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2007. 1. 8. 윤식(문) 제공) ◆ 일시 : 2007년 1월 4일(목) ◆ 장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95번지 경기도박물관 ◆ 참석 : 영환, 영윤, 윤만, 발용, 윤식(무순, 경칭 생략)
평일 낮시간, 모처럼 여유로움을 만끽한 날이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 서울시 모처에 모셔 둔 부사공(휘 명리) 할아버지 묘지호와 관련해 영환 종친과 함께 경기도박물관 장덕호 부장(유물관리팀장)과 송미경 박사(보존과학실 복식담당)를 만났습니다.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철원부사공(휘 확) 할아버지 묘소 출토 의복에 대한 보존처리를 완료하고 도록 발간을 앞둔 상태에서 이와 관련해 협조 요청을 해 왔습니다.
출토 의복은 2001년 4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의 철원부사공과 배위 동래정씨 할머니 묘소를 가양리 선영으로 천봉하는 과정에서 총 102점(의복 99점, 신발 2점, 이불 1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때 철원부사공 묘소에서 총 10매의 묘지석이 수습되었습니다.(이 가운데 2점은 내용이 같은 것으로 묘지석은 9매가 한 쌍입니다.) 이 출토 의복은 수습 당시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등 내로라 하는 박물관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철원부사공께서 상의원 정을 지내셨기에 더욱 큰 관심을 끌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포천시 관계 당국의 간곡한 요청 등으로 인해 수습 의복 전체를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 천봉한 철원부사공(휘 확) 묘소. 포천 가양리
그 동안 발견된 출토 의복은 20~30점이 출토된 경우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부부 묘에서 각각 50여 점씩 100여 점이 동시에 대량으로 출토된 사례는 없다고 합니다. 출토 의복의 수가 워낙 많아 경기도박물관에서는 근 6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훈증처리 등 보존처리를 실시한 다음 최근에야 작업을 마치고, 도록(圖錄)을 발간하기 위해 사진촬영에 착수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아울러 도록에 수록하기 위해 부사공 할아버지의 묘지호에 대한 촬영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이에 따라 문온공파종회에서는 서울시 모처에 특별 보관 중인 묘지호를 경기도박물관으로 임시로 옮기게 되었고, 박물관 담당자들의 안내를 받아 사진촬영 작업 중인 출토 의복 일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 경기도박물관 가는 길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신갈인터체인지 → 예전 출구 못미처 새로 생긴 용인向 출구로 우회전 → (100여 미터) 우회전 → 3~5분 직진, 고가도로에서 좌회전(한솔학원 앞) → (50여 미터) 좌회전 → 좌회전 하자마자 바로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박물관 측에서는 부사공 묘지호의 중요성을 감안해 무진동 차량까지 동원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진동 차량은 5톤 차량으로서 용차 비용이 막대한 것을 감안해 문온공파종회에서는 박물관 측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서 박물관 측의 차량으로 옮기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충격을 받지 않도록 겹겹이 둘러싸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지만, 장덕호 부장의 차량에 동승해 박물관으로 가는 동안 내내 신경이 쓰이고 조바심이 났습니다. 오후 3시 정각,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도 용인의 박물관까지 대략 1시간 남짓인데 무척 길게 느껴졌습니다. 장덕호 부장도 운전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도 여러 차례 비상등을 켜면서 조심스레 박물관으로 모셔왔습니다. 박물관으로 오는 도중 영윤, 윤만, 발용 종친께서 박물관 정문에 이미 도착하셨다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문중 귀중품이라 기다리시는 동안 마찬가지로 애가 타셨을 것 같습니다.
오후 4시 박물관에 도착, 기다리시던 종친들과 합류해 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가서 묘지호 인계인수 서류를 작성하고 간단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묘지호를 살펴보는 박물관 직원들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긴장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박물관 수장고는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지역으로 입구에서 신원확인을 한 다음 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수장고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거대한 철문만 보였습니다.
부사공 묘지호는 곡식을 되는 말[斗]을 뒤집어놓은 형태와 유사한데, 크기는 그보다 약간 작습니다. 윗부분은 원추형 투각인데, 이 부분을 살펴본 박물관 직원들은 “청자”라고 입을 모읍니다. 아랫부분은 새우젓 옹기처럼 두툼하며, 속은 비어 있습니다. 몸체는 분청이며, 부사공 묘지문이 상감(象嵌)으로 기록돼 있습니다.(부사공 묘지문 내용은 우리 홈을 참조하시기 바라며 생략합니다.) 박물관 직원들은 몸체 부분을 가리키며 조선 청화백자 양식이라고 표현합니다.
박물관 직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백자의 양식이 모두 나타난 특이한 형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려 청자의 전통과 조선조의 새로운 청화백자 양식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만큼 부사공 묘지호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식인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묘지문 내용이 더 소중했지만, 박물관 직원들은 “그릇 자체로도 보물급 이상의 가치가 있다.”며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우리 문중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이상인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 도자기를 전공한 담당자가 휴가 중이라 더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한 것이 조금 섭섭했습니다.
묘지호 촬영을 위해 인계인수서를 작성한 다음, 보존처리실로 자리를 옮겨 송미경 박사의 안내로 철원부사공 묘지석을 살펴봤습니다. 이 묘지석은 청화백자로서 수습 당시 두어 장이 깨졌는데, 완벽한 보존처리로 말끔히 수리가 돼 있었습니다. 다만, 수습 초기에 우리 문중에서 응급조치를 한 것이 미숙해 묘지석 한 장에서 약간 티가 났습니다.(묘지석 내용 역시 우리 홈을 참조하기 바라며 생략합니다.)
▲ 철원부사공 묘지석 첫째 장
▲ 철원부사공 묘지석 마지막 장
이어 유물관리팀 수장고 자리를 옮겨 보존처리가 끝난 철원부사공 할아버지 묘소 출토 의복들을 살펴봤습니다. 송미경 박사는 한지로 곱게 싼 의복들을 한 점 한 점 꺼내 우리 일행들에게 정성스레 펼쳐 보이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보존처리실에서 살펴본 의복은 원삼과 장옷, 할머니 치마(솜치마), 창의 등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원삼은 섬세한 꽃무늬가 직조돼 있어서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천은 비단입니다. 송미경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조에서는 별도의 수의 대신 평상복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날 살펴본 원삼도 수의로 사용된 것인데, 일제 강점기까지도 평상복을 수의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또한 장옷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누빈 누비옷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재봉틀에서 가장 촘촘한 것이 1단인데, 그것보다 더 촘촘하게 누볐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할머니 솜치마는 길이가 짧아서 조금 의아했습니다. 송미경 박사 설명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웃옷(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서 자연히 치마가 가슴이 아니라 허리에 걸치게 되므로 짧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의 개량한복 비슷한데, 입고 활동하기가 아주 편한 형태라고 합니다.
그렇게 의복들을 살펴보면서 한참 놀라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사진작업 중인 강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마침 할아버지와 할머니 옷을 사진으로 찍고 있었습니다. 그냥 앞면만 1장 찍는 줄 알았는데 앞면, 뒷면, 주요 부위 등 옷 한 점에 거의 10장 이상씩 찍는 것 같았습니다. 시대가 변해 디카로 촬영한 사진을 바로 노트북으로 옮겨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미진한 것은 다시 찍는 듯했습니다.
사진 작업 중인 할아버지 도포는 황갈색인데, 본래 색은 어떤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현대 기술로도 당시 염색기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도포를 보니 키가 무척 크셨던 것 같습니다. 묘소 천봉 당시 철원부사공 묘소는 한 길 가까울 정도로 두꺼운 회벽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영환 종친께서 갖고 오신 당시 사진을 보니 놀라울 정도입니다. 당시 회곽 안에서는 철원부사공을 모셨던 소나무 관과 각종 부장품 및 묘지석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경기도박물관으로 기증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려 의복 색깔이 조금 변색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도포 다음에는 철릭과 심의, 습신(신발)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철릭은 웃옷과 주름치마 형태의 아래옷이 하나로 이어진 원피스 형태의 옷입니다. 아랫부분은 주름치마처럼 주름이 잡히고, 옆이 트여 있는 옷인데 임란 이전에는 사대부(남자)의 평상복이었다고 합니다. 이 옷은 원나라에서 들어온 옷으로 옆이 트여서 말을 타는데 아주 편한 옷이라고 합니다.
▲ 철릭 - 심수륜묘 출토복식(경기도박물관. 2004)
철릭에는 자주고름이 달려 있었습니다. 자주고름은 여자들이 많이 하는 줄 알았는데, 그 당시에는 남자들도 은근히 화려한 장식을 했나 봅니다. 철릭은 임란 후에는 일상복에서 예복으로 변화했다고 합니다. 철원부사공 약간 후대 인물인 의원군 이혁 묘소에서 출토되기도 했는데, 이때에는 이미 예복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철원부사공 묘소에서는 철릭 8벌, 도포 5벌이 출토되었는데, 의원군 묘소에서는 철릭이 단 1벌만 나왔다고 합니다.
▲ 철릭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中
심의는 ‘유학자의 법복’으로서 맨 겉옷이라고 합니다. 유학자의 경우, 이 심의에 복건을 쓰는 것이 평상시 옷차림이라고 합니다. 1000원짜리 지폐를 보시면, 퇴계 선생의 초상이 그려져 있죠. 퇴계 선생의 옷차림이 바로 심의에 복건을 쓴 것이라 합니다. 1000원짜리 지폐 한번 살펴보시면 확실히 아실 겁니다.
습신(신발)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각각 1쌍씩 출토되었습니다. 재질은 비단인데, 바닥을 종이(한지)로 만들어 장례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버선의 일종이 있었는데, 장례용으로 만든 것이라 합니다. 이 버선에는 앞면에 도장 2개와 뒷면에 작은 도장 1개가 찍혀 있었습니다.
앞면 도장 2개는 ‘수성노인도’ 그림인데 목숨을 관장하는 신(神)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옆의 도장은 ‘한천제조’라고 적힌 듯한데, 이를테면 ‘made in 한천’인 셈이죠. ‘한천’은 중국의 지명으로 추정되므로 이 버선은 아마도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품 같습니다. 할아버지 신발은 단순하면서도 들여다볼수록 화려한 느낌을, 할머니 신발은 첫눈에도 화려한 느낌을 주는 명품이었습니다.
의복 처리작업은 실물을 그대로 실측해서 스케치한 그림에 치수까지 꼼꼼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스케치를 토대로 1/10로 정밀한 그림을 그린 다음 컴퓨터로 일러스트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림만 보고도 실물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 복식 실측도 - 심수륜묘 출토복식(경기도박물관. 2004)
또한 일러스트 작업을 한 뒤에 사진을 찍어서 실물 사진과 함께 도록에 수록한다고 합니다. 도록 발간을 앞두고 사진작업은 연일 야근을 하면서 강행군 중이라고 합니다. 특히 출토 과정에서 의복이 일부 훼손돼 손바느질로 일일이 꿰매고 있었습니다. 보수작업은 원형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대체로 실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훼손된 부분이 조금 커서 어쩔 수 없이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데, 기록을 철저히 남기고 후대 사람들이 보더라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약간 듬성듬성하고 색깔이 약간 다른 실로 처리하고 있답니다.
그런 작업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니 추후 유사 사례가 생길 경우에는 철저한 대비가 필요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해가 지고 오후 5:40분이 되었습니다. 장덕호 부장과 송미경 박사, 그리고 작업 중이신 박물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향합니다. 오늘은 눈도 마음도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 좌로부터 윤식. 송미경 박사. 윤만. 영환. 영윤. 장덕호 부장.
어려운 작업인데도 저녁 늦게까지 고생하시는 관계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울러 사진촬영을 해 주신 발용 종친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이상 경기도박물관 방문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발용 / 글 윤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