)

神道碑(全面文)<신도비(전면문)>

-- 有明 朝鮮國 贈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 平安道 助防將 贈 忠武金公 應河之墓(유명 조선국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겸 평안도 조방장 증 충무김공 응하지묘)

 

-- 조선 선조 13년(1580)에 철원군 어운면 하갈리에서 태어났다. 고려시대의 명장 方慶(방경)의 후손이며 8척의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 선조 37년(160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북우후 등을 거쳐 광해군 10년(1618) 명의 원병 요청으로 부원수 金景瑞(김경서)의 조방장으로 출전했다가 다음 해 도원수 姜弘立(강홍립)의 좌영장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後金國軍(후금국군)과 富車嶺(부차령)에서 대전하다가 명나라 도독 유정(劉綎)은 패전하여 자결하고 조선군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은 전세가 불리하여 달아나니 홀로 3000의 군사를 이끌고적 6만과 대전하다가 갑자기 큰 바람으로 시야가 가리어 총과 활을 쏠 수 없게 되어 아군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장군이 홀로 칼과 활을 가지고 버드나무에 기대어 싸우니 장군의 화살에 적의 시체가 쌓이고 많은 적장이 죽으니 적들이 크게 두려워 했다. 이때에 전세의 불리함을 깨달은 강홍립이 항복하고 장군에게도 항복할 것을 종용하자 장군이 크게 꾸짖기를 “너희 무리는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린다.” 하며 장군의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싸우고 칼이 부러지자 맨주먹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전사하니 그날이 광해군 11년(1619) 은력 3월 4일(양력 4월 13일)이였으며 장군의 나이 40세였다.

-- 광해군 12년(1620)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무공이라 내렸으며 명나라 신종으로부터 요동백에 추서되었다.

 

-- 형의 슬픈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아우 응해(應海)는 형이 출정할 때 도강하였던 창성으로 가서 압록강 건너 쪽을 향하여 형의 적삼을 흘들며 혼백을 불렀다. 응해는 형의 혼백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 11년(1619) 4월 27일 비변사는 광해군께 김장군을 고향에서 衣冠葬(의관장)으로 장례 거행함에 있어 강원감사가 주관하여 묘소를 조영토록 할 것을 계청한 바 광해군께서는 계청대로 시행할것을 하명하였다. 이리하여 여우산(군량봉) 선영하에 장군을 의관장으로 장례하였다.

-- 이와 같이 시체없는 빈무덤이라 하여 여우산을 “빈장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한 그 앞 내를 빈장개울이라 부르게 되었다.

-- 광해군 11년(1619) 9월 27일 묘 앞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판중추부사 龍洲(용주) 趙炯(조형)이 지은 것이다.

-- 신도비 대석은 모두 상면에 복련을 조각한 장방형이며 비두는 화강암 옥개로 되어 있다. 묘비는 온전하나 신도비는 전면에 총탄 자국으로 인하여 많이 파손되었다.

 

▣ 사진 소개

遼東伯 金應河將軍 廟庭碑(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

--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 1-1번지.

--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05호 1985년 9월 13일자.

 

포충사(褒忠祠 : 충무공 김응하장군 배향)

--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 1-1번지]

 

忠武公 金應河將軍 影幀(충무공 김응하장군 영정 : 1580년~1619년)

 

철원군지(하)/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1992.

 

▣ 金應河(김응하) 소개

1. 사냥을 좋아한 소년.

-- 김응하의 본은 안동, 자는 景羲(경희)이며, 1580년(선조 13년) 3월 철원군 어운면 갈운동(현 하갈리)에서 고려 僉議中贊 上將軍 忠烈公 金方慶(첨의중찬 상장군 충렬공 김방경)의 10대손 地四(지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응하 소년은 숙성하여 어른스러웠으며,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사냥한 새나 짐승으로 부모님께 반찬거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응하의 나이 14세 때에 임진왜란 중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지성껏 묘자리를 구하여 장군 두 사람이 난다는 명당을 얻어 안장하였다.

-- 응하는 아우 應海(응해)와 함께 사냥하러 다니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새사냥을 나갔다가 범을 만나 고두리살로 범의 정수리를 쏘았는데, 화살이 정수리를 뚫고 贓腑(장부)까지 관통했다. 급소를 맞은 범은 꼼짝없이 앉은 채로 죽고 말았다. 그는 기운이 세어 단검하나로 산돼지를 잡았고, 짐 실은 말을 도랑에서 올리기도 하였으며, 18세 때에는 덕령산에서 주먹으로 범을 때려잡는 일도 있어서 김장군이란별호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2. 무과급제.

-- 청년 응하는 팔척 장신에 몸집도 우람했으며,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한번에 황소다리 하나를 다 먹어치웠으며, 남달리 술을 좋아하여 두세말 술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시곤 했지만, 정신을 잃거나 쓰러지는 일이 없었다. 한 때는 야생마를 얻어 길들인 일도 있었고, 均田使(균전사) 밑에 量田監(양전감)으로 일하면서 농민들 편에 서서 정의로운 선행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 24세 때 여름, 강원도 관찰사 朴承宗(박승종)이 관내 순시차 왔을 때 무술대회를 열었는데, 응하는 뛰어난 무예로 박관찰사의 눈에 들었고 병서를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고를 받았다. 그는 漢灘江(한탄강) 상류의 경승지 칠만바위를 중심으로 심신의 수련을 계속하여 병서를 열심히 읽고 깨우쳤다.

 

-- 2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내 함경도 鍾城(종성)에 변경수비의 임무를 맡고 부임, 삭막한 국경지대에서의 처음 겪는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투철한 책임감으로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 때 강원도 관찰사로 있었던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응하는 군관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 당시 선조의 국상중이어서 관리들의 주색 풍류를 금하고 근신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청년 응하는 절제하며 근신하는 생활을 잘 하였으므로 박승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3. 서민적인 목민관.

-- 응하는 31세 때 都體察使 李恒福(도체찰사 이항복)의 추천으로 정 5품 문관인 함경도의 慶源府 判官(경원부 판관)에 발탁되었다. 후에 중앙관서인 五衛都摠府(오위도총부)의 經歷(경력)을 거쳐, 동급 문관인 함경도 삼수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삼수군은 갑산부와 함께 압록강 상류에 접하고 있어서 풍속과 습관조차 다를 만큼 교통이 불편하여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깊은 산중인데 삼동의 추위도 대단하며 대부분 주민들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다. 김응하 군수는 훗날 淸白吏(청백리)가 된 金時讓(김시양 : 옮긴이 주-하담할아버지로 추정됨)이란 막역한 친구가 보내준 한지를 솜대신 넣어 지어 입고 찬 바람을 면하였다. 그후 그는 정 3품 무관인 兵馬虞候(병마우후)를 제수 받고 함경도 鏡城(경성)에 있는 北兵營(북병영)에 근무하였다. 그 때 병마절도사 金景瑞(김경서)의 지시를 따라 府城(부성)의 동문과 남문의 문루와 망대를 修築(수축)하게 되었는데, 士卒(사졸)들이 힘드는 일을 할 때에는 김응하 우후도 같이 일하면서 밤낮으로 감독하였으므로 그 큰 공사를 한 달만에 훌륭하게 마쳤다.

-- 39세 되던 1619년 여름 편안도 助防將(조방장)겸 선천군수로 가게 되었다. 효성과 우애와 의리가 있는 사람들은 薦擧(천거)하게 하여 예를 다하여 대접하였고 재주있는 사람들을 수습하여 그 앞길을 열어주었다. 또 지혜롭고 용맹스런 사람을 불러 신임하니 백성들은 모두 김군수를 존경하였다. 사생활에 있어서는 근엄하고 청렴하였으며 10여년 공직에 머물며 상관에게 아첨하거나 부하에게 교만하지않았고 백성을 대할 때는 체통을 차리는 일이 없이 늘 서민적인 사람이었다.

 

4. 구원군 좌영장으로 출정하다.

-- 1616년에 後金(후금)을 세운 여진족 建州衛(건주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吟赤 ; 노아음적)는 차츰 그 세력을 확장하여 만주 땅을 차지한 후 1618년에는 撫順(무순), 淸河(청하) 등지를 점령하고 쇠약해 가는 명나라의 동부지방을 침략하는 것이었는데 명나라는 이에 대항하여 요동군 經略使(경략사) 곧 총사령관에 楊鎬(양호)를 임명하고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좌. 우. 중. 남의 네길로 나누어 진군하게하고, 우리 조선에 대하여 원병을 청하는 재촉이 심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와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문에 7년동안이나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어 국력이 매우 피폐하였고, 명나라는 새로 일어난 후금의 세력을 막아낼 도리가 없어서 구원군을 청하여 온 것이었다. 광해군은 이 국제정세의 변환기에 처하여 밖으로는 형세관망의 태도를 취하여, 명나라를 저버리지도 후금의 노여움을 사지도 않는 용의주도한 양단정책을 쓰는 동시에 안으로는 임진왜란에 파괴된 城池(성지)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국방경비를 튼튼히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흥국 후금을 깔보고 문화가 발달된 명나라를 계속 대국으로 섬겨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어서 광해군의 양단정책은 반대에 부딪쳤다. 원병을 거부하던 광해군은 드디어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의리때문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도원수에 姜弘立(강홍립). 부원수에 金景瑞(김경서)를 임명하고 1만 3천의 평안도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 선천군수 김응하는 병력 3천을 맡은 좌영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中軍(중군)에 車載重(차재중), 千摠(천총)에 申忠業(신충업). 金堯卿(김요경). 桂如杠(계여강)을 임명하였는데 평소에 모두 김응하를 흠모하던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때는 2월 중순이라 1만 3천의 대군이 압록강 얼음위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응하는 주민들에게 싸리바지를 엮게 해 이를 밟고 지나가게 하니 압록강 이편에서 저편까지 바자를 밟고가는 군사들로 장사진을 이루게 되었다.

 

5. 조선 원군의 항전.

-- 좌. 우. 중. 남 네길로 나누어 진군했던 명나라의 십만 대군이 모두 패망하는 안타까운 전황과, 명. 청 두 큰 세력의 운명을 결정한 싸루후산 전투에서 후금의 막강한 세력 앞에 참패해 버린 상황은 접어 두더라도 기울어 가는 명의 국운과, 이 국면에 처한 조선 원병의 설 자리를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 조선 원군의 선발대는 1618년 2월25일 일찌감치 명나라 전략기지인 경마전에 도착하였으며 김응하 장군은 먼저와 있던 남로군의 유정 도독과 만났다. 유정 도독은 조선군 총사령관인 강홍립 장군의 진군이 더딘 것에 불평을 하였으나, 김장군은 보병이 먼길을 빨리 걸을 수 없었으므로 다소 늦을 것이 예상되지만 강 도원수는 중영군과 함께 곧 당도할 것이라고 두둔하였다.

-- 이 날 늦게 조선 원군이 모두 기지에 도착하였으므로 밤에 작전회의를 열어, 남로군이 일선에 나가고 구원부대가 이선에 가다가 적의 대부대를 만나면 앞뒤에서 서로 응하여 나아가 공격하는 椅角進功(의각진공)의 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 경마전을 떠난 구원부대는 식량보급이 않되는 와중에도 험로를 무릅쓰고 말의 배에 차는 鴨兒河(압아하)의 깊은 강물을 건너기도 하는 등 많은 고생을 하면서 3월 1일 馬家寨(마가채)에 도착하였다.

-- 김응하 장군은 예하 부대원들에게 “전시의 식량과 병기는 적을 쳐서 빼앗아 얻는 법인데, 지금 되놈의 군사가 많아 보이니 용기를 내라.”하고 사기를 북 돋우니 부대원들은 모두 기운을 내는 것이었다. 선봉에 선 좌영군은 마가채에서 진군하니 20㎞, 그 사이에 후금의 군대가 수백명 혹은 천여기가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좌영군은 10여개의 堡(보)를 격파하고 많은 적을 베어버리는 등, 큰 전과를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땅속에 숨겨 놓았던 적의 곡식을 찾아내어 돌절구에 찧어 죽을 쑤어 먹기도 하면서 고생스럽게 진군하였던 것이다. 한편, 뒤에 떨어져 따라오던 중영군과 우영군은 도원수 강홍립의 통제를 받아 적과의 접전을 피하고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 광해군은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는 밀지를 도원수 강홍립에게 주었다고 한다.

 

6. 深河(심하)에서의 혈전.

-- 김응하 장군은 자기가 생명을 걸고 부대의 전투능력을 최고로 발휘하여 조선 원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후금으로 하여금 조선 원군을 얕보지 않도록 과시해야 하는 막다른 처지에 있음을 인식하였다.

-- 3월 3일 부차령을 넘은 좌영군은 다음날 심하마을이 앞에 보이는 언덕에 진을 쳤다. 한편, 중영군과 우영군은 고개 위에 머물러 있었다. 김응하 장군은 진격하지 않고 적을 유인하여 치는 방어전략을 폈다. 앞 줄에는 포병을, 뒷줄에는 궁노수를 배치하고 진 앞에는 나무를 얽어 가로질러서 적군이 말을 달려 좌영군의 진에 덤비지 못하도록 장애물(拒馬木;거마목)을 쳐 놓았다. 장군기를 휘날리며 선두에서지휘하던 김장군은 위엄있게 전군에 호령하였다. “듣거라. 총을 든 군사는 화약을 재고, 활을 든 군사는 살을 메우고 있다가 나의 북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끝까지 힘껏 싸워라. 군졸 한 명이 길목을 굳게 지키면 천명의 적군도 두렵지 않다는 병법의 말은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必生則死(필생즉사)’요 ‘必死則生(필사즉생)’이니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라. 명령을 어기는 자는 엄한 군법에 처하겠다.” 잠시 뒤 철갑을 두른 적의 기마병들이 돌격하여 왔다. 백여미터 안에 다가오자 김장군은 ‘사격개시’의 북을 울렸다. 많은 적들이 가로막이에 걸려 넘어지고, 총에 맞아 죽고, ‘푸르륵 푸르륵’ 화살소리가 나는대로 적군들이 말에서 두 팔을 벌리며 땅에 떨어지니, 빈 안장을 업은 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였다.  

누루하치의 둘째 아들이 앞장서서 큰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여 오다가 김장군의 화살에 맞아 땅에 떨어졌다. 장수를 잃은 적군이 사기를 잃고 퇴각하자 좌영군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첫 접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잠시 후 병력을 보충한 적군은 누루하치의 장남 貴盈哥(귀영가)의 결사대 백여기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하여 왔다. 파상공격이다. 김장군은 계속 북을 울리며 독전한다. 사기가 충천한좌영군은 결사적으로 총탄과 화살을 퍼부어 또 적을 격퇴시켰다. 이러한 접전이 세차례, 번번이 아군이 승리하였고, 적군은 베어 넘기는 삼대처럼 쓰러졌으며 살아남은 이는 도망쳐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맹렬한 회오리 바람이 일더니 황사강풍을 몰아와 티끌이 사방으로 날리어서 좌영군을 에워싸며 얼글을 때리고 햇빛을 가리어 총과 활을 쏠 수 없게 되었다.

-- 후금은 “이 때다.“하고 힘을 모아 공격하여 좌영군의 측면으로 총과 화살을 비오듯 퍼부어 댔다. 그러나 김응하 장군은 최후까지 싸워 옥쇄하겠다는 각오로 말에서 내려 큰 버드나무를 의지하며 활을 당겼다. 김장군은 필사의 결의를 보이므로 군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도록 김장군을 따라 싸우며 항복치 아니하였다. 김장군은 활을 쏘는데 유명한 그의 활솜씨는 다른 장군들의 화살보다 갑절이나멀리 나가고, 빠르며, 한 대도 빗맞힘이 없어 한 화살에 적병을 셋(一矢三殺;일시삼살)이나 꿰 뚫었다. 한 낮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김장군은 계속하여 활을 쏘아 삼백여개의 화살이 다 떨어져 버렸다. 김장군은 허리에 찼던 장검을 빼어 적을 쳤다. 목이 잘려 구르는 소리가 ‘뜨르르 뜨르르’ 산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김장군은 운이 다하였는지 장검이 부러졌으나 젊은 시절에 호랑이를 때려잡던 굳센 맨주먹을 불끈 쥐고 더욱 분발하였다. 이 때 창을 든 적병이 버드나무 뒤에 숨어서 김장군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김장군은 적병의 창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 용맹스럽게 항전하던 김장군을 잃자 조선 원군의 사기는 떨어져 버리고 사상자 수는 늘어만 갔다. 이에 도원수 강홍립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무방을 풀어 적장에 항복하였다.

 

7. 최고의 영예.

-- 조정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김장군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그가 전사한 다음달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5월에는 旌忠祠(정충사)를 용만강가에 짓고 충혼비를 세워 충의의 혼을 위로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忠武公 (충무공)의 시호를 내렸고 명나라의 신종황제는 요동백(遼東伯)을 追封(추봉)하였다.

-- 1620년 조정에서는 김장군에게 다시 영의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처럼 빠른 기간에 전직 군수에게 영의정을 추증함은 파격적인 대우요, 최고의 영예였다.

-- 1621년 9월에 訓練都監(훈련도감)을 시켜 김장군의 사적을 적은 忠烈錄(충렬록)을 출판 간행하였다. 전에는 김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이 네 군데나 있었는데 고향인 철원에 있는 포충사(褒忠祠)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2월 8월의 中丁日(중정일)에 철원향교 주관으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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