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수(金 )1547(명종2)∼1615(광해군7)--(서)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몽촌공 소개

2. 묘소 소개

3. 친필 서찰

4. 시문 소개

5. 시장 소개

6. 신도비문

7.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본문

p11.png 6. <몽촌공 신도비문> (2005. 6. 11. 태서(익) 제공)

출전 : 樂全堂稿卷之十二碑銘

輔國崇禄大夫判中樞府事金公神道碑銘幷序

恭惟我 聖上撥亂反正靈承丕啚克奠神天於是吊死問生昭幽直枉與寓內更始 教吏曹復故臣金睟官輔國崇禄大夫判中樞府事其孤信立氏持家狀泣而請曰先君子之廢削以殁迨十年所而墓地荒矣不肖孤幸無斃於覆盆之下得覩恩施泉壤位秩如故猶懼夫先君子之懿乆而益墜無以藉手見先君子於地下旣具麗牲之石敢徼子文之而禍菑流離譜牒漏失不能舉其槩則亦惟子述生平識知而最之欽嘗從里閈獲知於公雅矣其惡敢辭無何信立氏逝而信立氏之子祴扶襄申請欽迺慨然於代序遂据其狀序之曰安東之金逖疏源派爲我東阀閲叙公所烝嘗者髙祖淑演掌樂院正 贈吏曹叅判曾祖希壽司憲府大司憲祖鲁僉知中樞府事 贈吏曹判書大憲僉樞俱以文行顯筆法嗣媺世稱羲獻考諱弘度司宰監正  贈領議政用公貴也議政公以名髙忤權貴卒于北纍人惜其短而卜其後公果以萬暦癸酉中謁 聖文科第三名未隷館選而薦授藝文館檢閲其明年授弘文館正字著作還翰院爲奉教陞司憲府監察調戶曹兵曹俱佐郎拜正言逓爲騎省弘文館修撰己卯秋以書狀官賀至叙承文院校檢庚辰春還朝晉司憲府持平成均館直講夏拜修撰校理 宣廟命公改修十九史畧添入注断其跋文行于世壬午由獻納入銓曹爲佐郎癸未正郎以繡衣撫關西甲申公在邊陣病谻 宣廟下教曰金某可惜之人 特送醫藥救療盖異數也秋移議政府檢詳舎人應教典翰奉 命撫西路路拜直提學丙戌陟承旨序陞至右丁亥秋 特加嘉善階平安道觀察使以事免未幾 特叙爲慶尙道觀察使考滿命仍任庚寅手批拜公弘文館副提學徵還俄遷大司憲兵曹叅判秋超授本曹判書公乞解移刑曹 特授副提學辛卯夏出爲慶尙道觀察使見擠於時議也公甫涖累而倭大入難生所忽師徒屢潰公亦左次裭歸判漢城知中樞癸巳用勞階正憲大夫議政府右叅賛戶曹判書兼 世子右賓客知 経筵事乙未辭知中樞丙申復拜戶曹兼帶猶前加知春秋館事戊戌病就樞府庚子戶曹判書壬寅以樞府帶都揔管尋改刑曹判書冬授右叅贊癸卯春陞崇政大夫判中樞兼京畿觀察使甲辰瓜逓爲樞府移判敦寧府丁未戶曹判書戊申加階崇禄大夫己酉充 詔使館伴庚戌判義禁府事辛亥加階輔國崇禄大夫判中樞府事壬子晉領中樞未拜有故相就西樞者領之公仍判府癸丑公之孫袐爲賊所誣引死於獄臺諫論削公職時公己病健忘廢處數年遂卒乙卯八月十七日也是年十月某甲葬于衿川樊堂里艮坐之原從先兆也公字子昂號夢村生於丁未六月二十五日得年六十九歲夫人成氏廣興守好問之女有巽德克內相先公幾年殁葬同公室年幾歲生四男二女側室男一人男長敬立戶曹佐郎義立學生信立司憲府監察 贈承旨其次殤泰山側出也女長適校理朴萀其次夭敬立娶主簿姜允緖女生一男一女男曰礽女適都事尹璷義立娶縣令沈友成女生一男一女男夭女適縣監柳汝惺信立娶判官李頲女生二男一女男長袐無後次祴娶 贈直提學趙守寅女朴萀生二男一女男俱夭女適同知李灦尹璷生三男二女男昌安餘幼柳汝惺生四男二女男珎璘餘幼祴生二男一女皆幼李灦生四男二女男聖敏餘幼公早喪怙恃鞠于外家纔齔自知讀書十三從師友遊頴悟絶倫能綴文賦稍壯志學不倦弱冠上庠處醜以正士咸敬服釋褐登朝蔚有聲望乆侍經幄奏對精確動止有常獻替弘多不妄言詭隨以繩墨自律秉心忠亮濟以清儉能結主知致位上卿而門無私謁庫無遺儲雄勤於職事早徃晏罷不避風雨公退却掃一室泊如也公之判度支也當壬辰大亂之後八路丘墟人相殺食 天朝文武將吏擁十萬衆來住境上與賊對壘皆以軍興法督餉公日夜在公握美調度拮据萬方軍前之需得無少缺數十年來數掌計者推公爲第一云辛卯洪汝諄設苦穽將驅士流而辟焉欲引公爲重 公門者數而公竟不應由是公亦不得安於朝焉君子多之白沙李公恒福去相在田間聞公卒嘆曰國之藎臣亡矣噫欽能列公履行而不敢以毫髮容餙以諛墓中所以知公也夫銘曰

藹乎名德昭而不章穮蓘而栗公迓其昌質儒服勤益普厥施出以爲用入以爲儀晚際于屯公焉不省歸之以全已動而靜或削或復于公損益吉凶相禪攷世之德銘旃無怍其辭也直  

 

찬자 낙전당  신익성 [申翊聖, 1588~1644] 소개  

(2009. 9. 11. 항용(제) 제공)

본관 평산(平山). 자 군석(君奭). 호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 시호 문충(文忠). 선조의 사위, 척화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12세에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광해군 때는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벼슬이 박탈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고, 이괄(李适)의 난 때는 3궁(宮)을 호위했고, 1627년 정묘호란에는 세자를 호위, 전주로 피란,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여, 선양[瀋陽]으로 붙잡혀 갔다가 뒤에 풀려났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글씨로 <영창대군 비>·<율곡이이비> 및 저서에 《낙전당집(樂全堂集)》 《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 등이 있다

 

 

 

 

b00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