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휘(金 徽)1607(선조40)∼1677(숙종3)--(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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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휴제공 및 연보 소개

2. 묘소 사진

3. 친필 서찰 및 시문 소개

4. 문인화 소개

5. 낙관 소개

6. 졸재집의 사휴제공 관련 자료 소개

7. 묘비 건립기

8. 묘비문 소개

9. 각종 문헌 내의 기록 종합

 

 

 

본문

p11.png 8. 묘비문 소개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徽이시고 字는 敦美이시다. 安東金은 일찍이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이름 난 姓氏로 鼻祖는 新羅의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다. 中始祖는 高麗의 上洛郡開國公이신 諡號 忠烈公 諱 方慶이신데 高麗朝의 出將入相으로서 最高 官職인 僉議令에 오르셨고 二次에 걸친 日本遠征과 여러 功勳으로 致仕 후 安東을 食邑으로 받으셨으며 자손들은 이로 인하여 貫鄕을 삼게 되었는데 公은 忠烈公의 十三代孫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들어와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이어 司憲府 監察 諱 孟廉, 典農寺 主簿 諱 哲鈞, 贈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贈 吏曹參判 諱 彦默은 公의 高祖요, 成均進士로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은 公의 曾祖이시다.

 

領相公은 道學으로 士流에 이름 높았는데 己卯士禍 때 進士로서 成均館 儒生들과 함께 從兄 正言公 諱 釴과 더불어 靜菴 趙光祖를 力救하는 上疏에 참여하셨다가 禍를 피하여 槐山으로 은둔하시어 세칭 五甲의 名賢을 키우셨고 子 文肅公 諱 悌甲의 壬亂 殉國 推恩으로 領議政에 追贈되셨다. 祖이신 贈 左贊成 諱 仁甲은 司馬試에 入格한 後 長水察訪과 濟用監 直長을 거쳐 永山과 比安縣監을 지내셨으며 壬辰倭亂을 만나 白衣從軍하시다가 槐山 先塋에 돌아와 歿하셨는데 子 時讓의 貴로 左贊成에 追贈되셨다. 父는 文科及第 후 慶尙道 平安道 觀察使, 八道都元帥, 四道體察使, 兵曹 戶曹 判書를 거쳐 崇祿大夫 判中樞府事에 오르시고 淸白吏에 錄選되신 후 忠翼의 諡號를 받으신 諱 時讓이시며, 母는 貞敬夫人 慶州李氏로 益齋先生 齊賢의 後孫이요 贈 承旨로 郡守인 大遂의 따님이시다.  

 

公은 一六0七年(宣祖四十) 六月 十八日 忠翼公의 二子 중 次男으로 出生하셨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주위의 칭송이 높았는데 一六三三年(仁祖十一. 二十七歲)에 生員과 進士 兩試에 합격한 뒤 一六四二年(仁祖二十)에 文科에 及第하여 곧 禮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셨고, 一六四五年(仁祖二十三)에 正言이 되셨으며, 弘文館에 뽑혀 들어가 副修撰과 吏曹佐郞 등을 拜命받으셨다. 一六五二年(孝宗三)에는 오랜 가뭄으로 임금이 <喜雨>라는 제목으로 관원들에게 七言 律詩를 짓게 하였는데 公은 여기서 壯元하여 豹皮와 胡椒를 賞으로 받으셨다. 그 후 吏曹正郞을 거쳐 通政大夫에 올라 義州府尹, 承旨, 五曹의 參判을 거쳐 忠淸,咸鏡,慶尙,黃海의 觀察使를 역임하셨고, 江華와 開城의 留守, 大司憲, 大司諫 등을 제수 받았으며 右參贊, 吏曹와 禮曹의 判書를 역임한 뒤 耆老所에 들어가셨다. 이 때 號를 四休라 하셨는데 致仕한 후에는 또 號를 晩隱이라 하고 悠悠自適하시다가 一六七七年(肅宗三) 八月 九日에 七十八歲로 小安國洞에서 歿하셨다. 이 때 子 秋萬이 公의 형님인 陜川公 諱 곡에게 出系하였다가 先卒하게 되자 禮曹에서는 秋萬의 第二子인 麟至로 하여금 大功服으로 三年間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충북 괴산읍 능촌리에 安葬되셨다.  

 

그 후 또 麟至의 後嗣가 없자 禮曹判書인 閔鎭厚가 임금에게 건의하여 公의 第一孫인 鳳至의 第三子 德祚로 하여금 祭祀를 관장하게 하였다.  

 

配이신 貞夫人 陽川許氏는 一六一一年(光海三)에 出生하셨는데 父는 正言인 許實이며, 祖는 吏曹判書인 岳麓 許筬이고, 曾祖는 監司인 草堂 許曄이다. 夫人께서는 治家함에 있어 婦道를 갖추고 극진히 하셨는데 公 歿後 十년 뒤인 一六八七年(肅宗十三)에 돌아가시어 公과 合封되셨다.  

 

一男 一女를 두셨는데 子 秋萬은 長兄 곡에게 出系하여 司馬試에 오르신 후 通訓大夫 義禁府都事를 역임했으며 豊山人 南原府使  洪의 따님을 맞아 二男을 낳았고 女는 扶餘人 牧使 徐敬祖에게 갔으며 庶子로 肅萬, 畢萬, 載萬이 있다.   

 

아아! 四休第公께서 歿하신지 三百十九年이 지나도록 墓碑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였는데 一九九二年 比安公門中會가 구성된 이후 본격적인 爲先事業과 比安公先祖님의 墓碑建立이 계기가 되어 公을 追慕하는 後孫들의 精誠이 모여 이제야 墓碑를 세우게 되었도다. 이에 晩時之歎이나 感泣할 따름이며 벅찬 감격을 누르고 公의 行狀과 그동안의 顚末을 기록하여 公의 높은 精神과 功業이 길이길이 遺傳되며 본 墓域 또한 子子孫孫 永久 保存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九年(二00六). 四月 十六日. 四休第公 十三代傍孫 恒鏞 謹撰. 十一代孫 文應 碑前面 謹書

 

四休第公 十代孫  相天, 十一代孫 斗應 駿應 達應 順應 聖應, 十二代孫 泰燮 奎榮 益洙 奎東 奎成, 十三代孫 泰鎭 恒鏞 大鏞, 外 後孫 一同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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