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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주요행사 및 기타사항
(1) 창립기념행사 (2010. 6. 15. 글, 사진 항용(양) 제공) (2)도정사 고유제 봉행 (2010. 7. 2. 항용(제) 제공)
1. 일시 : 2010. 6. 26(일), 08시-19시 2. 장소 :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도정사 및 병천 일대 3. 참가자(22명) 가. 수도권종회 임원(8명) : 태욱회장, 운식상임부회장, 상근상임부회장, 태선상임부회장, 항용사무국장, 운철총무부장, 태준재무부장, 성회(안) 전대종회부회장. 나. 현지 종친(12명) : 남응대종회장, 상천제학공파종회장, 상옥병천종약소장, 천응제학공파부회장, 득응충남도의회의원, 상순, 명회, 태시, 상원 기타 3인 다. 개별 참석자(2) : 범식(생원공파, 용인 거주)과 子 4. 내용 : 1)수도권 종회 창립 고유제, 2)병천 일대 주요 선조님 묘소 성묘 및 역사 유적지 답사
아침 새벽, 하늘이 흐리다. 비가 온다니 걱정이다. 8시 10분 전, 만남 장소인 사당동역 1번 출구 앞 공영 주차장 앞은 버스를 타려는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태욱회장님, 상근부회장님, 운철총무부장님, 태준재무부장님은 벌써 오셔서 반갑게 필자를 맞아주셨다. 이어 운식부회장님, 태선부회장님, 성회 전대종회 부회장님(안)이 오셨다. 정시 출발이다. 이날 태준재무부장님은 자신의 봉고버스를 직접 운전하며 봉사하기로 했다. 감사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아직 한산했다. 가끔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미웠다. 진행 상황을 묻는 남응대종회장님과 상천제학공파회장님의 전화가 왔다. 감사했다. 쉼 없이 버스 전용차로를 달리니 1시간 30분만인 9시 30분, 병천 기술대학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제천에서 버스로 오시는 상천제학공파회장님을 만나 도정사로 향했다.
10시, 도정사에 도착하자 남응대종회장님, 상옥 병천종약소장님, 천응제학공파부회장님, 득응충남도의회의원, 상순님, 명회님, 태시님, 그 외 2분의 종친들이 와 계셨고, 전날 안동김씨 홈페이지와 우리 수도권종회카페에 들어오셨던 범식님(생원공파, 용인 거주)께서 아드님과 함께 개인 승용차편으로 참가하셨다. 놀랍고 감사했다. 한참 진행중인 도정사 재실 건축을 둘러 보았다.
가랑비가 간간히 오기에 도정강사 안에서 고유제를 봉행하기로 했다. 11시 30분부터 약 30분간 고유제를 올렸다. 제수는 주과포만 간단히 준비했다. 분정은 다음과 같았다.
초헌관 : 태욱회장, 아헌관: 운식부회장, 종헌관 : 성회 안렴사공파(전대종회 부회장), 첨작 : 태선부회장, 축관 : 상근부회장, 집사 : 좌-운철, 우-태준, 사준-범식, 집례 : 항용, 직일 : 상옥 병천종약소장
전 종친은 제복을 입고 국한문 혼용식의 홀기를 읽는 집례(항용)의 약식 창홀에 따라 엄숙하게 제례를 봉행하였다. 지위는 문숙공(휘 永暾), 상락백공(휘 縝), 제학공(휘 益達) 3분을 모셨다. 축문은 한글식으로 준비했다. 축문은 다음과 같았다.
提學公派 首都圈 宗會 創立 告由 祝文
단군기원 4343년(서기 2010년) 6월 26일(음.5. 15)에 23대손 안동김씨 제학공파 수도권종회장 태욱은 삼가 고하옵니다.
23대조이신 고려국 추충병의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 시 문숙공 할아버님과 냉평국 대부인 이천신씨할머님,
(高麗國 推忠秉義翊贊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上洛府院君 諡 文肅公府君)冷平國大夫人 利川申氏)
22대조이신 단성여절보조공신 중대광 판자혜원사 상락백공 할아버님과 의혜택주 문화유씨할머님,
(端誠勵節補祚功臣 重大匡 判慈惠院事 上洛伯府君, 義惠宅主 文化柳氏)
21대조이신 정순대부 밀직사 좌부대언 보문각 직제학공 할아버님과 안동부주 영해박씨할머님이시여!
(正順大夫 密直司左副代言 寶文閣直提學 府君, 安東府主 寧海朴氏)
선조님들께서는 일찍이 삼한갑족이요 명문거족인 안동김문의 충렬공 후손으로서 문벌귀족의 자랑스러운 생명과 성씨를 우리들에게 계승시켜주셨으며, 아름다운 이 나라의 영토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굳건하게 지켜주셨고, 오늘날에 이르러 우리나라가 더욱 부강하며 찬란한 문화와 문명, 격 높은 학문과 예술을 지닌 세계적인 국가로 우뚝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기본 터전을 만드는데 선도적 역할을 해 오셨습니다. 이에 우리 후손들은 이를 항상 잊지 않고 있으며, 또한 이에 깊이깊이 감사하고 있사옵니다.
오늘 아뢰올 말씀은 본 제학공파의 지역 종회인 수도권종회가 지난 6월 13일 서울에서 창립되었기에 이를 고하고자 본 종회 회장인 저와 임원 여러분 및 인근의 종친 여러분들이 함께 모여 고유제를 봉행하고 있사옵니다.
본 종회는 전 제학공파 후손 가운데 2/3에 해당하는 종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지역의 종회로서 앞으로 제학공파종회는 물론이고 대종회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있는 종회입니다.
이에 간절히 바라오니, 본 종회가 모든 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조직체로 크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늘 보살펴 주시옵고, 아울러 초대회장직을 맡아 중임을 수행하려는 저와 모든 임원 여러분들에게 본 종회의 업무를 적극적이고 신명나며,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큰 힘과 지혜를 내려 주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이에 삼가 맑은 술과 간소한 제수를 올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옵소서.
(24대손 恒鏞 謹撰, 21대손 相根 奉讀)
이어 직일을 맡으신 상옥님은 ‘오늘 이 고유제에는 수도권 종회의 깊은 효심(孝心)과 새 조직체의 단결과 분발을 바라는 깊은 정성이 담겨 있었다’면서 매우 큰 찬사 평을 하셨다.
그리고 전 일행은 음복을 하며 태욱회장님, 남응대종회장님, 상천 제학공파회장님의 인사가 있었고, 이날 처음 만나는 종친들의 소개가 있었으며 이번에 충남 도의회의원으로 당선된 득응님의 인사가 있었다. 이때 천응 제학공파부회장님은 현재 짓고 있는 재실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순수 전통 한옥식으로 짓고 있으며 금년 시제 전까지는 완성할 계획이라 한다.
고유제를 봉행한 도정강사는 일찍이 1594년 창평이씨께서 별세하신 후 아드님인 교관공(휘 時進)께서 건축을 하고 글을 읽던 곳이라 한다. 우리 전통식이 아닌 중국식 모습이 이채롭다. 중국 명나라 대풍수로 임란 때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이 창평이씨할머니 묘소 명당터를 잡아 준 뒤 은 서말을 받고 도정강사터와 건물 설계까지 알려준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1946년에 중건되었으며 서당, 회의소, 각종 문헌 발간소, 재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이어 일행은 뒷산으로 올라가 충무공 시민장군의 어머님이신 창평이씨할머니와 교관공(휘 時進)의 묘소를 참배하고 명당터라 불리는 풍수설을 해설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묘소의 머리 부분에는 석물을 쓰지 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석물이 하나도 없다.
도정사로 내려와 영단에 모셔져 있는 문숙공(휘 永暾), 상락백공(휘 縝), 제학공(휘 益達)의 3위 영단과 맨 우측에 제단으로 모셔져 있는 4위 선조님(사간공 휘 顧, 감찰공 휘 孟廉, 주부공 휘 哲鈞, 승지공 휘 壽亨)의 영단과 제단 글씨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도정사. 좌로부터 문숙공(휘 永暾), 상락백공(휘 縝), 제학공(휘 益達), 4위 제단
이어 도정사 입구의 구암공(휘 忠甲) 사적비, 창평이씨 묘비, 교관공(휘 時進) 묘비 등을 살피고 차를 타고 가전리 입구의 음식점 <돌모루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교관공의 종손인 용남(容男)씨가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맛있는 오리탕과 닭도리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다음 일행 모두는 가전리 창규 원로종친님 댁으로 향했다. 댁 안으로 들어가니 내외분이 함께 계셨다. 창규님은 금년 95세이시다. 바깥출입을 못하고 계셨다. 평생을 종중사에 몸 바치신 분이다. 특히 문영공 종회를 구성하던 초기 단계에서부터 오늘날의 튼튼한 종회가 되도록 무던히 애를 쓰신 분이시다. 일행은 모두 절을 올렸다. 님께서는 우리에게 종사일에 정성을 다해 줄 것을 눈가를 붉히시며 당부하셨다. 그리고 우리 문중의 단일본으로 교관공 후손 여러분들의 시문집인 <백계세고>(栢溪世稿)를 빌려 주셨다. 귀한 것이었다. 앞으로 영인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창규아저씨 집 앞 464번지 일대에는 충렬사가 공터로 남아 있다. 이곳엔 4위 선조님(구암공 충갑, 충무공 시민, 죽계공 계종, 안풍군 득신)을 봉안하고 있었으나 고종때 강제 훼철되었다. 현재 병천종중에서 토지를 매입하고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복원해야 하리라.
이어 동네 뒤 학암묘원으로 갔다. 묘원 상단으로 올라가 주부공(휘 哲鈞) 묘소를 참배하고 구 묘비석의 휘 ‘鈞’자에 金변이 정(鉦)으로 지운 흔적을 확인했다. 선조의 이름이 鈞이라 피휘(避諱)하느라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주부공은 양녕대군의 셋째 사위이신데 최초에는 서울 상도동 양령대군 후손 집성촌에 모셔져 있었는데 1968년 상도동 개발로 인해 아드님 승지공과 함께 현지의 위토 800평을 팔아 이곳으로 이안했다가 몇 년 전, 이곳으로 다시 천봉하였다. 바로 옆의 승지공(휘 壽亨)께도 참배하고 아래에 있는 시정공(휘 絪) 묘소와 합동 묘원을 참배한 후 충무공 생가를 답사했다.
여기서 남응대종회장님의 해설 말씀이 이어졌다. 이 지역 460평을 몇 해 전에 천안시에 2억원에 팔았으며, 충무공 생가 복원 사업을 위해 공주 박물관에 개발계획을 의뢰하여 100억원의 설계 계획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의 몇 몇 집에서 수용을 거부하는 진정서를 천안시에 제출함으로써 현재 진행이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우선 수용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6억원의 천안시 예산으로 개발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어 사사처(射蛇處)로 갔다. 이때 충무공의 무용담인 구렁이를 화살로 쏜 전설의 연못이 현재의 구암 바위가 있는 곳이 아닌 길 건너 논자리라는 것과, 사사암도 논자리에서 현 위치로 옮겨 왔다는 새로운 사실을 남응회장님으로부터 들었다.
다음, 일행은 차를 타고 병천리를 지나 탑원리로 가서 감찰공(휘 孟廉) 묘소와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생원공(휘 壽眞)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이때 생원공 묘소 위의 노오란 원추리 꽃이 우리를 반겼다. 그런데 생원공 묘소 앞에 생원공 배위 묘소가 모셔져 있는 특이한 형태를 보았다. 비오듯 흐르는 땀을 씻으며 내려와 생원공의 재실도 답사했다. 그런데 마을 맨 뒤의 재실 바로 앞에 있는 집 거주자를 물으니 바로 생원공 종손집이라 한다. 가족들이 놀러 와서 맛있는 삼겹살 점심을 들고 있었다. 다정해 보였다.
다음은 죽계공 묘소로 향했다. 탑원리에서 병천리 방향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여 넓게 터진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는데 끝도 없이 길었다. 이곳이 광터골이라 한다. 우리 안동김씨 안렴사공파와 청주한씨 등의 집성촌이라 한다. 동승하신 성회님은 자신의 옛날 집 마을을 지나면서 자세한 설명을 하며 좋아 하신다. 약 15리를 들어가 맨 끝 마을에서 차를 내리니 마을 뒤로 재실 두 개가 나타났다.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여러 해 된 것 같았다. 처음 것은 극재공(휘 昈), 나중 것은 극재공(휘 繼宗) 재실이라 한다. 극재공의 재실은 재력이 있는 후손 한 분이 좋은 집의 재목을 이곳으로 옮겨와 지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고풍의 멋을 느낄 수 있었고, 죽계공 재실은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던 것 같았다.
재실 뒤로 돌아 산으로 올라가니 깜짝 놀랄 만한 큰 묘소 하나가 산처럼 나타났다. 죽계공 묘소다. 묘소 규모만큼 우리의 자긍심이 불쑥 솟아 나는 것 같았다. 풍수에 문외한들이 보아도 명당자리 같았다. 모두 크게 감탄했다. 묘소 뒤쪽엔 빠알간 나리꽃 한 송이가 우리를 반가이 맞았다. 그런데 묘비는 한 단 아래에 있는 것이 특이했다. 이어 우측 골짝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극재공 묘소가 나왔다. 잘 관리되고 있었다. 운철님은 극재공 종손이시란다. 이때 상원님(제학공파 이사. 생원공 후손)께서 소식을 듣고 청주에서 오셨다. 감사했다.
다시 죽계공 묘소가 있는 산줄기 맨 아래로 가니 잘 조성된 3기의 납골묘가 나타난다. 죽계공 큰 아드님인 봉사공(휘 曄) 이하 77위를 모신 곳이라 한다. 금년 3월부터 공사 중인데 봉사공(휘 曄)의 위토로 작업하고 있다는 상근부회장님의 설명이다.
일행은 다시 돌아 나오다가 노은정을 답사했다. 언제 보아도 멋있는 정자였다. 여기서 성회님의 열띤 해설이 있었다. 이 정자를 문화재로 지정 받기 위해 님께서는 지난 1997년 큰 노고를 하셨다. 정자엔 많은 소풍객들이 있었다. 보기 좋았다.
이어 일행은 바로 옆 마을로 들어갔다. 길 옆에는 전 태인대종회장님의 송덕비가 있어 이곳이 우리 안동김씨 안렴사공파의 집성촌임을 짐작케 했다. 곧 영식종손님의 종택을 방문했다. 고색창연한 고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집 뒤뜰에 있는 사당은 인상적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배례하고 위패 문을 여니 모두 4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작년에 돌아가신 영식님 내자분의 위패가 맨 오른쪽에 영정과 함께 모셔져 있었고, 좌측으로 한칸씩 부모님, 조부모님, 증조부모님 순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고조부모님은 그 위에 모셔져 있었다.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영식님이 뒤늦게 오시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한쪽엔 일산(日傘)도 보관되고 있었다. 사당 앞에는 딸기와 앵두가 잘 익어 있었는데 일행은 아이들처럼 신기한 듯 재미있게 열매를 따먹었다.
영식종손님은 '이 종택은 현재 자신까지 13대가 연속하여 거주해 왔으며 약 300여년이 넘는다'고 하며, '바깥채는 옛날 그대로이나 안채는 마적단들의 행패가 심하여 최근에 현재처럼 줄여서 중건했으며, 사당은 약 200년 전에 지은 것이다' 고 하신다.
이어 영식 종손님은 집 안으로 우리를 부르더니 귀한 보물들을 보여 주셨다. 노비 문서라며 호적단자 1매와 호패 2개를 보여 주셨으며, 왕실 제사일을 적은 제첩(祭牒)도 보여 주셨다. 벽에는 매형님이 써 주셨다는 족자가 걸려 있었는데 곧 영식님을 풍자한 상징시로 보였다. 시문은 이러했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 천년 묵은 오동나무는 늘 음악소리를 품고 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 추위에 피는 매화 한 가지는 향기를 잊지 않았도다. 얇은 한문 실력으로 해설해 드리며 '오동나무의 그윽한 음악소리와 매화의 고운 향기'가 곧 영식님을 비유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 드리자 님은 직접 담그신 매실주로 한역 값을 대신하려 하셨다. 집 바깥채는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매우 고풍스러웠고 집 앞 마당에는 ‘광기(廣基)’라는 지명이 새겨진 돌 한 개가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벌써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상천회장님을 천응 제학공파부회장님이 모시고 청주까지 모셔다 드린다며 떠나시고, 영식님은 매실주병을 들고 다니며 떠나려는 우리 옷깃을 한사코 붙잡으셨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나서 고독에 싸여 있는 안타까운 영식님의 손을 떨치고 할 수 없이 차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역시 엄청난 교통체증이었다. 우린 버스 전용차로를 ‘룰루랄라’를 외치며 씽씽 달려 서울 사당동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불과 2시간만이다. 태준재무부장의 지인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일행은 아르헨티나와 우리 대표팀의 남아프리카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총총히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무사히 다녀오도록 노고를 베풀어 주신 태준님께 모두 감사했다. 아! 오늘은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며 보람찬 날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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