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지 제출자료12---김구용과 여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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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9 19:00 조회1,663회 댓글1건본문
척약재 김구용은
38세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뒤에 모향 여흥(驪興)으로 옮겨 7년간 한거하면서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였다.
44세 1381년 다시 풀려나와-----
■ 동국여지승람 ▣ 제2권 p85-p88<여주목 고적(古蹟)>
--육우당(六友堂) : 천령현에 있다. 척약재(?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여강에 귀양와 당(堂)을 짓고 육우(六友)라 이름하였다.
○이색(李穡)의 기문에,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 ◀척약재 김구용의 字)가 그 당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대체로 강절선생(康節先生 ; 소옹<邵雍> 송대의 철학자)의 설월풍화(雪月風花)를 취한 것이다.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하기 청하나, 그것을 배우기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함이 오래되었다.
그가 여흥(驪興)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지금 우리 외가(◀민사평댁, ?천령현, 현재의 여주 금사면)에 있는데, ----- 경지는 어머니(◀민사평의 딸, 1379년 몰)를 모시는 여가에 강에 배타고 짚신신고 산에 올라 낙화(洛花)를 세고, 청풍에 서서 눈을 밟고 중은 찾고, 달을 대하여 손을 부르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극치를 다함이오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獨步)하는 분이다. ----- 이에 육우당기에 짓는다.” 하였다.
○정추(鄭樞)의 부에, “저 여강 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당(堂)이 있어 장려하구나. 아, 탁월한 높은 사람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손을 모았구나. 그 벗함은 오직 여섯인데 보통 사람이 친할 만한 것이 아니네. -----
금사면은 여주군의 서북쪽에(지금의 이포대교주변)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양평군 강상면, 광주군 실촌면에 접하고 있고 동남단은 흥천면 내사리, 문장리, 계신리와 이천시 신둔면, 백사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금사면은 남한강을 통한 수운이 편리하고 서울과 육상교통로 접근이 용이하여 조선시대 관료들의 피난지 및 낙향지역으로 이용되어 아직도 그 자취가 많이 남아있어
▣ 김영환 - 육우당은 척약재선조께서 여흥(지금의 여주)에 계실때 계신 당호입니다. 당시 천녕현(川寧縣)에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현재 금사면 금사리 이포대교 근처일 듯합니다. 현지에 답사도 하여보았지만 바위와 5-600년된 은행나무가 있는것도 확인하였습니다.
▣ 김윤식 - 죽산에서 발원한 물이 음죽을 거쳐 여주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까만 작은 점으로 표시된 '천녕(川寧)' 인근으로 추정됩니다. 합수 지점의 여주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윤만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여강에 귀양왔다."와 여주문화원 발행 금사면지 지명유래에 금사면은 "본래 천령현의 지역으로 예종 원년(1469)에 여주목에 편입되었다."로 보아 본 지도 천령을 지나 합수머리 지점인 금사면 이포리 여주강변 어느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제2권 p83-p85<여주목 고적(古蹟)>
--침류정(沈流亭) : 천령(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 (전략)-----
이색(李穡)의 기(記)에, "염동정(廉東亭 이름은 흥방(興邦), ?∼1388)이 귀양살이 할 때, 안으로 천녕현(川寧縣)에 옮기어 물에 걸쳐 정자를 짓고, 그 위에서 노닐며 쉬었다. - 중략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이암(伊庵)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 위에서 책을 베고 조노라.“ 하였다.
○또, ”못을 파고 버들을 심고 초가 정자를 지었으니, 푸르름이 축축하여 개이려 하지 않네. 문득 은대(銀臺)에 놀던 화월(花月)의 꿈을 깨치니 녹음에서 가끔가다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 하였다.
○또, ”꿈은 아직도 봉황지(鳳凰池)를 싸고 도는데, 집을 구하고 밭을 구하여 푸른 물가를 찾았네. 구구히 성자(姓字) 감출 것 없다. 금어초목(金魚草木)이 이미 알고 있네. 하였다.
○또, “조각배 짧은 노로 가시사립 두들기니, 비오는 밤에 도리어 물 위 마을이 아득하구나. 묻노니 금사가 어느 곳이뇨. 등불이 숲을 격한 언덕에 깜박거리네.” 하였다.
■ 상주지(상주시.군문화공보실, 1989)
○ 金九容(김구용) 初名(초명)은 齊閔(제민), 方慶(방경)의 後孫(후손)이다. ----- 若齋(척약재)는 永嘉(영가)가 本貫(본관)인데 본 州(주)의 沙谷(사곡)과 佳里坊(가리방)에 그의 遺墟(유허) 가 있다고 傳(전)해 오니 永嘉(영가)에서 이곳으로 移居(이거)한 것인지 아니면 尙
州(상주)가 예전에 安東府(안동부)로 있을 때 永嘉(영가)가 邑號(읍호)였는지 또는 그가 安東(안동)에서 係出(계출)하였으므로 本貫(본관)으로 따라 부른 것인지 未詳(미상)하다.
■ 상주지명총람 (2004, 조희열 편, 문창사)
척약재 김구용(1338-1384)이 상주의 佳里坊(가리방)에 은거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 1375년 권신들과 마찰로 죽주로 귀양 가서 방면되던 해인 1381년 사이에 상주에 우거한 것은 아닌가 싶다. 佳里坊은 당시 靑里縣에 속한 西北 북록 일대로 현재는 佳庄里(가장리) 일대라 짐작된다. <奇呈太子山日寧>, <贈李敏道> 시에서도 역시 商山에 우거했음을 알 수 있다. <상주 한문학, 2002, 권태을, 문창사>
▣ 제2권 p49<여주목 산천(山川)>
--승산(勝山) : 주 남쪽 5리에 있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청산에 들불이 침노하니, 소나무와 삼(杉)나무가 다 타버리고 다시 마음이 상하누나. 지난해 철쭉꽃이 피던 곳, 울창하게 도리어 잡목 숲을 이뤘네.” 하였다.
▣ 제2권 p63<여주목 불우(佛宇)>
--보은사(報恩寺) : 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다. 옛 신륵사인데, 벽돌 탑이 있으므로 속칭 벽절이라 한다. (중략)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나무 돛대는 갈대 여울을 돌고, 소나무 배를 돌다리에 매었구나. 맑은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밝은 달은 긴 강에 찼네. 설법하니 용도 응당 들을 것이요, 참선하니 호랑이도 스스로 엎드리네. 오가며 그윽한 흥이 있으니, 이끼 길이 배창에 접했네.“ 하였다.
▣ 제2권 p81-p83<여주목 고적(古蹟)>
--사우당(四友堂) : 마암(馬巖)에 있다. 임원준(?∼1147)이 당(堂)을 짓고, 이름을 사우(四友)라 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전략)-----근자에 김선생 경지(敬之)가 여강(驪江)에 계셔 그 당(堂)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설(雪)·월(月)·풍(風)·화(花)를 위한 것이었는데, 뒤에 강(江)·산(山)을 다하여 육우(六友)라 하였다. 그 벗함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숭상하는 것이 다 선생이 벗한 바가 인륜 일용(人倫 日用)의 떳떳한 데 있고, 형색(形色)이 완호(玩好)한 데 있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니, 벗을 취하는 도리가 이에 극진 하였다.(하략)-----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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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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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엄청난 자료들이 종합 정리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